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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선물 1화

1.



현관문을 열고 집 안에 들어서면 단내가 코를 찔렀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래 왔다. 손을 씻은 뒤에 얌전히 의자에 앉으면 어머니가 그림같이 예쁜 과자를 묵직한 접시에 담아 내밀었다. 그걸 행복하게 받아먹던 때도 있었다. 까마득한 과거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단것을 전혀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신선한 빵과 다디단 과자를 구웠다. 피로한 뇌에는 당분이 필요하다고 했다.

쉴 틈 없이 학원과 과외를 뺑뺑이 돌 때도 어머니는 나를 픽업하던 차 속에서 과자가 든 봉지를 건넸다. 힘들게 짓씹으면 뭉개진 덩어리가 침과 함께 무겁게 목 안으로 넘어갔다. 내가 봉지 안에 든 것을 모두 해치웠을 때만 어머니는 룸미러를 통해 가면 같은 웃음을 보였다.

매일 정신 차리지 못하는 나를 새벽부터 깨워 기어이 식탁 앞에 앉힐 때도 어머니는 똑같은 웃음을 막 오픈한 식당의 간판처럼 내걸었다. 그녀의 뒤에서 육중한 오븐과 발효기가 충성스러운 가신들처럼 배경이 되어 주었다. 팔로 식탁을 짚은 채로 그녀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여기다 구운 빵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니까.

그 뒤는 언제나 같았다.

“너는 나 같은 엄마가 있는 걸 행운으로 알아. 이런 빵을 집에서 먹게 해 주는 엄마가 어디 흔할 것 같니?”

나는 호밀빵의 조각을 입에 물며 시인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어머니는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신다고 했다.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에너지가 많은 사람이었다. 작지 않은 집을 TV광고에 나오는 집처럼 깔끔하게 관리하는 것은 물론 매 끼니마다 정갈한 반찬을 식탁에 올렸다. 나를 담당하는 실질적인 관리자도 어머니였다.

천천히 아침을 먹고 있으면 아버지가 그의 방에서 걸어 나오며 어머니와 나를 힐끗 보았다. 키가 크고 어깨가 떡 벌어진 아버지는 슈트 차림이 잘 어울렸다. 몸에 착 달라붙는 어머니의 홈드레스만큼이나.

두 사람 모두 나이보다 한참은 젊어 보였다. 마치 누군가의 생기를 빼앗아 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들은 경쟁적으로 몸을 관리했다.

“주말에 파티가 있어. 준비해 놔.”

“알겠어요.”

어머니는 아버지를 쳐다보지도 않고 냉랭하게 대답했다. 어머니의 시선 앞에 놓인 건 나였다. 목이 막히는 기분이 들어 잔을 들어 우유를 한 모금 머금었다. 바로 삼키지 않고 혀로 빙글빙글 돌리다가 아버지가 현관을 나서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꿀꺽 삼켰다. 문을 쏘아보는 어머니의 눈이 표독스러웠다.

그도 잠시, 어머니는 곧 그린 듯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오늘 수학 과외 있는 거 알지?”

“……농담이신 줄 알았어요.”

“얘는. 무슨 그런 걸 가지고 농담을 하니.”

“고등학교에도 붙었는데…….”

어머니는 단칼에 내 말을 잘랐다.

“그러니까 더 해야지. 기숙사제잖아. 들어가기 전에 미리미리 공부해 놔야 할 거 아냐. 비슷하게 해서 어떻게 남을 앞질러? 왜 이렇게 생각이 짧아?”

“…….”

“네 아버지랑도 합의된 거야. 그렇게 알고 있어.”

내 일정임에도 내 의견은 필요 없었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최강의 매니저였다. 내 대신 학습 계획을 짰고 실력 있는 과외 선생을 수배하는 한편으로 나의 하루 운동량과 식단까지 조절했다. 나는 연예인만큼이나 엄중하게 관리되었다. 그러므로 성적이 좋지 못하다면 그건 내 탓이었다.

“재희야. 명이나물만 먹지 말고 여기 고사리도 좀 먹어 봐. 어떻게 반찬을 만들면 한 끼 먹는 게 끝이니? 나머지는 어떡하라고?”

하여간 입맛 까다롭다니까. 어머니가 짜증을 냈다. 할 말이 없었다. 침묵하는 내게 본격적으로 폭포수처럼 불만이 쏟아졌다.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있어서 흘러넘치는 감정을 들이붓는 구멍이었다. 결코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

어머니는 불행했다. 내 앞에서 제 불행의 이유를 줄줄 읊어 대는 여자에게 나는 종종 묻고 싶었다. 왜 당신이 불행하다고 해서 나까지 불행해야 하느냐고.

