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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그에게 다가오는 여자들이라고 해봐야 원하는 것이 많기에 이렇듯 대놓고 강한 성격을 드러내진 않을 터였다. 그의 비위를 건드렸다간 뭐 하나라도 얻어갈 수 없을 테니 얌전한 척 속내를 감추는 게 다반사였다. 그러니 여자는 그에게 더 이상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라 줘도줘도 만족을 모르는 귀찮은 존재들일 뿐이었다.
“쁘리벳(러시아 말로 ‘안녕’), 미샤(미하일의 애칭)?”
야나는 자신이 건넨 러시아 인사말에 그의 얼굴에 의문이 가득 뜨는 걸 보곤 피식 웃었다. 어릴 때 헤어진 이후로 이렇듯 가까이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라 가슴이 이상스레 요동쳤다. 신문에서 그를 보는 것과 실제로 보는 건 천지차이였다.
늘씬한 근육질의 체격에 새까만 머리카락과 무자비해 보이는 검은 눈은 위협적일 만큼 강인해 보였다. 흠잡을 데 없는 검은 정장과 눈부신 화이트 셔츠는 그를 어떻게 하면 돋보이게 하는지 잘 알고 있는 듯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한 마리의 맹수처럼 사나운 모습에 가슴을 고동치게 하는 묘한 남성적인 매력이 느껴졌다. 아주 살벌하게 카리스마를 팍팍 풍기는 남자였다.
‘못 알아보는 게 당연한 일일 테지만 그래도 서운한데?’
그녀의 기억으로 그와 만난 지 17년 만이었다. 자신이나 그나 세월을 비껴갈 수 없는 것이 당연한데도 어른이 되어 있는 것 자체가 참으로 신기했다. 그런데 저 남자, 너무 많이 변했잖아? 스케이트를 타도 될 만큼 꽁꽁 언 표정이라니.
가끔 엄마가 그녀의 어릴 적 이야기를 할 때면 등장하곤 하던 레퍼토리가 있었다. 양쪽 어머니가 아는 지인의 결혼식에서 그녀가 나중에 크면 그의 신부가 되겠다고 떼를 썼다고 한다. 그녀가 기억하는 그는 짧은 단편들밖에 없었지만 나쁘진 않았다.
그녀가 넘어지려고 하면 잡아 주던 일이라든가, 음식을 흘리면 냅킨을 건네주던 일이라든가, 그녀가 우는 일이 있으면 그만의 방식으로 정수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다던가 하는 일등이 떠오르곤 했다. 특히 헤어지기 직전 정원에서 넘어졌을 때 안아 주었던 일이 기억에 깊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녀의 기억의 잔재에 남아 있던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자기를 낳아 준 어머니를 가차 없이 상처 입히고, 차가운 어투로 비아냥거리는 그는 처음 보는 남자처럼 생소하기만 했다.
“누군데 날 미샤라고 부르지?”
미샤라고 부르는 사람은 어릴 때 아는 사람들 이외에는 전혀 없었다. 어머니가 떠나고 난 뒤 아버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미샤라는 이름을 없애는 거였다. 그에게도 미샤라는 이름은 어머니를 생각나게 해서 아버지 의견에 동조했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여자가 자신을 미샤라고 부른다. 어머니와 살던 시절 그를 미샤라고 부르던 유일한 여자아이가 있긴 있었는데, 혹시?
“야(러시아 말로 ‘나’)? 말칙(러시아 말로 ‘꼬맹이’)”
“꼬맹이?”
꼬맹이란 단어에 미샤는 그녀를 노골적인 시선으로 관찰했다. 그의 시선에 담담히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그녀의 무덤덤한 눈빛에 익숙지 않은 감각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풋, 기억이 난다. 그의 신경을 건드리는 눈동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이미 성장해 버린 그녀는 낯설지 몰라도 웃음소리만은 그의 가슴에 흔적이 있으니 기억해낼 수 있었다.
순간 미샤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상처가 된 추억이 그를 괴롭혔다. 어머니와 함께 보낸 마지막 생일 이후로 그녀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 해에 참 많은 사건이 있었던 것 같다.
“기억 안 나?”
