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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마스터는 사기꾼 1권 15화
돌발 이벤트 (3)
언제 잡은 건지, 축 늘어진 방길이의 위에 걸터앉은 유저가 유독 눈에 띄었다.
이마에 동여맨 흰색 띠가 바람에 펄럭였다. 짧고 짙은 보라색 머리에 새하얀 피부였는데, 도복 같은 것을 입고 있는 걸 보니 파이터 성향의 유저인 모양이었다.
“거참, 다들 눈치가 없네.”
다소 거만한 뉘앙스로 입을 열자, 모두가 그를 주목했다. 몇몇 유저들이 그를 알아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헐, 랭킹 2위 아니야?”
“진짜다, 필 님이다!”
“필? 그 미국 플레이어? 대박!”
그러고 보니 그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랭킹엔 전혀 신경도 못 쓰고 있었다.
필이라는 유저는 방길이 위에 서서 유저들을 향해 말했다.
“아직도 모르겠냐? 이거 이벤트잖아. 아까 ‘게임마스터와 함께하는’ 던전 개막식이라고 하지 않았냐고. 몹들까지 나오고, 벽은 무너지고. 그럼 방어전 이벤트지. 게임 한두 번 해 보나? 척 하면 착이지.”
눈치도 없다는 듯 혀까지 찬다. 그 말을 들은 유저들이 웅성거렸다.
“이벤트?”
“헐, 그렇구나!”
“이벤트였다니… 연출 보소.”
뭐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뒤통수라도 후려 맞은 기분이었다.
요즘 게임은 이벤트가 운영자도 모르는 상태에서 열리냐? 그게 무슨 듣도 보도 못한……. 아니지, 일단 그게 문제가 아냐. 지금이 기회다.
― 지금 당장 파라마스타 유저들한테 안내 음성 내보내.
― 예? 뭐라고 말입니까, 깰룩?
― ‘마황군이 쳐들어왔습니다. 지금부터 파라마스타 방어전 이벤트를 시작합니다. 마황군의 공격으로부터 파라알 광장을 지켜 보호하세요’라고. 지금 저승에 갇혀 있는 유저들한테는 광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 실시간으로 중계해.
자연스레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설마 하니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순진한 유저들을 깜짝 이벤트라며 슬쩍 넘겨 버릴 수 있는 기회가 생길 줄이야.
급조해 낸 방어전 이벤트야, 추후에 게임 스토리로 풀어버리면 그만이다.
“안 그래요, 영자님?”
그때, 필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전염되듯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순간에 내게로 쏠렸다.
시계탑 꼭대기에서 혼자 실실거리며 웃고 있던 나는 마치 물건을 훔치다 들킨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예, 예?”
얼떨결에 대답까지 해버렸다.
“뭐야, 어디 갔지?”
하지만 필은 인상을 찌푸리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덩달아 유저들도 모두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갑자기 왜들 저래?’
그때 돌연, 한쪽에 있던 맘이시리네가 나를 바라보며 이상한 제스처를 취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손가락으로 얼굴과 옷을 가리키고 있었다.
‘설마.’
그제야 발밑에 불타다 만 채 널브러져 있는 가면과 로브가 눈에 들어왔다.
이 코스튬들은 GM 전용 장비였다. 혹시나 찢어지거나 흘러내려서 얼굴이 보이는 일이 없도록 특별한 마법이 걸려 있다. 누가 억지로 벗겨낼 수도 없고, 투시 스킬로도 볼 수 없다. 다 내 정체를 감추기 위한 방책이었는데.
망했다.
“어? 근데 저 사람 혹시 안방마 아니야? 맞는 것 같은데?”
“뭐라고? 안방마?”
나는 놀라서 내 닉네임을 말한 유저를 돌아보았다.
‘뭐야, 날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유저들은 ID카드를 불러내 뒤적거리더니, 나와 카드를 번갈아 보다 탄성을 내질렀다.
“헐, 진짜 마 님이다.”
“지, 진짜다! 진짜가 나타났다!”
“저기 봐! 저 사람이 랭킹 1위래!”
유저들이 나를 보며 놀라 소리치자, 라이트닝 월 주변에 서 있던 랭커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응? 다들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왜 랭킹 1위야?
