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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마스터는 사기꾼 1권 2화
위기의 클로즈 베타 (1)
파라마스타 왕국, 대륙 동쪽에 위치한 아침의 나라. 하르코스탄이라는 노쇠한 왕이 다스리는 국가로서 아트라 대륙의 네 왕국 중 하나다.
비단 이곳만이 아니라, 현재 대륙의 왕들은 모두 건강이 많이 위태로운 상태였다. 예전보다 걱정거리가 부쩍 늘은 게 그 이유였다.
“몇 년 사이에 마황군들이 더욱 난폭해졌네.”
하르코스탄이 초췌한 얼굴로 비단실 같은 흰 수염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왕국 곳곳에 그들의 거점이 늘어나면서 이 파라마스타의 선량한 국민들이 고통받고 있지.”
“알아.”
그 앞에 앉아 있는 나는 다리를 꼬고 턱을 괸 채였다.
“자네를 부른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네. 아주 오래전, 마황군이 세상에 등장하면서부터 이 세상에 마나가 폭주하기 시작했거든.”
“알아.”
“자네에게 부탁할 건 딱 한 가지…….”
“알아, 안다고. 나도 안다고, 새끼야.”
인트로의 스토리는 이미 지겹도록 봐서 죄다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나를 따분하게 만드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하르코스탄 녀석의 말이 너무 느릿느릿한 게 문제였다.
“어떻게든 멸망을 막는 데 보탬이 되라는 거 아냐. 여행을 떠나 마황군을 직접 물리치든, 아님 도시를 튼튼하게 만들든, 그것도 아니면 강력한 물건을 구해다가 다른 헌터들에게 팔든, 뭘 할지는 각자 알아서 하면 되는 거고. 어? 맞지?”
따발총처럼 대신 쏟아내는 인트로 멘트에 하르코스탄이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끝났지? 그럼 이제 그거나 내놔.”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얇고 납작한 무언가를 홱 뺏어 들었다. ID카드였다.
“…….”
“왜, 뭐 할 말 있어?”
예의상 물어보자, 하르코스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짐은 아트라 대륙의 카킹 중 한 명이네. 자네와 신분부터가 다르단 말일세.”
“그래서?”
“그러니까 앞으로는 조금 더 예의를 갖춰주게나.”
하르코스탄이 아니꼬운 말투로 강력하게 주장했다.
“예의?”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온다.
“야, 니 신분이 어떻게 나보다 높냐?”
“그게 무슨 말이지?”
“무슨 말이긴. 넌 기껏해야 한 나라의 카킹이잖아. 난 무려 이 행성의 구원자거든? 용사 모르냐? 근데 어디서 건방지게 예의 타령이냐? 너부터 갖춰라, 예의.”
대답을 들은 그는 재밌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었다.
“껄껄, 아무래도 자네가 착각을 좀 하고 있는 것 같군. 계급 사회에 구원자라는 신분은 없지 않나. 아무리 여기가 자네 세상이 아니라곤 하지만 이 세상에도 엄연히 지켜야 할 법도와 규칙이란 게 존재하네. 그러니까 짐의 말은, 사회라는 틀 안에서의 예의를 갖춰달라는 거라네.”
“흠, 그래. 사회인으로서의 자세라는 거지?”
“바로 그걸세.”
하르코스탄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예의를 차리고 어쩌고 하는 건 문제가 없는데, 그럼 네놈이 방금 한 말들 신문에다가 대서특필해도 괜찮지?”
“시, 신문이라니?”
“‘파라마스타의 카킹 하르코스탄, 용사 마르디노 억압’, 이런 타이틀은 어때?”
“자, 잠깐, 억압이라니! 짐이 언제…….”
“불만 없는 거지? 그럼 수고해라. 난 이만 간다.”
“잠깐……!”
급히 불러 세우는 하르코스탄을 뿌리치고, 미련 없이 성을 빠져나왔다.
하여간 카킹들은 하나같이 기고만장한 놈들뿐이다. 물론 진짜로 신문에 낼 생각 따윈 없었다.
‘카킹은 무슨 얼어 죽을 카킹이냐. 네놈한테 예의 차린다고 떡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
나는 왕성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날린 뒤 수도 광장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일단은 튜토리얼을 진행한 뒤 클로즈 베타 서버가 잘 열렸는지 확인할 생각이었다.
길을 따라 도심 쪽으로 들어가니, 수많은 오더코르트인들이 돌아다니고 있는 거리가 나타났다.
나를 알아본 몇몇 오더코르트인들이 인사를 했다. 건성으로 손을 흔들어주었다.
‘흠, 수도는 뭐 괜찮네.’
게임을 즐길 생각이 없더라도 들어오고 싶도록 만들라고 몇 번을 강조한 만큼 수도는 호화로우면서도 아주 웅장했다. 중세 로마의 한복판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나처럼 이미 인트로를 끝마치고 나온 유저들도 여럿 보였다.
그들은 모두 손가락을 꿈틀댄다든가, 제자리에서 폴짝 뛰어본다든가, 아니면 바닥의 벽돌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신기해하고 있었다.
“우와, 쩔어.”
“헐, 여기가 정말 게임 속임? 미쳤네.”
