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 1화

Round 1 (1)





“재하 씨. 이대로 호텔까지 갈래?”

야릇한 미소를 흘리며 가슴 위로 손을 얹는 남자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잘 알고 있었다. 제게로 밀착하는 남자를 보고 재하는 걸음을 멈췄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어두컴컴한 바 안에서 술까지 마셨으면 이제 슬슬 타액을 교환하고 몸으로 대화를 나누어야 할 시점이라는 거겠지.

‘흐음.’

어찌한다.

유혹하듯 가슴을 부드럽게 쓸며 진한 눈빛을 보내던 남자의 손가락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자, 재하의 고뇌도 깊어졌다.

지난 몇 번의 만남 동안 비슷한 코스로 전개되었던 것처럼, 재하의 몸을 더듬고 있는 이 남자는 아마도 그를 인적이 드문 공간으로 그를 데려가고 싶어 하는 것이리라. 그 후에는 재하가 단단하게 여민 슈트 상의의 단추를 거칠게 풀어 헤친 후, 바지 앞섶까지 문지르며 지난 몇 주 동안 저를 흥분시켰던 기둥을 꺼내고 싶은 거겠지.

여전히 밝히는 녀석이군.

“재하 씨. 응?”

열망에 젖은 숨소리가 고요한 복도를 울린다. 촉촉한 눈빛으로 이름을 불러 대는 남자의 숨결이 더욱더 빨라지자 재하는 빙긋 웃었다.

‘시간이 됐군.’

아래로, 점점 더 아래로 향하는 남자의 손길이 자신의 바지 버클에 닿기 직전에, 재하는 남자의 손목을 덥석 잡는 데 성공했다.

“재하…… 씨?”

“수빈 씨.”

“어어?”

“우리, 오늘이 몇 번째지?”

바를 나온 이후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재하의 말에 남자가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자신을 향한 갈증이 가득한 남자의 눈빛이 결코 싫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몇 주 전처럼 그를 가지고 싶어 미쳐 버릴 만큼 탐이 나지는 않는다. 애석한 일이다. 재하는 어리둥절해하는 그를 무심하게 내려다보더니, 빙긋 웃으며 남자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부드럽고 다정하게.

파르르 떨리는 상대의 눈빛이 요동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재하는 속삭였다.

“떠올려 보면, 정식으로 한 데이트는 두 번 정도밖에 안 되는데 섹스는 다섯 번이었군.”

“……뭐?”

“만난 기간은 한 달 정도니 짧지도, 그렇다고 길지도 않은 시간이었지.”

“재, 재하 씨?”

“한 달이라. 음. 지금이 딱 적당한 건지도.”

“저기 재하 씨.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는…….”

“수빈 씨.”

“응?”

“우리 이제 그만 만나.”

재하보다 5센티 정도 작은 남자가 태연하기 그지없는 그의 말에 눈을 휘둥그레 뜬다. 조금 전까지 호텔 방으로 향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더욱 충격을 받았을지도.

‘아아.’

애처로울 만큼 당혹감이 서린 그 얼굴에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미 결론을 내어 버린 제 결심을 돌릴 만큼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재하는 크게 놀라 경직된 얼굴로 웃는 남자의 손을 제게서 떼어 냈다. 재하는 남자로 인해 잔뜩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지런히 정리했다. 그리고 싱긋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야. 그저 내가 더 이상 수빈 씨한테 흥미를 못 느껴서 그러는 거니까.”

“재, 재하 씨……!”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네. 수빈 씨라면 내 헛헛한 마음을 채워 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지. 당신도 그간 내 곁을 지나간 사람들과 별다른 점이 없는 것 같군.”

재하가 뱉어 내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남자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재하는 덜덜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남자를 향해 최후의 작별 인사를 꺼냈다.

“하지만 그래도 수빈 씨와 한 섹스는 정말 좋았어. 간혹 수빈 씨가 나보다 빨리 가던 일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도 뭐, 귀여웠으니까.”

“…….”

“앞으로도 잘 지내길 바라. 참. 우리가 이렇게 헤어진다고 구질구질하게 매달리진 않겠지? 하긴 뭐, 수빈 씨는 쿨한 사람이니 그 정도 경우는 있을 거야. 그럼.”

“자, 잠깐!”

파리한 얼굴의 상대에게 제 할 말만 늘어놓고 몸을 돌리려던 재하는 온 힘을 다해 저를 부르는 남자, 수빈의 외침에 미간을 좁혔다.

뭐야. 아직도 할 말이 남은 건가?

