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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적 하루 1화

Chapter 1. 밀레니엄 버그 (1)



‘천 년에 한 번 온다는 길일. 숫자 9가 다섯 번 들어간 오늘 1999년 9월 9일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가 줄을 잇고 있습니다. 금일 제주에선 중국인 부부 300쌍이 합동 야외 결혼식을…….’

턱 끝에 맺힌 물기를 닦아 낸 여준이 식탁에 자리했다. 늘 이른 출근을 하는 터라 항상 비어 있던 의자에 오늘은 웬일로 아빠가 앉아 있었다. 텅 빈 공기를 채우듯 뉴스 소리가 끊임없이 쏟아졌다. 제 몫의 미역국이 식탁에 오른 후에야 여준은 천천히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밤새웠니?”

“아뇨. 1시 안 넘기고 잤어요.”

“그래. 자정 넘기면 집중력도 떨어지게 돼 있어. 괜한 시간 낭비야.”

“네.”

항상 듣는 얘기였기에 여준은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명문고와 명문대 엘리트 코스를 거친 여준의 아빠는 단순히 결과뿐 아니라 공부 방식에도 관심이 많았다. 말이 관심이지, 여준에겐 그저 간섭으로 느껴질 따름이다.

“이제 며칠 남았지?”

“70일요.”

“긴장 늦추지 마라. 컨디션 관리 잘하고.”

“네.”

여준이 콩나물무침을 한가득 입에 넣었다. 돌이라도 삼킨 양 입 안이 유난히 거칠었다.

“여보.”

뒤늦게 빈자리에 앉은 여준의 엄마가 주의를 주듯 목소리를 낮췄다.

“아침부터 식탁에서 이럴 거야? 잘하고 있는 애한테 괜히 부담 주지 말자고 했지.”

이어지는 핀잔에 아빠가 작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조용히 눈을 굴리던 여준이 공연히 찬물로 입 안을 적셨다.

“엄마는 걱정 안 해, 여준아. 평소처럼만 하면 되는걸.”

“…….”

“그치?”

“……네.”

한 박자 늦은 대답에 엄마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다시 정적이 내려앉은 식탁까지 TV의 소음이 겨우 닿다 이내 흩어졌다.



불편한 아침 식사를 마친 여준이 학교 갈 준비를 서둘렀다. 아직 날이 더워 방학 전과 다름없는 하복 차림이었다. 끝이 덜 마른 머리를 대충 넘기고 방을 나오자 출근 준비를 마친 아빠가 손짓으로 여준을 불렀다. 쭈뼛거리며 다가간 그의 앞에 하얀 봉투가 내밀어졌다.

“생일 축하한다.”

“네. 감사합니다.”

회사 로고가 새겨진 봉투를 가만 내려다보던 여준이 눈치를 살피듯 힐끔 시선을 올렸다. 다행히도 막 주방을 나선 엄마의 목소리가 어색했던 분위기를 깼다.

“당신은 멋없게 돈이 뭐야. 아들 생일 선물도 고민 안 하고.”

“마음에 안 드는 선물보다야 돈이 낫지. 안 그러냐?”

아빠의 물음에 여준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못해도 두 달 치 용돈은 될 만큼 두둑한 봉투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큰돈이 부담으로 느껴진 탓이다. 차마 돈 봉투를 들고 학교에 갈 순 없어 책상에 두고 나오니 아빠는 어느새 집을 나선 후였다.

“아빤 출근하셨어요?”

“응. 오랜만에 늦게 출근하는데 너도 태워다 주면 좀 좋아. 하여튼 센스가 없다니까.”

“학교랑 회사 정반대잖아요.”

여준도 딱히 바라던 바는 아니었다. 오늘따라 유난한 엄마의 배웅을 받으며 현관으로 향하니 처음 보는 운동화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누나가 보던 잡지를 어깨너머로 구경하다가 별 뜻 없이 갖고 싶다 말했던 운동화였다.

“이건 엄마 선물. 아들 이거 갖고 싶다고 했지?”

“이걸 어떻게 기억했어요?”

“엄마 기억력 좋아. 마음에 들어?”

“네. 감사해요, 진짜.”

내내 무기력하던 여준의 눈이 전에 없이 반짝였다.

“사실 네 누나한테 물어봤어. 엄마 눈엔 운동화가 다 거기서 거기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인사에 마음이 찔렸는지 엄마가 진실을 털어놓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준의 정신은 온통 새 운동화에 꽂혀 있었다. 새하얀 운동화는 눈이 부셨다.

