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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풀썩. 여자의 옆에 앉았을 때, 더운 날씨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당장 재킷을 벗고 싶을 정도로 후끈한 열기가 온몸을 에워쌌다. 떨리는 손으로 선글라스를 벗는 순간, 자신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하아. 정민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서른한 해를 살아오며 또래의 남자들이 그러하듯, 정민 또한 몇 번의 연애를 했고 누군가를 사랑한 추억이 있었다. 하지만 첫눈에 자신의 마음을 움켜쥔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의심이 많은 성격은 아니었지만, 사람을 어떻게 첫눈에 다 알 수 있겠냐는 신중함 정도는 가지고 살아왔다. 그런데 여자의 모습 앞에서는 평생의 가치관도 무의미했다. 도대체 이 여자의 무엇이 자신을 움직이고 있는 것일까? 최대한 차분하게 생각해 봤지만, 쉽게 답이 나올 문제 같지 않았다.

일단 정민은 여자에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떨리는 마음 때문인지 횡설수설한 탓에 금방 뱉은 말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몇 년 전에 끊은 담배 생각이 절로 났다. 담배라도 피우면 한 박자 쉬어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하지만 기차 안에서의 흡연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렇다면 담배를 대체할 수 있는 건 카페인밖에 없었다.

여자에게 함께 스낵바에 커피를 사러 가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혼자 커피 두 잔을 사 올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어서 유치한 변명들을 늘어놓았다. 다행히 여자는 쉽게 승낙했다. 그리고 스낵바를 오가는 과정에서, 커피를 받아 드는 여자의 섬세한 손길과 우연히 캐리어 네임 택에서 본 ‘Ji―won, Han’이라는 이름이 정민의 뇌리에 깊게 박혔다.

‘나, 어쩌면 첫눈에 반한 것 같아요. 한지원 씨에게요. 나도 좀 어이없긴 한데, 자꾸만 심장이 뛰고 얼굴에서 열이 나네요. 뭐 이런 상황이 다 있죠?’

결국 정민은 한지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여자에게 고백하고 말았다. 시계를 보니 여자를 만난 지 겨우 30분이 지나 있었다. 함께한 거라고는 커피를 마시며 나눈 몇 마디의 대화가 전부였다. 여자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한지원’이라는 이름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고백하고 싶었다. 그의 고백에 여자는 조금 전까지 보여 주었던 착한 눈웃음을 싹 지웠다. 정민은 지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원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거였다. 그보다 더 생뚱맞은 고백이 어디 있단 말인가?

“어차피 바르셀로나에 여행 가는 거면, 오늘 하루 나와 같이 있어 볼래요? 분위기 좋은 데서 맛있는 것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요.”

정민에게 중요했던 건 자신의 감정이었다. 기차는 넉넉잡고 두 시간 반 뒤면 바르셀로나에 도착한다. 각자의 길로 흩어지게 될 몇 시간 뒤의 일이 벌써부터 서글프게 와닿았다. 강력하게 이야기하지 않으면 앞으로 영영 지원을 보지 못할 것 같아서, 결국 정민은 빠르게 자신의 마음을 드러냈다.

연락처를 물어볼 수도 있었고, 서울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잡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서울은 너무 멀었다. 커피 한 잔을 사러 가는 순간에도 떨어지기가 싫을 정도로 마음에 가득 들어온 여자인데, 어떻게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질 수가 있단 말인가?

정말 다른 의도는 없었다. 한지원을 더 알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도시 바르셀로나에서 지원과 함께 있고 싶었다. 정민은 최선을 다해 지원을 설득하기 시작했고 정민의 집요함이 지원의 승낙을 얻었다. 두 사람은 함께 바르셀로나를 돌아본 뒤, 저녁을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정민의 화보 촬영은 다음 날 오후부터 시작되어 3일간 이어질 예정이었고, 지원은 3일 뒤에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렇다면 함께 낮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오늘뿐이었다.

정민은 다음 날도 화보 촬영 일정이 끝나면 꼭 지원과 함께 저녁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원이 허락만 해 준다면, 가능한 시간을 맞춰 한 번이라도 더 지원을 보고 싶었다. 벌써 정민의 머릿속에는 지원과 함께 보낼 시간들에 대한 계획이 꽉 차 있었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두 사람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역을 빠져나와 미리 약속한 택시 승강장 근처에서 다시 만났다. 호텔방에 들어갔다 나오는 시간조차도 아까워서, 두 사람 모두 프런트에 짐을 맡기고 일정을 시작하는 걸로 합의를 봤다. 지원은 오늘의 일정을 끝낸 뒤, 자신이 예약한 호텔로 가겠다고 했다.

