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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발을 멈춰 세운 그가 넥타이 사이로 손가락 두 개를 밀어 넣어 손목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하준의 무심한 눈빛이 밑으로 떨어졌다.
태평하게 잘만 잔다. 어쩐지 괘씸하다 못해 억울할 지경이다.
“넌 지금 잠이 오냐.”
그의 낮은 음성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단영이 가장 크게 사는 부분이었다. 성우처럼 차분하면서도 깊이 있는 목소리 하난 끝내주게 좋다면서.
하준은 세상모르고 편히 잠에 취한 단영을 흘기듯 바라보았다.
……화장했네.
“예뻐서 봐준다.”
툭. 그가 손가락으로 부드러운 단영의 볼을 건드렸다.
그러자, 차분히 감겨 있던 눈이 반사적으로 찡그려졌다. 푹신한 침대를 포기해야 하는 건 내키지 않았지만, 상대가 최단영이라면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다.
“잘 자, 최단영.”
그 마음을 네가 알기나 할까.
하준의 입가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2화
밝은 빛이 쏟아지듯 창문을 뚫고 들어와 단영을 괴롭혔다. 줄곧 뒤척였지만, 끝내 참지 못하고 무거운 눈꺼풀을 어렵게 밀어 올렸다.
“으…….”
아침마다 노곤함과 전쟁을 치르는 건, 매번 있는 일이었는데도 영 적응이 안 됐다.
포토그래퍼 직업 특성상 밤낮이 바뀌는 탓에 숙면 패턴도 엉망진창이었다. 제시간에 일어나는 건 오랜만이었다.
“오빠들이 데려다줬나 보네.”
술 마시고 또 난리를 부렸을 거다. 아, 빌어먹을 그놈의 주사.
단영은 휴대폰을 꺼내어 민재와 세훈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 손가락을 바삐 움직였다.
[이번에도 나 때문에 고생 많았어. 나중에 술 쏘겠음.]
그날이 언제가 될진 모르겠다만.
전송 버튼을 누르자마자 답장은 곧바로 도착했다.
[ㅇㅇ! 네, 다음 구라쟁이.]
민재였다.
숫자 ‘2’가 사라진 것을 보아, 세훈은 읽고 무시한 듯하다.
단영은 피식 웃으며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는 주변을 살폈다.
먼지 하나 없이 청결한 것만 봐도 집주인이 누군지 알겠다. 아마 깔끔 떠느라 바쁜 요주의 인물의 집일 것이다.
널찍한 평수, 우윳빛 침대, 아기자기함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말 그대로 모던하기 짝이 없는 인테리어. 하준의 집에 처음 오는 것도 아닌데, 올 때마다 늘 낯설다.
침대의 유혹에서 어렵게 벗어난 단영이 침실 문을 열었다. 대리석 바닥을 밟고 선 발바닥에 뜨거운 열감이 전해졌다.
하준은 연예인보다 더 빽빽한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인물이라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보일러가 틀어져 있다는 건…….
단영의 걸음이 빨라졌다.
“도하……!”
반가움이 앞섰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마저 부를 순 없었다.
얼마 만에 보는 귀한 얼굴인지 모른다. 하준은 팔을 머리맡에 끼워 넣은 채 소파에 누워 자고 있었다. 185cm의 장신인 그를 전부 담기엔 턱없이 부족한 공간이었다.
“지가 새우야, 뭐야. 침대 올라와서 자면 될 것이지……. 괜히 미안해지게.”
단영이 다가가자, 고운 얼굴이 더 또렷하게 보였다. 그리웠던 머스크 향수 냄새도 은근하게 풍겼다. 그의 향수 냄새는 이제 엄마의 체향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잠잘 땐 이렇게 예쁜데.”
고동색 머리카락, 하얀 피부, 눈썹을 간지럽히는 앞머리. 바쁜 동안에도 철저한 운동으로 관리해 온 다부진 몸.