“진짜 같아도 너무 진짜 같은데? 현실감, 현실감 하길래 얼마나 대단한가 했더니…….”
한 사람이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을 손으로 만져보며 말했다.
“그니까요, 그냥 현실이랑 똑같아요. 꿈꾸고 있는 거 같지 않아요? 진짜 쩐다.”
그야 당연히 현실이랑 똑같겠지. 가상 현실 게임 어쩌고 하며 홍보하지만, 사실 대체 현실이나 다름없으니까. 물론 내게는 그냥 리얼 현실이지만.
유저 중에는 은색 테두리에 액정이 달린 디지털식 아티팩트를 들고 뒤적거리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하르코스탄에게 받은 ID카드였다.
‘그러고 보니 카드가 있었지.’
생각난 김에 카드를 꺼내 들고 바라보자 액정이 저절로 켜졌다. 빽빽한 문구가 홀로그램 형식으로 눈앞에 펼쳐졌다.
[본 카드는 신분증과 동일한 효력을 갖습니다.
카드를 통해 다양한 인터페이스를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카드는 손에서 놓으시면 자동으로 사라집니다. 다시 소환하기를 원하시면 ‘카드’라고 외쳐 주십시오.
오더코르트의 주민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닉네임을 등록해야 합니다.
닉네임을 설정하지 않을 시 모든 게임 이용에 제한을 받습니다.
닉네임을 등록하시면 자동으로 튜토리얼이 진행됩니다.
닉네임을 등록하시겠습니까?]
망설임 없이 ‘예’ 버튼을 눌렀다.
“응?”
그러나 그뿐이었다.
재차 버튼을 누르려고 하자, 이번엔 카드가 아예 통째로 가루처럼 흩어지며 사라져 버렸다.
“뭐야, 왜 안 돼? 카드.”
명령어를 외웠다. 하지만 손에 생겨나야 할 카드는 나타나지 않았다.
“카드, 카드, 카드.”
몇 번이고 다시 외쳐 봐도 마찬가지였다.
“아씨, 뭐냐고.”
구시렁대며 주위를 둘러보자, 다른 클로즈 베타 플레이어들은 모두 닉네임 등록을 끝마쳤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 깰룩아, 나 ID카드가 사라졌는데?
―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깰룩?
메시지 마법을 보내자, 항상 그렇듯 칼같이 빠른 답신이 도착했다.
― 몰라. 들고 있는데 갑자기 사라졌어.
―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알아보겠습니다, 깰룩.
깰룩이는 배불뚝이가 내게 붙여준 아주 유능한 조수였다. 원래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어쨌든 그냥 저렇게 부르고 있었다.
“흠.”
나는 카드가 사라져 허전해진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문득 건물들 위로 치솟아 있는 커다란 시계탑의 꼭대기가 눈에 들어왔다. 파라알 광장 중앙에 있는 시계탑이었다.
“이렇게 된 거 유저들이나 구경해볼까.”
자연스레 광장으로 향했다.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카드를 붙잡고 튜토리얼을 진행하고 있었다.
얌전히 광장의 벤치에 기대앉아 느긋하게 눈동자를 굴리며 플레이어들의 커스터마이징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쟨 무슨 커스터마이징을 코스프레 수준으로 해놨냐. 되게 웃기네, 저거.’
빨간 조끼에 밀짚모자를 쓴 플레이어를 보며 키득거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누군가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고개를 돌리자, 엄청 하얀 피부의 여성 유저가 나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저기, 죄송한데 혹시 ‘성향’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어리둥절하여 그녀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어떻게 해야 되나요?”
나한테 묻는 건가?
“그걸 왜 저한테 물으세요? 튜토리얼에 나와 있잖아요.”
대답이 까칠해서인지, 그녀는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제대로 안 읽고 대충 넘겨 버려서요. 다짜고짜 성향을 얻으라는데 어떻게 얻는 건지 알 수가 있어야죠.”
“대충 넘겼다고요? 아니, 읽으라고 써 놓은 글을 왜 그냥 넘겨요? 그거 쓰느라 얼마나……. 아, 됐고, 저도 모르겠으니까 그냥 저 사람들한테 가서 물어보든지 하세요.”
나는 광장 중앙의 시계탑 근처를 가리켰다.
“뭐라구요? 아니, 뭔 NPC가 이따구야?”
“NPC?”
뭐야, 지금 나를 NPC로 착각하고 있는 거였냐?
황당한 표정을 짓자,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ID카드를 내 얼굴을 향해 슥 들이밀었다.
삐빅.
NPC를 식별하는 작은 효과음이 들렸다. 그녀는 다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친밀도가 낮은 건가.”
그럴 리가 있냐! 아니, 도대체 내가 왜 NPC로 식별되는 건데!
“저기, 뭔가 착각하고 계신…….”
“그러지 말고 이거 한번 드셔보세요.”
그녀는 말을 끊으며, 처음 접속한 유저들에게 기본적으로 지급되는 빵을 한 조각 내게 건넸다.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든다. 재빨리 빵을 도로 그녀에게 쥐어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싫어요. 귀찮게 굴지 말고, 저 사람들한테나 가서 물어보라니까요.”
그러나 그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들러붙었다.