호텔로 향하는 택시 안, 어떻게든 시간을 아껴 가며 잘 써야겠다는 책임감을 떠안은 정민은, 머릿속으로 바르셀로나의 유명 관광지들을 쭉 나열해 보았다. 그러다 깜짝 놀라 지원을 쳐다보았다. 무릎 위에 가볍게 얹어 둔 자신의 손 위에 지원의 손이 포개어져 있었다.

“나도 살면서 첫눈에 반했다는 고백은 처음 들어요. 연예인에게 고백을 받은 것도 당연히 처음이고.”

“…….”

“이렇게 손이라도 한번 잡아 봐야 실감이 날 것 같아서요.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일이 너무 현실감이 없거든요.”

평온하기만 한 지원과는 달리 정민은 들썽거리는 욕구를 잠재우기 위해 무던히도 애써야 했다. 당장 이 여자를 안아 볼 수는 없는 걸까? 저 붉은 입술에서는 어떤 맛이 날까?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밝히는 놈이었지?

“차정민 씨 손을 잡고 보니 꿈은 아니네요. 그럼 오늘 하루, 잘 부탁해요. 바르셀로나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차정민 씨니까, 주도권을 가지고 있잖아요.”

잘 부탁한다는 사람이 이렇게나 당당할 수 있다니. 도대체 얼마나 피가 뜨거워진 걸까? 정민의 이마에 땀이 송송 솟아났다.





06 먼저 가 볼게요



토요일. 진료가 끝난 지원이 민속촌에 있는 드라마 세트장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6시였다.

“잘 부탁드릴게요. 지난번 대본 리딩 끝나자마자 광고 촬영 일정이 있어서 정식으로 인사도 못 드렸네요.”

“반가워요. 저도 잘 부탁드려요.”

활짝 웃는 하나에게 지원도 웃으며 인사를 했다.

“대본 리딩 때 얼핏 보고 생각하긴 했지만, 한 선생님 너무 미인이세요. 배우를 하시지 왜 한의사를 하셨어요?”

겉치레일 뿐인 칭찬이라는 걸 아는데도 듣기 불편했다. 자신의 외모를 칭찬하기엔 하나가 너무나 예뻤다.

“그런데 선생님. 저 맥 좀 봐 주시면 안 될까요?”

한의사라는 직업을 밝히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손을 내밀며 맥을 짚어 달라는 부탁을 하곤 했다. 한의원이 아닌 곳에서의 진료는 사절이라며 상대방의 면전에서 거절하는 한의사들도 있었지만, 지원은 달랐다. 처음 만난 사람과 적절한 대화 주제를 찾지 못해 어색한 상황에 놓여 있을 때, 맥을 짚어서라도 대화를 나눌 구실이 생기는 게 차라리 반가웠다.

“그래요. 이리 줘 봐요.”

하나의 손목을 감싸 쥔 지원은 조용히 하나의 맥에 집중했다. 하나는 신기해 죽겠다는 얼굴로 자신의 손목과 지원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생리통이 심할 것 같은데요? 자궁 쪽 맥이 안 좋아요.”

“네. 주기도 불규칙하고, 생리할 때는 누가 내 자궁을 손에 꽉 쥐고 비트는 것처럼 아파요.”

너무나 고운 얼굴에서 생각지도 못한 강한 표현이 나오자 지원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나도 자신이 한 말이 웃긴지 생글거리며 지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산부인과에 가서 검진을 한번 받아 보는 게 좋을 거예요. 큰 문제가 없는데 생리통이 심한 거라면 한약을 먹는 것도 방법이고요. 너무 한의사 같은 말인가요?”

“아뇨. 정말 한약이라도 먹어야 할까요? 병원에 가 보고 싶어도 여자 연예인이 산부인과 드나드는 게 남들 보기에 오해를 불러일으키기가 좋아서 참고 있거든요. 이 바닥이 아니 땐 굴뚝에도 화산이 폭발하는 곳이라.”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사는 직업이라 해도 좋은 점만 있을 수는 없겠지. 아파도 병원조차 쉽게 가지 못하는 하나의 처지가 측은했다.

“한지원 선생님, 오늘 촬영인가요?”

익숙한 목소리가 지원을 불렀다.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아, 유, 아니 차정민 씨 반가워요.”

하마터면 유정후라는 이름을 입에 올릴 뻔한 지원은 슬며시 입술을 입 안으로 말아 넣었다.

“오빠 오늘 촬영 없잖아.”

갑작스럽게 나타난 정민을 보고 놀란 하나와 달리 지원은 정민의 등장을 예상하고 있었다. 첫 촬영 날이 다가오자 초조해하는 지원을 안아 주며, 정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촬영장에 오겠다는 약속을 했다.

