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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커피를 내리는 동안, 서린은 치울 것이 없나 집 안을 둘러보았다. 대충 치우기는 했는데, 비좁은 공간에 쌓아 둔 그림이 많다 보니 아무리 정리를 해도 어수선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가 사는 곳은 아파트식 구조의 3층 건물이었다. 열댓 평 크기의 원룸으로 지은 지 오래되어 시설은 노화되었지만, 저렴한 임대료와 아침저녁으로 산책할 수 있는 공원이 가까워서 이곳을 선택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해가 드는 창가에 앉아 식어 가는 커피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문밖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1층에 사는 노인이 키우는 개인데, 낯선 사람을 유달리 싫어해서 인기척만 나도 득달같이 짖곤 했다.
개 짖는 소리와 함께 휴대 전화가 울리자, 서린은 커피 잔을 내려놓고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1층 공동 출입문 앞을 서성이는 검은 트렌치코트의 남자가 보였다. 얼굴을 확인할 수 없지만, 자연스러운 반곱슬머리의 두상이 눈에 익었다. 서두르는 기색 없이 우아하게 이어지는 동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따로 확인하지 않아도 태인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서린이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국의 아파트와 마찬가지로 비밀번호를 모르면 외부인이 들어올 수 없는 구조의 건물이라, 직접 내려가는 편이 좋을 거 같았다. 그녀는 휴대 전화를 받는 대신 1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내려갔다.
1층 로비가 있는 마지막 계단을 내려온 순간, 유리문 밖을 서성이던 태인과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빈틈없어 보이는 외모와 잘생긴 이목구비는 그대로이지만 시간과 함께 무르익어 더욱 깊어진 검은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마음을 배반한 몸이 먼저 반응했다. 등줄기를 훑고 지나는 뜨거운 전율과 아랫배의 조임까지. 순간,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다. 과거의 씁쓸한 기억 때문일까. 차라리 자신이 열광했던 대상이 허상이길 바랐다. 하지만 흘러간 시간을 비웃듯, 차곡차곡 쌓아 놓은 과거의 이미지가 조금도 손상되지 않은 채 근사한 모습으로 나타난 그를 보니 돌연 허탈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출입문으로 다가간 서린이 버튼 누르자, 자동문이 스르르 열렸다.
“……오랜만이에요.”
흘러간 시간만큼이나 어색한 인사에 짙은 색의 동공이 요동치듯 일렁였다.
“아무리 찾아도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더니, 고작 이런 곳에서 숨어 지낸 거니?”
‘숨어 지내다니,’ 마치 그를 피해 도망이라도 온 것처럼, 질책하는 말투가 귀에 거슬렸다. 그에게 한마디 쏘아붙이려다 그만두었다. 이른 아침부터 언성을 높이다가 가까운 이웃의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쓸데없는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서린이 그의 시선을 피하며 2층에 있는 그녀의 집으로 안내했다. 집 현관문을 열자마자, 그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차 한잔 드릴까요?”
마치 누군가의 흔적을 찾기라도 하듯, 작업실을 둘러보는 그의 눈동자가 베일 듯 날카로웠다.
“이곳에서 언제부터 살았지?”
“파리에서 살다가, 이사 온 지 1년 정도 되었어요.”
“차윤우는?”
“파리에 있어요.”
윤우와 헤어졌다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유쾌한 화제도 아니고 그에게 일일이 보고할 의무도 없기 때문이다. 짧은 대답 후에 나올 말을 기대하는지, 그가 물끄러미 서린을 응시했다. 결국, 침묵을 견디지 못한 것은 서린이었다.
“윤우와는 헤어졌어요. 예전처럼 친구로 지내기로 했고 가끔 연락하며 지내요.”
완고해 보이는 눈동자가 약간 느슨해졌다.
처음 들어섰을 때와 달리 그의 예리한 시선이 서린 주변에 있는 것을 느린 시선으로 훑었다. 혼자 쓰기에 적당한 싱글 침대와 작은 소파, 일자 구조의 주방과 아일랜드 식탁, 한곳에 정리한 화구와 겹겹이 세워 놓은 크고 작은 크기의 캔버스까지.