“지금까지 열심히 해서 주는 상이야. 얼마 안 남았으니까 조금만 더 고생하자.”

“…….”

신이 나서 신발 끈을 풀던 여준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그나저나 난 너희 학교 급식 먹는 거 정말 마음에 안 들어. 지금같이 중요한 시기에 먹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어디서 온 줄도 모르는 식자재를…….”

“맛있어요.”

“응?”

“급식, 맛있어요. 그러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작게 대답한 여준이 꾸역꾸역 신발에 발을 꿰었다. 빳빳한 새 신발을 길들이려면 시간이 조금 필요할 듯했다.



***




아침밥을 너무 급하게 먹은 탓인지 속이 더부룩했다. 애써 가슴께를 두드려 보았지만, 딱히 소용은 없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만원 버스에 몸을 싣고 나자 다시금 정신이 멍해졌다. 차멀미가 날 것 같아 창밖으로 멀리 시선을 던졌다.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부대껴 오는 타인의 살이 싫어 있는 대로 몸을 구기다 보니 학교에 도착할 무렵엔 운동이라도 한 듯 몸이 찌뿌듯했다.

“조여준!”

발이 땅에 닿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익숙한 부름이 들려왔다. 여준이 못 들은 척 무시하자 매서운 기세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아침 안 먹었냐? 왜 내 말을 먹어?”

어깨 위로 느껴지는 무게에 여준이 잔뜩 얼굴을 구겼다. 매일같이 등교 시간이 겹치는 형우였다. 아침부터 무슨 기운이 그리 넘치는지 여준이 버티기엔 버거운 상대였다.

“미역국은 먹었냐?”

“어. 좀 떨어져.”

“생일 축하한다, 조여준. 그나저나 오늘이 천 년에 한 번 오는 길일이라던데, 너 오늘 좋은 일 생기는 거 아니야?”

“종일 학교에 있는데 좋은 일은 무슨.”

자기 생일이라도 되는 양 신이 난 형우를 차갑게 흘긴 여준이 기어이 그를 떨쳐 냈다. 앞서가는 그의 뒤를 형우가 그림자처럼 바짝 쫓아왔다.

“어! 야, 조여준 신발 샀냐?”

“…….”

“와, 이 새끼 조던!”

흰 신발 위에 제 발자국을 내겠다고 달려드는 형우를 피해 여준이 냅다 도망쳤다. 아침부터 뜀박질이라니. 1교시에 집중하긴 글렀구나. 입 밖으로 한숨 섞인 탄성이 터져 나왔다.



딱 하루만이라도 신발을 깨끗이 유지하고 싶던 여준의 바람은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수포가 되었다. 형우가 동네방네 새 신발에 대한 소식을 떠들어 댄 탓이다. 그 나이대 장난기라는 게 거기서 거긴지라 너도나도 여준의 신발을 밟겠다고 나섰다. 덕분에 새 신발은 금세 헌신짝이 되고 말았다.

“강형우 죽여 버려.”

답지 않게 사나운 말을 내뱉는 여준을 보고도 형우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실실 웃음을 흘렸다. 늘 조용하던 여준이 이렇게 한 번씩 크게 반응할 적이면 친구들은 무척이나 즐거워하곤 했다. 그 사실을 알기에 아무렇지 않게 넘기려 했지만, 거지꼴이 된 제 신발을 보고 있자니 차마 욕이 삼켜지질 않았다.

“너희 진짜 너무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신발 꼴이 이게 뭐냐?”

어딜 다녀왔는지 조회 시간이 가까워질 무렵에야 나타난 선교가 여준의 신발을 발견하고 탄식했다. 제 손으로 닦으려는 시늉까지 하기에 여준이 다급히 신발을 뒤로 물렸다. 손으로 닦아 봤자 어차피 소용도 없을 터였다.

“이렇게 밟아 줘야 오래 신는 거야.”

“조용히 해라, 강형우.”

여준이 다시금 이를 드러내자 아이들은 또 좋다고 웃었다. 천 년에 한 번 오는 길일이라더니, 생일날 일진이 영 사나웠다.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휴지로 신발을 벅벅 닦다가 이내 골이 나 휙 내팽개쳤다. 나동그라진 신발을 주워 그의 책상 밑에 가지런히 내려놓은 이는 선교였다.

“물로 헹구면 깨끗해질 거야.”

“…….”

“햇볕에 바짝 말리면 처음 샀을 때보다 더 하얘질걸?”