“촬영 없다고 촬영장에도 못 와? 「깊은 밤」의 주연 배우로서 이 정도 책임감은 가지고 살거든? 스케줄이 없어서 한번 와 봤어.”

“오빠 밤새워서 촬영하고 오늘 아침에 들어가지 않았어? 나라면 푹 잘 텐데.”

정민이 밤을 새우고 오전 8시에 겨우 집에 들어간 걸 지원도 모르지 않았다. 사전 제작 드라마인데도 일정이 빡빡하긴 매한가지라며 최근 여러 차례 피곤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얼마 자지 못하긴 했는지 눈 아래 살짝 그늘이 진 얼굴을 한 정민이 하나와 지원의 앞에 놓인 접이식 의자를 펼쳐 앉았다. 지원은 졸린 눈을 하고도 자신을 보기 위해 달려와 준 정민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그런데 뭐 했어? 너 한 선생님한테 맥 짚어 달라고 했지?”

“응. 그런데 오빠, 한지원 선생님 너무 예쁘지 않아? 전에 처음 봤을 때도 느꼈는데 세상 불공평해. 이렇게 예쁜데 공부까지 잘하고.”

난데없이 하나가 지원을 또다시 치켜세웠다.

“맞아. 나도 처음 한 선생님 봤을 때, 엄청 미인이라 생각했어.”

오로지 지원과 정민, 두 사람만이 아는 눈의 움직임이 오갔다.

“그런데 한 선생님. 저도 맥 한번 봐 주세요. 맨날 침만 놔 줬지, 맥은 통 안 짚어 줬잖아요? 나 요즘 엄청 피곤한데 한약을 좀 먹어야 할까요?”

정민이 촬영 틈틈이 명성한의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나도 지원에게 살갑게 구는 정민의 태도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원은 짧게나마 자신과의 스킨십을 노리는 정민의 시커먼 속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여간, 이 남자는. 못 이기는 척, 지원이 정민의 손목을 잡으려 할 때, 스태프 중 하나가 정민을 불렀다.

“차정민! 마침 잘 왔어. 이리 좀 와 봐!”

“에이, 이렇게 중요한 타이밍에 조명 감독님은 또 왜 날 찾으시지?”

정민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원은 스태프들에게 달려가는 정민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 선생님, 저보다 한 살 많으신데 그냥 언니라고 해도 될까요?”

나쁠 게 없는 제안이었다. 어쨌건 몇 번은 더 봐야 하는 사이니까, 서로 편한 게 좋은 거겠지.

“그래요.”

“와, 신난다. 그럼 언니, 언니도 말 편하게 하세요.”

대답 대신 지원이 웃어 보이자 하나가 할 말이 있는 듯 주춤거렸다.

“차정민 저 오빠, 언니가 보기엔 어때요?”

“네? 아니, 응?”

정민에게로 가 있는 하나의 눈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지원을 보지 못했다.

“저, 정민 오빠한테 1년 전에 고백했다가 차였거든요. 오빠 드라마 쫑파티에 놀러 갔다가 제가 술을 좀 과하게 마신 거죠. 우연히 광고 하나를 같이 찍은 뒤로 한 2년 정도 좋아하는 감정을 갖고 있다가, 술김에 고백을 해 버린 거예요.”

“아…….”

하나의 눈빛이 갑자기 슬퍼지자 지원은 자신의 표정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하나가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는 거였다.

“그렇게 고백을 했는데, 오빠가 거절하더라고요. 자기는 마음에 담아 둔 여자가 있대요. 나는 좋은 동생 말고 다른 걸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아, 다시 생각해도 진짜 부끄러운 기억인데, 문제는 그 자리에 사람이 너무 많았다는 거죠.”

“그랬구나……. 그런데 그런 이야기 내가 알아도 되는 건가?”

그래도 명색이 알아주는 여배우인데, 안 지 얼마 되지 않은 자신에게 지나치게 솔직한 하나가 부담스러웠다. 정민을 좋아한다는 하나의 이야기도 절대 편할 리 없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이 바닥에서 소문이 다 났으니까, 언제 어떻게 언니 귀에 들어갈지 모르는데 그럴 바엔 내가 먼저 말하는 게 낫죠. 저 오빠는 참 묘해요. 한없이 바르고 친절한데, 어느 선을 넘어가면 철벽이에요. 그런데 왜 그 철벽을 허물고 싶을까요? 나를 거절한 남자인데도 여전히 너무 좋아요.”

공공연한 비밀 속에 정민이 있었다. 잘못한 게 없는데도 하나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아 속이 편치 않았다. 조금 더 솔직하자면, 다른 여자와 엮여 있는 정민의 현재가 못마땅했다. 정민이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도 괜히 미웠다.

