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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8화 데바의 팔찌(2)
신전으로 들어선 시박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팔뚝에 좁쌀만 한 돌기까지 난 것이 중원에 있었을 적 영기가 충만한 혼백을 마주했을 때 이는 현상이었다.
‘호오, 정말로 신의 영향을 받는 곳인가? 제법 선기가 충만하게 느껴지는 곳이네.’
시박의 걸음이 마당에 닿자 수련생들로 보이는 프리스트가 눈에 띄었다. 대체로 열다섯 전후로 보이는 소년들이었는데 모두가 카샘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고것 참 인사성 하나는 밝은 아이들이네.”
“당신에게 하는 거 아닙니다.”
“나도 그 정도는 알아.”
시박이 카샘의 말을 정면으로 받아쳤다.
그 모습에 소년들이 하나같이 놀란 얼굴로 변했다.
“우와. 카샘 님에게 말대답했어.”
“저 사람이 소문의 김시박인가 봐.”
여기저기서 새어 나오는 쑥덕거림에 카샘의 얼굴은 또 한 번 벌게졌다.
카샘의 뜨거운 눈빛에 시박은 뻔뻔하게 정면을 응시했다.
팔짱까지 끼고 있으니 누가 보면 꼭 떼인 돈 받으러 온 고리대금업자로 착각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어서 손님 받으라고 전해라.”
“하이 프리스트님, 손님 오셨…… 이놈이 정말! 여기는 신전이다 예의를 갖추지 못할까!”
신전에 오자 말투가 급속도로 바뀌는 카샘이었다.
시박은 카샘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개의 습성 같은 거로군.”
“개, 개?”
“떠돌이 개도 잡아다가 일주일만 밥 먹이면 그곳이 자신의 집인 줄 착각한다. 밖에서는 제대로 짖지도 못하는 게 집에서는 손님이 오면 왕왕 하고 짖어 대지. 여러 경우가 있지만 이번에는 자신에게 밥 주는 주인을 믿고 짖어 대는 것 같군.”
“허, 허…… 너 이 개새…….”
카샘의 입술이 칼날에 꿰매지듯 다물어졌다.
지금껏 한낱 장사치로만 생각했던 시박이었다.
그런 시박이의 몸이 갑자기 산을 마주하기라도 한 것처럼 거대하게 보였다.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단 하나다.”
“하…… 하이…… 프리스…….”
“네놈이 말한 신탁에 관심이 있어서다.”
카샘이 기어코 주저앉아 버렸다.
시박이 그런 카샘에게 다가가 멱살을 쥐어 잡으려 할 때였다.
“자네가 소문의 이방인인가?”
제법 노년의 중후함이 깃든 목소리였다.
소년들이 카샘을 봤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절도 있는 동작을 행했다.
그 마지막은 누가 머리에 땅이 먼저 닿나 시합하는 모습이었다.
시박은 정신 차리라는 듯 카샘의 뺨을 한 대 툭 치며 뒤돌아봤다.
“네가 하이 프리스트냐?”
시박이의 말을 받은 노인은, 얼굴에 미소를 띠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눈에 봐도 여기저기 돈으로 치장한 옷차림이었다.
마치 내가 집단의 우두머리요 하는 차림새랄까, 명색이 신을 모신다는 자가 금으로 된 목걸이를 둘렀다는 것에 시박은 헛웃음이 나왔다.
“그렇소. 말로만 듣던 수석 요리사를 직접 보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하이 프리스트는 진심으로 시박이를 환영했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행실은 크게 중요치 않았다. 그들이 시박을 억지로라도 선교하려고 했던 목적은 시박마차로 새는 돈 하나였다.
신전으로 왔다는 것 자체가 운명의 신 데바의 교리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니 목적한 바를 다 이루면 그때 가서 내쳐도 큰 상관없었다.
“응? 근데 카샘, 자네는 왜 바닥에 주저앉아 있나?”
하이 프리스트의 말에도 카샘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렸다.
꼭 헛것이라도 본 것 같이 안색이 허연 게 장소가 병석이었다면 꽃이라도 하나 줬을 것이다.
‘카샘이 더위를 먹었나? 왜 귀여운 척을 하고 있는 거지?’
방금 전 상황을 보지 못한 하이 프리스트였다.
‘그나저나 넋 나간 카샘을 정신 차리라고 뺨까지 때려 주다니, 신전의 막힌 돈줄은 확실히 풀리겠군.’
