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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이모! 여기 맥주에 소주 한 병 더!”
탕탕! 단영은 온 힘을 다해 테이블을 내리치며 호쾌하게 외쳤다. 붉게 물든 뺨. 턱을 받치고 있는 위태로운 손. 풀린 시선. 그녀는 현재 취기가 한껏 올라 있는 상태였다.
“하아…….”
맞은편에 앉아 있던 두 남자는 한 시간째 단영의 주사를 받아 주다 지친 듯, 동시에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최단영. 이제 그만 마셔.”
보다 못해 팔을 뻗은 민재가 단영의 잔 위로 손을 얹으며 만류했다.
“그래, 너 계속 마시게 내버려 두면 도하준한테 괜히 우리만 욕먹는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세훈도 슬쩍 가세했다.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행동하는 두 남자의 태도에 단영의 눈가가 게슴츠레 떠졌다.
“술도 잘 못 마시면서 까불지 좀 마. 요즘 시대가 얼마나 흉흉한데.”
그들은 단영을 끔찍하게 생각하고 있는 하준의 절친한 고등학교 동창생이었다.
세훈은 현직 법조계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검사였고, 민재는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젊은 사장님. 마지막으로 자리에 없는 하준까지 더하면 단영에겐 방패가 부럽지 않았다.
“말끝마다 도하준, 도하준. 지겨워 죽겠다. 걔 이름 좀 그만 들먹여. 도하준이 내 엄마라도 돼?”
“오빠한테 걔가 뭐냐, 걔가. 한 살도 아니고 무려 네 살 차인데. 자식 농사 다 지어 놓으면 뭐 하냐고. 뭔 놈의 계집애 반항기가 이렇게 길어.”
세상사 전부 부질없다. 민재가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어 대며 아줌마처럼 한탄했다.
“누가 당신 자식이야.”
“무, 뭐? 다, 당신?”
민재의 턱이 느슨해지자, 입술 사이에 물려 있던 오징어 다리가 테이블로 툭, 추락했다.
그리고 한 잔 더, 단영이 술을 쭉― 들이켰다.
“벌써 내 나이가 스물여덟이다. 열여덟도 아니고 무려, 이십팔 살이라고.”
“하하. 우리 단영이, 지금 억양 좀 셌던 거 알지?”
“연애고 나발이고 제대로 된 거 한 번을 못 하는 이유가 다 니들 때문이야. 알아?”
“대체 우리가 뭘 어쨌다고. 우리 때문이 아니라, 도하준 때문이겠지.”
세훈이 들고 있던 생수를 내려놓으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아, 들었냐? 리틀 파파 억장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
그녀의 술주정은 익숙했지만, 민재는 못내 속상한 얼굴로 가슴팍을 부여잡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리틀 파파는 얼어 죽을…….”
“최단영. 제발 말 좀 예쁘게 하자. 이게 다 그놈의 직업 때문이야. 포토그래퍼인지 포토그래프인지 뭔지 하는 그거 때문에!”
“아니거든. 이거 다 그쪽한테 배운 거거든요. 왜 멀쩡한 남 직업 깎아내리고 그래?”
민재도 그 말엔 차마 반박할 거리가 없었다. 풀이 한껏 죽어 버린 민재를 관망하던 세훈이 고갤 끄덕였다.
“인정. 술버릇은 아주 하민재를 빼다 닮았지. 나쁜 것만 골라 배우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개자식. 피도 눈물도 없는 새끼.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세훈 모르게 주먹을 꽉 쥔 민재가 고요히 욕을 내뱉었다.
“하민재. 다 들린다.”
귀신같은 놈. 민재가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민재 오빤 내 쪽에서 사양이야. 차라리 도하준이 백번 낫지.”
그 말을 듣고 충격에 빠진 민재를 아는지, 모르는지. 단영은 태연스레 입 안으로 술을 털어 냈다.
“최단영. 너 자꾸 그런 식으로 오빠 편애하기 있어? 나 지금 되게 서운해지려 한다.”
“그래, 그래.”
단영이 흘러가듯 대충 대답했다.
“와하하. 그래, 그래? 뭐지, 방금? 나 좀 무시당하는 기분 들었는데?”
옥신각신하는 둘을 두고, 세훈은 깊은숨을 밀어 냈다.
그때였다. 별안간 그녀가 홱 고개를 추켜들었다.
“아, 깜짝아!”
화들짝 놀란 민재가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어깨를 푸드득 떨었다.
“나, 이제야 깨달았어.”
“뭐가.”
대충 비위나 맞춰 주잔 식으로 세훈이 물었다.
단영은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다 말문을 텄다.
“배경이며, 외모며 겉만 번지르르한 남자 새끼들은 하나같이 다 똑같다는 거.”