“진짜 딱 한 입만 드셔보세요. 자, 아∼”
“아니, 됐다니까 그러네……. 우웁!”
그녀는 단번에 내 턱을 잡더니, 강제로 입을 벌리고 손에 들고 있는 빵을 목구멍 속 깊은 곳까지 욱여넣었다.
“우윽! 켁! 켁켁! 무울! 물! 흐으으윽!”
“헛! 퀘스트인가?”
그녀는 들뜬 표정으로 바로 옆의 분수대 쪽으로 단숨에 달려가더니, 기본 아이템인 수통에 물을 떠 왔다.
“여기 있어요, 물!”
수통을 홱 낚아채 목구멍에 물을 급히 쏟아부었다.
“커헉, 커헉. 진짜 뒤질 뻔했어, 진짜로 뒤질 뻔했다고!”
“오오! 제가 목숨을 구해드린 거죠? 고마우시죠?”
보상을 바라는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자, 이성의 끈이 끊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미친… 개 똥 싸는 소리하고 자빠졌네. 저 지금 님 때문에 죽을 뻔했거든요?”
“뭐라고요?”
하지만 화를 낸 쪽은 오히려 그녀 쪽이었다.
“하, NPC가 뭐 이래? 이런 쓰레기 같은 게임을 봤나. 아오, 빡쳐. 클베 당첨됐다고 신나서 들어온 내가 바보지.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제작사가 나와서 게임이랍시고 홍보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이딴 게임 두 번 다신 하나 봐라!”
필터링된 욕이 이어졌다.
“자, 잠시만요!”
씩씩거리며 멀어지는 그녀를 재빨리 따라가 붙잡았다.
“뭐야?”
“하하, 기분 많이 나쁘셨죠? 죄송합니다. 이 게임은 원체 모든 NPC들이 현실적으로 반응을 하게끔 프로그래밍되어 있거든요.”
“현실적으로?”
“방금 님이 저한테 빵 먹이는 바람에 죽을 뻔했잖아요. 보통 사람들 같으면 저보다 더 심하게 반응했겠죠. 현실에서 님이 이걸 겪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잠시 땅을 내려다보던 그녀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내 시선을 피했다.
“그, 그건 그렇지만.”
“현실적인 게임이라 그런 겁니다. 친밀도를 올리려는 건 좋은 시도지만, 그렇다고 강제적으로 막 그렇게 음식 먹이고 그러면 오히려 관계가 악화될 수 있어요. 현실에서 다른 사람이랑 친해지는 것과 똑같습니다.”
“…….”
“이번은 처음이니까 제가 봐드리는 겁니다. 다음부턴 어디 가서 NPC라고 막 그러지 마세요. 진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라고요. 아까 뭐라고요? 성향 얻는 법? 알려드릴게요.”
조금 시무룩한 표정을 짓던 그녀는 대번 화색을 띠더니, 서둘러 ID카드를 꺼내고 메모를 시작했다.
지금은 클로즈 베타 테스트가 막 시작된 시점. 출시 이후로도 계속할 생각이 있다면, 이런 별것 아닌 정보 하나라도 알아두는 편이 유리하다.
보아하니 그런 것은 알고 있는 눈치다. 애초에 소리 소문 없이 진행한 1차 클베에 테스터로 뽑혔다는 데서 게임 쪽 소식에 빠른 유저일 게 분명했다.
그럼 씨, 웬만한 게임은 다 해봤을 텐데 대체 왜… 아휴, 아니다.
“체월에선 유저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게임에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니까 성향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특정 조건을 만족하는 행동을 취하기만 하면 되는 거죠. 이해했어요?”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어쩐지 신통치 않았다.
“감이 잘 안 오는데, 빵을 하나 더 주면 자세히 알려주나요?”
그녀는 메모를 하다 말고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 그니까 예를 들면, 요리사 성향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요리를 하면 된단 소립니다.”
“아아, 그렇구나. 생각보다 별거 아니었네.”
반쯤 가방에서 나온 빵은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을 때, 문득 그녀가 내게 손을 내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그녀는 더 의아해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퀘스트 보상은요?”
“…….”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끝까지 손을 안 치우는 걸 보니 진심이다.
‘때릴까? 딱 한 대 정도는 때려도 괜찮을지도 몰라.’
광장 한복판에 선 채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니야, 내가 어떻게 3년을 버텼는데. 참자, 참아야 해.’
스스로를 설득하며 간신히 분노를 삭였다.
하는 수 없지. 그 방법을 쓸 수밖에. 이렇게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저쪽에서 먼저 저런 식으로 나오면 어쩔 수가 없다.
“아휴, 이걸 어쩌죠? 제가 지금 가진 게 없어서 말이에요.”
텅 빈 주머니를 보여주자, 그녀의 표정이 단번에 구겨졌다.
“대신 엄청난 정보를 하나 알고 있는데, 괜찮으시면 이거라도 알려드릴까요? 고오급 정보인데, 사실 이거 저 혼자서 꿀꺽하려고 했던 건데, 어쩔 수 없죠.”
그러자 예상대로 그녀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미끼를 덥석 물었다.
“그거 듣는 걸로 할게요! 뭔데요?”
“그러니까…….”
주위를 둘러보며 손짓을 하자, 쫄랑쫄랑 다가와 귀를 가져다 댄다.
