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황궁의 이브닝 1화



<프롤로그>

제국력 735년, 황성의 비취궁.

모든 사람들 앞에서 전령이 큰 소리로 고했다.

“……하여, 황궁의 모든 이는 아테마의 지그문트를 귀인(貴人)으로 맞을 준비를 하도록 하라.”

청천벽력 같은 어지(御旨)였다.

아테마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기쁜 소식에 활짝 웃던 이브의 얼굴은 쩡하니 얼어붙었다. 다들 신분에 맞는 예를 차리느라 고개를 숙이거나 엎드린 상태였는데도 이브는 자신을 향하는 시선들을 느낄 수 있었다.

“이상이 폐하의 어명이십니다.”

어지를 전달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온 전령이 공손하게 무릎을 꿇으며 이브에게 손에 든 두루마리를 바쳤다. 이 나라의 황제가 부재한 동안 황궁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황후가 어지를 받아 답해 마땅했으므로.

머리가 어찔하고 누가 덜미에 얼음을 쑥 밀어 넣은 듯 서늘해 온몸의 핏기가 가셨다. 이브는 겨우 전령에게서 어지를 받아 들어 의무적으로 입을 열었다.

“폐하의 어명 받드노라.”

이브의 말이 끝나자 다들 크게 외쳤다.

“폐하의 어명 받듭니다! 위대한 라 엠페라움에 영광 있으리라!”

황제의 어명에 예를 표하고 난 뒤, 이브는 다시금 의무적으로 어지를 쥐고 몸을 돌렸다. 황궁 기록사가 얼른 달려와 공손하게 어지를 받들어 모셨다. 이브는 제게 큰 충격을 준 두루마리가 금색 비단이 깔린 받침 위에 놓여 황실 서고로 향하는 걸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시 몸을 돌리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귀족들이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숨이 턱 막혔다. 아테마 친정(親征)으로 자리를 비운 황제 대신 국정을 처리하고 있는, 재상 세트라가 전령에게 따지고 들었다.

“갑자기 귀인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냐?”

세트라 호라이스 엠페라움. 그는 황제의 아우이자 제국에서 손꼽히는 권력자로, 황제 측근 중 한 명이다. 황제가 갑자기 후궁을 들여온다니, 그것도 패전국 출신이라니. 그로서는 따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그문트라면 분명 아테마의 첫째 계승자 이름일 텐데. 왕국, 아니 이제는 공국이지. 공국의 첫째 계승자를 후궁으로 삼겠다?”

이번에는 아이린 백작이 입을 열었다. 이브에게 한번 시선을 주었다가 고개를 돌리는 움직임에 플래티넘 금발이 흔들렸다. 냉엄하다 못해 차가운 얼굴이었으나 딱히 전령이 전해 온 소식 때문에 그런 건 아니었다. 서늘하고 날카로운 검날 같은 모습이 평상시 그대로였다. 아이린 팬텀, 그녀는 이브의 모친이자 팬텀가의 수장으로 귀족 세력의 구심점이기도 했다. 그녀가 두른 케이프 위, 은사로 새겨진 까마귀가 반들거리며 빛났다.

행정부 최고 책임자인 황제의 아우와 귀족 중 가장 넓은 봉토를 소유하고 있는 팬텀 백작, 두 권력자가 물으니 전령은 깊이 고개만 숙여 보였다.

“송구합니다. 지그문트 님은 아테마의 첫째 계승자가 맞으며, 또한 아테마는 공국이 아니라 왕국의 위치를 그대로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뭐라? 공국이 아니라 왕국이라고?”

재상 세트라가 거의 소리를 지르다시피 했다.

엠페라움의 국고는 십여 년에 걸친 크고 작은 전쟁들로 인해 건국 시절부터 착실하게 쌓아 둔 금은보화들이 점차 눈에 띄게 줄어드는 중이었다. 반면 국가의 반절 가량이 산맥인 아테마에는 광산들이 많다.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면 아테마를 공국으로 격하시킨 뒤, 진상되는 온갖 공물들로 국고를 채우려 했던 세트라의 계획이 산산조각 났다. 세트라는 거의 전령의 멱을 잡을 기세였다.