뭐라 대꾸하려던 차에 담임이 들어오는 바람에 시도로만 그쳤다. 미련 없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선교의 등 뒤로 여준의 시선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




수업 내내 혼을 빼놓고 있던 녀석들도 점심시간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기가 넘쳤다. 그중 단연 1등은 형우였다. 종이 치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나 이내 미친 듯이 복도를 내달리는 그를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급식을 시작한 이래 가장 열정적인 학생이란 평을 받기도 했다. 달리는 모습이 지난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이봉주 선수와 비슷하다 하여 강봉주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야, 1등으로 가면 급식 더 많이 주냐?”

“주겠냐. 그냥 집착하는 거지. 미친놈이잖아.”

지석의 말에 여준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아침, 엄마에게 고집을 부리듯 맛있다고 했던 급식은 사실 정말 별로였다. 더구나 까다로운 아빠 입맛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그에게 바깥 음식이 맞을 리 없었다. 중식은 어영부영 아이들 틈에 끼어 먹는다지만 석식은 건너뛰거나 차라리 매점에서 군것질을 택하는 일이 많았다. 엄마가 알면 기절할 일이었다.

학년이 높은 순으로 줄을 서기 때문에 여준과 친구들은 서두를 필요 없이 여유롭게 배식을 받았다. 여느 날처럼 미리 자리를 잡아 둔 형우가 친구들을 발견하곤 연신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에 장난기가 발동한 지석이 은근슬쩍 방향을 틀었다. 미리 짠 것도 아닌데 마음이 맞아 우르르 다른 테이블에 몰려 앉았다.

“야이씨! 죽을래?!”

버럭 소리를 내지른 형우가 별수 없이 친구들을 따라 자리를 옮겼다. 씩씩대는 형우의 반응에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내내 웃지 않던 여준 역시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씰룩였다.

“멍청이.”

작은 중얼거림이 주변의 소음에 묻혀 흩어졌다.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하고 밥을 먹는 친구들이었지만 이야깃거리는 항상 넘쳐 났다. 무리에 수다스러운 녀석들이 많아 언제나 왁자지껄했다. 과묵한 성격의 여준은 대체로 가만히 앉아 듣는 쪽이었다.

“야, 근데 진짜로 지구 멸망하면 어떡하지?”

한창 게임 얘기에 빠져 있던 형우가 다소 뜬금없는 화두를 끄집어냈다. 저마다 떠들기 바쁘던 아이들의 고개가 전부 형우를 향했다. 묵묵히 밥만 먹던 여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뭔 헛소리야, 또.”

바로 옆에 앉은 지석의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형우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 외국에 엄청 유명한 예언가가 그랬다며. 99년에 지구 멸망한다고. 노스……. 뭐더라.”

“노스트라다무스?”

“어 맞아. 노스라타무스.”

“노스라타무스가 아니고 노스트라다무스라고. 새끼야.”

“그래. 그 사람!”

그 말에 여준이 코웃음을 쳤다.

“노스트라다무스는 99년 7월에 지구가 멸망한다고 했어.”

“어?”

“이미 지나갔다고. 멍청아.”

그제야 저도 뉴스에서 본 적이 있다며 맞장구를 치는 녀석이 등장했다. 그렇게 싱겁게 화제가 가라앉나 했지만 시기가 시기인 만큼 다들 할 말이 많은 눈치였다.

“어떤 종교는 올해가 진짜 구원의 시간이라고 그러던데. 자기들 믿어야 천국 간다고.”

“사이비잖아. 헛소리하니까 사이비 소릴 듣는 거지.”

어느 종교의 교주가 무슨 소릴 했다든가 하는 이야기는 신문이나 뉴스에도 왕왕 등장하곤 했다. 물론 전부 허무맹랑한 가설에 불과할 뿐인지라 귀 기울여 듣는 이는 많지 않았다.

“근데 Y2K는 좀 신빙성 있지 않냐?”

“Y2K? 그게 뭔데.”

“가수?”

“밀레니엄 버그! 컴퓨터 버그 말이야.”

“그게 뭔데 새끼야. 자세히 말해야 알지.”

신문 보길 좋아하는 한 녀석이 흘러내린 안경을 추켜올리며 말을 이었다.

“컴퓨터가 날짜를 인식할 땐 연도의 뒤 두 자리로 구분을 하거든? 올해는 99 이런 식으로 말이야.”

“그래?”

“그럼 2천 년은 뭐겠어.”

“……영영?”

