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3화
이미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몸살을 앓듯이 한 사람을 사랑했고, 그 사랑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또 다른 사랑을 선택했다. 하지만 흘려보낸 시간이 무색하게 같은 사람과 같은 시험대에 놓이고 말았다.
“……다른 방법은 없어요?”
“다음 주가 고비야. 아쉽게도 다른 방법은 없어.”
겨우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자식 된 도리로서 부모의 어려움을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고비를 넘기고 회사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서린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가 싸늘하게 냉소했다.
“여전히 너는 이기적이야. 막다른 곳에 몰리면 늘 혼자 빠져나갈 곳을 마련해 놓으려 하지.”
그가 뭐라고 말해도 상관없다. 일정 부분 그의 말이 옳았지만, 여기에 오기까지 서린 역시 쉽지 않은 선택과 수많은 난관을 겪었고 이제야 겨우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지금의 평화로운 생활을 포기할 수 없었다.
“1년의 시간을 줄게요. 당신은 회사를 살리고 그토록 원하던 자리에 앉으세요. 그 후, 저는 이곳으로 다시 돌아와서 지금처럼 지낼 테니까. 그 이상은 저도 절대 양보 못 해요.”
창에서 흘러들어 온 아침 햇살 때문일까. 빛을 받은 검은 눈동자가 빨려 들듯이 강렬하다.
“좋아. 대신 최대한 빨리 짐을 챙겨. 네가 숨어 있던 이 끔찍한 땅에서, 한시도 허비하고 싶지 않으니까.”
출국 절차를 마치고 비행기 탑승구 앞에 선 서린이 곁에 서 있는 태인을 올려다보았다. 키가 크고 체격이 건장한 서양인 틈에 끼어 있어도 전혀 손색없는 완벽한 외모였지만, 다급하게 재촉하던 지난 이틀간의 일을 떠올리면 밉살스러워 얼굴조차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탑승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걸음을 옮기려던 서린이 뒤를 돌아보았다. 시간과 함께 익숙해지고 정이 든 곳이라 그런지, 좀처럼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문득 이곳 프랑스에 도착하던 날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떠도는 공기마저 생경하게 느껴지던 낯선 땅, 그리고 낯모르는 사람들의 시선. 오로지 의지할 것이라곤 마주 잡은 윤우의 따스한 손밖에 없었다.
연민이 사랑으로 변하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죄어 오던, 뜨겁게 몸이 달아오르던 사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사랑이라 믿고 싶었다.
“어서 들어가자.”
태인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다시 재촉했다.
“……윤우에게 간다는 연락을 못 했어요.”
“내가 직접 연락할 테니까, 앞으로 차윤우라는 이름은 입에 담지도 마.”
“매사 이렇게 강압적이에요? 마치 제가 기억하는 사람이 아닌 거 같아요.”
“만약 내가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면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너 때문일 거야. 너를 찾느라 5년을 헤매었어. 네 소식을 듣자마자, 모든 걸 다 제쳐 두고 정신없이 비행기를 탔다고. 이런 내 앞에서 차윤우를 걱정해? 걸음조차 떼지 못하는 너를 언제까지 이렇게 지켜봐야 하느냐고!”
“왜 이렇게 발끈해요. 내 말은…….”
이렇게까지 화를 내다니, 예전의 태인 같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주변의 시선이 모이자, 서린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비행기에 탑승한 후 그가 일등석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이륙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고 비행기가 천천히 활주로를 향해 선회했다. 마침내 비행기가 미끄러지듯 하늘로 날아오르자, 비로소 한국으로 간다는 사실이 실감 나는 현실로 다가왔다.
“긴 비행시간에 지루할 거야. 잠시 좀 눈이라도 붙여.”
비행기가 활주로를 벗어났다. 승객의 안전을 위한 안내 방송과 기내 서비스가 이어졌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기내를 밝히던 밝은 조명이 꺼졌다. 곁에 앉은 태인이 담요를 꺼내서 그녀의 무릎에 덮어 주었다. 어딘가 안도한 듯 편안해 보이는 표정을 보니, 내내 날카롭게 곤두서 있던 신경이 차츰 누그러졌다.