“언니 그거 알아요? 저 오빠 한때는 신부님이 되는 게 장래희망이었던 거. 그래서인지 사람이 어딘가 모르게 참 침착하고 외로워 보여요. 물론 나는 그런 면을 좋아하지만.”

“그랬……어? 정말 의외네.”

지원도 아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하나 앞에서 알은척할 수가 없었다.

“하나 씨 촬영분 끝나는 대로 한 선생님 촬영 진행할게요.”

고맙게도 촬영 일정을 알려 주기 위해 다가온 스태프 한 명이 화제를 전환시켰다. 일에 있어서는 하나도 프로였다. 언제 정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냐는 듯, 하나가 벌떡 일어났다. 미리 연습해 두었지만 침을 놓는 자세에 있어 모자람이 없는지 지원에게 다시 한번 조언을 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모두 맥주 한잔하러 가시죠. 김진양 작가님도 들르시겠대요.”

촬영이 끝나자 지원의 이마에 진땀이 흘러내렸다.

촬영 첫날, 모든 건 대체적으로 순조로웠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힘을 뺀 탓인지 온몸이 뻐근했다. 의녀 ‘송아’가 어린 공주의 급체를 치료하기 위해 침을 놓는 장면이 문제였다. 하나가 모든 촬영을 마친 상태였고, 지원이 아역 배우의 손에 침을 놓는 장면만 찍으면 오늘 촬영은 끝나는 상황이었다.

‘민설아, 이거 잘하면 사탕 줄 테니까 조금만 참아 봐.’

‘싫어, 주사보다 더 무서워. 엉엉엉.’

공주 역할을 맡은 민설이라는 다섯 살 남짓한 아역 배우가 바닥에 드러누워 온몸을 버둥거렸다. 민설의 엄마가 달래 봤지만, 침 앞에서 잔뜩 겁을 먹은 민설을 달래기엔 역부족이었다.

지원은 민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른도 선뜻 나서서 맞기에는 두려울 법한 굵은 침이니 아이가 겁을 먹는 것도 당연했다. 침이라는 게, 제아무리 살살 놓는다고 해도 아프지 않을 수는 없으니 더 답답한 노릇이었다.

‘이름이 민설이야? 자, 이모 좀 봐. 이모가 가능한 살살 놓을게.’

지원도 민설을 달래 봤지만, 민설은 지원의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왕왕 울어 댔다. 민설의 엄마는 스태프들의 눈치를 보느라 안절부절못하며 민설을 어르고 달랬다.

‘어쩌죠? 아이 손이 풀샷으로 보여야 하는 장면이잖아요. 어른이 대신 해 줄 수도 없는데.’

한 스태프의 말에 모두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드라마의 전체적인 흐름을 봤을 때, 필수적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장면이어서 뺄 수는 없었다. 의녀 송아가 왕비의 눈에 들어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장면이었으니까.

민설을 둘러싸고 연기자, 스태프들이 모두 발을 동동 굴렀다. 단 한 컷만 완성하면 오늘의 촬영이 끝나는 상황이니 더욱 애가 타는 듯했다. 결국 민설을 재우고 난 뒤에야 촬영을 재개할 수 있었다.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었다. 손에 침을 찌르는 순간, 민설이 곧바로 잠에서 깰 것이 분명했다. 혹시라도 지원의 실수로 NG가 나면 큰일이었다. 다시 민설을 재우려면 한참 시간이 걸릴 것이고, 그러면 모두의 퇴근도 늦어질 것이다.

꿀꺽. 지원은 마른침을 삼켰다. 매일 하는 일이었기에 이 정도로 긴장을 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조명장치, 음향장비가 모두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지원의 마음이 부담감에 더욱 짓눌렸다.

‘한 선생님, 민설이 깨면 내가 업어서 다시 재울 테니까, 편하게 놔요. NG 나서 마무리 늦어지면 다 같이 여기서 밤새우면서 단합회나 하죠 뭐. 비용은 제가 다 낼게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틈에, 정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황을 편하게 만드는 정민의 목소리는 효과적이었다. ‘그래, 혹시라도 이 아이가 깨면 정후 씨가 책임지겠지 뭐.’ 그렇게 생각하니 민설에게 침을 놓는 것쯤 별거 아니라는 과감한 자신감이 생겼다.

자는 아이의 손을 가만가만 손끝으로 만져 보던 지원이 카메라 감독과 눈으로 사인을 주고받았다. 카메라 감독이 준비되었다는 고갯짓을 했다. 지원은 망설임 없이 민설의 손에 침을 찔러 넣었다.

‘와앙! 아파!’

민설이 자지러지듯 울며 잠에서 깼지만, 촬영은 끝이 났다.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지원도 크게 한숨을 내쉬며 주저앉았다.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다리가 풀려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