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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 우리, 얼굴이나 좀 깝시다
인연일까, 악연일까. 그러나 매 순간 그를 향해 망설임 없이 직진했던 건 송아, 자신이었다.
“충분히 잘할 수 있습니다. 4년간 교지 편집부에서 활동했거든요. 웨딩드레스를 소개하는 블로그를 3년 6개월 동안 운영했는데, 블로거 시상식에서 장려상도 받았어요.”
떨리는 심장을 꽉 부여잡았다.
“어찌나 열심히 했던지, 성적은 간당간당 취직할 만큼만 채웠네.”
그러나 구석기 편집장은 귓구멍을 후비적거리며 어퍼컷을 날렸다.
“성적 1등보단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열정과 성실함이 더 중요하죠. 무슨 일이 있어도 매일 포스팅했고, 덕분에 여러 디자이너나 업체 담당자들과 인맥을 쌓았어요. 이건 상품화된 브로슈어 원고와 잡지사에 실었던 외고들입니다.”
송아는 방긋 웃으며 포트폴리오로 막아섰다.
“남들 다 갔다 오는 어학연수는 어따 떼어먹고?”
티오가 난 웨딩 전문 출판사가 두어 군데만 더 있었어도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것이다. 송아는 공손하게 답했다.
“영어도 업무에 지장되지 않을 만큼은 충분히 잘합니다.”
반항이 아니라 승부수였다. 다행히 코드를 제대로 짚어 편집장은 큭, 웃으며 커다란 배를 볼록거렸다. 그 틈을 빠르게 치고 들어갔다.
“완벽한 결혼식은 모두의 로망이죠. 여러 예비 신부들이 평생 꿈꿔 오던 결혼식을 환상이 아닌 현실로 그릴 수 있도록, 결혼식에 대한 알찬 정보를 전달하는 기사를 쓰고 싶…….”
한마디 한마디 정성을 실어 말하는 데 대고 그는 아무렇지 않게 강펀치를 날렸다.
“결혼식이 그렇게 로망이면 직접 결혼을 하지?”
문득 떠오른 엄마의 아련한 얼굴. 엄마의 일생소원이던, 그래서 송아의 꿈이 되어 버린 웨딩드레스. 내가 남자랑 무슨 결혼을 해!
슬프지만 그 펀치엔 직격타를 맞았고, 면접용 미소만을 간신히 유지한 채 입가를 바들바들 떨 수밖에 없었다.
“출판사 다니는 것보단 훨씬 나을 텐데.”
그러나 그는 아무렇지 않게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그는 굉장한 경쟁자들 속에서 송아만을 합격시켜 줬다. 그리고 캐릭터대로 온 정성을 다해 송아를 알뜰살뜰 괴롭혔다.
“자! 주얼리, 생활잡화 꼭지들이야.”
웨딩드레스가 좋아 이곳, 잡지사 <화이트 웨딩>에 입사했음을 그렇게 피력했건만!
“생활잡화는 그렇다 치고 주얼리…… 보석에 대해서는 모르는 거 뻔히 아시잖아요?”
그는 친절하게 책꽂이를 손가락질해 줬고,
“모른다는 소리를 참 당당하게 한다? 그럼, 빨리 공부해, 영어 잘하는 금송아.”
거기엔 수십여 권의 영어 원서가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그는 덧붙였다.
“너 하고 싶은 일만 하려면 집에 가서 해. 웨딩에 대해 너보다 잘 쓰는 사람, 여기서부터 쩌어기까지 쭉 앉아 있는 거 보이지?”
바둑판같은 부스에 도열해 앉은 대선배님들과 비교하며 엿을 먹였다.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도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매월 말 어김없이 잡지를 한 권씩 낳다 보니, 그러면서 보석에 대해 한 땀 한 땀 공부하다 보니, 2년이 훌쩍 넘어 3년 차가 되어 있었다. 스물여섯. 꽃다운 나이에 일에만 치여 살지만.
그러던 며칠 전, 구석기 편집장은 송아에게 일거리를 툭 던졌다.
“황진헌 꼭지, 네가 대신 맡아라.”
“네?”
기획이 나올 때부터 저건 정말 아닌데, 싶은 거였다. 기획 내용도 무척 오글거려 입에 담기 창피했다.
“조 대리 배 속에서 아이가 갑자기 빨리 나와 버린 걸 어떡해. 그럼 누가 맡니? 네가 주얼리 전문이잖아.”
자기가 떠맡겼지, 웨딩 잡지에 주얼리 전문이 어디 있다고.
