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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이튿날, 잉그람의 악명 높은 황색 신문들은 일제히 왕자의 폭언을 전면에 실었다. 축제의 여파가 다 가시기도 전에 생각지도 못한 화젯거리가 폭풍처럼 잉그람을 덮친 것이다.



‘쯧쯧. 그럼 그렇지.’

‘왕자님은 조세핀 왕비 전하의 아들만이 아니라, 국왕의 아들이기도 하다는 걸 여태 잊고 살았어.’




왕자에겐 참으로 예외적이게도 이런 반응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과는 별개로, 여전히 왕자를 옹호하는 세력도 굳건했다.



‘아무렴. 왕실의 잘못이지. 엄마 잃은 아이를 제대로 보듬기나 했어? 그 어린애를 툭하면 기자들 앞으로 내보내서 얼굴 마담 역할이나 시키고 말이야.’



알렉 왕자의 인기를 등에 업고 어느 정도 지지세를 회복했다곤 하지만, 하워드 국왕에 대한 반감은 오래전부터 꾸준한 터였다. 왕자가 어릴 때부터 어린아이를 너무 언론에 자주 노출시키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끊임없던 만큼, 때마침 국왕으로 대표되는 왕실에 대한 비판도 줄을 이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이번 사태로 가장 뒤집힌 곳은 왕실이었다. 기사가 나가기 무섭게 궁전으로 몰려드는 기자단을 사방팔방 내쫓으며 방안을 강구하던 왕실은 초장에는 강하게 밀고 나가기로 했다.

이른바 언론과의 전면전이 시작된 것이다.



‘알렉은 하워드와는 달라. 우리 왕실의 얼굴을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지.’



사실상 아크라이트 왕실의 실세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막강한 캐서린 공주가 전면으로 나섰다. 하워드 국왕이 한창 난봉꾼이던 시절에야 왕실에서도 거의 내놓은 수준이었으므로 딱히 언론을 규제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으나, 알렉은 사정이 달랐다. 하워드로 추락하던 왕실의 위상을 알렉으로 되살렸다. 만일 알렉마저 추락한다면, 왕실의 위상은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었다.

그리해 캐서린 공주의 주도로 황색 신문을 겨냥한 고발이 시작되었다. 진실을 파헤쳐야 하는 언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일삼노라 쓰인 왕실의 성명문도 널리 퍼졌다. 사람들은 그럼 그렇지, 하며 왕실을 믿는 듯했다. 아니면 말고 식의 스캔들로 점철된 황색 신문은 애당초 그다지 신뢰 가는 매체가 아니었다.

그러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맨 처음 알렉 왕자의 폭언을 보도한 황색 신문들이었다. 의혹을 사실처럼 보도했다가 관련인의 고발을 받는 것이야 일상적인 일이지만, 이번은 달랐다. 늘 거짓말쟁이라며 조롱받던 삼류 기자들이 처음으로 억울해진 것이다.



‘권력에 굴복하여 이대로 진실을 파묻을 수는 없지!’



삼류 기자들은 눈물을 머금고 난생처음 기자로서의 본분을 다하고자 역공을 가하기 시작했다. 왕실에게 거대한 명예와 재물이 있다면, 그들에겐 펜이 있었다. 사람을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는 그것은 때때로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했다. 특히나 겨냥하는 상대가 고고할수록 그러했다.



<알렉 왕자, 여배우 R 양과 열애 중?>



<‘좆같은’ 왕실의 진면목을 파헤치다!

퍼블리칸 특집호: 베일에 싸인 버트윈 공의 내연녀를 밝히다!>



<하워드 국왕의 찬란했던 과거를 추억하며…….

(주의: 심신 미약자는 읽지 않을 것을 권합니다)>



……요런 기사들이 줄을 잇게 된 것이다.

당연히 왕실에선 난리가 났다. 여배우 R 양은 실제 알렉 왕자와는 생면부지임에도 이틈에 이름값을 올리고자 왕자의 연인 행세를 했고, 버트윈 공의 사택은 때아닌 불륜 스캔들로 발칵 뒤집혔다. 서서히 잊히는 듯했던 하워드 국왕의 파란만장한 과거가 다시금 펼쳐진 것은 당연지사다.

왕실은 잇따른 보도를 전부 고발 조치하였으나, 황색 신문은 많고 왕실의 손은 한정되어 있었다. 아무리 고발해도 신들린 듯이 기사를 써 재끼는 삼류 기자들의 속도를 따라갈 수는 없었다. 그러자 처음에는 미심쩍어하던 국민들도 점차 삼류 기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얼마나 억울하면 저렇게까지 할까, 심지어는 그네들을 동정하는 치들도 있었다.

결과는 놀랍게도 삼류의 승리였다. 삼류들의 펜에 무릎 꿇은 왕실은 알렉 왕자를 둘러싼 그들의 최초 보도를 일부 인정하며 간담회를 가지기로 했다.

