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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잉그람 마녀의 의무》
1. 마녀는 잉그람 법전의 심판을 받는다. 다만 징역형 이상에 처하는 경우에는 발푸르기스 평의회로 신병을 이송한다.
2. 마녀는 1687년 체결된 발롬피에 협약의 심판을 받는다.
3. 마녀는 왕명을 즉시 따른다. 다만 잉그람 국왕은 천재지변이나 전쟁, 극심한 인명 피해가 우려되는 경우에만 마녀를 동원할 수 있다. 이때 국왕은 그 지역에 거주하는 마녀를 일차적으로 동원해야 하며,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른 때에만 다른 지역의 마녀를 동원할 수 있다. 동원에 따른 보수는 양자의 협의로써 결정한다.
4. 마녀는 계약을 통해 국가 사무를 관장할 수 있다. 이때 보수는 양자의 협의로서 결정한다.
5. 마녀는 다음 장소에서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 로엔그렌 내궁(內宮), 산티그마 교단에 공식적으로 귀속된 교회당, 괄티에로 벨리.
비밀 회동
어두운 방 안에 촛불이 올랐다.
“아가, 큼, 아가씨. 막시무스입니다.”
쥐 죽은 듯 고요한 사위로 중후한 음성이 퍼져 나갔다. 대답을 기다리듯 이어지는 침묵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적막은 좀체 깨지질 않았다.
그런데 문득,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슬리퍼를 질질 끌며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진다. 뒤이어 맥없이 의자를 끌어다 앉은 이가 무지근한 숨을 길게 내뱉었다.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음을 듣고 혀를 끌끌 차던 막시무스가 어지간히도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쳤다.
“엿새째 방에서 꼼짝도 안 하고 계신다고요. 이 막시무스, 병영을 돌아다니며 다 들었습니다. 아가씨의 악명이 어찌나 드높던지, 큼, 전나무 꼭대기에서도 고약한 마녀 어쩌고 하는 욕이 쩌렁쩌렁하답니다. 깁슨 대령도 아주 이를 갈고 있고요.”
작정하고 들이붓는 질책에도 맞은편 의자에 앉은 이는 별다른 반응이 없다. 이에 약이 올랐는지, 막시무스의 목소리에도 점차 열에 받치기 시작했다.
“근 2년, 아가씨치고 얌전히 계시기에 이제는 정말로 철이 드셨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사람이 그리 쉽게 바뀔 리가 없지요. 고기, 큼,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잘 먹는다고, 철이 드는 것도 애당초 제정신인 사람에게나 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가씨 같은 분께는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지요! 아직도 아가씨께 기대를 품고 계시는 주인님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 읍! 읍!”
“……이제야 좀 조용하네.”
아직도 꿈속을 거닐듯 몽롱한 음성이 조용히 들려온다. 악담이 줄기차게 내리꽂히던 사람이 하는 말이라기엔 지나치게 차분하고 느린 어조였다.
“잔소리는 고모한테 듣는 걸로도 충분하니까, 조사하라고 시킨 거나 자세히 말해 봐.”
“읍! 읍!”
“얼른?”
“읍!”
“아. 마법을 안 풀어 줬구나.”
나지막한 혼잣말에 이어 탁,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입을 틀어막는 마법에서 풀려난 시종이 왈칵 성을 냈다.
“아가씨! 어떻게 이런 야만적인 마법을 부리실 수가!”
“고작 이 정도로 야만적이라 하면 안 되지.”
“네?”
“한 번만 더 큰소리 내면, 다음번엔 통째로 삶아 먹으려고 했거든.”
잔뜩 기함한 막시무스가 사색이 되어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자는 의자를 아슬아슬하게 뒤로 기울이며 한가로이 말을 잇는다.
“왕자님 주변은 잘 살펴봤어?”
“예, 예…….”
“어떤데?”
여자가 의아한 기색을 내비치자, 막시무스는 퍼드덕 소리를 내며 황급히 대꾸했다.
