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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두리번거리자니, 고운 빛깔의 목백일홍이 흐드러지게 핀 아래, 약을 달이느라 연신 부채질을 하는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연노랑 저고리에 감싸인 작은 어깨가 떨리는 것으로 보아 눈물짓는 것은 그 아이였다.
아까 궐에 들어올 때 조만한 또래의 계집아이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공주님들이냐 여쭈었더니, 아버님께서 애기 나인들이라 하셨다. 제 앞가림도 못할 것 같은 저 어린 아이들이 누구 시중을 드는지 궁금하였는데, 역시나 부모와 떨어져 궁에 들어왔으니 외로운 것인가.
제 손으로 한 뼘을 넘을락 말락 한 어깨가 안쓰러워서 서익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가 다가가 그 곁에 쪼그리고 앉는데도 아이는 제 울음소리 때문인지 알아채지를 못한다.
“어찌 우는 게야?”
“에구머니!”
가만 묻는다고 했는데도, 아이는 소스라치게 놀라서는 부채까지 떨어뜨리며 제 얼굴을 가리고 뒤로 발라당 넘어간다. 저런.
“미안타.”
그가 화급히 손을 내밀어 부축했다. 저고리 아래의 손목이 새 새끼만큼이나 무척이도 가늘어, 세게 쥐었다가는 부러질 것 같았다.
“아니어요…….”
계집아이는 그가 일으켜 주고 뒤로 돌아가 연분홍 치마를 털어 주는 동안, 제 얼굴을 부리나케 닦아 내며 어른스럽게 그리 중얼거렸다. 놀라게 한 것은 미안하였지만, 울음을 그친 것은 다행이었다.
“손수건을 빌려주랴? 코를 풀어야지.”
아이의 어른스러움에 감탄하느라 그 질문도 한발 늦어, 어느새 제 손수건을 꺼낸 아이는 콧물까지 야무지게 팽 풀고는 일어섰다. 돌아선 아이는, 여전히 쪼그리고 앉아 있던 그와 눈이 딱 마주치자, 또 한 번 흠칫 놀랐다. 눈물에 젖어 발개진 눈이 휘둥그렇게 뜨였다.
“오라버니가 아니…….”
앵두처럼 작은 입술이 오물거리더니 얼버무린다.
“오라비가 아니어도 어쨌든 네가 울음을 그쳤으니 되었지 않니.”
나인들에게 하대를 하여도 되는지는 들은바 없었으나, 연치가 한참이나 어린 아이니 괜찮겠지 싶었다.
“어찌 울었니? 어머니가 보고팠니?”
“……보고파질까 봐…….”
딱해라. 막 궁에 들어온 모양이구나.
“나아질 게야.”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어도 될까?
“……그럴까?”
“그럼.”
“하지만, 벌써부터…….”
꼬마의 작은 입술이 일그러지더니,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굴러떨어짐과 동시에 다시 울음을 터뜨릴 기세다. 저런.
이번에는 주저 없이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살다 보면 좋은 날이 있어 다시 만나질 게야. 자꾸 울면…… 어머님이 슬퍼하시잖니.”
그 말에 아이는 잇새로 입술을 밀어 넣으며 울음을 참아 냈다. 그것이 기특하여 머리를 또 쓰다듬어 주었다. 그의 손아래 작은 머리통에서 열기가 전해졌다. 꽤 애를 쓰는 양이다.
“그래, 울지 말거라. 네가 울면 어쩐지 나도 슬퍼질 것 같으니.”
다시 눈물을 삼켜 넣은 아이는 말없이 그를 마주 보았다. 동그랗고 영민해 보이는 눈망울이었다. 언젠가 집에 있던 강아지처럼.
