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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탁.
그가 태블릿을 소리가 나도록 책상에 내려놓고는 그제야 시선을 들었다. 팔짱을 낀 후 기술팀장을 향해 ‘가 보세요.’라고 말했다. 인사를 한 기술팀장이 나가자 그는 자연스럽게 신희와 눈을 맞추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그가 꽤 신중하게 자신의 표정을 살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서 고개를 조금 든다면 영락없이 그와 눈길이 엮일 터라 신희의 부동자세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내려갑시다.”
그는 매우 끈질기게 식사를 권했으며 신희도 매우 끈질기게 거절했다.
“전 괜찮습니다.”
“그럼 나 혼자 먹을 테니 함께 있기만 해요. 점심부터 굶었더니 아사 직전인데, 혼자 밥 먹는 게 싫어서.”
그대가 윈(Win).
얼떨결에 시선을 든 신희는 부자연스럽게 웃었다. 더는 거절하지 않는 것으로 긍정의 대답을 한 거였지만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한다니, 먹지 않아도 체기가 올라올 듯했다.
마음을 맞춘 듯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식당으로 내려가는 동안, 걷어 둔 셔츠의 소매 아래 푸른 힘줄이 드러난 팔뚝이 유난히 시선을 잡았다.
여의도 사옥 홍보팀에서 함께 근무했던 난희가, 남자의 매력은 힘줄이 툭 불거진 팔뚝에서 나온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새삼 그 말이 떠올라 난감했다. 시선 둘 곳을 이리저리 찾다가 겨우 정면을 향했다. 그러나 거기엔 팔뚝의 힘줄보다 더 사나운 광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말갛게 닦인 거울 속에서 꼼짝없이 그와 시선이 엉켰기 때문이다.
그는 아까부터 거울을 통해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던 듯 미동이 없었다. 고요한 회오리가 거울로부터 몰아치는 느낌이었다. 그 회오리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신희는 부단히 노력을 해야 했다. 예컨대, 그의 앞에서 절대 주눅 들지 않는 것 말이다.
“여의도에서 어쩌다 이리로 발령을 받은 겁니까.”
지하 직원 식당 앞에 두 사람을 토해 낸 엘리베이터는 곧장 위로 올라갔다. 그의 반보 뒤를 걸으면서, 그가 하는 말을 놓치지 않으려 신희는 내내 귀를 쫑긋 세웠다.
“저도 애매하지만 아마도 능력을 인정받아서가 아닐까요?”
“후훗.”
홍보 3팀에서 본부장 비서로 옮겨 간다는 건, 바다 위 요트에서 유유히 여가를 즐기다 갑자기 파충류가 우글대는 정글에 뚝 떨어지는 것과도 같았다. 하지만 견디지 못하는 사람에겐 절대 주어지지 않는 기회라는 걸 알았다. 홍보 3팀 팀장이 건넨 위로의 말도 사실 부러움에 다름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내심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는데, ‘후훗’이라는 그의 웃음소리가 귀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비웃는 건가? 왜? 하루 종일 예민해 있던 탓에 신희는 사소한 그의 말과 음성 하나에도 신경이 바짝 쓰였다.
저녁 메뉴는 서너 가지가 있었는데 그는 한식을 택했다. 잡곡밥과 시금치된장국, 그리고 나물과 생선구이로 이루어진 7첩 반상이다. 플라스틱 식판에 반찬을 하나하나 담아 가던 그가 돌연 고개를 돌리고 그녀의 빈손을 쳐다봤다.
“정말 안 먹을 거예요?”
“네. 본부장님. 신기하게 허기가 느껴지지 않네요.”
“흠. 이거야말로 난감하네. 사람을 앞에 두고 혼자 밥을 먹어야 한다니.”
“그럼 전 이만 돌아갈까요?”
“무슨 소리.”
그의 눈썹 사이가 꿈틀대는 게 보였다.
귀여우셔라.
자신도 모르게 긴장이 풀어졌는지 입속으로 삼켜진 실없는 한마디에 신희는 등허리를 곧추세웠다. 혀끝으로 입술을 축이고 있으니 완성된 식판을 들고 그가 걸음을 옮겼다. 야근을 위해 남은 직원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짓거나 혹은 혼자 앉아 있는 테이블들을 지나쳤다.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은 영모를 따라 신희도 맞은편에 앉았다.
“집이 어딥니까.”