언뜻 보면 뚜렷한 이목구비 때문에 날카로운 인상처럼 보이지만, 지금처럼 무방비한 상태에선 풀어진 표정 속에 온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그래서 학교 다닐 때 좀 불편했지.”
덕 본 일은 많았으나, 그렇게 귀찮을 수가 없었다. 동급생들은 득달같이 달려들어 한 번만 하준을 만나게 해 달라며 끈질기게 졸라 댔었다.
그뿐만 아니라, 길거리 캐스팅이니 뭐니 하는 사람들도 넘쳐 났다. 그 정도로 잘난 남자다 보니, 단영도 한때는 어린 마음에 잠깐 가슴 설레었던 적도 있었다.
물론, 그 또한 찰나의 감정이었다.
어느 날, 감히 비교도 안 될 만큼 지독하게 예쁜 언니와 연애를 시작했을 때 깔끔하게 지웠다. 일부러 더 ‘우리는 가족이잖아.’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와는 12년 동안 가족처럼 알고 지낸 사이였다. 어느 땐 딸바보 아빠 같다가도, 그렇게 무서울 수 없는 엄격한 선생님 같기도 했다.
때로는 짓궂은 오빠처럼. 때로는 둘도 없는 친구처럼, 그는 단영에게 부족한 가족의 부재를 채워 준 소중한 사람이었다.
어둡고 소심했던 성격을 밝혀 준, 은인.
그녀가 무릎을 굽혀 앉았다. 무려 삼 주 만에 재회한 거였다.
“…….”
그 순간, 얌전히 감겨 있던 하준의 눈꺼풀이 날렵하게 떠졌다.
“뭐 하냐.”
바짝 건조하게 갈라진 음성이 나지막이 깔렸다.
“아, 깜짝이야!”
가까운 거리였다. 도둑질을 저지르려다 걸린 사람이 이런 심정이었을까.
화들짝 놀란 단영이 뒤로 기우뚱거리자, 하준은 순발력 있게 버둥거리는 그녀의 손목을 확 낚아챘다.
“안 본 사이에 이상한 취미가 생긴 것 같다, 최단영.”
그런 거 아니거든? 단영이 인상을 찌푸리며 하준에게 잡혀 있던 손을 거칠게 빼내었다.
“오늘은 출근 안 해?”
“해.”
“술김에 들어서 잘 기억은 안 나는데, 민재 오빠 말로는 교수 하기로 했다며.”
“그게 벌써 네 귀에도 들어갔어?”
하준이 상체를 서서히 일으켰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대. 그래서 오늘 출근은 어디로 해? 대학교? 아님, 회사?”
“학교.”
“회사는 어쩌고?”
“강의 없는 날 가야지.”
그 말에 단영은 푸스스 웃었다. 언제부터 돈 욕심이 많아진 건지. 지금도 차고 넘치면서.
“이제부턴 본부장님이 아니라, 교수님이라 불러야겠네?”
“너까지 그러지 마라. 소름 돋는다. 그리고 교수 아니야. 겸임이지.”
“겸임은 교수 아닌가? 학교 안에선 다 똑같을 텐데, 뭐.”
안 그래도 어제저녁 회식에서부터 도 교수, 도 교수 하는 소리를 지겹도록 들어야 했다. 하준은 그 낯간지러운 호칭에 솜털이 삐죽 솟을 지경이었다.
“예쁘고 어린 애들 많을 텐데, 좋겠다? 간만에 회춘하는 기분 들겠어.”
“됐다 그래. 너 다 가져.”
“나도 이제 일자리 안정 찾았으니까 슬슬 장가갈 준비 하셔야죠, 도하준 씨. 언제까지 동생 뒷바라지만 하고 살래. 나이도 찼잖아.”
“꼰대처럼 쓸데없이 남 걱정 하지 말고, 술이나 작작 마셔. 다 컸으니까 봐주고 있는 거야.”