하이 프리스트는 시박이를 복덩이라도 된 마냥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것이 시박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는 행동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여기 있는 놈들은 죄다 실실 이빨 보이는 게 취미인가?”
“…….”
“아니면 남색을 밝히는 건가.”
“…….”
“무언은 긍정을 뜻하지.”
순식간에 남색을 밝히는 특수 종자가 된 하이 프리스트였다.
“하하, 농담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도록.”
농담이란 말에 하이 프리스트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자신에게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필시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역시 로난드의 끄나풀인가.’
정령은 보이지 않았지만 막무가내인 성격에서 알 수 있었다.
자고로 괴짜 밑에서는 괴짜밖에 나올 수 없지 않나?
시박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네놈이 신탁을 받을 수 있는 놈인가.”
“…….”
상황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할 말을 잃은 하이 프리스트에게 시박은 가차 없이 효과적인 주둥아리란 무엇인가를 보여 줬다.
“이게 굼벵이 고기를 삶아먹었나. 왜 이렇게 반응이 느려.”
“…….”
“뭐야. 지금 좀 늙었다고 가는 귀 먹은 거야?”
“…….”
“늘그막에 북망산 한번 제대로 오르고 싶어?”
북망산(北邙山).
북망산은 명을 다해 죽은 자들이 묻히는 곳으로, 하남성 낙양 땅에 있는 산으로 그 음산함과 공동묘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하이 프리스트는 이 생소한 단어에 알 수 없는 공포를 느껴야 했다. 시박은 연거푸 북망산을 들먹이며 하이 프리스트를 압박했다.
‘이놈…… 카샘에게 선교된 것이 아니란 말인가?’
아무리 괴짜라 한들 자신에게 짝다리까지 짚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분위기는 또 꼭 자신을 한 대 칠 기세 아닌가.
“하, 하이 프리스트님…….”
카샘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는 하이 프리스트가 구세주라도 되는 양 구원의 눈길을 보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하이 프리스트의 싸늘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카샘은 부리나케 그에게 달려갔다.
그러고는 주인에게 하소연하는 강아지처럼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속삭였는데 그것이 마치 밥 달라고 낑낑대는 강아지 꼴이었다.
“선교…… 된 것이 아니었군.”
“면목 없습니다.”
“염라대왕이란 사이비 신의 광신도이고.”
하이 프리스트는 시박이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래도 명색이 한 곳의 지도자인지라 카샘처럼 쉽게 폭언을 일삼거나 하지는 않았다.
‘한 가지에 미칠 수 있는 것만큼 탐나는 것도 없지. 특히 그것이 사이비를 믿는 광신도라면.’
하이 프리스트는 아직 프리스트라 불리지 못하는 여러 수련생들을 바라봤다.
여기서 무엇 하나라도 실수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 자신에게 보내는 저 존경 어린 눈빛이 십 년, 이십 년이 넘도록 유지돼 자신에게 돈을 벌어다 줄 것이다.
하이 프리스트는 큰 결심을 한 듯 입을 열었다.
“허허, 카샘 자네가 아직 수양이 부족한가 보이.”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이 프리스트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돌아왔다.
“아무리 사이비에 빠진 신자라 한들 그들까지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게 우리의 운명일세. 그것이 운명의 신 데바 님의 뜻이기도 하고.”
시박은 하이 프리스트를 보고 자신이 잡아들였던 녹림의 산적 두목 이봉수(利鋒輸)가 생각났다.
그는 산적 두목답지 않게 화술을 좋아했다.
적이 말로 도발을 하면 무턱 대고 칼을 빼 들기보다 그것이 억지든 억지가 아니든 똑같이 말로 제압했다.
특히나 아랫것들 앞에서는 말이다.
시박이 잡으러 왔을 때도 두려움에 도망치지 않고 어설프게 성인군자 흉내 내며 돌려보내려 하지 않았던가.
‘여기는 왜 이렇게 별난 종자들이 많은 거지?’
생각해 보니 눈을 뜬 순간부터 괴상한 일의 연속이었다.
정신 나간 저승차사 발레포르, 자신을 무서워하지 않는 꼬마, 괴상한 잡귀스러운 정령, 이상한 영감탱이, 덜떨어진 자객, 염라대왕을 사이비라 하는 신도…….
“그래, 자네의 나이는 올해 몇인가?”
하이 프리스트는 한껏 부드럽게 말했다.
그 꿍꿍이는 카샘이 못한 선교를 자신이 해 보겠다는 속셈이었다.
