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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공 냠냠 1화
0. 프롤로그
승언은 마른침을 삼켰다.
바라 마지않던 조건의 고액 아르바이트 제안을 수락했을 때만 하더라도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였다. 기껏해야 부작용 정도만 걱정했지, 설마 하루 두 시간의 면담이 문제가 될 거라곤 정말 상상도 못 했는데.
“……왜 그렇게 보죠?”
신혁의 물음에 승언은 당황한 속내를 감추며 말했다.
“제가 뭘요?”
“꼭…… 꼴린 것 같은 얼굴로 보고 있잖아요, 지금.”
이번에는 차마 감출 수가 없었다. 승언은 눈을 찌푸리며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합니까?”
“아니었어요? 나하고 자고 싶은 눈이었는데.”
“아닙니다.”
물론 생각지 못한 부분에서 성적 매력을 느낀 건 사실이었다. 아무리 저 얼굴이 취향이라지만, 성격은 전혀 아니올시다였는데……. 차분하고 냉정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뭔가 마구 흐트러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같고.
특히 저 눈매. 오만할 정도로 자신을 내려다보던 눈동자를 떠올리자 왜인지 뒷골이 쭈뼛해졌다. 이상한 흥분감이 맴돌며 더워졌다.
“뭐야, 기대했는데.”
“미안하지만 신혁 씨는 제 취향이 아니라서요.”
“그래요?”
신혁이 빙긋 웃으며 팔을 들어 올렸다. 승언은 ‘또 뭘 하려고?’ 생각하며 손에 든 음료를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때, 아래쪽에 무언가가 닿는 느낌이 들었다.
“이쪽은 아닌 것 같은데.”
솜털이 비죽 솟는 느낌에 얼어붙은 채로 시선만을 내리자 신혁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제 것을 꾸욱 누르고 있는 게 보였다.
“푸웁!”
승언이 입에 머금었던 음료를 삼키지 못하고 뿜어 버렸다. 당황으로 얼룩진 승언의 눈에 역시 놀란 신혁의 얼굴이 비쳤다.
연신 쿨럭거리면서도 승언은 가까스로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게, 이게 무슨 짓…….”
“서 있길래요.”
“서다니?”
입가에 묻은 음료를 훔치던 승언이 깜짝 놀라 내려다보자 정말로 앞섶이 부풀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충격으로 굳은 승언과는 달리 신혁은 즐겁다는 양 생글거렸다.
“취향이 아닌 남자한테도 꼴리나?”
“이건, 그냥 너무 오래 안 해서…….”
“뭐를? 자위를?”
“……자위도 그렇고…….”
잠자리 안 한 지도 꽤 되었으니 여상한 접촉에도 반응할 법했다. 신혁은 이상하게 요염한 구석까지 있는 남자기도 했고.
더욱 큰 문제는 신혁이 제 스스로의 매력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승언 씨 취향이 청순글래머였지? 딱 나였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승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신혁이 제 티 속으로 손을 집어넣곤 천천히 끌어 올리기 시작한 탓이었다. 기지개를 켤 때 언뜻 보였던 것과는 다른, 군살 하나 없이 매끈하고 납작한 배가 눈앞에 놓이자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흰 티가 거침없이 말려 올라가며 제법 탄탄하게 솟은 가슴이 슬쩍 드러났다. 체계적으로 관리했는지 탄력 있게 붙은 근육 모양이 예뻤다. 거기다 워낙 피부가 희어서 그런가, 유두조차도 옅어선 붉은 기가 돌았다.
저것도 어쨌든 가슴은 가슴이니까, 저렇게 늘씬한 몸에 저만한 볼륨이면 확실히 글래머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떠올리던 승언은 망연해졌다.
‘잘생긴 또라이라고 욕할 때는 언제고.’
말도 안 통하고, 도무지 그 속을 알 수가 없는 이상한 남자라고만 생각했던 신혁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이 상황은 대체 뭘까.
“마침 우리 둘 다 손길이 필요한 것 같은데, 그냥 서로 돕고 살죠. 이렇게 면담 시간을 마련한 것도 서로 의지하며 도우라는 뜻이었잖아요.”
“대화하랬지, 서로 욕구 풀어 주라곤 안 했습니다. 그러니까 쌓인 건 혼자 풉시다. 애꿎은 나까지 끌어들이지 말고.”
“그건 너무 재미없잖아요? 한계도 있고. 지금도 봐요. 살 좀 스쳤다고 이렇게 된 거.”
얇은 옷 위로 형형하게 치솟은 성기의 윤곽이 선명했다. 다시금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나도 도와줄 테니까…… 그러지 말고, 응?”
신혁은 승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승언이 주춤 물러났으나 성큼 더욱 가까이 다가온 신혁이 기어코 트레이닝 바지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윽.”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는 가벼운 손길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움찔거렸다. 옷 위로 성기를 감싸 쥔 신혁이 낮게 웃었다.
“……이렇게 흥분했으면서.”
힘주어 쥔 채로 문질러 대자 오싹거리며 쾌감이 치밀었다. 승언의 입술 새로 뜨거운 숨이 새어 나왔다. 몸에 힘이 들어가며 배가 조여들었다. 눈에 띄게 움찔거리는 걸 내려다보던 신혁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흐려졌다.
고작 옷 위로 문질러 댈 뿐인데 자극이 거셌다. 승언은 거부감이 들긴커녕 뒷골이 찌릿할 만큼 흥분하는 자신이 당황스러웠다. 금방에라도 터질 것처럼 몸집을 부풀고 움찔거리는 성기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호흡이 가빠지고 몸에 열이 오르며 눈앞이 어질해졌다. 이렇게 흥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신혁의 얼굴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붉어진 눈가와 입 안이 마르는지 제 입술을 핥는 혀, 흥분으로 가라앉은 눈동자 같은 게 너무 야해서.