대체 장르가 몇 번이나 바뀌는 건지 모르겠다. 단영의 의미 모를 말에 두 남자의 눈가가 동시에 일그러졌다.
“하하. 우리 최단영이, 갑자기 왜 그럴까? 오빠들 등골 서늘해지게.”
얼굴이 뚫어질 만큼 민재를 부리부리하게 노려보던 단영이 천천히 입술을 떼어 냈다.
“섹스가 그렇게 중요해?”
“푸흡―!”
“뭐?”
전자는 민재였고, 후자는 세훈이었다.
진정, 애지중지하며 키워 낸 단영의 입에서 나온 말이 성관계를 뜻하는 적나라한 단어가 맞나. 두 귀로 직접 듣고도 믿을 수 없어 기겁한 남자 둘은 사색이 됐다.
“이봐, 최, 최단영이 너 설마, 진짜로 한 건 아니지?”
“뭘!”
“그러니까 그거 그 뭐시기냐. 거시기하고 거시기한. 아, 아냐, 됐어. 그럴 리가 없…….”
“섹스?”
“야, 이 계집애야! 오빠들 앞에서 부끄러운 줄도 몰라? 그래서 했냐고 안 했냐고. 어떤 새끼야? 어떤 개자식이 감히…….”
민재는 젓가락을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장담하는데, 이 사실 도하준 귀에 들어가면 백 프로 척살감이다.”
세훈은 확신했다. 그러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참지 못한 단영이 꽥 소리쳤다.
“이 원수 같은 것들아! 내가 그걸 했으면, 그 시늉이라도 해 봤으면 지금 이렇게 술이나 퍼붓고 있겠냐, 어?! 차라리 모쏠인 게 낫지. 이 씨…….”
우렁찬 음성이 고깃집 내부를 뒤흔들었다. 주변 시선이 집중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민재가 조용히 하라며 단영의 입술을 틀어막았다.
“손 뜨르!”
단영이 역정을 내며 턱을 비틀었다. 두 번 다신 그 단어 입에 올리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민재의 손이 떨어졌다.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문을 텄다.
“……나 헤어졌다?”
“또?”
“또라니? 처음이거든?”
지겹다는 투로 말하는 세훈의 옆구리를 민재가 팔꿈치로 푹 찔렀다. 검사란 새끼가 눈치를 옆집에 팔아먹고 왔냐? 단영에게 들리지 않게끔 속삭였다.
아, 알겠다고. 인상을 찌푸린 세훈이 낮은 숨을 토해 내며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어떤 자식인데.”
괜히 말했나. 단영은 말 꺼낸 것을 금세 후회했다. 남자와 관련된 일이라면 유독 유난 떠는 이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의사였어. 우리 스튜디오에 프로필 촬영하러 왔다가 만나게 됐고.”
“직업은 좀 하네.”
“오, 완전 금탯줄.”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야.”
단영은 오늘 두 달 남짓 만난 애인과 헤어졌다. 길고 힘겨운 첫사랑을 정리한 뒤, 큰맘 먹고 시작한 첫 연애였다.
그런데 키스는커녕 손 한 번 못 잡아 보고 헤어진 것이다. 고작 두 달 만에.
사실, 연애라 할 것도 없었다. 사랑의 감정이 뭔지 제대로 생각해 볼 여유도 없었고, 이별의 감정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 서로 일에 치여 살다 보니, 어떻게 보면 헤어짐은 당연한 결과였다.
불편한 시작이었고 미적지근하게 이어지다, 간단히 끝났다.
“그래도 능력으로 따지면 우리 도 본부장이 훨씬 더 빵빵하지. 걔 봐라. 독하게 자수성가해서 본부장으로 특진한 걸로 모자라 이젠 또 겸임 교수다. 무려 투 잡이라고, 투 잡. 얼마나 완벽해. 단영아, 너 그거 알아야 된다? 남자는 배경보단 능력이야.”
민재가 장난스레 웃으며 초를 쳤다. 그런 그를 슬쩍 노려보는 단영을 목격한 세훈이 서둘러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헤어지게 된 이유가 뭔데.”
“프리랜서가 어쩌고, 스킨십이 어쩌고, 내 성격이 어쩌고. 결혼할 생각이 없어 보이네, 집안에서도 달가워하는 눈치는 아닌 것 같네 하면서 어쩌고저쩌고. 아, 몰라. 이 정도면 나 진짜 문제 있는 거 아닐까 싶어.”
“…….”
