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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주변은 물론, 드라마나 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일이 제 이야기가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해 본 적 없었다. 윤희는 눈앞에 나란히 앉아 있는 자신의 남자 친구와 난생처음 보는 여자의 존재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방금 전 태오의 말을 듣는 순간 함께한 지난 3년간, 과연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가 맞나 싶을 만큼 그가 낯설게 느껴졌다.
“정윤희, 내 말 들었어?”
독촉을 하듯 되묻는 태오의 말에 윤희가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여자가 네 아이를 임신했다고?”
“그래. 그러니까 우리 깔끔하게 헤어지자. 난 이 여자와 결혼하고 싶거든. 미안하다.”
모든 것이 비참했다. 이런 소리를 들을 줄도 모르고 오랜만의 데이트에 설레 잔뜩 멋을 부리고 온 자신이 초라하고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윤희는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물컵을 꽉 집어 들었다.
자신의 얼굴에 뿌리려는 줄 알고 태오가 움찔거리며 손으로 얼굴을 필사적으로 가렸다. 그 모습이 한심하기 그지없어 윤희는 헛웃음을 지으며 간신히 목을 축였다. 물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막힌 목에서 눈물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 줄은 알아?”
“무슨 날이더라?”
두 번이나 함께한 자신의 생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태오의 모습에 윤희는 또다시 충격을 받았다. 여태 자신이 알고 있던 그의 모습들이 전부 거짓처럼 느껴졌다.
“내 생일이야, 이 자식아. 넌 생일 선물을 이딴 식으로 주니?”
“그래서 미안하다고 했잖아.”
그제야 고작 ‘미안하다’라는 말 몇 마디로 끝내려고 드는 이기적인 태오의 얼굴에 정말로 물을 뿌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주변의 모든 이목이 집중되어 하나같이 저를 동정하듯 안쓰럽게 볼 것이다. 이미 바닥으로 떨어져 더 추락할 곳조차 없는 제 자존심이 더욱 비참해질 터였다. 차인 것도 서러운데, 사람들에게 동정과 주목을 받아 비참해지는 건 더더욱 싫었다.
“적어도 사람이라면 이별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 하는 거야. 그래도 한때 네가 사랑했던 사람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는 게 얼마나 비겁하고 못난 짓인지는 알고 있니?”
태오는 아무 말 없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는 윤희를 응시했다.
“넌 네 추억과 시간, 그리고 감정마저 더럽힌 거야.”
윤희의 말을 인정하는 것인지, 태오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꺼져. 이 개자식아.”
그에게 건네는 마지막 인사. 태오는 윤희의 거친 말에 잘 살아, 라는 짧은 한마디와 함께 여자와 자리에서 일어나 가 버렸다.
혼자 남겨진 윤희의 허벅지 위, 꽉 쥐고 있는 손등에 뜨거운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분통함에 몸이 바르르 떨렸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
지금껏 뭘 하며 살았던 걸까. 허탈함이 밀려왔다.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한 그가 한없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아, 그냥 얼굴에 물이라도 뿌릴걸. 뺨이라도 시원하게 갈겨 줄걸…….”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것이 싫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눈물만 뚝뚝 흘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겨우 마음을 추스른 윤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으.”
뒤에서 옅은 남자의 신음이 들려왔다. 벌떡 일어나면서 뒤로 밀린 의자가 남자를 친 듯싶었다.
“죄송합니다.”
뒷모습만 보이는 남자에게 사과한 후, 윤희는 황급하게 카페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보영에게 연락했다. 이대로 집에 들어가면 온종일 울기만 할 것 같았다.
몇 차례 신호음이 울리더니, 보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영, 나랑 술 한잔하자!”
─미안해서 어쩌지? 나 지금 가평인데. 놀러 왔어.
“가, 가평? 아…… 알았어.”
전화를 끊고 낙담에 빠져 있던 윤희가 깊은 한숨과 함께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
승언의 걸음이 멈춘 곳은 제법 많은 사람들로 바글거리고 있는 수제 맥줏집이었다. 별로 오고 싶지 않았던 고교 동창회에 참석을 하게 된 건, 은사님의 뒤늦은 결혼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청첩장을 받기 위해 가게에 들어서자 오늘의 주인공인 은사님과 동창들이 그를 반겼다.