된장국에 밥 한 그릇을 몽땅 말던 그가 시선을 흘깃 들고 물었다. 올 것이 왔노라고, 신희는 생각했다. 인사과에 접속하여 여기저기 뒤져 보면 그녀의 이력서쯤은 쉽게 찾을 수 있겠지만, 마땅히 주고받을 말이 없는 이런 자리에서 각별하게 필요한 사항이긴 했다.
“신림동이요.”
“꽤 멀군.”
“네. 출퇴근 시간이 괴로울 것 같긴 합니다.”
“그런 사람을 잡아 두었으니 얼마나 짜증스러웠을까.”
“아뇨. 아닙니다, 본부장님. 사실은 이미 늦어서 상관없습니다. 차라리 좀 더 늦게 나가면 지하철 타는 게 수월해요.”
“그런가?”
이름을 알 수 없는 초록색 나물무침 한 젓가락을 집어 먹고는 오물오물 씹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인정받은 능력이 어떤 종류의 것이죠?”
“네?”
“인정받아서 이리로 발령받은 거라며.”
“아…….”
불쑥 던진 그의 질문은 대답하기 곤란한 종류였다. 어떤 종류로 인정을 받은 거냐니? 지금 뭐라는 거야. 아무래도 아까의 그 웃음소리는 비웃음이었던 게 틀림없는 듯했다.
“작년 연말에 저희 팀에서 사보를 제작했는데 제 기사가 반응이 좋았던 걸로 알아요. 그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입니다.”
“선우 인(人)과 술의 상관관계?”
“어떻게 아셨…….”
놀랍도록 큰 목소리가 신희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당황한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알았냐니. 그런 쓸데없는 질문을 왜 한 걸까. 그는 선우그룹 직원이고 사보를 보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인데. 머릿속에 차츰 질서가 잡히자 신희는 다소 얼떨떨해하며 재차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아무리 직원이라 해도 얼굴 보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바쁜 그가 감히 사보를 읽어 주셨다니 몸 둘 바를 다 모르겠다.
“읽었으니까 알죠. 중간중간 삽화처럼 들어간 신희 씨의 코멘트가 웃겨 기억하고 있었죠. 그래서 공석인 내 비서 자리에 신희 씨를 추천했어요. 하루에 한 번이라도 웃을 수 있을까, 해서.”
“아…….”
겨우 잡힌 질서가 다시 뒤죽박죽 헝클어졌다. 전혀 몰랐던 일이었고 그가 말하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모른 채 지냈을, 그런 일대 사건이었다. 그러니까 아까의 그 비웃음은 비웃음이 아니라 사건의 전후를 모두 간파하고 있는 그의 속내였던 것이고, 그의 비서가 된 건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말을 잃은 사람처럼 신희는 입술만 움찔거렸다. 두 눈에 아교를 붙인 것처럼 그에게 집요하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예기치 않게 튀어 오른 상황에 갖가지 감정이 들이쳤다. 당황스러움과 혼란, 그리고 수치심이 차례대로 이어졌다.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그녀에게, 영모의 온화한 미소가 닿았다.
“그러니까 긴장할 필요 없어요.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만 하면 됩니다.”
“…….”
“대답 안 합니까?”
“네……. 알겠습니다. 제가 제일…… 잘하는 겁니다.”
억지로 겨우 대답을 끌어냈고 그는 다시 식사에 열중했다. 억측일 수도 있고 오버센스일 수도 있지만 그의 말이 위로처럼 들렸다. 웅크린 어깨 좀 펴라고, 그렇게 애쓰지 말라고, 적당히 해도 된다고.
신기한 일이지만 그때부터 미친 듯이 허기가 밀려들었다. 그의 어깨 너머 벽에 붙은 동그란 시계가 유난히 크게 보였다.
7시 30분.
오늘 하루 중 가장 마음이 편한 순간이었다.
* * *
주말 아침은 청소로 시작되곤 했다. 8시쯤 눈을 떠 맨정신을 눈 밑에 담고도 30분 정도 뒤척인 후 좀비처럼 일어나 거실로 나온다. 등을 덮는 긴 머리를 한 갈래로 묶어 올린 후 가장 먼저 커피를 내려놓고 곧장 청소기를 집어 들었다. 주말이라 늦잠을 잘지도 모를 아래층 사람들을 위해 청소기 레버를 ‘하’에 고정시킨 후 일주일 동안 곳곳에 쌓인 먼지를 제거시켜 나갔다.