“까딱하면 그 짓거리만은 안 된다, 툭하면 성관계는 위험한 행위다, 시작하면 언젠간 다 끝난다. 학생 때부터 부정적인 말들만 귀에 딱지 붙게 듣다 보니까 절로 거부감이 생겨 버린 걸 어떡해. 그렇다고 대학생 때 편하게 술 한 번을 먹게 했어, 맘껏 연애하게 자유를 줬어.”
골치 아프게 된 상황에 세훈이 손을 들어 건조한 얼굴을 쓸어 냈다. 그러다 이내 단영을 빤히 주시했다.
단영은 화려한 외모까진 아니었으나, 수수하게 예쁘장한 편이었다. 그런데 매번 차여 오니 속이 상하는 거였다.
평소 같았다면 화장기 없는 얼굴이어야 했다. 어쩐지 오늘따라 꼼꼼히 입술을 채우고 있는 립스틱 하며 얼씨구, 안 어울리게 분칠까지 하셨다.
……누가 보면 큰일 날 모습인 것은 분명하다.
“야, 하민재. 도하준 지금 어디래.”
푹 고개를 떨어트린 단영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세훈이 고개를 돌렸다. 말문이 턱 막혀 버린 상황에서 구세주는 하준뿐이었다. 그녀가 술에 취할 때마다 하준을 찾는 모습은 어느덧 몇 년째 이어지고 있는 일상이었기에 익숙했다.
“여기 오면서 통화했을 땐 환영회 빌미로 교수들한테 잡혀 있다고 그러던데.”
“그러니까, 걘 왜 답지 않게 쓸데없이 겸임 교수 제안을 선뜻 받아선 고생을 사서 해.”
“걔도 좋아서 했겠냐. 기업에서 되는대로 밀어붙였단다. 이때다 싶으니까 기업 제품 홍보다, 인재 채용이다 뭐다 하면서 살살 달랜 것 같은데. 어쩌겠어, 윗선에서 까라면 까야지.”
민재가 입 안으로 남은 술을 털어 냈다. 크으,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기업, 시오그룹은 전자, 금융, 자동차, 관광, 건설, 유통 등 문어발처럼 수많은 계열사를 품고 있었다. 그곳에서 하준은 시오전자 기획부서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본부장이었다.
유능한 두뇌와 깨어 있는 경영 방식 때문에 시오전자의 작년 4분기 매출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랐다. 그 이유로 하준을 스카우트하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 기업 또한 많았다.
“야. 단영이 맛 간 거 같은데, 어쩔래. 도하준한테 연락해 볼까? 최단영 일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달려올 놈이잖아.”
민재와 세훈이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혼자 부어라 마셔라 반복하던 단영은 축 늘어지며 기어코 뻗고 말았다.
세훈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잠시 응시하다 시선을 올렸다.
“됐어. 안 그래도 피곤할 애를 뭐 하러 불러. 술 안 마셨으니까 내가 운전하면 돼. 차 키 줘.”
세훈은 그 말을 끝으로 민재에게 차 키를 건네받고는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어 냈다. 다리를 굽혀 앉아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야, 단영아. 눈 뜨고 오빠 좀 봐 봐.”
“우음…….”
“제대로 갔네, 안드로메다로 진작 갔어.”
으차. 그가 단영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목적지는 언제나 그랬듯 변함없이 하준의 오피스텔이었다.
* * *
민재는 허벅지가 당장 터질 것만 같았다. 가위바위보에 졌다는 이유로 세훈 대신 단영을 업어야 했다. 몇 번이고 고쳐 업어 봐도 줄줄 흘러내리는 그녀 덕분에 어금니가 부서지도록 이를 앙다물었다.
하준의 침실에 들어서자마자 민재는 단영을 던지듯 침대에 눕혔다.
하으,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절로 앓는 소리가 터졌다.
“하민재, 빨리 가자. 도하준 오기 전에.”
“어. 안 그래도 그럴 생…….”
띠띠띠띠. 띠리릭.
스릴러 영화의 하이라이트 장면보다 더 두려운 순간이었다. 세훈과 민재는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그 자리에 굳었다.
아, 망했어요.
세훈은 이마를 짚었고, 다리에 힘이 풀린 민재는 그대로 풀썩 주저앉았다.
“뭐 하냐, 너희.”
방문을 열고 들어온 하준의 첫마디였다. 피곤이 잔뜩 묻어난 음성이었다. 침대에 벌러덩 누워 있는 단영에게로 건조한 시선이 천천히 옮겨졌다.
“쟨 또 왜 저래.”
“아, 그게. 그러니까…….”
민재가 망설이자, 하준이 미간을 좁혔다.
“술 먹였어?”
“머, 먹이긴 누가 먹였다고 그러냐! 뭔 일 있나 걱정돼서 일 제쳐 두고 달려와 봤더니 이미 혼자 세 병 까고 있더만, 뭐.”