“아가씨의 짐작이 맞았습니다.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아주 은밀하게 움직이는 통에 이 막시무스조차 여간 추적하기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만―”
“요점만 간단히.”
“골 아픈 놈들임엔 틀림없습니다.”
흐음, 콧소리를 내며 잠시 고심에 빠진 여자가 물었다.
“배후는?”
“네?”
“그 골 아픈 놈들의 배후는 누구냐고.”
“그, 그건 아직은 저도 잘…….”
다가올 참극을 예언한 막시무스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그에 발맞추어, 연약하던 촛불이 일순 시종의 그림자를 잡아먹을 것처럼 거세게 화하였다.
“무능해, 막시.”
“무, 무능하다니요! 그리고 제 이름은, 큼, 막시무스 살로티우스입니다! 멋대로 줄이지 마세요!”
“그건 너무 길잖아.”
“주인님께서 3일 밤낮 공들여 지어 주신 이름입니다!”
“어쨌든. 그걸 전부 부르는 건 너무 비효율적인 일이야.”
뒤로 기울였던 의자를 단숨에 쿵, 바닥으로 내리찧으며 여자는 고양이처럼 나른하게 기지개를 폈다. 언제 흉포했냐는 듯 애기 손톱만 하게 줄어든 불빛은 다시금 조신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아우, 슬슬 나갈 준비를 해야겠네.”
씩씩거리며 화를 짓누르던 막시무스가 처음으로 반색했다.
“다시 일하실 생각이 드신 겁니까? 그래요, 엿새나 노셨으니 일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밖에요! 그래도 아주 잘 생각하셨습니다! 장족의 발전이에요!”
“네가 무능하니까 내가 나갈 수밖에 없잖아.”
“예, 예. 다 제가 무능한 탓입……. 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시종이 반문했다.
“어쩌겠어. 무능한 시종을 둔 주인의 운명이려니 해야지.”
“제 주인은 아가씨가 아닙니다! 아니, 그리고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요? 서, 설마 지금 오킹엄으로 가시겠다는 소리는 아니지요? 아무리 알피어스 가문에서 내놓은 아가씨라 하여도 그렇게나 생각이 없으시진 않겠지요!”
“방금 그 말, 되게 기분 나쁘다.”
“힉!”
갑자기 우당탕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퍼드덕퍼드덕 막시무스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갔다. 그래 봤자 방구석이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귀찮은 지금의 여자에겐 족히 먼 거리다.
“일단 네가 먼저 오킹엄으로 가서 왕자와 접촉해.”
“그, 그다음은요?”
“그다음이라니?”
“그러고 아가씨께서 직접 오킹엄으로 오시려는 생각은 설마 아니겠지요? 그렇지요? 제발 대답을 좀 해 주세요!”
“말했잖아. 네가 무능한 탓에 내가 가야 한다고.”
“아니 됩니다! 저얼대로 아니 될 일이에요! 지금 국경의 상황을 몰라서 하시는 말씀입니까? 저 분리주의자들이 언제 또 날뛸지 모르는데, 깁슨 대령이 잘도 아가씨를 보내 주겠습니다!”
“그 대머리가 뭐라고 하든 말든. 난 이제 끝이야. 할 만큼 했어.”
“아니 된다니까요! 아가씨께서 그리 막가시면 그 뒷수습은 또 누가 하라고요! 결국 주인님의 몫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네가 유능했으면 됐잖아. 나도 여기서 쉬고, 고모도 솔즈베리에서 쉬고. 얼마나 좋았겠어?”
“으아악!”
이제껏 어떻게든 고상을 떨던 막시무스가 마구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어렵지 않게 꿰뚫어 본 여자가 대단히 귀찮은 기색으로 훠이 훠이 손짓한다.
“알았으면 얼른 나가 봐.”
“예! 예! 그렇지 않아도 나갈 생각이었습니다! 당장 주인님께로 날아가서 이 돼먹지 못한 일을 소상히 알려 드려야…….”
“하기만 해 봐. 그땐 정말로 튀겨 먹을 테니까.”