하지만 실제로 하지는 않았다. 대신 말문을 닫았다. 그 언젠가 죽으려던 시도가 좌절된 이후로 나는 심장이 없는 인형처럼 살았다.



* * *



아버지가 나를 나이 든 무리에게 소개했다. 우리를 둘러싼 웅성대는 소음 속에서 아버지의 목소리만이 선명하게 귀에 박혔다. 침이 말랐다.

“제 아들입니다. 인사드려라.”

어깨를 감싸 잡는 커다란 손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티 났을까. 반듯해 보이려고 애쓰며 나는 예의 바르게 허리를 굽혔다.

“안녕하세요. 한재희입니다.”

“허허, 아들 인물이 훤하구만. 아들이라고 해서 한 전무를 닮았으려니 했는데 와이프 미모를 빼다 박았어. 몇 살이었지?”

“올해 고등학교 올라갑니다. ○○고입니다.”

“○○고? 내 아들과 동문이구만. 인물 좋고, 전도유망하고…… 이거이거, 한 전무 이제 보니까 알짜배기야? 노후에도 걱정이 없겠어, 한 전무는.”

“과찬이십니다.”

정장을 빼입은 남자들 사이에서 나는 겸손하게 웃었다. 어머니도 아버지의 곁에 서서 그와 팔짱을 낀 채로 완벽한 미소를 장착했다. 화목한 가정을 보여 주는 데 있어서 나는 꽤 괜찮은 소품이었다.

“한재희. 이쪽에도 와서 인사해라.”

“네.”

나는 아버지를 따라 바삐 움직였다. 어머니가 매니저라면 아버지는 매니저를 고용한 엔터테인먼트사의 오너였다. 그는 어떻게 하면 자신의 아들이 가장 비싸게 보일지를 치밀하게 계산했다. 그리고 적절한 장소에 잘 포장한 나를 데려가 샘플을 내보이듯 나를 선보였다. 지금처럼.

아버지는 그가 가진 가장 화려한 인맥에 나를 걸치고 싶어 했다. 그건 나의 미래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미래가 보장된 블루칩을 쥔 자신의 가치를 더욱 높이려는 행동이었다.

“후우.”

형식적인 인사를 계속하다 간신히 아버지의 곁에서 떨어져 나왔다. 투명한 잔에 주스를 받아 마른 입술을 축였다. 한발 물러서서 본 연회장은 화려했다. 아버지를 따라다닌 횟수가 꽤 되었지만 이렇게 큰 규모는 처음이었다. 엄청나게 큰 연회장과 그곳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규모에 놀랍다기보다 기가 질렸다.

크리스마스는 지났지만 신년은 오지 않은 애매한 시기에 왜 사람을 모았나 했더니, 회사 창립기념일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일로 이 많은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으다니. 아버지가 욕망하는 권력이란 게 이런 걸까.

나는 이런 것들이 조금도 탐나지 않았다. 단지 피로했다.

과하게 밝은 빛이 샹들리에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그럴 리 없었지만, 하얀 셔츠 아래로 푸른 멍이 비쳐 보일까 봐 신경 쓰며 쇄골을 가렸다.

“하하하, 장 전무님도 참…….”

아버지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맥없이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가해자는 이미 잊었다. 나 역시 이유는 잊었다. 그런 건 중요하지도 않았고 일방적인 폭력은 내게는 일상이었으므로. 다만 누군가 내게서 폭력의 흔적을 발견할까 싶어 전전긍긍하는 이는 나뿐이라고 생각하니 서글펐다.

그 때 삐이 소리와 함께 웅웅거리는 마이크 소리가 들려왔다. 좌중의 소란이 점차 가라앉았다. 퇴장하기엔 적기였다. 조심스럽게 바깥쪽으로 몸을 옮겼다.

“……다음 순서로 강준표 회장님과 강기원 이사님을 모시겠습니다…….”

무리 지은 이들의 시선이 한데 쏠렸다. 나도 무의식적으로 그 눈길들을 따라 연단을 보았다. 강건해 보이는 중후한 남자가 한 젊은 남자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나는 젊은 남자 쪽을 흘긋 보았다.

강기원이라고 했던가. 그는 이사라는 직함을 달기에는 너무 젊어 보였다. 유려한 남자의 외견과 회장과 나란히 서도 전혀 기가 죽지 않는 당당함에 절로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두 사람의 성씨가 같은 걸 보면 손자나 뭐 그런 게 아닐까.