“황진헌이 주얼리 회사 대표인 것과 이 기획이 무슨 상관이에요?”
“시끄러! 네가 가장 적임자야.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려면 어떻게 하랬지?”
확, 그냥 집에 가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회사를 그만둘 순 없다. 까라면 까야지. 후우!
황진헌의 <싸이듀(Thy dew)>는 ‘그대의 이슬’이란 뜻으로 결혼반지의 대명사, 다이아몬드 전문 주얼리숍이다. 또한 업계 1위를 찍고 계시므로 그는 송아의 광고주님이시기도 했다. 그렇더라도 홍보부 직원, 정영실 과장과만 일을 해 왔을 뿐, 대표와 직접 인연을 맺을 일은 없었다.
그래서 그의 비서를 통하기로 했다. 처음엔 비교적 모든 게 순조로웠다.
“아, 네. ‘이달의 프러포즈’라는 새로운 코너인데요. 사회적으로 성공한 괜찮은 미혼남들이, 불특정 여성들에게 프러포즈를 하는 형식이에요. 대표님같이 잘생기시고 성공하신 분들이 선정되시죠!”
― 어머머! 우리 대표님이 참 잘생기긴 하셨죠. 우리 대표님을 만나 보셨나요?
전화 통화만 해 봤지만 그의 여비서는 대표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늘 두 톤쯤 업되었다.
“아뇨, 사진으로만 뵈었죠.”
거짓말을 하려고 한 게 아니라, 먼저 뱉은 말 때문에 좀 꼬였다. 잘생겼다고 말해 버렸는데 못 봤다고 하면 이상해지니까. 실은 이걸 떠맡기며 구석기 편집장이 호언장담했다. ‘사진발 잘 받게 충분히 잘생겼어. 쓸데없는 걱정 말고 인터뷰나 꼭 따!’
그러나 강 비서는 엉뚱한 말을 했다.
― 이상하다? 인터넷에서 대표님 사진 서치 안 될 텐데? 대표님 개인 기사 나는 거 진짜 싫어하세요. 원래는 제품을 위주로 기사 써 주시기로 하지 않았나요?
아, 구석기 편집장님! 이런 거 하나 해결 안 해 주시고! 송아는 얼른 순발력 있게 받았다.
“10면을 <싸이듀> 제품으로만 기획 기사를 내는 건 몇 달 전 기사와 너무 겹쳐서 임팩트가 없어요. 대표님이 이 시대를 대표하는 멋진 신랑감으로 소개되면서 우선 대표님의 이미지를 업그레이드하면 신제품 홍보뿐 아니라 더 큰 브랜드 홍보가 되죠.”
사실, 보통의 미혼 대표였다면 양팔 벌려 환영할 기획이다. 개인 홍보도 해 주고 브랜드 홍보도 해 준다는데 누가 싫어할까. 그러나 아, 황진헌이 언론 노출 진짜 싫어하는 사람이구나. 그래서 이 기사가 나한테까지 밀려왔구나, 하는 생각을 곱씹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그의 비서조차 거의 다 설득되고 있었다.
“그냥 그렇게 하는 걸로 하시죠? 황진헌 대표님보다 괜찮은 신랑감이 어디 있다고요.”
― 후우, 우리 대표님이 신랑감으론 완전 괜찮긴 한데…….
“그러니 이 코너에 딱인 분이시지요. 좋으시겠어요, 이런 분과 함께 일하다가 로맨틱한 분위기라도 생기면.”
거반 농담으로 던졌으나 강 비서는 완전 진심으로 받았다.
― 아하하, 그림의 떡이에요. 꼬리 치는 직원은 딱 찍혀요.
“정말요? 애인은 없으시다고 들었는데?”
― 우와! 기자님이시라 그런지 정보가 탄탄하네요. 아유, 만날 퇴근도 안 하시고 일만 하셔서 저도 죽겠어요.
“네, 그 얘긴 홍보부 정영실 과장도 매일 하죠. 그렇게 깐깐하시다면서요.”
― 말도 마세요. 다들 차라리 연애라도 하셨으면 좋겠다고 그래요. 그럼 일찍 퇴근이라도 하지.
“혹시, 대표님은 연애 고자?”
― 크흐흐흐! 아, 웃겨. 연애 고자, 딱인데. 이런 얘기 대표님 들으시면 죽음…… 아앗!
그러나 곧 ‘삐이!’ 하는 잡음이 끼어들며 다른 남자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송아는 기절하듯 깜짝 놀랐다.
― 나, 황진헌입니다. 거기 이름!
스피커폰으로 돌려진, 중저음의, 강렬한 목소리였다.