승언은 자신을 빤히 들여다보는, 제 손길에 흥분하는 걸 관찰하는 기색이 역력한 눈동자를 마주 보는 게 힘들어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헉, 잠깐…….”
그 틈을 타 신혁의 손이 바지 속을 파고들었다. 속옷 안까지 단번에 밀려 들어와선 맨살을 움켜쥐는 손에 당황한 승언이 반사적으로 팔을 뻗었다. 한 손으로는 신혁의 손목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론 그의 얼굴을 밀어 냈으나 소용이 없었다.
승언의 것을 쥐곤 위아래로 쓸어내리는 손길이 과감했다. 옷 위로도 충분히 자극적이었는데, 축축하게 젖은 맨손으로 성기를 문질러 대자 아찔한 쾌감이 온몸을 내달렸다.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며 연신 움찔거리고, 허리가 살짝 굽었다.
“읏, 아…….”
승언은 하복부에서 느껴지는 짜릿함에 집중하느라 제 손이 아직 신혁의 얼굴을 밀어 내고 있단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신혁이 혀를 내밀어 제 시야를 가리는 발칙한 손을 핥은 건 그때였다.
“윽……!”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축축한 간지러움에 고개를 들자, 그런 그의 반응이 귀엽다는 양 눈을 휘며 웃는 신혁이 보였다. 황급히 손을 떼어 내려는데 신혁이 반대쪽 손으로 그의 팔뚝을 잡아챘다. 그러곤 승언의 손바닥부터 손끝까지 가볍게 입술을 가져다 댔다. 쪽 소리가 나는 귀여운 움직임이었다.
움찔거리며 손끝까지 힘이 들어가자 이번엔 그의 손가락을 입 속에 넣곤 빨아 댔다. 마치 펠라 하듯 볼이 팰 정도로 빨다가 혀를 내밀어 핥아 올리며 보란 듯이 싱긋 웃는 신혁의 모습이 지독하게 야해서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 남자한테 왜 이렇게 휘둘리는 거지? 왜 자꾸 흥분하는 거고.’
어쩌면 이것도 동의서에 명시되어 있던 부작용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승언은 생각했다. 더불어 역시 세상에 쉽게 돈 버는 일은 없다고도 말이다.
승언은 이 모든 일의 시작이나 다름없는 그날을 떠올렸다.
1. 혹하는 제안 (1)
“안녕히 가세요.”
승언은 조수석 창문을 통해 카드를 돌려주고 휴지를 건네며 습관처럼 인사를 던졌다. 시동을 거는 차를 뒤로한 채 느린 발걸음으로 휘적휘적 주유소 앞에 마련된 의자로 향했다. 무겁게 주저앉으며 모자를 한번 고쳐 쓰자 기름때가 묻어났다.
“후우, 덥다.”
뜨거운 볕 아래 이글거리며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올해는 또 얼마나 더우려고 벌써부터 이러는 건지. 질린 얼굴로 웃옷을 팔락거리던 승언이 끼고 있던 목장갑을 빼고 재킷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눈살을 찌푸린 채 화면을 몇 번 톡톡톡 두드리던 그의 손길이 멈췄다.
묘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바라보던 승언의 인상이 대번에 구겨졌다.
“뭐야, 이건.”
승언의 눈동자에 익숙한 초록색 창이 비쳤다. 혹 구직에 도움이 될까 싶어 검색해 보던 와중에 보게 된 이상한 질문 글이었다.
「임상 시험 부작용 위험에 대해 충분히 고지되고 있는데, 대체 왜 하는 겁니까?」
앞뒤 뚝 잘라먹고선 밑도 끝도 없이 툭 내뱉어진 질문 글은 광역 어그로를 끌기 위해 작정한 것처럼 보였다.
승언의 반듯한 눈썹이 비스듬히 올라가며 불쾌함을 드러냈다. 토독, 토도독. 치켜든 검지로 유행 지난 답변을 거칠게 달고는 주머니 속으로 쑤셔 넣었다.
허벅지에 올려 두었던 목장갑을 끼는데, 차 한 대가 주유소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고개를 들자 여전히 찌푸려진 눈에 매끈하게 잘빠진 검은색 차가 박혀 들어왔다.
승언이 멈춰 선 차 조수석으로 다가가자 간신히 카드를 주고받을 정도로 창문이 열렸다. 그는 열린 틈으로 두 눈동자를 맞춰 운전석에 앉은 검은 정장 차림의 사내에게 물었다.
“만 원이시죠?”
승언의 물음에 사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카드를 건넸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주유기의 버튼을 누르자 주변에 퍼져 있는 기름 냄새가 조금 더 진해졌다.
그사이에 결제를 끝냈지만 일부러 카드를 돌려주지 않은 승언이 차 뒷좌석을 힐끔거렸다.
주유소에서 꽤 오래 일했음에도 워낙 관심이 없는 터라 차종은 잘 몰랐다. 그래도 보고 듣는 게 아예 없진 않았다. 같이 일하는 현욱이 뭐 S클래스 어쩌구 했던 것도 같은데.
‘……회장님 차라고 했던가?’
꼭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 제 눈앞에 있는 검은색 차가 범상치 않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온몸으로 ‘나는 비싸! 너 따위는 평생 탈 수 없을 정도로!’라고 말하는 듯했으니까 말이다.
일명 회장님 차라고 불리는 차종이라고 했으니 뒷좌석, 정확히는 조수석 뒤에 앉은 사람이 높으신 분이라는 뜻일 터. 뭐 진짜 어느 기업의 회장쯤 되는 사람이거나 국회 의원이라도 탄 걸까? 하는 얄팍한 호기심에 힐끔거려 보아도 틈이 너무 좁았다.
