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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제1장 뱀파이어의 위험한 청혼


어디를 가나 저를 힐끔거리는 시선과 제 이야기를 수군대는 목소리뿐이다. 이영은 굳어지려는 표정을 애써 감추며 덤덤한 얼굴을 가장했다. 어차피 예상 못 한 건 아니었다. 이미 소문은 퍼질 대로 퍼진 상황이었으니까.

그녀가 속해 있는 이쪽 세상이 얼마나 좁은지 잘 알고 있다. 외부에는 새어 나가지 않는 소문들도 이 세상 안에서는 단 며칠 만에 다 퍼져 나가기 마련이다. 그중 일부분이 가끔 증권가에 ‘찌라시’라는 이름으로 돌아다니기도 하지만, 새어 나가지 않는 이야기가 훨씬 많은 법이다.

이영은 얼마 전 그 이야기 중 하나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되었다. 흔히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출생의 비밀이 주된 내용이었다. 한영일보 공현익 회장의 막내딸이 사실은 그와 본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 아니라, 그가 밖에서 데리고 들어온 첩의 딸이었다더라. 간단히 말하자면 그런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새어 나가게 된 건 이영의 이복 언니인 수연의 입을 통해서였다. 얼마 전, 수연이 몇 명의 지인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술에 취해 이영의 출생에 대한 말을 실수로 꺼냈다.

그녀는 화를 내던 아버지에게 단지 ‘실수’였을 뿐이라며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그다지 신빙성이 있지는 않았다. 수연의 주량은 제법 센 편이었고, 또한 그날 그녀는 별로 취하지 않은 상태로 귀가했으니 말이다.

어찌 되었든 그 바람에 이영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한동안 외출을 삼가고 집에 틀어박혀 있어야 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나자마자 이번에는 각종 모임이나 파티 등에 참석하라는 강요를 받게 되었다.

오늘 이 크루즈 파티도 아버지의 그런 강요로 인해 참석하게 된 터였다. 자신의 아버지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마음을 바꿔 여기저기 모습을 드러내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영은 그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흔들리려는 속내를 다잡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사람들의 시선과 수군거림을 무시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모든 일의 원인을 제공했던 수연이 어느 남자의 품에 안겨 있는 게 보였다.

저 남자가 홍영전자 장남이었던가. 이영은 무심코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이내 관심을 거두고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자신이 상관할 바 아닌 일이다. 그저 언제쯤이면 파티가 끝날까, 그것만이 제 유일한 관심사일 뿐이었다. 파티를 즐기고 있는 제 이복형제들과는 달리.

그 순간, 이영의 시선이 어느 곳인가를 무심히 스쳐 지나가려다가 그대로 멈췄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눈이 일렁였다. 이영이 바라보고 있는 곳에,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곁에 있었던 남자가 다른 여자와 함께 서 있었다.

윤기석.

그는 이영의 전 약혼자였다. ‘전(前)’이라는 말을 붙이는 게 아직 어색하지만, 이미 그에게서 파혼 통보를 받았으니 이제는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그 사실을 되새기는 이영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스쳤다.

당신, 참 빠르구나.

좋아한다고 먼저 고백했던 쪽은 기석이었다. 이영은 느닷없이 본인의 감정을 내보이며 다가오는 기석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감정을 호소했다. 그 집요함에 이영이 결국 두 손을 든 결과가 바로 두 사람의 약혼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출생에 대한 말이 나돌기 무섭게 기석은 냉정하게 돌아섰다. 그토록 지극정성이었던 남자가 언제 그랬던가 싶게 싸늘해졌다. 바로 전날만 하더라도 다정하게 웃고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던 시선이 아무런 쓸모가 없는 물건을 보는 듯 돌변했다.

‘우리 약혼 없었던 걸로 하자.’

그나마 직접 얼굴을 보고 파혼하자 말한 걸 고맙다고 해야 할까. 이영은 피식거리며 실소하고는 제 쪽으로 다가오는 기석을 쳐다보았다. 그와 동시에 그가 누군가를 향해 웃으며 인사를 하고는 무심코 이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그의 입에서 무의미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들이 약혼했던 사이라는 걸 지금 이곳에 모인 이들 중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이영은 순식간에 자신과 그를 향해 사람들의 시선이 모조리 집중된 것을 느꼈다.