마치 오래전 그의 손에 이끌려 들어갔던 허름한 식당과 단칸방, 그가 살았던 흔적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둘러보던 그녀의 세심한 시선처럼.
마지막으로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벽 한쪽 구석에 놓인 50호 크기의 그림이었다. 완성하지 못하고 작업을 중단했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덮개도 씌우지 않고 그대로 놓아두었다.
“또 다른 남자라도 있는 모양이지?”
그가 그림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물었다. 남자의 인체가 그려진 그림은 얼핏 보면 인물화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인물화가 아닌 추상화였다.
1년 전, 긴 슬럼프를 겪다가 훌쩍 유럽 배낭여행 길에 올랐다. 그리고 마지막 경유지인 북극해에서 처음으로 오로라를 목격했다. 검은 하늘을 수놓은 신비로운 푸른빛에 숨이 막히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때 처음으로 느꼈다. 신은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신이 깃든 영혼일 것이라고, 그렇지 않다면 저토록 아름다운 장관이 눈앞에 펼쳐질 리 없을 거라고.
짧은 영감은 긴 여운으로 남았다. 눈부셨던 오로라 색채의 한 부분만이라도 표현할 수 있기를 바랐다. 새하얀 여백의 공간에 자신이 목격했던 감동을 스케치했다. 인간의 형상 위에 신의 색을 입히고 색 위에 형상을 겹쳤다. 마치 잡힐 듯이 눈앞에 형상이 아른거렸지만, 아쉽게도 결정적인 순간에 매번 그리다가 실패하고 말았다.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서린이 무심하게 대꾸했다. 여전히 그림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탓인지 퉁명스러운 대답이 되고 말았다.
“나와 상관있으니까 묻는 거야.”
말의 의미가 궁금하지만, 묻기가 꺼려졌다.
서린이 커피 머신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문득 그가 커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떠올랐지만, 넉넉하지 않은 형편 때문에 커피 외에 대접할 만한 차가 별로 없었다. 어떤 차를 내갈지 고민하다 보니, 골목 끝에 작은 카페가 떠올랐다.
“집 앞에 있는 골목길을 빠져나가면 분위기 좋은 카페가 있어요. 집 안은 답답하니, 나가서 이야기해요.”
서린의 대답에 그의 한쪽 눈썹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아마도 그녀의 무심한 반응을 곡해해서 받아들인 모양이다.
“여기서 이야기해. 그림 속의 남자가 갑자기 들이닥쳐도 놀라지 않을 테니까.”
그에게 이런 고압적인 면이 있었나. 오늘 그를 처음 만나면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날카롭게 반응하는 태도가 그녀의 머릿속에 간직한 기억을 무색하게 했다. 게다가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초조하게 서성이는 모습이 쫓기는 사람처럼 불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기억 속의 그는 매사 침착하고 조용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가 따스한 시선으로 다정하게 말을 붙여 오면 아무리 언짢은 일이 있어도 거짓말처럼 기분이 나아지고는 했다.
문득 정연과의 통화 내용이 떠올랐다. 온갖 어려움을 딛고 그가 회사를 살려 냈다고 했다. 노쇠한 아버지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제는 아버지, 하 회장의 뒤를 잇는 기업 후계자로 정상 가까운 곳에 우뚝 섰다고 들었다. 설령 그것이 어려운 환경에서 벗어나려는 그의 야심 찬 몸부림일지라도 노력한 결과라면 마땅히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비껴가듯 그녀가 정체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는 삶의 한복판에서 치열하게 회사와 아버지를 지켜 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에게 무거운 멍에를 씌운 것일 수도 있었다.
“먼 곳에서 왔는데, 커피 외에는 대접할 만한 차가 없어서 그래요.”
서린이 가만히 한숨을 내쉬자, 그가 식어 가는 그녀의 에스프레소 잔을 스치듯 바라보았다.
“유난히 커피를 좋아하더니, 여전하구나.”