“하이고, 무서워라.”
지금이야 농담처럼 넘길 수 있게 됐지만, 단영이 학창 시절 때 하준은 정말 무서웠다.
이후로도 영양가 없는 안부 대화가 이어졌다. 삼 주 동안의 부재인 만큼 나눌 주제는 차고 넘쳤다. 둘 사이에 어색함은 없었다.
“샤워하고 와, 밥 먹게.”
단영의 말에 그제야 하준은 고갤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번처럼 부엌 태워 먹지 마.”
“그럴 거 같아서 3분 카레 하려고.”
“자랑이다. 그래서 시집이나 제대로 갈 수 있겠냐.”
“네네. 걱정 마시죠. 셰프한테 시집가면 되니까.”
“밖에서 질리도록 할 텐데, 집 들어와서 잘도 요리하겠다.”
“정 안 될 것 같으면 도하준이나 잡고 늘어져 보지 뭐.”
순간, 하준이 멈칫했다. 그러나 이내 입술 끝을 슬쩍 올리며 장난스레 응수했다.
“누가 너 만나 준다는데.”
“야.”
“야는 반말이고.”
단영은 단 한 번도 하준에게 말싸움으로 이긴 적이 없었다. 그녀가 눈을 세모꼴로 추켜 뜨자, 하준은 무서워 죽겠네 하며 진심이라곤 한 스푼도 담겨 있지 않은 말을 뱉었다.
“……아, 진짜 싫어. 도하준.”
“도하준은 이름이고.”
“아, 좀! 사람 신경 그만 긁고 씻기나 해.”
“오빠라 안 부르지.”
“징그러워.”
“하민재나 오세훈한테는 잘만 부르잖아.”
“걔넨 걔네고.”
“어쭈, 걔네?”
남자 셋, 그리고 단영의 막둥이 남동생까지 하면 남자만 무려 네 명이었다.
뭐, 당연한 일이겠지만, 아마 민재와 세훈이 듣게 된다면 대성통곡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휴, 말을 말자.”
결국 먼저 백기를 든 쪽은 단영이었다. 그녀는 절레절레 고갤 내저으며 부엌으로 멀어져 갔다.
……하여튼, 성격하고는.
그 모습을 넌지시 지켜보던 하준도 피식 웃으며 욕실로 향했다.
*
오랜만인 캠퍼스 교정을 걷다 보니 잊고 살았던 아련한 추억도 함께 샘솟았다. 캠퍼스는 끝도 없이 넓었다.
“……대학생 때로 돌아간 기분이네.”
추억에 젖어 있던 것도 잠시, 자칫하면 지각할 위기였다. 촉박한 시간을 쪼개어 단영이 작업하는 스튜디오에 바래다준 탓이 컸다. 하준이 교정을 가로질러 빠른 보폭으로 걷기 시작하자, 뒤에선 수군거리는 여대생들의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사사로운 것엔 일절 신경 쓰는 편이 아니었던지라, 하준은 그것들을 모두 가볍게 무시했다. 10분 정도 지체됐지만, 그는 의연하게 지정된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
떠들썩한 분위기가 하준의 등장으로 인해 일순 고요해졌다. 새 학기를 맞이해 초롱초롱 빛나는 햇병아리들의 눈빛이 퍽 부담스럽게까지 느껴졌다.
회사에선 평사원들에게 서류를 내던지며 ‘다시 컨펌.’을 외치던 까칠한 본부장님이었는데, 학교에서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사회 초년생이 될 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 줘야 할……. 뭐라 했더라. 어찌 됐든 교수들은 하준에게 끊임없이 당부했다. 까탈스러운 AE기획부서 본부장 이미지는 싹 지워 달라며.
비록 대타로 들어온 자리였지만, 첫 겸임 교수라, 소속은 경영학과였어도 실질적으로 맡게 된 과목은 전공이 아닌 교양 쪽이었다.
