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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안, 안녕, 안녕하십니까.”

둥그런 얼굴 속 쪽 째진 눈과 마주친 송아는 말을 더듬었다.

“그렇게 열심히 부르는데 무시해? 니들끼리만 올라가면서 뭔 짓 하려고?”

“아니, 아닙니다!”

그러나 변명도 꺼내기 전에 빚 독촉은 시작되었다.

“금송아, <싸이듀> 황진헌이 인터뷰 땄어, 못 땄어?”

아하하, 이게 더 곤란하다. 어깨를 펴고 씩씩하게 답했다.

“못 땄습니다!”

“어쭈구리? 너, 아주 당당하다? 자그마치 10면을 하얗게 비워 놓으시겠다?”

그는 평소대로 커다란 배를 볼록거리며 열을 냈다. 꽤 정돈된 외모의 오지령 선배와 나란히 서 있으니 이질적인 괴리감이 든다. 잠자코 있던 오 선배가 불쑥 끼어들었다.

“형! 아침부터 송아한테 왜 그래? 담배나 피우러 올라가요.”

출판사 선후배란다. 꿈에도 몰랐던 저 둘의 사적 관계가 이런 악연을 가능케 했다.

“후배라고 편드냐? 넌 빠져, 계약직.”

“몇 달만 메워 달라고 매달리던 게 누구더라? 이 비싼 몸을 헐값에 노예 부리듯 하면서?”

띵,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8층에 도착했다. 구석기 편집장이 따라 내리는데, 오지령 선배가 그의 팔짱을 쏙 끼고 안으로 끌어들였다. 송아 홀로 탈출시킨 것.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

“빚이야, 갚아라?”

닫히는 문 새로 주먹을 쥐는 시늉을 하며 ‘파이팅!’ 입 모양으로 외쳐 주기까지. 송아는 이를 악물 새도 없이 구석기 편집장이 퍼붓는 말을 고스란히 받아 내야 했다.

“야, 너 금송아! 황진헌이 인터뷰 못 따기만 해 봐! 원고 마감일 나흘 남았…….”

다행히 엘리베이터는 스르르 닫혔다. 휴우!

“죄송합니다, 좀 늦었습니다아.”

사무실로 들어서며 송아는 먼저 온 선배들에게 늦은 아침 인사를 했다.

“안녕, 금송아.”, “왔어?”, “웬일로 네가 지각을 다?”

과중한 업무, 야근이 잦은 탓에 사무실 분위기는 비교적 자유롭다. 선배들은 모니터에 시선을 꽂은 채 선선히 인사를 해 왔다. 모두 밀린 원고들을 쓰고 있었다.

송아는 시원하게 사과를 하며 늦은 이유를 얼버무렸다.

“늦잠 잤어요. 죄송합니다. 앞으론 안 늦겠습니다!”

배우급으로 잘생긴 남자에게 잠깐 설렌 기억은 완전히 달아났다.

작은 사물함, 이동식 서랍이 달린 좁은 책상, 사무용 무선 전화기, 조금만 작업을 하면 뜨끈뜨끈해지는 구형 노트북과 발밑의 전선 뭉치들. 이것이 그토록 어렵게 획득한 ‘편집 기자’로서 금송아가 누리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 눈앞의 빼곡한 포스트잇들도.

오늘의 일정을 빠르게 머릿속에 넣었다. 지금은 기사를 쓰고 있어야 할 때. 그러나 구멍이 휑하다. <싸이듀> 대표, 황진헌 인터뷰, 아휴!

잡지사의 한 달은 시계 초침처럼 정확하다. 5일까진 외주 원고, 즉 외고 필자 섭외 및 청탁, 10일까진 인터뷰 및 기사 작성, 15일까진 취재 및 외고 마감, 그 뒤론 최종 원고 마감 및 교정 작업과 출간.

책이 나와야 하는 날은 딱 정해져 있다. 그러니 조금만 늦어도 야근으로, 철야로 고난의 행군이다. 그런데 최종 원고 마감일을 코앞에 두고 원고는커녕…….

“어젠 만났어? 인터뷰하겠대?”

뒷자리의 반 대리 언니가 슬쩍 말을 걸어왔다.

“후, 아뇨. 그쪽 정영실 과장에게 오늘 저녁엔 사무실에 붙어 있을 거란 정보를 얻었어요. 어떻게 하든 만나라도 보려고요.”

