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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그 여자의 연애 외전

<그 남자 그 여자의 첫 데이트>





살짝 열린 커튼으로 따뜻한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던 발가락을 얌전히 하고 정연은 몸을 바르게 폈다. 머리까지 푹 뒤집어쓴 이불을 내렸다. 팔로 눈을 가리며 어제의 회식을 곱씹어 봤다.

조용한 상념을 깨는 휴대 전화의 진동에 놀란 정연은 벌떡 일어나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오빠라고 뜨는 발신자 표시에 살짝 긴장했던 어깨가 내려앉았다.

“오빠!”

― 정연아, 잘 있었어? 오늘 출근 안 했지?

“응. 무슨 일이야?”

― 무슨 일이 있어야 전화해? 오늘 별일 없으면 밥이나 먹자고.

정연은 전화 너머 들려오는 조카의 떠드는 소리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째깍째깍 방 안의 시계가 혼자만 요란스럽다. 아직 이른 오전. 어제의 애매한 약속은 아무런 연락이 없다.

“……미안. 오늘 약속이 있을 거 같아.”

― 있으면 있는 거지 있을 거 같다는 뭐야?

“그러게.”

실없이 웃는 동생이 평소와 조금 다른 것을 알았는지 현수는 전화기 너머에서 웃었다. 더 재촉해서 묻는 질문에 단어가 이어지지 못하고 입 안에서 맴돌았다. 형식적인 안부와 인사가 몇 번 더 오가고 정연은 전화를 끊었다.

기지개를 쭉 펴고 머리끈을 찾아 머리를 묶었다. 휴대 전화를 들었다 놓았다 반복하다 정연은 방을 나섰다. 어제 늦게 회식을 마치고 와 샤워만 하고 잠들었다. 몇 주째 이어지던 야근은 술 한 잔에도 정신을 휘청거리게 했다. 얼떨결에 오늘 약속을 잡았지만 그게 사실인지 어떤지도 자고 일어나니 의심스럽다.

살짝 어질러진 거실을 정리하고 빨랫거리를 찾아 세탁기를 돌렸다. 11시가 넘어간다. 오전이 다 가는데 전화 한 통 없는 고요에 슬쩍 민망해졌다. 그래, 회식 자리에서의 장난이었지. 그걸 고민으로 갖고 있었던 제 자신이 우습다. 휙휙 돌아가는 세탁기에 감정이 같이 돌아갔다.

토스트기에 들어간 식빵이 톡 올라오면서 세탁기의 세탁 완료 신호음이 동시에 울렸다. 그리고 휴대 전화도 울렸다. 무엇부터 해야 하나 잠시 멍해져 있다 정연은 전화의 통화 버튼을 먼저 눌렀다. 모르는 번호다.

“……여보세요.”

조금은 망설이는 목소리가 나왔다.

― 김정연 씨, 박진우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저기 어제 저희 부장님 장난이 지나친 거 같아서 이제야 사과드립니다.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제가 먼저 연락드렸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앞에 그 사람이 마치 있는 듯 정연은 망설이며 전화를 받을 때와는 다르게 또박또박 이야기를 했다. 잠깐 건너편 남자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고 생각했다.

“지금 정연 씨 집 앞입니다. 삼십 분 기다리겠습니다.”

통화 종료라고 뜨는 휴대 전화를 들고 멍해졌다. 어쩌자는 건지? 다시 전화를 걸어 그럴 필요 없다고 해야 할까 하다 집 앞이란 말에 정신을 차렸다. 손이 바쁘게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냈다. 탁탁 수건을 털어 널면서 베란다 너머로 보이는 낯선 차가 그의 차인가 힐끔거렸다.

화장을 하고, 두어 번 옷을 갈아입으며 고민을 했다. 집을 한 번 쓱 둘러보고 나갔을 때는 그가 이야기한 시간보다 5분을 초과했다. 초조한 마음으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빌라 앞에서 박 팀장은 뚫어져라 입구를 쳐다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주차 사정이 좋지 못한 동네에서 차를 어떤 식으로 주차했는지도 신경이 쓰이고, 약속한 시간보다 늦어진 것도 마음이 쓰였다.

