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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로제 프라이스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그 눈이었다.

보기 좋게 생긴 입술이 볼우물이 희미하게 패도록 필터를 빨아들였다가 담배 연기를 천천히 뱉는 모습은 어떤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감흥을 주었다. 어른어른하는 흰 연기 사이로 푸른 눈이 빛났다. 그는 홍채조차 푸른 꽃잎의 결처럼 예뻤다. 아니, 눈이야말로 가진 것 중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었다. 눈꺼풀이 움직이는 모양조차 우아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을 꼽으라면 오즈는 주저하지 않고 로제 프라이스를 선택할 것이다. 비록, 이런 상황일지라도.

“잠시…….”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한쪽을 향했다. 길게 담배 연기를 뱉은 로제가 손을 내렸다. 아름답고 긴 손가락 사이에서 벌겋게 불이 붙은 담배가 타들어 갔다. 단단하며 보기 좋게 힘줄이 불거진 손목에는 값비쌀 것이 분명한 은빛의 손목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째깍째깍 희미하게 초침 소리가 들렸다.

“그저 궁금해서 말이에요.”

간단히 입을 여는 것만으로도 로제는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흠잡을 곳 없이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쉬운 일이었다.

툭 손가락 사이로 아슬하게 담배를 떨어트린 로제가 구둣발로 짓밟아 껐다. 잠시간 탁탁 바닥을 두드리는 단단한 소리가 들렸다. 검은 구두는 먼지 한 톨 없이 반질반질했다.

“몇 번 언뜻 들었던 것도 같은데, 오즈 씨는 뭘 잘한다고 했죠? 마술이라고 했었나?”

오즈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가만히 있지 못하겠냐며 욕설과 함께 팔이 비틀렸다. 그러나 위기 상황에서도 그는 꿋꿋했다. 머리를 짓누르는 손길에도 오즈는 기어코 내뱉고 말았다. 결코 수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로제의 눈가에 서늘한 웃음기가 어렸다.

“아니. 마술이 아니라, 마법이다.”

마법이 존재하기는커녕 허황된 것으로 부정되기만 하는 세계. 그곳에서 마법사 오즈가 당당하게 외쳤다.







제1장

마법사 오즈







머리 위로 그믐달이 어른어른 떠 있었다. 오즈가 신음하며 몸을 뒤척였다. 머리고 몸이고 안 아픈 곳이 없어서 이마에 손등을 올리고 끙끙 앓다가 눈가를 문질렀다.

[악!]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했다가 바닥에 박힌 뾰족한 돌에 엄지손가락을 찧은 오즈가 짤막하게 비명을 질렀다. 가물가물한 시야로 보니 찔끔 붉은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미간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하니 겨우 제대로 시야가 잡혔다.

[여기는……?]

꺼칠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낯선 장소였다. 주변에 드문드문 나무와 수풀이 자리했다. 그는 반쯤 수풀에 끼인 채로 풀밭에 엎어져 있던 것이다.

엉금엉금 수풀에서 기어 나오며 오즈는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했다. 정신을 잃기 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마력 역류였어. 폭발이 있었고, 그리고…….’

정신을 잃기 전 오즈는 왕의 명령을 받아 새로운 마법을 시연하는 중이었다.

대규모 마법이라 조심에 조심을 기했다. 준비는 완벽했다. 절차를 따라 시행하기만 하면 성공할 일이었다. 그러나 막바지에 그가 아끼던 제자 한 명이 배신하고 말았다. 배신감에 오즈의 얼굴이 잠시간 창백해졌다.

탑에서 제자가 스승을 배반하는 일은 그렇게 드물지만은 않았다. 스승을 제거하고 나면 그 자리에 자신이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실력만으로 모든 것이 가름이 나는 곳이었다.

돌아가 자신을 배반한 제자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니 오즈는 벌써부터 슬퍼졌다. 발론을 죽이면 그의 손으로 죽인 제자만 자그마치 세 명이 된다. 발론은 그중에서도 가장 아끼는 녀석이었다.

일단 탑으로 돌아가기 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파악할 필요부터 있었다. 오즈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주위를 둘러본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가 대체 어디지?]