“어쩐지 잠이 오지 않을 거 같아요.”
“와인이라도 좀 달라 할까?”
오랜만에 들어 보는 다정한 목소리에 서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지나가는 승무원을 불러서 와인과 간단한 안주를 주문했다.
잠시 후, 서린은 그가 따라 준 와인을 홀짝이며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마르세유의 밤을 내려다보았다. 온갖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자유를 찾아 이 낯선 땅에 발을 들여놓았던 그때처럼, 1년 후, 다시 이 땅을 밟을 수 있을까. 막연한 두려움이 몰려와서 자신도 모르게 잠시 몸을 움츠렸던 모양이다. 그가 여분의 담요까지 꺼내어 어깨에 덮어 주고 의자 손잡이 위에 놓인 그녀의 손을 끌어다가 모양 좋은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이제야 겨우 잡았어.”
태인이 멀어지는 육지의 밤을 응시하며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또다시 불안감이 엄습했다. 초조한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서린이 떨리는 손으로 와인 잔을 집어 들었다.
“1년 후에 다시 돌아올 거예요.”
얼음장처럼 차가운 시선이 돌아왔다. 서린 역시 시선을 피하지 않고 응시했다.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그가 입술 끝을 말아 올렸지만, 차가운 눈동자엔 조금의 웃음기도 묻어나지 않았다.
잠시 후, 그가 서린을 향해 잔을 들어 올렸다.
“자, 건배하자.”
달칵하며 잔 부딪치는 소리가 고요한 기내를 울렸다. 그가 와인 잔을 입술에 가져다 댄 채로 서린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느리게 넘어가는 액체만큼이나 나른한 눈빛이 빨려 들듯 강렬하다.
“삶은 우리를 위해 늘 뜻밖의 선물을 준비하고는 하지. 그것이 불행이든, 행복이든…….”
내리뜬 눈꺼풀이 만든 그림자가 흐린 조명 불빛을 받아서 잘게 요동쳤다. 캔버스를 휘젓는 붓처럼 서린의 눈동자가 남자다운 얼굴선을 천천히 따라갔다.
“함께하면 불행하고 떨어져서야 행복하다면, 나는 차라리 함께하는 불행을 선택할 거야. 하지만 너는 나와 다른 선택을 하겠지?”
“……아마 그럴 테죠.”
습관보다 무서운 것이 있을까. 탐욕스러운 눈은 아름다움에 열광한다. 객관을 주관화시키고 금지된 것을 욕망하게 한다. 눈에 보이는 대상은 저마다 제 고유의 이미지와 색채를 지니고 있다. 사람 역시 마찬가지였다.
회화를 전공한 서린은 대상 특유의 이미지와 개성을 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관찰자의 시선으로 본 태인은 잡것이 섞이지 않는 순수한 흑색이며, 칠흑처럼 어두운 밤이며, 야생의 재규어이며, 맹렬하게 이글대는 태양이었다.
북극해에서 보았던 오로라의 강렬한 색채를 캔버스에 담고 싶어 했듯이, 한때는 그의 존재가 주는 이미지를 색채로 담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를 떠올리면 까닭도 없이 늘 숨이 차올랐다. 하지만 신열처럼 올라오던 감정에 몸 달아 하던 앳된 소녀는 이제 세상을 아는 어른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더는 달콤한 동화를 믿지 않았다.
와인을 연거푸 마신 탓인지 갑자기 졸음이 몰려왔다.
서린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눈을 뜨지 않아도 따갑게 느껴지는 시선 때문일까, 그를 처음 만났던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세상은 그녀에게 관대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부러워했다. 미완으로 남은 캔버스의 빛깔처럼 짙푸르고 찬란한 세상. 그것이 그녀가 아는 세상이고 삶이었다. 그녀의 세상은 지나칠 만큼 순탄하고 활기찼으며 또한 눈부시게 빛났다. 강태인.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1. 열여덟의 하서린, 스물셋의 강태인
“전국 수석에 K대를 다니는 수재라도 영 내키지 않아.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것이나 시장통에서 식당 한다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
서린은 발소리를 한껏 죽이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어머니 박 여사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흠칫 놀라 벽에 몸을 기대었다.