그녀는 카페인 중독에 가까울 만큼 커피를 좋아했다. 그런 서린 때문에 커피가 싫어졌다며 농담처럼 말하던 과거의 그가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림 그릴 때 커피보다 좋은 친구가 없으니까요.”
내내 서성이던 그가 고개를 돌려서 서린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방 안을 살피던 날카로운 눈동자가 자신에게로 돌아오자, 긴장한 서린이 속눈썹을 내리며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집요할 정도로 달라붙는 눈동자는 노골적인 탐색을 멈추지 않았다.
화장기 없이 투명한 피부와 갸름한 얼굴선, 가는 목덜미를 지나서 여성스러운 선을 그리는 가느다란 허리까지. 하얀 셔츠와 데님 바지의 단순한 디자인이 그녀의 가냘픈 몸매를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얼굴이 많이 여위었어. 길에서 봤으면 모르고 지나쳤을 거야.”
프랑스로 오기 전, 스물한 살의 그녀는 큰 키 때문인지 스타일 좋다는 칭찬을 간혹 듣고는 했지만 마른 체격은 아니었다. 그러나 생활 패턴이 바뀌고 힘든 시간을 겪어 오면서 자연스럽게 체중이 줄었다.
따라붙는 시선을 피하려고 서린이 소파에 다가가 앉았다. 좁은 작업실에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그가 서성이고 있으니, 어쩐지 더 비좁아 보였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바라보는 시선에 신경이 곤두서고 갑작스러운 피로감까지 몰려왔다.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좀 앉아요.”
그가 마지못한 듯 자리에 앉자 그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조금 전에 정연 언니와 통화했어요. 사시 합격 소식까지는 들었는데, 당신이 회사 일을 돕고 있는지는 몰랐어요.”
“네가 그렇게 종적을 감추고 회장님께서 많이 힘들어하셨어. 사모님은 두말할 것도 없고.”
부모님 이야기가 나오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당시는 어렸고 철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 나름대로는 사방이 꽉 막힌 듯 절박한 시기였다.
“당시는 어쩔 수 없었어요. 부모님의 허락을 받을 자신이 없었고, 그렇다고 윤우를 혼자 보낼 수는 없었어요.”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꼭꼭 숨었지. 마치 너라는 존재가 어디론가 순식간에 증발한 것처럼.”
마치 억눌린 듯이 그가 한 음절씩 끊어 가며 말했다. 번뜩이는 눈동자가 예리한 유리 조각을 박아 놓은 듯 위험해 보였다.
“딱히 숨어 다닌 건 아니에요. 1년을 정착하지 못하고 여러 나라를 떠돌다가, 윤우가 파리를 좋아해서 그곳에 정착했어요.”
“네가 떠나고 미친놈처럼 너를 찾아다녔어. 그리고 윤우와 함께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화가 나다 못해, 허탈한 웃음밖에 나오지 않더라.”
어려서 무모했지만, 그때의 일을 후회하진 않았다. 그렇게 떠나오지 않았다면 지금도 그를 미워하고 원망하며 제게 등 돌려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혼자 애태웠을 테니까.
“혼자 힘들었을 텐데, 도움이 되지 못해서 죄송해요.”
화제를 피하려고 서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마주하고 있으니 또다시 습관처럼 커피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남은 이야기가 있는지 무언가를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이제 과거 이야기는 그만해요, 그보다 제가 지금 도울 수 있는 게 뭔지부터 말해 주세요.”
묻는 말에도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을 굳게 다문 채였다. 자신의 몫으로 에스프레소 한 잔과 그를 위해 커피를 한 잔 내렸다. 우유와 시럽을 약간 섞어서 그에게 건네자, 그가 물끄러미 커피 잔을 응시했다.
“주식이 필요하다면 헐값에 넘겨드릴게요. 그렇지 않아도 돈이 좀 필요했어요. 좀 더 넓은 곳으로 작업실을 옮기고 당분간 그림에만 집중하고 싶었거든요.”