“…게 있어요.”
“헐, 정말요? 고대 왕족들의 무덤? 거긴 어떻게 가는데요?”
그녀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저기 저쪽에 빨간 지붕 하나 보이세요?”
“성당 옆에 저거요?”
“네. 그 옆에 난 길을 따라서 쭉 걷다 보면 수도 동문이 나오거든요? 그리로 나가세요. 그럼 오른쪽에 큰 강이 하나 있어요. 강 따라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시면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보여요. 보시면 딱 알 거예요. 그 나무 아래예요. 보물이… 크흠, 잔뜩 묻혀 있는 무덤. 진짜 아무한테도 얘기하시면 안 돼요. 제가 운 좋게 카킹님 말씀하시는 걸 엿들은 거거든요.”
“대박, 대박. 이거 설마 거짓말은 아니죠?”
그럼 진짜겠냐?
신실하고 깨끗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하르코스탄의 가호가 있길.”
난 긍정도 부정도 안 했다? 가서 어디 한번 실컷 굴러 봐라, 이 또라이야!
나는 도망치듯 광장을 벗어나, 거리를 거닐었다.
지금쯤 그 또라이 유저는 뭣도 모르고 무덤을 찾아 달려가고 있겠지만, 그곳은 사실 보물이 묻힌 고대 왕족들의 무덤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구울들이 우글거리는 히든 스테이지다.
나는 그녀가 어떻게 죽을지 상상하며 실실거렸다.
때마침 기다리고 있던 깰룩이의 메시지 마법이 도착했다.
― 마르디노 님, 일단 돌아오시랍니다, 깰룩.
― 뭐? 왜?
― 아무래도 새 아티팩트를 직접 받아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깰룩.
아씨, 왔다 갔다 하기 귀찮은데.
유저들 몰래 옆에 있는 빈집으로 숨어 들어갔다. 이동 마법의 주문을 외우자, 마나로 이루어진 오더코르트 문자가 비눗방울처럼 피어오르며 주변을 부드럽게 감쌌다.
빛이 사라진 뒤 나타난 것은 내 개인 작업실의 전경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배불뚝이 초록색 뱀이 배를 쭉 내밀고 뒤뚱거리며 들어왔다.
“얘기는 들었네. 여기 새 ID카드일세. 급히 만드느라 아주 진땀을 뺐지.”
배불뚝이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어이가 없어 코웃음이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이걸 네가 만들었냐? 개발 팀이 만들었을 거 아냐. 왜 네가 만든 것처럼 말하냐, 한 것도 없으면서.”
침 뱉듯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그가 멋쩍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껄껄, 만드는 걸 옆에서 지켜보는 일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닐세.”
“진짜 힘든 일 시켜줄까? 나랑 같이 창고 청소 한번 할래? 내일 출근 못하고 집에서 쉬어야겠지만.”
“그것도 괜찮지. 하지만 어쩌겠나. 내가 바빠도 너무 바빠서 도통 시간이 안 나니 말일세. 내일도 출근을 해야 하거든. 아쉽지만 다음…….”
“바쁘긴, 내가 너 한 시간마다 사무실에서 퍼질러 자는 거 모를 줄 아냐? 어차피 이거 끝나고도 또 가서 잘 거잖아. 마침 잘됐네. 말 나온 김에 지금 청소하러 가면 되겠구만.”
그러자 배불뚝이는 꺽꺽거리며 웃었다.
“뭐가 어찌됐든 지금 급한 건 클로즈 베타가 아닌가. 창고 청소를 귀중한 클로즈 베타와 바꿀 순 없지 않겠나! 자, 어서 자네 닉네임부터 바로 설정하도록 하지. 한번 적으면 못 고치니 신중하게 정하게.”
“망할 놈.”
재빠르게 말을 돌리는 배불뚝이에게 짧은 욕을 날리고, ID카드를 홱 낚아챘다.
카드를 손에 들자, 푸르게 빛나는 디스플레이 마법이 눈앞에 나타났다.
[닉네임을 입력해 주십시오.
_____]
큰 고민은 없었다. 내겐 오더코르트인들이 자꾸 잘못 발음하는 ‘나석익’이란 이름 말고도 이름이 하나가 더 있으니까.
“아노 방가르 마르디노.”
[닉네임이 너무 깁니다.]
“…아노 방가 마르.”
[띄어쓰기는 불가합니다.]
“…아노방가마르.”
[닉네임이 너무 깁니다.]
“아노방가마!”
[욕설은 닉네임으로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지랄하지 마! 이게 왜 욕이야!”
“욕 맞네. 오더코르트어로 ‘사기꾼’이라는 뜻이지. 공백이나 특수문자 없이 5음절 이내로만 설정할 수 있다네.”
“미리 말을 하라고! 아노방마!”
[닉네임 등록이 완료되었습니다.]
[안방마 님, ‘체인지 더 월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현 시점부터 왕국 내의 모든 시설을 무료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안방마? 아니, 아노방마라고! 안방마 님 아니라고!”
“호오, 안마방인가. 멋진 이름이구먼. 자, 다시 돌아가세. 클로즈 베타 테스트를 마저 하러 가야지!”
“안마방도 아니야! 아오, 진짜!!”
