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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이영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소파에 누워 있는 여자 쪽을 돌아보았다. 이 와중에 고요히 자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기괴한 연극 무대에 올라와 있는 소품 같았다.

그녀는 다시 몸을 떨며 고개를 돌려 서원을 쳐다보았다. 도준이 저를 쳐다보는 걸 느끼기는 했지만, 그보다 더한 존재감으로 저를 응시하고 있는 서원을 무시할 수 없었다.

“저를, 어떻게 하시려고요.”

믿기 힘들지만 제 앞에 펼쳐진 이 기괴한 일은 현실이다. 그 점을 자각하고 나니 다른 생각이 뒤를 이었다. 아무도 알지 못하던 비밀을 알게 된 이상, 자신은 어떤 식으로든 그 비밀의 대가를 치러야 할 거라는 점이었다.

원해서 알게 된 비밀은 아니었지만, 그런 사정을 봐줄 리 없다는 걸 안다. 눈앞의 남자가 그냥 눈감아 주지는 않으리란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뭔가를 받아 내기 위해서 제게 대답하기를 강요하고 비밀을 밝혔을 터.

“제 처지에 대한 소문을 들어 아시겠지만, 아무것도 드릴 게 없어요.”

“내가 지금 너한테 돈이라도 뜯어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서원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물었다. 이영은 그 물음에 대꾸하지 못한 채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하지만 이대로 너를 놓아줄 수는 없지. 다른 사람에게 비밀이 새어 나가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마, 말 안 해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거예요. 아니, 제가 다른 사람한테 지금 이 얘기를 한다고 해도 누가 믿겠어요? 오히려 미친 사람 취급이나 받을 텐데.”

“물론 네 말대로 누가 믿을 리 없겠지만……. 그래도 그 추측 하나만으로 너를 돌려보내는 건 위험 부담이 크지 않겠어? 평생 내 비밀이 다른 누군가에게 발설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면 말이야.”

서원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친절했다. 그 말의 내용을 직접 듣지 못한 사람이 본다면 밀어라도 속삭이는 게 아닐까 하고 착각할 정도로. 그러나 이영은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그를 쳐다보다가 꺼질 듯한 목소리를 냈다.

“그럼 뭘 어쩌려고요.”

“간단히 하자면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의 비밀을 아는 공이영 씨를 깨끗하게 처리할 수도 있겠고. 사실 그게 가장 간단한 방법이기는 하지.”

이영의 말에 서원이 대답하기 전, 도준이 불쑥 끼어들었다. 서늘한 눈매가 조금은 잔혹한 빛으로 물든 채 휘어졌다. 누구에게나 매너 있고 정중하게 굴던 장도준이라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 위에 다른 모습이 떠올랐다. 바로 여자의 목덜미에 제 송곳니를 박아 넣고 피를 빠는 모습이었다.

“아, 안…… 안 돼.”

직접 흡혈하는 장면을 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서 저절로 연상된 모습은 마치 제 눈으로 보기라도 한 것처럼 생생했다. 이영은 가쁜 숨을 들이쉬지도 내쉬지도 못한 채 헐떡이다가 그대로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미처 한 걸음을 떼기도 전에 서원에게 손목을 붙잡히고 말았다.

“안 잡아먹어. 걱정 마. 형은 괜한 소리를 해 가지고 어린애 겁먹게 만들어? 팔백 살 넘은 나이가 아깝다.”

서원은 이영의 손목을 꽉 붙든 채 도준을 타박했다. 도준이 서원의 말에 발끈해서 한마디 하려다가 입을 다물더니 어깨를 으쓱이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도준을 쳐다보던 서원의 시선이 다시금 이영에게로 향했다. 그녀가 바들바들 떨다가 다리의 힘이 풀리면서 무릎이 꺾여 비틀거렸다.

“이런, 조심해야지.”

그녀를 재빨리 부축한 서원이 고개를 돌려 방 안을 둘러보다가 반대편 창가 앞에 놓인 티 테이블 쪽으로 이영을 데리고 갔다. 그녀는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그에게 이끌려 테이블로 향했다. 작은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창문 바로 밑에 자리하고 있었다. 서원은 이영을 의자에 앉힌 뒤, 맞은편 자리에 가서 앉았다.

“……흐, 흐으.”

이영의 몸이 심하게 떨렸다. 감당하기 힘든 두려움에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걸 참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에너지를 모두 소진할 것만 같았다. 그래도 여기서 기절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줄도 모르고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순간,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서원의 입이 열렸다.