일고여덟 살 무렵. 서당을 왕래하느라 마당을 오고 가는 그에게 추운 날에도 열심히 꼬리를 흔들던 녀석에게 꽤 정이 붙었더랬다. 체통에 어긋난다 할까 싶어, 보는 눈이 없을 때에나 한두 번 쓰다듬어 보았던 녀석의 털 감촉이 아직도 손에 남아 있는 듯했다. 한데, 그것이 어느 여름날부터 보이지 않았다. 복날, 어머님께서 하인들에게 몸보신을 하라 내어주셨다는 말을 듣고는, 이불을 둘러쓰고 며칠을 울며 앓았는데…… 지금 왜 그 오래된 기억이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름이 무엇이지?”
“……옥돌.”
“으응? 이름이 참말 귀엽기도 하구나.”
서익은 가만히 미소 지었다.
“이름은 아니고……”
아이는 말이 길지도 않으면서 할 말은 다 하였다. 다음 말을 기다리는데, 모퉁이 너머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아무리 어린아이라 하나, 보는 눈이 있는 데서까지 남녀 간에 함께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서익은 다리를 펴고 일어섰다.
서서 내려다보니, 10살도 안 되어 보이는 아이였다. 아이도 동그란 눈으로 서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 주고는 걸음을 옮겼다. 서둘러 연못가를 벗어나 가던 길을 가는데, 뒤에서 궁인이 외치는 말이 들려왔다.
“아이고, 현주 아기씨! 여기 계셨군요! 어서 오셔요! 소훈마마님께서 찾으십니다!”
현주…… 아기씨라니?
돌아보니, 궁인은 잰 몸놀림으로 그 계집아이를 들쳐 업고 있었다.
이런. 현주 아기씨께 실수를 하였구나. 하긴 나인의 오라비라면 궁 밖에 있을 터이니, 예서 찾을 리는 없지. 그래서 내게 하대를 하셨던 것이구나.
“해선이는 그새 어딜 간 겝니까?! 현주 아기씨께 부채질을 시키고…… 내 이것을 당장…….”
“소피가 급하다 하였어. 내가 어머님의 탕제를 달이고 싶다 조르기도 하였고…… 그러니 혼내지 말아…….”
울던 목소리를 애써 감추며 조곤조곤 변명을 하여 준다.
“아유, 또 우셨지요? 그리 우시면 혼삿날에 퉁퉁 부은 개구리눈처럼 미워 보이실 텐데, 낭군님께 그리 보여도 괜찮으시답니까?”
벌써 멀어진 터라 작은 대답은 들리지 않고 그다음 궁인의 대답만 들려왔다.
“소훈께서 최대한 서두르리라 하셨잖습니까. 그러니, 지금부터 어른스럽게 구셔야지요.”
아이는 말없이 궁인의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 어깨가 다시 파르르 떨리는 듯했다. 간신히 그친 울음이었는데. 세자마마의 따님은 저 나이에도 얼마나 더 어른스러워야 하는 것인지.
걸음을 멈춘 서익의 시야에서 노랑 저고리가 나비처럼 날아 아련히 멀어지고 있었다.
* * *
“그 나이에 벌써 혼인이라니, 좀 이르긴 하네요.”
“하지만 그대로 있다가는 현주는커녕 폐서인으로 내려갈 참이니 지금으로선 그것이 최선이오.”
부모님께 저녁 문안을 드리기 위해 안채에 들던 서익은 마루로 올라서던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방 안에 계신 부모님께서 누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시는 중인지 대번에 알아들은 탓이었다. 그 아이…… 현주 아기씨에 관한 말씀이었다. 존귀한 분이시니 제가 함부로 생각해서는 아니 될 일이었지만, 애기 나인으로 처음 보았던 때의 첫인상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혼자 머릿속으로 하는 생각이니 아무렴 어떤가. 그것보다―
“어쩌다 저하의 따님으로 나서는…… 쯧쯧. 따님에 대한 정이 유별나신 주상 전하께서는 혼인도 미뤄 가며 오래도록 곁에 두고 어여뻐 하실 터인데요.”
“그는 그렇지. 따지자면 세자 저하의 고명따님인데.”
