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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3화 낭만사신 환생하다(3)
반면 발레포르는 그 모습에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필시 제정신이 아닌 드래곤이다. 미친 드래곤이다. 온순한 소[牛]도 미치면 오우거를 죽일 수 있다.
하물며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생명체인 드래곤이 미친다면…….
발레포르의 머릿속에 자신의 짧은 인생사가 스쳐 지나갔다.
떠돌이 음유시인의 한(恨)에서 태어난 그는 악마라 부르기도 민망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노래 하나로 우연히 열 번째 군단장 하우레스의 집사 살롬의 눈에 띄어 사시사철 새장에서 노래하는 신세가 되었다.
혼백을 거둬들이는 말단에 취임하기까지 온갖, 갖은 아부와 애교가 필요했으리라. 그러던 중 우연히 발견한 씨알 굵은 영혼이었다.
이것만 들고 가면 충분히 출세하리라 믿었는데.
하필이면 똥이 묻어도 말똥, 아니 용똥에 묻게 되다니.
필시 인생을 좌지우지할 결심이 필요한 때였다.
“이상한 잡귀…… 정신 나간 저승차사…… 괴상한 혼백…….”
시박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역시나 달은 하나가 아니었다. 생각해 보니 염라대왕이 미치지 않고서야 달덩이를 두 개 띄워 놨을 리가 없었다.
순간 파드득거리며 발레포르가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잠깐의 틈을 보인 사이 줄행랑을 치려는 듯 보였다.
“흐윽! 시바인지 씨빡인지 모르겠다만 드래곤 주제에 감히 이 몸을 건드리다니!”
“저, 저놈이 그래도!”
“내가 호락호락 당할 것 같으냐!”
발레포르 머리 위로 한 장 정도 공간이 일그러졌다.
뭔가 범상치 않은 기운에 시박이 긴장했다.
앞서 청룡과 차원의 균열에 휩쓸렸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 든 것이다.
아미가 본능적으로 시박의 등 뒤로 숨었다.
“너!”
발레포르가 한껏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밤길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그 말을 끝으로 발레포르는 일그러진 공간으로 도망쳐 버렸다. 시박은 월영검까지 뽑아 들었는데, 순간이나마 긴장했던 자신이 부끄러워 혀를 깨물고 싶었다.
덩그러니 남겨진 숲 속에 노움의 홀홀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미는 말없이 시박의 등을 토닥거렸다.
시박은 조용히 노움의 입을 발로 막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나는 다른 세상에 오게 된 것인가?”
어느새 동이 터 오기 시작했다.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태양빛이 시박을 환영하듯 붉게 물들였다. 심장이 갓 잡아 올린 활어처럼 맥박질 쳤다.
귓가를 어지럽히는 소리에 발레포르가 한 말이 생각났다.
“저승차사가 인간이 된 것인가…….”
이곳에도 속곳이 있을까 하는 시답잖은 생각도 잠시, 같이 빛에 휩쓸렸던 청룡의 생사가 궁금했다.
“명색이 영물인데 죽었을 리는 없겠지.”
시박은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번 일만 끝내면 월영검에 대한 기억을 얻고 염라대왕이 숨겨 놓은 뱀술에 황구를 곁들여 시간을 보내려 했다. 그런데 청룡, 아니 파랭이 녀석 때문에…….
시박의 두 무릎이 털썩 땅에 부딪쳤다.
예전 같으면 느껴지지도 않을 쓸모없는 아픔이, 저 멀리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찾아왔다.
“나…….”
시박이 양팔을 하늘로 뻗었다.
“나 다시 돌아갈래!”
***
죄인의 비명이 끊이지 않는 저승.
그러나 며칠 전부터 벌을 받는 혼백들은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바로 염라대왕의 살벌하리만큼 끊임없이 들려오는 욕, 아니 비명 소리 때문이다.
“으흐흐흑! 시, 시바아악!”
이불을 우악스레 말아 쥔 염라대왕은 둔부의 고통에 얼굴이 노랗게 떴다. 필시 고통에 못 이겨 저승이, 아니 천계가 보이는 것이었다.
“대, 대왕님. 괜찮으십니까?”