“와, 우리 승언이는 키가 더 컸구나? 완전 남자가 됐네!”
“그러게요! 와, 승언이 넌 어째 더 잘생겨졌다!”
간단하게 인사를 한 뒤 친구들 사이에 파묻혀 맥주를 두 잔 째 마시고 있을 때였다. 낯익은 여자 한 명이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때부터 계속 여자에게 신경이 쓰였다. 아니, 신경이 쓰였던 건 지금뿐만이 아니었다. 오늘 낮, 카페에서부터 눈에 밟히던 여자였다.
피곤함을 달래러 들어간 카페에서 여자는 심상치 않은 얼굴을 하고서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건너편에 앉아 있는 남자를 한 대 칠 것 같은 얼굴에 호기심이 생겨 여자의 뒷자리에 앉았다.
“넌 네 추억과 시간, 그리고 감정마저 더럽힌 거야.”
남자의 뻔뻔한 태도에도 침착함을 유지하던 여자는 두 사람이 사라진 후에야 참았던 서러움을 토해 냈다. 승언은 괜히 신경이 쓰였다. 일어나서 티슈라도 건넬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녀가 일어나면서 의자에 부딪히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여자는 잡을 새도 없이 황급하게 도망치듯 카페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지금, 이 맥줏집에서 그 여자와 또다시 마주쳤다.
이미 취한 것 같은데 여자는 쉬지 않고 잔을 비워 내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흘깃거리며 승언도 갈증이 나는 목을 축이기 위해 맥주를 마시고 또 마셨다.
동창들의 이야기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승언의 신경은 온통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여자에게 쏠려 있었다. 여자는 가끔 허공에 대고 뭐라고 중얼거리기도 했고 갑자기 웃다가 울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어느새 가방을 정리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들어올 때보다 더욱 비틀거리면서.
그녀의 옆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남자 세 명이 갑자기 자신들끼리 눈짓을 하더니 밖으로 향하는 여자의 뒤를 따랐다.
“3차 가는 거야, 3차!”
여자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을 정확하게 포착한 승언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변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집중되었다.
“죄송해요. 갑자기 집에 가스 불 켜고 온 게 생각이 나서.”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모두 은사님의 결혼 소식에 정신이 팔려 그의 이상한 변명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 그럼 얼른 가 봐야지!”
“결혼 축하드립니다, 선생님. 그럼 결혼식 날 뵙겠습니다.”
무슨 이유로 여자에게 관심이 가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오늘 아픔을 겪었던 그녀가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리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취한 여자의 뒤를 따라 나온 남자 셋을 제치고 달려가 그녀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윤희 씨, 잠깐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혼자 멋대로 가 버리면 어떡합니까?”
오늘 카페에서 들었던 이름으로 부르자 그녀가 술에 취해 헤롱헤롱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뒤를 따라 오던 남자들은 아쉽다는 듯이 혀를 차며 두 사람을 지나쳐 갔다. 승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 저를 아세요?”
이 상황을 알 리 없는 윤희가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안다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른다고 대답을 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그녀가 해맑게 웃으며 입술을 떼어 냈다.
“저 아시는 분이면 같이 술 한잔하실래요?
윤희가 어깨를 크게 들썩이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금세 투명한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오늘 좀 외로운데…….”
실연의 충격과 상처를 받은 여자를 달래 주고 싶었다. 승언이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 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이 여자를 오늘 밤 품에 안으리라는 것을. 그녀로 인해 애달픔을 알게 되리라는 것도.
“그럽시다.”
전혀 알지 못했다.
* * *
두 사람이 자리를 옮긴 곳은 술을 마시는 것과 동시에 재즈에 맞춰 춤을 출 수 있는 스테이지가 마련되어 있는 바(Bar)였다. 일자형 테이블에 윤희와 나란히 앉은 승언은 옆에서 칵테일을 시키고 있는 그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두 잔 주세요.”
손가락으로 귀엽게 ‘V’자를 그리며 말하는 윤희에 승언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분명 오늘 처음 보는 여자인데, 묘하게 끌린다. 마치 오래전부터 기다려 왔던 사람처럼 어색하거나 낯설함이 없을뿐더러, 평소의 저답지 않게 상대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말 날 알아요?”