“일단 차나 탑시다. 여기 주차해 놓고 은근 눈총 많이 받았습니다.”

빌라 주차난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 낯선 차는 단번에 표시가 났다. 누군가 그의 차를 보고 한바탕 짜증을 냈으리라. 미안하다는 사과를 할 사이도 없이 진우의 차를 타고 그녀의 동네를 벗어났다. 어색한 침묵이 차 안을 맴돌았다.

“죄송합니다. 굳이 오실 필요는 없는데 근데 저희 집 주소는……?”

정연은 신호 대기 중에 망설이며 운전에 신경 쓰이지 않도록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우리가 오늘 만난 지 삼십 분도 되지 않았는데 죄송합니다가 두 번째입니다. 그리고 주소는 수진 씨가 보내 주더군요.”

“……네.”

야단맞는 아이 같은 심정이 되어 살짝 몸이 움츠러들었다. 협력 업체 사원인 정연의 입장에서는 혹시라도 그의 눈 밖에 나는 일이라도 생길까 마음이 편치 않다. 주말 복잡한 영화관 건물에 주차를 간신히 하고, 그것보다 더 복잡한 티켓 창구 앞에서 정연은 멍했다. 진우가 발권을 해 온다고 잠시 혼자 서 있었다.

고소한 냄새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다들 하나같이 커다란 팝콘 박스를 들고 삼삼오오 상영관 앞에 모여 있다. 그녀도 저들처럼 팝콘 통을 들고 화사하게 웃기라도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다 팝콘까지 나눠 먹을 사이는 전혀 아닌 걸 알기에 생수 두 병을 샀다. 계산을 하고 돌아서는데 진우가 바로 뒤에 서 있다 그녀와 부딪혔다.

“……아, 죄송…….”

입 안에서 자동 검색어처럼 죄송합니다가 나오다 바로 입을 다물었다. 차 안에서 그의 질책이 생각났다.

“뭐 다른 거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생수를 정중하게 내밀며 혹시나 그가 다른 거라도 찾을까 머리 위쪽에 있는 메뉴판을 쳐다보는데 생수를 받아 든 그는 별다른 말이 없다. 저만큼 상영관을 향해 먼저 발을 옮기는 그를 따라나섰다.

이미 상영관 입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 틈에 정연과 진우는 한구석에 바짝 붙어서 멀뚱히 상영관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연의 손안에 생수병이 살짝 우그러졌다 펴졌다 했다.

영화는 쓸데없이 진지하고 진했다. 다들 편하게 보는 영화관 안에서 정연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앉아 한 시간 반가량을 긴장한 채 보냈다. 엔딩 컷이 올라오자마자 그가 먼저 일어섰다. 그제야 긴장했던 숨이 한꺼번에 터졌다. 이제 집에 가도 되나 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어느 사이 극장을 빠져나온 그들은 요즘 핫 플레이스라는 식당 앞 대기 의자에 앉아 있게 되었다. 토요일 다들 다정한 연인들 사이에 쭉정이처럼 끼여 있는 그들은 어색했다.

“팀장님, 바쁘실 텐데 여기 말고 다른 곳 알아볼까요?”

“아닙니다. 여기가 맛있다고 수진 씨가 추천했습니다.”

“네.”

정연은 더 이상 대꾸도 못 하고 목을 쭉 뺀 채 그들의 차례는 언제인지 두리번거렸다. 가끔 어색한 눈짓을 서로 하기도 했다. 그가 휴대 전화로 업무 지시를 내리고 있을 때였다.

“김정연 님.”

“네!”

전화 통화 중이었던 진우가 벌떡 일어나 정연의 이름에 대답했다. 식당에 들어서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것은 그다. 그랬으니 당연히 그의 이름이 불릴 거라 생각했다. 박으로 시작하는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어깨를 작게 들썩이며 고갯짓을 했던 사람은 정연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자신의 이름이라니.

좀 의아해 그를 보는데 “갑시다.” 하며 살짝 팔을 잡는 그였다. 얼떨결에 테이블에 앉고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니 수제 버거 가게란다. 어지러운 메뉴판만큼 어지러운 마음으로 선명한 사진 속의 음식을 보며 망설였다. 그런 정연을 한 번 힐끔 보던 진우는 정연의 몫까지 시키고 다시 전화를 했다. 어색하게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데 진우의 전화 내용이 귀에 들어왔다.