“꼬맹이라면 야나(러시아 말로 ‘신의 선물’이라는 뜻의 이름)?”
“오호, 내 이름을 아직까지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
그가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고 부르자 조금 전 몰라 봤던 건 싹 잊었다. 미샤가 이름을 알아듣든 말든 무슨 상관이라고 이렇게 신경을 쓰지?
“날 귀찮게 하는 여자아이는 네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거든.”
“하긴 나도 따라다닌 남자는 미샤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잘 기억하고 있었는데.”
‘여전히 톡 쏘네.’
미샤는 꼬맹이였던 여자아이 야나의 지지 않으려는 당당한 대답에 입가의 근육이 꿈틀거렸다. 어릴 때에도 그가 누구건 간에 제 할 말은 다 하는 여자아이이긴 했었는데, 지금은 그만큼 성장했다고 꽤나 여유 있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도 같았다.
‘예쁘게 성장했네.’
눈앞에 보이는 야나를 더 이상 옛날의 그 여자아이로 볼 수는 없을 듯했다. 귀여웠던 외모는 여성스런 선이 두드러질 만큼 성장했고, 장난기 가득했던 시선은 진지하다 못해 성숙한 눈빛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어머니를 잡고 있으면서도 그에게 당당하게 맞서는 태도엔 그를 둘러싸던 여자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야나는 알까? 그녀의 시선이 그가 가지고 있는 줄도 몰랐던 수컷 본연의 욕구를 충동질 하고 있다는 걸. 위험하다. 그의 기억 속에 좋은 이미지로 남아 있던 야나가 자신의 무언가를 건드린다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라 피해야만 했다. 아니, 거부해야만 했다.
미샤는 자신의 생소한 반응이 못마땅해 거만한 입매를 딱딱하게 굳히곤 평소의 습관이 만들어내곤 하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야나를 보고 있으니 어릴 적 행복했던 시절이 더 떠올라 가슴을 칼로 후비는 듯 고통스러워졌다.
“러시아엔 언제 왔어?”
“2년이 다 되어가지.”
“2년?”
“오랜만에 보니 더 반갑지?”
야나는 그가 경계심을 살짝 푸는 듯해 제대로 인사라도 나누려고 가까이 한발 내디뎠다. 오호, 그런데 이 남자 보란 듯이 한발 뒤로 물러난다.
“글쎄?”
“그렇다고 피할 건 뭐야?”
그의 거부에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주변 사람들이 실실 웃어댔다. 짜증보다는 창피함이 더 강한 이 상황으로 몰아넣은 주범을 본 야나는 이맛살을 일그러뜨렸다. 그의 표정이 심각했던 것이다. 무엇을 참기라도 하는 것처럼 턱에 굵은 힘줄이 사선으로 불거져 나오고 눈동자는 건조하기가 금방 불이라도 붙을 것 같았다.
“우리가 반갑게 인사를 나눌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잖아?”
“인사를 나누는데 친하고 안 친하고를 꼭 따져야겠어?”
“난 그래.”
“와, 정말 인사 한 번 하자는데 엄청 비싸게 군다.”
그동안 그의 소식은 신문에서 또는 올가에게 듣기는 했지만 막상 눈앞에서 보고 겪으니 아주 딴판이라 놀랍기만 했다. 성격대로 은근슬쩍 밀어붙이려던 야나는 마른 벌판처럼 생명력 없는 미샤의 눈빛을 보고는 잠시 주춤거렸다.
“어릴 때처럼 징징거리면서 떼라도 쓰면 허그해 주던 시절은 갔으니 기대 않는 게 좋아.”
“쳇……까칠하기는. 관둬라 관둬. 허그는 무슨. 나도 굳이 하기 싫다는 사람하고는 안 하니까 염려 붙들어 매시지? 근데 너무 변했단 생각 안 들어?”
“사람은 누구나 다 변해.”
미샤는 야나의 투덜거림에 그녀의 짧은 머리를 헝클어트리고 싶은 유혹이 샘솟자 당황해 우거지상을 썼다. 그녀의 웃음소리에 행복할 것 같은 시간이 되돌아온 것처럼 그에게 미치는 영향이 커지는 느낌에 미간을 좁혔다. 그저 어린 시절의 추억일 뿐인데 왜 그녀에게 호기심이 생기지?