온통 풀숲과 나무들뿐, 세 번째 기둥은커녕 그 어느 탑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심비오스에서는 기둥이 보이지 않는 곳이 없었기에 이는 퍽 이상한 일이었다.

위화감을 느낀 오즈가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덜컹 가슴이 내려앉았다. 불길한 것이 달 바로 아래 떠 있었다. 왜 이것을 이제야 알아차렸을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둥글고 거대한 마력의 소용돌이가 그의 머리 위, 까마득한 상공에서 느리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불규칙한 움직임이었다. 마법 시연이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보자 소용돌이 안쪽으로 익숙한 풍경이 언뜻 보일 듯 말 듯 했다.

저 마력의 소용돌이는 일종의 문이었다.

지금 이 장소와 오즈가 원래 있어야 할 곳을 연결해 주는 문.

걸음을 옮기자 그 문도 천천히 머리 위에 떠서 따라왔다. 문은 명백히 자신과 연결되어 있었다. 한참을 관찰하던 오즈의 눈과 입이 차츰 커졌다.

[저 정도 역류면……. 설마, 대륙 너머로 날려 온 건가?]

오즈는 목이 뻐근해지도록 오랫동안 문을 노려보았다. 대규모 마력을 이용한 마법 시연에서 시공간이 뒤틀리는 부작용은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는 한참을 문을 살피다 곧 시선을 내렸다.

일단은 이곳이 어디인지 파악하는 게 좋겠다. 부러 위험을 감수하며 문을 열고 돌아가느니 시간이 오래 걸려도 안전하게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심비오스 출신 마법사의 명성이라면 어디서든 지내는 일에 무리는 없으리라, 그는 그렇게 판단했다.

옆구리가 심하게 결려 움켜쥔 채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몸 상태가 몹시도 좋지 않았다. 밤이슬이 맺혀 축축한 잔디밭을 자박자박 밟으며 걸었다. 등 뒤로 로브가 질질 끌렸다. 오즈는 곧 인위적으로 조성된 듯한 작은 숲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러자…….

그곳에는 화려한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동시에 까마득하며 압도적이기까지 한 아름다움이 오즈를 덮쳐 왔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선명한 푸른 눈동자가 신처럼 높은 곳에서 오즈를 내려다보았다. 흠결 하나 없는 흰 피부에 입술은 갓 피어난 어린 장미 꽃잎처럼 발긋하고 부드러웠다. 매혹적인 입술에는 완벽할 정도로 부드럽고 아름다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금빛의 머리카락이 단정하게 정돈되어 휘장처럼 어깨 위로 늘어졌다.

가히, 신의 사자라 해도 믿을 만한 미모의 남자였다.

어느 모로 보나 단점 하나 없이 완벽하게 생긴 사내가 눈을 깜박이듯이 느리게 눈꺼풀을 움직이더니 눈을 휘어 웃었다. 얼굴처럼 아름답고 섬세한 손에는 불그스름한 빛이 감도는 투명한 유리병이 쥐여 있었다.

아름다운 외모에 대한 충격이 너무 커서 오즈는 잠시 뒤에야 그게 실제 같은 거대한 그림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마탑과 비견될 정도로 높은 건물, 은은하게 빛나는 흰 벽에 아름다운 남자의 상반신이 새겨져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움직이기까지 했다.

[……저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넋이 나간 오즈가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 그의 갈색 눈동자가 흰 빛으로 잘게 반짝거렸다. 한참 뒤에야 그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 다른 것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사방이 기이하고 처음 보는 것투성이였다. 오즈의 눈이 점점 커졌다.

낯선 양식의 높은 건물들이 사방에서 하늘을 삐죽삐죽 찔러 댔다. 그 진귀한 유리창들이 건물들의 외벽을 뒤덮고 있었다. 분명 밤일 텐데도 건물들은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그는 살면서 이토록 화려한 야경의 도시를 본 적이 없었다…….

‘여긴 대체 어디지? 심비오스는 절대 아니고, 타천차라, 알레자브, 자칠로 그 어느 곳도 아니다.’