“너 이 후춧가루에 밥 비벼 먹을 놈아! 네, 네놈 눈에는 이게 괜찮은 듯싶더냐!”
염라대왕의 호통에 동자귀는 질끈 눈을 감았다.
시박이 떠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이틀이면 될 줄 알았던 고통이었는데, 어떻게 된 것인지 무사 귀환은커녕 깜깜무소식이었다.
“흐으윽. 씨빡아, 염라대왕 죽느니라!”
가히 염라대왕답게 저승을 뒤흔들 목소리였다.
그때 땅을 관장하는 월직차사가 황급히 꽃살문을 열고 들어왔다. 걱정에 못 이겨 후발대로 보낸 것인데 지금에서야 돌아온 것이다.
염라대왕이 월직차사를 보자마자 도자기를 던졌다.
쨍그랑.
“으헉!”
정수리에 제대로 맞은 월직차사가 고통에 몸부림쳤다.
“너 이 북해 벌판에서 밀감이나 까먹을 육시할 놈아! 보낸 지가 언젠데 지금에야 나타나는 것이냐!”
상투 뒤로 갓이 넘어간 월직차사는 혹이 난 얼굴로 재빨리 자세를 바로 했다.
“봐봐. 내 엉덩이를 보란 말이다! 허어억! 종, 종기가 네놈 얼굴보다 더 크잖…… 크윽! 씨바아악아!”
“죄, 죄송합니다. 대왕님! 공간의 균열이 기승을 부려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시, 시박이는 어떻게 된 것이냐. 그리고 청룡은!”
“소인이 알아본 바 저승차사 김시박과 사방신 중 하나인 청룡은 차원의 균열에 휩쓸린 것 같습니다!”
염라대왕이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둔부를 환기시키기 위해 바지를 벗고 있었음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동자귀와 월직차사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균, 균열에 휩쓸렸다고?”
“그렇습니다.”
“참말이더냐?”
“소인 월직차사의 명예를 걸고 확신합니다.”
염라대왕은 다리에 저절로 힘이 풀렸다.
말렸어야 했다. 아니, 다른 이를 보냈어야 했다. 차원의 균열에 휩쓸린다면 자신이 아무리 염라대왕이라도 손쓸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전해 드릴 것이…….”
“무엇이냐. 중요한 게 아니면 나중에 아뢰도록 하라.”
월직차사는 조용히 입을 떼었다.
“이번 차원의 균열은 여러모로 수상하옵니다.”
“수상해?”
“자연스럽게 발생한 균열이라기에는 청룡의 폭주도 그러하옵고 무엇보다도…….”
월직차사는 확신이 없는지 쉽사리 말하지 못했다.
염라대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임으로 월직차사가 말할 수 있게 도와줬다.
“천 년 전 김시박이 처음으로 혼백을 놓친 일을 기억하십니까?”
“혈교의 교주 천병세(天兵勢)를 말하는 것이냐?”
“그자 역시 김시박의 추격에 쫓겨 북해에서 차원의 균열에 휩쓸리지 않았습니까.”
“그런 일이 있었지.”
“천병세가 휩쓸렸던 차원의 균열과 김시박이 당한 균열이 너무나도 비슷…….”
염라대왕은 손을 들어 월직차사의 말을 끊었다.
지금껏 땅을 관장한 월직차사의 말은 틀린 적이 없었다. 행동은 굼뜨긴 해도 그 능력 하나만큼은 자신이 인정한 자가 아니던가.
“시박아…….”
염라대왕은 시박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청룡을 잡아 오면 독각화망을 담근 술로 같이 목이나 축이려 했는데 생사도 알 수 없게 되었다. 만약 월직차사의 말대로라면…….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4화 한 달간의 휴식(休息)(1)
시박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숲을 걷고 있었다.
사천 땅인 줄 알았는데, 설마 다른 세계로 떨어졌을 줄이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팔자에도 없는 환생을 하게 되었다.
“언니야, 같이 가!”
아미가 시박의 등 뒤에서 소리쳤다.
“버르장머리 없는 꼬마 같으니라고…….”
시박은 걸음을 멈췄다. 감히 자신에게 오라버니도 아니고 언니라고 하다니. 생김새가 아무리 곱상하다지만 가히 듣기 좋은 호칭은 아니었다.