꼬맹이에게 호기심이? 미친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17년 만에 본 꼬맹이 야나를 여자로 인식하다니.
“나처럼 좋게 변했어야지 말을 안 하지. 어머니에게 상처나 주는 바보 멍청이가 되었잖아.”
“누구보고 바보 멍청이래?”
“내 눈에는 그렇게 보여.”
“뭘 모르면 가만이나 있지. 어디서 갑자기 나타나 쓸데없는 소리를 함부로 지껄여?”
“미샤?”
야나는 어둡게 눈을 빛내며 쏘아붙이는 그의 뚫어 버릴 듯 강렬한 눈빛을 마주하고 선 자신이 모르는 일이 있음을 감지했다. 엄마에게 올가의 소식을 들었을 땐 어린 나이였으니 그냥 스쳐 지나갔었는데, 지금 미샤의 얼굴을 보니 상처를 받았구나 싶었다.
그래서 저렇게 삐뚤어진 걸까?
신문의 기사에 그가 무자비하고 냉혹하다고 했어도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으니 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의 그의 표정에 스민 상처를 보자 위장이 조여들어 거북했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노에 미풍 같은 한숨처럼 조심히 이름을 불렀다.
“미하일.”
“무슨 말이야?”
조금 전 올가에게 미하일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으면서도 야나는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그의 이름이니 원하는 대로 불러 줘야 하는 것이 당연한 거지만 아무리 그래도 미하일보다는 미샤가 더 낫다.
“미하일이라고 부르라고.”
“싫어.”
“……!”
순수했던 어린 시절을 함께 공유하고 있어서일까, 평소였다면 경호원을 시켜 벌써 끌어냈을 텐데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뭘 믿고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고 자신을 향해 싱글벙글 웃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두려운 눈빛 한 점 없는 야나의 행동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따름이었다. 무모한 건 어릴 때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난 미하일 빅토르비치 보예보츠키라고 부를 생각 전혀 없으니까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그렇게 영 못마땅하면 내가 한국 사람이라 긴 러시아 이름을 부르기가 힘들다고 이해해도 되고.”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하는 소리야?”
“안 믿으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지만 야나는 그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지 않은 심술이 가슴에서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의 말대로 러시아 말은 그녀에게 한국말처럼이나 익숙한 언어였다. 어릴 때부터 한국과 러시아를 오갔으니 힘들다는 말은 거짓말일 수밖에. 그런데 그는 알까? 어린 시절, 그녀만이 그를 미샤라고 부를 수 있게 해줘서 무척 기분이 좋았다는 것을.
“제 마음대로 하는 건 여전하네.”
“미샤만큼은 아닐걸?”
“한마디도 안 지는 것도 여전하네.”
“그랬나?”
“이젠 능청까지?”
“그렇게 빡빡하게 굴면 안 힘들어? 어차피 한 번 살다가 갈 인생 편하게 살아야지 뭘 그렇게 힘들게 살아. 어깨에 그렇게 잔뜩 힘주고 있으면 안 아파? 힘 좀 빼. 아이쿠, 그만 좀 노려보지?”
비꼬는 티가 역력한 그의 말에 여유 있게 대답한 야나는 그들을 조심스럽게 관찰하는 올가와 보베가의 시선을 느끼곤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엄마에게 대충 들어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어렴풋이 알고는 있지만 올가와 미샤 사이가 이렇게 심각할 줄 예상치 못했었다.
“장난은 그만.”
야나의 시선이 올가와 보베가에게 향하자 미샤의 입가에 냉혹한 조소가 쓰게 어렸다. 옆에 야나가 있으면 상황이 꼬인다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다. 지금이 17년 전과 똑같은 상황인 줄 아는가. 17년 동안 버텨온 시간을 알기나 하고 끼어드는지. 가슴에 묻어두었던 상념들이 일제히 깨어나 상처를 극도로 자극한다.
“미샤…….”
“네가 낄 자리 아니야.”
“글쎄, 아주머닌 내 대모니까 내 일이기도 한 것 같은데?”