선팅도 어찌나 진하게 해 놓았는지 온통 새카매서 밖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호기심도 호기심이지만, 차 안에서 시선이 느껴지는데 확인할 길이 없으니 원. 마치 동물원 원숭이처럼 관찰당하는 느낌인데 단순히 기분 탓일까.
시력도 좋지 않은 눈에 힘을 잔뜩 주고 흘겨보니 그나마 보이는 것은 진갈색 머리카락 몇 가닥이 전부였다.
꼴랑 만 원의 주유는 그렇게 길지 않았다. 주유구를 닫으며 카드와 휴지를 건네자 운전석의 사내가 조용히 받아 들곤 창문을 올렸다.
“안녕히 가세요.”
닫힌 창문에 대고 인사를 하자 잘빠진 검은색 세단은 망설임 없이 주유소를 빠져나갔다. 차의 뒤꽁무니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승언은 의문을 품은 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승언의 어깨가 살짝 흔들렸다. 현욱이 멍하니 서 있는 승언의 어깨를 두드린 거였다.
“고휘만 왔다 갔네?”
고휘만은 현욱이 붙인 별명으로 고급 휘발유 만 원어치의 줄임말이었다. 물론 그 고휘만은 매일 만 원씩 넣으러 오는 검은색 세단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 동네에서 보기 힘든 고급 차가 출석 도장 찍듯이 들르는 게 이상하기는 했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이지? 돈도 많은 사람이 매일 만 원씩. 무슨 PC방에 정액 넣으러 오는 것도 아니고.”
“내가 아냐.”
현욱은 휙 돌아서서 가는 승언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새끼. 까칠하기는.”
이제는 익숙하다만, 가끔씩 이런 생각이 들곤 했다. 저놈은 쓸데없이 적을 만들고 다닐 타입이라고. 그야 늘 짧은 대답에 까칠한 말투, 펴질 줄 모르는 미간과 그늘진 눈 밑까지 시비 거는 걸로 오해받기 딱 좋았으니 말이다.
현욱도 승언의 첫인상은 썩 좋지 않았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정말 별로였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 많은 건지 항상 찡그리고 있는 표정이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그래도 같은 시간대에 일하는데 조금은 친해져 볼까 하는 마음으로 몇 번 말을 걸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세 마디를 넘긴 적이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같이 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웃는 모습 한 번을 못 봤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오죽하면 뭐 문제라도 있나 고민했을까.
감정 결핍이나 그 비슷한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무렵, 현욱은 주유를 마치고 멍하게 서 있는 승언에게 몰래 접근했다. 재빠르게 승언의 팔 사이를 파고들어 갈비뼈 부근을 마구 간질이자 효과는 놀라웠다.
‘주유소가 떠나가라 웃던 그 모습이란…….’
사람 인상이 그렇게까지 달라질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아예 분위기가 판이하게 바뀌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본래도 재수 없을 정도로 잘생긴 놈인데 더 근사해진달까.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가 무너지면서 더더욱.
지금은 시력이 안 좋아서 오만상을 다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지만 그래도 종종 ‘그렇게 웃고 다니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말을 그렇게밖에 못 한다는 건 그렇다 쳐도, 인상까지 쓰고 다니니 괜한 오해를 사고 있는 게 안타까워서였다.
얼굴만 좀 펴져도 인기가 지금보다 배는 더 많을 텐데…….
“야.”
“왜.”
“렌즈 끼고 다닐 생각 없냐?”
“눈 뻑뻑해서 싫어.”
“아니면 안경이라도…….”
“귀찮아.”
하여간 귀여운 구석이라곤 없는 놈 같으니. 가볍게 혀를 찬 현욱이 말을 돌렸다.
“퇴근하고 뭐 하냐? 또 뭐 일해?”
“아니, 오늘은 이게 끝.”
“오올, 웬일로? 잘됐다. 나랑 술 먹자.”
키 크고 얼굴도 빤질빤질 잘생긴 승언은 당연히 인기가 많았다. 같이 있으면 여자들이 먼저 호감을 드러내며 다가오는 일이 잦았고, 체격이 좋아서인가 풍기는 분위기가 남달라서 그런가 희한하게 섹시한 누님들도 많이 들러붙었다. 그런 승언의 곁에 있으면 말 그대로 꿀 빨 수가 있었다.
승언이 이놈 옆에서 꿀 한 모금이라도 더 빨아먹으려는 꿀벌 같은 존재는 현욱뿐만이 아닌지라 실상 그의 인기는 여자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지금도 소개팅이다 뭐다 승언을 끌어들이려는 놈들이 줄 서 있었다.
문제는 승언이 그런 거에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점이었다.
“싫어.”
“아, 왜! 형이 쏠게!”
“집 가서 일자리 알아볼 거야.”
“뭔 일을 또 구해? 야, 그거 하루 안 알아본다고 어떻게 돼?”
“어, 난 어떻게 돼. 지금 이 순간에도 몇십 건씩 일자리가 생겨나고 있다고. 좋은 자리 생겼는데 다른 사람이 채 가면 어떡해.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말 모르냐.”
“우리 지금도 일하고 있거든? 됐다, 됐어. 치사한 애늙은이 새끼. 혼자 존나 맛있는 거 먹을란다.”
어울리지도 않게 입술을 삐죽 내민 채 주유소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리는 현욱을 보며 승언이 짧게 혀를 찼다.
“저놈은 언제 철들려나.”
하루도 빠짐없이 지각하는 주제에 돈 생기는 족족 술을 먹거나 노는 데에 탕진했다. 옆에서 보고 있으면 한심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돈 빌려 달라거나 징글징글하게 매달리거나 하진 않으니 나쁜 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각할지언정 무단결근하는 일도 여태껏 없었고.