이미 용건은 끝난 것 같은데?

“왜 그래, 수빈 씨? 나한테 하고 싶은 얘기라도 있어?”

워낙 간곡한 외침이었기에 차마 무시할 수도 없었다. 하여 마지막 예의 정도는 갖추자 싶어 재하는 눈을 반달처럼 휘었다. 그러자 미간을 꿈틀거리며 입술을 꿍얼거리던 수빈이 그렁그렁 눈물까지 맺어 가며 재하를 향해 입을 벌렸다.

“……어졌어.”

응?

“뭐라고, 수빈 씨? 잘 안 들리는데.”

재하는 손을 귀에 가져다 대며 수빈에게 물었다. 그러자 윗니로 아랫입술을 꽉 깨물던 수빈이 의아한 얼굴의 재하에게 외쳤다.

“다, 당신이랑 만나려고 나는 여자 친구랑도 헤어졌다고!”

아.

“5년을 만난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당신을 선택했는데…… 그랬는데, 나, 나를 버리겠다고? 저, 정말 날 버리겠다는 거야? 그런, 악!”

“이봐.”

“컥!”

“지질하게 왜 이래?”

전혀 쿨하지 않잖아.

온 힘을 다해 제 팔을 잡던 수빈을 냉정하게 뿌리친 재하가 놀란 그의 멱살을 덥석 잡으며 서늘한 눈빛을 빛냈다. 재하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신음을 흘리던 수빈이 얼굴을 찌푸리자 재하는 말을 이었다.

“넌 단순히 내 유흥 상대였을 뿐이야.”

언제나 그랬듯.

꽤 흥미로워 보이던- 공략 상대.

“큭, 끄으윽!”

재하는 제 손안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수빈을 냉랭하게 내려다보고는 속삭였다.

“내 유혹에 넘어온 것이 잘못이지, 나보고 그 후까지 책임지라고 하면 곤란해.”

“윽!”

“그러니 처음부터 경고했었잖아. 나하고 엮이면 손해 보는 건 수빈 씨가 될지 모른다고. 그런데도 날 선택했으면서 왜 이래?”

“하윽.”

“정말 실망스러워. 아주 많이 실망스럽다고.”

“커헉…… 크윽!”

재하는 찡그리던 얼굴을 펴고선, 어떻게든 제게 말하려는 수빈을 바닥으로 내쳤다. 그로 인해 엉덩이를 찧게 된 수빈이 신음을 흘리자, 재하는 그를 움켜쥐고 있었던 손을 탈탈 털며 중얼거렸다.

“어쨌든 공략이 끝난 남자와는 한 달 이상 만나지 않는 게 내 신조야.”

“콜록콜록!”

“그러니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 주겠나?”

“크으윽.”

“꼬신 지 하루 만에 넘어온 녀석 주제에 바라는 것도 많군.”

쯧. 재하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어깨를 들썩이는 수빈에게 혀를 차며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먼지만큼 남아 있던 흥미 역시 완벽하게 사라졌다.

‘그럼 오늘은…….’

누구를 타깃으로 삼아 볼까나.

“하, 한재하!”

원만한 이별을 끝낸 재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제 갈 길을 가려 했다. 그러나 그런 그가 발을 떼기도 전, 쓰러진 남자 쪽에서 제 이름이 들려왔다. 재하는 얼굴을 구겼다.

“거, 거기 서!”

정말 미련한 놈이군.

‘그런다고 내가 설 것 같…….’

푹!

투득.

“……어?”



똑똑-

스르륵, 겨우 잠에 빠져들 때였다.

고요한 방 안에서 겨우 눈을 붙이려던 재하는 대답이 들려오질 않자 한 번 더 똑똑 문을 두드리는 노크에 반사적으로 얼굴을 구겼다.

젠장. 귀찮게.

“들어와.”

아마 허락하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노크해 댈 것이 분명하기에 하는 수 없이 음성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잘 지냈어, 한 점장?”

그러자 예상했던 대로의 인물이 시야로 들어온다. 재하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낯익은 얼굴에 미간을 좁혔다.

“하하하. 이거 생각했던 모습 이상인데? 붕대까지 칭칭 감고 있고 말이야. 이번엔 호되게 당했나 봐?”

병문안을 온 사람이라고는 짐작되지 않을 만큼 호쾌한 목소리.

오랜 친구이자, 재하가 일하는 직장의 직속 상사이기도 한 석주가 터벅터벅 병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재하는 얼굴을 일그러뜨린 후 흥, 하고 코웃음을 흘리는 태도로 석주를 맞았다.