올가는 야나의 엄마와는 대학 동창으로 그녀에게는 대모이기도 했다. 한국에 있을 때도 생일이나 졸업 때면 직접 참석하진 못해도 매번 선물을 챙겨 주고는 해서 인연을 이어오고 있었다.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 말라고 했지?”
“쓸데없는 소리라니까 하고 싶은 얘기, 마저 해야겠네.”
당장에라도 삼킬 듯 노려보고 있는 미샤의 두 눈에 어린 아픔을 보자 야나는 두려움을 잊었다. 그가 어떻게 변했든, 상황이 어떻게 변했든 그녀의 마음은 그를 믿기 때문이었다.
“하지 마.”
“미샤와 아주머니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든지 간에 나중에 후회할 말 같은 건 하지 마. 무슨 일이 있었던 아주머닌 미샤를 낳아 준 분이시잖아.”
“입 다물어.”
자그마한 야나가 그의 협박에도 눈 하나 깜빡거리지 않고 할 말 다하자 미샤의 이마에 빗금이 그려졌다. 남자조차 그의 눈빛과 차가운 명령엔 말을 삼키고 침묵을 지키는데, 이 꼬맹이는 도대체 뭔가. 화를 내야 하는데 작은 입술을 오므렸다가 펴며 오물조물 말하는 야나의 입술 움직임만 눈에 들어왔다.
“아주머니 떠시는 거 안 보여?”
“입 다물라고 했지.”
“미샤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
“네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여?”
“그래도 미샤……아야.”
“입 다물라고 몇 번을 말해?”
그가 여러 번 경고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야나가 조잘조잘 쉴 새 없이 떠들자 팔을 움켜쥐고는 확 잡아당겼다. 그의 행동에 순식간에 주변에 깊은 정적이 감돌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들이 집중되었다. 미샤는 낮게 으르렁대며 소스라치게 놀란 눈을 치켜뜬 야나를 살벌하게 노려봤다. 그의 손에 전해지는 야나의 따뜻한 체온에 더 짜증스러워졌다.
그에게 다가오는 여자들이라고 해봐야 원하는 것이 많기에 이렇듯 대놓고 강한 성격을 드러내진 않을 터였다. 그의 비위를 건드렸다간 뭐 하나라도 얻어갈 수 없을 테니 얌전한 척 속내를 감추는 게 다반사였다. 그러니 여자는 그에게 더 이상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라 줘도줘도 만족을 모르는 귀찮은 존재들일 뿐이었다.
“쁘리벳(러시아 말로 ‘안녕’), 미샤(미하일의 애칭)?”
야나는 자신이 건넨 러시아 인사말에 그의 얼굴에 의문이 가득 뜨는 걸 보곤 피식 웃었다. 어릴 때 헤어진 이후로 이렇듯 가까이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라 가슴이 이상스레 요동쳤다. 신문에서 그를 보는 것과 실제로 보는 건 천지차이였다.
늘씬한 근육질의 체격에 새까만 머리카락과 무자비해 보이는 검은 눈은 위협적일 만큼 강인해 보였다. 흠잡을 데 없는 검은 정장과 눈부신 화이트 셔츠는 그를 어떻게 하면 돋보이게 하는지 잘 알고 있는 듯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한 마리의 맹수처럼 사나운 모습에 가슴을 고동치게 하는 묘한 남성적인 매력이 느껴졌다. 아주 살벌하게 카리스마를 팍팍 풍기는 남자였다.
‘못 알아보는 게 당연한 일일 테지만 그래도 서운한데?’
그녀의 기억으로 그와 만난 지 17년 만이었다. 자신이나 그나 세월을 비껴갈 수 없는 것이 당연한데도 어른이 되어 있는 것 자체가 참으로 신기했다. 그런데 저 남자, 너무 많이 변했잖아? 스케이트를 타도 될 만큼 꽁꽁 언 표정이라니.
가끔 엄마가 그녀의 어릴 적 이야기를 할 때면 등장하곤 하던 레퍼토리가 있었다. 양쪽 어머니가 아는 지인의 결혼식에서 그녀가 나중에 크면 그의 신부가 되겠다고 떼를 썼다고 한다. 그녀가 기억하는 그는 짧은 단편들밖에 없었지만 나쁘진 않았다.