“회장님께서 사람 보는 눈이 대단하시잖아요. 재단 장학생 중에서 가장 특출하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시던데요.”
비서 정연이 박 여사 앞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역시나 눈치 빠른 그녀답게, 계단 벽에 껌딱지처럼 붙어 있는 서린을 발견하고 어서 방으로 돌아가라는 듯 눈짓을 보내왔다. 그러나 모처럼 주말인데, 방에 처박혀 따분한 공부만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근본이 어디 가겠니. 사람을 집으로 들이는 일인데 신중해야지. 그리고 서린이 성격이 좀 극성맞아야지. 베테랑 선생들도 한 달을 못 견디고 발길을 끊는데, 과외 경험도 없는 학생이 그 애를 어떻게 감당하겠어.”
서린이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과외 선생이 못 견디고 발길을 끊는 건 자신 때문이 아니라 까탈스러운 성미를 지닌 어머니, 박 여사 때문이었다. 과외 선생님이 공부만 잘 가르치면 되지,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고 식당을 운영하는 게 무슨 흠이 되겠는가.
“일단 시간을 두고 지켜보세요. 혹시 알아요. 좋은 선생을 만나 서린이 성적이 쑥쑥 오를는지.”
“하긴, 하는 데까지 해 봐야지 어쩌겠어.”
박 여사가 한숨을 푹 내쉬는 것과 동시에 서린의 손에 들린 휴대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약속 시각을 삼십여 분이나 넘긴 탓에 친구들이 참지 못하고 전화를 한 모양이다.
휴대 전화를 틀어쥔 서린이 계단을 후다닥 뛰어 내려갔다. 어머니의 잔소리가 두렵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학수고대하던 대니얼 콘서트에 늦을까 마음이 급해졌기 때문이다.
“하서린!”
날카로운 하이 톤의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죄송! 용무가 몹시 급해서요!”
현관으로 냅다 뛰어나간 그녀가 정원을 가로질러 돌계단을 내려갔다. 마당을 뛰어놀던 강아지 한솔이가 놀라서 집 안으로 뛰어들자, 흙먼지를 못 참아 하는 박 여사가 질색하며 현관문 옆으로 비켜섰다.
“정연아! 쟤 좀 잡아.”
박 여사의 히스테릭한 반응에 정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가 멀다고 신경전을 벌이는 모녀의 싸움에 지친 탓이었다.
“놔두세요. 밤새워서 겨우 산 암표래요.”
서린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문을 열어젖혔다. 순간, 대문 밖을 서성이던 누군가와 몸이 세게 부딪쳤다.
“아야!”
낯설지만, 단단한 손이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몸을 붙잡았다. 겨우 몸을 추스른 서린이 위를 올려다보자,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장신의 키에 보기 드물 정도로 훤칠한 미남이지만, 입고 있는 차림은 유행이 지난 허름한 인상을 주는 옷이었다.
비록 낡긴 했지만, 붉은색과 녹색이 어우러진 체크 남방에서 그 빛깔에 어울리는 푸릇한 풀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어색해하는 표정이나 허름한 차림을 보니 전단을 돌리는 알바생으로 보였다.
“대문 앞에 전단 붙이면 큰일 나요. 이 집 아줌마가 워낙 성미가 지랄맞아서 회사까지 찾아서 항의한다니까요.”
매번 전단을 붙이고 달아나는 아르바이트와 박 여사의 신경전은 대단했다. 혹시라도 전단 알바가 수난을 치를까 볼 때마다 전단을 떼지만, 모처럼 얼굴을 보았으니 돌아가는 상황까지는 알려야 했다.
“아르바이트 때문에 왔지만, 전단 아르바이트는 아닙니다.”