여러 학과 학생들이 모여 있었고, 1학년 강의가 아니라서 그런지, 그나마 연륜이 묻어난 2, 3학년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4학년 졸업반은 거의 없었다.
뭐, 그래 봤자 하준의 눈엔 단영보다 어린 조막만 한 애들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반갑습니다. 마케팅전략 교양 과목을 맡게 된, 겸임 교수 도하준입니다. 편의상, 말은 편하게 놓을 생각인데.”
그가 차분하게 첫인사를 건네자, ‘좋아요!’ 하며 기다렸다는 듯 여학생들의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사실, ‘겸임’이라는 단어는 겸임 교수들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쉬쉬하는 편이었다. 무시당할 게 뻔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하준은 일부러 더 제 위치를 상기시켰다. ‘대학교수’란 직급이 어지간히 부담스러웠다.
“봤어? 겁나 잘생겼어.”
“와, 대박. 나 무슨 4학년 선배인 줄. 연예인 뺨 제대로 후려쳤어.”
다 들린다. 이것들아.
하준은 도무지 적응할 수가 없었다. 은어와 비속어가 난무하는 강의실 실태가 심각할 정도였다. 서른이 넘은 나이였대도 기획부서 본부장으로 근무하며 비슷한 연령대의 사원들보단 깨어 있다 생각했는데, 새파랗게 젊은 대학생들의 대화 수준을 따라가기엔 무리였다.
“교수님! 교수님은 몇 살이에요?”
“몇 살은 반말.”
습관적으로 단영에게 하는 말버릇이 튀어나왔다.
“그럼…… 연세?”
아, 그건 그거대로 듣기가 좀 거북한데. 하준이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그게 또 좋다며 마냥 신이 난 학생들이었다.
하준이 대학을 다니던 시절엔 아무리 겸임이라 할지라도 교수님이란 존재는 무척이나 높았다. 요즘 애들은 다 이런가. 적응 불가다.
“서른둘.”
“와! 교수님 엄청 젊다! 애인 있어요?”
“너희들이 고등학생이냐.”
교생 실습도 아니고. 하준은 어쩐지 괴롭힘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대충 넘어가자. 안 그래도 피곤해 죽겠는데.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학생들의 질문 세례는 끝이 없었다.
“교수님, 시오전자 기획부서 본부장님이라고 들었는데, 그거 사실이에요?”
“그래.”
“와! 시오전자 입사하기 엄청 힘들기로 유명하잖아요. 선배들 하반기 공개 채용 때 떨어졌다고 우는 거 많이 봤어요.”
그게 네가 될 수도 있어, 인마. 하준은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을 애써 삼켰다. 희망. 그래, 희망을 심어 줘야 한다.
“왜, 졸업하면 면접 보러 오게?”
“가면 교수님 빽으로 취업시켜 줘요?”
“이제부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는 무시로 일관한다.”
고분고분 들어 주다 보니, 철 덜든 것들의 건방짐에 휘발유를 들이붓고 있는 격이었다.
“그리고 말 좀 예쁘게 해. 빽이 뭐냐 빽이. 생긴 건 멀쩡하게 생겨 가지고.”
‘멀쩡하게’라는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릴 법도 한데, 여학생들은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이 꺅꺅거리고 난리도 아니다. 아마, ‘멀쩡하게’란 말이 ‘예쁘게’로 잘못 전달된 모양이다.
“자, 이제 그만 떠들고 집중.”
강단에 선 하준이 한층 진중해진 음성으로 학생들을 압도했다. 마냥 잘생긴 교회 오빠쯤으로 편하게 여긴 모양인데, 그건 완벽한 착각이었다. 하준은 처음부터 교수들의 절절한 부탁을 들어줄 생각 자체가 없었다.
기선 제압엔 일가견이 있다는, 무려 시오전자 기획본부장 도하준이 아니던가.