칵테일을 주문한 후, 윤희가 한층 풀린 눈으로 승언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요. 잘 몰라요.”
“그런데 왜…….”
“알고 싶은 사람이라? 돌아서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아서요.”
“아…….”
쉽게 수긍을 하는 게, 귀여우면서도 위험해 보인다. 문득, 오늘 카페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서럽게 울던 그녀의 모습이 내내 승언의 마음속에 박혀 있었기 때문일까. 먼저 입술을 떼어 낸 건 윤희였다.
“왜 내가 알고 싶어요?”
“정확한 이유는 나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쪽이 오늘 하루 종일 신경 쓰였어요.”
“작업 기술이 대단하시네요.”
엄지까지 치켜들고 말하는 윤희에 승언이 실없이 웃어 버렸다.
“나는 굳이 누구한테 작업 같은 거 안 거는데.”
“얼굴 좀 된다고 잘난 척하시는 거예요?”
말을 하고서는 입을 삐죽거린다. 그 모습마저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귀여웠다.
“아니요. 아무한테나 작업을 걸 만큼 한가하지 않다는 소리예요.”
“인정!”
뜬금없다. 그래도 계속 웃음이 새어 나온다.
“뭐가요?”
“잘생긴 외모 인정이요.”
윤희가 별안간 손바닥으로 자신을 톡톡 가리키며 말을 이어 나갔다.
“난 웹 디자이너에요. 가끔은 판촉 디자인도 하고, 지금은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어요!”
“아, 프리랜서.”
“네. 편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죠?”
“딱히 그렇게 생각은 한 적 없는데, 그런 편견이 있나 봐요.”
“프리랜서가 얼마나 힘들 줄 알아요? 의뢰인들은 또 얼마나 까다로운데요!”
마침 나온 칵테일을 받은 윤희는 그것을 단숨에 들이켰다. 아무래도 목이 말랐던 모양이다.
“선 하나 바꾸는 건 손가락만 움직이면 된다고 쉽게 생각한다고요. 하지만 아니에요. 코딩부터 다시 작성해야 하고! 얼마나 할 게 많은데. 그걸 몰라, 그걸.”
살짝 흥분한 얼굴로 팔을 크게 휘두르며 말을 이어 나가는 윤희를 승언은 그저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어? 이거 내가 좋아하는 노랜데?”
그러다 갑자기 바뀐 노래에 윤희가 호감을 보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가서 춤춰요.”
“난 괜찮아요.”
권하는 윤희를 거절하고 칵테일을 마시려는데, 손목이 여리고 작은 그녀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
“같이 춰요!”
“나 춤 못 춰요.”
“나도 못 춰요. 그냥 느낌 가는 대로 추면 돼요!”
결국 그녀에게 끌려 스테이지로 향하고 말았다. 마음만 먹으면 그녀의 손목 하나쯤이야 가볍게 뿌리칠 수 있었지만 승언은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와 함께 이렇게 마주 보고 있으면서 이런 기분을 느껴 본 적이 있었던가?
참, 생각할수록 이상하다. 처음 보는 여잔데, 대체 왜 자꾸만 이런 마음이 드는 걸까.
윤희의 춤은 거의 흐느적거림에 가까웠다. 자아도취 상태로 열심히 추다가 앞에 있는 승언의 팔을 붙잡고 몸을 흔들었다. 그리고 웃는다. 너무나 예쁘게.
그녀가 몸을 흔들 때마다 좋은 냄새가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기분이 좋았다.
“어어!”
열심히 춤을 추던 그녀가 다리에 힘이 빠진 모양인지 갑자기 주저앉자 승언이 얼른 윤희를 끌어안았다. 그녀와의 얼굴이 가깝게 와 닿았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과 분위기가 묘해졌다. 달콤해 보일 정도로 붉은 그녀의 입술에선 어떤 향이 날까 궁금해졌다.
“키스하고 싶어요.”
허락을 받듯 말하는 승언에 윤희가 마른침을 꼴깍 삼켜 넘기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승언이 천천히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예상대로 달콤한 향이 감돌았다.
단 한 번의 키스만으로도 극심한 간절함과 아쉬움이 들 정도로.