민재는 단영이 첫 연애를 시작하고, 두 달도 되지 않아 끝냈단 사실까진 언급하지 않았다. 후환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모르는 게 약이 될 때도 있다고, 굳이 입 놀리지 말자.
민재는 그녀를 대변해 주기 위해 서둘러 말을 이었다.
“이런 일이 자주 있던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던 것도 아니었잖아. 뭘 그렇게까지 정색하고 그래.”
아……. 하준의 잇새로 짜증 섞인 탄식이 흘러나왔다. 밀린 회사 업무며, 교수들 사이에서 받은 스트레스만 해도 한가득인데, 오랜만에 마주한 최단영은 취해 있다.
삐딱하게 선 하준이 손을 들어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단영이 일어나면 잔소리는 적당히 해라. 이제 어린애도 아닌데, 가끔 술 마시고 취할 수도 있지. 너 그러는 거, 좀 과잉보호다.”
언제 터질지 몰라 조마조마한 상황을 알면서도 세훈은 제 할 말을 똑똑히 전했다.
“그러니까, 필터링 없이 직구로 던지는 거 조심 좀 하라고. 단영이도 여잔데 자꾸 그러면 상처받아.”
그녀가 열여섯 살이 되던 해였다. 그때, 하준을 통해 단영을 처음 알게 됐다. 그 후로 그들은 우열을 가릴 것 없이 단영을 친동생처럼 아꼈다. 무엇보다, 남 일에 사사건건 참견하는 걸 질색하던 하준이 데려온 여자애였다.
그의 등 뒤에 숨어 빼꼼 고개를 내밀던 어린 단영을 잊을 수 없다. 피투성이가 된 교복, 잔뜩 헝클어진 머리. 피멍으로 가득한 얼굴. 그 모든 걸 말이다.
“……고생했다.”
무거운 침묵을 뚫고 하준이 고마움을 전했다. 평소 하준의 성격은 몹시 이성적인 편이었지만, 단영의 일이라면 말이 조금 달라진다. 쉽게 흥분했고, 감정적으로 변했다. 그럴 때마다 차분하게 중재시켜 주는 일이 세훈의 역할이기도 했다.
“고생은 무슨.”
“고맙다. 너희들도 바쁠 텐데.”
“됐어. 당연한 일을 네가 왜 고마워해. 그나저나 너도 좀 쉬어라. 투잡 두 번 뛰다간 사람 여럿 잡겠다.”
그도 그럴 것이, 하준은 많이 지친 기색이었다. 오고 가는 그들의 대화 속엔 무심함뿐이었지만, 서로를 걱정하고 있음은 진심이었다.
“오늘따라 예민한 거 보니까, 윗대가리들이랑 대차게 한판 했나 보다?”
“뭐…… 그렇지.”
잦게 있는 일이었다. 본래 마케팅이라 하면 깨어 있는 사상이 필요한 법인데, 고지식한 시오전자 임직원들은 구닥다리 같은 틀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그런 이들과 맞서는 이는 회사 내에 오직 하준뿐이었다. 실질적으로 매출의 기준은 그의 손에 쥐어져 있으니, 임직원들도 쉬이 그에게 쓴소리 한 번 뱉을 수 없는 실정이었다.
“뭐, 어쨌든 수고해라. 우리 간다.”
툭툭, 세훈은 나머지 뒤처리를 부탁한다는 뜻을 담아 하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어, 조심히 가라.”
민재와 세훈 덕분에 그나마 떠들썩한 집 안은 금세 고요해졌다. 남자 혼자 지내기엔 터무니없이 깨끗했고, 넓었다.
그들이 사라진 곳을 잠시 응시하다 말고, 하준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침대로 다가갔다.
발을 멈춰 세운 그가 넥타이 사이로 손가락 두 개를 밀어 넣어 손목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하준의 무심한 눈빛이 밑으로 떨어졌다.
태평하게 잘만 잔다. 어쩐지 괘씸하다 못해 억울할 지경이다.
“넌 지금 잠이 오냐.”
그의 낮은 음성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단영이 가장 크게 사는 부분이었다. 성우처럼 차분하면서도 깊이 있는 목소리 하난 끝내주게 좋다면서.
하준은 세상모르고 편히 잠에 취한 단영을 흘기듯 바라보았다.
……화장했네.
“예뻐서 봐준다.”
툭. 그가 손가락으로 부드러운 단영의 볼을 건드렸다.
그러자, 차분히 감겨 있던 눈이 반사적으로 찡그려졌다. 푹신한 침대를 포기해야 하는 건 내키지 않았지만, 상대가 최단영이라면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다.
“잘 자, 최단영.”
그 마음을 네가 알기나 할까.