깍듯한 말투와 깊고 낮은 음성이 인상적이다. 어울리는 또래 남자 친구와는 다른 느낌. 겉멋이 든 녀석들에 비하면 레벨 차이가 확실했다. 그러나 서린이 최근 열성적으로 쫓아다니는 아이돌, 대니얼보다는……. 품평하듯 아래위로 그를 훑던 서린이 엄지를 척 하고 들어 올렸다. 차림새는 그렇지만 생김새만은 대니얼 이상이었다. 사실 대니얼은 거의 성형발이니까.
“혹시 전국 수석의 K대생?”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과외 선생님을 전단 알바로 착각하다니, 태도가 돌변한 서린이 그의 팔에 매달리며 특유의 눈웃음을 지었다.
“쌤, 제가 저 골목길 끝으로 사라지면 그때 벨을 누르세요. 그 전에 누르시면 절대 안 돼요.”
어딘가 혼란스러워 보이는 그의 팔을 내려놓은 그녀가 천천히 뒷걸음쳤다. 후미진 곳, 모퉁이 담벼락에 바짝 붙어서 서린을 향해 손짓하는 친구들을 발견하자, 서린은 한걸음에 그들에게로 달려갔다. 떠들썩하게 서린을 맞이하며 친구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왜 이제 나와. 한참 기다렸잖아.”
“나오다가 딱 걸렸어.”
“빨리 가자.”
친구들의 손에 이끌려서 큰길로 나가려던 서린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당부를 잊지 않고 벨을 누르지 않은 채 끝까지 기다려 준 그가 고마워서일까, 대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그를 보고 있으니 까닭도 없이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다.
서린이 우뚝 선 채로 두 손을 머리 위로 모아 크게 하트를 그려 보였다.
“쌤! 고마워요. 그리고 사랑해요!”
골목이 떠내려가라 크게 소리치자, 그가 당황한 기색으로 시선을 피했다.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서 과외를 받을까.’ 문득 자신답지 않은 망상에 사로잡혔지만, 이내 친구들의 성화에 못 이겨 발걸음을 돌렸다.
이미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몸살을 앓듯이 한 사람을 사랑했고, 그 사랑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또 다른 사랑을 선택했다. 하지만 흘려보낸 시간이 무색하게 같은 사람과 같은 시험대에 놓이고 말았다.
“……다른 방법은 없어요?”
“다음 주가 고비야. 아쉽게도 다른 방법은 없어.”
겨우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자식 된 도리로서 부모의 어려움을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고비를 넘기고 회사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서린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가 싸늘하게 냉소했다.
“여전히 너는 이기적이야. 막다른 곳에 몰리면 늘 혼자 빠져나갈 곳을 마련해 놓으려 하지.”
그가 뭐라고 말해도 상관없다. 일정 부분 그의 말이 옳았지만, 여기에 오기까지 서린 역시 쉽지 않은 선택과 수많은 난관을 겪었고 이제야 겨우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지금의 평화로운 생활을 포기할 수 없었다.
“1년의 시간을 줄게요. 당신은 회사를 살리고 그토록 원하던 자리에 앉으세요. 그 후, 저는 이곳으로 다시 돌아와서 지금처럼 지낼 테니까. 그 이상은 저도 절대 양보 못 해요.”
창에서 흘러들어 온 아침 햇살 때문일까. 빛을 받은 검은 눈동자가 빨려 들듯이 강렬하다.
“좋아. 대신 최대한 빨리 짐을 챙겨. 네가 숨어 있던 이 끔찍한 땅에서, 한시도 허비하고 싶지 않으니까.”
출국 절차를 마치고 비행기 탑승구 앞에 선 서린이 곁에 서 있는 태인을 올려다보았다. 키가 크고 체격이 건장한 서양인 틈에 끼어 있어도 전혀 손색없는 완벽한 외모였지만, 다급하게 재촉하던 지난 이틀간의 일을 떠올리면 밉살스러워 얼굴조차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탑승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걸음을 옮기려던 서린이 뒤를 돌아보았다. 시간과 함께 익숙해지고 정이 든 곳이라 그런지, 좀처럼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문득 이곳 프랑스에 도착하던 날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떠도는 공기마저 생경하게 느껴지던 낯선 땅, 그리고 낯모르는 사람들의 시선. 오로지 의지할 것이라곤 마주 잡은 윤우의 따스한 손밖에 없었다.