그러니까 귀찮은데도 꼬박꼬박 답해 주었지, 아니었으면 진작 꺼지라고 말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간다, 내일 보자.”
“와, 새끼. 진짜 끝까지 매정하네. 좀 놀아 주면 어디가 덧나냐?”
“응, 덧나.”
들릴 듯 말 듯 욕으로 랩하는 현욱에게 승언은 길고 곧은 중지를 뻗어 보여 준 뒤 집으로 돌아왔다.
하루에도 몇 개씩 알바를 하는 통에 집에 들어오면 쓰러져 버릴 만도 한데 승언은 그래 본 적이 없었다. 고단한 몸을 이끌고 곧장 욕실로 향했다. 몸에 배어 있는 기름 냄새가 싫었다.
샤워기를 틀어 놓고 하염없이 물을 맞고 있자 몸이 노곤해졌다. 그 느낌이 좋아서 더운 날씨임에도 일부러 따뜻한 물로 씻었다. 수증기가 욕실 안을 가득 채워 안 그래도 흐린 시야를 막았다. 승언은 뿌예진 허공을 잠깐 노려보다가 눈을 감았다. 샤워는 승언이 쉬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했다.
꽤 오랫동안 욕실에 있던 그가 젖은 머리 위에 수건 한 장을 걸친 채 밖으로 나왔다. 뿌연 욕실을 등진 승언의 몸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났다. 물기가 남아 있는 채로 선풍기를 켜자 피부 온도가 빠르게 낮아지며 그럭저럭 시원해졌다.
머리 위에 올려져 있던 수건을 끌어 내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몸을 대충 닦아 내자 탄력 있는 근육이 모습을 드러냈다. 잘 갈라진 근육은 어떠한 운동이나 관리로 생겨난 게 아니었다. 다부진 몸은 그의 바쁜 생활로 인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남들보다 배는 짧은 하루인데 그 안에 어떻게 운동까지 하겠는가. 그런 건 시간이 남는 사람이나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굳이 관리하지 않아도 될 만큼 타고나게 벌어진 어깨와 큰 키를 가지고 있었기에 딱히 몸 좋은 사람들을 보며 부러워했던 적도 없었다.
승언은 젖은 발을 매트에 몇 번 슥 문대고는 걸음을 옮겨 컴퓨터 앞에 가서 앉았다. 말리지 않은 머리에서는 여전히 물이 뚝뚝 떨어져 어깨와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딸칵거리는 몇 번의 소리와 함께 주유소에서 보았던 사이트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자신의 프로필 옆에 알림이 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승언의 눈이 짧은 순간 커졌다가 다시 평소대로 찌푸려졌다. 서둘러 알림을 클릭하자 제가 쓴 답변이 채택되었다는 문구가 있었다.
“내 답변이 채택되었다고?”
승언은 제가 적은 글을 확인했다. 성의도, 재미도 없는 답변에 댓글이 하나 달려 있었다. 눌러 보자 「질문자입니다. 맛있게 드세요 ^^.」라고 적혀 있었다. 질문 글과는 다른 친절한 답변에 승언은 당황스러웠다.
천천히 스크롤을 내려 다른 답변을 확인하자 그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재.택.근.무.이.젠.편.하.게.집.에.서.일.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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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그러진 그의 동공에 비슷한 내용의 광고 글들이 빠르게 지나쳐 갔다. 도로 제일 위까지 올라왔을 때 제가 쓴 유치한 문장이 콱 박혀 들어왔다.
「내공 냠냠.」
깊은 한숨을 한번 내쉰 승언이 키보드를 타닥타닥 눌러 댔다.
“공짜로 먹을 순 없지.”
***
삐-삐-삐-
간밤 새 방 안을 가득 채웠던 어둠이 미처 다 빠져나가지도 못한 이른 시간이었다. 하루를 일찍 여는 요란한 소리가 끊길 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졌다.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커다란 손이 침대 위를 더듬거리며 울고 있는 핸드폰을 찾았다. 이내 손에 잡힌 핸드폰을 이불 속으로 끌어당기자 환한 불빛이 승언의 얼굴을 밝혔다.
쉽게 뜨이지 않는 눈을 한껏 찌푸린 채 여전히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을 익숙한 손놀림으로 꺼 버렸다. 밤새 일자리를 알아보다가 잠이 든 걸 여실히 드러내듯 화면엔 아르바이트 어플이 떠 있었다.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진 몸이 제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아 승언은 엎드린 상태로 몇 번이고 상체를 일으켰다 쓰러지기를 반복했다.
“후.”
정신을 차리려는 듯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던 승언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앞으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거의 감다시피 뜨고 있던 눈꺼풀에 점점 힘이 들어가더니 언뜻 날카로워 보이는 눈매가 또렷해졌다. 남들보다 조금 짙은 고동색의 눈동자는 아무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것처럼 건조해 보였다.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하는데 걸음마다 추를 달아 놓은 것처럼 한없이 무거웠다.
대충 씻고 나올 때까지도 방 안은 여전히 어두웠다. 하늘에 걸린 희미한 달이 해가 완전히 뜨려면 아직 멀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었다.
승언은 늘 이렇게 남들보다 이른 하루를 시작했다. 그는 굳이 불을 켜지 않고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은은한 달빛을 조명 삼아 옷장을 뒤적거렸다.
검은색 티에 검은색 트레이닝 바지로 갈아입은 승언이 모자를 눌러쓰며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제법 식은 새벽 공기가 몸을 감쌌다. 짧게 숨을 훅 들이마시며 빠르게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이내 빌라 구석에 세워 두었던 자전거에 가뿐하게 올라타 페달을 굴리기 시작했다.
0. 프롤로그
승언은 마른침을 삼켰다.