뚜렷한 이목구비에 웃음기 한 점 없는 얼굴은 상당히 날카로워 보였다. 넓은 어깨와 탄탄한 가슴, 비율이 좋아 늘씬하게 라인이 떨어지는 슈트를 모델처럼 소화해 내는 체형까지.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존재만으로 사람을 압도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저런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겠지. 처음부터 모든 걸 손에 쥔 사람이 되는 건 어떤 기분일까.

얼마나 그렇게 보고 있었을까. 생각보다 오래 시선이 머물렀나 보다.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아니, 분명 눈이 마주쳤다. 내내 강철 같던 낯이 나를 똑바로 보고 싱긋 웃었다. 관통당한 듯 짜릿하게 전율이 일었다.

뭘까. 뭐지.

도망치듯 연회장을 벗어났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반쯤 열린 문 뒤에서 폭포수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남자의 연설이 끝나서겠지. 낯선 시선이 씨앗처럼 심어 놓은 열꽃이 자라나 뱃속에서 거북하게 요동쳤다. 걷는 속도를 올렸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선택받은 소수 사이에 섞이고 싶을지 모르겠으나 나는 아니었다.

발걸음 소리조차 나지 않는 복도를 따라가자 곧 넓은 공간이 나왔다. 네모진 통유리 너머로 바깥이 비쳐 보였다. 새까매진 하늘 아래 무수히 많은 빛들이 있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진 빛덩이들을 따라 장난감 같은 자동차들이 줄을 이어 달렸다. 그 위에 내 음영이 유령처럼 흐릿하게 떠올라 있었다.

창틀에 이마를 기댔다. 차가웠다. 달아오른 몸이 가라앉는 듯했다. 한동안 그렇게 있었더니 조금 속이 풀렸다.

“작네.”

엄지와 검지를 벌려 그 사이에 건물 하나를 끼워 넣었다. 이 건물에서 저 건물로 선을 긋기도 하고, 영화 속의 괴수처럼 건물들을 손가락으로 찌그러뜨리는 시늉도 했다.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작은 유희였지만 썩 나쁘지 않았다.

문득 항상 이런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생활을 한다면 과연 다른 사람이 하찮아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넌 부모덕에 호강하는 줄 알아. 너도 편하게 사는 게 솔직히 좋지 않니? 엄마가 뭐 어려운 거 바라는 것도 아니고 공부만 하라고 하잖아. 다른 건 아무것도 안 시키고. 긴장 풀다 한번 굴러떨어져 봐, 가뜩이나 까탈스러운 네가 바닥 생활 할 수 있겠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몸이 편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내가 예민한 성정이라는 사실도, 부모가 이루어 놓은 결과에 기생하며 사는 실정도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닥 생활, 가난이라는 가정은 잘 와 닿지 않았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경쟁하듯 나를 겁박했지만 계급의 하락이란 막연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므로 의문이 들었다. 토론 수업을 위해 읽었던 조지 오웰의 소설처럼, 어머니와 아버지가 더 큰 위협을 들어 나를 저들의 구미에 맞게 통제하려고 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정말로 근원적인 생각.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쩔 것인가. 나는 미성년자였고 무조건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해야만 했다.

지금 생활이 못 견디게 힘들지는 않았다. 죽을 것 같아도, 죽지는 않으니까. 옷 아래로 몸을 물들인 푸른 멍들도 시간이 흐르면 누레지고 빛바래 갔다. 멍이 지워질 때쯤이면 다시 덧칠되는 캔버스는 질기고 질긴 면을 가지고 있어서 너덜거릴지언정 결코 찢어지지는 않았다. 차라리 그랬다면 좋았을 텐데.



‘넌 대체 뭐가 되려고 그러니?’



언젠가 어머니가 비꼬듯 내게 물었을 때,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 무엇도 되고 싶지 않았다. 내 유일한 바람은 미래가 아닌 현실에 있었다.

나는 아주 조금만 편해지고 싶었다. 쉬는 시간 삼삼오오 모여 앉아서 재잘거리고, 학교가 끝나고서는 제 무리들과 함께 PC방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 여느 다른 아이들처럼.

이런 내 바람이 혹시 누군가에게 도련님의 사치스러운 투정으로 보인다면, 매일이 아니라도 좋았다. 한 달, 아니 두 달에 한 번. 딱 그만큼만 숨통이 트였으면 하고 바랐다. 그마저도 내게는 허용되지 않았으니까.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하는 걸까.

내 숨이 닿은 유리창에 허연 김이 서렸다. 뚜렷하던 정경이 불투명한 나의 미래처럼 흐려져 갔다.