하준의 입가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이모! 여기 맥주에 소주 한 병 더!”
탕탕! 단영은 온 힘을 다해 테이블을 내리치며 호쾌하게 외쳤다. 붉게 물든 뺨. 턱을 받치고 있는 위태로운 손. 풀린 시선. 그녀는 현재 취기가 한껏 올라 있는 상태였다.
“하아…….”
맞은편에 앉아 있던 두 남자는 한 시간째 단영의 주사를 받아 주다 지친 듯, 동시에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최단영. 이제 그만 마셔.”
보다 못해 팔을 뻗은 민재가 단영의 잔 위로 손을 얹으며 만류했다.
“그래, 너 계속 마시게 내버려 두면 도하준한테 괜히 우리만 욕먹는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세훈도 슬쩍 가세했다.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행동하는 두 남자의 태도에 단영의 눈가가 게슴츠레 떠졌다.
“술도 잘 못 마시면서 까불지 좀 마. 요즘 시대가 얼마나 흉흉한데.”
그들은 단영을 끔찍하게 생각하고 있는 하준의 절친한 고등학교 동창생이었다.
세훈은 현직 법조계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검사였고, 민재는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젊은 사장님. 마지막으로 자리에 없는 하준까지 더하면 단영에겐 방패가 부럽지 않았다.
“말끝마다 도하준, 도하준. 지겨워 죽겠다. 걔 이름 좀 그만 들먹여. 도하준이 내 엄마라도 돼?”
“오빠한테 걔가 뭐냐, 걔가. 한 살도 아니고 무려 네 살 차인데. 자식 농사 다 지어 놓으면 뭐 하냐고. 뭔 놈의 계집애 반항기가 이렇게 길어.”
세상사 전부 부질없다. 민재가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어 대며 아줌마처럼 한탄했다.
“누가 당신 자식이야.”
“무, 뭐? 다, 당신?”
민재의 턱이 느슨해지자, 입술 사이에 물려 있던 오징어 다리가 테이블로 툭, 추락했다.
그리고 한 잔 더, 단영이 술을 쭉― 들이켰다.
“벌써 내 나이가 스물여덟이다. 열여덟도 아니고 무려, 이십팔 살이라고.”
“하하. 우리 단영이, 지금 억양 좀 셌던 거 알지?”
“연애고 나발이고 제대로 된 거 한 번을 못 하는 이유가 다 니들 때문이야. 알아?”
“대체 우리가 뭘 어쨌다고. 우리 때문이 아니라, 도하준 때문이겠지.”
세훈이 들고 있던 생수를 내려놓으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아, 들었냐? 리틀 파파 억장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
그녀의 술주정은 익숙했지만, 민재는 못내 속상한 얼굴로 가슴팍을 부여잡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리틀 파파는 얼어 죽을…….”
“최단영. 제발 말 좀 예쁘게 하자. 이게 다 그놈의 직업 때문이야. 포토그래퍼인지 포토그래프인지 뭔지 하는 그거 때문에!”
“아니거든. 이거 다 그쪽한테 배운 거거든요. 왜 멀쩡한 남 직업 깎아내리고 그래?”
민재도 그 말엔 차마 반박할 거리가 없었다. 풀이 한껏 죽어 버린 민재를 관망하던 세훈이 고갤 끄덕였다.
“인정. 술버릇은 아주 하민재를 빼다 닮았지. 나쁜 것만 골라 배우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개자식. 피도 눈물도 없는 새끼.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세훈 모르게 주먹을 꽉 쥔 민재가 고요히 욕을 내뱉었다.
“하민재. 다 들린다.”
귀신같은 놈. 민재가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민재 오빤 내 쪽에서 사양이야. 차라리 도하준이 백번 낫지.”
그 말을 듣고 충격에 빠진 민재를 아는지, 모르는지. 단영은 태연스레 입 안으로 술을 털어 냈다.
“최단영. 너 자꾸 그런 식으로 오빠 편애하기 있어? 나 지금 되게 서운해지려 한다.”
“그래, 그래.”
단영이 흘러가듯 대충 대답했다.
“와하하. 그래, 그래? 뭐지, 방금? 나 좀 무시당하는 기분 들었는데?”
옥신각신하는 둘을 두고, 세훈은 깊은숨을 밀어 냈다.
그때였다. 별안간 그녀가 홱 고개를 추켜들었다.
“아, 깜짝아!”
화들짝 놀란 민재가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어깨를 푸드득 떨었다.
“나, 이제야 깨달았어.”
“뭐가.”
대충 비위나 맞춰 주잔 식으로 세훈이 물었다.
단영은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다 말문을 텄다.
“배경이며, 외모며 겉만 번지르르한 남자 새끼들은 하나같이 다 똑같다는 거.”