“네가 올 줄은 몰랐는데.”

“내가 오면 안 되는 곳이었나요?”

이영의 말을 듣던 기석이 이맛살을 찌푸리더니 여자에게 뭐라고 양해를 구했다. 그러자 여자가 피식 웃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와 동시에 그가 이영의 손목을 낚아채고는 연회장 한쪽 구석으로 그녀를 끌고 갔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그녀는 기석에게 끌려가다시피 하다가 날카롭게 외쳤다. 그러자 기석이 이영의 손목을 떨쳐 내듯 놓고는 얼굴을 잔뜩 구긴 채 입을 열었다.

“그러는 너야말로 여기는 왜 온 건데? 너는 창피한 것도 몰라? 수치심 같은 걸 느끼지도 못하냐고. 파혼당했다고 일부러 나 엿 먹일 작정으로 온 게 아니고서야…….”

“아무리 본인 편하게 생각한다고 하지만, 어떻게 그런 결론이 나와요? 내가 그렇게 할 일이 없어 보여요? 전 약혼자 엿 먹이겠다고 참석하지 않아도 될 파티에 굳이 나타날 만큼, 기석 씨 눈에는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였나 보죠?”

이영은 기석의 말을 끊고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과 함께 되받아쳤다. 더러운 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쓰기라도 한 것처럼 불쾌한 기분이 온몸을 휘감았다. 아무리 헤어진 사이라 하더라도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라는 게 있는 법이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 예의조차 갖추지 않고 있었다.

제 출생에 대해 알고 나서 기석이 일방적으로 파혼을 통보한 점에 대해서는 서운하기는 했지만,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그를 속이고 결혼하려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약혼한 뒤에 몇 번이나 기석에게 제 출생에 대하여 솔직히 털어놓아야 하는 게 아닐까 고민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아교라도 바른 듯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그에게 아무것도 얘기하지 못하고 있다가 다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소문으로 듣게끔 했다. 그것이 내심 미안하던 터였다.

……이제는 그럴 필요도 없겠지만.

“너,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기석은 제 앞에서 시선을 똑바로 마주한 채 대꾸하는 이영의 모습에 당황해 하며 눈을 찡그렸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들을 느꼈다. 그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같이 파티에 참석한 여자뿐만 아니라 안면이 있는 이들이 자신과 이영을 빙 둘러싼 채 흥미진진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젠장!

그는 자칫 웃음거리가 되겠단 생각에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리고 주먹을 꽉 쥔 채 이영을 향해 비아냥거리듯 말을 이었다.

“그럼 내가 없는 말을 지어내기라도 했다는 거야? 공이영, 너 그럼 여기에 왜 온 건데? 네가 아직도 한영일보 공주님인 줄 아냐? 근본도 모르는 여자한테서 태어난 주제에. 너 말이야. 너를 낳은 친모가 누구인지도 모른다며. 하기야 뻔하지. 술집이나 사창가에서 몸이나 파는 여자…….”

짜악.

이영이 휘두른 손에 얻어맞은 기석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연회장을 채우고 있던 피아노 연주가 뚝 끊겼다. 그리고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숨조차 쉬지 않는 듯 침묵만이 감돌았다. 그 적막을 깬 건 그녀에게 뺨을 맞은 기석이었다.

“야, 공이영! 너 지금 나를 쳤어?”

사람들 앞에서 따귀를 맞았다는 수치심에 그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기석은 그대로 후려치기라도 할 듯 큼직한 손을 들었다. 그 손에 얻어맞으면 이영의 가냘픈 몸 정도는 그대로 나가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들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 중 일부가 움찔거리며 눈을 감으려는 순간,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만합시다, 윤기석 씨.”

이영은 금방이라도 저를 후려칠 듯하던 기석의 손 대신, 마치 저를 보호하기라도 하듯 앞을 가로막고 선 낯선 남자의 등을 쳐다보았다. 방금 들려온 목소리는 바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뭐야? 당신이 뭔데…….”

기석이 남자를 향해 언성을 높이려다가 말끝을 흐리더니 들고 있던 팔을 슬그머니 아래로 내리고 재차 입을 열었다.