그러지 않아도 서익은, 궁에서 나온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그 아이가 눈에서 어른거려 이상하던 지경이었다.
“오히려 주상께서는 세자에 대한 노여움이 지나치신 탓에 길례조차 명하지 않으시니, 그냥 조촐히 치를 것으로 보이오. 참으로 딱하게 되었지 뭐요.”
“한데 그 댁을 천거하셨다가 후일 원망을 듣지 않으시겠습니까? 특별히 내세울 것 없는 집안이니 말입니다. 물론 혼인 후에야 종3품 첨위의 직은 받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영…….”
“원망을 들을 일이나 있었으면 좋겠소.”
아버님께서 깊이 한숨을 내쉬시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리니, 소훈마마님의 심각하다는 병환 때문이리라.
그 아이. 그 뒤로도 혼자 숨어서 많이 울었을 텐데. 어쩌면 지금도…….
“좀 들고 하여라.”
“예, 어머니.”
서안 옆에 약과가 든 소반을 내려놓으시는 어머님의 손에 낀 옥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옥돌. 그 아이가 떠올랐다.
“이리 늦게까지 글을 읽다가 건강을 해치기라도 하면 어쩌― 아니, 어찌 그러느냐!”
“예?”
서익이 눈을 들자, 어머님께서는 대경실색하여 그의 얼굴을 살피고 계셨다.
“어찌 눈물까지 보이는 게야?! 그리 힘든 것이냐?!”
아.
제 얼굴을 만져 보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 모양이었다.
“아닙니다. 눈에…… 뭐가 들어갔나 봅니다.”
서둘러 얼버무리며 얼굴을 쓸어내렸지만, 어머님의 미간은 펴지지 않았다.
“대과를 치를 것이 걱정인 게야? 지나친 부담은 갖지 말거라. 아버님께서 네가 자만할까 싶어 말씀은 않으셨다지만, 그 정도로 글을 읽었으니 급제는 따 놓은 당상이라 하셨다.”
“……예.”
기실 대과 시험이 문제는 아니었다.
서익은 이상하게도 자꾸만 그 아이가 생각이 났다. 밤이고 낮이고.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에도, 글을 읽다가도. 어떤 때는 입궐하시는 아버님을 성큼 따라나서고 싶었다. 궐에 들어가 그 아이의 얼굴을 본다 하여 뭐가 달라지려는지. 그 아이가 대체 무엇인데, 내가 이러나 싶을 정도로 이상하였다.
혼인을 하셨다 들은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소식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망극하게도 세자 저하께서 그 어머님 되시는 소훈마마님을 죽이셨고, 다음 날 상감마마의 명으로 세자 저하마저 뒤주에 갇혀 며칠 후 돌아가시는 큰 변이 있었다. 그 며칠 전에 상감마마께서 세자께 자결을 명하셨다는 소문도 있었다. 때문에 혹시 세자 저하께서 이제 막다른 길임을 자각하시고는 병환이 깊은 소훈께서 못 볼 꼴을 보실 것이 염려되어 차라리 그 손으로 먼저 보내시고 뒤따르신 것이 아닌가 생각도 되었지만, 지밀(至密. 대전, 내전 등 임금이 늘 거처하는 곳)에 있는 이들이나 제대로 사정을 알 뿐, 궐 밖에 있는 그가 소상히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그가 깊이 생각할 분은 그분들이 아니었다. 옥돌……! 부모님께서 그리 큰 변을 당하셨으면 그 아이는 대체 어찌 지내고 있을는지.
세자빈 마노라와 세손마마를 제외하고 세자 저하의 후궁들과 그 자손들이 모두 폐서인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견디지 못하고 수소문을 하였다. 그 아이의 이름이 맑을 청(淸)에 아름다울 옥 근(瑾) 쓰는 청근이라는 것도 그 와중에 알게 된 터였다. 그가 알고 있는 옥돌은 아마도 별칭일 터였다.