힉! 또다시 우당탕 소리를 낸 막시무스가 다급히 창문 너머로 사라졌다.
어느덧 끝물에 다다른 겨울. 아직은 찬 새벽 공기가 들이치는 창문을 손짓만으로 닫아건 여자가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란 가운을 끌고 비척거리며 침대 맡에 이른 여자는 풀썩, 태엽이 끊긴 인형처럼 이불 위로 스러졌다. 동시에 유일하게 사위를 밝히던 촛불도 순식간에 꺼진다.
방은 도로 암암한 어둠 속에 잠겼다.
1. 망나니 왕자
알렉 아크라이트. 그는 잉그람의 하나뿐인 왕자다.
하나뿐인 왕자라는 것은 즉 잉그람의 차기 국왕으로 가장 유력한 인사라는 뜻. 아무리 국왕이 실권을 잃은 나라라곤 하지만, 여전히 잉그람에서 국왕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며 왕가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도 상당했다. 이는 다시 말해, 올해 겨우 스물셋 된 젊은 왕자가 나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뽑히는 중요 인사로 대접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론적인 위상은 차치하고서라도, 왕자에 대한 잉그람 국민들의 애정은 오래전부터 기이할 만치 드높았다. 현 국왕인 하워드 아크라이트가 젊은 시절 벌였던 온갖 기행과 추문으로 재위 초 지지율이 바닥을 쳤던 것을 상기하면 상당히 의아스러운 일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알렉 왕자 역시 화려한 스캔들과 무성한 뒷소문을 몰고 다니는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전설을 써 내려갔던 젊은 시절 국왕을 떠올리게 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음에도, 국민들이 왕자에게 끊임없는 애정과 연민을 보내는 이유는 딱 한 가지다.
바로, 오래전 숨을 거둔 조세핀 왕비의 눈부신 후광이 왕자를 감싸고 있는 덕분이다.
젊은 시절, 꽃다운 미모를 무기로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숱한 여자들을 후리고 다녔던 하워드 국왕은 말 그대로 천하의 난봉꾼이었다. 잉그람 역사상 으뜸가는 성왕이라는 리처드 3세도 서른 명이 넘는 정부를 거느렸다는 야사로 유명하니, 사실상 여색만 탐했다면 하워드 국왕의 평판이 그리 바닥을 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일 ‘여색만’ 탐했다면 말이다.
안타깝게도 하워드 국왕은 여색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주일의 교회에서 만취하여 고꾸라지는 술꾼이었으며, 나이 지긋한 주교에게도 막말을 일삼는 양아치였다. 심지어 언젠가는 아들을 잃어 슬픔에 잠긴 고관대작의 아내에게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저속할 말로 추근거렸다가, 하이에나처럼 특종을 찾아 헤매던 일간지 기자에게 잘못 걸려 이튿날 신문 앞면에 대문짝하게 얼굴이 실리기도 했다.
그때 기사의 헤드라인이 <엄숙한 장례식에서도 염치를 모르는 난봉꾼, 부끄러운 줄 알라!>였으니, 젊은 날 국왕의 이미지가 어떠했는지는 대강 짐작하리라.
정말로 저런 놈팡이한테 왕관이 넘겨진단 말이야?’
‘말세야, 말세! 우리 뒷동네 건달도 저만치 상스럽지는 않겠어!’
당시 잉그람에선 어딜 가도 이런 대화가 들려올 지경이었다. 고향, 학교, 직장, 하다못해 키우는 동물로도 다툰다 할 정도로 분열의 상징인 잉그람 국민들이 그야말로 한마음 한뜻으로 합쳐지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역사상 그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일을 해낸 하워드 아크라이트에게 무궁한 영광이 있으리!
좌우지간 당시 왕자였던 하워드를 폐하고, 그의 누이동생인 캐서린 공주를 차기 국왕으로 올려야 한다는 의견이 진지하게 논의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음엔 틀림없다. 그럼에도 정신 못 차리고 ‘왕위? 엿이나 먹으라지!’라며 기자들 앞에서 공공연히 막말을 하고 다녔던 하워드가 개과천선하게 된 계기는 다름 아닌 조세핀 포크스였다.