발을 멈춰 세운 그가 넥타이 사이로 손가락 두 개를 밀어 넣어 손목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하준의 무심한 눈빛이 밑으로 떨어졌다.
태평하게 잘만 잔다. 어쩐지 괘씸하다 못해 억울할 지경이다.
“넌 지금 잠이 오냐.”
그의 낮은 음성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단영이 가장 크게 사는 부분이었다. 성우처럼 차분하면서도 깊이 있는 목소리 하난 끝내주게 좋다면서.
하준은 세상모르고 편히 잠에 취한 단영을 흘기듯 바라보았다.
……화장했네.
“예뻐서 봐준다.”
툭. 그가 손가락으로 부드러운 단영의 볼을 건드렸다.
그러자, 차분히 감겨 있던 눈이 반사적으로 찡그려졌다. 푹신한 침대를 포기해야 하는 건 내키지 않았지만, 상대가 최단영이라면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다.
“잘 자, 최단영.”
그 마음을 네가 알기나 할까.
하준의 입가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2화
밝은 빛이 쏟아지듯 창문을 뚫고 들어와 단영을 괴롭혔다. 줄곧 뒤척였지만, 끝내 참지 못하고 무거운 눈꺼풀을 어렵게 밀어 올렸다.
“으…….”
아침마다 노곤함과 전쟁을 치르는 건, 매번 있는 일이었는데도 영 적응이 안 됐다.
포토그래퍼 직업 특성상 밤낮이 바뀌는 탓에 숙면 패턴도 엉망진창이었다. 제시간에 일어나는 건 오랜만이었다.
“오빠들이 데려다줬나 보네.”
술 마시고 또 난리를 부렸을 거다. 아, 빌어먹을 그놈의 주사.
단영은 휴대폰을 꺼내어 민재와 세훈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 손가락을 바삐 움직였다.
[이번에도 나 때문에 고생 많았어. 나중에 술 쏘겠음.]
그날이 언제가 될진 모르겠다만.
전송 버튼을 누르자마자 답장은 곧바로 도착했다.
[ㅇㅇ! 네, 다음 구라쟁이.]
민재였다.
숫자 ‘2’가 사라진 것을 보아, 세훈은 읽고 무시한 듯하다.
단영은 피식 웃으며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는 주변을 살폈다.
먼지 하나 없이 청결한 것만 봐도 집주인이 누군지 알겠다. 아마 깔끔 떠느라 바쁜 요주의 인물의 집일 것이다.
널찍한 평수, 우윳빛 침대, 아기자기함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말 그대로 모던하기 짝이 없는 인테리어. 하준의 집에 처음 오는 것도 아닌데, 올 때마다 늘 낯설다.
침대의 유혹에서 어렵게 벗어난 단영이 침실 문을 열었다. 대리석 바닥을 밟고 선 발바닥에 뜨거운 열감이 전해졌다.
하준은 연예인보다 더 빽빽한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인물이라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보일러가 틀어져 있다는 건…….
단영의 걸음이 빨라졌다.
“도하……!”
반가움이 앞섰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마저 부를 순 없었다.
얼마 만에 보는 귀한 얼굴인지 모른다. 하준은 팔을 머리맡에 끼워 넣은 채 소파에 누워 자고 있었다. 185cm의 장신인 그를 전부 담기엔 턱없이 부족한 공간이었다.
“지가 새우야, 뭐야. 침대 올라와서 자면 될 것이지……. 괜히 미안해지게.”
단영이 다가가자, 고운 얼굴이 더 또렷하게 보였다. 그리웠던 머스크 향수 냄새도 은근하게 풍겼다. 그의 향수 냄새는 이제 엄마의 체향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잠잘 땐 이렇게 예쁜데.”
고동색 머리카락, 하얀 피부, 눈썹을 간지럽히는 앞머리. 바쁜 동안에도 철저한 운동으로 관리해 온 다부진 몸.