위기의 클로즈 베타 (1)
파라마스타 왕국, 대륙 동쪽에 위치한 아침의 나라. 하르코스탄이라는 노쇠한 왕이 다스리는 국가로서 아트라 대륙의 네 왕국 중 하나다.
비단 이곳만이 아니라, 현재 대륙의 왕들은 모두 건강이 많이 위태로운 상태였다. 예전보다 걱정거리가 부쩍 늘은 게 그 이유였다.
“몇 년 사이에 마황군들이 더욱 난폭해졌네.”
하르코스탄이 초췌한 얼굴로 비단실 같은 흰 수염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왕국 곳곳에 그들의 거점이 늘어나면서 이 파라마스타의 선량한 국민들이 고통받고 있지.”
“알아.”
그 앞에 앉아 있는 나는 다리를 꼬고 턱을 괸 채였다.
“자네를 부른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네. 아주 오래전, 마황군이 세상에 등장하면서부터 이 세상에 마나가 폭주하기 시작했거든.”
“알아.”
“자네에게 부탁할 건 딱 한 가지…….”
“알아, 안다고. 나도 안다고, 새끼야.”
인트로의 스토리는 이미 지겹도록 봐서 죄다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나를 따분하게 만드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하르코스탄 녀석의 말이 너무 느릿느릿한 게 문제였다.
“어떻게든 멸망을 막는 데 보탬이 되라는 거 아냐. 여행을 떠나 마황군을 직접 물리치든, 아님 도시를 튼튼하게 만들든, 그것도 아니면 강력한 물건을 구해다가 다른 헌터들에게 팔든, 뭘 할지는 각자 알아서 하면 되는 거고. 어? 맞지?”
따발총처럼 대신 쏟아내는 인트로 멘트에 하르코스탄이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끝났지? 그럼 이제 그거나 내놔.”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얇고 납작한 무언가를 홱 뺏어 들었다. ID카드였다.
“…….”
“왜, 뭐 할 말 있어?”
예의상 물어보자, 하르코스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짐은 아트라 대륙의 카킹 중 한 명이네. 자네와 신분부터가 다르단 말일세.”
“그래서?”
“그러니까 앞으로는 조금 더 예의를 갖춰주게나.”
하르코스탄이 아니꼬운 말투로 강력하게 주장했다.
“예의?”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온다.
“야, 니 신분이 어떻게 나보다 높냐?”
“그게 무슨 말이지?”
“무슨 말이긴. 넌 기껏해야 한 나라의 카킹이잖아. 난 무려 이 행성의 구원자거든? 용사 모르냐? 근데 어디서 건방지게 예의 타령이냐? 너부터 갖춰라, 예의.”
대답을 들은 그는 재밌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었다.
“껄껄, 아무래도 자네가 착각을 좀 하고 있는 것 같군. 계급 사회에 구원자라는 신분은 없지 않나. 아무리 여기가 자네 세상이 아니라곤 하지만 이 세상에도 엄연히 지켜야 할 법도와 규칙이란 게 존재하네. 그러니까 짐의 말은, 사회라는 틀 안에서의 예의를 갖춰달라는 거라네.”
“흠, 그래. 사회인으로서의 자세라는 거지?”
“바로 그걸세.”
하르코스탄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예의를 차리고 어쩌고 하는 건 문제가 없는데, 그럼 네놈이 방금 한 말들 신문에다가 대서특필해도 괜찮지?”
“시, 신문이라니?”
“‘파라마스타의 카킹 하르코스탄, 용사 마르디노 억압’, 이런 타이틀은 어때?”
“자, 잠깐, 억압이라니! 짐이 언제…….”
“불만 없는 거지? 그럼 수고해라. 난 이만 간다.”
“잠깐……!”
급히 불러 세우는 하르코스탄을 뿌리치고, 미련 없이 성을 빠져나왔다.
하여간 카킹들은 하나같이 기고만장한 놈들뿐이다. 물론 진짜로 신문에 낼 생각 따윈 없었다.
‘카킹은 무슨 얼어 죽을 카킹이냐. 네놈한테 예의 차린다고 떡이 나오냐, 밥이 나오냐.’
나는 왕성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날린 뒤 수도 광장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일단은 튜토리얼을 진행한 뒤 클로즈 베타 서버가 잘 열렸는지 확인할 생각이었다.
길을 따라 도심 쪽으로 들어가니, 수많은 오더코르트인들이 돌아다니고 있는 거리가 나타났다.
나를 알아본 몇몇 오더코르트인들이 인사를 했다. 건성으로 손을 흔들어주었다.
‘흠, 수도는 뭐 괜찮네.’
게임을 즐길 생각이 없더라도 들어오고 싶도록 만들라고 몇 번을 강조한 만큼 수도는 호화로우면서도 아주 웅장했다. 중세 로마의 한복판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나처럼 이미 인트로를 끝마치고 나온 유저들도 여럿 보였다.
그들은 모두 손가락을 꿈틀댄다든가, 제자리에서 폴짝 뛰어본다든가, 아니면 바닥의 벽돌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신기해하고 있었다.
“우와, 쩔어.”
“헐, 여기가 정말 게임 속임? 미쳤네.”