당시 고작 열일곱. 성년을 1년 앞둔 조세핀은 포크스 공작의 막내딸로, 아름다운 외모와 기품 있는 태도로 사교계에선 일찍부터 유명한 아가씨였다. 그러나 타고나길 몸이 약하여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채링턴 지방에서 요양하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사냥을 나갔다가 우연찮게 채링턴 인근을 어슬렁거리던 하워드와 마주친 것이다.
운명의 신도 잔혹하시지, 순진한 조세핀 아가씨는 거죽만은 남부럽지 않게 잘생긴 하워드에게 순식간에 마음을 빼앗겼다. 치마 두른 여자면 일단 추근거리고 보는 하워드야 말할 것도 없었다.
자연스레 두 사람은 불같은 사랑에 빠져 서로밖엘 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다 돼도 하워드 왕자는 안 되노라 극구 반대하는 포크스 공작도, 너 같은 난봉꾼에게 저런 꽃다운 아가씨가 가당키나 하겠느냐는 당시 국왕의 힐난도 사소한 장애물이었을 뿐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 둘은 주변에서 쫑알대는 소리는 조금도 들어 먹질 않았다.
‘만나도 어떻게 저런 놈을 만나! 차라리 내 목에 칼을 꽂아라!’
애지중지 기른 막내딸을 천하의 개차반에게 보내야 할 처지에 이른 포크스 공작은 당연하게도 매일 밤 피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하워드의 부친 되는 국왕에게 조세핀이란 굴러들어 온 황금이나 진배없었다. 저러다가 어느 날 아들이 서른 살은 많은 여자에게 애를 보았다며 떳떳하게 들어오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국왕은 면전에선 몇 마디 책망하면서도 뒤돌아선 아주 좋아 죽었다. 결혼은 일사천리였다.
《잉그람 마녀의 의무》
1. 마녀는 잉그람 법전의 심판을 받는다. 다만 징역형 이상에 처하는 경우에는 발푸르기스 평의회로 신병을 이송한다.
2. 마녀는 1687년 체결된 발롬피에 협약의 심판을 받는다.
3. 마녀는 왕명을 즉시 따른다. 다만 잉그람 국왕은 천재지변이나 전쟁, 극심한 인명 피해가 우려되는 경우에만 마녀를 동원할 수 있다. 이때 국왕은 그 지역에 거주하는 마녀를 일차적으로 동원해야 하며,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른 때에만 다른 지역의 마녀를 동원할 수 있다. 동원에 따른 보수는 양자의 협의로써 결정한다.
4. 마녀는 계약을 통해 국가 사무를 관장할 수 있다. 이때 보수는 양자의 협의로서 결정한다.
5. 마녀는 다음 장소에서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 로엔그렌 내궁(內宮), 산티그마 교단에 공식적으로 귀속된 교회당, 괄티에로 벨리.
비밀 회동
어두운 방 안에 촛불이 올랐다.
“아가, 큼, 아가씨. 막시무스입니다.”
쥐 죽은 듯 고요한 사위로 중후한 음성이 퍼져 나갔다. 대답을 기다리듯 이어지는 침묵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적막은 좀체 깨지질 않았다.
그런데 문득,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슬리퍼를 질질 끌며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진다. 뒤이어 맥없이 의자를 끌어다 앉은 이가 무지근한 숨을 길게 내뱉었다.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음을 듣고 혀를 끌끌 차던 막시무스가 어지간히도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쳤다.
“엿새째 방에서 꼼짝도 안 하고 계신다고요. 이 막시무스, 병영을 돌아다니며 다 들었습니다. 아가씨의 악명이 어찌나 드높던지, 큼, 전나무 꼭대기에서도 고약한 마녀 어쩌고 하는 욕이 쩌렁쩌렁하답니다. 깁슨 대령도 아주 이를 갈고 있고요.”