언뜻 보면 뚜렷한 이목구비 때문에 날카로운 인상처럼 보이지만, 지금처럼 무방비한 상태에선 풀어진 표정 속에 온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그래서 학교 다닐 때 좀 불편했지.”
덕 본 일은 많았으나, 그렇게 귀찮을 수가 없었다. 동급생들은 득달같이 달려들어 한 번만 하준을 만나게 해 달라며 끈질기게 졸라 댔었다.
그뿐만 아니라, 길거리 캐스팅이니 뭐니 하는 사람들도 넘쳐 났다. 그 정도로 잘난 남자다 보니, 단영도 한때는 어린 마음에 잠깐 가슴 설레었던 적도 있었다.
물론, 그 또한 찰나의 감정이었다.
어느 날, 감히 비교도 안 될 만큼 지독하게 예쁜 언니와 연애를 시작했을 때 깔끔하게 지웠다. 일부러 더 ‘우리는 가족이잖아.’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와는 12년 동안 가족처럼 알고 지낸 사이였다. 어느 땐 딸바보 아빠 같다가도, 그렇게 무서울 수 없는 엄격한 선생님 같기도 했다.
때로는 짓궂은 오빠처럼. 때로는 둘도 없는 친구처럼, 그는 단영에게 부족한 가족의 부재를 채워 준 소중한 사람이었다.
어둡고 소심했던 성격을 밝혀 준, 은인.
그녀가 무릎을 굽혀 앉았다. 무려 삼 주 만에 재회한 거였다.
“…….”
그 순간, 얌전히 감겨 있던 하준의 눈꺼풀이 날렵하게 떠졌다.
“뭐 하냐.”
바짝 건조하게 갈라진 음성이 나지막이 깔렸다.
“아, 깜짝이야!”
가까운 거리였다. 도둑질을 저지르려다 걸린 사람이 이런 심정이었을까.
화들짝 놀란 단영이 뒤로 기우뚱거리자, 하준은 순발력 있게 버둥거리는 그녀의 손목을 확 낚아챘다.
“안 본 사이에 이상한 취미가 생긴 것 같다, 최단영.”
그런 거 아니거든? 단영이 인상을 찌푸리며 하준에게 잡혀 있던 손을 거칠게 빼내었다.
“오늘은 출근 안 해?”
“해.”
“술김에 들어서 잘 기억은 안 나는데, 민재 오빠 말로는 교수 하기로 했다며.”
“그게 벌써 네 귀에도 들어갔어?”
하준이 상체를 서서히 일으켰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대. 그래서 오늘 출근은 어디로 해? 대학교? 아님, 회사?”
“학교.”
“회사는 어쩌고?”
“강의 없는 날 가야지.”
그 말에 단영은 푸스스 웃었다. 언제부터 돈 욕심이 많아진 건지. 지금도 차고 넘치면서.
“이제부턴 본부장님이 아니라, 교수님이라 불러야겠네?”
“너까지 그러지 마라. 소름 돋는다. 그리고 교수 아니야. 겸임이지.”
“겸임은 교수 아닌가? 학교 안에선 다 똑같을 텐데, 뭐.”
안 그래도 어제저녁 회식에서부터 도 교수, 도 교수 하는 소리를 지겹도록 들어야 했다. 하준은 그 낯간지러운 호칭에 솜털이 삐죽 솟을 지경이었다.
“예쁘고 어린 애들 많을 텐데, 좋겠다? 간만에 회춘하는 기분 들겠어.”
“됐다 그래. 너 다 가져.”
“나도 이제 일자리 안정 찾았으니까 슬슬 장가갈 준비 하셔야죠, 도하준 씨. 언제까지 동생 뒷바라지만 하고 살래. 나이도 찼잖아.”
“꼰대처럼 쓸데없이 남 걱정 하지 말고, 술이나 작작 마셔. 다 컸으니까 봐주고 있는 거야.”