― 당신 이름!
독촉하듯 되묻는 압박감에 오그라드는 목소리로 답했다.
“아, 안녕, 안녕하세요. 대표님! <화이트 웨딩>, 금……송아입니…….”
― 어이, 금송아 씨! 금송아 씨는, 스스로가 만든 잡지에 그렇게 자신이 없습니까. 내 이미지 이용해서 판매 부수 올리고 싶습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인사를 쥐어짜는 데 대고 황진헌은 처음부터 비수를 정확히 꽂았다.
― 금송아 씨 업무는 구걸입니까?
“네?”
― 구걸하지 말고 기사를 써요. 남의 이미지 이용해 잡지 팔 생각 집어치우고.
판매 부수 좀 올리자, 등 떠밀던 구석기 편집장의 푸시에 여기까지 왔지만,
“저, 저기, 저기요, 대표님! 아무리 그래도 말씀이 너무…….”
무방비 상태로 정곡을 찌르는 모욕이 아프게 쿡, 박히는 상황에서 송아는 짜증 나게도 말까지 더듬었다.
― 콘셉트, 원래대로 잘 되돌리십시오. 금송아 씨 이름 대면서 광고까지 싹 뺄 수 있습니다.
그는 목소리조차 착, 가라앉히면서 자기 할 말을 시원스레 털어 냈다.
황진헌! 그래, 당신 참 잘나셨어!
어디 가서 말발 딸린다는 말은 못 들어 보았었는데! 어버버거리며 말을 더듬었던 그 기억은 며칠 동안의 이불킥을 선사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 송아는 그때부터 황진헌에 관한 조사를 더 바싹 했다.
황진헌 그 나쁜 놈의 시키에게 ‘잡지 몇 부 더 팔려고 내 이미지 발라먹는 양아치 기자 금송아’로 남고 싶진 않았다. 차라리 멋진 기사를 써 주고 서로의 이미지를 바꾸는 게 말끔하게 모욕을 씻는 일이다.
“우리, 얼굴이나 좀 깝시다!”
그때부터 송아는 버릇처럼 똑같은 말을 내뱉으며 전의를 다졌다. <싸이듀>의 입구조차 통과하지 못하고 퇴짜 맞고 올 때마다 구석기 편집장도 틈틈이 파이팅을 불어넣었다.
“금송아, 너 신입 티 낼래? 못 해, 안 돼, 소리는 누구든지 해. 널 뭐 하러 뽑았게? 학교 다니면서 시험 기간에도 독하게 매일 포스팅하던 거, 블로그 운영했던 그 끈기와 열정 하나 보고 뽑았어.”
“저쪽엔 애초에 다른 기획으로 기사 쓰기로 하시고선. 기획 변경된 거 해결도 안 해 주시고선요!”
커다란 배를 볼록거리며 구석기 편집장은 오히려 큰소리쳤다.
“그래서 취재원이 인터뷰 안 합니다, 하는 말 한마디에 그냥 나가동그라질래?”
어쩌면 문제는 송아 자신에게 있을지 몰랐다. 솔직히 황진헌의 기사 자체를 쓰고 싶지 않았다.
“편집장님, 이 시대를 대표하는 멋진 신랑감을 소개하는 것보다 웨딩 정보 하나를 더 싣는 게 낫죠. 더 아름다운 드레스, 합리적인 가격의 주얼리, 생활 소품, 인테리어, 신혼여행지……. 실을 게 얼마나 많은데 굳이 황진헌이세요!”
하지만 그는 정곡을 찔러 왔다.
“이슈! 이슈가 되잖아. 네가 얘기한 것들 중 하나라도 ‘이 잡지를 꼭 사서 봐야겠다’ 싶게 확 땅기는 게 있나 봐 봐. 이 시대를 대표하는 멋진 신랑감, <싸이듀> 대표, 황진헌 심층 인터뷰! 그가 부자가 된 성공법! 네가 생각해 봐. 잡지를 꼭 사서 보고 싶은 이유가 분명하지 않아?”
“결혼을 준비할 독자들에게 허탈감을 느끼게 하잖아요. 그런 남자 소개해 봤자 괜히 자기 신랑감과 비교만 하게 돼요. 신부들에게 가장 행복한 결혼식을 꿈꾸게 해 줘야지요. 현실에 두 다리를 딛고 서서 결혼 준비를 하도록 실질적인 정보를 줘야지요!”
“그렇지. 하지만 일단 잡지를 구매하도록 해야 정보도 줄 수 있고, 좋은 기사도 의미가 있지. 팔리지 않고 창고에 쌓일 잡지는 책이 아니라 뭐라고 했지?”