15평 남짓한 오피스텔은 단출했다. 작은 주방과 좁은 거실, 그리고 방 하나와 욕실로 이루어진 평범하기 짝이 없는 구조지만, 그녀가 파양당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 혼자 버티고 살아 내면서 겨우 마련한 단 하나의 재산이었다. 여전히 높은 대출 이자를 갚아 나가고는 있지만 말이다.
열린 베란다 창문 밖으로 상체를 내밀며 얇은 카펫을 두어 번 털어 냈다. 이어 쿠션 두 개를 터는데 어제와는 확연하게 다른 색깔의 하늘이 그제야 눈에 띄었다. 선명한 파란색. 그녀가 일에 지쳐 있을 동안에도 하늘은 제 소임을 다해 계절을 옮겨 가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이 제자리걸음이 민망하기까지 했다.
“이거지.”
신희는 짧게 감탄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근처 공원에 산책이라도 나가야 할 것 같았다. 고무장갑을 끼고 싱크대와 욕실까지 싹싹 닦아 내는 걸로 주말 청소 일과를 모두 끝낸 신희는 커피 잔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 리모컨을 챙겨 텔레비전을 켜고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 끝내 다시 껐다.
‘오늘 취소된 약속이 맞선이었다고.’
한 모금 홀짝거릴 때마다 어제저녁의 상황이 반복되었다. 반말인지 존대인지 애매한 말끝을 흐리면서 허탈하게 미소 짓던 영모가 자꾸만 떠올랐다. 정신없이 청소를 할 땐 자연스럽게 망각했던 일이 머리가 한가해지니 다시금 그녀를 괴롭혀 왔다.
“어쩌라구.”
생각보다 더 깊숙하게, 그가 자리한 것 같다. 파양당한 이후로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타인과 깊은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다. 친구든 그 어떤 대상이든, 마음을 준다는 건 곧 상처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제나 그녀를 배신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녀는 더는 배신을 이겨 낼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니 우정이든 사랑이든, 어떤 감정도 제 남은 인생에서 철저하게 배제시키리라 다짐했었다. 그게 신희의 생존 방식이었다. 양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곧장 파양 절차에 돌입한 양어머니는 모든 일이 끝난 후, 이렇게 말했다.
‘이제 널 볼 일이 없어 마음이 좀 편하구나.’
세 살부터 열아홉 살 때까지 딸이랍시고 데리고 있었던 양어머니란 사람이 그녀에게 내뱉은 말이었다. 신희를 너무도 아꼈던 양아버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어머니 역할을 해야만 했던 그 여자는 함께 사는 내내 차갑게 대했다. 어렸을 땐 무작정 무섭고 서운했지만 머리가 크고 세상을 어느 정도 알게 된 지금은, 일면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
그 여자가,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입양했다며 데리고 온 아이를 보는 심정은 어땠을까.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품에 툭 떨어진 아이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을까. 아직 엄마가 될 준비가 안 된 그 여자가 할 수 있는 건 뭐였을까. 남편이 부재할 때마다 피해 의식과 자학으로 똘똘 뭉쳐 아이를 냉소적으로 대한 여자는 입양한 딸이 마냥 ‘불편’했을 것이다.
정신적인 학대를 서슴지 않았던 그 여자가 이제 와서 얼마쯤 이해가 되고 있는 건, 신희 본인도 그 절차를 밟고 있기 때문이리라.
누구나 제 상처를 후벼 파이고 싶어 하진 않는다. 그래서 마음에 겹겹이 장막을 친다. 그 장막이 때로 상대방을 힘들게 만들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모든 사람은 이기적이니까. 그 여자도 그랬고, 이제 신희 자신도 그러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워지기는커녕 여전히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이었다.
그러니 짝사랑이든 그 어떤 감정이든, 자신을 소비하고 시간을 낭비해선 안 되었다. 이쯤에서 깨끗하게 털어 버리고 그의 성공적인 맞선과 결혼을 기원하는 게 더는 상처받지 않는 유일한 길이리라.
“하…….”
신희는 긴 한숨을 끝으로 식어 버린 커피를 모조리 마신 후 힘차게 일어났다. 샤워하기 전에 나가서 조깅이라도 하고 들어와야겠다는 생각으로 옷을 갈아입으려 하는데, 초인종 소리가 크게 울렸다. 무의식적으로 시계를 보았다.
9시 30분.
이 시간에 누구지? 주말 아침에 찾아올 이는 없는데. 흐리게 뜬 인터폰 화면을 집중하며 쳐다보던 신희는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세히 보니 대학의 같은 과 선배 윤경이었다. 얼마쯤 다급하고 난감해하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탁.