“안방마 님! 스킬 좀 보여주세요!”
“몹 좀 잡아주세요!”
“마 님, 저것들 싹 쓸어주세요!”
동공이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이, 일단 GM 장비 껴야 돼. 공간 이동 마법을 써서 사람이 없는 데로…….
“안방마! 안방마!”
“안방마! 안방마!”
급기야 유저들은 뭐가 그리 신났는지 내 닉네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이 시선을 피해 내뺀다는 건 아무리 해도 무리였다.
“저기…….”
말려보려고 한 손을 앞으로 내밀며 중얼거리자, 광장 안이 조용해졌다. 모두가 내 일거수일투족을 선망 어린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몬스터들조차도 이쪽을 보고 있었다.
뭐냐고, 이 분위기는.
“…어, 음. 안녕하세요?”
결국 나는 내밀었던 손을 흔들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뭐야, 관종이네.”
무슨 말을 하나 보자는 표정으로 날 보고 있던 필이 고개를 홱 돌렸다.
‘꺼져, 이 보라돌이 새끼야!’
하지만 나는 이미 관심 종자가 되어 있었다.
아, 죽고 싶다. 랭킹 1위라니, 이게 무슨 소리요.
혼란스러운 상태로도 슬쩍 ID카드를 불러내 실시간 랭킹을 확인해 본 나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시계탑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
랭킹 1위엔 진짜로 ‘안방마’라는 닉네임과 한국 국기가 떡하니 올라가 있었고, 상세 화면에는 맨날 거울 속에서 보는 그 모습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주 성향은 매지션, 하지만 번쩍거리는 흉갑을 비롯한 갑옷을 망토 안에 두르고 있다. 얼굴엔 핏기가 없어 파리하고, 다크서클이 잔뜩 내려와 있다. 볼은 며칠 굶은 사람처럼 쏙 들어가 있었다.
‘이게 뭐야. 내가 왜 랭킹에 있는 거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랭킹이 계산되는 기준, 우선 플레이 시간.
‘이건 당연히 1위일 거고.’
나에겐 로그아웃이란 개념 자체가 없다. 여기가 내 현실이니까.
다음은 업적.
‘이것도.’
정식 오픈 후에도 디버깅 작업을 할 때마다 한 사냥터를 천 번 가까이씩 돌았다. 그것보다 더 돈 적도 있다. 오늘만 해도 패치가 완료된 히드라 동굴을 재검사하기 위해서 800번이나 돌았다. 별의별 업적이 쌓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수련도…….’
나는 조용히 고개를 떨어트렸다.
온갖 스킬을 써 대며 매일 그렇게 노가다를 하는데 내 로그가 전산에 쌓이지 않는다면 모를까, 수련이 안 되면 그게 곧 버그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나하나 생각해 보니 랭킹 1위가 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 그건 일단 그렇다 치고.’
랭킹이고 나발이고, 지금은 우선 최대한 플레이어들의 의심을 덜 사는 게 중요하다.
[마황군이 쳐들어왔습니다. 지금부터 파라마스타 방어전 이벤트를 시작합니다. 플레이어분들은 마황군의 공격으로부터 파라알 광장을 지켜 보호하세요.]
깰룩이에게 부탁했던 안내 멘트가 ID카드를 통해 흘러나오자, 슬슬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속도 모르는 유저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모두 각자 등이나 허리춤에 차고 있던 무기들을 꺼내 들었다.
“랭커들도 있으니, 우리도 문제없어!”
하지만 그것도 잠시.
두두두두―
지진이 일어나는 것처럼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무너진 회랑 밖 성벽 쪽을 바라본 유저들은 모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온 땅을 울리며 또 다른 몬스터 무리가 먼지 나게 달려오고 있었다. 노란 코뿔소처럼 생긴 몬스터들이었다.
“음? 저건 뭐지? 처음 보는데.”
필이 굉장히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그렇겠지.’
내가 코봉이라고 부르는 저 녀석들은 선천적으로 체내에 번개 주머니를 지닌 채 태어나는 코뿔소 외형의 호르핌들이었다.