창밖으로 아직 철거되지 않은 대형 트리가 눈에 들어왔다. 왜 아까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거대했다. 크리스마스가 지난 지가 언젠데. 때마침 색색이 바뀌던 트리의 불빛이 구조 신호처럼 절박하게 깜박였다. 괜히 헛웃음이 나왔다.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잔잔하게 울려 퍼지던 캐롤과 웅성이던 사람들. 그 한가운데 놓인 커다란 트리 앞에서 어린아이는 기도를 했다. 아이의 곁에는 껑충하니 키가 큰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이제 세상에 없다. 홀로 살아남은 어린아이는 이제는 아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훌쩍 자라 버렸다. 나는 이제 산타도, 산타가 준다는 선물도 믿지 않았지만 누군가가 나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 하나만은 기억했다. 잊을 수 없었다.

나도 그때 죽어 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왜 아직 살아서 누더기를 기워 붙이듯 매일을 잇고 있는지 모르겠다.

허리를 세운 채로 유리창에 기댔다. 이마에 닿은 냉기가 먹먹한 가슴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한참 동안 그렇게 밭은 숨을 간신히 쉬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문득 인기척이 느껴졌다. 화들짝 놀라 돌아본 나는 몸이 굳었다. 그 남자였다. 연단 위의 점령자. 초라한 나와 달리 손아귀에 많은 것을 쥔 사람. 그가 눈에서 불을 뿜듯 나를 보고 있었다.

그 눈에 차마 대적하지 못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나를 보고 있다는 게 착각이었으면 해서. 하지만 주변에는 나뿐이었다.

왜 나를 저렇게 보지.

시선은 불편했다. 마치 그의 시선이 밧줄이 되어 나를 옭아매는 것 같았다. 갑갑한 마음에 목깃을 만지작거리는데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한재희.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어머니였다. 짜증 섞인 눈초리에 본능적으로 얼굴이 굳었다. 황급히 유리창에서 몸을 떼어 냈다. 억수같이 퍼부어 대기 시작한 세찬 단어들을 우산 없이 맞으며 나는 어머니를 따라 죄수처럼 얌전히 걸었다. 남자의 시선이 뒤통수에 달라붙는 게 느껴졌지만 곧 잊었다.

고단한 시간이 다시 찾아왔다.



* *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눈을 깜박였다. 그래도 시야에 잡힌 상(像)은 마찬가지였다.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은 유리 너머의 풍경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누군가의 절제된 손길이 닿은 선향의 끝이 발갛게 타오르며 흰 연기를 피워 올렸다. 정신이 몽롱해지는 향내였다. 무릎 꿇은 다리에서 전달되는 저릿한 감각이 더해져 오감(五感) 모두가 지금 이 순간이 현실임을 내게 일깨웠다. 그러나 머리는 여전히 내가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막 대학교에서 첫 번째 중간고사를 넘긴 참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고대해 마지않던, 최고 대학의 내로라하는 학과에서. 대학에 진학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일상에 나의 의지는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다. 뫼비우스의 띠를 닮은 나의 하루는 그런 것이었다. 어제와 같이 오늘도 반복되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왜 여기 있는 거지.

두툼하게 살이 차오른 중년의 남자가 내 앞에서 절을 했다. 그의 허리에서 삐져나온 와이셔츠 자락과 벨트 위로 튀어나온 살이 우스꽝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돌리며 웃는 대신 맞절을 했다. 남자는 허리춤을 꾹꾹 눌러 옷을 정돈하더니 이마의 땀을 훔치고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었다.

난 저런 사람 모르는데. 아버지. 아시는 분이에요?

눈으로 아버지에게 물었다. 네모나게 각진 틀 안에 갇힌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그럼 어머니 쪽인가. 마찬가지였다. 둘 중 누구도 내게 답해 주지 않았다.

급하게 마련된 두 개의 영정을 빤히 보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완벽한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면 늘 그랬던 것처럼. 이 두 사람이 서로를 원수같이 여겼단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알았다면 이렇게 나란히 놓지는 않았겠지.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을 내면서도 한민준과 하재연은 갈라서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그게 마치 나를 위해서인 것처럼 말했지만, 단지 그들이 지금껏 누리던 것들을 포기할 수 없어서일 뿐이었다.

누군가가 다시 분향을 했다. 긴 갈색 막대 끝에서 희미한 연기가 피어올랐다가 공기 중에 녹아 스러져 갔다.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순간 이명이 삐 울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웅웅 메아리쳤다.



