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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prologue
쿨럭쿨럭.
벌어진 문설주 틈으로 차가운 냉기가 스며들자, 간헐적으로 흘러나오는 기침 소리가 점점 심해졌다. 계속되는 가래 섞인 기침 소리가 혜원의 신경을 자극했다.
낡고 허름한 단칸방은 열여덟 살의 혜원과 그녀의 아버지가 사용하는 방이었다. 가구라고는 좌식 책상과 간이 옷장, 배가 불룩한 오래된 텔레비전 한 대가 전부였지만, 그마저도 세월과 함께 낡고 바래서 초라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야!”
희미한 스탠드 등에 의지하여 책을 읽던 혜원이 고개를 돌렸다. 온기조차 없는 차가운 방에서 이불을 돌돌 말고 누워 있던 그녀의 아버지가 부스럭대며 몸을 일으켰다.
“부엌에 가서 소주 남은 거 있으면 좀 가져와라.”
“소주가 어디 있어? 어젯밤에 다 마셨잖아.”
혜원의 앙칼진 대꾸에 그녀의 아버지 만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년 말투 좀 보게. 제 어미 딸 아니랄까 봐, 독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네.”
“술이 마시고 싶으면 돈을 주든가. 집에 쌀도 떨어졌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구걸하든, 옆집에서 꾸든 그건 알아서 하고 어쨌든 만들어서라도 가져와. 어서!”
늘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혜원은 당할 때마다 화가 치밀었다.
엄동설한, 한파가 몰려오는 날씨에 돈도 안 주면서 술을 사 오라는 아버지란 인간이 끔찍하게 싫었기 때문이다.
혜원이 숨을 쌕쌕 고르며 아버지를 노려보자, 험상궂은 얼굴의 만호가 제 옆에 놓인 플라스틱 재떨이를 집어서 혜원에게 던졌다.
담뱃재와 가래가 섞인 재떨이가 혜원의 어깨를 스쳐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그래도 분이 안 풀리는지, 그가 잡아 던질 것을 찾으며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눈 똑바로 안 떠! 어린 것이 벌써 아비를 무시하려 들어! 지금 병신이라고 무시하는 거야, 뭐야!”
덤빌 듯이 다리를 끌며 다가오는 제 아비의 모습에 놀란 혜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험한 말 뒤에 거친 폭력이 쏟아진다는 것을 이미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이, 쌍년! 거기 안 서!”
혜원이 창호지를 바른 미닫이를 재빠르게 열고 나왔다.
만호는 혜원이 나가는 동안에도 온갖 욕설에 잡히는 대로 무언가를 집어 던졌지만, 정작 그는 혜원을 따라 나오지 못했다. 오래전 사고로 다리를 잃어서 거동이 쉽지 않은 까닭이다.
*
비탈진 산동네는 새로운 아파트가 들어선 아랫동네보다 겨울이 더 빨리 찾아들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매서운 바람이 혜원의 얇은 티셔츠로 스며들어 왔다.
어두운 골목길에 몸을 잔뜩 웅크리고 앉았지만, 살을 에는 날씨에 이가 딱딱 부딪치고 전신이 바들바들 떨려 왔다.
집으로 들어가면 아버지에게 흠씬 얻어맞을 테고, 이대로 있으면 금방이라도 얼어 죽을 것 같았다. 추위 피할 곳을 이리저리 궁리해 보니, 그나마 떠오르는 곳이 한 군데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혜원이 골목길을 빠져나와 모퉁이를 돌았다.
낡은 판자 지붕에 꽂힌 붉은 깃발을 보니 늘 그렇듯이 주저하며 망설여졌다. 하지만 온몸을 때리는 세찬 바람이 그녀의 등을 거칠게 떠밀었다.
삐거덕대는 대문을 열고 마당 안으로 들어서자, 댓돌 앞에 웅크리고 있던 누렁이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늙어서 눈곱이 잔뜩 낀 개가 자신만큼이나 처량해 보였다.