그 동그란 눈망울에 눈물 마를 새가 없을 것에 애타 하며 수소문 끝에 찾아간 작은 기와집, 그 처마 밑에는 역시나 작은 어깨를 떨며 울고 있는 아이가 있었다. 눈물을 감추느라 한껏 숙인 머리채에는 이제 댕기가 아닌 비녀가 꽂혀 있었지만, 그 아래로 드러난 가녀린 목이며 어깨는 더욱 가냘파 보일 뿐이었다.
담 너머로 넘겨다보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서익은 그 뒤로도 몇 번이나 걸음을 하였다. 그리고 그 횟수가 늘어날수록 주기는 짧아졌다. 보면 볼수록 애타는 마음은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러니, 어머님 앞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을 보였던 것이고.
서익은 그 뒤로도 사흘이 멀다 하고 찾아가 보고 와야 얼마간 글이 제대로 읽혔다. 그렇게 몇 해가 넘어갈 즈음 대과를 치르게 되었고, 때문에 얼마간 찾아보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어찌나 애가 타던지.
급제 후에야 홍패를 받고 바로 홍문관 부수찬으로 임명되어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간신히 틈을 내어 찾아갔더니, 이게 어쩐 일인지. 그사이 그 집은 빈집이 되어 있었다. 망연자실하여 지나가는 이에게 물으니, 그 댁의 젊은 나리께서 지병으로 세상을 등지는 바람에 가족 모두 낙향을 하였다는 것이다. 겨우 혼인한 지 두어 해 남짓인데, 청상과부가 되셨다고?! 서익의 억장이 무너졌다. 인복이 없다 없다, 어찌 그렇게까지…….
그날 서익은 매일 담 너머로 들여다보기만 하던 그 집 대문 안으로 드디어 들어설 수 있었지만, 그를 반겨 주는 것은 을씨년스러운 마당 한쪽에 나뒹구는 다리 부러진 개다리소반뿐이었다.
두리번거리자니, 고운 빛깔의 목백일홍이 흐드러지게 핀 아래, 약을 달이느라 연신 부채질을 하는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연노랑 저고리에 감싸인 작은 어깨가 떨리는 것으로 보아 눈물짓는 것은 그 아이였다.
아까 궐에 들어올 때 조만한 또래의 계집아이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공주님들이냐 여쭈었더니, 아버님께서 애기 나인들이라 하셨다. 제 앞가림도 못할 것 같은 저 어린 아이들이 누구 시중을 드는지 궁금하였는데, 역시나 부모와 떨어져 궁에 들어왔으니 외로운 것인가.
제 손으로 한 뼘을 넘을락 말락 한 어깨가 안쓰러워서 서익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가 다가가 그 곁에 쪼그리고 앉는데도 아이는 제 울음소리 때문인지 알아채지를 못한다.
“어찌 우는 게야?”
“에구머니!”
가만 묻는다고 했는데도, 아이는 소스라치게 놀라서는 부채까지 떨어뜨리며 제 얼굴을 가리고 뒤로 발라당 넘어간다. 저런.
“미안타.”
그가 화급히 손을 내밀어 부축했다. 저고리 아래의 손목이 새 새끼만큼이나 무척이도 가늘어, 세게 쥐었다가는 부러질 것 같았다.
“아니어요…….”
계집아이는 그가 일으켜 주고 뒤로 돌아가 연분홍 치마를 털어 주는 동안, 제 얼굴을 부리나케 닦아 내며 어른스럽게 그리 중얼거렸다. 놀라게 한 것은 미안하였지만, 울음을 그친 것은 다행이었다.
“손수건을 빌려주랴? 코를 풀어야지.”
아이의 어른스러움에 감탄하느라 그 질문도 한발 늦어, 어느새 제 손수건을 꺼낸 아이는 콧물까지 야무지게 팽 풀고는 일어섰다. 돌아선 아이는, 여전히 쪼그리고 앉아 있던 그와 눈이 딱 마주치자, 또 한 번 흠칫 놀랐다. 눈물에 젖어 발개진 눈이 휘둥그렇게 뜨였다.