폐지. 팔리지 않는 책은 결국 폐지다.
그래, 개겨 봤자 편집장님의 말씀은 항상 옳다.
“얼마나 이슈가 되겠니? 너도 궁금하지? 겨우 서른넷에, 동네 금은방이었던 ‘황금당’을 세계적으로도 주목받는 핫한 브랜드, <싸이듀>로 만들었어.”
편집장님이 그토록 부르짖는 이슈. 그랬다. 황진헌은 매력적인 이슈 메이커다.
“검색질 기막히게 잘하는 네가 찾아봐. 아무리 너라도 쉽지 않을걸?”
정말 그랬다. 가장 기초적인 자료 조사마저도. 신입 기자치곤 발도 넓고 자료 수집도 잘하는 편인데.
성공한 CEO 황진헌이 젊은 싱글이라는 게 이토록 잘 알려진 게 오히려 신기했다. 이 정도라면 고의로 노출을 관리한 것.
어렵게 그의 영어 이름이 ‘Chris Hwang’이라는 걸 알아내고서, 미국 사이트들을 뒤지고 어메뤼칸들 SNS를 뒤져 간신히 찾아낸 게 전부.
송아는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겨우 건진 건 알아보지도 못하도록 옆얼굴이 어렴풋한 고등학생 소년의 모습이었다.
― 저희 대표님께서 통화하지 않으시겠대요. 그때 하실 말씀은 모두 하셨다고. 그리고 이 인터뷰 건으로는 더 이상 찾아오지 마세요. 오실 때마다 그냥 가시게 하는 저도 힘들답니다.
강 비서에게까지 완벽하게 차단마저 당하니, 그의 말대로 진짜 ‘구걸’을 하는 것 같았다. 스물여덟에 혜성같이 나타나 6년 만에 <싸이듀>를 업계 1위로 올려놓은 성공의 아이콘. 그는 콧대의 아이콘이기도 했다.
* * *
송아는 걸음을 재촉하며 버그 선글라스를 머리 위로 올렸다. 와! 아름답다. 거리가 온통 붉은 천지. 단풍나무 거리가 제철을 맞았다. 새빨간 가지가 제각각 푸른 하늘을 힘차게 가로지른다.
그러나 지금은 아침 8시 45분. 바글바글 출근하는 무리에 밀려 걷는 중이다.
“와아, 저거 봐!”
사람들이 쇼윈도 앞에 멈춰 탄성을 질렀다.
여기는 단풍나무 2길. 유럽풍 고딕 양식 건물들이 줄지은 명품숍의 거리. 압도적으로 아름다우며 압도적으로 세가 비싸기도 한 곳. 그래, 모두들 여기를 ‘싸이듀 사거리’라 부른다.
“쳇!”
송아는 이 거리를 사랑했다. 이 끝자락에 오피스텔 하나를 얻어 독립하는 것이 유일한 꿈이다. 아니, 꿈이었었다. 그러나 이젠 사랑할 수 없게 됐어! 나쁜 노무 시키, 황진헌!
송아의 미간에 세 줄의 주름이 귀엽게 팍삭, 그어졌다. 유리창 너머가 당황스럽도록 찬란하다. 신상품 출시했구나?
송아의 뺨은 복숭앗빛으로 발그레했다. 엷게 쌍꺼풀진 눈은 크진 않지만 눈동자만큼은 선명하게 또릿하다. 가느다란 속눈썹이 묘한 각도로 곱게 휜 그녀. 코는 작지만 오뚝하고, 입술은 앙증맞다.
“짜증 나.”
송아는 토트백을 팔에 걸고, 종이 봉지에서 꽈배기를 꺼내 한입 베어 물었다. 화가 불끈 치솟으니 허기가 졌다.
“아주 잘나셨어!”
이번엔 웨딩 콘셉트. 왼쪽 끝 미니어처는 숱하게 봐 왔던 진짜 웨딩드레스보다 더욱 고급스럽다. 어떻게 저런 걸 장난감 드레스 부속으로 쓸 생각을 할까? 손가락에 끼기도 아까운 걸!
검붉은 벨벳을 굽이치며 내려오는 새하얀 레이스 자락, 허리께엔 은회색 최고급 진주를 알알이 흩뿌렸다. 이 정도는 배경이야, 비웃듯 디스플레이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멋진 신랑감? 쳇이다!”
그때 한 남자가 그녀를 스쳐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러나 송아는 쇼윈도 안에만 정신을 팔았다.