“……채서원 씨가 왜 끼어드는 겁니까. 이건 엄연히 제 개인적인 문제입니다만.”

채서원, 남자의 이름이 순식간에 파도를 타듯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옮겨졌다. 이영은 그제야 제 앞에 보이는 등의 주인이 채서원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남자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고 해서 그가 제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게 이해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채서원이 왜, 지금 이 상황에 끼어든 거지?

이영은 되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였다. 그건 이영뿐만 아니라 기석과 주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다들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서원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그다지 개의치 않는 듯 무덤덤한 얼굴로 기석을 쳐다보다가 뒤늦게 대꾸했다.

“아는 동생이 봉변을 당하게 생겼는데, 그걸 못 본 척하고 넘어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 아는 동생?”

기석이 얼굴을 찡그리며 서원의 뒤쪽에 서 있는 이영을 쳐다보았다. 이영과 서원이 친한 사이였던가 하고 의구심을 품은 게 역력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그렇지만 이영은 기석의 의문 가득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대응을 할 수 없었다. 기석보다도 더 당혹스러운 게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

아는 동생이라니.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자신과 서원이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결코 아니었다. 물론 어릴 적부터 이런저런 모임을 통해 얼굴 정도를 알고 지내기는 했다. 그렇지만 말 그대로 그저 서로의 얼굴만 알고 지낸 것이지, 이렇듯 다른 사람들 앞에서 친분을 과시할 만큼 가까운 관계인 건 아니었다. 더구나 제 출생에 대한 소문이 퍼져 나간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다.

이영은 가까이 지내던 이들조차 저를 외면하고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을 새삼 떠올리다가 쓴웃음이 비어져 나오려는 걸 삼켰다. 그러고는 잡념을 털어 내기 위해 고개를 두어 번 저으려는데, 등을 보이고 서 있던 남자가 그녀를 향해 슬쩍 몸을 돌렸다.

“공이영, 나 몰라?”

“……아, 알기는 알지만.”

그녀는 너무나 친근하게 저를 부르는 서원의 태도에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바보 같은 대답이란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지금 이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 중에서 채서원을 모르는 이가 과연 있기나 할까 싶어서였다.

수십 년째 재계 1위 자리를 확고하게 지키고 있는 도경그룹, 그곳의 하나뿐인 후계자가 바로 채서원이다. 외부에서는 서원과 다른 이들을 한꺼번에 뭉뚱그려 ‘금수저’ 운운하는 말로 엮기도 하지만, 그건 얼토당토않은 얘기였다.

국내 재계 서열 1위라는 게 도경그룹이 갖고 있는 전부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도경의 일면에 불과했다. 경제 분야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전반에 걸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곳이 바로 도경이다. 오죽하면 헌법 제 1조 1항의 문구를 ‘대한민국은 도경공화국이다.’라고 고쳐 써야 한다는 말까지 우스개처럼 나올까.

그런 까닭에 이곳에 모인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서원의 존재를 가볍게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기석도 별반 다르지 않은 입장이기에 한 발 뒤로 물러선 것일 테고.

그런데 그런 남자가 왜 자신을 도와준 것일까. 무엇 하나 이득 될 게 없는데.

그녀의 의문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그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그러나 서원은 곧 웃음기를 지우고 기석을 돌아보았다.

“더 할 얘기가 있습니까?”

“아, 아니, 그게…….”

기석은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가 다물기를 반복했다. 한국대 총장을 부친으로 두고 있다는 게 지금 이 순간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걸 깨달은 얼굴이었다. 하기야 대통령을 부친으로 두고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테지만. 그는 얼굴이 일그러지려는 걸 간신히 억누르고는 이영을 쏘아보다가 같이 왔던 여자와 함께 연회장의 반대편으로 향했다.

멀어져 가는 기석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이영이 바짝 긴장해 있던 것을 풀어내며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도 더 긴장하고 있었는지 몸이 제멋대로 바들바들 떨렸다.

“괜찮아?”

그 순간, 서원의 목소리가 다시금 그녀의 귓가에 들렸다. 이영은 황급히 주먹을 꽉 쥐었다가 놓으며 호흡을 가다듬은 뒤, 그를 향해 돌아섰다. 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채 차장님.”