주변은 물론, 드라마나 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일이 제 이야기가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해 본 적 없었다. 윤희는 눈앞에 나란히 앉아 있는 자신의 남자 친구와 난생처음 보는 여자의 존재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방금 전 태오의 말을 듣는 순간 함께한 지난 3년간, 과연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가 맞나 싶을 만큼 그가 낯설게 느껴졌다.
“정윤희, 내 말 들었어?”
독촉을 하듯 되묻는 태오의 말에 윤희가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여자가 네 아이를 임신했다고?”
“그래. 그러니까 우리 깔끔하게 헤어지자. 난 이 여자와 결혼하고 싶거든. 미안하다.”
모든 것이 비참했다. 이런 소리를 들을 줄도 모르고 오랜만의 데이트에 설레 잔뜩 멋을 부리고 온 자신이 초라하고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윤희는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물컵을 꽉 집어 들었다.
자신의 얼굴에 뿌리려는 줄 알고 태오가 움찔거리며 손으로 얼굴을 필사적으로 가렸다. 그 모습이 한심하기 그지없어 윤희는 헛웃음을 지으며 간신히 목을 축였다. 물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막힌 목에서 눈물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 줄은 알아?”
“무슨 날이더라?”
두 번이나 함께한 자신의 생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태오의 모습에 윤희는 또다시 충격을 받았다. 여태 자신이 알고 있던 그의 모습들이 전부 거짓처럼 느껴졌다.
“내 생일이야, 이 자식아. 넌 생일 선물을 이딴 식으로 주니?”
“그래서 미안하다고 했잖아.”
그제야 고작 ‘미안하다’라는 말 몇 마디로 끝내려고 드는 이기적인 태오의 얼굴에 정말로 물을 뿌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주변의 모든 이목이 집중되어 하나같이 저를 동정하듯 안쓰럽게 볼 것이다. 이미 바닥으로 떨어져 더 추락할 곳조차 없는 제 자존심이 더욱 비참해질 터였다. 차인 것도 서러운데, 사람들에게 동정과 주목을 받아 비참해지는 건 더더욱 싫었다.
“적어도 사람이라면 이별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 하는 거야. 그래도 한때 네가 사랑했던 사람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는 게 얼마나 비겁하고 못난 짓인지는 알고 있니?”
태오는 아무 말 없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는 윤희를 응시했다.
“넌 네 추억과 시간, 그리고 감정마저 더럽힌 거야.”
윤희의 말을 인정하는 것인지, 태오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꺼져. 이 개자식아.”
그에게 건네는 마지막 인사. 태오는 윤희의 거친 말에 잘 살아, 라는 짧은 한마디와 함께 여자와 자리에서 일어나 가 버렸다.
혼자 남겨진 윤희의 허벅지 위, 꽉 쥐고 있는 손등에 뜨거운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분통함에 몸이 바르르 떨렸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
지금껏 뭘 하며 살았던 걸까. 허탈함이 밀려왔다.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한 그가 한없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아, 그냥 얼굴에 물이라도 뿌릴걸. 뺨이라도 시원하게 갈겨 줄걸…….”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것이 싫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눈물만 뚝뚝 흘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겨우 마음을 추스른 윤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으.”
뒤에서 옅은 남자의 신음이 들려왔다. 벌떡 일어나면서 뒤로 밀린 의자가 남자를 친 듯싶었다.
“죄송합니다.”
뒷모습만 보이는 남자에게 사과한 후, 윤희는 황급하게 카페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보영에게 연락했다. 이대로 집에 들어가면 온종일 울기만 할 것 같았다.
몇 차례 신호음이 울리더니, 보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영, 나랑 술 한잔하자!”
─미안해서 어쩌지? 나 지금 가평인데. 놀러 왔어.
“가, 가평? 아…… 알았어.”
전화를 끊고 낙담에 빠져 있던 윤희가 깊은 한숨과 함께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
승언의 걸음이 멈춘 곳은 제법 많은 사람들로 바글거리고 있는 수제 맥줏집이었다. 별로 오고 싶지 않았던 고교 동창회에 참석을 하게 된 건, 은사님의 뒤늦은 결혼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청첩장을 받기 위해 가게에 들어서자 오늘의 주인공인 은사님과 동창들이 그를 반겼다.