그녀가 넘어지려고 하면 잡아 주던 일이라든가, 음식을 흘리면 냅킨을 건네주던 일이라든가, 그녀가 우는 일이 있으면 그만의 방식으로 정수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다던가 하는 일등이 떠오르곤 했다. 특히 헤어지기 직전 정원에서 넘어졌을 때 안아 주었던 일이 기억에 깊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녀의 기억의 잔재에 남아 있던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자기를 낳아 준 어머니를 가차 없이 상처 입히고, 차가운 어투로 비아냥거리는 그는 처음 보는 남자처럼 생소하기만 했다.
“누군데 날 미샤라고 부르지?”
미샤라고 부르는 사람은 어릴 때 아는 사람들 이외에는 전혀 없었다. 어머니가 떠나고 난 뒤 아버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미샤라는 이름을 없애는 거였다. 그에게도 미샤라는 이름은 어머니를 생각나게 해서 아버지 의견에 동조했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여자가 자신을 미샤라고 부른다. 어머니와 살던 시절 그를 미샤라고 부르던 유일한 여자아이가 있긴 있었는데, 혹시?
“야(러시아 말로 ‘나’)? 말칙(러시아 말로 ‘꼬맹이’)”
“꼬맹이?”
꼬맹이란 단어에 미샤는 그녀를 노골적인 시선으로 관찰했다. 그의 시선에 담담히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그녀의 무덤덤한 눈빛에 익숙지 않은 감각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풋, 기억이 난다. 그의 신경을 건드리는 눈동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이미 성장해 버린 그녀는 낯설지 몰라도 웃음소리만은 그의 가슴에 흔적이 있으니 기억해낼 수 있었다.
순간 미샤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상처가 된 추억이 그를 괴롭혔다. 어머니와 함께 보낸 마지막 생일 이후로 그녀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 해에 참 많은 사건이 있었던 것 같다.
“기억 안 나?”
“꼬맹이라면 야나(러시아 말로 ‘신의 선물’이라는 뜻의 이름)?”
“오호, 내 이름을 아직까지 기억해 주다니 영광인데?”
그가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고 부르자 조금 전 몰라 봤던 건 싹 잊었다. 미샤가 이름을 알아듣든 말든 무슨 상관이라고 이렇게 신경을 쓰지?
“날 귀찮게 하는 여자아이는 네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거든.”
“하긴 나도 따라다닌 남자는 미샤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잘 기억하고 있었는데.”
‘여전히 톡 쏘네.’
미샤는 꼬맹이였던 여자아이 야나의 지지 않으려는 당당한 대답에 입가의 근육이 꿈틀거렸다. 어릴 때에도 그가 누구건 간에 제 할 말은 다 하는 여자아이이긴 했었는데, 지금은 그만큼 성장했다고 꽤나 여유 있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도 같았다.
‘예쁘게 성장했네.’
눈앞에 보이는 야나를 더 이상 옛날의 그 여자아이로 볼 수는 없을 듯했다. 귀여웠던 외모는 여성스런 선이 두드러질 만큼 성장했고, 장난기 가득했던 시선은 진지하다 못해 성숙한 눈빛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어머니를 잡고 있으면서도 그에게 당당하게 맞서는 태도엔 그를 둘러싸던 여자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야나는 알까? 그녀의 시선이 그가 가지고 있는 줄도 몰랐던 수컷 본연의 욕구를 충동질 하고 있다는 걸. 위험하다. 그의 기억 속에 좋은 이미지로 남아 있던 야나가 자신의 무언가를 건드린다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라 피해야만 했다. 아니, 거부해야만 했다.
미샤는 자신의 생소한 반응이 못마땅해 거만한 입매를 딱딱하게 굳히곤 평소의 습관이 만들어내곤 하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야나를 보고 있으니 어릴 적 행복했던 시절이 더 떠올라 가슴을 칼로 후비는 듯 고통스러워졌다.
“러시아엔 언제 왔어?”
“2년이 다 되어가지.”
“2년?”