“그게 무슨 소리냐? 전쟁에서 승리하였는데 어째서 아테마가 왕국 그대로인 것이야!”

“송구하옵니다. 폐하께서 이르시기를, 이는 지그문트 님을 귀인으로 맞이하는 대신의 조건이라 하셨습니다. 지그문트 님을 맞이함에 부족함이 없게 하라 전하기도 하셨습니다.”

이제야 어지의 충격에서 벗어난 귀족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 말이 뜻하는 바가 명확했기 때문이었다.

이제까지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준 적 없는 황제다. 그런 황제가, 왕족이든 귀족이든 내키는 대로 아무나 데려와도 되는 패전국에서 굳이 대가를 지불해서까지 귀인을 맞이하겠다 한다. 더군다나 맞이함에 부족함이 없게 하라고 특별히 지시하기까지 했으니 엠페라움의 젊은 황제가 의미하는 바가 명백했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 지그문트란 자가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어지를 받들기 위해 모였던 귀족들의 말소리가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후궁이라니, 그것도 엠페라움의 어느 귀족 출신이 아니라 패전국 아테마의 제1위 계승자라니 다들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전통에 어긋난다, 아테마가 후궁 지그문트를 등에 업고 내정에 간섭할 것이다, 귀족들을 무시하는 처사다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이 받은 충격은 이브가 받은 것에는 반의반도 미치지 못했다. 황제가 후궁을 들인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이브는 내도록 멍한 상태였다. 자신의 모친 아이린 백작이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도, 귀족들이 자신을 힐끔거려도 상관치 않았다. 그럴 정신이 되지 못했다.

이브는 귀족들이 떠들게 내버려 둔 채 힘없이 내실 문을 열고 나갔다. 긴 복도를 지나자 지키고 있던 기사 둘이 절도 있게 거대한 문을 열었다. 황제와 귀족들이 회의를 하는 ‘비취의 방’이기에 문에는 아름다운 청색 비취들이 박혀 장식이 되어 있었다.

“이브 님.”

무기를 지니고 있기에 비취의 방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벨제가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예리한 시선으로 안색을 살폈다. 이브는 호위기사가 자신을 살피거나 말거나 스윽 그 옆을 스쳐 지나갔다. 벨제가 바짝 이브의 뒤에 붙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응…….”

“안 좋은 일입니까?”

대꾸도 하지 않던 이브는 비취궁을 완전히 나가 수국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정원을 가로지를 때에야 겨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승전하셨다.”

“전쟁에서 이기면 좋은 것이 아닙니까? 이제 폐하께서도 귀환하실 테니 이브 님에게도 좋은 일이고요. 매일 같이 폐하 오시기만을 기다리셨잖습니까.”

이브가 잠시 말끄러미 벨제를 바라보았다. 그 호수 같은 눈동자에 말갛고 서러운 빛이 어렸다. 어린 주인을 섬긴 지 벌써 10년인데, 벨제는 때때로 이브가 자신을 이런 식으로 바라보면 잠시 정신이 멍해지곤 했다.

그러고 보면 황궁에 들어온 뒤로 이브는 웃지 않게 된 지도 꽤 되었다. 벨제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이브가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돌아오지 않으시면 좋겠어.”

“예? 누가 들을까 무섭습니다. 그 무슨 불경한 말씀을…….”

그렇게 말하면서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태도로 벨제가 설렁설렁 주위를 살폈다. 이브는 다시 타박타박 힘없이 걷다가 중얼거렸다.

“그래, 돌아오지 않으시면 좋겠다는 말은 취소할게.”

