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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1화 저승사자 김시박(2)


시박은 슬며시 취걸개의 귓가에 얼굴을 가져갔다.
조건만 맞으면 이레 정도는 살려 줄 수도 있었다.
“……있더냐?”
취걸개가 너무 작아 못 알아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박은 체면이 안 서는 듯 다시 한 번 속삭였다.
“강호삼미의 속곳이 남아 있는 게 있더냐?”
“속곳이라면 일전에 이덕춘에게…….”
“어허! 목소리가 크다!”
시박은 취걸개에게 딱밤을 한 대 때렸다. 분명 때리기는 취걸개를 때렸는데 이 도령이 엉뚱하게 소리를 질렀다.
워낙 수없이 맞아서 보는 것만으로도 아팠던 것이다.
“애, 애석하게도 속곳은 있지 않으…….”
“커흠.”
시박의 난데없는 헛기침. 눈동자는 좀 전과 달리 타협이 불가한 서생의 곧은 기개가 느껴질 정도였다.
“네 이놈! 감히 명이 다한 삶이거늘 고작 황구에 집착해 저승차사들을 희롱하다니!”
시박의 호통에 취걸개가 대뜸 바지를 벗었다.
그의 눈빛으로 보아 지금 한 수에 모든 걸 건 듯 싶었다.
“속곳이 필요하시다면 여기 제 것이라도 벗어…… 쿠엑!”
명부로 따귀를 맞은 취걸개가 삼 장을 날아갔다.
시박은 자신도 모르게 나간 손버릇에 무안한 듯 애꿎은 차사들에게 화를 냈다.
“뭘 하고 있는 게야? 어서 혼백을 꺼내지 않고.”
거품을 물고 기절한 취걸개에게 이 도령이 다가갔다.
그를 보자니 왠지 모를 친근감이 들었다. 자신 역시 김시박 때문에 수없이 기절했었다.
이 도령은 이왕 죽이는 거 곱게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일혼, 이혼, 삼혼. 취걸개의 나이와 이름이 세 번 불려졌다.
호통이 아닌 동정심 가득 담긴 어투였다.
“웬일이래. 삼혼의 의식을 여자 다루듯 해 주네?”
취걸개의 육신이 장침(長針)을 맞은 것처럼 한 차례 부르르 떨렸다. 이윽고 옅은 빛에 물들더니 희끄무레한 혼백이 몸에서 분리됐다. 유체이탈과 달리 명백한 죽음이었다.
“자아, 이제 소임도 마쳤으니 올라가 볼…….”
귀환할 채비를 하던 시박의 눈에 주인 잃은 황구가 들어왔다. 제삿밥과 달리 달짝지근한 냄새가 콧구멍을 자극했다.
‘저게 뭐 그리 맛있다는 걸까.’
시박은 슬쩍 취걸개의 혼백을 봤다. 얼마나 황구에 집착을 했으면 혼백으로 나올 때 뒷다리까지 딸려 나왔을까.
생각에 잠기던 시박은 이내 품속에서 자신의 위패를 꺼냈다.
그것을 본 이승차사가 기겁하며 물었다.
“설마 금기(禁忌)를 어기실 작정이십니까?”
“덕춘아.”
시박의 부름에 이덕춘은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서열 관계에 있어 충실한 신장다운 반응이었다.
“저승차사가 지켜야 할 삼대 금기에 대해 읊어 보아라.”
“첫째,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이승의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옳지, 계속하거라.”
시박은 이덕춘의 말을 들으며 꼬챙이에 꽂혀 있는 황구를 유심히 살폈다. 주둥이에 위패를 꽂자니 그렇고 항문에 꽂자니 모양새가 안 좋았다.
“둘째, 제사상에 올려진 것을 제외한 이승의 것을 탐하면 안 된다. 셋째…….”
퍽.
황구의 등에 자신의 위패를 꽂은 시박이 말했다.
“너 역시 두 번째 금기를 어긴 마당에 나라고 하지 못하는 법 있냐? 그러지 말고 너희들도 어서 위패나 꽂아.”
이덕춘과 이 도령은 뭉그적거리며 딴청을 피웠다.
시박 정도 돼야 저런 행각을 하지 자신들은 도저히 시도할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었다. 시박은 황구의 남은 뒷다리를 마저 뜯었다.
“쩝쩝. 오호! 제사상에 올라오는 산적과는 차원이 다르구나!”
처음 맛보는 음식은 호불호가 갈리는 법.
황구는 불행히도 시박의 입맛에 딱 들어맞았다. 더구나 이것이 어떤 황구인가. 이제는 고인이 된 개방 방주 취걸개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염라대왕이나 좀 갖다 줄까? 아니야, 괜히 금기를 어겼다고 귀찮게 할 수 있어.”
순식간에 황구를 해골로 만들어 놓은 시박은 손가락을 쪽쪽거렸다. 물론 이덕춘과 이 도령을 향해 목을 긋는 시늉도 잊지 않았다.
고자질하면 시박에게 죽는다. 나중에 들켜도 염라대왕에게 죽는다. 이래저래 죽을 거 조금 더 살고 보자는 차사들이었다.
서서히 날이 밝아 왔다.