작정하고 들이붓는 질책에도 맞은편 의자에 앉은 이는 별다른 반응이 없다. 이에 약이 올랐는지, 막시무스의 목소리에도 점차 열에 받치기 시작했다.
“근 2년, 아가씨치고 얌전히 계시기에 이제는 정말로 철이 드셨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사람이 그리 쉽게 바뀔 리가 없지요. 고기, 큼,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잘 먹는다고, 철이 드는 것도 애당초 제정신인 사람에게나 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가씨 같은 분께는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지요! 아직도 아가씨께 기대를 품고 계시는 주인님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 읍! 읍!”
“……이제야 좀 조용하네.”
아직도 꿈속을 거닐듯 몽롱한 음성이 조용히 들려온다. 악담이 줄기차게 내리꽂히던 사람이 하는 말이라기엔 지나치게 차분하고 느린 어조였다.
“잔소리는 고모한테 듣는 걸로도 충분하니까, 조사하라고 시킨 거나 자세히 말해 봐.”
“읍! 읍!”
“얼른?”
“읍!”
“아. 마법을 안 풀어 줬구나.”
나지막한 혼잣말에 이어 탁,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입을 틀어막는 마법에서 풀려난 시종이 왈칵 성을 냈다.
“아가씨! 어떻게 이런 야만적인 마법을 부리실 수가!”
“고작 이 정도로 야만적이라 하면 안 되지.”
“네?”
“한 번만 더 큰소리 내면, 다음번엔 통째로 삶아 먹으려고 했거든.”
잔뜩 기함한 막시무스가 사색이 되어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자는 의자를 아슬아슬하게 뒤로 기울이며 한가로이 말을 잇는다.
“왕자님 주변은 잘 살펴봤어?”
“예, 예…….”
“어떤데?”
여자가 의아한 기색을 내비치자, 막시무스는 퍼드덕 소리를 내며 황급히 대꾸했다.
“아가씨의 짐작이 맞았습니다.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아주 은밀하게 움직이는 통에 이 막시무스조차 여간 추적하기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만―”
“요점만 간단히.”
“골 아픈 놈들임엔 틀림없습니다.”
흐음, 콧소리를 내며 잠시 고심에 빠진 여자가 물었다.
“배후는?”
“네?”
“그 골 아픈 놈들의 배후는 누구냐고.”
“그, 그건 아직은 저도 잘…….”
다가올 참극을 예언한 막시무스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그에 발맞추어, 연약하던 촛불이 일순 시종의 그림자를 잡아먹을 것처럼 거세게 화하였다.
“무능해, 막시.”
“무, 무능하다니요! 그리고 제 이름은, 큼, 막시무스 살로티우스입니다! 멋대로 줄이지 마세요!”
“그건 너무 길잖아.”
“주인님께서 3일 밤낮 공들여 지어 주신 이름입니다!”
“어쨌든. 그걸 전부 부르는 건 너무 비효율적인 일이야.”
뒤로 기울였던 의자를 단숨에 쿵, 바닥으로 내리찧으며 여자는 고양이처럼 나른하게 기지개를 폈다. 언제 흉포했냐는 듯 애기 손톱만 하게 줄어든 불빛은 다시금 조신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아우, 슬슬 나갈 준비를 해야겠네.”
씩씩거리며 화를 짓누르던 막시무스가 처음으로 반색했다.
“다시 일하실 생각이 드신 겁니까? 그래요, 엿새나 노셨으니 일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밖에요! 그래도 아주 잘 생각하셨습니다! 장족의 발전이에요!”
“네가 무능하니까 내가 나갈 수밖에 없잖아.”
“예, 예. 다 제가 무능한 탓입……. 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시종이 반문했다.
“어쩌겠어. 무능한 시종을 둔 주인의 운명이려니 해야지.”
