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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2. 레드벨벳(2)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다비드상보다 더 완벽한 내 남편의 얼굴을 보면 평생 이렇게 살다 처녀 귀신으로 죽더라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니 아마도 난 아직 성숙한 여자가 아닌 소녀인가 보다.
“근데, 지영아. 우리 부부, 사실 만난 지 육 개월밖에 안 됐잖아. 그리고 결혼 후에도 계속 그 사람 해외 세미나다 학회다 바빴고, 생각해 보면 그동안 우리는 친밀해질 시간이 부족했어.”
“얘가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남녀가 필이 통하면 하룻밤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거 몰라? 이건 시간 부족이 문제가 아닌 거지…….”
그도 그렇긴 하다. 하지만 이대로 이 남자를 놓을 수는 없다는 애절함이 밀려왔다. 딱 하나, 그거만 빼고 완벽한 내 남편과의 결혼 생활을 위해서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그래도, 그래도 말이야. 이혼보다는 어떻게…… 다른 방법이 없을까, 응?”
내 목소리가 절박하긴 했나 보다. 남녀 관계에 있어서만은 단호한 지영이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날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뗐다.
“그래, 하긴 재민 씨도 그 나이 되도록 공부만 했겠지. 연애할 시간이나 있었겠냐. 어쩌면 아직 숫총각? 그렇담 네가 먼저 이렇게 해 보는 건 어떨까?”
“내가 먼저? 어떻게?”
지영이는 잠시 주위를 살피더니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속닥속닥, 귀에 닿는 말에 내 얼굴은 차츰 붉게 달아올랐다.
“헉! 뭐야, 진짜. 나보고 지금 그걸 하라고?”
“왜? 못하겠어? 그럼 뭐, 할 수 없고.”
“아니, 아니야. 할게. 해 볼게.”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재민 씨 내일 오지? 오면 당장 시도해라. 그래도 반응 없으면 고자 맞으니까 이혼해. 집도 네 명의겠다, 부모님이 남겨 주신 유산도 있겠다, 뭐가 아쉬워서 수녀 코스프레 하며 사냐? 아니다 싶으면 얼른 정리하고 조금이라도 젊을 때 진짜 남자 만나야지.”
“응. 알았어. 노력해 볼게.”

* * *

띠리리릭.
왔다! 드디어 왔나 보다.
일주일간 학회 때문에 독일에 갔던 남편이 돌아와 현관 버튼을 누르는 소리였다. 저녁 준비를 하던 나는 현관으로 잽싸게 달려 나가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지영이가 코치해 준 대로 새하얀 셔츠에 단순한 검정 타이트스커트, 그리고 단정하게 하나로 묶은 머리는 이제껏 보여 준 나의 이미지와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나 왔어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환한 웃음을 머금고 그가 현관 안으로 들어선다.
아! 이 멋진 남자가 내 남편이라니.
그와 눈이 마주치자 그대로 호흡이 멎고 동공이 풀리고 가슴은 미친 듯 뛰기 시작했다. 지영이가 가르쳐 준 작전이고 뭐고 다 잊고 이대로 이 남자의 얼굴만 바라봐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곧 정신을 가다듬고 그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보고 싶었어요.”
들릴 듯 말 듯 낮게 속삭이며 붉은 립스틱을 바른 내 입술을 그의 입술에 포개기 위해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목을 감싸려고 팔을 한껏 들어 올리자 두 개의 단추를 푼 셔츠 앞섶이 벌어지며 뽀얀 가슴골이 노출되었다.
이대로 조금 더, 조금만 더…….
발꿈치를 치켜들고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내심 떨렸지만, 영화 속 팜므파탈을 떠올리며 마치 내가 치명적 매력의 여주나 된 듯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쫑긋 오므리며 턱을 내밀었다.
‘너, 그런다고 속이 훤히 비치는 옷이나 허벅지 다 드러내는 미니스커트는 안 된다. 특히 재민 씨 같은 남자를 혹하게 하는 건 그런 원초적인 야함이 아니야. 음, 뭐랄까……. 고급스러운 섹시함? 왜 그런 거 있잖아. 우리도 근육 울룩불룩한 남자의 벗은 몸보다는 걷어 올린 셔츠 소매 아래 드러난 팔뚝 같은 게 끌리잖아. 힘줄이 살짝 선. 흐흐. 안 그래? 그리고 넌 피부가 깨끗하고 하야니까 입술만 살짝 포인트를 줘. 그다음에 재민 씨 목을 껴안고 입술을 가져다 대기만 해. 그럼 목석이 아닌 이상 반응이 올 거야. 반응이 오면 그 뒤는 저절로 진행되는 거지. 으흠?’
지영이의 조언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제 내 입술이 그의 입술에 닿는 순간 우리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은 눈 녹듯 사라질 것이다. 그럴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쪽!
내 입술이 채 닿기도 전에 그의 입술이 내 이마에 먼저 도장을 찍었다. 그러고는 나를 살짝 안아 주고, 자신의 목을 감싼 내 팔을 풀어내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나도 보고 싶었어요. 음, 맛있는 냄새. 오늘 저녁은 뭐예요?”
그의 행동이 워낙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나조차 내 원래 의도를 잊을 정도였다. 그냥 처음부터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여겨졌다.
“재민 씨 좋아하는 두부 전골이랑 불고기예요. 얼른 씻고 식탁으로 오세요.”
“안 그래도 다은 씨 두부 전골이 먹고 싶었어요. 아! 그리고 이거.”
“뭐예요?”
“다은 씨가 하면 예쁠 거 같아서……. 귀걸이예요.”
그의 손바닥엔 고급스러운 포장의 선물 상자가 놓여 있었다.
“고마워요. 조금 이따가 풀어 볼게요.”
그동안 그가 선물을 사 오면 난 뛸 듯이 좋아하며 그 자리에서 포장을 뜯고 바로 착용해 보이곤 했었다. 그것이 값비싼 명품이어서가 아니라 내 생각을 하며 내게 어울릴 걸 골랐을 그의 마음이라 여겼기 때문에 진심으로 기뻤었다. 하지만 지금은 왠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그래요, 그럼.”
대답하는 음성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 같아 고개를 들어 그를 봤지만, 안경 너머 눈동자는 호수처럼 맑고 고요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호수. 내가 던진 돌멩이 하나쯤은 그대로 꿀꺽 집어삼켜 잔잔한 파문조차 일지 않을 심연의 호수.
그 바닥을 알 수 없을 것 같은 아득함에 문득 절망감이 엄습해 왔지만, 한편으론 저 잔잔한 호수를 마구 헤집어 보고 싶다는 충동이 스멀스멀 솟아올랐다.

