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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순진한 척하면서 나한테 뭔가 뜯어낼 생각이라면 오산이야.”

“이봐요, 꽃뱀이라뇨?”

“아니야? 근데 왜 꽃뱀처럼 굴지?”

다정은 볼을 타고 흐르던 눈물이 거꾸로 눈 속에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대충 눈물을 닦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불로 몸을 둘둘 말고 자신의 속옷이 어디 있는지 찾았다.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저기 있다.’

건우의 발치에 떨어져 있는 브래지어와 팬티를 발견하고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그것들을 주워 들었다.

‘발밑에 있으면서 주워 주지도 않는다니, 나쁜 새끼.’

다정은 속으로 그에게 온갖 욕을 퍼부었다. 그동안 건우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는 그대로 속옷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끔찍했다. 어깨를 살짝 가리는 웨이브 머리는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지고 화장은 번져 있었다. 이불을 치우고 바라본 젖가슴과 빗장뼈엔 어젯밤 이건우의 흔적이 거칠게 남아 있었다.

엉망인 몸 상태만큼이나 기분까지 끔찍해졌다. 어쩌자고 저런 놈과 하룻밤을 보냈나 싶었다. 알려진 성격대로 친절한 인물이라면 좋았을 텐데, 원 나이트 섹스를 했다는 충격보다 이건우의 말투가 더 충격이었다.

‘어떻게 만난 거지?’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그것만은 떠오르지 않았다. 술집에서 건우를 만난 것은 분명했다. 얼핏 ‘우와’ 하고 놀랐던 기억은 났다. 그런데 어떻게 그의 호텔 방까지 오게 됐을까. 어떻게 그와 섹스하게 됐을까. 어떻게 세 번이나 절정을 맞이했을까?

‘아, 좋았는데…….’

다시금 지난밤의 섹스를 떠올리자 다정의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 아래가 움찔거리며 지난밤을 다시 원하고 있었다.

‘미친…….’

그녀는 고개를 세게 내저었다. 꽃뱀 취급까지 받아 놓고 이런 생각이나 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그녀는 빠르게 속옷을 입고 욕실 문을 열고서 나갔다.

“아, 왜?”

건우는 침대에 앉아 누군가와 전화를 하고 있었다.

“그 작품 하기 싫다니까? 내 말이 그렇게 어려워? 싫어.”

그는 인상을 찡그리며 화를 냈다.

“여자 주인공을 바꾸라고 해. 걔 연기 더럽게 못하는 거 잘 알잖아. 개봉하고 나서 흥행 실패하면 내 명성에 오점이라고. ……근데? ……내가 어디 있든 무슨 상관이야. 내일 돌아갈 거야. 끊어.”

그는 그렇게 전화를 끊더니 침대 위로 휴대 전화를 내던졌다.

‘하, 그런 거였어? 소속사도 모르게 도망쳐 여행 온 거야?’

다정은 옷을 입으면서 혀를 끌끌 찼다.

“옷 입었으면 나가요.”

통화하는 사이 옷을 다 입은 다정을 보고 그가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 꽃뱀 아니에요.”

“알았으니까 나가라고요.”

그녀의 말에 흥미가 없다는 투로 그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절대 아니라고요. 당신은 어떨지 모르지만, 난 평소에 이런 짓 안 해요. 그러니 당신처럼 책임감 없는 사람한테 그런 취급 받을 사람 아니라고요.”

그녀는 다시금 힘을 줘 말하고 방문 손잡이를 돌렸다.

“아, 꽃뱀 아니라니까 하는 말인데.”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그녀 뒤에서 들려왔다.

“그럼 오늘도 나랑 섹스할래요?”

“미친놈.”

쾅―

다정은 세게 방문을 닫았다.

‘이게 다 지성화, 그 개새끼 때문이야.’

그녀는 전 남자 친구인 성화를 떠올리고 이를 악물었다.

사법 고시를 준비하는 5년간 그녀에게 빌붙어 살아 놓고서는 화이트데이에 다른 여자와 약혼을 했다면서 이별을 고한 놈이었다. 그놈과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고 섹스도 못 한 지 6개월에 접어들면서 어느 정도 눈치는 챘지만, 그래도 대형 법무법인에 들어가자마자 다른 여자 변호사와의 약혼이라니. 그 충격으로 머리를 식히기 위해 태국 끄라비섬으로 떠나온 여행이었다.