대망의 간담회 날. 궁전 앞에서 꼬박 하룻밤을 지새운 기자들은 대문이 열리자마자 들개처럼 회장으로 뛰어들었다.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필기구를 꺼내 만반의 준비를 하는 그들의 모습은 흡사 죽음을 불사하고 출전하는 옛이야기 속 기사를 떠올리게 했다.

왕실에서 미리 고지했던 대로 시곗바늘이 10시 정각에 이르자, 기다렸다는 듯 회장의 문이 열렸다. 긴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회장으로 들어온 사람은 물론 왕실의 백색 정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알렉 아크라이트 왕자였다.

높은 단상에 오른 왕자는 마이크를 앞에 두고 잠시 침묵을 지켰다. 형형한 눈으로 왕자의 눈빛 하나까지 세세하게 관찰하며 기자들은 제각기 펜을 빠르게 놀리기 시작했다.



「왕자는 긴장한 기색이었다. 한 올 흐트러짐 없이 깔끔하게 뒤로 넘긴 갈색 머리칼과 수많은 훈장이 위태롭게 매달린 정복은 감히 흠잡을 구석이 없으나, 고통에 잠겨 마이크를 제대로 응시하지 못하는 아름다운 녹안은 차마 숨길 수가 없다…….」



뭐, 많은 신문 기사들이 으레 그러하듯 반쯤 기자의 상상이 담긴 글이긴 했지만 말이다.

좌우지간 왕자는 오래지 않아 입술을 열었다. 환상에 잠긴 기자들의 귀엔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목소리였는진 몰라도, 정상적인 귀엔 흔들림 없이 차분하고 단단한 목소리였다.



‘안녕하십니까, 잉그람 국민 여러분.’



서두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저는 오늘 지난날의 과오를 바로잡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한 달 전, 신성해 마지않은 성 봄비에리 축일을 저의 그릇된 언사로 더럽힌 점,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여러분의 질타, 달게 듣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언급하지 않은 말로 왕실에 누를 입히는 현실은 차마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 신문에서는 제가 저속한 욕설을 입에 담으며 왕실을 욕되게 하였다고 보도하였으나, 맹세코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밤늦도록 취재에 열중하셨던 기자분들을 원색적으로 비난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님을 미리 밝히겠습니다.

당시 저는 만취한 상태였고, 만취한 사람의 경우 발음이 어눌해지는 것은 다들 아시리라 믿습니다. 만취하여 중얼거렸던 말을 당시의 기자분들이 저속한 욕설로 잘못 알아들어 이 사달이 벌어진 것으로…….’




왕자의 말을 빠르게 받아 적던 기자들이 의아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알렉 왕자는 전에 없이 찌푸린 얼굴로 단상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곤 갑자기 이마를 짚으며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피식거리며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이걸 대체 누구 믿으란 건지.’

‘…….’

‘그렇지 않나요, 여러분? 이건 우리 엘리자베스도 안 믿을 것 같은데.’




이제 막 세 살이 된 왕자의 사촌까지 언급되자, 기자들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뒤에서 시종들이 경악하는 것도 모르고, 왕자는 단상에 미리 준비되어 있었던 성명서를 팔랑팔랑 흔들어 댔다.



‘내 생각에 이건 험프리 행정관이 쓴 것 같아요. 그분이 딱 술에 취하면 못 알아들을 정도로 발음이 어눌해지거든요. 자기가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 다 그런 줄 아는 거지.’



군데군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왕자는 아예 성명문을 어깨 너머로 날려 보내곤, 반듯했던 자세를 풀어 보다 편안해진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이렇게 남이 쓴 글 읊어 대는 쇼 말고, 내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실한 해명이란 걸 해 볼게요. 피차 그게 더 재미있지 않겠어요?’



기자 몇몇이 고개를 주억거리고, 또 다른 몇몇은 반기는 의미로 짧은 환호성을 질렀다. 양손을 가볍게 들어 그 열렬한 반응을 익숙하게 잠재운 왕자가 눈썹을 찡긋대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 그래서 성 봄비에리 축일에 내가 언급했던……. 그런데 그날 내가 정확히 뭐라고 말한 거죠? 잔말 말고 근신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뒤로 신문도 제대로 못 읽어서요.’

‘…….’

‘아무도 말 안 해 줄 거예요? 이제 곧 점심시간인데. 협조 좀 해 주시죠?’




묘하게 빈정대는 말에 앞자리에 앉아 있던 기자 하나가 머뭇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좆같은 왕실, 확 망해 버렸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고마워요.’




그러면서 마치 생경한 외국어를 발음해 보듯, 기자가 일러 준 문장을 저 혼자 웅얼거리던 왕자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박장대소까지는 아니어도 원래대로 진정되기까진 꽤나 시간이 걸리는 웃음이었다.



‘아, 미안해요. 갑자기 웃, 푸흡. 웃음이 터져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짓누른 왕자가 애써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별 효과는 없었다.



‘확실히 내가 입에 담기 곤란한 말을 내뱉은 것 같네요. 실언이었음을 인정합니다. 성스러운 축일에 공연히 국민 여러분의 귀를 어지럽혔으니,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죠. 기왕 말할 거였으면 조금 더 고상한 단어를 사용할 걸 그랬어요.’