바라 마지않던 조건의 고액 아르바이트 제안을 수락했을 때만 하더라도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였다. 기껏해야 부작용 정도만 걱정했지, 설마 하루 두 시간의 면담이 문제가 될 거라곤 정말 상상도 못 했는데.
“……왜 그렇게 보죠?”
신혁의 물음에 승언은 당황한 속내를 감추며 말했다.
“제가 뭘요?”
“꼭…… 꼴린 것 같은 얼굴로 보고 있잖아요, 지금.”
이번에는 차마 감출 수가 없었다. 승언은 눈을 찌푸리며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합니까?”
“아니었어요? 나하고 자고 싶은 눈이었는데.”
“아닙니다.”
물론 생각지 못한 부분에서 성적 매력을 느낀 건 사실이었다. 아무리 저 얼굴이 취향이라지만, 성격은 전혀 아니올시다였는데……. 차분하고 냉정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뭔가 마구 흐트러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같고.
특히 저 눈매. 오만할 정도로 자신을 내려다보던 눈동자를 떠올리자 왜인지 뒷골이 쭈뼛해졌다. 이상한 흥분감이 맴돌며 더워졌다.
“뭐야, 기대했는데.”
“미안하지만 신혁 씨는 제 취향이 아니라서요.”
“그래요?”
신혁이 빙긋 웃으며 팔을 들어 올렸다. 승언은 ‘또 뭘 하려고?’ 생각하며 손에 든 음료를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때, 아래쪽에 무언가가 닿는 느낌이 들었다.
“이쪽은 아닌 것 같은데.”
솜털이 비죽 솟는 느낌에 얼어붙은 채로 시선만을 내리자 신혁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제 것을 꾸욱 누르고 있는 게 보였다.
“푸웁!”
승언이 입에 머금었던 음료를 삼키지 못하고 뿜어 버렸다. 당황으로 얼룩진 승언의 눈에 역시 놀란 신혁의 얼굴이 비쳤다.
연신 쿨럭거리면서도 승언은 가까스로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게, 이게 무슨 짓…….”
“서 있길래요.”
“서다니?”
입가에 묻은 음료를 훔치던 승언이 깜짝 놀라 내려다보자 정말로 앞섶이 부풀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충격으로 굳은 승언과는 달리 신혁은 즐겁다는 양 생글거렸다.
“취향이 아닌 남자한테도 꼴리나?”
“이건, 그냥 너무 오래 안 해서…….”
“뭐를? 자위를?”
“……자위도 그렇고…….”
잠자리 안 한 지도 꽤 되었으니 여상한 접촉에도 반응할 법했다. 신혁은 이상하게 요염한 구석까지 있는 남자기도 했고.
더욱 큰 문제는 신혁이 제 스스로의 매력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승언 씨 취향이 청순글래머였지? 딱 나였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승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신혁이 제 티 속으로 손을 집어넣곤 천천히 끌어 올리기 시작한 탓이었다. 기지개를 켤 때 언뜻 보였던 것과는 다른, 군살 하나 없이 매끈하고 납작한 배가 눈앞에 놓이자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흰 티가 거침없이 말려 올라가며 제법 탄탄하게 솟은 가슴이 슬쩍 드러났다. 체계적으로 관리했는지 탄력 있게 붙은 근육 모양이 예뻤다. 거기다 워낙 피부가 희어서 그런가, 유두조차도 옅어선 붉은 기가 돌았다.
저것도 어쨌든 가슴은 가슴이니까, 저렇게 늘씬한 몸에 저만한 볼륨이면 확실히 글래머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떠올리던 승언은 망연해졌다.
‘잘생긴 또라이라고 욕할 때는 언제고.’
말도 안 통하고, 도무지 그 속을 알 수가 없는 이상한 남자라고만 생각했던 신혁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이 상황은 대체 뭘까.
“마침 우리 둘 다 손길이 필요한 것 같은데, 그냥 서로 돕고 살죠. 이렇게 면담 시간을 마련한 것도 서로 의지하며 도우라는 뜻이었잖아요.”
“대화하랬지, 서로 욕구 풀어 주라곤 안 했습니다. 그러니까 쌓인 건 혼자 풉시다. 애꿎은 나까지 끌어들이지 말고.”
“그건 너무 재미없잖아요? 한계도 있고. 지금도 봐요. 살 좀 스쳤다고 이렇게 된 거.”
얇은 옷 위로 형형하게 치솟은 성기의 윤곽이 선명했다. 다시금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나도 도와줄 테니까…… 그러지 말고, 응?”
신혁은 승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승언이 주춤 물러났으나 성큼 더욱 가까이 다가온 신혁이 기어코 트레이닝 바지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윽.”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는 가벼운 손길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움찔거렸다. 옷 위로 성기를 감싸 쥔 신혁이 낮게 웃었다.
“……이렇게 흥분했으면서.”
힘주어 쥔 채로 문질러 대자 오싹거리며 쾌감이 치밀었다. 승언의 입술 새로 뜨거운 숨이 새어 나왔다. 몸에 힘이 들어가며 배가 조여들었다. 눈에 띄게 움찔거리는 걸 내려다보던 신혁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흐려졌다.
고작 옷 위로 문질러 댈 뿐인데 자극이 거셌다. 승언은 거부감이 들긴커녕 뒷골이 찌릿할 만큼 흥분하는 자신이 당황스러웠다. 금방에라도 터질 것처럼 몸집을 부풀고 움찔거리는 성기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호흡이 가빠지고 몸에 열이 오르며 눈앞이 어질해졌다. 이렇게 흥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신혁의 얼굴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붉어진 눈가와 입 안이 마르는지 제 입술을 핥는 혀, 흥분으로 가라앉은 눈동자 같은 게 너무 야해서.