마법을 거의 사용하지 못하는 호르핌들은 카킹이나 아란탈들로부터 천대받고 있지만, 제각기 특이한 능력들을 가지고 있다.
코봉이들은 엄청난 방어력과 재빠른 속도, 그리고 강력한 번개 속성 때문에 높은 등급의 던전에 배정받은 몬스터였다.
게임이 출시된 지 한 달밖에 지나지 않은 지금, 당연히 어떤 유저도 그런 고위 던전은 구경해 본 적도 없을 것이다. 비록 오늘에서야 처음 알긴 했지만, 랭킹 1위인 나도 아직 파라알을 벗어나지 않고 있으니까.
쿠과광!
코봉이들은 달려오던 그대로 무너진 외벽의 잔재들을 들이받으며 광장에 들어섰다.
부서진 돌무더기들이 대포알처럼 쏘아져 날아와 플레이어들을 덮쳤다.
“끄아악!”
쿠궁!
처참히 돌에 깔려 사라지는 시체를 본 유저들은 기겁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그러고 계실 겁니까, 안방마 님?”
그때, 붉은 무늬가 있는 초록색 제복을 입은 유저 하나가 검을 빼들며 말했다.
“이럴 때일수록 랭킹 1위로서의 진면모를 보여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진면모는 개뿔, 탈모를 보여주게 생겼구만.
서둘러 ID카드를 뒤적여 방금 말한 유저가 누구인지 훔쳐보았다. 중국 플레이어인 ‘칭다오’라는 랭커였다.
“맞아요, 한 수 알려주세요, 마 님.”
붉은 로브를 입은 마녀마저 지팡이를 빙그르르 돌리며 말했다. 이쪽은 ‘라라크’라는 프랑스 유저였다.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듯했다.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한단 말인가.
진짜 유저인 척 몬스터를 잡자니, 맘에 걸리는 것이 너무 많았다.
개고생을 하며 던전을 돌아다니는 나 이상으로, 던전에서 무한정 대기하며 유저들 손에 죽어나는 호르핌 노동자들은 진정한 3D 업종이었다. 아무리 죽어도 다시 태어난다고 하지만 고통은 똑같이 느낀다. 모두 게임을 개발하는 3년간 동고동락한 직원들인데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후… 아니야. 쟤네 생각할 때가 아니지.’
지금은 엄연히 플레이어의 입장. 게다가 도통 왜인지 모르겠지만 먼저 공격해 온 쪽은 저쪽이었다.
하는 수 없지.
“모두 물러서십쇼.”
한마디 했을 뿐인데, 유저들이 모두 ‘오오오!’ 하고 환호했다.
코봉이 떼가 광장 중앙부에 다다르자, 다른 몬스터들이 반으로 갈라지며 길을 텄다. 그와 동시에 코봉이들이 라이트닝 월을 들이받았다.
라이트닝 월은 그들의 박치기에 맥없이 깨져 버렸다. 같은 번개 속성이니 별 피해를 주지 못한 것이다.
그것을 알 리가 없는 랭커들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뒤집어질 듯 놀라며 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후닥닥 뒤로 물러났다.
하나 코봉이들의 속도는 생각보다 더욱 빨랐다.
당황한 랭커들은 다른 유저들의 머리통을 발판 삼아 더 뒤쪽까지 달아났다. 그 뒤를 쫓던 수십 마리의 코봉이들은 그대로 유저들 사이에 쑤셔 박혔다.
“끄아아아악!”
엄청난 수의 플레이어들이 코봉이의 뿔에 꿰뚫려 죽어나갔다. 근처에 있던 유저들까지 번개에 감전되어 쓰러졌다.
“아오, 저 빡대가리들. 그러게 물러서라니깐.”
나는 시계탑을 박차고 그대로 공중에서 솟구쳤다.
유저들의 시선이 나를 따라 포물선을 그렸다.
‘토오 뚜 오보우아제타이…….’
추락하는 동안 주문을 외웠다. 마나가 미친 듯이 몰려들어 두 손에 응집되더니, 밝은 광채를 냈다.
‘카트쥬이어즈바.’