“어르신에게 나이를 물어볼 때는 연세라 하는 거다, 아가야.”
“허허. 자네가 농을 좋아하는지는 내 미처 몰랐네. 새파랗…… 아니, 이제 갓 스물이 넘었을 법한 자네가 연세라니. 나이를 밝히기 싫다면 더 이상 묻지는 않겠네.”
하이 프리스트의 넉살에 수련생들이 감탄사를 뱉어 냈다.
역시 자신들의 수장답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에 대한 존경심이었다.
시박은…… 피식 웃었다.
시박이는 정말로 자신의 나이를 몰랐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저승 생활만 무려 1000년이 넘었다.
1000살이 되는 해, 더 이상 나이를 세는 것도 고역 아닌 고역으로 다가왔다.
나이가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겉모습도 바뀌어야 하는데 죽은 몸이 늙을 리 만무했다.
괜한 헛짓거리 같은 생각에 포기한 지가 언제인지도 몰랐다.
‘스무 살짜리 내 모습이 이곳에 와서는 오해만 만드는군.’
시박은 혼자 열변을 토하는 하이 프리스트의 말에 다시 귀 기울였다.
“……까지가 데바 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일세. 아마 자네가 믿는 염라대왕이란 신은 데바 님의 역사에서 파생된 것이거나 일부 다른 신들의 교리를 짜깁기 한 걸세.”
시박은 귀찮다는 듯 하이 프리스트 말에 동조를 해 줬다.
즉, 고개를 세 번 끄덕여 줬다는 것이다.
“역시 자네는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네가 신탁을 받을 수 있는 애냐?”
“…….”
결과는 행동과 말이 상극을 이뤘지만.
화를 낼 법도 한데 하이 프리스트는 뭔가 꼬투리를 잡았는지 밝은 목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자네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구만.”
“하, 하이 프리스트님?”
카샘이 불안한 듯 하이 프리스트를 바라봤다.
그는 하이 프리스트의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생각했다.
하지만 하이 프리스트는 카샘의 등까지 두드리며 좋아했다.
“카샘, 자네도 아직 한참 멀었네. 멀었어.”
“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한 번만 다시 생각해 보세나.”
“뭐를 말씀입니까?”
“저자는 염라대왕이란 신을 믿는 광신도가 아닌가?”
“그, 그렇죠.”
“그런 자가 신탁 때문에 우리 위대한 데바 님을 모시는 신전에 찾아오다니 우스운 일이 아닌가. 후후.”
“뭐가 우스운…….”
“쯧쯧.”
하이 프리스트는 딱하다는 듯 혀를 찼다.
“시박이 믿는 신이 정말 있다면 자연스레 신전이 있을 테고 거기서 신탁을 받으면 될 터인데 왜 굳이 남의 신전에 왔냐는 말이야.”
카샘의 얼굴이 그제야 밝아졌다.
“사이비 신을 믿으니 신탁을 받지 못하는 거군요!”
“그렇지.”
“그 말인즉 염란가 왕인가 하는 건 없다는 것이고!”
“더 이상 말해 뭐 하는가. 입만 아프지.”
“푸하하! 역시 하이 프리스트님이십니다!”
신전 밖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언뜻 들어서는 언성이 높은 게 뭔가 문제가 있어 보였다.
“무슨 일이지?”
카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련생 하나가 급히 마당으로 뛰어 들어왔다.
“하, 하이 프리스트님!”
“무슨 일이냐?”
“주, 주민들이 갑자기 몰려와 김시박이란 자를 보고 싶다 억지를 부리고 있습니다!”
하이 프리스트는 별일이라는 듯 물었다.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 데바 신전은 언제, 어느 때라도 열려 있으니 막아설 이유가 없지 않은가. 어서 들어오게끔 하거라.”
“그, 그게…….”
수련생은 곤란하다는 듯이 말을 머뭇거렸다.
“괜찮다. 말해 보아라.”
“사, 사람들의 수가 아무리 어림잡아 봐도 신전이 모두 수용하기가 어렵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모두 한 번에 들어오기를 원하…….”
수련생은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바깥의 웅성거림이 바로 자신의 뒤에서 들려왔기 때문이다.
“시박이다!”
“오오, 하이 프리스트님도 계셔!”
“앗, 잠깐. 맨 뒤에 수비대장 로난드가 있다!”
한동안 신전에서는 제어하지 못할 소란스러움이 계속됐다.