“결혼하자.”

“……뭐, 뭐라고요?”

이영은 전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바람에 긴장이 풀어져서 주먹을 쥐고 있던 손이 느슨해졌다. 서원은 그녀의 손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입꼬리를 올려 웃더니 한 번 더 말했다.

“나랑 결혼하자고.”

“그, 그게 무슨…… 지금 이 상황에 그런 얘기가, 아니, 이런 상황이 아니더라도…… 도대체 왜…….”

뜬금없는 청혼에 머릿속이 백지라도 된 것처럼 새하얘졌다.

“비밀을 지키려면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이를 평생 꽁꽁 묶어서 곁에 두는 게 확실한 방법이니까. 그렇게 따진다면 결혼만큼 적격인 게 또 있겠어?”

서원은 별것 아니라는 듯 덤덤한 투로 말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요. 어떻게 결혼을 이런 식으로…….”

“사흘 줄게.”

이영의 말을 끊으며 서원이 재차 입을 열었다. 그녀는 서원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네가 내 제안을, 아니, 내 청혼을 받아들일 시간 말이야.”

그는 이영이 자신의 말을 거절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녀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서원은 이번에는 달아나는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그녀가 나간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을 뿐. 그때, 도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그 오래된 짝사랑을 끝내기로 결심한 거냐? 붙잡기로 마음먹은 거야?”

그는 도준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 없이 그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이영이 나가 버린 문 쪽을 응시하는 서원의 시선이 한층 가라앉았다. 그녀가 눈앞에 있다면 금방이라도 삼켜 버렸을 듯 짙은 소유욕이 묻어나는 시선이었다.



제2장 미련이 불러온 덫


이영은 발포 비타민 하나를 컵 안에 넣으며 한 손으로 지끈거리는 옆머리를 눌렀다. 살림을 맡아서 하는 익산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얼굴이 하룻밤 사이에 반쪽이 됐네. 피곤한 자리였나 봐요?”

“뭐…… 조금요.”

이영이 익산댁의 질문에 어색한 웃음과 함께 대꾸한 뒤, 비타민이 녹아든 물을 마셨다. 차가운 물이 들어가니 그나마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두통이 가라앉은 건 아니지만 말이다. 수더분한 인상의 익산댁이 냉장고 문을 열고 포장된 갈비를 꺼내며 말을 이었다.

“몸이 그렇게 약해서 어디에 쓴대요? 아무리 남자들이 가냘프고 연약해 보이는 여자를 좋아해도 그건 말 그대로 그렇게 ‘보이는’ 걸 좋아하는 거지, 진짜 연약한 걸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요.”

“그래요?”

그녀가 흐릿하게 웃으며 대꾸하자 익산댁이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짐짓 으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래 봬도 내가 소싯적에 남자들한테 인기가 꽤 있었거든요? 나 좋다던 남자들이 한 트럭은 거뜬히 넘었으니. 어쨌든 그러니까 남자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내가 하는 말을 무조건 믿어도 좋아요.”

이영은 익산댁의 넉살 좋은 말에 거듭 소리 없이 웃다가 거실로 나왔다. 제 방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몸을 돌리려는 순간, 안방 쪽에서 이영의 모친인 한정숙이 나왔다. 이영은 정숙과 마주치자마자 흠칫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숙였다.

“……쯧.”

정숙은 뭐가 그렇게 못마땅한지 이영을 보자마자 혀를 차더니 돌아서서 거실로 향했다. 차가운 모친의 태도에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계단을 올라갔다.

2층에 막 올라와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맞은편 방문이 열리고 필성이 그 안에서 나왔다. 얇은 파자마 하나만을 걸치고 상반신은 벌거벗은 그의 모습에 이영이 깜짝 놀라 황급히 방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필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넌 오빠 보고도 인사 안 하냐?”

“…….”

이영은 입술을 앙다문 채 침묵을 고수했다. 그 모습을 보던 필성의 얼굴이 험악해지려는 순간, 다른 방에서 수연이 나오면서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다.

“내버려 둬. 오빠는 저런 계집애한테 굳이 인사받고 싶어? 나 같으면 재수 없어서라도 안 받아.”

이영은 차디찬 이복 언니의 말에도 역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1층으로 내려가기를 그저 묵묵히 기다렸을 뿐이다. 수연이 먼저 계단을 내려가고 필성이 그 뒤를 따랐다. 그러고는 이영의 옆을 막 지나가려다 말고 멈춰 서더니 그녀의 가느다란 팔을 꽉 움켜잡았다.