제국 엠페라움의 황제, 오닐 오젤리스 라 엠페라움이 친히 전쟁터에 나간 지 벌써 1년이나 되었다. 재상 세트라와 더불어 황제 대신 황궁의 자리를 지키면서 이브는 매순간 순간 오닐을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언제쯤 전령이 승전보를 가지고 돌아올까, 언제쯤 오닐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듣고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안달을 냈다. 그런데 1년이라는 기나긴 기다림 끝에 돌아온 건 황제가 후궁과 함께 돌아온다는 소식이었다.

이브가 입술을 깨물었다. 오닐과 혼인한 지도 3년이나 지났다. 행복하면서도 동시에 괴로웠던 그 시간 동안 오닐이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황후인 이브에게조차 마음을 주지 않았다는 게 유일한 위안이자 고통이었다. 그런 유일한 위안이 이제 사라져 버렸다. 오닐이 누군가에게 마음을 내어 주고 귀애해 준다는 생각만 해도 이브는 가슴이 저몄다.

그는 더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긴 의자에 앉았다. 그렇게 한참을 서러움에 잠겨 있었다. 이브의 어두운 안색을 살피다가 벨제가 조용히 물었다.

“잠시 뒤에 있을 테라리움은 취소하도록 할까요?”

“……아냐. 가자.”

작은 정원을 의미하는 ‘테라리움’은 젊은 귀족들을 대상으로 한 모임이었다. 실제로 2주에 한 번 정원에서 이루어지는 이 모임은, 황제 혹은 황후가 직접 모임에 참가해 앞으로 제국을 이끌어 나갈 인재들에게 가르침의 영광을 베푼다는 게 취지였다.

이브는 자신의 기분 상태를 이유로 이 의무를 저버릴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엉망진창인 기분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테라리움이 열리는 장미 정원에 도착할 때까지도 이브의 표정은 어두웠다. 미리 당도해 기다리고 있던 귀족가의 자제들이 이브의 안색을 보고는 눈을 굴렸다.

“룬 엠페라움을 뵙습니다.”

그사이 어지의 내용이 전해졌는지 그들은 인사를 하면서도 모두 다 안다는 얼굴로 이브를 흘끗거렸다. 이브가 눈을 깜박이며 사람들을 둘러보고는 말을 건넸다. 테라리움을 시작하는 말은 항상 가장 높은 직위의 사람이 맡았다.

“오늘 날씨가 참 좋지 않나?”

화창하니 날씨가 좋긴 했다. 정작 이브의 표정에는 어둑어둑한 폭풍우가 몰려오기 직전이라 그렇지. 그들은 장미 정원에 들어온 이브가 수심 깊은 얼굴로 의자에 앉는 걸 지켜보았다.

에블랑 팬텀 엠페라움.

그는 황후로서 제국에서 황제 외에 유일하게 엠페라움이라는 호칭으로 불릴 수 있는 존재였다. 이름에 엠페라움을 달 수 있는 사람은 꽤 된다. 하지만 엠페라움, 감히 제국의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 사람은 제국에 딱 두 명뿐이었다. 황제와 황후. 그 정도로 명예롭고 고귀한 자리기에 대대로 엠페라움의 황후는 황제와 비등한 권력을 누려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브는 아니었다. 제5황자 오닐 오젤리스가 황제 오닐 오젤리스 라 엠페라움이 되도록 만든 일등 공신이 팬턴 가임에도, 오닐은 이브를 대우해 주긴 하되 총애하지는 않았다. 황궁에서 황후의 권력은 황제에서 나오는 것이라. 그렇기에 황궁에서 이브의 영향력은 작았다.

사람들은 이브가 왜 황제의 총애를 얻지 못하는 가에 대해 떠들어 대곤 했다. 이브의 신분이 비천한가? 아니다. 이브는 개국 시절부터 명맥을 이어 온 유서 깊은 팬텀 백작가의 장자다.

남자라는 것도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반신(半神)인 초대 황제 라 엠페라움의 핏줄을 진하게 타고 난 황족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또한 이브는 남자이면서도 자식을 가질 수 있는 룬이라 후계 걱정도 없다.