혜원이 툇마루에 오르며 누군가를 불렀다.
“보살님. 안에 계세요?”
부스럭대는 기척과 함께 여닫이문이 열리자, 혜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한 올도 남김없이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 올린 쪽 찐 머리와 성성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혜원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어색한 기분에 혜원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아이, 추워. 뭐 하고 계셨어요?”
방 안에 들어선 혜원이 안을 휘휘 둘러보았다. 강한 향냄새와 온갖 기이한 그림이 붙여진 방은 만신인 화옥이 법당으로 사용하는 방이었다.
온기가 도는 방으로 들어왔지만, 아직도 오한이 들린 것처럼 몸이 오싹오싹 떨려 왔다. 추위 때문인지, 묘한 향냄새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이런 날씨에 또 쫓겨 온 게야? 하여튼 짐승이 인두겁을 쓰고 나왔나, 아비란 놈이, 참.”
혀를 끌끌 차던 화옥이 다시 말을 이었다.
“밥은 먹었고?”
혜원이 부끄러움도 잊고 고개를 저었다. 학교에서 주는 점심이 그녀의 하루 식사량의 전부였다. 한창 커 가는 나이에 늘 허기가 져서 지내다 보니 이제는 염치조차 없어졌다. 아르바이트라도 하고 싶지만, 공부 욕심이 많아서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대학을 갈 때까지는 버텨야 했다.
밖으로 나간 화옥이 무언가를 주섬주섬 챙겨 왔다.
“어서 먹어라.”
굿하고 남은 음식인지, 쟁반에는 떡과 수육과 과일이 수북하게 담겨 있었다. 쟁반을 받아 든 혜원이 먹음직스럽게 음식을 먹었다. 그런 혜원을 화옥이 뚫어질 듯이 바라보았다. 한참을 바라보던 그녀가 방구석에 놓인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내 온갖 사람 다 만나 보았지만, 너처럼 음기가 강한 계집아이는 처음이다.”
늘 이상한 말을 늘어놓는 화옥은 사실 허름한 산동네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명문 대학을 나와서 결혼까지 했지만, 30대 후반에 신병이 와서 내림굿을 받고 무당이 되었다고 한다.
전국을 이리저리 떠돌다가 쉰이 가까워진 나이에 외진 산동네에 숨어들었지만,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화려한 차림새의 사람들이 그녀를 만나기 위해 여기저기에서 찾아왔다.
나라 굿까지 하는 큰무당으로, 용하기로 소문이 났지만, 혜원에게는 그저 가까운 이웃일 뿐이었다.
멀뚱하게 쳐다보는 혜원을 위아래로 훑던 화옥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아직은 어리지만, 사내놈 여럿 잡게 생겼다는 뜻이야. 부모 복을 타고났으면, 좋은 남자를 만나 평생 사랑받고 살았을 텐데, 부모 복이 없으니 앞으로 어찌 될는지 알 수 없지. 팔자가 좋게 풀리면 괜찮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말을 흐리던 화옥이 담배 연기를 훅 하고 뿜어냈다.
아직 덜 여문 몸이지만, 열여덟 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성숙한 몸에 화옥의 시선이 저절로 따라갔다.
치켜뜬 눈꼬리와 선이 고운 콧대, 오물거리는 윤곽이 뚜렷한 입술에는 붉은 기운이 선연하다. 갸름한 턱선을 지나 유난히 가는 목이 둥근 어깨로 이어졌다.
얇은 티셔츠를 뚫고 나올 듯이 탄력 있게 솟은 젖가슴 사이로 선명한 가슴골이 보였다. 가느다란 허리와 부드럽게 벌어진 골반이 어린 소녀의 것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팔자도 팔자지만, 관상이나 몸상만으로도 단번에 아이의 운명이 꿰뚫어졌다.