“서랜드 부분은 제가 다시 한주에 확인해 보겠습니다.”

정연은 물을 한 잔 마시다 귀에 들어오는 회사 상호에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어제 퇴근하면서 이번 물량 비엘을 넘겼었다. 그렇지 않아도 서랜드 되지 않은 부분이 걸려서 미리 말해 뒀는데 아직 처리가 안 된 모양이다. 전화를 끊는 진우를 보며 정연은 가방에서 자신의 휴대 전화를 꺼냈다.

“정연 씨, 식사 자리입니다. 전화는 나중에 합시다.”

살짝 서늘한 목소리의 남자가 액정을 보는 정연을 멈칫하게 했다. 사적인 전화로 오해를 하는 거 같아 정연은 아니라는 손짓을 했다.

“중국에 제가 바로 전화 넣겠습니다. 어제 그렇지 않아도 빠른 처리 부탁드렸는데 아직인가 봅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니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여기 우리 일하러 온 거 아니지 않습니까?”

“팀장님 폰으로까지 전화 오는 거 보면 급하신 거 같아서요.”

“어차피 오늘 토요일이라 그쪽에서도 일 처리 늦어지는 게 분명할 텐데. 우리 이 일 하루 이틀 하는 거 아니잖아요. 지금 수선 떤다고 해도 월요일 오전에 처리될 게 분명합니다.”

정연의 알은척이 수선이라고 이야기하는 그를 보고 전화를 내려놓았다. 틀린 말도 아니다. 지금 전화해 둔다고 해도 당장 통관 업무를 진행할 것도 아니다. 장소만 바꿔 일하러 온 격이다.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산을 이룬 음식 앞에서 정연은 난감했다. 가끔 수진과 수제 버거집을 다니긴 했어도 그건 친한 사이에서나 맛있는 메뉴였다. 오늘처럼 거래처 상사를 앞에 두고 먹을 만한 음식은 아니다. 옆에 놓인 종이 봉지에 햄버거를 넣고 한번 꾹꾹 눌러 볼까 생각도 해 봤지만 그러나저러나 입을 크게 벌리고 먹기는 부담스러웠다. 할 수 없이 얌전 떠는 여자처럼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앞에 진우는 그런 정연이 신경 쓰일 것도 없는지 맛있게도 먹었다. 하긴 그의 입장에서는 뭐가 걸리겠는가? 정연은 입맛도 없어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는 꽤나 배가 고팠는지 사이드에 감자까지 싹싹 비웠다.

그에 비해 거의 비워지지 않는 정연의 접시를 보며 진우가 살짝 눈을 찌푸렸다. 편식하는 아이 같은 기분이 되어 정연은 쓱쓱 패티를 잘라 억지로 입에 밀어 넣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그가 굳은 눈썹을 풀었다.

그렇게 꾸역꾸역 식사를 배 속에 밀어 넣고 일어서자 정연은 속이 불편했다. 계산하는 그의 등 뒤에서 가슴을 살짝 두드렸다. 어서 집에 가서 소화제라도 먹어야겠다. 하지만 끝인 줄 알았던 불편한 자리는 다시 차를 끌고 어딘가 있는 커피숍을 찾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 부장님이 주신 모바일 커피 쿠폰을 써야 한다고 했다. 이쯤에서 정연은 정중하게 괜찮다며 거절했지만 그는 받은 성의를 무시할 수 없다 했다. 하필이면 모바일 쿠폰의 커피숍은 근처에 없어 주차장에서 차를 빼고 또 차 안에서 어색한 침묵을 견뎌야 했다.

정연은 이렇게까지 그가 자신을 끌고 하루 종일 다닐 줄은 몰랐다. 혹시 정연의 회사에 대한 어떠한 불만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제가 주문하고 올게요.”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 집으로 가고 싶었다. 정연은 모바일 쿠폰을 찾고 있는 진우를 두고 제 지갑을 들고 일어섰다.

“제가 이런 것도 못 할 거 같아 그럽니까?”