“오랜만에 보니 더 반갑지?”
야나는 그가 경계심을 살짝 푸는 듯해 제대로 인사라도 나누려고 가까이 한발 내디뎠다. 오호, 그런데 이 남자 보란 듯이 한발 뒤로 물러난다.
“글쎄?”
“그렇다고 피할 건 뭐야?”
그의 거부에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주변 사람들이 실실 웃어댔다. 짜증보다는 창피함이 더 강한 이 상황으로 몰아넣은 주범을 본 야나는 이맛살을 일그러뜨렸다. 그의 표정이 심각했던 것이다. 무엇을 참기라도 하는 것처럼 턱에 굵은 힘줄이 사선으로 불거져 나오고 눈동자는 건조하기가 금방 불이라도 붙을 것 같았다.
“우리가 반갑게 인사를 나눌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잖아?”
“인사를 나누는데 친하고 안 친하고를 꼭 따져야겠어?”
“난 그래.”
“와, 정말 인사 한 번 하자는데 엄청 비싸게 군다.”
그동안 그의 소식은 신문에서 또는 올가에게 듣기는 했지만 막상 눈앞에서 보고 겪으니 아주 딴판이라 놀랍기만 했다. 성격대로 은근슬쩍 밀어붙이려던 야나는 마른 벌판처럼 생명력 없는 미샤의 눈빛을 보고는 잠시 주춤거렸다.
“어릴 때처럼 징징거리면서 떼라도 쓰면 허그해 주던 시절은 갔으니 기대 않는 게 좋아.”
“쳇……까칠하기는. 관둬라 관둬. 허그는 무슨. 나도 굳이 하기 싫다는 사람하고는 안 하니까 염려 붙들어 매시지? 근데 너무 변했단 생각 안 들어?”
“사람은 누구나 다 변해.”
미샤는 야나의 투덜거림에 그녀의 짧은 머리를 헝클어트리고 싶은 유혹이 샘솟자 당황해 우거지상을 썼다. 그녀의 웃음소리에 행복할 것 같은 시간이 되돌아온 것처럼 그에게 미치는 영향이 커지는 느낌에 미간을 좁혔다. 그저 어린 시절의 추억일 뿐인데 왜 그녀에게 호기심이 생기지?
꼬맹이에게 호기심이? 미친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17년 만에 본 꼬맹이 야나를 여자로 인식하다니.
“나처럼 좋게 변했어야지 말을 안 하지. 어머니에게 상처나 주는 바보 멍청이가 되었잖아.”
“누구보고 바보 멍청이래?”
“내 눈에는 그렇게 보여.”
“뭘 모르면 가만이나 있지. 어디서 갑자기 나타나 쓸데없는 소리를 함부로 지껄여?”
“미샤?”
야나는 어둡게 눈을 빛내며 쏘아붙이는 그의 뚫어 버릴 듯 강렬한 눈빛을 마주하고 선 자신이 모르는 일이 있음을 감지했다. 엄마에게 올가의 소식을 들었을 땐 어린 나이였으니 그냥 스쳐 지나갔었는데, 지금 미샤의 얼굴을 보니 상처를 받았구나 싶었다.
그래서 저렇게 삐뚤어진 걸까?
신문의 기사에 그가 무자비하고 냉혹하다고 했어도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으니 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의 그의 표정에 스민 상처를 보자 위장이 조여들어 거북했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노에 미풍 같은 한숨처럼 조심히 이름을 불렀다.
“미하일.”
“무슨 말이야?”
조금 전 올가에게 미하일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으면서도 야나는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그의 이름이니 원하는 대로 불러 줘야 하는 것이 당연한 거지만 아무리 그래도 미하일보다는 미샤가 더 낫다.
“미하일이라고 부르라고.”
“싫어.”
“……!”
순수했던 어린 시절을 함께 공유하고 있어서일까, 평소였다면 경호원을 시켜 벌써 끌어냈을 텐데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뭘 믿고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고 자신을 향해 싱글벙글 웃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두려운 눈빛 한 점 없는 야나의 행동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따름이었다. 무모한 건 어릴 때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난 미하일 빅토르비치 보예보츠키라고 부를 생각 전혀 없으니까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그렇게 영 못마땅하면 내가 한국 사람이라 긴 러시아 이름을 부르기가 힘들다고 이해해도 되고.”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하는 소리야?”