“진짜 같아도 너무 진짜 같은데? 현실감, 현실감 하길래 얼마나 대단한가 했더니…….”
한 사람이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을 손으로 만져보며 말했다.
“그니까요, 그냥 현실이랑 똑같아요. 꿈꾸고 있는 거 같지 않아요? 진짜 쩐다.”
그야 당연히 현실이랑 똑같겠지. 가상 현실 게임 어쩌고 하며 홍보하지만, 사실 대체 현실이나 다름없으니까. 물론 내게는 그냥 리얼 현실이지만.
유저 중에는 은색 테두리에 액정이 달린 디지털식 아티팩트를 들고 뒤적거리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하르코스탄에게 받은 ID카드였다.
‘그러고 보니 카드가 있었지.’
생각난 김에 카드를 꺼내 들고 바라보자 액정이 저절로 켜졌다. 빽빽한 문구가 홀로그램 형식으로 눈앞에 펼쳐졌다.
[본 카드는 신분증과 동일한 효력을 갖습니다.
카드를 통해 다양한 인터페이스를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카드는 손에서 놓으시면 자동으로 사라집니다. 다시 소환하기를 원하시면 ‘카드’라고 외쳐 주십시오.
오더코르트의 주민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닉네임을 등록해야 합니다.
닉네임을 설정하지 않을 시 모든 게임 이용에 제한을 받습니다.
닉네임을 등록하시면 자동으로 튜토리얼이 진행됩니다.
닉네임을 등록하시겠습니까?]
망설임 없이 ‘예’ 버튼을 눌렀다.
“응?”
그러나 그뿐이었다.
재차 버튼을 누르려고 하자, 이번엔 카드가 아예 통째로 가루처럼 흩어지며 사라져 버렸다.
“뭐야, 왜 안 돼? 카드.”
명령어를 외웠다. 하지만 손에 생겨나야 할 카드는 나타나지 않았다.
“카드, 카드, 카드.”
몇 번이고 다시 외쳐 봐도 마찬가지였다.
“아씨, 뭐냐고.”
구시렁대며 주위를 둘러보자, 다른 클로즈 베타 플레이어들은 모두 닉네임 등록을 끝마쳤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 깰룩아, 나 ID카드가 사라졌는데?
―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깰룩?
메시지 마법을 보내자, 항상 그렇듯 칼같이 빠른 답신이 도착했다.
― 몰라. 들고 있는데 갑자기 사라졌어.
―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알아보겠습니다, 깰룩.
깰룩이는 배불뚝이가 내게 붙여준 아주 유능한 조수였다. 원래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어쨌든 그냥 저렇게 부르고 있었다.
“흠.”
나는 카드가 사라져 허전해진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문득 건물들 위로 치솟아 있는 커다란 시계탑의 꼭대기가 눈에 들어왔다. 파라알 광장 중앙에 있는 시계탑이었다.
“이렇게 된 거 유저들이나 구경해볼까.”
자연스레 광장으로 향했다.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카드를 붙잡고 튜토리얼을 진행하고 있었다.
얌전히 광장의 벤치에 기대앉아 느긋하게 눈동자를 굴리며 플레이어들의 커스터마이징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쟨 무슨 커스터마이징을 코스프레 수준으로 해놨냐. 되게 웃기네, 저거.’
빨간 조끼에 밀짚모자를 쓴 플레이어를 보며 키득거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누군가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고개를 돌리자, 엄청 하얀 피부의 여성 유저가 나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저기, 죄송한데 혹시 ‘성향’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어리둥절하여 그녀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어떻게 해야 되나요?”
나한테 묻는 건가?
“그걸 왜 저한테 물으세요? 튜토리얼에 나와 있잖아요.”
대답이 까칠해서인지, 그녀는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제대로 안 읽고 대충 넘겨 버려서요. 다짜고짜 성향을 얻으라는데 어떻게 얻는 건지 알 수가 있어야죠.”
“대충 넘겼다고요? 아니, 읽으라고 써 놓은 글을 왜 그냥 넘겨요? 그거 쓰느라 얼마나……. 아, 됐고, 저도 모르겠으니까 그냥 저 사람들한테 가서 물어보든지 하세요.”
나는 광장 중앙의 시계탑 근처를 가리켰다.
“뭐라구요? 아니, 뭔 NPC가 이따구야?”
“NPC?”
뭐야, 지금 나를 NPC로 착각하고 있는 거였냐?
황당한 표정을 짓자,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ID카드를 내 얼굴을 향해 슥 들이밀었다.
삐빅.
NPC를 식별하는 작은 효과음이 들렸다. 그녀는 다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친밀도가 낮은 건가.”
그럴 리가 있냐! 아니, 도대체 내가 왜 NPC로 식별되는 건데!
“저기, 뭔가 착각하고 계신…….”
“그러지 말고 이거 한번 드셔보세요.”
그녀는 말을 끊으며, 처음 접속한 유저들에게 기본적으로 지급되는 빵을 한 조각 내게 건넸다.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든다. 재빨리 빵을 도로 그녀에게 쥐어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싫어요. 귀찮게 굴지 말고, 저 사람들한테나 가서 물어보라니까요.”
그러나 그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들러붙었다.