녹취 풀고 기사 쓰고 자료 찾고 탈고하고. 이것에만 매달려도 최소 사흘? 잠 한숨 안 자고 들러붙어도 최하 이틀. 지금 그런 게 문제가 아니라 인터뷰 자체가…….

소녀의 핑크빛 꿈과 현실은 달랐다. 아름다운 웨딩의 세상을 만드는 건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 노가다로 이루어지는 페이지들의 묶음. 오늘 쌓인 피로를 내일로 넘기는 하루들을 버텨 내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진정한 애정은 그 과정에서 생겼다. 게다 주얼리의 세계는 경험하지 못했던 신세계.

아름다운 보석의 홍수 속에서 반짝이는 새로움에 취했다. 허겁지겁 보석에 대한 지식을 들이켰다. <싸이듀>의 보석들을 사랑했었다. 그러나 황진헌, 이 인간만은!

송아는 텅 비어 있는 꼭지를 밀쳐 두고 다른 것들을 바삐 처리했다. 외고들, 부속들, 생활 소품 소개들, 할 수 있는 것들이라도 미리 다 해 놓아야 했다. 일단 사무실에 앉으면 시간은 총알 같다. 그럼에도 저 광활한 10페이지를 어째야 하나 하는 생각이 종일 머릿속을 괴롭혔다.

“바빠도 먹고 해. 한 나이라도 어릴 때부터 몸 챙겨야지, 계속 그렇게 살면 골로 간다?”

“와, 언니밖에 없어요.”

반 대리 언니가 나눠 준 샌드위치 반쪽이 오늘의 늦은 점심이다. 오후의 해가 기울어 오니 내면의 비겁쟁이가 고개를 쳐든다.

“황진헌 인터뷰, 확 그냥 빼 버릴까 봐요. 하기 싫다잖아요. 하지 말라죠, 뭐.”

할 일이 산더미인데 퇴짜 맞으러 갈 시간조차 아까웠다.

“하긴, 오늘도 허탕 치면 좀 많이 빠듯하지?”

“황진헌을 설득하는 게 빠를까요, 구석기 편집장님을 설득하는 게 빠를까요?”

송아는 발작적으로 서랍에서 파일을 꺼내 뒤적였다. 유사시를 대비해 키핑해 놓은 것들이다.

“글쎄, 대안을 내놓겠다? 요건 가을이니 안 되고, 요건 지난번에 물먹었고, 요건 좀 괜찮은데 이제 와서 섭외하긴 늦었고. 아무래도 황진헌을 설득해야겠네?”

“하아, 이걸로 밀어붙이면 안 될까요?”

“너 잘라 인건비 줄이는 게 회사에 가장 큰 보탬이라고 지랄할걸?”

“언니!”

반 대리 언니가 큭큭, 웃는 소리에 내면의 불안이 확 올라왔다. 그때 송아의 전화기가 울렸다.

“감사합니다. <화이트 웨딩> 편집부 금송아입니다.”

갑자기 그윽한 목소리가 허를 찔렀다.

― 나, 황진헌입니다.

숨이 턱 막혔다. 꽤 권위적인 그러면서도 부드럽고 감미로운.

“아, 안, 안, 흐흠! 반갑습니다. 대표님, 저, 전화 주셔서 무척 감사합니다.”

왜, 왜 더듬고 그래. 물론 무척 반갑고 감사했고 또 재수 털렸다.

― 거기, 나 좀 봅시다. 오늘 저녁, 퇴근하고 시간 낼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쯤은 가볍게 접을 수 있다.

“그럼요! 시간 낼 수 있고말고요.”

너무나 반가웠다. 갑자기 그가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니, 진짜로. 얼마 전 그 모욕적 언사를 뱉던 뉘앙스가 아니다. 기이하게 부드러워졌고, 심지어 장난스럽게도 들린다. 황급히 말을 이었다.

“생각 바꾸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표님! 편하신 시간에 인터뷰 준비해서 가겠습니다.”

그의 숨소리가 유선을 타고 깊숙이 흘렀다. 한숨 같기도 한, 어쩌면 웃음 같기도 한.

― 흠! 성격이…… 정말로 집요하네요. 인터뷰에 관한 대답은 이미 충분히 한 걸로 아는데. 그냥 좀 봅시다. 인터뷰는 안 하고.