“아니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아까 영화관에서도 팀장님이 주문하시고 제가 미안해서요. 얼른 주문하고 올게요.”

혹시나 자신의 행동이 그에게 불쾌감을 주었을까 싶어 그렇지 않다며 손사래까지 치며 변명했다.

“……정연 씨는 오늘 이 자리가 외근 업무라 생각하시는 모양이군요.”

정확하게 집어내는 남자를 보며 정연은 속으로 쩔쩔맸다. 틀린 말이 아니다.

“아니, 저는…….”

“됐습니다. 제가 주문하고 오겠습니다.”

그러더니 찬바람을 일으키며 일어선 진우가 카운터로 갔다. 하루가 너무 길고 꼿꼿하게 세운 허리가 아팠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정연은 허리에 힘을 풀었다. 그의 말대로 긴 외근 업무다. 그것도 너무 긴 휴일 근무 말이다.

곧이어 주문을 마친 진우가 다시 다가왔다. 대기 중인 손님이 없었는지 진동 벨이 이내 울렸다. 정연은 다시 업무 시간으로 돌아갔다. 어떤 이가 아슬아슬하게 트레이를 든 진우를 비켜 갔을 때는 불량 제품 사후 보고서를 올릴 때의 심정처럼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별일 없이 자리로 돌아온 진우의 손에 들린 트레이를 본 정연은 조금 당황했다.

“팀장님? 이런…… 걸 좋아하세요?”

정연은 음료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말했다. 커다란 컵에 담긴 음료는 휘핑크림이 산만큼 올려져 있었다. 그 위에는 초코 시럽으로 짐작되는 검은 띠가 몇 번이나 휘감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자세히 보니 색색깔의 스프링클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아마도 저 칼로리를 짐작하자면 오늘 먹은 수제 버거 이상을 훌쩍 뛰어넘을 게 분명했다.

“아, 부장님이 주신 모바일 쿠폰 음료가 이건가 봅니다.”

“대체 이건 이름이?”

그는 휴대 전화를 꺼내 직접 정연에게 모바일 쿠폰을 보여 주었다. 정연은 꼭 이름을 알고자 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보여 주는 것을 됐다고 할 수도 없어 몸을 진우에게로 가까이 해서 확인했다. 여기 들어오면서 보이는 곳마다 포스터가 붙어 있는 시즌 음료였던 모양이다.

“꼭 이걸로 주문해서 먹어야 되는 건 아니에요. 그냥 아메리카노로 시켜도 되는데, 팀장님 모르셨나 봐요.”

아메리카노에 시럽은 절대 넣지 않고, 아니면 에스프레소나 어울릴 법한 남자에게 도저히 권할 음료는 아니었다.

“아, 그런 겁니까? 그럼 다음에는 그냥 아메리카노로 마시는 걸로 하고 오늘은 그냥 먹읍시다.”

“다음, ……에요?”

“네. 이거 말고 몇 개 더 받았습니다.”

오늘이 끝이 아닌 거야? 정연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그런 정연을 보던 진우는 빨대로 휙휙 크림을 저어 덥석 먹어 치운다. 정연이 다른 거라도 주문해 올까요 하는 질문할 타이밍을 놓쳤다.

그렇게 어색한 거래처 상사와의 만남은 속이 부대끼게 휘핑크림을 다 먹어 치우고서야 끝이 났다. 그는 이후 다른 약속이 잡혀 있는 통화를 그녀 옆에서 했음에도 굳이 정연의 동네까지 돌아왔다. 내리지 말라는 정연의 말에 그는 대꾸도 안 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섰다.

“정연 씨.”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그가 뒤에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정연은 그때 순식간에 밀려오는 깨달음에 잠시 어지러웠다. 왜 박진우가 아닌 김정연인지. 대기자 명단의 이름 김정연은 그가 그녀를 부르는 소리였다.

그리고 어느 여름날 그의 회사 앞에서 마주했던 그날. 수진이 부르던 정연의 이름에 그가 먼저 돌아봤던 그날. 역시 오늘과 같은 부름이었구나 하는 느낌이 섬광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당신이 내 이름을 불렀나요?





―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