“혜원아.”
화옥의 부름에 혜원이 고개를 들었다.
“지금 사는 게 어떠냐? 만족스럽니?”
느닷없는 질문에 혜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끼니도 잇지 못하는 삶이 만족스러울 리 없었다. 가래 섞인 기침과 술 냄새가 진동하는 냉기가 도는 방이 떠오르자, 혜원은 우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또래 친구들은 지금 이 시각이면 훈기가 도는 집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조금의 의심도 없이 행복한 미래를 꿈꾸고 있을 것이다. 가혹한 매질과 추위와 배고픔을 그들이 알 리 없었다.
“만족스러울 리 없잖아요. 어서 빨리 시간이 가서 이곳을 벗어났으면 좋겠어요.”
“착각하지 마라. 단지 몸만 커질 뿐, 시간이 가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이대로 계속 지옥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요?”
“아니. 나쁜 팔자라면, 그것을 뒤집으면 되지. 너는 생기가 강한 아이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단다.”
수수께끼 같은 말에 혜원이 화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번뜩이는 눈동자가 등골이 오싹할 만큼 요기로웠다. 매끄러운 피부와 선이 뚜렷한 이목구비가 입고 있는 붉은 적삼과 어우러져 쉰이라는 나이를 무색하게 했다.
난봉꾼으로 소문난 혜원의 아버지조차 화옥 앞에서는 늙은 누렁이처럼 잔뜩 꼬리를 내리며 눈치를 살피고는 했다.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다니, 벗어나게 해 주랴? 위험한 모험이지만 네가 원한다면 기꺼이 도와주겠다.”
“어떻게요?”
“혹시 윗방아기라고 들어 봤니?”
혜원이 고개를 저었다.
“기력이 쇠한 노인의 회춘을 위해 어린 소녀를 동침시켰던 풍습이 있었지. 지금도 암암리에 그런 일이 벌어지고는 있지만…….”
“그럼 저보고 윗방아기가 되란 말씀이세요?”
혜원의 말에 화옥이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럴 리가. 너 같은 아이를 늙은이의 노리개로 줄 수는 없지.”
“…….”
“이렇게 외진 산동네에서 나고 자란, 네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세상이 있다. 최고의 자리에서 최상의 것을 누리는 진짜배기들이지. 하지만 그들조차 하늘의 이치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단다.”
열여덟 살의 혜원이 알아듣기 힘든 말이었지만, 그래도 애써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2년 전, 아주 유명한 기업의 젊은 후계자가 사고로 의식을 잃었다. 좋다는 온갖 치료를 다 해 보았지만, 아직도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 있지. 생기를 불어넣어 줄 상대를 찾고 있기에 내가 알아보겠다고 대답했단다.”
“…….”
“혜원아. 위험하지만, 해 볼 만한 도박이 아니니? 인생을 저당 잡혀야 하지만, 그가 깨어나기만 한다면 한순간에 팔자를 뒤집을 수 있다 이거야. 어떠냐? 네가 해 보겠다면 내가 도와주마.”
“어떻게요?”
“그가 깨어난다면, 당연히 안방을 내놓아야지. 어차피 아쉬운 쪽은 그쪽이니, 순순히 허락할 거다.”
“하지만 생기를 불어넣는다는 게, 어떤 거죠?”
혜원이 이맛살을 찌푸리자, 화옥이 안심하라는 듯이 웃었다.
“깨어 있는 사람 대하듯이 하면 된단다. 이야기도 해 주고 곁에서 밥도 먹고 함께 잠자리에 들면 되지. 굳은 몸을 정성껏 마사지하고 닦는 일도 마다치 않아야 해. 하지만 따로 돌보는 간호인이 있으니 그다지 힘든 일은 아닐 거야.”
“그럼 학교는 다닐 수 있나요?”