“오라버니가 아니…….”
앵두처럼 작은 입술이 오물거리더니 얼버무린다.
“오라비가 아니어도 어쨌든 네가 울음을 그쳤으니 되었지 않니.”
나인들에게 하대를 하여도 되는지는 들은바 없었으나, 연치가 한참이나 어린 아이니 괜찮겠지 싶었다.
“어찌 울었니? 어머니가 보고팠니?”
“……보고파질까 봐…….”
딱해라. 막 궁에 들어온 모양이구나.
“나아질 게야.”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어도 될까?
“……그럴까?”
“그럼.”
“하지만, 벌써부터…….”
꼬마의 작은 입술이 일그러지더니,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굴러떨어짐과 동시에 다시 울음을 터뜨릴 기세다. 저런.
이번에는 주저 없이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살다 보면 좋은 날이 있어 다시 만나질 게야. 자꾸 울면…… 어머님이 슬퍼하시잖니.”
그 말에 아이는 잇새로 입술을 밀어 넣으며 울음을 참아 냈다. 그것이 기특하여 머리를 또 쓰다듬어 주었다. 그의 손아래 작은 머리통에서 열기가 전해졌다. 꽤 애를 쓰는 양이다.
“그래, 울지 말거라. 네가 울면 어쩐지 나도 슬퍼질 것 같으니.”
다시 눈물을 삼켜 넣은 아이는 말없이 그를 마주 보았다. 동그랗고 영민해 보이는 눈망울이었다. 언젠가 집에 있던 강아지처럼.
일고여덟 살 무렵. 서당을 왕래하느라 마당을 오고 가는 그에게 추운 날에도 열심히 꼬리를 흔들던 녀석에게 꽤 정이 붙었더랬다. 체통에 어긋난다 할까 싶어, 보는 눈이 없을 때에나 한두 번 쓰다듬어 보았던 녀석의 털 감촉이 아직도 손에 남아 있는 듯했다. 한데, 그것이 어느 여름날부터 보이지 않았다. 복날, 어머님께서 하인들에게 몸보신을 하라 내어주셨다는 말을 듣고는, 이불을 둘러쓰고 며칠을 울며 앓았는데…… 지금 왜 그 오래된 기억이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름이 무엇이지?”
“……옥돌.”
“으응? 이름이 참말 귀엽기도 하구나.”
서익은 가만히 미소 지었다.
“이름은 아니고……”
아이는 말이 길지도 않으면서 할 말은 다 하였다. 다음 말을 기다리는데, 모퉁이 너머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아무리 어린아이라 하나, 보는 눈이 있는 데서까지 남녀 간에 함께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서익은 다리를 펴고 일어섰다.
서서 내려다보니, 10살도 안 되어 보이는 아이였다. 아이도 동그란 눈으로 서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 주고는 걸음을 옮겼다. 서둘러 연못가를 벗어나 가던 길을 가는데, 뒤에서 궁인이 외치는 말이 들려왔다.
“아이고, 현주 아기씨! 여기 계셨군요! 어서 오셔요! 소훈마마님께서 찾으십니다!”
현주…… 아기씨라니?
돌아보니, 궁인은 잰 몸놀림으로 그 계집아이를 들쳐 업고 있었다.
이런. 현주 아기씨께 실수를 하였구나. 하긴 나인의 오라비라면 궁 밖에 있을 터이니, 예서 찾을 리는 없지. 그래서 내게 하대를 하셨던 것이구나.
“해선이는 그새 어딜 간 겝니까?! 현주 아기씨께 부채질을 시키고…… 내 이것을 당장…….”
“소피가 급하다 하였어. 내가 어머님의 탕제를 달이고 싶다 조르기도 하였고…… 그러니 혼내지 말아…….”