#1. 우리, 얼굴이나 좀 깝시다
인연일까, 악연일까. 그러나 매 순간 그를 향해 망설임 없이 직진했던 건 송아, 자신이었다.
“충분히 잘할 수 있습니다. 4년간 교지 편집부에서 활동했거든요. 웨딩드레스를 소개하는 블로그를 3년 6개월 동안 운영했는데, 블로거 시상식에서 장려상도 받았어요.”
떨리는 심장을 꽉 부여잡았다.
“어찌나 열심히 했던지, 성적은 간당간당 취직할 만큼만 채웠네.”
그러나 구석기 편집장은 귓구멍을 후비적거리며 어퍼컷을 날렸다.
“성적 1등보단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열정과 성실함이 더 중요하죠. 무슨 일이 있어도 매일 포스팅했고, 덕분에 여러 디자이너나 업체 담당자들과 인맥을 쌓았어요. 이건 상품화된 브로슈어 원고와 잡지사에 실었던 외고들입니다.”
송아는 방긋 웃으며 포트폴리오로 막아섰다.
“남들 다 갔다 오는 어학연수는 어따 떼어먹고?”
티오가 난 웨딩 전문 출판사가 두어 군데만 더 있었어도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것이다. 송아는 공손하게 답했다.
“영어도 업무에 지장되지 않을 만큼은 충분히 잘합니다.”
반항이 아니라 승부수였다. 다행히 코드를 제대로 짚어 편집장은 큭, 웃으며 커다란 배를 볼록거렸다. 그 틈을 빠르게 치고 들어갔다.
“완벽한 결혼식은 모두의 로망이죠. 여러 예비 신부들이 평생 꿈꿔 오던 결혼식을 환상이 아닌 현실로 그릴 수 있도록, 결혼식에 대한 알찬 정보를 전달하는 기사를 쓰고 싶…….”
한마디 한마디 정성을 실어 말하는 데 대고 그는 아무렇지 않게 강펀치를 날렸다.
“결혼식이 그렇게 로망이면 직접 결혼을 하지?”
문득 떠오른 엄마의 아련한 얼굴. 엄마의 일생소원이던, 그래서 송아의 꿈이 되어 버린 웨딩드레스. 내가 남자랑 무슨 결혼을 해!
슬프지만 그 펀치엔 직격타를 맞았고, 면접용 미소만을 간신히 유지한 채 입가를 바들바들 떨 수밖에 없었다.
“출판사 다니는 것보단 훨씬 나을 텐데.”
그러나 그는 아무렇지 않게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그는 굉장한 경쟁자들 속에서 송아만을 합격시켜 줬다. 그리고 캐릭터대로 온 정성을 다해 송아를 알뜰살뜰 괴롭혔다.
“자! 주얼리, 생활잡화 꼭지들이야.”
웨딩드레스가 좋아 이곳, 잡지사 <화이트 웨딩>에 입사했음을 그렇게 피력했건만!
“생활잡화는 그렇다 치고 주얼리…… 보석에 대해서는 모르는 거 뻔히 아시잖아요?”
그는 친절하게 책꽂이를 손가락질해 줬고,
“모른다는 소리를 참 당당하게 한다? 그럼, 빨리 공부해, 영어 잘하는 금송아.”
거기엔 수십여 권의 영어 원서가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그는 덧붙였다.
“너 하고 싶은 일만 하려면 집에 가서 해. 웨딩에 대해 너보다 잘 쓰는 사람, 여기서부터 쩌어기까지 쭉 앉아 있는 거 보이지?”
바둑판같은 부스에 도열해 앉은 대선배님들과 비교하며 엿을 먹였다.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도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매월 말 어김없이 잡지를 한 권씩 낳다 보니, 그러면서 보석에 대해 한 땀 한 땀 공부하다 보니, 2년이 훌쩍 넘어 3년 차가 되어 있었다. 스물여섯. 꽃다운 나이에 일에만 치여 살지만.
그러던 며칠 전, 구석기 편집장은 송아에게 일거리를 툭 던졌다.
“황진헌 꼭지, 네가 대신 맡아라.”
“네?”
기획이 나올 때부터 저건 정말 아닌데, 싶은 거였다. 기획 내용도 무척 오글거려 입에 담기 창피했다.
“조 대리 배 속에서 아이가 갑자기 빨리 나와 버린 걸 어떡해. 그럼 누가 맡니? 네가 주얼리 전문이잖아.”
자기가 떠맡겼지, 웨딩 잡지에 주얼리 전문이 어디 있다고.