욱한 마음에 뒤돌아보니…… 가관이었다.
종종 걸음으로 뛰어오는 아미 뒤에는 금동아줄에서 해방된 노움과 운디네들이 눈치를 살피며 따라오고 있었다.
“어이! 거기 너 색귀(色鬼), 저리 썩 꺼지지 못해?!”
색귀란 말에 노움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아미가 간신히 시박을 따라잡고 신난 얼굴로 말했다.
“히히. 쟤들이 언니가 좋다는데?”
“요 계집애가 말끝마다 언니, 언니. 대체 누가 네 언니야?”
“언니가 내 언니지. 누가 내 언니긴!”
“뭐, 이런…… 개떡 같은 경우는 또 처음 보네.”
아미는 배시시 웃으며 시박의 팔에 매달렸다.
시박이가 살려 주겠단 말을 하고 나서부터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이다. 시박은 팔을 쏙 빼내며 걸음을 옮겼다.
‘내가 괜한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닐 거야.’
세상이 바뀌었지만 시박은 엄연한 저승차사였다.
차사를 잃은 혼백을 못 본 척할 수는 없는 일. 자칫 구천을 떠돌다 성가신 귀신으로 변할 수 있었고 동업자 정신이라는 것도 작용했다.
무엇보다 발레포르라는 얼간이를 떠올리면 아미가 그날 죽을 운명도 아닌 듯했다.
***
성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통나무집이었다.
워낙 간단하게 만든 것이라 자칫 목재를 쌓아 놓은 것이라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아미가 신이 나서 말했다.
“여기가 우리 집이야!”
“알았으니까 그만 보채!”
시박은 아미를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정령들 역시 따라 들어가려 했지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노움이 나서서 만류했다.
시박을 향해 음흉한 미소를 지은 채.
시박은 바닥에 널브러진 아미의 육신을 바라봤다.
다행히 누가 땅속에 묻지는 않아 소생시킬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시박은 아미의 육신을 이리저리 훑어봤다.
“역시 그놈은 돌팔이였어.”
시박이 아미의 뒤통수 부근을 보더니 혀를 찼다.
필시 삼혼의 의식을 치른 게 아니었다. 삶이 남아 있음에도 강제로 영혼을 육체에서 뜯어낸 것이 분명했다.
그 증거로 목덜미 뒤에 보이는 불그스름한 화상 자국이 선명했다.
“홀홀.”
“앗 변태 할배다!”
시박은 집 안으로 들어온 노움을 바라봤다.
얼굴을 보니 괜히 짜증이 올랐는데 마침 아미의 육신을 옮길 심부름꾼이 필요했다.
시박이 턱짓으로 신호를 하자 용케 노움이 웃음소리를 높이며 아미의 육신을 나무 침대에 옮겼다.
“홀홀, 홀홀홀.”
“암소 짝짓기 하는 소리 내고 있네. 방해되니까 밖에 나가 있어.”
시박의 냉랭한 말에 노움이 충격 받은 듯 인상을 찌푸렸다.
노움이 아미에게 다가가 무언가 열심히 설명했다.
“으응…… 알았어. 언니, 변태가 칭찬해 달라는데? 머리 쓰다듬어 달래.”
노움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박이에게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시박은 애써 노움을 무시했다.
문득 자신이 염라대왕에게 고개를 내밀었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빨리 몸속으로 들어가기나 해라.”
“어떻게 들어가야 하는데?”
“천 년 묵은 구렁이가 똥구멍에 불붙어 냇가에 뛰어들듯.”
“구렁이? 음음, 너무 어려워. 다시 알려 줘라, 언니.”
“이덕춘이 꾀병을 빙자해 춘화 보다 들켜 자는 척하듯.”
“이덕춘이 누구야, 언니야?”
아미를 바라보는 시박의 얼굴이 기괴해졌다.
분명 이 꼬마가 날 놀리는 것이다.
한 대만 쥐어박을까. 하지만 꼬마에게 화를 내는 것도 우스웠다. 이 도령과 여러모로 다르게 생각하는 시박이었다.
“그냥 네 몸뚱이 위에 누워!”
“응!”
아미가 어색한 듯 자신의 육체 위로 조심스레 누웠다.