그녀의 아버지, 하 회장은 검소하고 합리적인 성격을 지닌 사람으로 서린이 평범하게 자라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무남독녀 외동딸이다 보니 그 자신이 일구어 온 회사에도 애착과 관심을 두길 바랐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스무 살 성인이 되던 해 아버지는 보유한 일부 주식을 그녀에게 양도했고, 그녀는 가진 주식을 아무리 헐값으로 판다 해도 평생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금액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주식 판 돈으로 작업실을 구할 생각도 호화롭게 살 생각도 없었다. 그저 지금처럼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며 소소하게 누리는 행복에 만족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가진 주식을 필요로 하는 그로서는 말을 꺼내기가 약간 껄끄러울 수도 있었다. 워낙 자존감이 강한 사람이니, 부탁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을 테니까.
“네가 가진 주식은 필요 없어. 이미 필요한 만큼 확보해 두었으니까.”
예상과는 다른 대답에 서린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연락도 없이 이 먼 곳까지 찾아온 이유가 주식 때문이 아니라면.
“지금으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
“나와 결혼하자.”
느닷없는 말에 하마터면 들고 있던 커피 잔까지 놓칠 뻔했다. 서린은 겨우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기 위해 양손을 마주 잡았다.
“미쳤어요?”
“다행히 지금은 멀쩡해. 5년 전에 눈이 뒤집힐 만큼 돌아 버린 경험이 있긴 하지만.”
고저 없는 담담한 말과는 달리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그의 말대로 위험한 빛을 뿜어냈다.
“지금 저를 놀리는 거죠?”
“농담처럼 들리겠지만, 회장님을 살리고 회사를 살릴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야.”
“그게 무슨 뜻이죠?”
“휘청이는 회사를 정상으로 돌리려면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해. 내 입으로 말하기 뭐하지만, 회사 안팎의 문제점을 훤히 꿰뚫고 있는 내가 실권을 쥐어야 모든 일이 쉽게 해결될 수 있어.”
어마어마한 자신감을 가진 태인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내가 하씨 집안과 아무 연관 없다는 이유로 매번 난관에 부딪히고 있어. 그래서 명분이 필요해. 가족이라는 명분.”
간단한 설명만으로 일순간에 이 모든 일이 이해가 되었다. 그의 말에 서린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커피를 내리는 동안, 서린은 치울 것이 없나 집 안을 둘러보았다. 대충 치우기는 했는데, 비좁은 공간에 쌓아 둔 그림이 많다 보니 아무리 정리를 해도 어수선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가 사는 곳은 아파트식 구조의 3층 건물이었다. 열댓 평 크기의 원룸으로 지은 지 오래되어 시설은 노화되었지만, 저렴한 임대료와 아침저녁으로 산책할 수 있는 공원이 가까워서 이곳을 선택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해가 드는 창가에 앉아 식어 가는 커피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문밖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1층에 사는 노인이 키우는 개인데, 낯선 사람을 유달리 싫어해서 인기척만 나도 득달같이 짖곤 했다.
개 짖는 소리와 함께 휴대 전화가 울리자, 서린은 커피 잔을 내려놓고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1층 공동 출입문 앞을 서성이는 검은 트렌치코트의 남자가 보였다. 얼굴을 확인할 수 없지만, 자연스러운 반곱슬머리의 두상이 눈에 익었다. 서두르는 기색 없이 우아하게 이어지는 동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따로 확인하지 않아도 태인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서린이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국의 아파트와 마찬가지로 비밀번호를 모르면 외부인이 들어올 수 없는 구조의 건물이라, 직접 내려가는 편이 좋을 거 같았다. 그녀는 휴대 전화를 받는 대신 1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내려갔다.
1층 로비가 있는 마지막 계단을 내려온 순간, 유리문 밖을 서성이던 태인과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빈틈없어 보이는 외모와 잘생긴 이목구비는 그대로이지만 시간과 함께 무르익어 더욱 깊어진 검은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마음을 배반한 몸이 먼저 반응했다. 등줄기를 훑고 지나는 뜨거운 전율과 아랫배의 조임까지. 순간,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다. 과거의 씁쓸한 기억 때문일까. 차라리 자신이 열광했던 대상이 허상이길 바랐다. 하지만 흘러간 시간을 비웃듯, 차곡차곡 쌓아 놓은 과거의 이미지가 조금도 손상되지 않은 채 근사한 모습으로 나타난 그를 보니 돌연 허탈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출입문으로 다가간 서린이 버튼 누르자, 자동문이 스르르 열렸다.