* * *

똑똑.
방문을 가볍게 노크하는 소리에 얼른 눈을 감았다.
똑! 똑!
이번엔 조금 더 큰 소리였다.
“으으, 음.”
난 들어오란 말 대신 마치 지금 막 잠에서 깨어나려 한다는 듯 신음을 토해 냈다.
“다은 씨, 들어가도 돼요?”
“네. 아아, 흐음.”
그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자 커피 향이 코를 간질였지만, 여전히 잠에서 못 깬 척 눈을 비비며 옹알거리고 있었다.
“아직 안 일어났군요. 피곤하면 좀 더 자요. 커피는 여기 두고 갈게요.”
어휴, 젠장. 이건 뭐 하나 제대로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게 없는지. 식기 전에 마시라며 흔들어 깨우면 잠결인 척 끌어당겨 어제 허무하게 불발로 끝난 작전을 재개하려 했건만……. 이래서야 어느 세월에 입을 맞추고, 진한 키스를 해 보며, 하늘은 또 언제 볼꼬!
“아, 아니에요. 저 원래 뜨거운 커피만 마셔요.”
나는 냉큼 일어나 앉으며 다급히 머그를 받았다. 그런 내 모습을 그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잠시 내려다보다가 곧 나가려 했다.
“뜨거우니 천천히 마셔요. 그럼 난 이만.”
“저, 저기요!”
급하긴 되게 급했는가 보다. 남편보고 ‘저기요’라니. 아우, 진짜 못 살아 내가.
“저요?”
싱긋이 웃으며 그가 돌아본다. 얼핏 놀리는 듯 장난기가 비쳤던 것 같기도 한데 착각일까?
“네.”
청승맞게 혼자 침대에 앉아 홀짝거리자고 이제부터 주말엔 침실로 모닝커피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겠는가. 그래도 명색이 신혼 5개월의 파릇한 새신부인데 말이다.
이른 아침부터 샤워하고 양치하고 향 좋은 보디로션을 치덕치덕 발라 가며 도모했던 거사를 시동도 걸기 전에 접어야 한다니, 나도 모르게 볼멘소리가 나올 수밖에.
“저, 혼자 커피 마시기 싫거든요.”
그런 날 지긋이 보던 그가 성큼 다가와 내 침대에 걸터앉으며 다정하지만, 예의 바른 목소리로 말한다.
“미안해요. 내가 너무 무심했나 봐요.”
커튼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틀어 올린 머리 아래 하얗게 드러난 어깨와 하늘거리는 레이스 슬립 위에 내려앉았다. 일부러 골라 입은 얇은 슬립 밑으로 숨길 수 없이 드러나는 굴곡을 보니 민망함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고개 숙이고 커피가 담긴 머그만 만지작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그의 곧고 긴 손가락이 내 어깨를 향해 다가온 것은.
흡!
나도 몰래 숨을 삼켰다.
“머리카락.”
해사하게 웃으며 내 어깨 위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섬세한 손길로 집어 올린다. 이 남자는 어쩜 이렇게 해맑을까? 세상의 모진 풍파는 알아서 이 남자를 비켜 갔을 것이다.
부와 명예, 외모와 성격까지 너무나 완벽한 이 사람에겐 자신의 무심한 손길에도 파르르 떠는 내 비루한 육체는 아무 감흥 없는 뼈와 가죽일 뿐이겠지? 잠시나마 온몸의 세포가 곤두서 버린 내 몸이, 설레었던 내 마음이, 원망스럽다.
“우리 오늘, 영화 보러 갈래요?”
“영화요? 재민 씨 안 바빠요?”
“안 바빠요. 토요일이잖아요. 다은 씨 가게 오늘 바쁜 날인가?”
“그렇긴 한데, 요즘 가게 일은 혜수가 다 알아서 해요. 또 주말엔 아르바이트생도 더 쓰니까.”
혜수는 가게에서 아르바이트하던 아이인데, 요즘은 휴학까지 하고 열성적으로 나에게 컵케이크를 배우고 있다. 워낙 감각 있고 성실한 아이라 가게 운영 전반에 대해 그녀에게 일임하고 매니저란 직책까지 주었다. 똘똘한 혜수 덕에 나는 여유로운 시간에 새로운 레시피를 개발하고 집안일도 살필 수 있어 좋았다.
“그럼 우리, 오늘 같이 나갈까요?”
“아뇨. 가게에 잠시 들러야 하니까, 음…… 오후에 가게로 오세요.”
“그럼 3시쯤 갈게요. 보고 싶은 영화 있어요?”
“글쎄요. 요즘 볼만한 게 뭐 있을까, 잘 모르겠네.”