8화 데바의 팔찌(2)
신전으로 들어선 시박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팔뚝에 좁쌀만 한 돌기까지 난 것이 중원에 있었을 적 영기가 충만한 혼백을 마주했을 때 이는 현상이었다.
‘호오, 정말로 신의 영향을 받는 곳인가? 제법 선기가 충만하게 느껴지는 곳이네.’
시박의 걸음이 마당에 닿자 수련생들로 보이는 프리스트가 눈에 띄었다. 대체로 열다섯 전후로 보이는 소년들이었는데 모두가 카샘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고것 참 인사성 하나는 밝은 아이들이네.”
“당신에게 하는 거 아닙니다.”
“나도 그 정도는 알아.”
시박이 카샘의 말을 정면으로 받아쳤다.
그 모습에 소년들이 하나같이 놀란 얼굴로 변했다.
“우와. 카샘 님에게 말대답했어.”
“저 사람이 소문의 김시박인가 봐.”
여기저기서 새어 나오는 쑥덕거림에 카샘의 얼굴은 또 한 번 벌게졌다.
카샘의 뜨거운 눈빛에 시박은 뻔뻔하게 정면을 응시했다.
팔짱까지 끼고 있으니 누가 보면 꼭 떼인 돈 받으러 온 고리대금업자로 착각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어서 손님 받으라고 전해라.”
“하이 프리스트님, 손님 오셨…… 이놈이 정말! 여기는 신전이다 예의를 갖추지 못할까!”
신전에 오자 말투가 급속도로 바뀌는 카샘이었다.
시박은 카샘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개의 습성 같은 거로군.”
“개, 개?”
“떠돌이 개도 잡아다가 일주일만 밥 먹이면 그곳이 자신의 집인 줄 착각한다. 밖에서는 제대로 짖지도 못하는 게 집에서는 손님이 오면 왕왕 하고 짖어 대지. 여러 경우가 있지만 이번에는 자신에게 밥 주는 주인을 믿고 짖어 대는 것 같군.”
“허, 허…… 너 이 개새…….”
카샘의 입술이 칼날에 꿰매지듯 다물어졌다.
지금껏 한낱 장사치로만 생각했던 시박이었다.
그런 시박이의 몸이 갑자기 산을 마주하기라도 한 것처럼 거대하게 보였다.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단 하나다.”
“하…… 하이…… 프리스…….”
“네놈이 말한 신탁에 관심이 있어서다.”
카샘이 기어코 주저앉아 버렸다.
시박이 그런 카샘에게 다가가 멱살을 쥐어 잡으려 할 때였다.
“자네가 소문의 이방인인가?”
제법 노년의 중후함이 깃든 목소리였다.
소년들이 카샘을 봤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절도 있는 동작을 행했다.
그 마지막은 누가 머리에 땅이 먼저 닿나 시합하는 모습이었다.
시박은 정신 차리라는 듯 카샘의 뺨을 한 대 툭 치며 뒤돌아봤다.
“네가 하이 프리스트냐?”
시박이의 말을 받은 노인은, 얼굴에 미소를 띠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눈에 봐도 여기저기 돈으로 치장한 옷차림이었다.
마치 내가 집단의 우두머리요 하는 차림새랄까, 명색이 신을 모신다는 자가 금으로 된 목걸이를 둘렀다는 것에 시박은 헛웃음이 나왔다.
“그렇소. 말로만 듣던 수석 요리사를 직접 보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하이 프리스트는 진심으로 시박이를 환영했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행실은 크게 중요치 않았다. 그들이 시박을 억지로라도 선교하려고 했던 목적은 시박마차로 새는 돈 하나였다.
신전으로 왔다는 것 자체가 운명의 신 데바의 교리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니 목적한 바를 다 이루면 그때 가서 내쳐도 큰 상관없었다.
“응? 근데 카샘, 자네는 왜 바닥에 주저앉아 있나?”
하이 프리스트의 말에도 카샘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렸다.
꼭 헛것이라도 본 것 같이 안색이 허연 게 장소가 병석이었다면 꽃이라도 하나 줬을 것이다.
‘카샘이 더위를 먹었나? 왜 귀여운 척을 하고 있는 거지?’
방금 전 상황을 보지 못한 하이 프리스트였다.
‘그나저나 넋 나간 카샘을 정신 차리라고 뺨까지 때려 주다니, 신전의 막힌 돈줄은 확실히 풀리겠군.’