“……오랜만이에요.”
흘러간 시간만큼이나 어색한 인사에 짙은 색의 동공이 요동치듯 일렁였다.
“아무리 찾아도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더니, 고작 이런 곳에서 숨어 지낸 거니?”
‘숨어 지내다니,’ 마치 그를 피해 도망이라도 온 것처럼, 질책하는 말투가 귀에 거슬렸다. 그에게 한마디 쏘아붙이려다 그만두었다. 이른 아침부터 언성을 높이다가 가까운 이웃의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쓸데없는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서린이 그의 시선을 피하며 2층에 있는 그녀의 집으로 안내했다. 집 현관문을 열자마자, 그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차 한잔 드릴까요?”
마치 누군가의 흔적을 찾기라도 하듯, 작업실을 둘러보는 그의 눈동자가 베일 듯 날카로웠다.
“이곳에서 언제부터 살았지?”
“파리에서 살다가, 이사 온 지 1년 정도 되었어요.”
“차윤우는?”
“파리에 있어요.”
윤우와 헤어졌다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유쾌한 화제도 아니고 그에게 일일이 보고할 의무도 없기 때문이다. 짧은 대답 후에 나올 말을 기대하는지, 그가 물끄러미 서린을 응시했다. 결국, 침묵을 견디지 못한 것은 서린이었다.
“윤우와는 헤어졌어요. 예전처럼 친구로 지내기로 했고 가끔 연락하며 지내요.”
완고해 보이는 눈동자가 약간 느슨해졌다.
처음 들어섰을 때와 달리 그의 예리한 시선이 서린 주변에 있는 것을 느린 시선으로 훑었다. 혼자 쓰기에 적당한 싱글 침대와 작은 소파, 일자 구조의 주방과 아일랜드 식탁, 한곳에 정리한 화구와 겹겹이 세워 놓은 크고 작은 크기의 캔버스까지.
마치 오래전 그의 손에 이끌려 들어갔던 허름한 식당과 단칸방, 그가 살았던 흔적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둘러보던 그녀의 세심한 시선처럼.
마지막으로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벽 한쪽 구석에 놓인 50호 크기의 그림이었다. 완성하지 못하고 작업을 중단했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덮개도 씌우지 않고 그대로 놓아두었다.
“또 다른 남자라도 있는 모양이지?”
그가 그림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물었다. 남자의 인체가 그려진 그림은 얼핏 보면 인물화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인물화가 아닌 추상화였다.
1년 전, 긴 슬럼프를 겪다가 훌쩍 유럽 배낭여행 길에 올랐다. 그리고 마지막 경유지인 북극해에서 처음으로 오로라를 목격했다. 검은 하늘을 수놓은 신비로운 푸른빛에 숨이 막히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때 처음으로 느꼈다. 신은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신이 깃든 영혼일 것이라고, 그렇지 않다면 저토록 아름다운 장관이 눈앞에 펼쳐질 리 없을 거라고.
짧은 영감은 긴 여운으로 남았다. 눈부셨던 오로라 색채의 한 부분만이라도 표현할 수 있기를 바랐다. 새하얀 여백의 공간에 자신이 목격했던 감동을 스케치했다. 인간의 형상 위에 신의 색을 입히고 색 위에 형상을 겹쳤다. 마치 잡힐 듯이 눈앞에 형상이 아른거렸지만, 아쉽게도 결정적인 순간에 매번 그리다가 실패하고 말았다.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서린이 무심하게 대꾸했다. 여전히 그림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탓인지 퉁명스러운 대답이 되고 말았다.
“나와 상관있으니까 묻는 거야.”
말의 의미가 궁금하지만, 묻기가 꺼려졌다.
서린이 커피 머신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문득 그가 커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떠올랐지만, 넉넉하지 않은 형편 때문에 커피 외에 대접할 만한 차가 별로 없었다. 어떤 차를 내갈지 고민하다 보니, 골목 끝에 작은 카페가 떠올랐다.