“……채 차장?”

이영이 고개를 숙여 고맙단 인사를 하자마자 찌푸리고 있던 서원의 미간에 더욱 선명한 주름이 생겼다. 뭔가 못마땅하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던 그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릴 때는 오빠라고 부르더니, 웬 ‘차장’ 호칭이야? 내가 네 직장 상사도 아닌데.”

“아, 그거야…….”

이영은 서원을 쳐다보다가 괜히 어색해져서 시선을 피했다. 어릴 때야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이었기에 그를 ‘오빠’라고 불렀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달라진 상황이다. 친하지도 않은 남자에게 어릴 때처럼 오빠 운운할 만큼 제 성격이 그렇게 사교적인 것도 아니다. 그 사실을 눈앞의 남자가 모르는 바도 아닐 텐데 굳이 이렇게 질문하는 건 무슨 심술일까.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서원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재차 입을 열었다.

“세상에 남자가 윤기석 하나뿐인 건 아니야.”

“……예?”

“오히려 파혼한 게 전화위복이 될 것 같은데? 저런 작자랑 결혼해 봤자 그다지 행복하게 살 것 같지도 않고.”

“…….”

그녀는 서원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기만 했다. 자신이 착각한 게 아니라면, 지금 그는 저를 위로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파혼당하고 난 뒤에 그 누구에게서도 듣지 못했던 위로의 말을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남자에게서 듣게 되다니. 이영은 눈시울이 뜨거워지려는 걸 간신히 참으며 입술을 거듭 깨물었다.

“괜히 윤기석 같은 남자 때문에 아파할 필요 없다는 거야. 사람들 수군거리는 것쯤이야 시간이 흐르고 나면 가라앉기 마련이고.”

“고맙…… 고맙습니다.”

이영은 힘겹게 입을 열어 인사했다. 서원이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를 받는 시늉을 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녀는 서원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는 걸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픽 웃고 말았다.

예상조차 못 했던 위로를 받아서일까.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그 덕분에 이 파티를 조금 더 견뎌 낼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서원으로 인해 나아졌던 기분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이영은 옆머리를 망치로 두드리는 듯한 통증에 이를 악물며 손으로 관자놀이 근처를 눌렀다. 이곳에 와서 칵테일 한 잔을 마신 게 전부인데, 그게 의외로 독했던 것인지 간헐적으로 두통이 치밀었다.

아니다. 사실, 자신이 마신 칵테일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과 수군거리는 말이 칼날처럼 제 몸을 헤집고 상처를 낸 게 두통의 원인이 되었을 터. 그녀는 계단을 올라가다 말고 중간 참에 멈춰 서서 숨을 몰아쉬며 허리를 숙였다. 난간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끝이 새하얗게 질린 채 파르르 떨렸다.

이영이 서원의 도움을 받은 이후, 기석은 그녀의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무심코 시선이 마주쳤을 때도 먼저 시선을 돌린 건 그였다. 그나마 그건 다행이었다. 저를 조롱하는 사람들을 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견디기 힘들었으니 말이다.

……그것도 한계에 다다른 것 같지만.

난간을 잡고 있던 이영의 손안에 땀이 찼다. 그러나 그녀는 미처 그런 제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숙이고 있던 허리를 다시 펴려 했다. 그와 동시에 땀으로 젖은 손바닥이 난간 위에서 미끄러졌다.

“앗!”

둔탁한 소리와 함께 이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그대로 고꾸라지면서 명치 부근을 난간에 부딪치고 만 것이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통증에 숨조차 쉬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며 몸을 웅크렸다. 점심 이후로 아무것도 먹은 게 없는데도 불구하고 구역질이 나오려 했다. 아마도 명치 근처를 심하게 부딪친 탓인 듯싶었다.

이영은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났다. 여기까지 굳이 올라올 사람은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누군가에게 이런 제 모습을 들키고 싶지는 않은 까닭이었다.

“하아…….”

이영이 재차 난간을 잡고 숨을 내쉬었다. 통증이 조금 가라앉으면서 울렁거리던 속도 진정되었다. 그녀는 차가워진 제 뺨을 다른 손으로 살짝 감쌌다가 뗀 뒤에 다시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