“황진헌이 주얼리 회사 대표인 것과 이 기획이 무슨 상관이에요?”
“시끄러! 네가 가장 적임자야.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려면 어떻게 하랬지?”
확, 그냥 집에 가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회사를 그만둘 순 없다. 까라면 까야지. 후우!
황진헌의 <싸이듀(Thy dew)>는 ‘그대의 이슬’이란 뜻으로 결혼반지의 대명사, 다이아몬드 전문 주얼리숍이다. 또한 업계 1위를 찍고 계시므로 그는 송아의 광고주님이시기도 했다. 그렇더라도 홍보부 직원, 정영실 과장과만 일을 해 왔을 뿐, 대표와 직접 인연을 맺을 일은 없었다.
그래서 그의 비서를 통하기로 했다. 처음엔 비교적 모든 게 순조로웠다.
“아, 네. ‘이달의 프러포즈’라는 새로운 코너인데요. 사회적으로 성공한 괜찮은 미혼남들이, 불특정 여성들에게 프러포즈를 하는 형식이에요. 대표님같이 잘생기시고 성공하신 분들이 선정되시죠!”
― 어머머! 우리 대표님이 참 잘생기긴 하셨죠. 우리 대표님을 만나 보셨나요?
전화 통화만 해 봤지만 그의 여비서는 대표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늘 두 톤쯤 업되었다.
“아뇨, 사진으로만 뵈었죠.”
거짓말을 하려고 한 게 아니라, 먼저 뱉은 말 때문에 좀 꼬였다. 잘생겼다고 말해 버렸는데 못 봤다고 하면 이상해지니까. 실은 이걸 떠맡기며 구석기 편집장이 호언장담했다. ‘사진발 잘 받게 충분히 잘생겼어. 쓸데없는 걱정 말고 인터뷰나 꼭 따!’
그러나 강 비서는 엉뚱한 말을 했다.
― 이상하다? 인터넷에서 대표님 사진 서치 안 될 텐데? 대표님 개인 기사 나는 거 진짜 싫어하세요. 원래는 제품을 위주로 기사 써 주시기로 하지 않았나요?
아, 구석기 편집장님! 이런 거 하나 해결 안 해 주시고! 송아는 얼른 순발력 있게 받았다.
“10면을 <싸이듀> 제품으로만 기획 기사를 내는 건 몇 달 전 기사와 너무 겹쳐서 임팩트가 없어요. 대표님이 이 시대를 대표하는 멋진 신랑감으로 소개되면서 우선 대표님의 이미지를 업그레이드하면 신제품 홍보뿐 아니라 더 큰 브랜드 홍보가 되죠.”
사실, 보통의 미혼 대표였다면 양팔 벌려 환영할 기획이다. 개인 홍보도 해 주고 브랜드 홍보도 해 준다는데 누가 싫어할까. 그러나 아, 황진헌이 언론 노출 진짜 싫어하는 사람이구나. 그래서 이 기사가 나한테까지 밀려왔구나, 하는 생각을 곱씹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그의 비서조차 거의 다 설득되고 있었다.
“그냥 그렇게 하는 걸로 하시죠? 황진헌 대표님보다 괜찮은 신랑감이 어디 있다고요.”
― 후우, 우리 대표님이 신랑감으론 완전 괜찮긴 한데…….
“그러니 이 코너에 딱인 분이시지요. 좋으시겠어요, 이런 분과 함께 일하다가 로맨틱한 분위기라도 생기면.”
거반 농담으로 던졌으나 강 비서는 완전 진심으로 받았다.
― 아하하, 그림의 떡이에요. 꼬리 치는 직원은 딱 찍혀요.
“정말요? 애인은 없으시다고 들었는데?”
― 우와! 기자님이시라 그런지 정보가 탄탄하네요. 아유, 만날 퇴근도 안 하시고 일만 하셔서 저도 죽겠어요.
“네, 그 얘긴 홍보부 정영실 과장도 매일 하죠. 그렇게 깐깐하시다면서요.”
― 말도 마세요. 다들 차라리 연애라도 하셨으면 좋겠다고 그래요. 그럼 일찍 퇴근이라도 하지.
“혹시, 대표님은 연애 고자?”
― 크흐흐흐! 아, 웃겨. 연애 고자, 딱인데. 이런 얘기 대표님 들으시면 죽음…… 아앗!
그러나 곧 ‘삐이!’ 하는 잡음이 끼어들며 다른 남자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송아는 기절하듯 깜짝 놀랐다.
― 나, 황진헌입니다. 거기 이름!
스피커폰으로 돌려진, 중저음의, 강렬한 목소리였다.