연민이 사랑으로 변하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죄어 오던, 뜨겁게 몸이 달아오르던 사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사랑이라 믿고 싶었다.
“어서 들어가자.”
태인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다시 재촉했다.
“……윤우에게 간다는 연락을 못 했어요.”
“내가 직접 연락할 테니까, 앞으로 차윤우라는 이름은 입에 담지도 마.”
“매사 이렇게 강압적이에요? 마치 제가 기억하는 사람이 아닌 거 같아요.”
“만약 내가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면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너 때문일 거야. 너를 찾느라 5년을 헤매었어. 네 소식을 듣자마자, 모든 걸 다 제쳐 두고 정신없이 비행기를 탔다고. 이런 내 앞에서 차윤우를 걱정해? 걸음조차 떼지 못하는 너를 언제까지 이렇게 지켜봐야 하느냐고!”
“왜 이렇게 발끈해요. 내 말은…….”
이렇게까지 화를 내다니, 예전의 태인 같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주변의 시선이 모이자, 서린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비행기에 탑승한 후 그가 일등석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이륙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고 비행기가 천천히 활주로를 향해 선회했다. 마침내 비행기가 미끄러지듯 하늘로 날아오르자, 비로소 한국으로 간다는 사실이 실감 나는 현실로 다가왔다.
“긴 비행시간에 지루할 거야. 잠시 좀 눈이라도 붙여.”
비행기가 활주로를 벗어났다. 승객의 안전을 위한 안내 방송과 기내 서비스가 이어졌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기내를 밝히던 밝은 조명이 꺼졌다. 곁에 앉은 태인이 담요를 꺼내서 그녀의 무릎에 덮어 주었다. 어딘가 안도한 듯 편안해 보이는 표정을 보니, 내내 날카롭게 곤두서 있던 신경이 차츰 누그러졌다.
“어쩐지 잠이 오지 않을 거 같아요.”
“와인이라도 좀 달라 할까?”
오랜만에 들어 보는 다정한 목소리에 서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지나가는 승무원을 불러서 와인과 간단한 안주를 주문했다.
잠시 후, 서린은 그가 따라 준 와인을 홀짝이며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마르세유의 밤을 내려다보았다. 온갖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자유를 찾아 이 낯선 땅에 발을 들여놓았던 그때처럼, 1년 후, 다시 이 땅을 밟을 수 있을까. 막연한 두려움이 몰려와서 자신도 모르게 잠시 몸을 움츠렸던 모양이다. 그가 여분의 담요까지 꺼내어 어깨에 덮어 주고 의자 손잡이 위에 놓인 그녀의 손을 끌어다가 모양 좋은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이제야 겨우 잡았어.”
태인이 멀어지는 육지의 밤을 응시하며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또다시 불안감이 엄습했다. 초조한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서린이 떨리는 손으로 와인 잔을 집어 들었다.
“1년 후에 다시 돌아올 거예요.”
얼음장처럼 차가운 시선이 돌아왔다. 서린 역시 시선을 피하지 않고 응시했다.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그가 입술 끝을 말아 올렸지만, 차가운 눈동자엔 조금의 웃음기도 묻어나지 않았다.
잠시 후, 그가 서린을 향해 잔을 들어 올렸다.
“자, 건배하자.”
달칵하며 잔 부딪치는 소리가 고요한 기내를 울렸다. 그가 와인 잔을 입술에 가져다 댄 채로 서린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느리게 넘어가는 액체만큼이나 나른한 눈빛이 빨려 들듯 강렬하다.
“삶은 우리를 위해 늘 뜻밖의 선물을 준비하고는 하지. 그것이 불행이든, 행복이든…….”