그가 태블릿을 소리가 나도록 책상에 내려놓고는 그제야 시선을 들었다. 팔짱을 낀 후 기술팀장을 향해 ‘가 보세요.’라고 말했다. 인사를 한 기술팀장이 나가자 그는 자연스럽게 신희와 눈을 맞추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그가 꽤 신중하게 자신의 표정을 살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서 고개를 조금 든다면 영락없이 그와 눈길이 엮일 터라 신희의 부동자세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내려갑시다.”
그는 매우 끈질기게 식사를 권했으며 신희도 매우 끈질기게 거절했다.
“전 괜찮습니다.”
“그럼 나 혼자 먹을 테니 함께 있기만 해요. 점심부터 굶었더니 아사 직전인데, 혼자 밥 먹는 게 싫어서.”
그대가 윈(Win).
얼떨결에 시선을 든 신희는 부자연스럽게 웃었다. 더는 거절하지 않는 것으로 긍정의 대답을 한 거였지만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한다니, 먹지 않아도 체기가 올라올 듯했다.
마음을 맞춘 듯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식당으로 내려가는 동안, 걷어 둔 셔츠의 소매 아래 푸른 힘줄이 드러난 팔뚝이 유난히 시선을 잡았다.
여의도 사옥 홍보팀에서 함께 근무했던 난희가, 남자의 매력은 힘줄이 툭 불거진 팔뚝에서 나온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새삼 그 말이 떠올라 난감했다. 시선 둘 곳을 이리저리 찾다가 겨우 정면을 향했다. 그러나 거기엔 팔뚝의 힘줄보다 더 사나운 광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말갛게 닦인 거울 속에서 꼼짝없이 그와 시선이 엉켰기 때문이다.
그는 아까부터 거울을 통해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던 듯 미동이 없었다. 고요한 회오리가 거울로부터 몰아치는 느낌이었다. 그 회오리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신희는 부단히 노력을 해야 했다. 예컨대, 그의 앞에서 절대 주눅 들지 않는 것 말이다.
“여의도에서 어쩌다 이리로 발령을 받은 겁니까.”
지하 직원 식당 앞에 두 사람을 토해 낸 엘리베이터는 곧장 위로 올라갔다. 그의 반보 뒤를 걸으면서, 그가 하는 말을 놓치지 않으려 신희는 내내 귀를 쫑긋 세웠다.
“저도 애매하지만 아마도 능력을 인정받아서가 아닐까요?”
“후훗.”
홍보 3팀에서 본부장 비서로 옮겨 간다는 건, 바다 위 요트에서 유유히 여가를 즐기다 갑자기 파충류가 우글대는 정글에 뚝 떨어지는 것과도 같았다. 하지만 견디지 못하는 사람에겐 절대 주어지지 않는 기회라는 걸 알았다. 홍보 3팀 팀장이 건넨 위로의 말도 사실 부러움에 다름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내심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는데, ‘후훗’이라는 그의 웃음소리가 귀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비웃는 건가? 왜? 하루 종일 예민해 있던 탓에 신희는 사소한 그의 말과 음성 하나에도 신경이 바짝 쓰였다.
저녁 메뉴는 서너 가지가 있었는데 그는 한식을 택했다. 잡곡밥과 시금치된장국, 그리고 나물과 생선구이로 이루어진 7첩 반상이다. 플라스틱 식판에 반찬을 하나하나 담아 가던 그가 돌연 고개를 돌리고 그녀의 빈손을 쳐다봤다.
“정말 안 먹을 거예요?”
“네. 본부장님. 신기하게 허기가 느껴지지 않네요.”
“흠. 이거야말로 난감하네. 사람을 앞에 두고 혼자 밥을 먹어야 한다니.”
“그럼 전 이만 돌아갈까요?”
“무슨 소리.”
그의 눈썹 사이가 꿈틀대는 게 보였다.
귀여우셔라.
자신도 모르게 긴장이 풀어졌는지 입속으로 삼켜진 실없는 한마디에 신희는 등허리를 곧추세웠다. 혀끝으로 입술을 축이고 있으니 완성된 식판을 들고 그가 걸음을 옮겼다. 야근을 위해 남은 직원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짓거나 혹은 혼자 앉아 있는 테이블들을 지나쳤다.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은 영모를 따라 신희도 맞은편에 앉았다.
“집이 어딥니까.”