“안 믿으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지만 야나는 그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지 않은 심술이 가슴에서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의 말대로 러시아 말은 그녀에게 한국말처럼이나 익숙한 언어였다. 어릴 때부터 한국과 러시아를 오갔으니 힘들다는 말은 거짓말일 수밖에. 그런데 그는 알까? 어린 시절, 그녀만이 그를 미샤라고 부를 수 있게 해줘서 무척 기분이 좋았다는 것을.
“제 마음대로 하는 건 여전하네.”
“미샤만큼은 아닐걸?”
“한마디도 안 지는 것도 여전하네.”
“그랬나?”
“이젠 능청까지?”
“그렇게 빡빡하게 굴면 안 힘들어? 어차피 한 번 살다가 갈 인생 편하게 살아야지 뭘 그렇게 힘들게 살아. 어깨에 그렇게 잔뜩 힘주고 있으면 안 아파? 힘 좀 빼. 아이쿠, 그만 좀 노려보지?”
비꼬는 티가 역력한 그의 말에 여유 있게 대답한 야나는 그들을 조심스럽게 관찰하는 올가와 보베가의 시선을 느끼곤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엄마에게 대충 들어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어렴풋이 알고는 있지만 올가와 미샤 사이가 이렇게 심각할 줄 예상치 못했었다.
“장난은 그만.”
야나의 시선이 올가와 보베가에게 향하자 미샤의 입가에 냉혹한 조소가 쓰게 어렸다. 옆에 야나가 있으면 상황이 꼬인다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다. 지금이 17년 전과 똑같은 상황인 줄 아는가. 17년 동안 버텨온 시간을 알기나 하고 끼어드는지. 가슴에 묻어두었던 상념들이 일제히 깨어나 상처를 극도로 자극한다.
“미샤…….”
“네가 낄 자리 아니야.”
“글쎄, 아주머닌 내 대모니까 내 일이기도 한 것 같은데?”
올가는 야나의 엄마와는 대학 동창으로 그녀에게는 대모이기도 했다. 한국에 있을 때도 생일이나 졸업 때면 직접 참석하진 못해도 매번 선물을 챙겨 주고는 해서 인연을 이어오고 있었다.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지 말라고 했지?”
“쓸데없는 소리라니까 하고 싶은 얘기, 마저 해야겠네.”
당장에라도 삼킬 듯 노려보고 있는 미샤의 두 눈에 어린 아픔을 보자 야나는 두려움을 잊었다. 그가 어떻게 변했든, 상황이 어떻게 변했든 그녀의 마음은 그를 믿기 때문이었다.
“하지 마.”
“미샤와 아주머니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든지 간에 나중에 후회할 말 같은 건 하지 마. 무슨 일이 있었던 아주머닌 미샤를 낳아 준 분이시잖아.”
“입 다물어.”
자그마한 야나가 그의 협박에도 눈 하나 깜빡거리지 않고 할 말 다하자 미샤의 이마에 빗금이 그려졌다. 남자조차 그의 눈빛과 차가운 명령엔 말을 삼키고 침묵을 지키는데, 이 꼬맹이는 도대체 뭔가. 화를 내야 하는데 작은 입술을 오므렸다가 펴며 오물조물 말하는 야나의 입술 움직임만 눈에 들어왔다.
“아주머니 떠시는 거 안 보여?”
“입 다물라고 했지.”
“미샤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
“네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여?”
“그래도 미샤……아야.”
“입 다물라고 몇 번을 말해?”
그가 여러 번 경고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야나가 조잘조잘 쉴 새 없이 떠들자 팔을 움켜쥐고는 확 잡아당겼다. 그의 행동에 순식간에 주변에 깊은 정적이 감돌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들이 집중되었다. 미샤는 낮게 으르렁대며 소스라치게 놀란 눈을 치켜뜬 야나를 살벌하게 노려봤다. 그의 손에 전해지는 야나의 따뜻한 체온에 더 짜증스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