“제 주인은 아가씨가 아닙니다! 아니, 그리고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요? 서, 설마 지금 오킹엄으로 가시겠다는 소리는 아니지요? 아무리 알피어스 가문에서 내놓은 아가씨라 하여도 그렇게나 생각이 없으시진 않겠지요!”
“방금 그 말, 되게 기분 나쁘다.”
“힉!”
갑자기 우당탕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퍼드덕퍼드덕 막시무스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갔다. 그래 봤자 방구석이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귀찮은 지금의 여자에겐 족히 먼 거리다.
“일단 네가 먼저 오킹엄으로 가서 왕자와 접촉해.”
“그, 그다음은요?”
“그다음이라니?”
“그러고 아가씨께서 직접 오킹엄으로 오시려는 생각은 설마 아니겠지요? 그렇지요? 제발 대답을 좀 해 주세요!”
“말했잖아. 네가 무능한 탓에 내가 가야 한다고.”
“아니 됩니다! 저얼대로 아니 될 일이에요! 지금 국경의 상황을 몰라서 하시는 말씀입니까? 저 분리주의자들이 언제 또 날뛸지 모르는데, 깁슨 대령이 잘도 아가씨를 보내 주겠습니다!”
“그 대머리가 뭐라고 하든 말든. 난 이제 끝이야. 할 만큼 했어.”
“아니 된다니까요! 아가씨께서 그리 막가시면 그 뒷수습은 또 누가 하라고요! 결국 주인님의 몫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네가 유능했으면 됐잖아. 나도 여기서 쉬고, 고모도 솔즈베리에서 쉬고. 얼마나 좋았겠어?”
“으아악!”
이제껏 어떻게든 고상을 떨던 막시무스가 마구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어렵지 않게 꿰뚫어 본 여자가 대단히 귀찮은 기색으로 훠이 훠이 손짓한다.
“알았으면 얼른 나가 봐.”
“예! 예! 그렇지 않아도 나갈 생각이었습니다! 당장 주인님께로 날아가서 이 돼먹지 못한 일을 소상히 알려 드려야…….”
“하기만 해 봐. 그땐 정말로 튀겨 먹을 테니까.”
힉! 또다시 우당탕 소리를 낸 막시무스가 다급히 창문 너머로 사라졌다.
어느덧 끝물에 다다른 겨울. 아직은 찬 새벽 공기가 들이치는 창문을 손짓만으로 닫아건 여자가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란 가운을 끌고 비척거리며 침대 맡에 이른 여자는 풀썩, 태엽이 끊긴 인형처럼 이불 위로 스러졌다. 동시에 유일하게 사위를 밝히던 촛불도 순식간에 꺼진다.
방은 도로 암암한 어둠 속에 잠겼다.
1. 망나니 왕자
알렉 아크라이트. 그는 잉그람의 하나뿐인 왕자다.
하나뿐인 왕자라는 것은 즉 잉그람의 차기 국왕으로 가장 유력한 인사라는 뜻. 아무리 국왕이 실권을 잃은 나라라곤 하지만, 여전히 잉그람에서 국왕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며 왕가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도 상당했다. 이는 다시 말해, 올해 겨우 스물셋 된 젊은 왕자가 나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뽑히는 중요 인사로 대접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론적인 위상은 차치하고서라도, 왕자에 대한 잉그람 국민들의 애정은 오래전부터 기이할 만치 드높았다. 현 국왕인 하워드 아크라이트가 젊은 시절 벌였던 온갖 기행과 추문으로 재위 초 지지율이 바닥을 쳤던 것을 상기하면 상당히 의아스러운 일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알렉 왕자 역시 화려한 스캔들과 무성한 뒷소문을 몰고 다니는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전설을 써 내려갔던 젊은 시절 국왕을 떠올리게 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음에도, 국민들이 왕자에게 끊임없는 애정과 연민을 보내는 이유는 딱 한 가지다.
바로, 오래전 숨을 거둔 조세핀 왕비의 눈부신 후광이 왕자를 감싸고 있는 덕분이다.