된장국에 밥 한 그릇을 몽땅 말던 그가 시선을 흘깃 들고 물었다. 올 것이 왔노라고, 신희는 생각했다. 인사과에 접속하여 여기저기 뒤져 보면 그녀의 이력서쯤은 쉽게 찾을 수 있겠지만, 마땅히 주고받을 말이 없는 이런 자리에서 각별하게 필요한 사항이긴 했다.
“신림동이요.”
“꽤 멀군.”
“네. 출퇴근 시간이 괴로울 것 같긴 합니다.”
“그런 사람을 잡아 두었으니 얼마나 짜증스러웠을까.”
“아뇨. 아닙니다, 본부장님. 사실은 이미 늦어서 상관없습니다. 차라리 좀 더 늦게 나가면 지하철 타는 게 수월해요.”
“그런가?”
이름을 알 수 없는 초록색 나물무침 한 젓가락을 집어 먹고는 오물오물 씹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인정받은 능력이 어떤 종류의 것이죠?”
“네?”
“인정받아서 이리로 발령받은 거라며.”
“아…….”
불쑥 던진 그의 질문은 대답하기 곤란한 종류였다. 어떤 종류로 인정을 받은 거냐니? 지금 뭐라는 거야. 아무래도 아까의 그 웃음소리는 비웃음이었던 게 틀림없는 듯했다.
“작년 연말에 저희 팀에서 사보를 제작했는데 제 기사가 반응이 좋았던 걸로 알아요. 그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입니다.”
“선우 인(人)과 술의 상관관계?”
“어떻게 아셨…….”
놀랍도록 큰 목소리가 신희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당황한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알았냐니. 그런 쓸데없는 질문을 왜 한 걸까. 그는 선우그룹 직원이고 사보를 보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인데. 머릿속에 차츰 질서가 잡히자 신희는 다소 얼떨떨해하며 재차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아무리 직원이라 해도 얼굴 보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바쁜 그가 감히 사보를 읽어 주셨다니 몸 둘 바를 다 모르겠다.
“읽었으니까 알죠. 중간중간 삽화처럼 들어간 신희 씨의 코멘트가 웃겨 기억하고 있었죠. 그래서 공석인 내 비서 자리에 신희 씨를 추천했어요. 하루에 한 번이라도 웃을 수 있을까, 해서.”
“아…….”
겨우 잡힌 질서가 다시 뒤죽박죽 헝클어졌다. 전혀 몰랐던 일이었고 그가 말하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모른 채 지냈을, 그런 일대 사건이었다. 그러니까 아까의 그 비웃음은 비웃음이 아니라 사건의 전후를 모두 간파하고 있는 그의 속내였던 것이고, 그의 비서가 된 건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말을 잃은 사람처럼 신희는 입술만 움찔거렸다. 두 눈에 아교를 붙인 것처럼 그에게 집요하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예기치 않게 튀어 오른 상황에 갖가지 감정이 들이쳤다. 당황스러움과 혼란, 그리고 수치심이 차례대로 이어졌다.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그녀에게, 영모의 온화한 미소가 닿았다.
“그러니까 긴장할 필요 없어요.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만 하면 됩니다.”
“…….”
“대답 안 합니까?”
“네……. 알겠습니다. 제가 제일…… 잘하는 겁니다.”
억지로 겨우 대답을 끌어냈고 그는 다시 식사에 열중했다. 억측일 수도 있고 오버센스일 수도 있지만 그의 말이 위로처럼 들렸다. 웅크린 어깨 좀 펴라고, 그렇게 애쓰지 말라고, 적당히 해도 된다고.
신기한 일이지만 그때부터 미친 듯이 허기가 밀려들었다. 그의 어깨 너머 벽에 붙은 동그란 시계가 유난히 크게 보였다.
7시 30분.
오늘 하루 중 가장 마음이 편한 순간이었다.
* * *
주말 아침은 청소로 시작되곤 했다. 8시쯤 눈을 떠 맨정신을 눈 밑에 담고도 30분 정도 뒤척인 후 좀비처럼 일어나 거실로 나온다. 등을 덮는 긴 머리를 한 갈래로 묶어 올린 후 가장 먼저 커피를 내려놓고 곧장 청소기를 집어 들었다. 주말이라 늦잠을 잘지도 모를 아래층 사람들을 위해 청소기 레버를 ‘하’에 고정시킨 후 일주일 동안 곳곳에 쌓인 먼지를 제거시켜 나갔다.