“와, 우리 승언이는 키가 더 컸구나? 완전 남자가 됐네!”
“그러게요! 와, 승언이 넌 어째 더 잘생겨졌다!”
간단하게 인사를 한 뒤 친구들 사이에 파묻혀 맥주를 두 잔 째 마시고 있을 때였다. 낯익은 여자 한 명이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때부터 계속 여자에게 신경이 쓰였다. 아니, 신경이 쓰였던 건 지금뿐만이 아니었다. 오늘 낮, 카페에서부터 눈에 밟히던 여자였다.
피곤함을 달래러 들어간 카페에서 여자는 심상치 않은 얼굴을 하고서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건너편에 앉아 있는 남자를 한 대 칠 것 같은 얼굴에 호기심이 생겨 여자의 뒷자리에 앉았다.
“넌 네 추억과 시간, 그리고 감정마저 더럽힌 거야.”
남자의 뻔뻔한 태도에도 침착함을 유지하던 여자는 두 사람이 사라진 후에야 참았던 서러움을 토해 냈다. 승언은 괜히 신경이 쓰였다. 일어나서 티슈라도 건넬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녀가 일어나면서 의자에 부딪히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여자는 잡을 새도 없이 황급하게 도망치듯 카페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지금, 이 맥줏집에서 그 여자와 또다시 마주쳤다.
이미 취한 것 같은데 여자는 쉬지 않고 잔을 비워 내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흘깃거리며 승언도 갈증이 나는 목을 축이기 위해 맥주를 마시고 또 마셨다.
동창들의 이야기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승언의 신경은 온통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여자에게 쏠려 있었다. 여자는 가끔 허공에 대고 뭐라고 중얼거리기도 했고 갑자기 웃다가 울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어느새 가방을 정리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들어올 때보다 더욱 비틀거리면서.
그녀의 옆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남자 세 명이 갑자기 자신들끼리 눈짓을 하더니 밖으로 향하는 여자의 뒤를 따랐다.
“3차 가는 거야, 3차!”
여자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을 정확하게 포착한 승언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변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집중되었다.
“죄송해요. 갑자기 집에 가스 불 켜고 온 게 생각이 나서.”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모두 은사님의 결혼 소식에 정신이 팔려 그의 이상한 변명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 그럼 얼른 가 봐야지!”
“결혼 축하드립니다, 선생님. 그럼 결혼식 날 뵙겠습니다.”
무슨 이유로 여자에게 관심이 가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오늘 아픔을 겪었던 그녀가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리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취한 여자의 뒤를 따라 나온 남자 셋을 제치고 달려가 그녀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윤희 씨, 잠깐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혼자 멋대로 가 버리면 어떡합니까?”
오늘 카페에서 들었던 이름으로 부르자 그녀가 술에 취해 헤롱헤롱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뒤를 따라 오던 남자들은 아쉽다는 듯이 혀를 차며 두 사람을 지나쳐 갔다. 승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 저를 아세요?”
이 상황을 알 리 없는 윤희가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안다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른다고 대답을 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그녀가 해맑게 웃으며 입술을 떼어 냈다.
“저 아시는 분이면 같이 술 한잔하실래요?
윤희가 어깨를 크게 들썩이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금세 투명한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오늘 좀 외로운데…….”
실연의 충격과 상처를 받은 여자를 달래 주고 싶었다. 승언이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 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이 여자를 오늘 밤 품에 안으리라는 것을. 그녀로 인해 애달픔을 알게 되리라는 것도.
“그럽시다.”
전혀 알지 못했다.
* * *
두 사람이 자리를 옮긴 곳은 술을 마시는 것과 동시에 재즈에 맞춰 춤을 출 수 있는 스테이지가 마련되어 있는 바(Bar)였다. 일자형 테이블에 윤희와 나란히 앉은 승언은 옆에서 칵테일을 시키고 있는 그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두 잔 주세요.”
손가락으로 귀엽게 ‘V’자를 그리며 말하는 윤희에 승언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분명 오늘 처음 보는 여자인데, 묘하게 끌린다. 마치 오래전부터 기다려 왔던 사람처럼 어색하거나 낯설함이 없을뿐더러, 평소의 저답지 않게 상대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말 날 알아요?”