대체 장르가 몇 번이나 바뀌는 건지 모르겠다. 단영의 의미 모를 말에 두 남자의 눈가가 동시에 일그러졌다.
“하하. 우리 최단영이, 갑자기 왜 그럴까? 오빠들 등골 서늘해지게.”
얼굴이 뚫어질 만큼 민재를 부리부리하게 노려보던 단영이 천천히 입술을 떼어 냈다.
“섹스가 그렇게 중요해?”
“푸흡―!”
“뭐?”
전자는 민재였고, 후자는 세훈이었다.
진정, 애지중지하며 키워 낸 단영의 입에서 나온 말이 성관계를 뜻하는 적나라한 단어가 맞나. 두 귀로 직접 듣고도 믿을 수 없어 기겁한 남자 둘은 사색이 됐다.
“이봐, 최, 최단영이 너 설마, 진짜로 한 건 아니지?”
“뭘!”
“그러니까 그거 그 뭐시기냐. 거시기하고 거시기한. 아, 아냐, 됐어. 그럴 리가 없…….”
“섹스?”
“야, 이 계집애야! 오빠들 앞에서 부끄러운 줄도 몰라? 그래서 했냐고 안 했냐고. 어떤 새끼야? 어떤 개자식이 감히…….”
민재는 젓가락을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장담하는데, 이 사실 도하준 귀에 들어가면 백 프로 척살감이다.”
세훈은 확신했다. 그러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참지 못한 단영이 꽥 소리쳤다.
“이 원수 같은 것들아! 내가 그걸 했으면, 그 시늉이라도 해 봤으면 지금 이렇게 술이나 퍼붓고 있겠냐, 어?! 차라리 모쏠인 게 낫지. 이 씨…….”
우렁찬 음성이 고깃집 내부를 뒤흔들었다. 주변 시선이 집중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민재가 조용히 하라며 단영의 입술을 틀어막았다.
“손 뜨르!”
단영이 역정을 내며 턱을 비틀었다. 두 번 다신 그 단어 입에 올리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민재의 손이 떨어졌다.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문을 텄다.
“……나 헤어졌다?”
“또?”
“또라니? 처음이거든?”
지겹다는 투로 말하는 세훈의 옆구리를 민재가 팔꿈치로 푹 찔렀다. 검사란 새끼가 눈치를 옆집에 팔아먹고 왔냐? 단영에게 들리지 않게끔 속삭였다.
아, 알겠다고. 인상을 찌푸린 세훈이 낮은 숨을 토해 내며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어떤 자식인데.”
괜히 말했나. 단영은 말 꺼낸 것을 금세 후회했다. 남자와 관련된 일이라면 유독 유난 떠는 이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의사였어. 우리 스튜디오에 프로필 촬영하러 왔다가 만나게 됐고.”
“직업은 좀 하네.”
“오, 완전 금탯줄.”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야.”
단영은 오늘 두 달 남짓 만난 애인과 헤어졌다. 길고 힘겨운 첫사랑을 정리한 뒤, 큰맘 먹고 시작한 첫 연애였다.
그런데 키스는커녕 손 한 번 못 잡아 보고 헤어진 것이다. 고작 두 달 만에.
사실, 연애라 할 것도 없었다. 사랑의 감정이 뭔지 제대로 생각해 볼 여유도 없었고, 이별의 감정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 서로 일에 치여 살다 보니, 어떻게 보면 헤어짐은 당연한 결과였다.
불편한 시작이었고 미적지근하게 이어지다, 간단히 끝났다.
“그래도 능력으로 따지면 우리 도 본부장이 훨씬 더 빵빵하지. 걔 봐라. 독하게 자수성가해서 본부장으로 특진한 걸로 모자라 이젠 또 겸임 교수다. 무려 투 잡이라고, 투 잡. 얼마나 완벽해. 단영아, 너 그거 알아야 된다? 남자는 배경보단 능력이야.”
민재가 장난스레 웃으며 초를 쳤다. 그런 그를 슬쩍 노려보는 단영을 목격한 세훈이 서둘러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헤어지게 된 이유가 뭔데.”
“프리랜서가 어쩌고, 스킨십이 어쩌고, 내 성격이 어쩌고. 결혼할 생각이 없어 보이네, 집안에서도 달가워하는 눈치는 아닌 것 같네 하면서 어쩌고저쩌고. 아, 몰라. 이 정도면 나 진짜 문제 있는 거 아닐까 싶어.”
“…….”