“진짜 딱 한 입만 드셔보세요. 자, 아∼”
“아니, 됐다니까 그러네……. 우웁!”
그녀는 단번에 내 턱을 잡더니, 강제로 입을 벌리고 손에 들고 있는 빵을 목구멍 속 깊은 곳까지 욱여넣었다.
“우윽! 켁! 켁켁! 무울! 물! 흐으으윽!”
“헛! 퀘스트인가?”
그녀는 들뜬 표정으로 바로 옆의 분수대 쪽으로 단숨에 달려가더니, 기본 아이템인 수통에 물을 떠 왔다.
“여기 있어요, 물!”
수통을 홱 낚아채 목구멍에 물을 급히 쏟아부었다.
“커헉, 커헉. 진짜 뒤질 뻔했어, 진짜로 뒤질 뻔했다고!”
“오오! 제가 목숨을 구해드린 거죠? 고마우시죠?”
보상을 바라는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자, 이성의 끈이 끊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미친… 개 똥 싸는 소리하고 자빠졌네. 저 지금 님 때문에 죽을 뻔했거든요?”
“뭐라고요?”
하지만 화를 낸 쪽은 오히려 그녀 쪽이었다.
“하, NPC가 뭐 이래? 이런 쓰레기 같은 게임을 봤나. 아오, 빡쳐. 클베 당첨됐다고 신나서 들어온 내가 바보지.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제작사가 나와서 게임이랍시고 홍보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이딴 게임 두 번 다신 하나 봐라!”
필터링된 욕이 이어졌다.
“자, 잠시만요!”
씩씩거리며 멀어지는 그녀를 재빨리 따라가 붙잡았다.
“뭐야?”
“하하, 기분 많이 나쁘셨죠? 죄송합니다. 이 게임은 원체 모든 NPC들이 현실적으로 반응을 하게끔 프로그래밍되어 있거든요.”
“현실적으로?”
“방금 님이 저한테 빵 먹이는 바람에 죽을 뻔했잖아요. 보통 사람들 같으면 저보다 더 심하게 반응했겠죠. 현실에서 님이 이걸 겪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잠시 땅을 내려다보던 그녀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내 시선을 피했다.
“그, 그건 그렇지만.”
“현실적인 게임이라 그런 겁니다. 친밀도를 올리려는 건 좋은 시도지만, 그렇다고 강제적으로 막 그렇게 음식 먹이고 그러면 오히려 관계가 악화될 수 있어요. 현실에서 다른 사람이랑 친해지는 것과 똑같습니다.”
“…….”
“이번은 처음이니까 제가 봐드리는 겁니다. 다음부턴 어디 가서 NPC라고 막 그러지 마세요. 진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라고요. 아까 뭐라고요? 성향 얻는 법? 알려드릴게요.”
조금 시무룩한 표정을 짓던 그녀는 대번 화색을 띠더니, 서둘러 ID카드를 꺼내고 메모를 시작했다.
지금은 클로즈 베타 테스트가 막 시작된 시점. 출시 이후로도 계속할 생각이 있다면, 이런 별것 아닌 정보 하나라도 알아두는 편이 유리하다.
보아하니 그런 것은 알고 있는 눈치다. 애초에 소리 소문 없이 진행한 1차 클베에 테스터로 뽑혔다는 데서 게임 쪽 소식에 빠른 유저일 게 분명했다.
그럼 씨, 웬만한 게임은 다 해봤을 텐데 대체 왜… 아휴, 아니다.
“체월에선 유저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게임에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니까 성향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특정 조건을 만족하는 행동을 취하기만 하면 되는 거죠. 이해했어요?”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어쩐지 신통치 않았다.
“감이 잘 안 오는데, 빵을 하나 더 주면 자세히 알려주나요?”
그녀는 메모를 하다 말고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 그니까 예를 들면, 요리사 성향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요리를 하면 된단 소립니다.”
“아아, 그렇구나. 생각보다 별거 아니었네.”
반쯤 가방에서 나온 빵은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을 때, 문득 그녀가 내게 손을 내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그녀는 더 의아해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퀘스트 보상은요?”
“…….”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끝까지 손을 안 치우는 걸 보니 진심이다.
‘때릴까? 딱 한 대 정도는 때려도 괜찮을지도 몰라.’
광장 한복판에 선 채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니야, 내가 어떻게 3년을 버텼는데. 참자, 참아야 해.’
스스로를 설득하며 간신히 분노를 삭였다.
하는 수 없지. 그 방법을 쓸 수밖에. 이렇게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저쪽에서 먼저 저런 식으로 나오면 어쩔 수가 없다.
“아휴, 이걸 어쩌죠? 제가 지금 가진 게 없어서 말이에요.”
텅 빈 주머니를 보여주자, 그녀의 표정이 단번에 구겨졌다.
“대신 엄청난 정보를 하나 알고 있는데, 괜찮으시면 이거라도 알려드릴까요? 고오급 정보인데, 사실 이거 저 혼자서 꿀꺽하려고 했던 건데, 어쩔 수 없죠.”
그러자 예상대로 그녀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미끼를 덥석 물었다.
“그거 듣는 걸로 할게요! 뭔데요?”
“그러니까…….”
주위를 둘러보며 손짓을 하자, 쫄랑쫄랑 다가와 귀를 가져다 댄다.