울던 목소리를 애써 감추며 조곤조곤 변명을 하여 준다.
“아유, 또 우셨지요? 그리 우시면 혼삿날에 퉁퉁 부은 개구리눈처럼 미워 보이실 텐데, 낭군님께 그리 보여도 괜찮으시답니까?”
벌써 멀어진 터라 작은 대답은 들리지 않고 그다음 궁인의 대답만 들려왔다.
“소훈께서 최대한 서두르리라 하셨잖습니까. 그러니, 지금부터 어른스럽게 구셔야지요.”
아이는 말없이 궁인의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 어깨가 다시 파르르 떨리는 듯했다. 간신히 그친 울음이었는데. 세자마마의 따님은 저 나이에도 얼마나 더 어른스러워야 하는 것인지.
걸음을 멈춘 서익의 시야에서 노랑 저고리가 나비처럼 날아 아련히 멀어지고 있었다.
* * *
“그 나이에 벌써 혼인이라니, 좀 이르긴 하네요.”
“하지만 그대로 있다가는 현주는커녕 폐서인으로 내려갈 참이니 지금으로선 그것이 최선이오.”
부모님께 저녁 문안을 드리기 위해 안채에 들던 서익은 마루로 올라서던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방 안에 계신 부모님께서 누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시는 중인지 대번에 알아들은 탓이었다. 그 아이…… 현주 아기씨에 관한 말씀이었다. 존귀한 분이시니 제가 함부로 생각해서는 아니 될 일이었지만, 애기 나인으로 처음 보았던 때의 첫인상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혼자 머릿속으로 하는 생각이니 아무렴 어떤가. 그것보다―
“어쩌다 저하의 따님으로 나서는…… 쯧쯧. 따님에 대한 정이 유별나신 주상 전하께서는 혼인도 미뤄 가며 오래도록 곁에 두고 어여뻐 하실 터인데요.”
“그는 그렇지. 따지자면 세자 저하의 고명따님인데.”
그러지 않아도 서익은, 궁에서 나온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그 아이가 눈에서 어른거려 이상하던 지경이었다.
“오히려 주상께서는 세자에 대한 노여움이 지나치신 탓에 길례조차 명하지 않으시니, 그냥 조촐히 치를 것으로 보이오. 참으로 딱하게 되었지 뭐요.”
“한데 그 댁을 천거하셨다가 후일 원망을 듣지 않으시겠습니까? 특별히 내세울 것 없는 집안이니 말입니다. 물론 혼인 후에야 종3품 첨위의 직은 받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영…….”
“원망을 들을 일이나 있었으면 좋겠소.”
아버님께서 깊이 한숨을 내쉬시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리니, 소훈마마님의 심각하다는 병환 때문이리라.
그 아이. 그 뒤로도 혼자 숨어서 많이 울었을 텐데. 어쩌면 지금도…….
“좀 들고 하여라.”
“예, 어머니.”
서안 옆에 약과가 든 소반을 내려놓으시는 어머님의 손에 낀 옥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옥돌. 그 아이가 떠올랐다.
“이리 늦게까지 글을 읽다가 건강을 해치기라도 하면 어쩌― 아니, 어찌 그러느냐!”
“예?”
서익이 눈을 들자, 어머님께서는 대경실색하여 그의 얼굴을 살피고 계셨다.
“어찌 눈물까지 보이는 게야?! 그리 힘든 것이냐?!”
아.
제 얼굴을 만져 보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 모양이었다.
“아닙니다. 눈에…… 뭐가 들어갔나 봅니다.”
서둘러 얼버무리며 얼굴을 쓸어내렸지만, 어머님의 미간은 펴지지 않았다.
“대과를 치를 것이 걱정인 게야? 지나친 부담은 갖지 말거라. 아버님께서 네가 자만할까 싶어 말씀은 않으셨다지만, 그 정도로 글을 읽었으니 급제는 따 놓은 당상이라 하셨다.”