칵테일을 주문한 후, 윤희가 한층 풀린 눈으로 승언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요. 잘 몰라요.”
“그런데 왜…….”
“알고 싶은 사람이라? 돌아서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아서요.”
“아…….”
쉽게 수긍을 하는 게, 귀여우면서도 위험해 보인다. 문득, 오늘 카페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서럽게 울던 그녀의 모습이 내내 승언의 마음속에 박혀 있었기 때문일까. 먼저 입술을 떼어 낸 건 윤희였다.
“왜 내가 알고 싶어요?”
“정확한 이유는 나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쪽이 오늘 하루 종일 신경 쓰였어요.”
“작업 기술이 대단하시네요.”
엄지까지 치켜들고 말하는 윤희에 승언이 실없이 웃어 버렸다.
“나는 굳이 누구한테 작업 같은 거 안 거는데.”
“얼굴 좀 된다고 잘난 척하시는 거예요?”
말을 하고서는 입을 삐죽거린다. 그 모습마저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귀여웠다.
“아니요. 아무한테나 작업을 걸 만큼 한가하지 않다는 소리예요.”
“인정!”
뜬금없다. 그래도 계속 웃음이 새어 나온다.
“뭐가요?”
“잘생긴 외모 인정이요.”
윤희가 별안간 손바닥으로 자신을 톡톡 가리키며 말을 이어 나갔다.
“난 웹 디자이너에요. 가끔은 판촉 디자인도 하고, 지금은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어요!”
“아, 프리랜서.”
“네. 편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죠?”
“딱히 그렇게 생각은 한 적 없는데, 그런 편견이 있나 봐요.”
“프리랜서가 얼마나 힘들 줄 알아요? 의뢰인들은 또 얼마나 까다로운데요!”
마침 나온 칵테일을 받은 윤희는 그것을 단숨에 들이켰다. 아무래도 목이 말랐던 모양이다.
“선 하나 바꾸는 건 손가락만 움직이면 된다고 쉽게 생각한다고요. 하지만 아니에요. 코딩부터 다시 작성해야 하고! 얼마나 할 게 많은데. 그걸 몰라, 그걸.”
살짝 흥분한 얼굴로 팔을 크게 휘두르며 말을 이어 나가는 윤희를 승언은 그저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어? 이거 내가 좋아하는 노랜데?”
그러다 갑자기 바뀐 노래에 윤희가 호감을 보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가서 춤춰요.”
“난 괜찮아요.”
권하는 윤희를 거절하고 칵테일을 마시려는데, 손목이 여리고 작은 그녀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
“같이 춰요!”
“나 춤 못 춰요.”
“나도 못 춰요. 그냥 느낌 가는 대로 추면 돼요!”
결국 그녀에게 끌려 스테이지로 향하고 말았다. 마음만 먹으면 그녀의 손목 하나쯤이야 가볍게 뿌리칠 수 있었지만 승언은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와 함께 이렇게 마주 보고 있으면서 이런 기분을 느껴 본 적이 있었던가?
참, 생각할수록 이상하다. 처음 보는 여잔데, 대체 왜 자꾸만 이런 마음이 드는 걸까.
윤희의 춤은 거의 흐느적거림에 가까웠다. 자아도취 상태로 열심히 추다가 앞에 있는 승언의 팔을 붙잡고 몸을 흔들었다. 그리고 웃는다. 너무나 예쁘게.
그녀가 몸을 흔들 때마다 좋은 냄새가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기분이 좋았다.
“어어!”
열심히 춤을 추던 그녀가 다리에 힘이 빠진 모양인지 갑자기 주저앉자 승언이 얼른 윤희를 끌어안았다. 그녀와의 얼굴이 가깝게 와 닿았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과 분위기가 묘해졌다. 달콤해 보일 정도로 붉은 그녀의 입술에선 어떤 향이 날까 궁금해졌다.
“키스하고 싶어요.”
허락을 받듯 말하는 승언에 윤희가 마른침을 꼴깍 삼켜 넘기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승언이 천천히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예상대로 달콤한 향이 감돌았다.
단 한 번의 키스만으로도 극심한 간절함과 아쉬움이 들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