3화 낭만사신 환생하다(3)
반면 발레포르는 그 모습에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필시 제정신이 아닌 드래곤이다. 미친 드래곤이다. 온순한 소[牛]도 미치면 오우거를 죽일 수 있다.
하물며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생명체인 드래곤이 미친다면…….
발레포르의 머릿속에 자신의 짧은 인생사가 스쳐 지나갔다.
떠돌이 음유시인의 한(恨)에서 태어난 그는 악마라 부르기도 민망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노래 하나로 우연히 열 번째 군단장 하우레스의 집사 살롬의 눈에 띄어 사시사철 새장에서 노래하는 신세가 되었다.
혼백을 거둬들이는 말단에 취임하기까지 온갖, 갖은 아부와 애교가 필요했으리라. 그러던 중 우연히 발견한 씨알 굵은 영혼이었다.
이것만 들고 가면 충분히 출세하리라 믿었는데.
하필이면 똥이 묻어도 말똥, 아니 용똥에 묻게 되다니.
필시 인생을 좌지우지할 결심이 필요한 때였다.
“이상한 잡귀…… 정신 나간 저승차사…… 괴상한 혼백…….”
시박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역시나 달은 하나가 아니었다. 생각해 보니 염라대왕이 미치지 않고서야 달덩이를 두 개 띄워 놨을 리가 없었다.
순간 파드득거리며 발레포르가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잠깐의 틈을 보인 사이 줄행랑을 치려는 듯 보였다.
“흐윽! 시바인지 씨빡인지 모르겠다만 드래곤 주제에 감히 이 몸을 건드리다니!”
“저, 저놈이 그래도!”
“내가 호락호락 당할 것 같으냐!”
발레포르 머리 위로 한 장 정도 공간이 일그러졌다.
뭔가 범상치 않은 기운에 시박이 긴장했다.
앞서 청룡과 차원의 균열에 휩쓸렸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 든 것이다.
아미가 본능적으로 시박의 등 뒤로 숨었다.
“너!”
발레포르가 한껏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밤길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그 말을 끝으로 발레포르는 일그러진 공간으로 도망쳐 버렸다. 시박은 월영검까지 뽑아 들었는데, 순간이나마 긴장했던 자신이 부끄러워 혀를 깨물고 싶었다.
덩그러니 남겨진 숲 속에 노움의 홀홀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미는 말없이 시박의 등을 토닥거렸다.
시박은 조용히 노움의 입을 발로 막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나는 다른 세상에 오게 된 것인가?”
어느새 동이 터 오기 시작했다.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태양빛이 시박을 환영하듯 붉게 물들였다. 심장이 갓 잡아 올린 활어처럼 맥박질 쳤다.
귓가를 어지럽히는 소리에 발레포르가 한 말이 생각났다.
“저승차사가 인간이 된 것인가…….”
이곳에도 속곳이 있을까 하는 시답잖은 생각도 잠시, 같이 빛에 휩쓸렸던 청룡의 생사가 궁금했다.
“명색이 영물인데 죽었을 리는 없겠지.”
시박은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번 일만 끝내면 월영검에 대한 기억을 얻고 염라대왕이 숨겨 놓은 뱀술에 황구를 곁들여 시간을 보내려 했다. 그런데 청룡, 아니 파랭이 녀석 때문에…….
시박의 두 무릎이 털썩 땅에 부딪쳤다.
예전 같으면 느껴지지도 않을 쓸모없는 아픔이, 저 멀리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찾아왔다.
“나…….”
시박이 양팔을 하늘로 뻗었다.
“나 다시 돌아갈래!”
***
죄인의 비명이 끊이지 않는 저승.
그러나 며칠 전부터 벌을 받는 혼백들은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바로 염라대왕의 살벌하리만큼 끊임없이 들려오는 욕, 아니 비명 소리 때문이다.
“으흐흐흑! 시, 시바아악!”
이불을 우악스레 말아 쥔 염라대왕은 둔부의 고통에 얼굴이 노랗게 떴다. 필시 고통에 못 이겨 저승이, 아니 천계가 보이는 것이었다.
“대, 대왕님. 괜찮으십니까?”