“까딱하면 그 짓거리만은 안 된다, 툭하면 성관계는 위험한 행위다, 시작하면 언젠간 다 끝난다. 학생 때부터 부정적인 말들만 귀에 딱지 붙게 듣다 보니까 절로 거부감이 생겨 버린 걸 어떡해. 그렇다고 대학생 때 편하게 술 한 번을 먹게 했어, 맘껏 연애하게 자유를 줬어.”
골치 아프게 된 상황에 세훈이 손을 들어 건조한 얼굴을 쓸어 냈다. 그러다 이내 단영을 빤히 주시했다.
단영은 화려한 외모까진 아니었으나, 수수하게 예쁘장한 편이었다. 그런데 매번 차여 오니 속이 상하는 거였다.
평소 같았다면 화장기 없는 얼굴이어야 했다. 어쩐지 오늘따라 꼼꼼히 입술을 채우고 있는 립스틱 하며 얼씨구, 안 어울리게 분칠까지 하셨다.
……누가 보면 큰일 날 모습인 것은 분명하다.
“야, 하민재. 도하준 지금 어디래.”
푹 고개를 떨어트린 단영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세훈이 고개를 돌렸다. 말문이 턱 막혀 버린 상황에서 구세주는 하준뿐이었다. 그녀가 술에 취할 때마다 하준을 찾는 모습은 어느덧 몇 년째 이어지고 있는 일상이었기에 익숙했다.
“여기 오면서 통화했을 땐 환영회 빌미로 교수들한테 잡혀 있다고 그러던데.”
“그러니까, 걘 왜 답지 않게 쓸데없이 겸임 교수 제안을 선뜻 받아선 고생을 사서 해.”
“걔도 좋아서 했겠냐. 기업에서 되는대로 밀어붙였단다. 이때다 싶으니까 기업 제품 홍보다, 인재 채용이다 뭐다 하면서 살살 달랜 것 같은데. 어쩌겠어, 윗선에서 까라면 까야지.”
민재가 입 안으로 남은 술을 털어 냈다. 크으,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기업, 시오그룹은 전자, 금융, 자동차, 관광, 건설, 유통 등 문어발처럼 수많은 계열사를 품고 있었다. 그곳에서 하준은 시오전자 기획부서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본부장이었다.
유능한 두뇌와 깨어 있는 경영 방식 때문에 시오전자의 작년 4분기 매출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랐다. 그 이유로 하준을 스카우트하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 기업 또한 많았다.
“야. 단영이 맛 간 거 같은데, 어쩔래. 도하준한테 연락해 볼까? 최단영 일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달려올 놈이잖아.”
민재와 세훈이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혼자 부어라 마셔라 반복하던 단영은 축 늘어지며 기어코 뻗고 말았다.
세훈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잠시 응시하다 시선을 올렸다.
“됐어. 안 그래도 피곤할 애를 뭐 하러 불러. 술 안 마셨으니까 내가 운전하면 돼. 차 키 줘.”
세훈은 그 말을 끝으로 민재에게 차 키를 건네받고는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어 냈다. 다리를 굽혀 앉아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야, 단영아. 눈 뜨고 오빠 좀 봐 봐.”
“우음…….”
“제대로 갔네, 안드로메다로 진작 갔어.”
으차. 그가 단영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목적지는 언제나 그랬듯 변함없이 하준의 오피스텔이었다.
* * *
민재는 허벅지가 당장 터질 것만 같았다. 가위바위보에 졌다는 이유로 세훈 대신 단영을 업어야 했다. 몇 번이고 고쳐 업어 봐도 줄줄 흘러내리는 그녀 덕분에 어금니가 부서지도록 이를 앙다물었다.
하준의 침실에 들어서자마자 민재는 단영을 던지듯 침대에 눕혔다.
하으,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절로 앓는 소리가 터졌다.
“하민재, 빨리 가자. 도하준 오기 전에.”
“어. 안 그래도 그럴 생…….”
띠띠띠띠. 띠리릭.
스릴러 영화의 하이라이트 장면보다 더 두려운 순간이었다. 세훈과 민재는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그 자리에 굳었다.
아, 망했어요.
세훈은 이마를 짚었고, 다리에 힘이 풀린 민재는 그대로 풀썩 주저앉았다.
“뭐 하냐, 너희.”
방문을 열고 들어온 하준의 첫마디였다. 피곤이 잔뜩 묻어난 음성이었다. 침대에 벌러덩 누워 있는 단영에게로 건조한 시선이 천천히 옮겨졌다.
“쟨 또 왜 저래.”
“아, 그게. 그러니까…….”
민재가 망설이자, 하준이 미간을 좁혔다.
“술 먹였어?”
“머, 먹이긴 누가 먹였다고 그러냐! 뭔 일 있나 걱정돼서 일 제쳐 두고 달려와 봤더니 이미 혼자 세 병 까고 있더만, 뭐.”