성정이 안 좋은 거나 흠이 있는가? 하면 그 또한 아니었다. 룬 엠페라움이 되기 전의 이브는 기사 작위까지 딴, 젊고 사교적인 청년으로서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그렇다면 외모가 떨어지는가? 그것만은 절대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오늘은 무언가…… 새로운 소식이 있나?”

이브가 느리느릿 물었다. 다들 눈치만 보는 가운데 조용히 미소를 짓는 사람이 있었다. 피오넬 벨라스가 영애였다. 팬텀가는 적이 많다. 이 말은 이브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자들도 꽤 된다는 의미다. 피오넬도 그중 하나였다. 팬텀가의 차남 브리건 팬텀, 그 재수 없는 자에게 당한 것이 많기에 그녀는 이브에게라도 그 분을 풀리라 다짐했다. 그녀는 오로지 이날을 위해 테라리움에 참가해 왔다.

“오늘 전해진 승전보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어떻습니까, 이브 님.”

무언가 말하려는 듯 이브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 그러다 이내 동요한 얼굴로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피오넬의 얼굴에서 미소가 조금 사라졌다.

“오늘 승전보라……. 그럼 그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

이브가 눈을 내리깔았다. 비취 색깔의 눈동자는 속눈썹에 반쯤 가려진 상태에서도 마치 희미하게 빛나는 듯했다. 차를 마시려는 듯 이브는 손을 뻗어 찻잔을 쥐려다가 다시 멈추었다. 숙였던 고개를 들자 풍성한 플래티넘 금발이 환하게 반짝거리며 빛났다.

그뿐인가, 이브의 그림자 속 별빛도 은은하게 빛나 시선을 빼앗았다. 룬들이 가진 저 특유의 ‘빛나는 그림자’, 혹은 ‘어두운 광휘’ 속에서 빛무리가 아름답게 너울졌다. 피오넬은 갑자기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와 똑같은 크기의 눈동자일 텐데 왜 더 커진 것 같지?

“실로 제국에 좋은, 기쁜 소식이었지.”

“그렇……습니다. 폐하께서 친히 검을 쥐시어 저 버릇없는 아테마를 정벌하지 않으셨습니까? 뿐만 아니라 이번에 폐하께서 손수 데려오…….”

피오넬의 말꼬리가 느리게 흐려졌다. 이브가 말끄러미 피오넬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눈동자의 크기나 색에는 변함이 없는데도 이상하게 착각이 든다. 더 깊고 진해지고, 물기가 어려 금방이라도 눈물이 후두둑 떨어질 것 같지 않은가.

“벨라스가 영애?”

“손수, 손수 데려오시는…….”

피오넬이 불끈 주먹을 쥐었다. 미소를 짓느라 입꼬리도 파들파들 떨렸다. 이브가 황제와 사이가 소원하다는 건 누구나 다 안다. 그러니 황제가 손수 직접 데려온다는 후궁이 이브에게는 얼마나 충격적이었겠나. 그걸 은근하게 들먹이려고 했는데, 이브가 물끄러미 바라보니 괜히 얌전히 엎드려 울망한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는 강아지를 걷어차거나 꼬리를 즈려밟는 느낌이 들었다.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결국 지고 말았다.

“……데려오시는, 아테마의 금은보화들 말입니다. 국고에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어느새 후궁 지그문트는 아테마의 금은보화로 바뀌었다.

‘젠장! 또야!’

이브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려는 시도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번번이 시도조차 제대로 못 했을 뿐. 그 깊은 눈동자에 함락될 때마다 피오넬은 이브가 더욱 미웠다. 미운데 도무지 상처를 입힐 수가 없었다.

이브는 딱히 울먹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눈가에도 눈물 한 방울 고이질 않았다. 그럼에도 이브는 누구의 심금이라도 울릴 수 있는, 시무룩하고 처연한 표정을 지을 줄 알았다. 고의인지 타고난 것인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저런, 또 졌군.’