“당연하지. 그가 깨어날 때를 학수고대하고 있으니, 너를 허투루 대하지는 않을 거다. 재력 있는 집안이라 네가 공부하겠다면 사람도 붙여 줄 거야. 대학은 물론 평생 아쉬움 없이 지낼 테니, 아무런 걱정하지 말아라.”
꿈만 같은 이야기였다. 낯선 사람, 그것도 의식이 없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곁에서 밥을 먹는다. 게다가 모르는 남자 곁에서 잠이 들고 몸까지 씻겨야 한다.
두려운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지금 상황에 비하면 오히려 꿈만 같은 이야기였다. 배불리 먹고 따뜻한 방에서 마음껏 공부할 수 있다. 대학도 가고 돈 걱정 없이, 아쉬움 없이 살 수 있다.
“당장 결정할 필요는 없으니,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렴.”
“아니요. 지금 당장 결정할래요. 보살님 말대로 하고 싶어요.”
혜원의 당돌한 대답에 화옥이 씁쓸하게 웃었다.
세상 물정을 모르지만, 혜원은 똑똑하고 당찬 아이였다. 정한그룹의 안주인이 누추한 이곳까지 찾아와서 그런 은밀한 부탁을 했을 때, 화옥은 처음부터 열여덟 살의 혜원을 떠올렸다.
사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자신만큼이나 기구한 팔자를 지닌 어린 혜원이 가여웠다. 아직은 모든 것이 불확실했다. 그런데도 굳이 혜원을 떠올린 이유는 아이를 큰물에 보내고 싶은 까닭이었다.
사람의 눈을 단숨에 홀리는 아이였다. 타고난 음기와 색기, 그리고 탐욕스럽고 독한 구석까지 있었다. 천운만 따라 준다면, 정한그룹의 안주인 정도는 충분히 꿈꿀 수 있었다.
“알았다. 내 따로 연락하마.”
혜원의 모양 좋은 입술이 환하게 올라갔다. 도화와 화개살이 겹친 색기가 강한 미소에 화옥이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prologue
쿨럭쿨럭.
벌어진 문설주 틈으로 차가운 냉기가 스며들자, 간헐적으로 흘러나오는 기침 소리가 점점 심해졌다. 계속되는 가래 섞인 기침 소리가 혜원의 신경을 자극했다.
낡고 허름한 단칸방은 열여덟 살의 혜원과 그녀의 아버지가 사용하는 방이었다. 가구라고는 좌식 책상과 간이 옷장, 배가 불룩한 오래된 텔레비전 한 대가 전부였지만, 그마저도 세월과 함께 낡고 바래서 초라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야!”
희미한 스탠드 등에 의지하여 책을 읽던 혜원이 고개를 돌렸다. 온기조차 없는 차가운 방에서 이불을 돌돌 말고 누워 있던 그녀의 아버지가 부스럭대며 몸을 일으켰다.
“부엌에 가서 소주 남은 거 있으면 좀 가져와라.”
“소주가 어디 있어? 어젯밤에 다 마셨잖아.”
혜원의 앙칼진 대꾸에 그녀의 아버지 만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년 말투 좀 보게. 제 어미 딸 아니랄까 봐, 독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네.”
“술이 마시고 싶으면 돈을 주든가. 집에 쌀도 떨어졌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구걸하든, 옆집에서 꾸든 그건 알아서 하고 어쨌든 만들어서라도 가져와. 어서!”
늘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혜원은 당할 때마다 화가 치밀었다.
엄동설한, 한파가 몰려오는 날씨에 돈도 안 주면서 술을 사 오라는 아버지란 인간이 끔찍하게 싫었기 때문이다.
혜원이 숨을 쌕쌕 고르며 아버지를 노려보자, 험상궂은 얼굴의 만호가 제 옆에 놓인 플라스틱 재떨이를 집어서 혜원에게 던졌다.