알고 있는 온갖 나라를 떠올려 보았으나 그 어느 곳도 지금 오즈가 보고 있는 광경에 적합하지 않았다. 돌연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설마, 설마…….]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 툭 오즈를 치고 지나갔다. 독특한 의복을 차려입은 남녀였다. 남성이 눈을 부라리며 무어라 쏘아붙인 뒤 지나갔다. 그 말을 듣자 오즈는 그만 눈앞이 까마득해지고 말았다.

그는 모든 고어, 모든 대륙, 그 어떤 나라의 언어든지 죄다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방금 들은 말은 난생처음 들어 보았던 것이다. 오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내가…… ‘이방인’이 된 건가?]

예로부터 심비오스를 비롯하여 온갖 나라들에는 공통된 전승 설화들이 전해져 내려왔다. 하나같이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이방인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들은 때로 영웅으로, 때로는 악당으로 기록되곤 했다.

혹은 세계에 이기지도, 적응하지도 못해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어 버리거나.

학자들과 마법사들은 이방인들에 대해 여러 방면으로 연구해 왔다. 현대 마법학의 체계가 제대로 성립되기 전에는 이런 이들의 등장이 신의 힘이라 믿었으나, 최근에 들어서는 막대한 마력이 시공간에 왜곡을 발생시킨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동시에 이런 설도 제시되고 있었다.

그쪽에서 이쪽으로 넘어올 수 있다면, 반대로 이쪽에서 그쪽으로 넘어갈 수도 있지 않겠냐 하는…….

그 가설은 이제까지 사라져 버리되 다시 돌아오는 사람이 없어서 언제까지나 추측으로만 남아 있었다. 오즈는 그게 가설이 아니라 사실이었다는 사실에 감격하는 한편 좌절하여 비틀거리고 말았다. 다른 세상이라니!

그는 혹시나 하여 좀 더 걸음을 옮겨 보았다.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피고 또 살폈다. 그러나 상식을 넘어서는 모양새의 건축물들과 기술, 그리고 마법들, 듣도 보도 못한 사람들의 외양과 언어가 다른 세계로 넘어왔다는 확신을 줄 뿐이었다.

[이럴 수가, 아니, ……정말로?]

그는 넋이 나가 비틀거리며 거리를 따라 걸었다. 놀라운 건 건물뿐만이 아니었다. 도로 위를 무서운 속도로 달리는 기이한 마차가 있었다. 그로서는 저 마차가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지 알 수조차 없었다.

마침내 오즈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망연자실 바닥에 널브러지고 말았다. 벽에 기대어 앉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흘끔거리며 쳐다봤다. 오즈가 입고 있는 의복이 워낙 유별난 까닭이었다. 기둥의 문양이 화려하게 금사로 새겨진 검은 망토는 시선을 끌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으윽……. 아니야, 분명 방법이 있겠지.]

한참을 머리를 쥐어뜯다가 오즈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연한 갈색 머리카락이 곱슬거리며 헝클어졌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어 ‘문’을 노려보았다. 눈 속에서 금빛의 파편이 일렁이며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다갈색의 동공이 밝은 금빛으로 번져 나갔다. 이마에서는 차츰 옅은 식은땀이 번졌다. 그렇게 알고 있는 이치를 모조리 동원해, 그는 마침내 방법을 알아냈다.

적절한 재료, 적절한 시기, 적절한 마법이 어우러지면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다소 위험할지라도 가능은 했다. 오즈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남은 것은 실천에 옮기는 것이었다.

저 ‘문’이 닫히기 전에 재료를 모두 모아 원래 세계로 돌아간 뒤 배신한 제자에게 대가를 치르게 만든다. 굳게 다짐하며 오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단은 먼저 이곳이 어떠한 곳인가 파악할 필요부터 있었다.

그는 마도국 심비오스, 그중에서도 위대하며 찬란한 세 번째 기둥의 주인이자 대륙 전쟁을 승리로 이끈 마도사다. 고작 이런 시련 따위에 굴복할 수는 없었다. 마도국의 젊고 강력한 마도사는 굳은 얼굴로 검은 망토를 펄럭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도시를 탐방한 지 채 몇 시간도 안 되어 위대하며 찬란한 세 번째 기둥의 주인이자 대륙 전쟁을 승리로 이끈 마도사는 배고픔에 굴복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