민재는 단영이 첫 연애를 시작하고, 두 달도 되지 않아 끝냈단 사실까진 언급하지 않았다. 후환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모르는 게 약이 될 때도 있다고, 굳이 입 놀리지 말자.
민재는 그녀를 대변해 주기 위해 서둘러 말을 이었다.
“이런 일이 자주 있던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던 것도 아니었잖아. 뭘 그렇게까지 정색하고 그래.”
아……. 하준의 잇새로 짜증 섞인 탄식이 흘러나왔다. 밀린 회사 업무며, 교수들 사이에서 받은 스트레스만 해도 한가득인데, 오랜만에 마주한 최단영은 취해 있다.
삐딱하게 선 하준이 손을 들어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단영이 일어나면 잔소리는 적당히 해라. 이제 어린애도 아닌데, 가끔 술 마시고 취할 수도 있지. 너 그러는 거, 좀 과잉보호다.”
언제 터질지 몰라 조마조마한 상황을 알면서도 세훈은 제 할 말을 똑똑히 전했다.
“그러니까, 필터링 없이 직구로 던지는 거 조심 좀 하라고. 단영이도 여잔데 자꾸 그러면 상처받아.”
그녀가 열여섯 살이 되던 해였다. 그때, 하준을 통해 단영을 처음 알게 됐다. 그 후로 그들은 우열을 가릴 것 없이 단영을 친동생처럼 아꼈다. 무엇보다, 남 일에 사사건건 참견하는 걸 질색하던 하준이 데려온 여자애였다.
그의 등 뒤에 숨어 빼꼼 고개를 내밀던 어린 단영을 잊을 수 없다. 피투성이가 된 교복, 잔뜩 헝클어진 머리. 피멍으로 가득한 얼굴. 그 모든 걸 말이다.
“……고생했다.”
무거운 침묵을 뚫고 하준이 고마움을 전했다. 평소 하준의 성격은 몹시 이성적인 편이었지만, 단영의 일이라면 말이 조금 달라진다. 쉽게 흥분했고, 감정적으로 변했다. 그럴 때마다 차분하게 중재시켜 주는 일이 세훈의 역할이기도 했다.
“고생은 무슨.”
“고맙다. 너희들도 바쁠 텐데.”
“됐어. 당연한 일을 네가 왜 고마워해. 그나저나 너도 좀 쉬어라. 투잡 두 번 뛰다간 사람 여럿 잡겠다.”
그도 그럴 것이, 하준은 많이 지친 기색이었다. 오고 가는 그들의 대화 속엔 무심함뿐이었지만, 서로를 걱정하고 있음은 진심이었다.
“오늘따라 예민한 거 보니까, 윗대가리들이랑 대차게 한판 했나 보다?”
“뭐…… 그렇지.”
잦게 있는 일이었다. 본래 마케팅이라 하면 깨어 있는 사상이 필요한 법인데, 고지식한 시오전자 임직원들은 구닥다리 같은 틀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그런 이들과 맞서는 이는 회사 내에 오직 하준뿐이었다. 실질적으로 매출의 기준은 그의 손에 쥐어져 있으니, 임직원들도 쉬이 그에게 쓴소리 한 번 뱉을 수 없는 실정이었다.
“뭐, 어쨌든 수고해라. 우리 간다.”
툭툭, 세훈은 나머지 뒤처리를 부탁한다는 뜻을 담아 하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어, 조심히 가라.”
민재와 세훈 덕분에 그나마 떠들썩한 집 안은 금세 고요해졌다. 남자 혼자 지내기엔 터무니없이 깨끗했고, 넓었다.
그들이 사라진 곳을 잠시 응시하다 말고, 하준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침대로 다가갔다.
발을 멈춰 세운 그가 넥타이 사이로 손가락 두 개를 밀어 넣어 손목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하준의 무심한 눈빛이 밑으로 떨어졌다.
태평하게 잘만 잔다. 어쩐지 괘씸하다 못해 억울할 지경이다.
“넌 지금 잠이 오냐.”
그의 낮은 음성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단영이 가장 크게 사는 부분이었다. 성우처럼 차분하면서도 깊이 있는 목소리 하난 끝내주게 좋다면서.
하준은 세상모르고 편히 잠에 취한 단영을 흘기듯 바라보았다.
……화장했네.
“예뻐서 봐준다.”
툭. 그가 손가락으로 부드러운 단영의 볼을 건드렸다.
그러자, 차분히 감겨 있던 눈이 반사적으로 찡그려졌다. 푹신한 침대를 포기해야 하는 건 내키지 않았지만, 상대가 최단영이라면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다.
“잘 자, 최단영.”
그 마음을 네가 알기나 할까.
하준의 입가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