“너 이 후춧가루에 밥 비벼 먹을 놈아! 네, 네놈 눈에는 이게 괜찮은 듯싶더냐!”
염라대왕의 호통에 동자귀는 질끈 눈을 감았다.
시박이 떠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이틀이면 될 줄 알았던 고통이었는데, 어떻게 된 것인지 무사 귀환은커녕 깜깜무소식이었다.
“흐으윽. 씨빡아, 염라대왕 죽느니라!”
가히 염라대왕답게 저승을 뒤흔들 목소리였다.
그때 땅을 관장하는 월직차사가 황급히 꽃살문을 열고 들어왔다. 걱정에 못 이겨 후발대로 보낸 것인데 지금에서야 돌아온 것이다.
염라대왕이 월직차사를 보자마자 도자기를 던졌다.
쨍그랑.
“으헉!”
정수리에 제대로 맞은 월직차사가 고통에 몸부림쳤다.
“너 이 북해 벌판에서 밀감이나 까먹을 육시할 놈아! 보낸 지가 언젠데 지금에야 나타나는 것이냐!”
상투 뒤로 갓이 넘어간 월직차사는 혹이 난 얼굴로 재빨리 자세를 바로 했다.
“봐봐. 내 엉덩이를 보란 말이다! 허어억! 종, 종기가 네놈 얼굴보다 더 크잖…… 크윽! 씨바아악아!”
“죄, 죄송합니다. 대왕님! 공간의 균열이 기승을 부려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시, 시박이는 어떻게 된 것이냐. 그리고 청룡은!”
“소인이 알아본 바 저승차사 김시박과 사방신 중 하나인 청룡은 차원의 균열에 휩쓸린 것 같습니다!”
염라대왕이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둔부를 환기시키기 위해 바지를 벗고 있었음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동자귀와 월직차사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균, 균열에 휩쓸렸다고?”
“그렇습니다.”
“참말이더냐?”
“소인 월직차사의 명예를 걸고 확신합니다.”
염라대왕은 다리에 저절로 힘이 풀렸다.
말렸어야 했다. 아니, 다른 이를 보냈어야 했다. 차원의 균열에 휩쓸린다면 자신이 아무리 염라대왕이라도 손쓸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전해 드릴 것이…….”
“무엇이냐. 중요한 게 아니면 나중에 아뢰도록 하라.”
월직차사는 조용히 입을 떼었다.
“이번 차원의 균열은 여러모로 수상하옵니다.”
“수상해?”
“자연스럽게 발생한 균열이라기에는 청룡의 폭주도 그러하옵고 무엇보다도…….”
월직차사는 확신이 없는지 쉽사리 말하지 못했다.
염라대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임으로 월직차사가 말할 수 있게 도와줬다.
“천 년 전 김시박이 처음으로 혼백을 놓친 일을 기억하십니까?”
“혈교의 교주 천병세(天兵勢)를 말하는 것이냐?”
“그자 역시 김시박의 추격에 쫓겨 북해에서 차원의 균열에 휩쓸리지 않았습니까.”
“그런 일이 있었지.”
“천병세가 휩쓸렸던 차원의 균열과 김시박이 당한 균열이 너무나도 비슷…….”
염라대왕은 손을 들어 월직차사의 말을 끊었다.
지금껏 땅을 관장한 월직차사의 말은 틀린 적이 없었다. 행동은 굼뜨긴 해도 그 능력 하나만큼은 자신이 인정한 자가 아니던가.
“시박아…….”
염라대왕은 시박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청룡을 잡아 오면 독각화망을 담근 술로 같이 목이나 축이려 했는데 생사도 알 수 없게 되었다. 만약 월직차사의 말대로라면…….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4화 한 달간의 휴식(休息)(1)
시박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숲을 걷고 있었다.
사천 땅인 줄 알았는데, 설마 다른 세계로 떨어졌을 줄이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팔자에도 없는 환생을 하게 되었다.
“언니야, 같이 가!”
아미가 시박의 등 뒤에서 소리쳤다.
“버르장머리 없는 꼬마 같으니라고…….”
시박은 걸음을 멈췄다. 감히 자신에게 오라버니도 아니고 언니라고 하다니. 생김새가 아무리 곱상하다지만 가히 듣기 좋은 호칭은 아니었다.