― 당신 이름!
독촉하듯 되묻는 압박감에 오그라드는 목소리로 답했다.
“아, 안녕, 안녕하세요. 대표님! <화이트 웨딩>, 금……송아입니…….”
― 어이, 금송아 씨! 금송아 씨는, 스스로가 만든 잡지에 그렇게 자신이 없습니까. 내 이미지 이용해서 판매 부수 올리고 싶습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인사를 쥐어짜는 데 대고 황진헌은 처음부터 비수를 정확히 꽂았다.
― 금송아 씨 업무는 구걸입니까?
“네?”
― 구걸하지 말고 기사를 써요. 남의 이미지 이용해 잡지 팔 생각 집어치우고.
판매 부수 좀 올리자, 등 떠밀던 구석기 편집장의 푸시에 여기까지 왔지만,
“저, 저기, 저기요, 대표님! 아무리 그래도 말씀이 너무…….”
무방비 상태로 정곡을 찌르는 모욕이 아프게 쿡, 박히는 상황에서 송아는 짜증 나게도 말까지 더듬었다.
― 콘셉트, 원래대로 잘 되돌리십시오. 금송아 씨 이름 대면서 광고까지 싹 뺄 수 있습니다.
그는 목소리조차 착, 가라앉히면서 자기 할 말을 시원스레 털어 냈다.
황진헌! 그래, 당신 참 잘나셨어!
어디 가서 말발 딸린다는 말은 못 들어 보았었는데! 어버버거리며 말을 더듬었던 그 기억은 며칠 동안의 이불킥을 선사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 송아는 그때부터 황진헌에 관한 조사를 더 바싹 했다.
황진헌 그 나쁜 놈의 시키에게 ‘잡지 몇 부 더 팔려고 내 이미지 발라먹는 양아치 기자 금송아’로 남고 싶진 않았다. 차라리 멋진 기사를 써 주고 서로의 이미지를 바꾸는 게 말끔하게 모욕을 씻는 일이다.
“우리, 얼굴이나 좀 깝시다!”
그때부터 송아는 버릇처럼 똑같은 말을 내뱉으며 전의를 다졌다. <싸이듀>의 입구조차 통과하지 못하고 퇴짜 맞고 올 때마다 구석기 편집장도 틈틈이 파이팅을 불어넣었다.
“금송아, 너 신입 티 낼래? 못 해, 안 돼, 소리는 누구든지 해. 널 뭐 하러 뽑았게? 학교 다니면서 시험 기간에도 독하게 매일 포스팅하던 거, 블로그 운영했던 그 끈기와 열정 하나 보고 뽑았어.”
“저쪽엔 애초에 다른 기획으로 기사 쓰기로 하시고선. 기획 변경된 거 해결도 안 해 주시고선요!”
커다란 배를 볼록거리며 구석기 편집장은 오히려 큰소리쳤다.
“그래서 취재원이 인터뷰 안 합니다, 하는 말 한마디에 그냥 나가동그라질래?”
어쩌면 문제는 송아 자신에게 있을지 몰랐다. 솔직히 황진헌의 기사 자체를 쓰고 싶지 않았다.
“편집장님, 이 시대를 대표하는 멋진 신랑감을 소개하는 것보다 웨딩 정보 하나를 더 싣는 게 낫죠. 더 아름다운 드레스, 합리적인 가격의 주얼리, 생활 소품, 인테리어, 신혼여행지……. 실을 게 얼마나 많은데 굳이 황진헌이세요!”
하지만 그는 정곡을 찔러 왔다.
“이슈! 이슈가 되잖아. 네가 얘기한 것들 중 하나라도 ‘이 잡지를 꼭 사서 봐야겠다’ 싶게 확 땅기는 게 있나 봐 봐. 이 시대를 대표하는 멋진 신랑감, <싸이듀> 대표, 황진헌 심층 인터뷰! 그가 부자가 된 성공법! 네가 생각해 봐. 잡지를 꼭 사서 보고 싶은 이유가 분명하지 않아?”
“결혼을 준비할 독자들에게 허탈감을 느끼게 하잖아요. 그런 남자 소개해 봤자 괜히 자기 신랑감과 비교만 하게 돼요. 신부들에게 가장 행복한 결혼식을 꿈꾸게 해 줘야지요. 현실에 두 다리를 딛고 서서 결혼 준비를 하도록 실질적인 정보를 줘야지요!”
“그렇지. 하지만 일단 잡지를 구매하도록 해야 정보도 줄 수 있고, 좋은 기사도 의미가 있지. 팔리지 않고 창고에 쌓일 잡지는 책이 아니라 뭐라고 했지?”