담뱃재와 가래가 섞인 재떨이가 혜원의 어깨를 스쳐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그래도 분이 안 풀리는지, 그가 잡아 던질 것을 찾으며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눈 똑바로 안 떠! 어린 것이 벌써 아비를 무시하려 들어! 지금 병신이라고 무시하는 거야, 뭐야!”
덤빌 듯이 다리를 끌며 다가오는 제 아비의 모습에 놀란 혜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험한 말 뒤에 거친 폭력이 쏟아진다는 것을 이미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이, 쌍년! 거기 안 서!”
혜원이 창호지를 바른 미닫이를 재빠르게 열고 나왔다.
만호는 혜원이 나가는 동안에도 온갖 욕설에 잡히는 대로 무언가를 집어 던졌지만, 정작 그는 혜원을 따라 나오지 못했다. 오래전 사고로 다리를 잃어서 거동이 쉽지 않은 까닭이다.
*
비탈진 산동네는 새로운 아파트가 들어선 아랫동네보다 겨울이 더 빨리 찾아들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매서운 바람이 혜원의 얇은 티셔츠로 스며들어 왔다.
어두운 골목길에 몸을 잔뜩 웅크리고 앉았지만, 살을 에는 날씨에 이가 딱딱 부딪치고 전신이 바들바들 떨려 왔다.
집으로 들어가면 아버지에게 흠씬 얻어맞을 테고, 이대로 있으면 금방이라도 얼어 죽을 것 같았다. 추위 피할 곳을 이리저리 궁리해 보니, 그나마 떠오르는 곳이 한 군데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혜원이 골목길을 빠져나와 모퉁이를 돌았다.
낡은 판자 지붕에 꽂힌 붉은 깃발을 보니 늘 그렇듯이 주저하며 망설여졌다. 하지만 온몸을 때리는 세찬 바람이 그녀의 등을 거칠게 떠밀었다.
삐거덕대는 대문을 열고 마당 안으로 들어서자, 댓돌 앞에 웅크리고 있던 누렁이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늙어서 눈곱이 잔뜩 낀 개가 자신만큼이나 처량해 보였다.
혜원이 툇마루에 오르며 누군가를 불렀다.
“보살님. 안에 계세요?”
부스럭대는 기척과 함께 여닫이문이 열리자, 혜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한 올도 남김없이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 올린 쪽 찐 머리와 성성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혜원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어색한 기분에 혜원이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아이, 추워. 뭐 하고 계셨어요?”
방 안에 들어선 혜원이 안을 휘휘 둘러보았다. 강한 향냄새와 온갖 기이한 그림이 붙여진 방은 만신인 화옥이 법당으로 사용하는 방이었다.
온기가 도는 방으로 들어왔지만, 아직도 오한이 들린 것처럼 몸이 오싹오싹 떨려 왔다. 추위 때문인지, 묘한 향냄새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이런 날씨에 또 쫓겨 온 게야? 하여튼 짐승이 인두겁을 쓰고 나왔나, 아비란 놈이, 참.”
혀를 끌끌 차던 화옥이 다시 말을 이었다.
“밥은 먹었고?”
혜원이 부끄러움도 잊고 고개를 저었다. 학교에서 주는 점심이 그녀의 하루 식사량의 전부였다. 한창 커 가는 나이에 늘 허기가 져서 지내다 보니 이제는 염치조차 없어졌다. 아르바이트라도 하고 싶지만, 공부 욕심이 많아서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대학을 갈 때까지는 버텨야 했다.
밖으로 나간 화옥이 무언가를 주섬주섬 챙겨 왔다.
“어서 먹어라.”
굿하고 남은 음식인지, 쟁반에는 떡과 수육과 과일이 수북하게 담겨 있었다. 쟁반을 받아 든 혜원이 먹음직스럽게 음식을 먹었다. 그런 혜원을 화옥이 뚫어질 듯이 바라보았다. 한참을 바라보던 그녀가 방구석에 놓인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내 온갖 사람 다 만나 보았지만, 너처럼 음기가 강한 계집아이는 처음이다.”