“놀리냐?”

“그럴 리가.”

재빨리 고개를 내젓는 것치고는 입꼬리가 스륵 올라가 있다. 재하는 싱글벙글 웃는 석주를 매섭게 노려보다 입술을 씰룩였다.

“천하의 한재하가 맞아서 입원이라니. 통 믿겨야 말이지.”

“이봐.”

“상대는?”

“…….”

“네가 그렇게 자랑하는 얼굴을 스스로 망가뜨릴 리 없잖아. 누구냐. 설마 이번에 만난다던 사람은 아니지? 그러니까 이름이 뭐였더라. 수민이랬나?”

수빈.

정정해 줄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재하는 굳이 입을 열지는 않았다.

어차피 헤어진 사인데 이 녀석이 알아서 뭐 해.

고심하며 고개까지 갸웃거리는 석주에게 재하는 ‘알 거 없어’라고 냉정히 대답하려 했다.

“아뇨. 수빈입니다. 성은 윤. 윤수빈 씨네요.”

하지만 그런 재하의 의도와는 달리, 석주를 따라 들어온 남자가 석주의 말에 지적을 가했다. 재하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자식이.’

안 그래도 예민한 상태였던 재하로서는 서늘한 표정을 지으며 병실 안으로 들어오는 남자가 아니꼽기만 하다. 그는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문을 닫고 선 남자를 노려봤다.

“아. 수민이 아니라 수빈이야?”

“예. 사장님도 저번에 샵에서 뵌 적이 있지 않으십니까?”

“뭐? 내가 봤다고?”

“예. 윤수빈 씨는 저희 샵의 단골이었습니다. 3개월마다 한 번씩 오셔서 아래위로 네 벌씩 맞추고 돌아갔던 성실 단골이었죠.”

“그, 그게 사실이야?”

“네.”

“한재하 이 새끼야!”

예의 ‘남자’를 본 순간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예상했다. 재하는 저를 책망하는 것이 분명한 석주의 외침에 모르는 척 눈을 돌렸지만, ‘내가 그렇게 말했지! 단골은 제발 건드리지 말라고!’라는 석주의 원망 어린 외침을 끊임없이 들어야 했다.

‘빌어먹을.’

양석주 개자식. 오려면 저 혼자 올 것이지.

‘웬 혹을 달고 와서는.’

불쾌하기 짝이 없다.

재하는 불편해진 심기를 숨길 생각 따위는 하지 않고 인상을 쓰며 병실 문 쪽을 응시했다. 그러자 178센티인 저보다 적어도 10센티는 더 커 보이는 남자가 재하의 살벌한 시선에도 끄떡 않고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오늘 병문안 갈 거다.’

‘혼자?’

‘아니. 우리 스태프랑.’

스물이 조금 안 되는 『블랙 옴므』의 직원들 중 석주가 유독 아끼는 직원은 저 멀대같이 키만 큰 남자였다. 재하는 ‘내 말 듣고 있냐고, 이 자식아!’라 소리치는 석주의 말을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흘리며 입을 다문 남자에게서 시선을 뗐다.

‘하여간 저 녀석이랑 얽히면 재수가 없다니까.’



***



“한재하. 너 나랑 사업 하나 하자.”

“사업?”

“무슨 아이템이든 좋아. 네가 열고 싶은 가게 하나를 열어 줄게. 대신 경영은 네가 해.”

“뭐?”

“돈은 얼마든 지원할 테니 사장 타이틀은 나한테 넘기라는 소리야.”

가진 것이라고는 흘러넘치는 돈밖에 없었던 재벌 3세, 양석주의 유일무이한 친구인 한재하는 고등학교 동창인 석주로 인해 인생이 핀 케이스였다.

마음에 든 친구에게는 아낌없이 돈을 쏟아붓는 석주와 친해진 덕분에 고등학교 내내 굶주림 없이 지냈고, 대학에 진학해서는 그와 함께 온갖 유흥이라는 유흥은 다 즐기며 시간을 보냈다.

대학 내내 미친 듯이 놀러 다닌 결과로 졸업 이후의 미래가 염려되는 상황에서, 재하가 동업 제의를 하는 석주의 손을 덥석 잡은 까닭은 간단했다. 석주와 동업을 한다면, 설령 사업이 망해도 자신의 금전적 손실은 적을 테니까. 게다가 공짜로 가게를 오픈해 주겠다는데 거절할 사람이 어디 있겠나.