‘엄마 아빠가 네게 해 준 게 얼만지 아냐. 그거 갚으려면 열심히 해야지. 듣고 있어, 한재희?’



빚이라니. 갚아야 한다니. 웃음조차 나지 않았다. 낳아 달라고 한 적 없다고 악을 쓰고 싶다가도 내가 부모에게 기생하는 건 사실이었기에 입을 다물었다. 게다가 어차피 듣지도 않을 이들이었다.

나는 꽤 성실한 채무자였다. 나를 두고 대리 만족을 하고 싶어 하는 두 사람을 위해 그들이 정해 주는 레일을 따라 움직였다. 좋은 결과를 내고 기대에 충족하는 것이 빚을 상환하는 방법이었다. 그들에게는 나의 노력이 너무나도 당연했다.

단 한 번. 벗어나려 한 적이 있었지만 결국 나를 보호하는 동시에 옥죄는 부모의 곁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내가 지워졌다. 남은 건 껍데기였다.

내 총 수면량은 건강을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관리되었다. 교우 관계는 넓을수록 좋았다. 그 깊이가 어떤지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으므로 나도 곧 중요치 않게 생각하게 되었다. 커피를 마시는 것도 귀찮아 카페인 알약을 물과 함께 삼키는 것도, 뱀이 벗어 놓은 허물처럼 얇고 버석한 교우 관계만을 갖는 것도 결국은 익숙해졌다.

그건 아주 얇게 언 호수 위를 걷는 것 같은 익숙함이었다. 어느 문학 지문에 나왔던 인물처럼 등 뒤에 총구가 겨누어진 채로 앞으로, 앞으로 발을 내딛는 기분으로 살았다. 발아래서 유리창처럼 투명한 얼음이 지직지직 금 가는 소리를 내는데도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어, 결국 하늘을 닮은 푸르고 시린 마음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던.

그 받고 싶은 빚 다 못 받아 내고 돌아가셔서 어떡해요, 아버지. 어머니.

눈으로 물었다. 영정은 답이 없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답하지 않겠지. 마음이 더없이 복잡했다. 채무를 한 번에 변제받은 채무자의 심정이 이럴까.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었다.

웅성이는 사람들의 소리가 귀를 울렸다.

“그렇게 건강하던 사람들이 어쩌다가.”

“교통사고라잖아요. 트럭 운전기사가 나이도 많고, 만취했대고…….”

그제야 어렴풋한 기억이 떠올랐다. 연락을 받았다. 그때는 인위적으로 가라앉힌 병원 관계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버지가 어머니가 웬일로 함께 차를 탔지.’ 하는 생각이나 막연하게 했다.

달려가 본 광경에는 할 말을 잊었다. 직접 보기 전엔 5톤 트럭과 부딪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감이 오지 않았다. 눈에 익은 차가 찌그러진 캔처럼 와작 구겨져 있었다. 그에 비해 트럭은 신의 망치처럼 형체를 온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은빛 트럭은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이 보였다.

내가 네 대신 그들을 처벌했어.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몽롱한 정신을 깜박 놓으니 어느새 이 자리였다. 검은 정장에 상모와 노란 띠. 억새처럼 나를 영좌 앞에 심어 놓고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마음이 많이 안 좋겠구나.”

누군가 내 손을 잡고 두드렸다. 아니요. 마음속의 목소리가 튀어나올까 봐 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을 아예 인식하지 않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묻는 사람도 답을 원하는 건 아니었는지 묵묵히 일어나 가 버렸다.

나의 마음은 아주 오래전에 바스라지고 부스러져 남은 것이 없었다. 기계에게 심장 대신 엔진을 박아 넣듯 그 무언가를 대신 넣어 움직여 왔다. 제련된 가짜 감정과 프로그래밍 된 대로 움직이는 기계. 그런 내게서 피붙이의 죽음을 애도하는 슬픔이 생겨날 리가 없었다. 애초에 그런 것이 두 사람과 나 사이에 있기는 했던가.

삐걱이는 시선을 다시 영정으로 옮겼다.

내게 쌓인 채무가 당신들이 죽어 사라졌다면. 내가 당신들에게 받아야 할 빚은 어떻게 받아 내야 하지?

마음이 일렁였다. 고장 난 인공 심장이 삐삐 경고음을 내는 것도 같았다. 숨이 가빠 왔다. 도움을 요청하고자 바깥을 보았으나 내게 시선을 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는 울고, 또 누군가는 웃으며 넓은 장례식장을 빼곡하게 사람들이 메우고 있는데도.

숨을 못 쉬겠어. 숨 쉬게 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