“지성화, 이 개새끼! 창자로 줄넘기를 뛰어도 시원찮을 새끼.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다정은 머리끝까지 차오른 분노에 못 이겨 큰 소리로 욕설과 저주를 내뿜었다. 하지만 그녀의 악몽은 이제 시작이나 다름없었다.





#1. 재회는 언제나 갑자기?



한 달 후 서울.

“진짜 잘생겼어, 그치?”

지혜의 감탄사에 다정은 노트북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두 살 터울 언니를 바라봤다.

“누가?”

“이건우 말이야. 저런 얼굴을 낳은 부모는 또 얼마나 잘났을까?”

지혜가 감탄사를 내뱉은 이유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이건우의 커피 광고 때문이었다. 화면 속 그는 햇빛이 들어오는 밝은 창가에 기대어 서서 창밖을 바라보며 찻잔을 들고 미소 지었다.



『언제나 부드러운 커피의 향기…….』



낮고 부드러운 그의 음색에 지혜는 텔레비전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몸을 앞으로 수그렸다.

“웩, 느끼해.”

다정은 텔레비전 화면에 눈길도 주지 않고 다시금 노트북 모니터로 시선을 떨구며 말했다. 지금 당장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노트북 화면에 떠 있는 한글 프로그램과 그 프로그램 속 활자였다. 먹고사는 것이 이 노트북에 달려 있었다.

머리를 질끈 올려 묶고 트레이닝 복장으로 차가운 마루에 주저앉아 키보드를 두드렸다. 역마살이 낀 사람처럼 하루가 멀다고 여행을 다니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그냥 밖으로 놀러 다니는 지혜가 웬일로 오늘은 온종일 다정과 함께 집에 있었다.

“너도 이건우 좋아하잖아?”

“내가? 난 저런 놈 안 좋아하거든?”

“웃기시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건우가 나온 드라마, 나랑 같이 꺅꺅거리면서 봐 놓고서.”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지혜가 다정의 옆구리를 발로 찌르며 말했다.

지혜의 말이 옳았다. 다정이 끄라비로 떠나기 전, 이건우가 주연으로 나온 드라마를 지혜와 함께 침을 흘리면서 몰입해 봤다. 그 완벽한 신체 조건으로 완벽한 남자 주인공을 연기하는 이건우를 싫어하는 여자가 있다면 비정상일 것이다. 그 비정상인 여자가 오늘은 다정이였다.

“건드리지 마라. 나, 이거 오늘 내로 써서 보내야 하거든?”

“그러게 애당초 너랑 어울리지도 않는 19금 연애 기고를 왜 시작한 거야? 매번 스트레스나 받으면서. 네가 ‘섹스 앤 더 시티’에 나오는 캐리냐?”

“캐리, 좋지. 지금 나는 그 캐리 브래드쇼가 아니라 공포 영화 주인공 캐리라서 문제지.”

“이 언니가 좋은 팁 좀 줄까?”

지혜가 흥미가 동한다는 듯 소파에 뉜 몸을 일으켜 앉으며 말했다.

“꺼져라.”

“언니한테 말하는 말본새하고는. 어? 또 이건우네? 쟤는 도대체 광고를 몇 개나 찍은 거야?”

지혜의 말에 다정의 눈이 잠시 텔레비전을 향했다. 이번에는 맥주 광고였다.

쌍까풀을 가리는 길고 짙은 속눈썹과 그 사이로 보이는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 오뚝한 콧날과 날카로운 턱 선. 강인함과 부드러움이 공존하는 완벽한 그의 얼굴이 번쩍이며 다정의 각막에 닿았다. 하얀 맥주 크림이 살짝 묻은 그의 입술과 힘차게 움직이는 그의 목울대를 보니 끄라비에서의 그 밤이 다시 떠올랐다.

“진짜 잘생겼다.”

남의 속도 모르고 지혜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저런 남자랑 하룻밤 보내면 얼마나 좋을까?”