“……!”

이영의 얼굴이 핏기 없이 창백해졌다. 그녀의 그런 반응을 즐기기라도 하듯이 필성은 몸까지 슬쩍 기울여 그녀의 얼굴 가까이 제 얼굴을 들이댄 채 움켜잡은 팔을 주물렀다. 희롱하는 게 분명한 손길이었다. 이영은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걸 어금니를 악물고 참아야 했다.

“큭.”

필성은 이영의 반응에 재미있다는 듯 목을 울려 웃더니 잡았던 그녀의 팔을 놓고 경쾌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그 발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이영은 그 자리에 서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가족이 되고 싶었던 바람이 산산이 부서졌던 건 열다섯 살 때의 어느 날이었다. 늘 그랬듯 밤늦게까지 책을 읽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던, 그런 평범한 밤이었다. 잠들어 있다가 가장 먼저 느낀 건 지독한 술 냄새였다. 뒤이어 느낀 건 자신의 몸을 짓누르고 있는 묵직한 무게였다. 그리고…….

그녀는 송곳으로 후벼 파는 듯한 두통을 견디지 못하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열다섯, 여물지도 못했던 몸을 탐한 손의 주인은 바로 제 이복 오빠, 공필성이었다.

시간이 이렇듯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게 그날의 악몽을 털어놓는다. 이영은 힘없이 주저앉은 채 덜덜 떨리는 몸을 양팔로 감싸고 앞으로 허리를 구부렸다. 흘러내린 머리칼 사이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바닥에 얼룩을 남겼다.

아무도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필성의 몸 아래에 깔려 옷이 거의 벗겨진 채 여기저기 얻어맞아 상처투성이가 된 그녀를 보고도 현익과 정숙, 수연은 모두 외면했다. 그나마 집 밖으로 추문이 새어 나갈까 두려워한 현익이 필성을 강제로 끌고 나갔을 뿐.

그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을지도 모르지.

적어도 그 덕분에 강간은 모면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또한 부친의 압박으로 인해 필성이 제게 그날처럼 노골적으로 손을 대는 일은 사라지기도 했고. 이영은 피식거리며 눈물에 젖어 차갑게 식은 제 뺨을 문질렀다. 그녀의 아버지, 공현익 회장이 염려한 것은 본인의 사회적 체면이었지, 놀라고 상처받은 당신의 딸이 아니었다.

그날, 어둠 속에 남겨진 그녀는 찢겨진 잠옷을 추스르며 홀로 그 모든 걸 감당해야 했다. 열다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당한 추행은 이영에게 큰 상처를 남겼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위로를 구할 수는 없었다.

‘위로’라…….

문득 이영은 전날 파티에서 받았던 위로를 기억해 냈다. 그 위로를 줬던 이가 지금 제 두통의 가장 큰 원인이라는 점이 우습기는 하지만.

“결혼이라니.”

그녀는 무심코 중얼거리다가 제풀에 놀라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다른 사람이 들은 것도 아닌데 가슴이 쿵쾅거리며 제멋대로 뛰었다.

“……누가 꿈이라고 해 줬으면 좋겠다, 진짜.”

하다못해 언제나 저를 못 잡아먹어 안달을 내는 이복 언니에게서라도 그런 말을 들을 수 있다면 기꺼이 조롱하는 말 몇 마디는 감사하게 받아들일 텐데. 이영은 헛된 바람을 품고 있는 제 자신이 우스워서 픽 웃으며 다시 무릎에 힘을 주고 일어섰다.

그녀는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가방을 챙겼다. 오늘은 학원 수업도 있는 날이라 다른 날보다 가방이 묵직했다. 도서관에 가서 서너 시간 공부를 한 뒤에 곧바로 학원에 갈 예정이다.

한동안 집에 갇혀 있다시피 한 터라 수업 진도를 따라가려면 더욱 노력해야 할 터였다. 설령 지금 제 머릿속이 전날 밤에 투척 된 ‘결혼 폭탄’ 때문에 엉망이 되었더라도 해야 할 일을 뒷전으로 미룰 수는 없으니 말이다. 이영은 한숨을 작게 내쉬고는 가방을 메고 방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발걸음이 무겁기 그지없었다.