내리뜬 눈꺼풀이 만든 그림자가 흐린 조명 불빛을 받아서 잘게 요동쳤다. 캔버스를 휘젓는 붓처럼 서린의 눈동자가 남자다운 얼굴선을 천천히 따라갔다.
“함께하면 불행하고 떨어져서야 행복하다면, 나는 차라리 함께하는 불행을 선택할 거야. 하지만 너는 나와 다른 선택을 하겠지?”
“……아마 그럴 테죠.”
습관보다 무서운 것이 있을까. 탐욕스러운 눈은 아름다움에 열광한다. 객관을 주관화시키고 금지된 것을 욕망하게 한다. 눈에 보이는 대상은 저마다 제 고유의 이미지와 색채를 지니고 있다. 사람 역시 마찬가지였다.
회화를 전공한 서린은 대상 특유의 이미지와 개성을 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관찰자의 시선으로 본 태인은 잡것이 섞이지 않는 순수한 흑색이며, 칠흑처럼 어두운 밤이며, 야생의 재규어이며, 맹렬하게 이글대는 태양이었다.
북극해에서 보았던 오로라의 강렬한 색채를 캔버스에 담고 싶어 했듯이, 한때는 그의 존재가 주는 이미지를 색채로 담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를 떠올리면 까닭도 없이 늘 숨이 차올랐다. 하지만 신열처럼 올라오던 감정에 몸 달아 하던 앳된 소녀는 이제 세상을 아는 어른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더는 달콤한 동화를 믿지 않았다.
와인을 연거푸 마신 탓인지 갑자기 졸음이 몰려왔다.
서린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눈을 뜨지 않아도 따갑게 느껴지는 시선 때문일까, 그를 처음 만났던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세상은 그녀에게 관대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부러워했다. 미완으로 남은 캔버스의 빛깔처럼 짙푸르고 찬란한 세상. 그것이 그녀가 아는 세상이고 삶이었다. 그녀의 세상은 지나칠 만큼 순탄하고 활기찼으며 또한 눈부시게 빛났다. 강태인.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1. 열여덟의 하서린, 스물셋의 강태인
“전국 수석에 K대를 다니는 수재라도 영 내키지 않아.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것이나 시장통에서 식당 한다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
서린은 발소리를 한껏 죽이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어머니 박 여사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흠칫 놀라 벽에 몸을 기대었다.
“회장님께서 사람 보는 눈이 대단하시잖아요. 재단 장학생 중에서 가장 특출하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시던데요.”
비서 정연이 박 여사 앞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역시나 눈치 빠른 그녀답게, 계단 벽에 껌딱지처럼 붙어 있는 서린을 발견하고 어서 방으로 돌아가라는 듯 눈짓을 보내왔다. 그러나 모처럼 주말인데, 방에 처박혀 따분한 공부만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근본이 어디 가겠니. 사람을 집으로 들이는 일인데 신중해야지. 그리고 서린이 성격이 좀 극성맞아야지. 베테랑 선생들도 한 달을 못 견디고 발길을 끊는데, 과외 경험도 없는 학생이 그 애를 어떻게 감당하겠어.”
서린이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과외 선생이 못 견디고 발길을 끊는 건 자신 때문이 아니라 까탈스러운 성미를 지닌 어머니, 박 여사 때문이었다. 과외 선생님이 공부만 잘 가르치면 되지,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고 식당을 운영하는 게 무슨 흠이 되겠는가.
“일단 시간을 두고 지켜보세요. 혹시 알아요. 좋은 선생을 만나 서린이 성적이 쑥쑥 오를는지.”
“하긴, 하는 데까지 해 봐야지 어쩌겠어.”
박 여사가 한숨을 푹 내쉬는 것과 동시에 서린의 손에 들린 휴대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약속 시각을 삼십여 분이나 넘긴 탓에 친구들이 참지 못하고 전화를 한 모양이다.
휴대 전화를 틀어쥔 서린이 계단을 후다닥 뛰어 내려갔다. 어머니의 잔소리가 두렵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학수고대하던 대니얼 콘서트에 늦을까 마음이 급해졌기 때문이다.