“윽.”

다정은 인상을 찡그리며 몸을 떨었다.

“왜? 몸이 저렇게 좋은데 기술이 엄청날 것 같지 않아?”

‘현란하지. 아주 현란해.’

다정은 속으로 지혜의 질문에 답했다.

“아, 이건우랑 같이 살 여자는 이래저래 진짜 좋을 거야.”

“저런 놈이 실상은 엄청 싸가지 없고 바람둥이일 수도 있거든?”

듣다 못한 다정이 끼어들었다.

“얘는. 이건우 미담이 얼마나 도는지 몰라? 인격도 죽인대.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니까?”

“난 그런 거 하나도 안 믿어. 저 사람 직업이 뭔지 몰라? 연기자야, 연기자. 배우라고. 분명히 저 멀끔한 얼굴 뒤에 악마가 도사리고 있을 것이 분명해.”

“비관적인 년. 네 방 들어가서 안 써지는 19금 기사나 써.”

“흥, 안 그래도 들어가려고 했네요.”

지혜의 타박을 뒤로하고 다정은 노트북을 챙겨 들고 자신의 방으로 도망치듯 들어왔다.

이건우를 팬으로서 좋아했던 게 불과 한 달 전이었다. 하지만 끄라비에서의 밤 이후로 그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는 밤을 선사한 그를 지금은 몹시 싫어했다.

“나쁜 새끼. 네 본성이 언젠가는 밝혀질 거다.”

아직도 그에게 당했던 꽃뱀 취급이 분한 다정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타자하는 손가락에도 힘이 가득 실렸다.



* * *



“내일 있을 인터뷰 잘해라. 말실수하지 말고.”

박수고 대표는 건우에게 일부러 하지 않아도 될 말을 꺼냈다.

“내가 언제 일과 관련해서 실수한 적 있던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소파에 기대 있는 건우가 답했다. 기다란 다리를 주체하지 못해 꼬아 앉았다. 188센티미터라는 키가 배우로서는 최적의 조건이 되었지만, 일상생활에선 불편할 때가 많았다.

특히 이렇게 모든 물건이 하얀 대표실에 있을 때는 더 그렇다. 발을 조금만 잘못 놀리면 하얀 테이블과 소파에 신발 자국이 남았다. 박 대표에게 또 잔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 그는 조심스레 다리를 바꿔 꼬았다.

“아마 이번 영화 여자 주인공 잘린 이야기도 물을 거야. 잘 대답해.”

“그러니까 내가 언제 그런 거로 실수한 적 있었냐고.”

“사람은 실수하는 법이니까. 그리고 이거.”

박 대표는 건우를 향해 잡지 한 권을 던졌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되는 두툼한 두께의 잡지였다. 한창 잘나가는 여배우가 뇌쇄적인 포즈로 표지를 장식했다.

“이게 뭐야?”

“내일 인터뷰할 잡지사 지난 호. 그냥 읽어 두라고. 다른 연예인들한테 어떤 식의 질문이 나갔는지도 대충 살펴보고, 사진 콘셉트도 생각해 보고. 뭐, 그쪽에서 어련히 잘해 주겠냐마는.”

건우는 소파에 널브러진 잡지를 들어 한 장 한 장 넘겨 보았다.

“뭐, 그냥 매우 흔한 여성 패션…… 어?”

대충 흘려 보던 그는 어느 한 기사에서 멈칫했다.

‘오르가슴을 부르는 체위’라는 19금 빨간 딱지가 떡하니 달릴 만한 제목의 기사였다. 한데 그 제목보다 더 그의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은 그 기사를 쓴 기자의 이름이었다.

“왜 그래?”

갑작스러운 건우의 반응에 이상한 낌새를 느낀 박 대표가 물었다.

“어? 아니야, 아무것도. 근데 이 잡지사 성인 잡지야? 내용이 꽤 야한데?”

“뭐, 세계적으로 유명한 잡지야. 너도 알면서 그래?”

“가끔 인터뷰나 하고 행사에 참석만 했지 이런 노골적인 내용도 실리는지 몰랐는데? 여자들도 이런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가 봐?”