15평 남짓한 오피스텔은 단출했다. 작은 주방과 좁은 거실, 그리고 방 하나와 욕실로 이루어진 평범하기 짝이 없는 구조지만, 그녀가 파양당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 혼자 버티고 살아 내면서 겨우 마련한 단 하나의 재산이었다. 여전히 높은 대출 이자를 갚아 나가고는 있지만 말이다.
열린 베란다 창문 밖으로 상체를 내밀며 얇은 카펫을 두어 번 털어 냈다. 이어 쿠션 두 개를 터는데 어제와는 확연하게 다른 색깔의 하늘이 그제야 눈에 띄었다. 선명한 파란색. 그녀가 일에 지쳐 있을 동안에도 하늘은 제 소임을 다해 계절을 옮겨 가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이 제자리걸음이 민망하기까지 했다.
“이거지.”
신희는 짧게 감탄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근처 공원에 산책이라도 나가야 할 것 같았다. 고무장갑을 끼고 싱크대와 욕실까지 싹싹 닦아 내는 걸로 주말 청소 일과를 모두 끝낸 신희는 커피 잔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 리모컨을 챙겨 텔레비전을 켜고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 끝내 다시 껐다.
‘오늘 취소된 약속이 맞선이었다고.’
한 모금 홀짝거릴 때마다 어제저녁의 상황이 반복되었다. 반말인지 존대인지 애매한 말끝을 흐리면서 허탈하게 미소 짓던 영모가 자꾸만 떠올랐다. 정신없이 청소를 할 땐 자연스럽게 망각했던 일이 머리가 한가해지니 다시금 그녀를 괴롭혀 왔다.
“어쩌라구.”
생각보다 더 깊숙하게, 그가 자리한 것 같다. 파양당한 이후로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타인과 깊은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다. 친구든 그 어떤 대상이든, 마음을 준다는 건 곧 상처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제나 그녀를 배신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녀는 더는 배신을 이겨 낼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니 우정이든 사랑이든, 어떤 감정도 제 남은 인생에서 철저하게 배제시키리라 다짐했었다. 그게 신희의 생존 방식이었다. 양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곧장 파양 절차에 돌입한 양어머니는 모든 일이 끝난 후, 이렇게 말했다.
‘이제 널 볼 일이 없어 마음이 좀 편하구나.’
세 살부터 열아홉 살 때까지 딸이랍시고 데리고 있었던 양어머니란 사람이 그녀에게 내뱉은 말이었다. 신희를 너무도 아꼈던 양아버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어머니 역할을 해야만 했던 그 여자는 함께 사는 내내 차갑게 대했다. 어렸을 땐 무작정 무섭고 서운했지만 머리가 크고 세상을 어느 정도 알게 된 지금은, 일면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
그 여자가,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입양했다며 데리고 온 아이를 보는 심정은 어땠을까.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품에 툭 떨어진 아이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을까. 아직 엄마가 될 준비가 안 된 그 여자가 할 수 있는 건 뭐였을까. 남편이 부재할 때마다 피해 의식과 자학으로 똘똘 뭉쳐 아이를 냉소적으로 대한 여자는 입양한 딸이 마냥 ‘불편’했을 것이다.
정신적인 학대를 서슴지 않았던 그 여자가 이제 와서 얼마쯤 이해가 되고 있는 건, 신희 본인도 그 절차를 밟고 있기 때문이리라.
누구나 제 상처를 후벼 파이고 싶어 하진 않는다. 그래서 마음에 겹겹이 장막을 친다. 그 장막이 때로 상대방을 힘들게 만들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모든 사람은 이기적이니까. 그 여자도 그랬고, 이제 신희 자신도 그러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워지기는커녕 여전히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이었다.
그러니 짝사랑이든 그 어떤 감정이든, 자신을 소비하고 시간을 낭비해선 안 되었다. 이쯤에서 깨끗하게 털어 버리고 그의 성공적인 맞선과 결혼을 기원하는 게 더는 상처받지 않는 유일한 길이리라.
“하…….”
신희는 긴 한숨을 끝으로 식어 버린 커피를 모조리 마신 후 힘차게 일어났다. 샤워하기 전에 나가서 조깅이라도 하고 들어와야겠다는 생각으로 옷을 갈아입으려 하는데, 초인종 소리가 크게 울렸다. 무의식적으로 시계를 보았다.
9시 30분.
이 시간에 누구지? 주말 아침에 찾아올 이는 없는데. 흐리게 뜬 인터폰 화면을 집중하며 쳐다보던 신희는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세히 보니 대학의 같은 과 선배 윤경이었다. 얼마쯤 다급하고 난감해하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