늘 이상한 말을 늘어놓는 화옥은 사실 허름한 산동네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명문 대학을 나와서 결혼까지 했지만, 30대 후반에 신병이 와서 내림굿을 받고 무당이 되었다고 한다.
전국을 이리저리 떠돌다가 쉰이 가까워진 나이에 외진 산동네에 숨어들었지만,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화려한 차림새의 사람들이 그녀를 만나기 위해 여기저기에서 찾아왔다.
나라 굿까지 하는 큰무당으로, 용하기로 소문이 났지만, 혜원에게는 그저 가까운 이웃일 뿐이었다.
멀뚱하게 쳐다보는 혜원을 위아래로 훑던 화옥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아직은 어리지만, 사내놈 여럿 잡게 생겼다는 뜻이야. 부모 복을 타고났으면, 좋은 남자를 만나 평생 사랑받고 살았을 텐데, 부모 복이 없으니 앞으로 어찌 될는지 알 수 없지. 팔자가 좋게 풀리면 괜찮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말을 흐리던 화옥이 담배 연기를 훅 하고 뿜어냈다.
아직 덜 여문 몸이지만, 열여덟 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성숙한 몸에 화옥의 시선이 저절로 따라갔다.
치켜뜬 눈꼬리와 선이 고운 콧대, 오물거리는 윤곽이 뚜렷한 입술에는 붉은 기운이 선연하다. 갸름한 턱선을 지나 유난히 가는 목이 둥근 어깨로 이어졌다.
얇은 티셔츠를 뚫고 나올 듯이 탄력 있게 솟은 젖가슴 사이로 선명한 가슴골이 보였다. 가느다란 허리와 부드럽게 벌어진 골반이 어린 소녀의 것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팔자도 팔자지만, 관상이나 몸상만으로도 단번에 아이의 운명이 꿰뚫어졌다.
“혜원아.”
화옥의 부름에 혜원이 고개를 들었다.
“지금 사는 게 어떠냐? 만족스럽니?”
느닷없는 질문에 혜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끼니도 잇지 못하는 삶이 만족스러울 리 없었다. 가래 섞인 기침과 술 냄새가 진동하는 냉기가 도는 방이 떠오르자, 혜원은 우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또래 친구들은 지금 이 시각이면 훈기가 도는 집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조금의 의심도 없이 행복한 미래를 꿈꾸고 있을 것이다. 가혹한 매질과 추위와 배고픔을 그들이 알 리 없었다.
“만족스러울 리 없잖아요. 어서 빨리 시간이 가서 이곳을 벗어났으면 좋겠어요.”
“착각하지 마라. 단지 몸만 커질 뿐, 시간이 가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이대로 계속 지옥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요?”
“아니. 나쁜 팔자라면, 그것을 뒤집으면 되지. 너는 생기가 강한 아이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단다.”
수수께끼 같은 말에 혜원이 화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번뜩이는 눈동자가 등골이 오싹할 만큼 요기로웠다. 매끄러운 피부와 선이 뚜렷한 이목구비가 입고 있는 붉은 적삼과 어우러져 쉰이라는 나이를 무색하게 했다.
난봉꾼으로 소문난 혜원의 아버지조차 화옥 앞에서는 늙은 누렁이처럼 잔뜩 꼬리를 내리며 눈치를 살피고는 했다.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다니, 벗어나게 해 주랴? 위험한 모험이지만 네가 원한다면 기꺼이 도와주겠다.”
“어떻게요?”
“혹시 윗방아기라고 들어 봤니?”
혜원이 고개를 저었다.
“기력이 쇠한 노인의 회춘을 위해 어린 소녀를 동침시켰던 풍습이 있었지. 지금도 암암리에 그런 일이 벌어지고는 있지만…….”
“그럼 저보고 윗방아기가 되란 말씀이세요?”