***

천지만물에 있어 옳고 그름을 정하는 자.
무림의 정의가 힘이라면 저승에 있어 정의는 염라대왕이다.
올해로 염라대왕이란 관직에 오른 지 만 년이 된 오병량(悟秉諒). 그는 며칠째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그였기에 그가 받는 두통은 일반적인 병세와 의미가 달랐다. 무언가 이치에 거스르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는 이승차사 이덕춘에게서 빼앗은 속곳을 꺼냈다.
처음에는 취걸개 때문인 줄 알았다. 원래의 생보다 이승에 한 달을 더 머물렀으니 일어나는 두통인 줄 알았다.
“취걸개는 시박이가 잡아 왔으니 해결이 되었는데.”
취걸개. 그 작자를 생각하니 너털웃음이 나왔다.
황구 뒷다리를 들고 나타난 혼백. 역시 시박이가 잡아 온 것은 달라도 뭐가 달랐다.
염라대왕은 그가 평생을 무욕(無慾)으로 살았으니 천계로 보내려 했다. 하지만 취걸개의 반응은 의외였다.
“날 지옥으로 보내 주시오. 개들이 들끓는 견옥(犬獄)으로!”
속곳의 고마움도 있어 염라대왕은 그리했다.
속곳을 서랍에 고이 모셔 놓은 그는 혹시나 잊은 게 있나 싶어 근 10년간의 일들을 생각했다.
평화로웠다. 낙양의 돌림병을 제외하면 영혼들의 판결만 내렸을 뿐. 딱히 이치를 거스르는 일은 없었다.
“흐음. 아무래도 이상하구나. 두통에 이어 자꾸 술만 마시고 싶으니.”
두통을 피하려 술을 마시니 엉뚱한 항문이 말썽이라 뒷간에 못 간 지 어언 열흘이다. 찬 곳에 앉아 있으면 따끔거려 알 수 없는 미묘한 아픔이 들기도 했다.
“염의서(閻醫書)를 가져와라.”
동자귀 하나가 염라대왕의 말에 사라졌다.
염의서(閻醫書)는 염라대왕의 병세를 적어 놓은 의서였다. 저승에서 병이 걸리는 이는 없지만 현세에 영향을 받으니, 염라대왕이 그랬다.
동자귀가 염의서(閻醫書)를 들고 나타났다.
책자를 받아 든 염라대왕은 자신의 병세를 살피기 시작했다.
“두통과 항…… 너는 그만 물러가거라.”
“알겠습니다.”
염라대왕은 다시 책장을 넘겼다.
두통과 항문에 문제가 있으니 합병증(合倂症)이란 목차를 확인하며 다시 글을 읽어 내려갔다.

두통(頭痛)이 오는 것은 이승에 순리를 거스르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그 원인은 대체로 사람인데 가끔 영물이나 저승의 존재가 원인일 수도 있다.

염라대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승에는 현재 문제를 일으키는 이가 없다.
사람이라 치면, 반로환동을 한 이들을 제외하고 취걸개밖에 없었지만 그는 이미 해결을 보았다.

항문(肛門)이 아픈 것은 음탕함이 있기 때문이다. 성욕을 버리면 된다. 그 외에는 청룡(靑龍), 백호(白虎), 현무(玄武), 주작(朱雀)의 실종이 원인이다.

염라대왕이 제갈미아의 속곳을 떠올렸다.
설마 그것 때문에 항문이 아팠단 말인가. 아니다, 그렇다면 두통은 오면 안 되는 것이다.
염라대왕은 두 병세에 대한 원인을 조합시켜 봤다.
“청룡, 백호, 현무, 주작이 순리를 거스른다?”
순간 항문이 찢어지는 것 같은 쓰라림이 덮쳐 왔다.
아픔을 못 이긴 염라대왕이 옥좌(玉座)에서 한 장 정도 뛰어올랐다.
“게, 게 누구 없느냐!”
벼락같은 호통에 놀란 동자귀가 다급히 모습을 드러냈다.
염라대왕이 곧 숨을 거둘 것처럼 입을 열었다.
“씨, 씨박이를 불러오너라. 당장!”
염라대왕이 받고 있는 고통은 치질이었다.