머리부터 떨어지던 내가 손을 뻗어 가장 앞에서 달려오던 코봉이의 머리에 댄 순간, 마나가 사방으로 물결처럼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돌발 이벤트 (3)
언제 잡은 건지, 축 늘어진 방길이의 위에 걸터앉은 유저가 유독 눈에 띄었다.
이마에 동여맨 흰색 띠가 바람에 펄럭였다. 짧고 짙은 보라색 머리에 새하얀 피부였는데, 도복 같은 것을 입고 있는 걸 보니 파이터 성향의 유저인 모양이었다.
“거참, 다들 눈치가 없네.”
다소 거만한 뉘앙스로 입을 열자, 모두가 그를 주목했다. 몇몇 유저들이 그를 알아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헐, 랭킹 2위 아니야?”
“진짜다, 필 님이다!”
“필? 그 미국 플레이어? 대박!”
그러고 보니 그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랭킹엔 전혀 신경도 못 쓰고 있었다.
필이라는 유저는 방길이 위에 서서 유저들을 향해 말했다.
“아직도 모르겠냐? 이거 이벤트잖아. 아까 ‘게임마스터와 함께하는’ 던전 개막식이라고 하지 않았냐고. 몹들까지 나오고, 벽은 무너지고. 그럼 방어전 이벤트지. 게임 한두 번 해 보나? 척 하면 착이지.”
눈치도 없다는 듯 혀까지 찬다. 그 말을 들은 유저들이 웅성거렸다.
“이벤트?”
“헐, 그렇구나!”
“이벤트였다니… 연출 보소.”
뭐요?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뒤통수라도 후려 맞은 기분이었다.
요즘 게임은 이벤트가 운영자도 모르는 상태에서 열리냐? 그게 무슨 듣도 보도 못한……. 아니지, 일단 그게 문제가 아냐. 지금이 기회다.
― 지금 당장 파라마스타 유저들한테 안내 음성 내보내.
― 예? 뭐라고 말입니까, 깰룩?
― ‘마황군이 쳐들어왔습니다. 지금부터 파라마스타 방어전 이벤트를 시작합니다. 마황군의 공격으로부터 파라알 광장을 지켜 보호하세요’라고. 지금 저승에 갇혀 있는 유저들한테는 광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 실시간으로 중계해.
자연스레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설마 하니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순진한 유저들을 깜짝 이벤트라며 슬쩍 넘겨 버릴 수 있는 기회가 생길 줄이야.
급조해 낸 방어전 이벤트야, 추후에 게임 스토리로 풀어버리면 그만이다.
“안 그래요, 영자님?”
그때, 필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전염되듯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순간에 내게로 쏠렸다.
시계탑 꼭대기에서 혼자 실실거리며 웃고 있던 나는 마치 물건을 훔치다 들킨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예, 예?”
얼떨결에 대답까지 해버렸다.
“뭐야, 어디 갔지?”
하지만 필은 인상을 찌푸리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덩달아 유저들도 모두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갑자기 왜들 저래?’
그때 돌연, 한쪽에 있던 맘이시리네가 나를 바라보며 이상한 제스처를 취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손가락으로 얼굴과 옷을 가리키고 있었다.
‘설마.’
그제야 발밑에 불타다 만 채 널브러져 있는 가면과 로브가 눈에 들어왔다.
이 코스튬들은 GM 전용 장비였다. 혹시나 찢어지거나 흘러내려서 얼굴이 보이는 일이 없도록 특별한 마법이 걸려 있다. 누가 억지로 벗겨낼 수도 없고, 투시 스킬로도 볼 수 없다. 다 내 정체를 감추기 위한 방책이었는데.
망했다.
“어? 근데 저 사람 혹시 안방마 아니야? 맞는 것 같은데?”
“뭐라고? 안방마?”
나는 놀라서 내 닉네임을 말한 유저를 돌아보았다.
‘뭐야, 날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유저들은 ID카드를 불러내 뒤적거리더니, 나와 카드를 번갈아 보다 탄성을 내질렀다.
“헐, 진짜 마 님이다.”
“지, 진짜다! 진짜가 나타났다!”
“저기 봐! 저 사람이 랭킹 1위래!”
유저들이 나를 보며 놀라 소리치자, 라이트닝 월 주변에 서 있던 랭커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응? 다들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왜 랭킹 1위야?