혜원의 말에 화옥이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럴 리가. 너 같은 아이를 늙은이의 노리개로 줄 수는 없지.”
“…….”
“이렇게 외진 산동네에서 나고 자란, 네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세상이 있다. 최고의 자리에서 최상의 것을 누리는 진짜배기들이지. 하지만 그들조차 하늘의 이치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단다.”
열여덟 살의 혜원이 알아듣기 힘든 말이었지만, 그래도 애써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2년 전, 아주 유명한 기업의 젊은 후계자가 사고로 의식을 잃었다. 좋다는 온갖 치료를 다 해 보았지만, 아직도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 있지. 생기를 불어넣어 줄 상대를 찾고 있기에 내가 알아보겠다고 대답했단다.”
“…….”
“혜원아. 위험하지만, 해 볼 만한 도박이 아니니? 인생을 저당 잡혀야 하지만, 그가 깨어나기만 한다면 한순간에 팔자를 뒤집을 수 있다 이거야. 어떠냐? 네가 해 보겠다면 내가 도와주마.”
“어떻게요?”
“그가 깨어난다면, 당연히 안방을 내놓아야지. 어차피 아쉬운 쪽은 그쪽이니, 순순히 허락할 거다.”
“하지만 생기를 불어넣는다는 게, 어떤 거죠?”
혜원이 이맛살을 찌푸리자, 화옥이 안심하라는 듯이 웃었다.
“깨어 있는 사람 대하듯이 하면 된단다. 이야기도 해 주고 곁에서 밥도 먹고 함께 잠자리에 들면 되지. 굳은 몸을 정성껏 마사지하고 닦는 일도 마다치 않아야 해. 하지만 따로 돌보는 간호인이 있으니 그다지 힘든 일은 아닐 거야.”
“그럼 학교는 다닐 수 있나요?”
“당연하지. 그가 깨어날 때를 학수고대하고 있으니, 너를 허투루 대하지는 않을 거다. 재력 있는 집안이라 네가 공부하겠다면 사람도 붙여 줄 거야. 대학은 물론 평생 아쉬움 없이 지낼 테니, 아무런 걱정하지 말아라.”
꿈만 같은 이야기였다. 낯선 사람, 그것도 의식이 없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곁에서 밥을 먹는다. 게다가 모르는 남자 곁에서 잠이 들고 몸까지 씻겨야 한다.
두려운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지금 상황에 비하면 오히려 꿈만 같은 이야기였다. 배불리 먹고 따뜻한 방에서 마음껏 공부할 수 있다. 대학도 가고 돈 걱정 없이, 아쉬움 없이 살 수 있다.
“당장 결정할 필요는 없으니,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렴.”
“아니요. 지금 당장 결정할래요. 보살님 말대로 하고 싶어요.”
혜원의 당돌한 대답에 화옥이 씁쓸하게 웃었다.
세상 물정을 모르지만, 혜원은 똑똑하고 당찬 아이였다. 정한그룹의 안주인이 누추한 이곳까지 찾아와서 그런 은밀한 부탁을 했을 때, 화옥은 처음부터 열여덟 살의 혜원을 떠올렸다.
사심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자신만큼이나 기구한 팔자를 지닌 어린 혜원이 가여웠다. 아직은 모든 것이 불확실했다. 그런데도 굳이 혜원을 떠올린 이유는 아이를 큰물에 보내고 싶은 까닭이었다.
사람의 눈을 단숨에 홀리는 아이였다. 타고난 음기와 색기, 그리고 탐욕스럽고 독한 구석까지 있었다. 천운만 따라 준다면, 정한그룹의 안주인 정도는 충분히 꿈꿀 수 있었다.
“알았다. 내 따로 연락하마.”
혜원의 모양 좋은 입술이 환하게 올라갔다. 도화와 화개살이 겹친 색기가 강한 미소에 화옥이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