***

시박은 단잠에서 깨어났다.
장장 백 일하고도 이틀만의 휴식이었다. 삼 일 밤낮은 잘 줄 알았는데 이승에서 먹은 황구가 보약이었는지 하루 만에 피로가 달아났다.
“하암. 한 달은 놀 수 있겠군.”
시박은 오랜만에 기분이 좋았다.
낙양에서의 일과 취걸개를 잡은 공로(功勞)로 염라대왕에게 한 달간의 휴식을 약속 받았기 때문이다. 공적(功績)이 일직차사의 자리를 넘어섰지만 시박에게 지위란 관심 밖의 얘기였다.
이렇게 되니 불편해지는 건 시박의 윗자리들이었다.
언제 치고 나갈지 모르는 시박으로 인해 하대를 하기도 그렇고 성가신 일에 엮지도 못했다.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박은 이번에도 염라대왕이 주는 승격을 한사코 거부했다.
“누구 좋으라고 승격을 해. 그저 속 편한 저승차사가 장땡이지.”
시박은 침상 밑에서 천으로 둘둘 말려 있는 검 한 자루를 꺼냈다. 애검(愛劍)인 월영검(月影劍)이었다.
천을 풀어내자 순백의 검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상하단 말이야.”
주인의 말에 대답하듯 월영검이 검명(劍鳴)을 토했다.
시박은 월영검을 뽑았다. 놀랍게도 검신은 투명했다. 아니, 원래 날이 있어야 할 곳에 허공만 보일 뿐 아무것도 있지 않았다.
쓸 수 없는 검이었다.
“분명 기물이긴 한데…… 날이 없는 검이니.”
침상 밑에 보관해 둔 지 벌써 500년이 되었다.
수없이 버리려 했지만 파기된 검에 무슨 놈의 미련이 남았는지 시박은 그러지 못했다.
“염라대왕이 말하길 내가 살아생전 쓰던 검이라 했는데…….”
망각수(忘却水)를 마셔 전생의 기억이 사라진지라 마음만 동했다. 무슨 놈의 사연이 있었던 걸까. 검을 바라보는 시박의 얼굴이 착잡했다.
육신을 잃고 죽은 자가 그리움을 느낀다. 이것은 시박이 특별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본래 저승차사란 인간의 혼백이 죽어서 깨달음을 얻은 자들이었다.
시박 역시 그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시박의 깨달음은 미묘했다. 어느 날 망각수를 마셔 지워 버린 자신의 전생이 궁금했고 몇 안 되는 감정을 깨우쳤다.
공적이 쌓일 때마다 그러한 현상은 더해 갔고 나중에서야 시박의 깨달음이 저승에서 염라대왕만이 깨우친 깨달음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놈만 아니었어도 깨달음이 멈추진 않았을 텐데.”
시박은 월영검을 다시 검집에 넣었다. 백 일 만에 보아서인지 괜스레 옆구리에 차기까지 했다.
“자자, 쉴 생각이나 하자. 한 달 후면 또 바쁠 테니.”
시박은 한 달간의 휴식을 어떻게 사용할까 고민했다.
유일한 취미라고는 염라대왕의 술 창고를 털어 술을 축내는 것뿐이다. 이제까지 시박의 뱃속에 들어간 술이 백여 동은 족히 넘었다.
“흐흐. 이번에는 신선주(神仙酒)나 마시며 놀아야겠구나.”
며칠 전 염라대왕이 마신 극락주(極樂酒)가 생각난 시박이었다. 생각을 마치자 시박의 발걸음이 궁궐 수라간으로 향했다.

저승의 거리는 여전히 조용했다.
이승의 모습을 본떠 만든 객점과 여관들이 색색의 등불을 켜 두었지만 정작 드나드는 손님은 없었다. 그것은 생계가 아닌 외관을 채우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차사 복장을 한 영혼들이 시박에게 작게 고개를 숙였다.
직급은 같더라도 그들 역시 시박을 같은 부류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때 저 멀리 보이는 궁궐로부터 독취 한 마리가 날아와 시박을 순식간에 지나쳤다.
독취가 지나간 자리에는 그날 저승에서 일어났던 일이 적혀 있는 호외(號外)가 빨랫줄에 널린 옷가지들처럼 흩날렸다.
시박은 그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천계행을 마다하고 견옥(犬獄)을 자청한 취걸개.
그는 죄인들과 합심하여 아귀처럼 달려드는 황구(黃狗)를 상대로 개방의 진법, 견벽진(堅壁陣)을 시전. 견(犬)들의 씨를 말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