“…게 있어요.”
“헐, 정말요? 고대 왕족들의 무덤? 거긴 어떻게 가는데요?”
그녀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저기 저쪽에 빨간 지붕 하나 보이세요?”
“성당 옆에 저거요?”
“네. 그 옆에 난 길을 따라서 쭉 걷다 보면 수도 동문이 나오거든요? 그리로 나가세요. 그럼 오른쪽에 큰 강이 하나 있어요. 강 따라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시면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보여요. 보시면 딱 알 거예요. 그 나무 아래예요. 보물이… 크흠, 잔뜩 묻혀 있는 무덤. 진짜 아무한테도 얘기하시면 안 돼요. 제가 운 좋게 카킹님 말씀하시는 걸 엿들은 거거든요.”
“대박, 대박. 이거 설마 거짓말은 아니죠?”
그럼 진짜겠냐?
신실하고 깨끗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하르코스탄의 가호가 있길.”
난 긍정도 부정도 안 했다? 가서 어디 한번 실컷 굴러 봐라, 이 또라이야!
나는 도망치듯 광장을 벗어나, 거리를 거닐었다.
지금쯤 그 또라이 유저는 뭣도 모르고 무덤을 찾아 달려가고 있겠지만, 그곳은 사실 보물이 묻힌 고대 왕족들의 무덤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구울들이 우글거리는 히든 스테이지다.
나는 그녀가 어떻게 죽을지 상상하며 실실거렸다.
때마침 기다리고 있던 깰룩이의 메시지 마법이 도착했다.
― 마르디노 님, 일단 돌아오시랍니다, 깰룩.
― 뭐? 왜?
― 아무래도 새 아티팩트를 직접 받아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깰룩.
아씨, 왔다 갔다 하기 귀찮은데.
유저들 몰래 옆에 있는 빈집으로 숨어 들어갔다. 이동 마법의 주문을 외우자, 마나로 이루어진 오더코르트 문자가 비눗방울처럼 피어오르며 주변을 부드럽게 감쌌다.
빛이 사라진 뒤 나타난 것은 내 개인 작업실의 전경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배불뚝이 초록색 뱀이 배를 쭉 내밀고 뒤뚱거리며 들어왔다.
“얘기는 들었네. 여기 새 ID카드일세. 급히 만드느라 아주 진땀을 뺐지.”
배불뚝이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어이가 없어 코웃음이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이걸 네가 만들었냐? 개발 팀이 만들었을 거 아냐. 왜 네가 만든 것처럼 말하냐, 한 것도 없으면서.”
침 뱉듯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그가 멋쩍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껄껄, 만드는 걸 옆에서 지켜보는 일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닐세.”
“진짜 힘든 일 시켜줄까? 나랑 같이 창고 청소 한번 할래? 내일 출근 못하고 집에서 쉬어야겠지만.”
“그것도 괜찮지. 하지만 어쩌겠나. 내가 바빠도 너무 바빠서 도통 시간이 안 나니 말일세. 내일도 출근을 해야 하거든. 아쉽지만 다음…….”
“바쁘긴, 내가 너 한 시간마다 사무실에서 퍼질러 자는 거 모를 줄 아냐? 어차피 이거 끝나고도 또 가서 잘 거잖아. 마침 잘됐네. 말 나온 김에 지금 청소하러 가면 되겠구만.”
그러자 배불뚝이는 꺽꺽거리며 웃었다.
“뭐가 어찌됐든 지금 급한 건 클로즈 베타가 아닌가. 창고 청소를 귀중한 클로즈 베타와 바꿀 순 없지 않겠나! 자, 어서 자네 닉네임부터 바로 설정하도록 하지. 한번 적으면 못 고치니 신중하게 정하게.”
“망할 놈.”
재빠르게 말을 돌리는 배불뚝이에게 짧은 욕을 날리고, ID카드를 홱 낚아챘다.
카드를 손에 들자, 푸르게 빛나는 디스플레이 마법이 눈앞에 나타났다.
[닉네임을 입력해 주십시오.
_____]
큰 고민은 없었다. 내겐 오더코르트인들이 자꾸 잘못 발음하는 ‘나석익’이란 이름 말고도 이름이 하나가 더 있으니까.
“아노 방가르 마르디노.”
[닉네임이 너무 깁니다.]
“…아노 방가 마르.”
[띄어쓰기는 불가합니다.]
“…아노방가마르.”
[닉네임이 너무 깁니다.]
“아노방가마!”
[욕설은 닉네임으로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지랄하지 마! 이게 왜 욕이야!”
“욕 맞네. 오더코르트어로 ‘사기꾼’이라는 뜻이지. 공백이나 특수문자 없이 5음절 이내로만 설정할 수 있다네.”
“미리 말을 하라고! 아노방마!”
[닉네임 등록이 완료되었습니다.]
[안방마 님, ‘체인지 더 월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현 시점부터 왕국 내의 모든 시설을 무료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안방마? 아니, 아노방마라고! 안방마 님 아니라고!”
“호오, 안마방인가. 멋진 이름이구먼. 자, 다시 돌아가세. 클로즈 베타 테스트를 마저 하러 가야지!”
“안마방도 아니야! 아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