이건 또 무슨 헛소리?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전화기 속으로 기어 들어가듯 상냥하게 답했다.

“그러니까 인터뷰를 ‘오늘은’ 안 하시겠다는 말씀은……. 아, 잠깐이라도 훑어보실 수 있도록 질의서는 곧바로 메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모두 꼭 답해야 하시는 건 아니니 말씀하실 범위는 조정 가능하십…….”

그는 잠깐 망설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곧 웃음기를 머금은 채 말을 잘랐다.

― 나, 그렇게 그쪽 뜻대론 안 움직여. 좀 봅시다. 내 요구는 ‘우리, 좀 봅시다.’ 뿐입니다. 직접 와서 날 설득해 보든가 말든가.

약간의 현기증이 일었다. 뭔가 좋지 않은 예감. 그러나 대답은 정해져 있다.

“대표님 사무실로 오늘 언제까지 찾아가면 될까요?”

“사무실? 후훗, 좋습니다. 퇴근하고 7시까지 와요. 저녁 같이 하게 배 속은 비워 두고.”

그가 시원스레 허락했다.



* * *



30년 전쯤, 황량했던 이 거리에 웬 유럽풍 건물이 처음 들어설 때만 해도 이곳이 이런 황금의 땅이 되리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비슷한 건물이 몇몇 더 들어서며 이국적 풍경이 멋들어진 거리뷰를 이루자, 경쟁적으로 더 화려하고 더 고풍스러운 저층 빌딩이 지어졌다.

중앙 공원을 따라 앞뒤로 카페가, 명품 매장이, 백화점이 줄줄이 생겼다. 그러면서 <싸이듀> 사거리를 중심으로 단풍나무 거리는 찬찬히 셀럽들의 명소로 떠올랐다. 시계탑이 내려다보는 공원을 배경으로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며 여유 부리는 사진, 명품 로고가 찍힌 종이백을 들고 시크하게 걷는 컷들이 꾸준히 노출되자, 사람들은 이곳으로 속속 몰려들었다.

그러나 대중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놀라운 사실이 있었다. 평당 풀빵 몇 조각 값이었던 그 시절부터 황만복이 이 일대를 모두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 즉, 이 거리의 실질적인 주인은 황만복이란 것. 그리고 막대한 현금으로 지하 경제를 단단히 떠받치는 황만복은 손자가 딱 하나 있었는데, 그 이름이 황진헌이라는 것이다.

“금송아 씨?”

인터폰으로 직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안녕하세요.”

매장 뒤편 출입구. 덩굴 식물이 구불구불 휘감은 문양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황급히 답했다. 철창 너머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이 삐, 하며 둔탁하게 열렸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송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침의 그 직원과는 유니폼도 분위기도 다르다. 물론, 이 남자도 꽤 잘생겼지만 그보다 경직되었고, 생기도 자신감도 없어 보인다.

“이쪽입니다.”

으리으리한 실내로 들어서자, 갑자기 긴장으로 어깨가 빳빳해졌다.

아침에 만났던 그는 쉽게 VVIP 손님으로 예약해 주겠다고 했지만, 사실 이곳은 마음을 먹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서면 되는 보통의 숍이 아니다.

1층 일반 매장에 들르는 것만도 예약을 하고 약속 시간을 지켜야만 서비스를 받는다. 반지 한두 개 골라 보자고 들어서기에는 문턱이 턱없이 높고, 게다가 그걸 구매하기까지는 가격이 정말 만만치 않다.

직원은 카드키를 대고 전용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아무래도 업종의 특성이 있는 만큼 보안이 철저합니다.”

세련된 매너로 긴장을 풀어 주는 직원에게 그녀도 의례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이까짓 것! 안 쫄아.

사무실은 볼펜 굴러떨어지는 소리라도 들릴 만큼 고요했다. 가는 데마다 카펫이 꼼꼼히 깔렸고, 차가운 유리 칸막이 안으론 바둑판같은 부스가 도열해 있었다. 외부의 기다란 복도를 지나자 강 비서가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금송아 씨.”

“늘 전화로만 인사드렸었는데, 이렇게 만나 뵙기는 처음이네요. 반갑습니다. 그동안 많이 귀찮게 해 드렸지요?”