하이 프리스트는 시박이를 복덩이라도 된 마냥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것이 시박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는 행동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여기 있는 놈들은 죄다 실실 이빨 보이는 게 취미인가?”
“…….”
“아니면 남색을 밝히는 건가.”
“…….”
“무언은 긍정을 뜻하지.”
순식간에 남색을 밝히는 특수 종자가 된 하이 프리스트였다.
“하하, 농담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도록.”
농담이란 말에 하이 프리스트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자신에게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필시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역시 로난드의 끄나풀인가.’
정령은 보이지 않았지만 막무가내인 성격에서 알 수 있었다.
자고로 괴짜 밑에서는 괴짜밖에 나올 수 없지 않나?
시박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네놈이 신탁을 받을 수 있는 놈인가.”
“…….”
상황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할 말을 잃은 하이 프리스트에게 시박은 가차 없이 효과적인 주둥아리란 무엇인가를 보여 줬다.
“이게 굼벵이 고기를 삶아먹었나. 왜 이렇게 반응이 느려.”
“…….”
“뭐야. 지금 좀 늙었다고 가는 귀 먹은 거야?”
“…….”
“늘그막에 북망산 한번 제대로 오르고 싶어?”
북망산(北邙山).
북망산은 명을 다해 죽은 자들이 묻히는 곳으로, 하남성 낙양 땅에 있는 산으로 그 음산함과 공동묘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하이 프리스트는 이 생소한 단어에 알 수 없는 공포를 느껴야 했다. 시박은 연거푸 북망산을 들먹이며 하이 프리스트를 압박했다.
‘이놈…… 카샘에게 선교된 것이 아니란 말인가?’
아무리 괴짜라 한들 자신에게 짝다리까지 짚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분위기는 또 꼭 자신을 한 대 칠 기세 아닌가.
“하, 하이 프리스트님…….”
카샘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는 하이 프리스트가 구세주라도 되는 양 구원의 눈길을 보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하이 프리스트의 싸늘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카샘은 부리나케 그에게 달려갔다.
그러고는 주인에게 하소연하는 강아지처럼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속삭였는데 그것이 마치 밥 달라고 낑낑대는 강아지 꼴이었다.
“선교…… 된 것이 아니었군.”
“면목 없습니다.”
“염라대왕이란 사이비 신의 광신도이고.”
하이 프리스트는 시박이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래도 명색이 한 곳의 지도자인지라 카샘처럼 쉽게 폭언을 일삼거나 하지는 않았다.
‘한 가지에 미칠 수 있는 것만큼 탐나는 것도 없지. 특히 그것이 사이비를 믿는 광신도라면.’
하이 프리스트는 아직 프리스트라 불리지 못하는 여러 수련생들을 바라봤다.
여기서 무엇 하나라도 실수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 자신에게 보내는 저 존경 어린 눈빛이 십 년, 이십 년이 넘도록 유지돼 자신에게 돈을 벌어다 줄 것이다.
하이 프리스트는 큰 결심을 한 듯 입을 열었다.
“허허, 카샘 자네가 아직 수양이 부족한가 보이.”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이 프리스트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돌아왔다.
“아무리 사이비에 빠진 신자라 한들 그들까지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게 우리의 운명일세. 그것이 운명의 신 데바 님의 뜻이기도 하고.”
시박은 하이 프리스트를 보고 자신이 잡아들였던 녹림의 산적 두목 이봉수(利鋒輸)가 생각났다.
그는 산적 두목답지 않게 화술을 좋아했다.
적이 말로 도발을 하면 무턱 대고 칼을 빼 들기보다 그것이 억지든 억지가 아니든 똑같이 말로 제압했다.
특히나 아랫것들 앞에서는 말이다.
시박이 잡으러 왔을 때도 두려움에 도망치지 않고 어설프게 성인군자 흉내 내며 돌려보내려 하지 않았던가.
‘여기는 왜 이렇게 별난 종자들이 많은 거지?’
생각해 보니 눈을 뜬 순간부터 괴상한 일의 연속이었다.
정신 나간 저승차사 발레포르, 자신을 무서워하지 않는 꼬마, 괴상한 잡귀스러운 정령, 이상한 영감탱이, 덜떨어진 자객, 염라대왕을 사이비라 하는 신도…….
“그래, 자네의 나이는 올해 몇인가?”
하이 프리스트는 한껏 부드럽게 말했다.
그 꿍꿍이는 카샘이 못한 선교를 자신이 해 보겠다는 속셈이었다.