“집 앞에 있는 골목길을 빠져나가면 분위기 좋은 카페가 있어요. 집 안은 답답하니, 나가서 이야기해요.”
서린의 대답에 그의 한쪽 눈썹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아마도 그녀의 무심한 반응을 곡해해서 받아들인 모양이다.
“여기서 이야기해. 그림 속의 남자가 갑자기 들이닥쳐도 놀라지 않을 테니까.”
그에게 이런 고압적인 면이 있었나. 오늘 그를 처음 만나면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날카롭게 반응하는 태도가 그녀의 머릿속에 간직한 기억을 무색하게 했다. 게다가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초조하게 서성이는 모습이 쫓기는 사람처럼 불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기억 속의 그는 매사 침착하고 조용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가 따스한 시선으로 다정하게 말을 붙여 오면 아무리 언짢은 일이 있어도 거짓말처럼 기분이 나아지고는 했다.
문득 정연과의 통화 내용이 떠올랐다. 온갖 어려움을 딛고 그가 회사를 살려 냈다고 했다. 노쇠한 아버지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제는 아버지, 하 회장의 뒤를 잇는 기업 후계자로 정상 가까운 곳에 우뚝 섰다고 들었다. 설령 그것이 어려운 환경에서 벗어나려는 그의 야심 찬 몸부림일지라도 노력한 결과라면 마땅히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비껴가듯 그녀가 정체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는 삶의 한복판에서 치열하게 회사와 아버지를 지켜 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에게 무거운 멍에를 씌운 것일 수도 있었다.
“먼 곳에서 왔는데, 커피 외에는 대접할 만한 차가 없어서 그래요.”
서린이 가만히 한숨을 내쉬자, 그가 식어 가는 그녀의 에스프레소 잔을 스치듯 바라보았다.
“유난히 커피를 좋아하더니, 여전하구나.”
그녀는 카페인 중독에 가까울 만큼 커피를 좋아했다. 그런 서린 때문에 커피가 싫어졌다며 농담처럼 말하던 과거의 그가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림 그릴 때 커피보다 좋은 친구가 없으니까요.”
내내 서성이던 그가 고개를 돌려서 서린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방 안을 살피던 날카로운 눈동자가 자신에게로 돌아오자, 긴장한 서린이 속눈썹을 내리며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집요할 정도로 달라붙는 눈동자는 노골적인 탐색을 멈추지 않았다.
화장기 없이 투명한 피부와 갸름한 얼굴선, 가는 목덜미를 지나서 여성스러운 선을 그리는 가느다란 허리까지. 하얀 셔츠와 데님 바지의 단순한 디자인이 그녀의 가냘픈 몸매를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얼굴이 많이 여위었어. 길에서 봤으면 모르고 지나쳤을 거야.”
프랑스로 오기 전, 스물한 살의 그녀는 큰 키 때문인지 스타일 좋다는 칭찬을 간혹 듣고는 했지만 마른 체격은 아니었다. 그러나 생활 패턴이 바뀌고 힘든 시간을 겪어 오면서 자연스럽게 체중이 줄었다.
따라붙는 시선을 피하려고 서린이 소파에 다가가 앉았다. 좁은 작업실에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그가 서성이고 있으니, 어쩐지 더 비좁아 보였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바라보는 시선에 신경이 곤두서고 갑작스러운 피로감까지 몰려왔다.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좀 앉아요.”
그가 마지못한 듯 자리에 앉자 그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조금 전에 정연 언니와 통화했어요. 사시 합격 소식까지는 들었는데, 당신이 회사 일을 돕고 있는지는 몰랐어요.”
“네가 그렇게 종적을 감추고 회장님께서 많이 힘들어하셨어. 사모님은 두말할 것도 없고.”
부모님 이야기가 나오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당시는 어렸고 철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 나름대로는 사방이 꽉 막힌 듯 절박한 시기였다.