피오넬의 심정을 잘 아는 이들이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황궁에서 영향력이 없는데도 이브가 테라리움이며 온갖 사교의 장에서 따돌림당하거나 무시당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저것이었다. 한때 이브가 자유로운 영식의 몸일 때 인기가 많았던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이브에게는 도무지 공격적으로 대할 수 없는 모호함이 있었다.

“피오넬 영애의 충성심은 여전하군. 그래, 확실히 아테마의…… 전리품들은 엠페라움에 도움이 되겠지.”

으윽. 피오넬은 죄책감에 시달렸다. 후궁의 후자는 꺼내지도 않았는데 오늘 어지의 내용을 다시 떠올린 이브의 눈동자에 물기가 감돈 탓이었다. 왜 눈물이 눈가로 안가고 빌어먹을 눈동자로 간단 말인가. 저 눈썹이 그리는 곡선은 또 왜 저리 유려하단 말인가. 차라리 눈물이라도 흘린다면 싸구려 동정을 산다고 비난을 했을 텐데.

이브와 시선을 마주치니 마치 큰 죄라도 지은 기분이었다. 이브를 비롯하여 팬텀가는 결코 좋아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피오넬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피오넬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무엇 하나 부족한 점 없는 이브를 황제는 대체 왜 멀리하는 것인가?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피오넬의 발언 이후 그날 테라리움의 분위기는 어색하고 조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정작 이브는 테라리움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지그문트.’

다른 귀족들이 조심스럽게 테라리움을 진행하는 동안 이브는 낯선 이름을 곱씹어 보았다. 이름을 혀끝으로 새겨 볼 때마다 거대한 망치가 마음의 모서리란 모서리는 죄다 두들겨 찍어 누르는 듯했다.

‘아테마의 지그문트를 귀인으로 맞을 준비를 하도록 하라.’

테라리움이 진행되는 내내 이브는 오늘 들은 어명에 대해서도 느리게 떠올렸다. 마음이 아파서 차마 빨리 되새길 수는 없었다.

그날 이브는 멍한 정신으로 모든 일을 처리했다. 테라리움에서도 어떤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는지 모르겠고, 황궁의 일도 어찌 처리했는지 기억이 안 났다. 이브는 말을 하지 않지, 사람들은 이브 눈치를 보느라 승전보의 승자도 꺼내지 않지. 그날 하루 종일 벨제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마침내 해야 할 일을 모두 처리한 이브는 터덜터덜 걸었다. ‘아테마의 지그문트를 귀인으로 맞을 준비를 하도록 하라.’ 이브의 머릿속에서 전령의 목소리는 어느새 낯익은 오닐의 목소리로 변해 있었다. 더 가슴이 아팠다.

이브는 힘겹게 걸어 오팔궁으로 돌아왔다. 그제야 이브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침소에 들어서자마자 소리 없이 눈물을 쏟아 내는 이브에게 벨제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이브 님…….”

달래려는 몸짓으로 어정쩡하게 어깨 위 허공을 슬슬 쓰는 시늉을 하며 벨제가 물었다.

“또 술 잘못 보관하셨습니까?”

“아니야!”

안 그래도 서러운데 저런 질문이나 받고 있자니 이브가 울컥했다. 그가 눈물을 흘릴 때면 모두가 난감해하며 어떻게든 달래려고 했으나 벨제는 달랐다. 그는 이브의 서러운 표정이나 눈물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소수의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아니면 또 속병 나셨어요? 그러니까 술 좀 그만 드시라고 했잖습니까.”

이브가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요즘 그놈의 보약 먹느라 술도 잘 못 마시는 걸 알면서 뻔히……. 그래도 호위기사라고…… 측근이라고……. 그간 알고 지낸 게 얼만데 그런 일 때문에 우는 게 아닌 건 눈치채야 하지 않나?

“폐…하가…….”