“하이고, 무서워라.”
지금이야 농담처럼 넘길 수 있게 됐지만, 단영이 학창 시절 때 하준은 정말 무서웠다.
이후로도 영양가 없는 안부 대화가 이어졌다. 삼 주 동안의 부재인 만큼 나눌 주제는 차고 넘쳤다. 둘 사이에 어색함은 없었다.
“샤워하고 와, 밥 먹게.”
단영의 말에 그제야 하준은 고갤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번처럼 부엌 태워 먹지 마.”
“그럴 거 같아서 3분 카레 하려고.”
“자랑이다. 그래서 시집이나 제대로 갈 수 있겠냐.”
“네네. 걱정 마시죠. 셰프한테 시집가면 되니까.”
“밖에서 질리도록 할 텐데, 집 들어와서 잘도 요리하겠다.”
“정 안 될 것 같으면 도하준이나 잡고 늘어져 보지 뭐.”
순간, 하준이 멈칫했다. 그러나 이내 입술 끝을 슬쩍 올리며 장난스레 응수했다.
“누가 너 만나 준다는데.”
“야.”
“야는 반말이고.”
단영은 단 한 번도 하준에게 말싸움으로 이긴 적이 없었다. 그녀가 눈을 세모꼴로 추켜 뜨자, 하준은 무서워 죽겠네 하며 진심이라곤 한 스푼도 담겨 있지 않은 말을 뱉었다.
“……아, 진짜 싫어. 도하준.”
“도하준은 이름이고.”
“아, 좀! 사람 신경 그만 긁고 씻기나 해.”
“오빠라 안 부르지.”
“징그러워.”
“하민재나 오세훈한테는 잘만 부르잖아.”
“걔넨 걔네고.”
“어쭈, 걔네?”
남자 셋, 그리고 단영의 막둥이 남동생까지 하면 남자만 무려 네 명이었다.
뭐, 당연한 일이겠지만, 아마 민재와 세훈이 듣게 된다면 대성통곡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휴, 말을 말자.”
결국 먼저 백기를 든 쪽은 단영이었다. 그녀는 절레절레 고갤 내저으며 부엌으로 멀어져 갔다.
……하여튼, 성격하고는.
그 모습을 넌지시 지켜보던 하준도 피식 웃으며 욕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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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인 캠퍼스 교정을 걷다 보니 잊고 살았던 아련한 추억도 함께 샘솟았다. 캠퍼스는 끝도 없이 넓었다.
“……대학생 때로 돌아간 기분이네.”
추억에 젖어 있던 것도 잠시, 자칫하면 지각할 위기였다. 촉박한 시간을 쪼개어 단영이 작업하는 스튜디오에 바래다준 탓이 컸다. 하준이 교정을 가로질러 빠른 보폭으로 걷기 시작하자, 뒤에선 수군거리는 여대생들의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사사로운 것엔 일절 신경 쓰는 편이 아니었던지라, 하준은 그것들을 모두 가볍게 무시했다. 10분 정도 지체됐지만, 그는 의연하게 지정된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
떠들썩한 분위기가 하준의 등장으로 인해 일순 고요해졌다. 새 학기를 맞이해 초롱초롱 빛나는 햇병아리들의 눈빛이 퍽 부담스럽게까지 느껴졌다.
회사에선 평사원들에게 서류를 내던지며 ‘다시 컨펌.’을 외치던 까칠한 본부장님이었는데, 학교에서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사회 초년생이 될 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 줘야 할……. 뭐라 했더라. 어찌 됐든 교수들은 하준에게 끊임없이 당부했다. 까탈스러운 AE기획부서 본부장 이미지는 싹 지워 달라며.
비록 대타로 들어온 자리였지만, 첫 겸임 교수라, 소속은 경영학과였어도 실질적으로 맡게 된 과목은 전공이 아닌 교양 쪽이었다.