손해 보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재하에게 있어서 석주는 무척이나 탐나는 동업자였다.

어떤 가게를 오픈할까.

“클럽? 아니면 재즈 바? 그것도 아니면 레스토랑?”

창업에 대해 고뇌하던 때의 일이다.

심드렁한 표정을 짓던 재하에게 창업 아이템에 대해 토론하자고 제안한 석주는 눈을 빛내 가며 말을 건넸다. 자신이 제안한 일이니, 창업 아이템 선정 정도는 재하에게 맡기겠다며 싱글벙글 웃는 석주의 말에 재하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슈트 샵.”

재하의 대답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석주가 되묻자, 재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 정확히 말해서는 맞춤 정장 샵이 좋겠군.”

“…….”

“왜?”

“아니. 옷 가게를 하자는 말이야?”

재하는 설마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 저를 응시하는 석주에게 말없이 긍정의 눈빛을 보냈다. 그 모습을 보던 석주는 흐응, 하고 콧소리를 흘리며 머리를 긁적이더니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하필 슈트 샵이냐?”

“간단하잖아.”

“뭐가?”

“어쩌면 그곳에서 내 취향을 낚을 수 있을지도.”

너무도 노골적인 재하의 대답에 석주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너 바이가 아니라 게이였냐?”

깜짝 놀라 묻는 석주에게 재하는 짙게 웃었다. 재하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사실이니까.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교까지.

석주와 함께 지내며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만나 왔었지만 결국 자신이 끌리는 성별은 ‘남자’ 쪽이었다는 것을 재하는 막 알아차린 참이었다.

이왕이면 일도 사랑도 함께하는 것이 좋지-라 생각하던 재하의 발언에 석주는 아주 조금 주저했고, 그 눈빛의 의미를 알아차린 재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입을 열었다.

“걱정 마라, 양석주. 나, 너 보고 꼴릴 만큼 남자가 궁하지는 않으니까. 넌 내 취향이랑 거리가 멀어.”

재하는 저를 경계하는 석주에게 싱긋 웃으며 선언했다.

“게다가 친구는 안 건드린다는 게 내 신조야. 네 엉덩이는 내 명예를 걸고 지켜 준다.”

“인마. 왜 내 엉덩이야? 엉덩이는 네가 조심해야지.”

“꿈도 야무지군. 그리고.”

“그리고?”

“오픈할 가게의 직원들도 안 건드리겠다고, 맹세하지.”

“……정말이냐?”

“정말.”

“진짜로?”

“하하. 진짜.”

주저하던 석주가 일말의 망설임 없는 재하의 발언에 ‘좋아. 네가 원하는 대로 맞춤 정장 샵, 차리자!’라고 답한 것은 그로부터 몇 초가 더 지난 후의 일이었다.

그렇게 신사동 가로수길의 가장 좋은 길목에, 맞춤 정장 전문샵인 블랙 옴므가 문을 열었다.

‘운이 좋았지.’

어떻게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을 소진하고자 하는 석주와 그런 석주의 돈을 잘 굴릴 줄 알았던 재하의 시너지는 기대 이상의 결과를 낳았다.

두 사람의 가게인 블랙 옴므는 오픈한 지 한 달 만에 미디어에도 수십 번 오를 만큼 유명해졌고, 금세 신사동의 가장 핫한 옷 가게로 소문이 났다.

그로 인해 석주는 자신의 본가에서 경영인으로서 인정을 받았고, 재하는-

“고객님. 따로 연락드려도 되겠습니까?”

소문을 듣고 슈트를 맞추러 오는 남자들 중, 제 취향에 가까운 이들에게 유혹의 손길을 건네며 스릴 넘치는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게 됐다.



그로부터 5년이 흘렀다.

“고맙습니다.”

퇴원을 한 재하는 택시에서 내리며 인사를 하고선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그러고는 불이 꺼진 자신의 가게, 블랙 옴므의 정문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후문 쪽으로 걸어갔다.

‘어떻게…… 어떻게 당신이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재하가 집이 아닌 샵으로 걸음 한 까닭은, 퇴원 직후부터 미묘하게 뛰는 가슴의 박동을 가라앉히기 위해서였다.

‘그 빌어먹을 자식.’

하필이면 다른 곳도 아닌 얼굴을 건드릴 줄이야.

재하는 그렁그렁 눈물을 맺으면서도 제게 달려들어 얼굴을 냅다 후리기를 멈추지 않던 수빈을 떠올리며 인상을 썼다.