말을 이으려다가 꾹 참는 이브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눈물이 조롱조롱 달린 긴 속눈썹과 서러워서 열기가 오른 발간 뺨, 피부 위로 흐르는 말간 눈물은 그 자체로 예술이었다. 하지만 이리 우는 걸 한두 번 본 게 아니었기에 벨제는 이브가 떠듬떠듬 말을 모두 이을 때까지 인내심 깊게 기다렸다.

“아테마의 왕족을 후궁으로 들이신다고…….”

겨우 말을 잇자 또 눈물이 와르르 쏟아졌다. 벨제는 한숨을 쉬며 이브에게 물을 좀 먹였다. 속이 상해 술이라도 마셔야겠다고, 술을 내놓으라고 이브의 손이 파닥거리는 걸 그는 못 본 척 무시했다.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군요.”

벨제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눈물이 쑥 들어간 이브가 고개를 들었다. 오늘 이브가 제대로 요기를 하지 못한 걸 떠올린 벨제가 시종에게 간단한 먹을 것을 내오라 지시했다.

“폐하께서는 이브 님에게 마음이 없으시니, 언젠가 다른 분을 맞이하실 것 같긴 했습니다.”

너무나 노골적이다 못해 무례한 분석에 기가 막혀서 잠시간 눈물도 사라진 이브가 한숨을 쉬었다.

“위로 고마워, 벨제.”

“별말씀을요. 항상 말씀드렸지만, 빨리 폐하를 향한 마음은 접으시는 게 어떻습니까. 자, 식사하십시오.”

벨제가 덤덤하게 조언하며 이브의 앞에 쟁반을 놓았다. 따뜻한 스프와 갓 구운 흰 빵, 그리고 샐러드로 이루어진 식사였다. 이브는 벨제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마음을 접으라니, 그런 게 가능했다면 옛날에 그리했겠지.

성의 없이 스프를 떠서 숟가락질 하는 체했다.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후궁이라니, 다시 한번 어지 내용을 머릿속에서 떠올리다가 입맛이 훅 떨어진 이브가 결국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몰래라도 폐하 따라 전쟁터에 갈 걸 그랬어.”

쟁반을 치우던 벨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브는 한숨을 쉬며 창가로 걸어갔다. 달빛을 받자 이브의 그림자 속 별들이 은은하게 빛났다. 룬의 어두운 광휘. 라와 더불어 신의 가호를 받은 룬은 그 증거로 햇빛과 달빛에 빛나는 그림자를 갖는다. 그들의 그림자에는 어두운 가운데 항상 별처럼 반짝이는 빛무리가 존재했다.

“전쟁터가 얼마나 끔찍한 곳인데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브는 고개를 돌려 벨제를 바라보았다. 기사 정복, 단정한 옷차림, 절도 있는 움직임까지, 황궁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기사의 모습이었다. 다만 벨제의 허리에는 다른 기사와는 다르게 특별히 검이 두 개 매달려 있었다. 잠시 검 두 개에 시선을 주었다가 이브가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전쟁터가 어떤 곳인지는 나도 잘 알아.”

“아시는 분이 그러십니까?”

“아니까 그러는 것이지.”

전쟁터에서 겪을 고통이 지금 이 괴로움보다는 크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전장은 그에게 그리 괴로운 곳만은 아니었다. 이브가 마른침을 삼켰다. 가슴이 답답하다 못해 먹먹하였다.

지그문트란 사람은 나와 무엇이 다르기에 오닐이 마음을 주었을까? 내게 무엇이 부족하기에 오닐의 마음을 얻어 내지 못한 걸까?

벨제가 쟁반을 치우러 사라진 사이 이브가 꾹 눈을 감았다가 떴다. 오닐, 오닐. 폐하. 떨리는 숨결을 뱉으며 이브는 오닐을 홀로 짝사랑해 온 길고 긴 시간을 떠올렸다.

가장 먼저 떠오른 기억은 4년 전, 어느 백작가에서 있었던 여름날 밤의 파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