젊은 시절, 꽃다운 미모를 무기로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숱한 여자들을 후리고 다녔던 하워드 국왕은 말 그대로 천하의 난봉꾼이었다. 잉그람 역사상 으뜸가는 성왕이라는 리처드 3세도 서른 명이 넘는 정부를 거느렸다는 야사로 유명하니, 사실상 여색만 탐했다면 하워드 국왕의 평판이 그리 바닥을 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일 ‘여색만’ 탐했다면 말이다.
안타깝게도 하워드 국왕은 여색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주일의 교회에서 만취하여 고꾸라지는 술꾼이었으며, 나이 지긋한 주교에게도 막말을 일삼는 양아치였다. 심지어 언젠가는 아들을 잃어 슬픔에 잠긴 고관대작의 아내에게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저속할 말로 추근거렸다가, 하이에나처럼 특종을 찾아 헤매던 일간지 기자에게 잘못 걸려 이튿날 신문 앞면에 대문짝하게 얼굴이 실리기도 했다.
그때 기사의 헤드라인이 <엄숙한 장례식에서도 염치를 모르는 난봉꾼, 부끄러운 줄 알라!>였으니, 젊은 날 국왕의 이미지가 어떠했는지는 대강 짐작하리라.
정말로 저런 놈팡이한테 왕관이 넘겨진단 말이야?’
‘말세야, 말세! 우리 뒷동네 건달도 저만치 상스럽지는 않겠어!’
당시 잉그람에선 어딜 가도 이런 대화가 들려올 지경이었다. 고향, 학교, 직장, 하다못해 키우는 동물로도 다툰다 할 정도로 분열의 상징인 잉그람 국민들이 그야말로 한마음 한뜻으로 합쳐지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역사상 그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일을 해낸 하워드 아크라이트에게 무궁한 영광이 있으리!
좌우지간 당시 왕자였던 하워드를 폐하고, 그의 누이동생인 캐서린 공주를 차기 국왕으로 올려야 한다는 의견이 진지하게 논의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음엔 틀림없다. 그럼에도 정신 못 차리고 ‘왕위? 엿이나 먹으라지!’라며 기자들 앞에서 공공연히 막말을 하고 다녔던 하워드가 개과천선하게 된 계기는 다름 아닌 조세핀 포크스였다.
당시 고작 열일곱. 성년을 1년 앞둔 조세핀은 포크스 공작의 막내딸로, 아름다운 외모와 기품 있는 태도로 사교계에선 일찍부터 유명한 아가씨였다. 그러나 타고나길 몸이 약하여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채링턴 지방에서 요양하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사냥을 나갔다가 우연찮게 채링턴 인근을 어슬렁거리던 하워드와 마주친 것이다.
운명의 신도 잔혹하시지, 순진한 조세핀 아가씨는 거죽만은 남부럽지 않게 잘생긴 하워드에게 순식간에 마음을 빼앗겼다. 치마 두른 여자면 일단 추근거리고 보는 하워드야 말할 것도 없었다.
자연스레 두 사람은 불같은 사랑에 빠져 서로밖엘 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다 돼도 하워드 왕자는 안 되노라 극구 반대하는 포크스 공작도, 너 같은 난봉꾼에게 저런 꽃다운 아가씨가 가당키나 하겠느냐는 당시 국왕의 힐난도 사소한 장애물이었을 뿐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 둘은 주변에서 쫑알대는 소리는 조금도 들어 먹질 않았다.
‘만나도 어떻게 저런 놈을 만나! 차라리 내 목에 칼을 꽂아라!’
애지중지 기른 막내딸을 천하의 개차반에게 보내야 할 처지에 이른 포크스 공작은 당연하게도 매일 밤 피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하워드의 부친 되는 국왕에게 조세핀이란 굴러들어 온 황금이나 진배없었다. 저러다가 어느 날 아들이 서른 살은 많은 여자에게 애를 보았다며 떳떳하게 들어오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국왕은 면전에선 몇 마디 책망하면서도 뒤돌아선 아주 좋아 죽었다. 결혼은 일사천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