승언은 자신을 빤히 들여다보는, 제 손길에 흥분하는 걸 관찰하는 기색이 역력한 눈동자를 마주 보는 게 힘들어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헉, 잠깐…….”
그 틈을 타 신혁의 손이 바지 속을 파고들었다. 속옷 안까지 단번에 밀려 들어와선 맨살을 움켜쥐는 손에 당황한 승언이 반사적으로 팔을 뻗었다. 한 손으로는 신혁의 손목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론 그의 얼굴을 밀어 냈으나 소용이 없었다.
승언의 것을 쥐곤 위아래로 쓸어내리는 손길이 과감했다. 옷 위로도 충분히 자극적이었는데, 축축하게 젖은 맨손으로 성기를 문질러 대자 아찔한 쾌감이 온몸을 내달렸다.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며 연신 움찔거리고, 허리가 살짝 굽었다.
“읏, 아…….”
승언은 하복부에서 느껴지는 짜릿함에 집중하느라 제 손이 아직 신혁의 얼굴을 밀어 내고 있단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신혁이 혀를 내밀어 제 시야를 가리는 발칙한 손을 핥은 건 그때였다.
“윽……!”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축축한 간지러움에 고개를 들자, 그런 그의 반응이 귀엽다는 양 눈을 휘며 웃는 신혁이 보였다. 황급히 손을 떼어 내려는데 신혁이 반대쪽 손으로 그의 팔뚝을 잡아챘다. 그러곤 승언의 손바닥부터 손끝까지 가볍게 입술을 가져다 댔다. 쪽 소리가 나는 귀여운 움직임이었다.
움찔거리며 손끝까지 힘이 들어가자 이번엔 그의 손가락을 입 속에 넣곤 빨아 댔다. 마치 펠라 하듯 볼이 팰 정도로 빨다가 혀를 내밀어 핥아 올리며 보란 듯이 싱긋 웃는 신혁의 모습이 지독하게 야해서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 남자한테 왜 이렇게 휘둘리는 거지? 왜 자꾸 흥분하는 거고.’
어쩌면 이것도 동의서에 명시되어 있던 부작용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승언은 생각했다. 더불어 역시 세상에 쉽게 돈 버는 일은 없다고도 말이다.
승언은 이 모든 일의 시작이나 다름없는 그날을 떠올렸다.
1. 혹하는 제안 (1)
“안녕히 가세요.”
승언은 조수석 창문을 통해 카드를 돌려주고 휴지를 건네며 습관처럼 인사를 던졌다. 시동을 거는 차를 뒤로한 채 느린 발걸음으로 휘적휘적 주유소 앞에 마련된 의자로 향했다. 무겁게 주저앉으며 모자를 한번 고쳐 쓰자 기름때가 묻어났다.
“후우, 덥다.”
뜨거운 볕 아래 이글거리며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올해는 또 얼마나 더우려고 벌써부터 이러는 건지. 질린 얼굴로 웃옷을 팔락거리던 승언이 끼고 있던 목장갑을 빼고 재킷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눈살을 찌푸린 채 화면을 몇 번 톡톡톡 두드리던 그의 손길이 멈췄다.
묘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바라보던 승언의 인상이 대번에 구겨졌다.
“뭐야, 이건.”
승언의 눈동자에 익숙한 초록색 창이 비쳤다. 혹 구직에 도움이 될까 싶어 검색해 보던 와중에 보게 된 이상한 질문 글이었다.
「임상 시험 부작용 위험에 대해 충분히 고지되고 있는데, 대체 왜 하는 겁니까?」
앞뒤 뚝 잘라먹고선 밑도 끝도 없이 툭 내뱉어진 질문 글은 광역 어그로를 끌기 위해 작정한 것처럼 보였다.
승언의 반듯한 눈썹이 비스듬히 올라가며 불쾌함을 드러냈다. 토독, 토도독. 치켜든 검지로 유행 지난 답변을 거칠게 달고는 주머니 속으로 쑤셔 넣었다.
허벅지에 올려 두었던 목장갑을 끼는데, 차 한 대가 주유소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고개를 들자 여전히 찌푸려진 눈에 매끈하게 잘빠진 검은색 차가 박혀 들어왔다.
승언이 멈춰 선 차 조수석으로 다가가자 간신히 카드를 주고받을 정도로 창문이 열렸다. 그는 열린 틈으로 두 눈동자를 맞춰 운전석에 앉은 검은 정장 차림의 사내에게 물었다.
“만 원이시죠?”
승언의 물음에 사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카드를 건넸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주유기의 버튼을 누르자 주변에 퍼져 있는 기름 냄새가 조금 더 진해졌다.
그사이에 결제를 끝냈지만 일부러 카드를 돌려주지 않은 승언이 차 뒷좌석을 힐끔거렸다.
주유소에서 꽤 오래 일했음에도 워낙 관심이 없는 터라 차종은 잘 몰랐다. 그래도 보고 듣는 게 아예 없진 않았다. 같이 일하는 현욱이 뭐 S클래스 어쩌구 했던 것도 같은데.
‘……회장님 차라고 했던가?’
꼭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 제 눈앞에 있는 검은색 차가 범상치 않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온몸으로 ‘나는 비싸! 너 따위는 평생 탈 수 없을 정도로!’라고 말하는 듯했으니까 말이다.
일명 회장님 차라고 불리는 차종이라고 했으니 뒷좌석, 정확히는 조수석 뒤에 앉은 사람이 높으신 분이라는 뜻일 터. 뭐 진짜 어느 기업의 회장쯤 되는 사람이거나 국회 의원이라도 탄 걸까? 하는 얄팍한 호기심에 힐끔거려 보아도 틈이 너무 좁았다.