“도대체 뭔데 그래?”

잡지를 다시 빼앗으려는 박 대표의 손을 피해 건우는 그것을 자기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다시 한번 방금 눈길을 사로잡았던 기자의 이름을 바라봤다.

‘안다정, 안다정이란 말이지?’

그의 눈이 재미난 예능 프로그램을 막 발견한 것처럼 호기심으로 빛났다.



‘안다정이에요.’



어깨에 살짝 걸린 갈색 머리카락이 굵게 물결치던 그녀였다.



‘내 이름이요, 안다정이라고요.’



술을 굉장히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던 여자. 멋대로 시선을 끌어 놓고 마음이 통하는 대화를 나눠 놓고 다음 날 모든 것을 잊어버린 여자. 그녀의 갈색 눈동자와 도톰했던 입술의 촉감이 떠올랐다.

“나 부탁이 있는데.”

“뭐?”

“내일 나랑 인터뷰한다는 기자 말이야.”

“응.”

“다른 사람으로 바꿔 줘.”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있지. 잘 아는 사람.”

건우는 박 대표를 보며 씩 하고 밝게 웃었다. 지루하기만 하던 그의 삶에 다시금 재미있는 상황이 발생했다.



* * *



따르르르릉.

가까이서 들려오는 휴대 전화 벨소리에 다정은 인상을 찡그리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지난 며칠간 날밤 새우며 쓴 원고를 새벽에 간신히 잡지사에 보내고 잠들었다. 마감 시간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다. 체감상 잠든 지 몇 시간이 안 지났을 터였다. 기껏해야 아침 10시 정도 됐으리라.

‘아, 끊겼다. 스팸이겠지. 분명 스팸일 거야.’

벨소리가 끊기자 다정은 스팸 전화였기를 간절히 바라며 다시금 꿈나라행 채비를 했다.

‘연인들이 말하는 맛있는 섹스’가 새벽에 보낸 원고의 주제였다. 설문한 것을 정리하고 글 쓰는 데 몰입한 결과, 꿈속조차 19금으로 야했다. 막 꿈속에서 멋진 남자의 애무를 받는 찰나였는데, 끊긴 상황이 몹시 아쉬웠다. 물론 그 남자가 이건우는 절대 아니었다.

따르르르릉.

“아, 좀!”

벨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하자 그녀는 짜증이 치솟았다. 일어날 생각은 없었다. 작은 두 평짜리 방에 손만 뻗으면 닿을 책상 위의 휴대 전화를 살펴볼 생각도 없었다. 지금은 다른 무엇보다 잠이 필요했다.

하지만 벌컥 하고 방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와 다정의 등을 손으로 짝― 내리쳤다.

“아!”

“일어나, 이 계집애야! 시끄러워 죽겠다, 벨소리.”

다정은 언니 지혜가 날린 등짝 스매싱에 어쩔 수 없이 눈을 떴다.

“잠 좀 자자, 잠 좀.”

“누가 할 소리. 그러니까 전화를 받든지, 전원을 끄든지 좀 해.”

“아우우우!”

“아, 발신자가 이 팀장이네?”

“뭐? 진작 말했어야지!”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여전히 시끄럽게 울리는 휴대 전화를 집어 든 다정을 향해 지혜는 혀를 쑥 내밀어 보이고는 방에서 나갔다.

‘왜 전화했지? 설마 글이 마음에 안 드나?’

온갖 생각이 다정의 머리에 떠올랐다.

3개월 전부터 자유 기고 식으로 이 잡지사에 연애 칼럼을 연재하고 있었다. 성인 여성들이 보는 잡지이기에 19금 수위를 오가는 야한 이야기도 집어넣어 글을 썼다. 프리랜서로 일하기 시작하고 처음으로 정기 계약을 한 것이다.

지금까지 해 온 작가 일만으로는 아무래도 그녀가 생각한 일을 실현하기 어려웠다. 나이도 들고 하니 독립까지는 무리여도 엄마가 일을 쉬어도 될 만큼 방세 겸 용돈이라도 두둑하게 드리고 싶은 마음에 구한 새로운 일감이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을 숨기고 다정은 전화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