아직도 내 마음은 뚱하니 풀리지 않았다. 그와 나는 시간이 맞을 때면 영화를 보거나 쇼핑을 하고 저녁을 먹으며 방금 본 영화 이야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각자의 일 이야기를 즐겁게 나누곤 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좀 더 깊은 대화로 진전이 된 적이 없다. 마치 소개팅에서 뜻하지 않게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났을 때처럼, 적당히 설레고 기분 좋고 예의 바른 관계를 유지해 왔다.
처음엔 그와의 그런 데이트가 마냥 좋기만 했다. 이렇게 조금씩 서로를 알아 가도록 시간을 주고, 내 몸과 마음이 완전히 그를 향해 열리길 기다려 주는 배려라 여겨져 그의 세심함에 감동했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늘 한결같은 온화한 표정과 부드러운 음성, 격식을 갖춘 매너, 이 모든 게 그가 나를 향해 쌓은 벽이라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를 향한 내 마음이 더욱 깊어지고, 그저 스치는 손길에도 내 몸의 반응이 달라지고 있었지만, 그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내가 검색해 보고 평 좋은 걸로 예매할게요.”
내 기분이 밝지 않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아무렇지 않게 그는 내 뺨에 살짝 입술을 댄 후, 빈 잔을 가지고 나갔다.
뜻하지 않은 청혼과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진행된 결혼까지야 어쩔 수 없었다 치더라도, 부부라는 이름으로 5개월 가까이 한집에 살며 고작 우리가 한 것은 서양 사람이면 이웃하고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의례적인 행위 정도였다.
아무런 의미 없는 인사임을 알지만, 아는데, 그런데도…… 난, 왜 바보처럼 가슴이 뛸까.
‘골치 아프게 하는 시댁 없어서 그거마저 완벽하다 했더니, 이럴 땐 후사를 이으라고 들들 볶아 줄 시부모님이 아쉽다. 드라마 같은 거 보면 계약결혼이다 정략결혼이다 해도 시집 식구들 성화에 합방하네, 마네 깨를 볶던데. 넌 누구보다 드라마틱한 결혼을 해 놓고 막상 뚜껑 열고 보니 앙꼬 없는 찐빵 꼴이네.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 남자는 자 보기 전엔 모른다고.’
그래, 지영아. 네 말은 항상 옳았어.
하루빨리 손주 보게 해 달라고 압력 넣는 시부모님? 어릴 때 미국에 이민 가 그곳에서 학업을 마친 그는 외아들이었다.
성공한 사업가였던 아버지는 5년 전 사고로 돌아가셨고 어머니마저 재작년 지병으로 돌아가신 후 국내 대학의 파격적인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얼마 전 귀국했다고 한다. 이게 내가 아는 그의 가족사 전부다.
그의 반듯한 성품을 보면 분명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을 것 같은데 그는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는다. 어쩌다 내가 물어보기라도 할라치면 금세 화제를 돌려 버리곤 했다. 그래서 난 시부모님의 사진조차 본 적이 없다. 그에게는 가족과의 소중한 추억 같은 것이 아예 없는 걸까?

* * *

가게 문이 열리고 깜찍한 아가씨 한 명이 들어선다. 매일 오후 이 무렵 들르는 단골손님이다. 근처 오피스텔에서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한다는데 본인이 모델도 겸한다고 혜수가 말해 줘서 익히 알고 있었다.
“어서 와요.”
“안녕하세요.”
그녀가 우리 가게에서 찾는 건 달콤한 컵케이크가 아니라 쌉쌀한 아메리카노다. 유명 바리스타가 있는 커피전문점도 아니고 특별히 좋은 원두를 공수해서 쓰는 것도 아니라 딱히 내세울 것도 없건만, 매일 이곳에서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그녀의 지정석과 다름없는 진열장 바로 앞자리에 앉아 오래오래 음미하며 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