“어르신에게 나이를 물어볼 때는 연세라 하는 거다, 아가야.”
“허허. 자네가 농을 좋아하는지는 내 미처 몰랐네. 새파랗…… 아니, 이제 갓 스물이 넘었을 법한 자네가 연세라니. 나이를 밝히기 싫다면 더 이상 묻지는 않겠네.”
하이 프리스트의 넉살에 수련생들이 감탄사를 뱉어 냈다.
역시 자신들의 수장답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에 대한 존경심이었다.
시박은…… 피식 웃었다.
시박이는 정말로 자신의 나이를 몰랐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저승 생활만 무려 1000년이 넘었다.
1000살이 되는 해, 더 이상 나이를 세는 것도 고역 아닌 고역으로 다가왔다.
나이가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겉모습도 바뀌어야 하는데 죽은 몸이 늙을 리 만무했다.
괜한 헛짓거리 같은 생각에 포기한 지가 언제인지도 몰랐다.
‘스무 살짜리 내 모습이 이곳에 와서는 오해만 만드는군.’
시박은 혼자 열변을 토하는 하이 프리스트의 말에 다시 귀 기울였다.
“……까지가 데바 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일세. 아마 자네가 믿는 염라대왕이란 신은 데바 님의 역사에서 파생된 것이거나 일부 다른 신들의 교리를 짜깁기 한 걸세.”
시박은 귀찮다는 듯 하이 프리스트 말에 동조를 해 줬다.
즉, 고개를 세 번 끄덕여 줬다는 것이다.
“역시 자네는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네가 신탁을 받을 수 있는 애냐?”
“…….”
결과는 행동과 말이 상극을 이뤘지만.
화를 낼 법도 한데 하이 프리스트는 뭔가 꼬투리를 잡았는지 밝은 목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자네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구만.”
“하, 하이 프리스트님?”
카샘이 불안한 듯 하이 프리스트를 바라봤다.
그는 하이 프리스트의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생각했다.
하지만 하이 프리스트는 카샘의 등까지 두드리며 좋아했다.
“카샘, 자네도 아직 한참 멀었네. 멀었어.”
“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한 번만 다시 생각해 보세나.”
“뭐를 말씀입니까?”
“저자는 염라대왕이란 신을 믿는 광신도가 아닌가?”
“그, 그렇죠.”
“그런 자가 신탁 때문에 우리 위대한 데바 님을 모시는 신전에 찾아오다니 우스운 일이 아닌가. 후후.”
“뭐가 우스운…….”
“쯧쯧.”
하이 프리스트는 딱하다는 듯 혀를 찼다.
“시박이 믿는 신이 정말 있다면 자연스레 신전이 있을 테고 거기서 신탁을 받으면 될 터인데 왜 굳이 남의 신전에 왔냐는 말이야.”
카샘의 얼굴이 그제야 밝아졌다.
“사이비 신을 믿으니 신탁을 받지 못하는 거군요!”
“그렇지.”
“그 말인즉 염란가 왕인가 하는 건 없다는 것이고!”
“더 이상 말해 뭐 하는가. 입만 아프지.”
“푸하하! 역시 하이 프리스트님이십니다!”
신전 밖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언뜻 들어서는 언성이 높은 게 뭔가 문제가 있어 보였다.
“무슨 일이지?”
카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련생 하나가 급히 마당으로 뛰어 들어왔다.
“하, 하이 프리스트님!”
“무슨 일이냐?”
“주, 주민들이 갑자기 몰려와 김시박이란 자를 보고 싶다 억지를 부리고 있습니다!”
하이 프리스트는 별일이라는 듯 물었다.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 데바 신전은 언제, 어느 때라도 열려 있으니 막아설 이유가 없지 않은가. 어서 들어오게끔 하거라.”
“그, 그게…….”
수련생은 곤란하다는 듯이 말을 머뭇거렸다.
“괜찮다. 말해 보아라.”
“사, 사람들의 수가 아무리 어림잡아 봐도 신전이 모두 수용하기가 어렵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모두 한 번에 들어오기를 원하…….”
수련생은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바깥의 웅성거림이 바로 자신의 뒤에서 들려왔기 때문이다.
“시박이다!”
“오오, 하이 프리스트님도 계셔!”
“앗, 잠깐. 맨 뒤에 수비대장 로난드가 있다!”
한동안 신전에서는 제어하지 못할 소란스러움이 계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