폐지. 팔리지 않는 책은 결국 폐지다.
그래, 개겨 봤자 편집장님의 말씀은 항상 옳다.
“얼마나 이슈가 되겠니? 너도 궁금하지? 겨우 서른넷에, 동네 금은방이었던 ‘황금당’을 세계적으로도 주목받는 핫한 브랜드, <싸이듀>로 만들었어.”
편집장님이 그토록 부르짖는 이슈. 그랬다. 황진헌은 매력적인 이슈 메이커다.
“검색질 기막히게 잘하는 네가 찾아봐. 아무리 너라도 쉽지 않을걸?”
정말 그랬다. 가장 기초적인 자료 조사마저도. 신입 기자치곤 발도 넓고 자료 수집도 잘하는 편인데.
성공한 CEO 황진헌이 젊은 싱글이라는 게 이토록 잘 알려진 게 오히려 신기했다. 이 정도라면 고의로 노출을 관리한 것.
어렵게 그의 영어 이름이 ‘Chris Hwang’이라는 걸 알아내고서, 미국 사이트들을 뒤지고 어메뤼칸들 SNS를 뒤져 간신히 찾아낸 게 전부.
송아는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겨우 건진 건 알아보지도 못하도록 옆얼굴이 어렴풋한 고등학생 소년의 모습이었다.
― 저희 대표님께서 통화하지 않으시겠대요. 그때 하실 말씀은 모두 하셨다고. 그리고 이 인터뷰 건으로는 더 이상 찾아오지 마세요. 오실 때마다 그냥 가시게 하는 저도 힘들답니다.
강 비서에게까지 완벽하게 차단마저 당하니, 그의 말대로 진짜 ‘구걸’을 하는 것 같았다. 스물여덟에 혜성같이 나타나 6년 만에 <싸이듀>를 업계 1위로 올려놓은 성공의 아이콘. 그는 콧대의 아이콘이기도 했다.
* * *
송아는 걸음을 재촉하며 버그 선글라스를 머리 위로 올렸다. 와! 아름답다. 거리가 온통 붉은 천지. 단풍나무 거리가 제철을 맞았다. 새빨간 가지가 제각각 푸른 하늘을 힘차게 가로지른다.
그러나 지금은 아침 8시 45분. 바글바글 출근하는 무리에 밀려 걷는 중이다.
“와아, 저거 봐!”
사람들이 쇼윈도 앞에 멈춰 탄성을 질렀다.
여기는 단풍나무 2길. 유럽풍 고딕 양식 건물들이 줄지은 명품숍의 거리. 압도적으로 아름다우며 압도적으로 세가 비싸기도 한 곳. 그래, 모두들 여기를 ‘싸이듀 사거리’라 부른다.
“쳇!”
송아는 이 거리를 사랑했다. 이 끝자락에 오피스텔 하나를 얻어 독립하는 것이 유일한 꿈이다. 아니, 꿈이었었다. 그러나 이젠 사랑할 수 없게 됐어! 나쁜 노무 시키, 황진헌!
송아의 미간에 세 줄의 주름이 귀엽게 팍삭, 그어졌다. 유리창 너머가 당황스럽도록 찬란하다. 신상품 출시했구나?
송아의 뺨은 복숭앗빛으로 발그레했다. 엷게 쌍꺼풀진 눈은 크진 않지만 눈동자만큼은 선명하게 또릿하다. 가느다란 속눈썹이 묘한 각도로 곱게 휜 그녀. 코는 작지만 오뚝하고, 입술은 앙증맞다.
“짜증 나.”
송아는 토트백을 팔에 걸고, 종이 봉지에서 꽈배기를 꺼내 한입 베어 물었다. 화가 불끈 치솟으니 허기가 졌다.
“아주 잘나셨어!”
이번엔 웨딩 콘셉트. 왼쪽 끝 미니어처는 숱하게 봐 왔던 진짜 웨딩드레스보다 더욱 고급스럽다. 어떻게 저런 걸 장난감 드레스 부속으로 쓸 생각을 할까? 손가락에 끼기도 아까운 걸!
검붉은 벨벳을 굽이치며 내려오는 새하얀 레이스 자락, 허리께엔 은회색 최고급 진주를 알알이 흩뿌렸다. 이 정도는 배경이야, 비웃듯 디스플레이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멋진 신랑감? 쳇이다!”
그때 한 남자가 그녀를 스쳐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러나 송아는 쇼윈도 안에만 정신을 팔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