“……예.”
기실 대과 시험이 문제는 아니었다.
서익은 이상하게도 자꾸만 그 아이가 생각이 났다. 밤이고 낮이고.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에도, 글을 읽다가도. 어떤 때는 입궐하시는 아버님을 성큼 따라나서고 싶었다. 궐에 들어가 그 아이의 얼굴을 본다 하여 뭐가 달라지려는지. 그 아이가 대체 무엇인데, 내가 이러나 싶을 정도로 이상하였다.
혼인을 하셨다 들은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소식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망극하게도 세자 저하께서 그 어머님 되시는 소훈마마님을 죽이셨고, 다음 날 상감마마의 명으로 세자 저하마저 뒤주에 갇혀 며칠 후 돌아가시는 큰 변이 있었다. 그 며칠 전에 상감마마께서 세자께 자결을 명하셨다는 소문도 있었다. 때문에 혹시 세자 저하께서 이제 막다른 길임을 자각하시고는 병환이 깊은 소훈께서 못 볼 꼴을 보실 것이 염려되어 차라리 그 손으로 먼저 보내시고 뒤따르신 것이 아닌가 생각도 되었지만, 지밀(至密. 대전, 내전 등 임금이 늘 거처하는 곳)에 있는 이들이나 제대로 사정을 알 뿐, 궐 밖에 있는 그가 소상히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그가 깊이 생각할 분은 그분들이 아니었다. 옥돌……! 부모님께서 그리 큰 변을 당하셨으면 그 아이는 대체 어찌 지내고 있을는지.
세자빈 마노라와 세손마마를 제외하고 세자 저하의 후궁들과 그 자손들이 모두 폐서인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견디지 못하고 수소문을 하였다. 그 아이의 이름이 맑을 청(淸)에 아름다울 옥 근(瑾) 쓰는 청근이라는 것도 그 와중에 알게 된 터였다. 그가 알고 있는 옥돌은 아마도 별칭일 터였다.
그 동그란 눈망울에 눈물 마를 새가 없을 것에 애타 하며 수소문 끝에 찾아간 작은 기와집, 그 처마 밑에는 역시나 작은 어깨를 떨며 울고 있는 아이가 있었다. 눈물을 감추느라 한껏 숙인 머리채에는 이제 댕기가 아닌 비녀가 꽂혀 있었지만, 그 아래로 드러난 가녀린 목이며 어깨는 더욱 가냘파 보일 뿐이었다.
담 너머로 넘겨다보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서익은 그 뒤로도 몇 번이나 걸음을 하였다. 그리고 그 횟수가 늘어날수록 주기는 짧아졌다. 보면 볼수록 애타는 마음은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러니, 어머님 앞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을 보였던 것이고.
서익은 그 뒤로도 사흘이 멀다 하고 찾아가 보고 와야 얼마간 글이 제대로 읽혔다. 그렇게 몇 해가 넘어갈 즈음 대과를 치르게 되었고, 때문에 얼마간 찾아보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어찌나 애가 타던지.
급제 후에야 홍패를 받고 바로 홍문관 부수찬으로 임명되어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간신히 틈을 내어 찾아갔더니, 이게 어쩐 일인지. 그사이 그 집은 빈집이 되어 있었다. 망연자실하여 지나가는 이에게 물으니, 그 댁의 젊은 나리께서 지병으로 세상을 등지는 바람에 가족 모두 낙향을 하였다는 것이다. 겨우 혼인한 지 두어 해 남짓인데, 청상과부가 되셨다고?! 서익의 억장이 무너졌다. 인복이 없다 없다, 어찌 그렇게까지…….
그날 서익은 매일 담 너머로 들여다보기만 하던 그 집 대문 안으로 드디어 들어설 수 있었지만, 그를 반겨 주는 것은 을씨년스러운 마당 한쪽에 나뒹구는 다리 부러진 개다리소반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