잠을 설친 탓일까. 하루 종일 묵직한 두통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도 때도 없이 제 머릿속으로 찾아든 한 남자 때문이었다고 해야겠지만 말이다.

이영은 뻣뻣해진 목과 어깨를 한 손으로 주무르며 버스 정류장에서 내렸다. 학원 근처에 주차할 만한 곳이 별로 없는 터라 차를 몰고 나오는 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어느새 익숙해진 터였다.

그녀는 서늘한 밤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집까지 걸어 올라가려면 제법 시간이 소요되겠지만 그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머릿속을 정리하기에는 걷는 것보다 좋은 게 없으니 말이다.

대략 이십여 분을 걸었을까. 그녀는 다시 한번 어깨를 주물렀다. 다른 날보다 가방이 무거웠던 탓에 어깨가 많이 결렸다. 이영은 가방을 고쳐 메고 이마에 맺힌 땀을 슬쩍 손으로 닦아 냈다. 봄이 되었다고 하지만 아직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한 편인데도 땀이 났다.

그러고 보니 혜선이 감기 기운 있는 것 같았는데.

이영은 같이 저녁을 먹던 자리에서 계속 콜록거리며 기침을 하던 제 친구를 떠올리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생각난 김에 곧바로 혜선에게 전화를 걸까 하다가 뒤쪽에서 비춘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을 보고는 옆으로 비켜서며 마음을 바꿨다. 제 방에 들어가 마음 놓고 편히 통화를 하는 게 좋겠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렇게 발걸음을 재촉한 끝에 집 앞에 다다랐다. 그녀는 대문 앞에 서서 물끄러미 정면을 응시했다. 시커먼 대문이 마치 괴물의 벌어진 입처럼 느껴졌다. 이영은 그 안으로 들어가는 걸 생각한 것만으로도 답답함을 느끼고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가슴을 쳤다. 그러나 곧바로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들어갈 거면서 매번 이러는 것도 우습다. 달아날 용기도 없으면서. 벗어나려고 저항조차 하지 못하면서. 그러면서 저 스스로 피해자인 척하는 게 한심하기까지 했다. 이영은 창백해진 제 뺨을 쓱쓱 문지르고는 대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돌계단 양쪽으로 서 있는 석등이 고풍스러운 느낌을 자아냈다. 그렇지만 이영은 석등을 보면서 결코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아마 초등학교 5, 6학년 시절이었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제 어머니가 화를 냈던 것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녀에게 몇 번이나 따귀를 맞으며 돌계단 아래로 끌려 내려와 그대로 석등에 머리를 부딪쳤던 건 기억난다.

이영은 멍하니 석등을 쳐다보다가 불쑥 손을 들어 제 이마를 만져 보았다. 석등에 부딪쳤던 이마에는 화장으로도 완벽하게 가려지지 않는 흉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계, 계단에서 놀다가 굴렀어요.’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병원 응급실 의사에게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했던 것도 희미하게나마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머리가 깨져 붕대를 칭칭 감은 것보다 더 두려운 건, 조심하지 그랬냐며 매섭게 저를 쏘아보던 모친의 시선이었다.

이영은 정숙에게 학대당한 흔적을 둘러대느라고 거짓말을 일찌감치 배워야 했다. 처음에는 정숙이 시켜서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했지만, 나중에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여겼기에 저절로 거짓말을 입에 담았다.

그러면 저를 예뻐해 주지 않을까 하는 어리석은 마음에.

이영의 입술 끝이 비틀렸다가 이내 내려갔다. 이제는 일말의 기대도 없는데 씁쓸한 마음이 드는 건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미련이 남기라도 한 걸까. 그녀는 자조하며 소리 없이 웃고는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곧바로 2층으로 올라가려던 이영의 발걸음이 멈췄다. 거실에 현익과 정숙을 비롯해 필성, 수연까지 다들 모여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다과 접시와 그 주변에 둘러앉은 가족의 모습. 누가 봐도 단란한 가족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법한 광경이었다.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아니, 저로서는 끼어들 수조차 없는, 그런 완벽한 가족의 모습이었다. 가방끈을 만지작거리던 그녀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다녀왔습니다.”

“이리 와서 앉아라.”

작은 소리로 고개 숙여 인사하고 서둘러 2층으로 올라가려던 이영의 뒤에서 현익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상치 못한 부름에 이영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단 한 번도 이렇게 모여 앉은 자리에 저를 부른 적 없던 이가 바로 아버지, 현익이였다. 그런데 왜 갑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