“안방마 님! 스킬 좀 보여주세요!”
“몹 좀 잡아주세요!”
“마 님, 저것들 싹 쓸어주세요!”
동공이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이, 일단 GM 장비 껴야 돼. 공간 이동 마법을 써서 사람이 없는 데로…….
“안방마! 안방마!”
“안방마! 안방마!”
급기야 유저들은 뭐가 그리 신났는지 내 닉네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이 시선을 피해 내뺀다는 건 아무리 해도 무리였다.
“저기…….”
말려보려고 한 손을 앞으로 내밀며 중얼거리자, 광장 안이 조용해졌다. 모두가 내 일거수일투족을 선망 어린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몬스터들조차도 이쪽을 보고 있었다.
뭐냐고, 이 분위기는.
“…어, 음. 안녕하세요?”
결국 나는 내밀었던 손을 흔들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뭐야, 관종이네.”
무슨 말을 하나 보자는 표정으로 날 보고 있던 필이 고개를 홱 돌렸다.
‘꺼져, 이 보라돌이 새끼야!’
하지만 나는 이미 관심 종자가 되어 있었다.
아, 죽고 싶다. 랭킹 1위라니, 이게 무슨 소리요.
혼란스러운 상태로도 슬쩍 ID카드를 불러내 실시간 랭킹을 확인해 본 나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시계탑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
랭킹 1위엔 진짜로 ‘안방마’라는 닉네임과 한국 국기가 떡하니 올라가 있었고, 상세 화면에는 맨날 거울 속에서 보는 그 모습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주 성향은 매지션, 하지만 번쩍거리는 흉갑을 비롯한 갑옷을 망토 안에 두르고 있다. 얼굴엔 핏기가 없어 파리하고, 다크서클이 잔뜩 내려와 있다. 볼은 며칠 굶은 사람처럼 쏙 들어가 있었다.
‘이게 뭐야. 내가 왜 랭킹에 있는 거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랭킹이 계산되는 기준, 우선 플레이 시간.
‘이건 당연히 1위일 거고.’
나에겐 로그아웃이란 개념 자체가 없다. 여기가 내 현실이니까.
다음은 업적.
‘이것도.’
정식 오픈 후에도 디버깅 작업을 할 때마다 한 사냥터를 천 번 가까이씩 돌았다. 그것보다 더 돈 적도 있다. 오늘만 해도 패치가 완료된 히드라 동굴을 재검사하기 위해서 800번이나 돌았다. 별의별 업적이 쌓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수련도…….’
나는 조용히 고개를 떨어트렸다.
온갖 스킬을 써 대며 매일 그렇게 노가다를 하는데 내 로그가 전산에 쌓이지 않는다면 모를까, 수련이 안 되면 그게 곧 버그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나하나 생각해 보니 랭킹 1위가 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 그건 일단 그렇다 치고.’
랭킹이고 나발이고, 지금은 우선 최대한 플레이어들의 의심을 덜 사는 게 중요하다.
[마황군이 쳐들어왔습니다. 지금부터 파라마스타 방어전 이벤트를 시작합니다. 플레이어분들은 마황군의 공격으로부터 파라알 광장을 지켜 보호하세요.]
깰룩이에게 부탁했던 안내 멘트가 ID카드를 통해 흘러나오자, 슬슬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속도 모르는 유저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모두 각자 등이나 허리춤에 차고 있던 무기들을 꺼내 들었다.
“랭커들도 있으니, 우리도 문제없어!”
하지만 그것도 잠시.
두두두두―
지진이 일어나는 것처럼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무너진 회랑 밖 성벽 쪽을 바라본 유저들은 모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온 땅을 울리며 또 다른 몬스터 무리가 먼지 나게 달려오고 있었다. 노란 코뿔소처럼 생긴 몬스터들이었다.
“음? 저건 뭐지? 처음 보는데.”
필이 굉장히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그렇겠지.’
내가 코봉이라고 부르는 저 녀석들은 선천적으로 체내에 번개 주머니를 지닌 채 태어나는 코뿔소 외형의 호르핌들이었다.
마법을 거의 사용하지 못하는 호르핌들은 카킹이나 아란탈들로부터 천대받고 있지만, 제각기 특이한 능력들을 가지고 있다.