“하서린!”
날카로운 하이 톤의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죄송! 용무가 몹시 급해서요!”
현관으로 냅다 뛰어나간 그녀가 정원을 가로질러 돌계단을 내려갔다. 마당을 뛰어놀던 강아지 한솔이가 놀라서 집 안으로 뛰어들자, 흙먼지를 못 참아 하는 박 여사가 질색하며 현관문 옆으로 비켜섰다.
“정연아! 쟤 좀 잡아.”
박 여사의 히스테릭한 반응에 정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가 멀다고 신경전을 벌이는 모녀의 싸움에 지친 탓이었다.
“놔두세요. 밤새워서 겨우 산 암표래요.”
서린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문을 열어젖혔다. 순간, 대문 밖을 서성이던 누군가와 몸이 세게 부딪쳤다.
“아야!”
낯설지만, 단단한 손이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몸을 붙잡았다. 겨우 몸을 추스른 서린이 위를 올려다보자,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장신의 키에 보기 드물 정도로 훤칠한 미남이지만, 입고 있는 차림은 유행이 지난 허름한 인상을 주는 옷이었다.
비록 낡긴 했지만, 붉은색과 녹색이 어우러진 체크 남방에서 그 빛깔에 어울리는 푸릇한 풀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어색해하는 표정이나 허름한 차림을 보니 전단을 돌리는 알바생으로 보였다.
“대문 앞에 전단 붙이면 큰일 나요. 이 집 아줌마가 워낙 성미가 지랄맞아서 회사까지 찾아서 항의한다니까요.”
매번 전단을 붙이고 달아나는 아르바이트와 박 여사의 신경전은 대단했다. 혹시라도 전단 알바가 수난을 치를까 볼 때마다 전단을 떼지만, 모처럼 얼굴을 보았으니 돌아가는 상황까지는 알려야 했다.
“아르바이트 때문에 왔지만, 전단 아르바이트는 아닙니다.”
깍듯한 말투와 깊고 낮은 음성이 인상적이다. 어울리는 또래 남자 친구와는 다른 느낌. 겉멋이 든 녀석들에 비하면 레벨 차이가 확실했다. 그러나 서린이 최근 열성적으로 쫓아다니는 아이돌, 대니얼보다는……. 품평하듯 아래위로 그를 훑던 서린이 엄지를 척 하고 들어 올렸다. 차림새는 그렇지만 생김새만은 대니얼 이상이었다. 사실 대니얼은 거의 성형발이니까.
“혹시 전국 수석의 K대생?”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과외 선생님을 전단 알바로 착각하다니, 태도가 돌변한 서린이 그의 팔에 매달리며 특유의 눈웃음을 지었다.
“쌤, 제가 저 골목길 끝으로 사라지면 그때 벨을 누르세요. 그 전에 누르시면 절대 안 돼요.”
어딘가 혼란스러워 보이는 그의 팔을 내려놓은 그녀가 천천히 뒷걸음쳤다. 후미진 곳, 모퉁이 담벼락에 바짝 붙어서 서린을 향해 손짓하는 친구들을 발견하자, 서린은 한걸음에 그들에게로 달려갔다. 떠들썩하게 서린을 맞이하며 친구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왜 이제 나와. 한참 기다렸잖아.”
“나오다가 딱 걸렸어.”
“빨리 가자.”
친구들의 손에 이끌려서 큰길로 나가려던 서린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당부를 잊지 않고 벨을 누르지 않은 채 끝까지 기다려 준 그가 고마워서일까, 대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그를 보고 있으니 까닭도 없이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다.
서린이 우뚝 선 채로 두 손을 머리 위로 모아 크게 하트를 그려 보였다.
“쌤! 고마워요. 그리고 사랑해요!”
골목이 떠내려가라 크게 소리치자, 그가 당황한 기색으로 시선을 피했다.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서 과외를 받을까.’ 문득 자신답지 않은 망상에 사로잡혔지만, 이내 친구들의 성화에 못 이겨 발걸음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