‘전하. 그렇다면 ‘좆같다’는 단어를 사용한 것에만 유감을 표하시는 겁니까?’




잠시 입을 꾹 다물었던 왕자가 버릇처럼 미소를 지어 올렸다.



‘예리하시네요. 성함이?’

‘……《데일리 오킹엄》에서 나온 패트릭 넬슨입니다.’

‘오, 대단한 곳에서 나오셨네요. 제가 고상하지 못한 말을 한 게 그렇게나 사회적 이슈였나 보죠?’




왕자가 싱글거리며 물었다. 아쉽게도 이번엔 아무도 웃지 않았다.



‘음, 좋아요, 넬슨 씨. 하나만 여쭤볼게요. 넬슨 씨도 금요일 밤이면 동기들과 술집에 옹기종기 모여 맥주 한 잔씩 하실 거예요. 그걸 왕자인 네가 어떻게 아느냐곤 묻지 마세요. 이래 봬도 보고 들은 게 꽤 많으니까. 어쨌거나 재미난 술판을 벌이실 텐데, 그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화제가 있겠죠. 내가 맞혀 볼게요. 회사, 아니면 상사. 둘을 잘근잘근 씹는 재미가 안주 못지않죠?’

‘저, 저는 딱히…….’

‘에이, 점잔 빼지 마시고. 어차피 여기 모인 다른 기자분들도 다 마찬가지일 텐데요. 생각해 보니 그래 봬도 기자분들이라 씹는 재주가 아주 탁월하시겠어요. 나처럼 좆같은 왕실, 확 망해 버려라. 이런 일차원적인 욕은 아닐 거 아니에요?’




왕자는 기자들의 대답을 바라는 눈치였으나, 회장에 빼곡하게 모인 기자들 중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도리어 싸한 분위기만 가중되었지만 왕자는 크게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누가 좋은 예시를 들어 주었으면 했는데. 아무도 대답이 없으니 그냥 좆같다로 대체할게요. 좆같은 회사, 확 망해 버려라. 좆같은 상사, 콱 죽어 버려라. 이런 말, 정말 한 번도 해 본 적 없다곤 안 하시겠죠? 우리 보좌관만 하더라도 술만 들어가면 맨날 나보고 강물에 빠져 죽어 버리라고 하던데, 기자분들이라고 다를 리 있나요.’



행여 왕자가 수습하지 못할 사고라도 칠까, 뒤편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왕자의 보좌관이 시퍼레진 얼굴로 입을 떡 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단상에 팔꿈치를 올리고 한가로이 턱을 괸 왕자는 웃는 낯으로 《데일리 오킹엄》에서 나온 패트릭 넬슨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를 바라보는 왕자의 눈빛이 어찌나 반짝거리던지, 넬슨 씨는 차마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원하는 대답을 얻어 낸 왕자가 구부정한 허리를 펴며 짝, 가벼운 박수를 쳤다.



‘좋아요. 넬슨 씨가 그렇다고 하셨으니, 다른 기자분들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믿어요. 아, 넬슨 씨. 그렇게 죽상을 하실 필요는 없어요. 좆같은 회사 확 망해 버리라고 술김에 말한들, 누가 그걸 진심이라고 생각하겠어요? 회사가 망하면 길바닥에 나앉는 건 넬슨 씨일 텐데. 그럼 집에서 오매불망 넬슨 씨의 봉급만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은 어떻게 되겠냐는 거죠. 망해 버리라는 건 그저 과장된 표현이지, 실제로는 회사에 대한 자그만 불만을 표출한 것일 뿐이잖아요?’



왕자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상사에 대한 욕도 마찬가지예요. 가끔은 시원하게 복수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겠지만, 진심으로 상사가 죽길 바라는 사람은 없을 거란 말이죠. 만약 그런 분이 있으시거든, 조용히 회장을 나가 병원으로 직행하시길 권할게요.’



기자 몇몇이 얼어붙은 얼굴로 딱딱한 웃음소리를 냈다. 중간쯤에 앉은 기자 하나가 조심스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럼 전하께서 왕실이 망해 버렸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신 것도 그저 과장된 표현이었을 뿐인가요?’

‘바로 그거죠.’




왕자가 기자의 질문을 반기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전 왕실에 개인적인 불만이 있고 그걸 망해 버렸으면 좋겠다는, 조금 과장된 말로 표현했을 뿐이에요. 우리 모두 지성인이잖아요? 모쪼록 맥락을 읽고, 행간을 읽자고요.’

‘그럼 왕실이 좆같다는 건 진심이셨습니까?’




누군가 날카롭게 질문했다. 이제껏 어안이 벙벙하던 기자들이 다시금 본능적으로 눈빛을 예리하게 세웠다. 배부른 사자처럼 느른하게 늘어져 있던 왕자도 마찬가지다. 사뭇 엄숙해진 분위기로 단상에 몸을 낮게 기울인 왕자가 씩 이를 보이며 웃었다.



‘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