코봉이들은 엄청난 방어력과 재빠른 속도, 그리고 강력한 번개 속성 때문에 높은 등급의 던전에 배정받은 몬스터였다.
게임이 출시된 지 한 달밖에 지나지 않은 지금, 당연히 어떤 유저도 그런 고위 던전은 구경해 본 적도 없을 것이다. 비록 오늘에서야 처음 알긴 했지만, 랭킹 1위인 나도 아직 파라알을 벗어나지 않고 있으니까.
쿠과광!
코봉이들은 달려오던 그대로 무너진 외벽의 잔재들을 들이받으며 광장에 들어섰다.
부서진 돌무더기들이 대포알처럼 쏘아져 날아와 플레이어들을 덮쳤다.
“끄아악!”
쿠궁!
처참히 돌에 깔려 사라지는 시체를 본 유저들은 기겁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그러고 계실 겁니까, 안방마 님?”
그때, 붉은 무늬가 있는 초록색 제복을 입은 유저 하나가 검을 빼들며 말했다.
“이럴 때일수록 랭킹 1위로서의 진면모를 보여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진면모는 개뿔, 탈모를 보여주게 생겼구만.
서둘러 ID카드를 뒤적여 방금 말한 유저가 누구인지 훔쳐보았다. 중국 플레이어인 ‘칭다오’라는 랭커였다.
“맞아요, 한 수 알려주세요, 마 님.”
붉은 로브를 입은 마녀마저 지팡이를 빙그르르 돌리며 말했다. 이쪽은 ‘라라크’라는 프랑스 유저였다.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듯했다.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한단 말인가.
진짜 유저인 척 몬스터를 잡자니, 맘에 걸리는 것이 너무 많았다.
개고생을 하며 던전을 돌아다니는 나 이상으로, 던전에서 무한정 대기하며 유저들 손에 죽어나는 호르핌 노동자들은 진정한 3D 업종이었다. 아무리 죽어도 다시 태어난다고 하지만 고통은 똑같이 느낀다. 모두 게임을 개발하는 3년간 동고동락한 직원들인데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후… 아니야. 쟤네 생각할 때가 아니지.’
지금은 엄연히 플레이어의 입장. 게다가 도통 왜인지 모르겠지만 먼저 공격해 온 쪽은 저쪽이었다.
하는 수 없지.
“모두 물러서십쇼.”
한마디 했을 뿐인데, 유저들이 모두 ‘오오오!’ 하고 환호했다.
코봉이 떼가 광장 중앙부에 다다르자, 다른 몬스터들이 반으로 갈라지며 길을 텄다. 그와 동시에 코봉이들이 라이트닝 월을 들이받았다.
라이트닝 월은 그들의 박치기에 맥없이 깨져 버렸다. 같은 번개 속성이니 별 피해를 주지 못한 것이다.
그것을 알 리가 없는 랭커들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뒤집어질 듯 놀라며 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후닥닥 뒤로 물러났다.
하나 코봉이들의 속도는 생각보다 더욱 빨랐다.
당황한 랭커들은 다른 유저들의 머리통을 발판 삼아 더 뒤쪽까지 달아났다. 그 뒤를 쫓던 수십 마리의 코봉이들은 그대로 유저들 사이에 쑤셔 박혔다.
“끄아아아악!”
엄청난 수의 플레이어들이 코봉이의 뿔에 꿰뚫려 죽어나갔다. 근처에 있던 유저들까지 번개에 감전되어 쓰러졌다.
“아오, 저 빡대가리들. 그러게 물러서라니깐.”
나는 시계탑을 박차고 그대로 공중에서 솟구쳤다.
유저들의 시선이 나를 따라 포물선을 그렸다.
‘토오 뚜 오보우아제타이…….’
추락하는 동안 주문을 외웠다. 마나가 미친 듯이 몰려들어 두 손에 응집되더니, 밝은 광채를 냈다.
‘카트쥬이어즈바.’
머리부터 떨어지던 내가 손을 뻗어 가장 앞에서 달려오던 코봉이의 머리에 댄 순간, 마나가 사방으로 물결처럼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