미안한 마음 반, 반가운 마음 반으로 인사했다. 그러나 강 비서는 왠지 쌀쌀하게 답했다.

“네, 반갑습니다. 이쪽입니다.”

괜히 더 긴장이 되었다. 늘 싹싹했고, 농담도 자주 했는데.

송아는 용기를 내어 그의 방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곧 눈살을 찌푸렸다. 검고 흐릿한 황진헌의 음영 뒤로 햇빛이 강렬하다. 그를 둘러싼 배경이 눈부신 것처럼.

재빨리 눈을 돌렸다. 눈은 빛에 천천히 익숙해져 갔다. 그의 위치에 비해 사무실은 오히려 소박하다. 개인용 집기들과 책장을 메운 방대한 원서들. 책상이 넓은데도 뭔가가 가득하다. 책과 서류들 그리고 융 재질의 두꺼운 천. 그 위엔 값비싸 보이는 주얼리 샘플들이 있었다.

“암 쏘리, 어…… 미안합니다. 잠깐, 앉아요.”

인사할 기회를 이미 놓쳤다. 그는 급하게 사과하고 다시 빠르게 영어로 전환했다. 그러곤 통화를 마무리했다. 송아는 귀를 쫑긋 세웠다. 방문객을 의식한 듯 몸을 일으키며 말이 속사포처럼 빨라졌다.

『안 돼. 그렇더라도 그건 손대지 맙시다. 알아요. 유연하게. 원가 절감 좋지.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돼. 이건 내 철학입니다. 손님 왔습니다. 다시 메일로 제출해요. 안녕.』

중요한 단어들을 it이나 that으로 지시해서 정확히 알아들을 순 없었다. 그렇더라도 취재에 뭐라도 도움이 좀 될까 싶어 바싹 집중하고 있을 때 아주 낯익은 오싹함이 모든 생각을 날렸다.

“저, 저기!”

그는 통화를 마치자마자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미안합니다. 그리고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금송아 씨!”

출근할 때 보았던, 그 잘생긴 매장 직원이 능글능글 웃고 있었다.

“어, 어떻게…….”

그는 자랑이라도 하듯 여유 있게 책상 위를 가리켰다. 여러 잡지의 과월 호들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다.

“난 잡지도 자주 봐요. 이렇게 포스트잇으로 표시해 주는 내 광고와 보석 기사들만.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다른 페이지를 봤어요.”

펼쳐진 면은 그녀의 눈에도 익숙한 지난 호 실무진들의 소개 페이지였다. 몇몇 시니어에디터 이름에 그리스 펜으로 붉은 줄이 북북 그어져 있었다. 그리고 맨 끝 에디터 금송아의 이름엔 빨간 동그라미.

“마침, 우리 직원 하나가 밖을 내다보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쪽을 좀 빨리 찾았습니다. 정영실 과장이라고. 참 불편한 우연이죠?”

노골적으로 놀려 먹는 말투다.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을 맞은 느낌. 망했다!

“정말 여러 번 찾아왔다던데. 많이 궁금했습니까, 나 일하는 데가. 어때요, 그냥 사무실이죠?”

입술을 지근지근 깨물었다. 발딱 일어나 집으로 가고 싶다. 내가 왜 아침부터 그런 경거망동을……. 아, 출근길부터 재수 없게 왜 쇼윈도를 들여다보고 그랬을까!

“금송아 씨, 정말 굉장한 사람입니다. 하루 종일 그쪽 생각을 무척 많이 했습니다. 아아주 열이 받도록 궁금해서?”

침만 꼴깍 삼키고 있을 때 ‘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그의 비서가 들어왔다.

“차 준비할까요?”

“아뇨, 데이트하러 나갈 겁니다.”

그는 경쾌하게 답하며 왼손 약지에 낀 반지를 다른 손으로 톡톡, 가리켰다. 강 비서는 “아, 네.” 하며 납작하고 커다란 케이스를 들고 들어왔다.

열린 케이스 안에는 아주 많은 반지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는 그 안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 넣었다.

“거봐, 불편할 거라고 했잖아. 디자인팀에 수정하라고…….”

그리고 그 뒷말들은 한국말임에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아! 난 몰라, 테스트용 샘플이었어!

강 비서가 나가자 그는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매력적으로 웃어 보이며 슬쩍 윙크했다.

“자, 이번엔 결혼반지 뺐으니, 제대로 잘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