“그렇지. 제로제로. 근데, 컴퓨터가 과연 이걸 날짜로 인식할 수 있느냔 말이야. 만약에 뉴 밀레니엄이 되자마자 오류가 생기면 온 지구가 난리가 나는 거지.”

“무슨 난리가 나는데?”

흥미로운 이야기에 형우가 말끝을 붙잡고 늘어졌다.

“뭐, 대규모 정전이라든가. 전화도 전혀 사용 못 할 테고. 아, 어디선 핵폭발도 일어날 수 있다고 하던데?”

“핵폭발?! 갑자기?”

“아니 뭐, 정전이 일어나서 제어 시스템에 문제 생기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가설이잖아, 가설.”

생각보다 심각한 이야기가 오가니 아이들의 표정도 조금씩 어두워졌다.

“와, 씨. 진짜 멸망하면 억울해서 어떡하냐. 1년 내내 공부만 하고 제대로 놀지도 못했는데.”

형우의 말에 여준은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야. 말은 바로 해야지. 네가 공부는 무슨…….”

“이씨. 나도 나름대로 열심히 했거든?!”

“어련하시겠어.”

“아오, 조여준. 너 오늘 생일이라 봐준다.”

순간 테이블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형우를 제외한 누구도 오늘이 여준의 생일임을 알지 못했던 탓이다. 어울려 놀기 바쁘지 서로의 생일을 챙길 만큼 섬세한 구석은 없는 녀석들이니 당연했다. 여준과 중학교 때부터 친했던 형우만 예외였다.

“뭐야. 조여준 생일이야? 말을 하지.”

“그러게. 야, 생일 축하한다.”

“뭐 별일이라고 말을 해. 됐어.”

냉랭하게 대답한 여준이 고개를 저었다. 사실 생일이니 뭐니, 제가 먼저 입 밖으로 꺼내긴 민망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여준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렸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선교였다.

“너 생일이야?”

“어.”

“아, 그럼 오늘 신고 온 신발이 생일 선물인가 보네?”

여준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선교는 또래답지 않게 퍽 다정한 말투를 구사했다. 그게 느끼하다며 놀리거나, 심지어는 정말 싫어하는 녀석들도 더러 있었다. 가식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때와 장소, 상대를 가리지 않는 꾸준함을 보면 타고난 말투는 맞는 듯했다.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어?”

“생일 선물 말이야.”

그 말이 마치 사 주겠다는 소리처럼 들려 여준은 당황스러웠다. 선뜻 대답을 못 하고 미간을 구기자 선한 눈매가 대답을 재촉하듯 다정히 휘어졌다.

“없어.”

“그래?”

단호한 대답에 선교가 눈에 띄게 실망한 낯을 했다. 그마저도 부담스럽게 느껴진 여준은 결국 피하듯 고개를 돌렸다. 친구들은 제 할 일에 바빠 이쪽엔 관심도 없어 보였다. 머쓱한 기분에 공연히 반찬을 뒤적이던 여준이 이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




여름의 끝과 가을의 시작에 발을 걸친 애매한 시기였다. 아침저녁으론 찬 바람이 불어 제법 쌀쌀했다. 해가 지기 무섭게 기온이 뚝 떨어져 오래되고 낡은 학교 건물 전체에 찬 기운이 감돌았다. 추위에 유난히 약한 여준은 아까부터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하필이면 체육복을 집에 놓고 온 탓에 걸칠 만한 옷도 없었다. 형우가 제 것을 빌려주겠다 나섰지만 1년에 한 번 세탁할까 말까 한 그의 체육복을 입을 엄두가 나지 않아 곧장 거절했다.

하복 반소매 밑으로 닭살이 잔뜩 돋았다. 손바닥으로 쓱쓱 비벼 봤지만 애초에 손이 찬 탓인지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조여준.”

한창 수학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절 부르는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영어 사전 좀.”

“……기다려.”

학교에 사전 하나 갖다 두지 않는 친구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여준은 별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물함 안에 넣어 두었기에 귀찮게 몸을 움직여야 했다.

친구에게 사전을 건네주고 돌아오니 못 보던 체육복 상의가 책상 위에 올라와 있었다. 이게 뭔가 싶어 이리저리 살피는데 가슴팍에 새겨진 이름이 낯익었다.

‘유선교’.

놀란 여준이 선교의 자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 이곳을 보고 있었는지 턱을 괴고 있던 그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씩 웃었다. 당황한 여준이 얼른 고개를 돌렸다. 다시 돌려줄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그의 체육복을 어깨에 걸쳤다. 머지않아 몸을 감싼 냉기가 천천히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