선팅도 어찌나 진하게 해 놓았는지 온통 새카매서 밖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호기심도 호기심이지만, 차 안에서 시선이 느껴지는데 확인할 길이 없으니 원. 마치 동물원 원숭이처럼 관찰당하는 느낌인데 단순히 기분 탓일까.
시력도 좋지 않은 눈에 힘을 잔뜩 주고 흘겨보니 그나마 보이는 것은 진갈색 머리카락 몇 가닥이 전부였다.
꼴랑 만 원의 주유는 그렇게 길지 않았다. 주유구를 닫으며 카드와 휴지를 건네자 운전석의 사내가 조용히 받아 들곤 창문을 올렸다.
“안녕히 가세요.”
닫힌 창문에 대고 인사를 하자 잘빠진 검은색 세단은 망설임 없이 주유소를 빠져나갔다. 차의 뒤꽁무니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승언은 의문을 품은 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승언의 어깨가 살짝 흔들렸다. 현욱이 멍하니 서 있는 승언의 어깨를 두드린 거였다.
“고휘만 왔다 갔네?”
고휘만은 현욱이 붙인 별명으로 고급 휘발유 만 원어치의 줄임말이었다. 물론 그 고휘만은 매일 만 원씩 넣으러 오는 검은색 세단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 동네에서 보기 힘든 고급 차가 출석 도장 찍듯이 들르는 게 이상하기는 했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이지? 돈도 많은 사람이 매일 만 원씩. 무슨 PC방에 정액 넣으러 오는 것도 아니고.”
“내가 아냐.”
현욱은 휙 돌아서서 가는 승언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새끼. 까칠하기는.”
이제는 익숙하다만, 가끔씩 이런 생각이 들곤 했다. 저놈은 쓸데없이 적을 만들고 다닐 타입이라고. 그야 늘 짧은 대답에 까칠한 말투, 펴질 줄 모르는 미간과 그늘진 눈 밑까지 시비 거는 걸로 오해받기 딱 좋았으니 말이다.
현욱도 승언의 첫인상은 썩 좋지 않았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정말 별로였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 많은 건지 항상 찡그리고 있는 표정이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그래도 같은 시간대에 일하는데 조금은 친해져 볼까 하는 마음으로 몇 번 말을 걸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세 마디를 넘긴 적이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같이 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웃는 모습 한 번을 못 봤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오죽하면 뭐 문제라도 있나 고민했을까.
감정 결핍이나 그 비슷한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무렵, 현욱은 주유를 마치고 멍하게 서 있는 승언에게 몰래 접근했다. 재빠르게 승언의 팔 사이를 파고들어 갈비뼈 부근을 마구 간질이자 효과는 놀라웠다.
‘주유소가 떠나가라 웃던 그 모습이란…….’
사람 인상이 그렇게까지 달라질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아예 분위기가 판이하게 바뀌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본래도 재수 없을 정도로 잘생긴 놈인데 더 근사해진달까.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가 무너지면서 더더욱.
지금은 시력이 안 좋아서 오만상을 다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지만 그래도 종종 ‘그렇게 웃고 다니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말을 그렇게밖에 못 한다는 건 그렇다 쳐도, 인상까지 쓰고 다니니 괜한 오해를 사고 있는 게 안타까워서였다.
얼굴만 좀 펴져도 인기가 지금보다 배는 더 많을 텐데…….
“야.”
“왜.”
“렌즈 끼고 다닐 생각 없냐?”
“눈 뻑뻑해서 싫어.”
“아니면 안경이라도…….”
“귀찮아.”
하여간 귀여운 구석이라곤 없는 놈 같으니. 가볍게 혀를 찬 현욱이 말을 돌렸다.
“퇴근하고 뭐 하냐? 또 뭐 일해?”
“아니, 오늘은 이게 끝.”
“오올, 웬일로? 잘됐다. 나랑 술 먹자.”
키 크고 얼굴도 빤질빤질 잘생긴 승언은 당연히 인기가 많았다. 같이 있으면 여자들이 먼저 호감을 드러내며 다가오는 일이 잦았고, 체격이 좋아서인가 풍기는 분위기가 남달라서 그런가 희한하게 섹시한 누님들도 많이 들러붙었다. 그런 승언의 곁에 있으면 말 그대로 꿀 빨 수가 있었다.
승언이 이놈 옆에서 꿀 한 모금이라도 더 빨아먹으려는 꿀벌 같은 존재는 현욱뿐만이 아닌지라 실상 그의 인기는 여자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지금도 소개팅이다 뭐다 승언을 끌어들이려는 놈들이 줄 서 있었다.
문제는 승언이 그런 거에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점이었다.
“싫어.”
“아, 왜! 형이 쏠게!”
“집 가서 일자리 알아볼 거야.”
“뭔 일을 또 구해? 야, 그거 하루 안 알아본다고 어떻게 돼?”
“어, 난 어떻게 돼. 지금 이 순간에도 몇십 건씩 일자리가 생겨나고 있다고. 좋은 자리 생겼는데 다른 사람이 채 가면 어떡해.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말 모르냐.”
“우리 지금도 일하고 있거든? 됐다, 됐어. 치사한 애늙은이 새끼. 혼자 존나 맛있는 거 먹을란다.”
어울리지도 않게 입술을 삐죽 내민 채 주유소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리는 현욱을 보며 승언이 짧게 혀를 찼다.
“저놈은 언제 철들려나.”
하루도 빠짐없이 지각하는 주제에 돈 생기는 족족 술을 먹거나 노는 데에 탕진했다. 옆에서 보고 있으면 한심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돈 빌려 달라거나 징글징글하게 매달리거나 하진 않으니 나쁜 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각할지언정 무단결근하는 일도 여태껏 없었고.