여러 학과 학생들이 모여 있었고, 1학년 강의가 아니라서 그런지, 그나마 연륜이 묻어난 2, 3학년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4학년 졸업반은 거의 없었다.
뭐, 그래 봤자 하준의 눈엔 단영보다 어린 조막만 한 애들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반갑습니다. 마케팅전략 교양 과목을 맡게 된, 겸임 교수 도하준입니다. 편의상, 말은 편하게 놓을 생각인데.”
그가 차분하게 첫인사를 건네자, ‘좋아요!’ 하며 기다렸다는 듯 여학생들의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사실, ‘겸임’이라는 단어는 겸임 교수들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쉬쉬하는 편이었다. 무시당할 게 뻔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하준은 일부러 더 제 위치를 상기시켰다. ‘대학교수’란 직급이 어지간히 부담스러웠다.
“봤어? 겁나 잘생겼어.”
“와, 대박. 나 무슨 4학년 선배인 줄. 연예인 뺨 제대로 후려쳤어.”
다 들린다. 이것들아.
하준은 도무지 적응할 수가 없었다. 은어와 비속어가 난무하는 강의실 실태가 심각할 정도였다. 서른이 넘은 나이였대도 기획부서 본부장으로 근무하며 비슷한 연령대의 사원들보단 깨어 있다 생각했는데, 새파랗게 젊은 대학생들의 대화 수준을 따라가기엔 무리였다.
“교수님! 교수님은 몇 살이에요?”
“몇 살은 반말.”
습관적으로 단영에게 하는 말버릇이 튀어나왔다.
“그럼…… 연세?”
아, 그건 그거대로 듣기가 좀 거북한데. 하준이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그게 또 좋다며 마냥 신이 난 학생들이었다.
하준이 대학을 다니던 시절엔 아무리 겸임이라 할지라도 교수님이란 존재는 무척이나 높았다. 요즘 애들은 다 이런가. 적응 불가다.
“서른둘.”
“와! 교수님 엄청 젊다! 애인 있어요?”
“너희들이 고등학생이냐.”
교생 실습도 아니고. 하준은 어쩐지 괴롭힘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대충 넘어가자. 안 그래도 피곤해 죽겠는데.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학생들의 질문 세례는 끝이 없었다.
“교수님, 시오전자 기획부서 본부장님이라고 들었는데, 그거 사실이에요?”
“그래.”
“와! 시오전자 입사하기 엄청 힘들기로 유명하잖아요. 선배들 하반기 공개 채용 때 떨어졌다고 우는 거 많이 봤어요.”
그게 네가 될 수도 있어, 인마. 하준은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을 애써 삼켰다. 희망. 그래, 희망을 심어 줘야 한다.
“왜, 졸업하면 면접 보러 오게?”
“가면 교수님 빽으로 취업시켜 줘요?”
“이제부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는 무시로 일관한다.”
고분고분 들어 주다 보니, 철 덜든 것들의 건방짐에 휘발유를 들이붓고 있는 격이었다.
“그리고 말 좀 예쁘게 해. 빽이 뭐냐 빽이. 생긴 건 멀쩡하게 생겨 가지고.”
‘멀쩡하게’라는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릴 법도 한데, 여학생들은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이 꺅꺅거리고 난리도 아니다. 아마, ‘멀쩡하게’란 말이 ‘예쁘게’로 잘못 전달된 모양이다.
“자, 이제 그만 떠들고 집중.”
강단에 선 하준이 한층 진중해진 음성으로 학생들을 압도했다. 마냥 잘생긴 교회 오빠쯤으로 편하게 여긴 모양인데, 그건 완벽한 착각이었다. 하준은 처음부터 교수들의 절절한 부탁을 들어줄 생각 자체가 없었다.
기선 제압엔 일가견이 있다는, 무려 시오전자 기획본부장 도하준이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