얌전한 놈인 줄 알았더니 그렇게 함부로 팔을 휘두르는 놈인 줄은 몰랐다.

제 아래서 숨을 헐떡일 때와는 달리 재하의 얼굴에 주먹을 가하던 손이 어찌나 맵던지.

만일 자신이 그보다 비슷한 눈높이를 지녔다면, 재하의 입원은 사흘에 그치지 않았으리라.

‘다시는 만나 주나 봐라.’

저보다 체격이 작은 녀석에게 당할 뻔했다는 사실이 치욕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

아니. 그것보다 한재하가 그토록 자랑하는 얼굴을 가격당했다는 것이 몹시 화가 난다.

충분히 피할 수 있었던 주먹질에 정면 타격을 당한 까닭은 재하가 은근히 상대를 무시했기 때문이었다. 방심하지 않았다면 수빈의 손목을 잡을 수도 있었을 거고, 입원도 하지 않았겠지.

퇴원 직후 곧장 샵으로 향한 이유는 자신의 실수를 용납하지 못한 탓도 함께였다. 심란한 기분에 하는 수 없이 마음의 안식처나 다름없는 매장 안의 슈트들을 감상하다 귀가나 해야겠다 싶었다.

재하가 지난 사흘 동안 영락없이 병원 신세를 졌던 것은 어쩐지 살벌하던 석주의 눈빛 때문이었다.

‘수민…… 아니, 수빈 씨 일은 내가 처리할 테니까 그때까지는 매장에 얼씬도 하지 마.’

‘야.’

‘사장 명령이야.’

재하가 또다시 ‘단골손님’을 건드렸다는 소식을 듣고 싸늘한 시선을 보내던 석주는 그에게 무려 ‘사장 명령’을 발동했다.

동업자라고는 하나, 엄밀히 따지면 저보다 훨씬 더 높은 직위를 지니고 있었던 석주의 명령을 재하가 어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하는 수 없이 반강제적으로 휴식을 부여받았던 재하는 지난 며칠, 푹 휴식을 취하기는 했지만…….

‘하반신이 쓸쓸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지독하게 가벼운 하반신을 지니고 있었던 한재하로서는 사흘간의 금욕 생활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어차피 내일부터 다시 출근할 테지만 새로운 먹잇감을 낚기 위한 준비를 미리미리 해 둬야겠다고 여기던 재하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뒷문을 통해 불 꺼진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어디 보자.’

석주 녀석이 가져온 슈트들이 있다고 했었는데.

“하아, 으흣!”

……응?

병원을 나설 때보다 한결 기분이 좋아진 재하가 자신의 직장이자, 곧 먹잇감을 낚는 작업장이기도 했던 매장 내부를 둘러보기 위해 스위치를 찾으려던 순간이었다.

얼마 전 병문안을 온 석주가 이태리의 장인이 손수 만들었다는 슈트를 공수해 왔다며,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던 모습을 떠올리곤 히죽 입꼬리를 올리고 있을 때였다.

재하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묘한 신음에 행동을 멈추었다.

“하읏, 으응! 읏!”

뭐……야.

이 기묘하고도 야릇한 숨소리는 틀림없이 섹스하고 있을 때나 흘러나올 법한 소리였다.

그것도 여성이 뱉어 내는 것이 분명한.

“…….”

재하와 석주의 블랙 옴므는 남성 고객 전용 가게였고, 스태프부터 점장, 그리고 오너 모두 남성이었다.

지금은 오픈 시간도 아니었기에 뜨거운 탄성을 흘려 대는 이 소리의 주인공은 손님일 가능성도 희박했다.

“아흑, 읏, 하으응, 읍!”

거칠어지는 숨결과 질척이는 소리가 재하의 신경을 있는 대로 긁고 있다.

“어, 어서, 하윽, 더, 하아, 더 넣어- 하아앙!”

살과 살이 부딪쳐 나는 기분 나쁜 소음이 재하의 얼굴을 딱딱하게 좁혔다.

석주가 자랑한 슈트들을 볼 생각에 흥분에 젖어 있던 재하의 눈은 차갑게 가라 앉았다.

‘감히.’

재하는 부드득 이를 갈았다.

‘대체 어떤 정신 나간 새끼가…… 내 신성한 작업, 아니 가게에서 섹스를 하고 있는 거지?’

그의 주 무대나 다름없는 블랙 옴므의 존재 의의가 얼룩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견딜 수 없는 치욕으로까지 느껴져 재하의 얼굴은 사납게 구겨졌다. 그는 성큼성큼,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예의 교성이 들려오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