그러니까 귀찮은데도 꼬박꼬박 답해 주었지, 아니었으면 진작 꺼지라고 말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간다, 내일 보자.”
“와, 새끼. 진짜 끝까지 매정하네. 좀 놀아 주면 어디가 덧나냐?”
“응, 덧나.”
들릴 듯 말 듯 욕으로 랩하는 현욱에게 승언은 길고 곧은 중지를 뻗어 보여 준 뒤 집으로 돌아왔다.
하루에도 몇 개씩 알바를 하는 통에 집에 들어오면 쓰러져 버릴 만도 한데 승언은 그래 본 적이 없었다. 고단한 몸을 이끌고 곧장 욕실로 향했다. 몸에 배어 있는 기름 냄새가 싫었다.
샤워기를 틀어 놓고 하염없이 물을 맞고 있자 몸이 노곤해졌다. 그 느낌이 좋아서 더운 날씨임에도 일부러 따뜻한 물로 씻었다. 수증기가 욕실 안을 가득 채워 안 그래도 흐린 시야를 막았다. 승언은 뿌예진 허공을 잠깐 노려보다가 눈을 감았다. 샤워는 승언이 쉬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했다.
꽤 오랫동안 욕실에 있던 그가 젖은 머리 위에 수건 한 장을 걸친 채 밖으로 나왔다. 뿌연 욕실을 등진 승언의 몸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났다. 물기가 남아 있는 채로 선풍기를 켜자 피부 온도가 빠르게 낮아지며 그럭저럭 시원해졌다.
머리 위에 올려져 있던 수건을 끌어 내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몸을 대충 닦아 내자 탄력 있는 근육이 모습을 드러냈다. 잘 갈라진 근육은 어떠한 운동이나 관리로 생겨난 게 아니었다. 다부진 몸은 그의 바쁜 생활로 인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남들보다 배는 짧은 하루인데 그 안에 어떻게 운동까지 하겠는가. 그런 건 시간이 남는 사람이나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굳이 관리하지 않아도 될 만큼 타고나게 벌어진 어깨와 큰 키를 가지고 있었기에 딱히 몸 좋은 사람들을 보며 부러워했던 적도 없었다.
승언은 젖은 발을 매트에 몇 번 슥 문대고는 걸음을 옮겨 컴퓨터 앞에 가서 앉았다. 말리지 않은 머리에서는 여전히 물이 뚝뚝 떨어져 어깨와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딸칵거리는 몇 번의 소리와 함께 주유소에서 보았던 사이트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자신의 프로필 옆에 알림이 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승언의 눈이 짧은 순간 커졌다가 다시 평소대로 찌푸려졌다. 서둘러 알림을 클릭하자 제가 쓴 답변이 채택되었다는 문구가 있었다.
“내 답변이 채택되었다고?”
승언은 제가 적은 글을 확인했다. 성의도, 재미도 없는 답변에 댓글이 하나 달려 있었다. 눌러 보자 「질문자입니다. 맛있게 드세요 ^^.」라고 적혀 있었다. 질문 글과는 다른 친절한 답변에 승언은 당황스러웠다.
천천히 스크롤을 내려 다른 답변을 확인하자 그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재.택.근.무.이.젠.편.하.게.집.에.서.일.하.세.요!
누구나 편하게 일할 수 있습니다. 20대부터 60대까지! 대학생, 직장인 투잡, 주부 부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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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그러진 그의 동공에 비슷한 내용의 광고 글들이 빠르게 지나쳐 갔다. 도로 제일 위까지 올라왔을 때 제가 쓴 유치한 문장이 콱 박혀 들어왔다.
「내공 냠냠.」
깊은 한숨을 한번 내쉰 승언이 키보드를 타닥타닥 눌러 댔다.
“공짜로 먹을 순 없지.”
***
삐-삐-삐-
간밤 새 방 안을 가득 채웠던 어둠이 미처 다 빠져나가지도 못한 이른 시간이었다. 하루를 일찍 여는 요란한 소리가 끊길 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졌다.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커다란 손이 침대 위를 더듬거리며 울고 있는 핸드폰을 찾았다. 이내 손에 잡힌 핸드폰을 이불 속으로 끌어당기자 환한 불빛이 승언의 얼굴을 밝혔다.
쉽게 뜨이지 않는 눈을 한껏 찌푸린 채 여전히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을 익숙한 손놀림으로 꺼 버렸다. 밤새 일자리를 알아보다가 잠이 든 걸 여실히 드러내듯 화면엔 아르바이트 어플이 떠 있었다.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진 몸이 제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아 승언은 엎드린 상태로 몇 번이고 상체를 일으켰다 쓰러지기를 반복했다.
“후.”
정신을 차리려는 듯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던 승언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앞으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거의 감다시피 뜨고 있던 눈꺼풀에 점점 힘이 들어가더니 언뜻 날카로워 보이는 눈매가 또렷해졌다. 남들보다 조금 짙은 고동색의 눈동자는 아무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것처럼 건조해 보였다.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하는데 걸음마다 추를 달아 놓은 것처럼 한없이 무거웠다.
대충 씻고 나올 때까지도 방 안은 여전히 어두웠다. 하늘에 걸린 희미한 달이 해가 완전히 뜨려면 아직 멀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었다.
승언은 늘 이렇게 남들보다 이른 하루를 시작했다. 그는 굳이 불을 켜지 않고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은은한 달빛을 조명 삼아 옷장을 뒤적거렸다.
검은색 티에 검은색 트레이닝 바지로 갈아입은 승언이 모자를 눌러쓰며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제법 식은 새벽 공기가 몸을 감쌌다. 짧게 숨을 훅 들이마시며 빠르게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이내 빌라 구석에 세워 두었던 자전거에 가뿐하게 올라타 페달을 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