“당시는 어쩔 수 없었어요. 부모님의 허락을 받을 자신이 없었고, 그렇다고 윤우를 혼자 보낼 수는 없었어요.”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꼭꼭 숨었지. 마치 너라는 존재가 어디론가 순식간에 증발한 것처럼.”
마치 억눌린 듯이 그가 한 음절씩 끊어 가며 말했다. 번뜩이는 눈동자가 예리한 유리 조각을 박아 놓은 듯 위험해 보였다.
“딱히 숨어 다닌 건 아니에요. 1년을 정착하지 못하고 여러 나라를 떠돌다가, 윤우가 파리를 좋아해서 그곳에 정착했어요.”
“네가 떠나고 미친놈처럼 너를 찾아다녔어. 그리고 윤우와 함께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화가 나다 못해, 허탈한 웃음밖에 나오지 않더라.”
어려서 무모했지만, 그때의 일을 후회하진 않았다. 그렇게 떠나오지 않았다면 지금도 그를 미워하고 원망하며 제게 등 돌려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혼자 애태웠을 테니까.
“혼자 힘들었을 텐데, 도움이 되지 못해서 죄송해요.”
화제를 피하려고 서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마주하고 있으니 또다시 습관처럼 커피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남은 이야기가 있는지 무언가를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이제 과거 이야기는 그만해요, 그보다 제가 지금 도울 수 있는 게 뭔지부터 말해 주세요.”
묻는 말에도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을 굳게 다문 채였다. 자신의 몫으로 에스프레소 한 잔과 그를 위해 커피를 한 잔 내렸다. 우유와 시럽을 약간 섞어서 그에게 건네자, 그가 물끄러미 커피 잔을 응시했다.
“주식이 필요하다면 헐값에 넘겨드릴게요. 그렇지 않아도 돈이 좀 필요했어요. 좀 더 넓은 곳으로 작업실을 옮기고 당분간 그림에만 집중하고 싶었거든요.”
그녀의 아버지, 하 회장은 검소하고 합리적인 성격을 지닌 사람으로 서린이 평범하게 자라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무남독녀 외동딸이다 보니 그 자신이 일구어 온 회사에도 애착과 관심을 두길 바랐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스무 살 성인이 되던 해 아버지는 보유한 일부 주식을 그녀에게 양도했고, 그녀는 가진 주식을 아무리 헐값으로 판다 해도 평생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금액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주식 판 돈으로 작업실을 구할 생각도 호화롭게 살 생각도 없었다. 그저 지금처럼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며 소소하게 누리는 행복에 만족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가진 주식을 필요로 하는 그로서는 말을 꺼내기가 약간 껄끄러울 수도 있었다. 워낙 자존감이 강한 사람이니, 부탁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을 테니까.
“네가 가진 주식은 필요 없어. 이미 필요한 만큼 확보해 두었으니까.”
예상과는 다른 대답에 서린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연락도 없이 이 먼 곳까지 찾아온 이유가 주식 때문이 아니라면.
“지금으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
“나와 결혼하자.”
느닷없는 말에 하마터면 들고 있던 커피 잔까지 놓칠 뻔했다. 서린은 겨우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기 위해 양손을 마주 잡았다.
“미쳤어요?”
“다행히 지금은 멀쩡해. 5년 전에 눈이 뒤집힐 만큼 돌아 버린 경험이 있긴 하지만.”
고저 없는 담담한 말과는 달리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그의 말대로 위험한 빛을 뿜어냈다.
“지금 저를 놀리는 거죠?”
“농담처럼 들리겠지만, 회장님을 살리고 회사를 살릴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야.”
“그게 무슨 뜻이죠?”
“휘청이는 회사를 정상으로 돌리려면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해. 내 입으로 말하기 뭐하지만, 회사 안팎의 문제점을 훤히 꿰뚫고 있는 내가 실권을 쥐어야 모든 일이 쉽게 해결될 수 있어.”
어마어마한 자신감을 가진 태인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내가 하씨 집안과 아무 연관 없다는 이유로 매번 난관에 부딪히고 있어. 그래서 명분이 필요해. 가족이라는 명분.”
간단한 설명만으로 일순간에 이 모든 일이 이해가 되었다. 그의 말에 서린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