욱한 마음에 뒤돌아보니…… 가관이었다.
종종 걸음으로 뛰어오는 아미 뒤에는 금동아줄에서 해방된 노움과 운디네들이 눈치를 살피며 따라오고 있었다.
“어이! 거기 너 색귀(色鬼), 저리 썩 꺼지지 못해?!”
색귀란 말에 노움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아미가 간신히 시박을 따라잡고 신난 얼굴로 말했다.
“히히. 쟤들이 언니가 좋다는데?”
“요 계집애가 말끝마다 언니, 언니. 대체 누가 네 언니야?”
“언니가 내 언니지. 누가 내 언니긴!”
“뭐, 이런…… 개떡 같은 경우는 또 처음 보네.”
아미는 배시시 웃으며 시박의 팔에 매달렸다.
시박이가 살려 주겠단 말을 하고 나서부터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이다. 시박은 팔을 쏙 빼내며 걸음을 옮겼다.
‘내가 괜한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닐 거야.’
세상이 바뀌었지만 시박은 엄연한 저승차사였다.
차사를 잃은 혼백을 못 본 척할 수는 없는 일. 자칫 구천을 떠돌다 성가신 귀신으로 변할 수 있었고 동업자 정신이라는 것도 작용했다.
무엇보다 발레포르라는 얼간이를 떠올리면 아미가 그날 죽을 운명도 아닌 듯했다.
***
성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통나무집이었다.
워낙 간단하게 만든 것이라 자칫 목재를 쌓아 놓은 것이라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아미가 신이 나서 말했다.
“여기가 우리 집이야!”
“알았으니까 그만 보채!”
시박은 아미를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정령들 역시 따라 들어가려 했지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노움이 나서서 만류했다.
시박을 향해 음흉한 미소를 지은 채.
시박은 바닥에 널브러진 아미의 육신을 바라봤다.
다행히 누가 땅속에 묻지는 않아 소생시킬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시박은 아미의 육신을 이리저리 훑어봤다.
“역시 그놈은 돌팔이였어.”
시박이 아미의 뒤통수 부근을 보더니 혀를 찼다.
필시 삼혼의 의식을 치른 게 아니었다. 삶이 남아 있음에도 강제로 영혼을 육체에서 뜯어낸 것이 분명했다.
그 증거로 목덜미 뒤에 보이는 불그스름한 화상 자국이 선명했다.
“홀홀.”
“앗 변태 할배다!”
시박은 집 안으로 들어온 노움을 바라봤다.
얼굴을 보니 괜히 짜증이 올랐는데 마침 아미의 육신을 옮길 심부름꾼이 필요했다.
시박이 턱짓으로 신호를 하자 용케 노움이 웃음소리를 높이며 아미의 육신을 나무 침대에 옮겼다.
“홀홀, 홀홀홀.”
“암소 짝짓기 하는 소리 내고 있네. 방해되니까 밖에 나가 있어.”
시박의 냉랭한 말에 노움이 충격 받은 듯 인상을 찌푸렸다.
노움이 아미에게 다가가 무언가 열심히 설명했다.
“으응…… 알았어. 언니, 변태가 칭찬해 달라는데? 머리 쓰다듬어 달래.”
노움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박이에게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시박은 애써 노움을 무시했다.
문득 자신이 염라대왕에게 고개를 내밀었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빨리 몸속으로 들어가기나 해라.”
“어떻게 들어가야 하는데?”
“천 년 묵은 구렁이가 똥구멍에 불붙어 냇가에 뛰어들듯.”
“구렁이? 음음, 너무 어려워. 다시 알려 줘라, 언니.”
“이덕춘이 꾀병을 빙자해 춘화 보다 들켜 자는 척하듯.”
“이덕춘이 누구야, 언니야?”
아미를 바라보는 시박의 얼굴이 기괴해졌다.
분명 이 꼬마가 날 놀리는 것이다.
한 대만 쥐어박을까. 하지만 꼬마에게 화를 내는 것도 우스웠다. 이 도령과 여러모로 다르게 생각하는 시박이었다.
“그냥 네 몸뚱이 위에 누워!”
“응!”
아미가 어색한 듯 자신의 육체 위로 조심스레 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