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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황제의 어명으로 하루아침에 감별사에 임명된 자.

상세한 신상은 불명이라지만 한 번이라도 만난다면 어느 명문 일족의 사생아라는 소문을 떠올릴 만큼 범상치 않은 인상을 주는 건헌은, 모르는 자에게도 아는 자에게도 경계 대상이었다. 더욱이 황명 탓에 쉬쉬하고 있지만 망국의 직계이며 홍국 황가의 선대 일문을 몰살한 살인자의 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백아국 내에서의 신망이 높았고 그 자신도 반역을 시도하였다는 점, 목숨을 부지하려 들지 않고 황손다운 처신을 한 점 또한 사실이라 건헌의 위치는 애매하기 그지없었다. 따라서 그의 처소를 정하는 일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었는데, 류안의 말 한마디에 황궁 깊숙한 곳에 외따로 자리한 별채로 정해지게 되었다.

나라를 안정시키기 전까지는 황궁을 새로 짓는 것 따윈 낭비일 따름,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을 써먹자는 황명대로 백아국의 황궁을 그대로 쓰고 있었기에 건헌도 익히 아는 장소였다. 역대 백아에는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 될 병을 앓았던 황손들이 종종 발생했는데, 이들을 평생 격리해 두는 곳이었다. 그래서 별채라고는 하나 또 다른 감옥이나 매한가지라 별다른 이견 없이 건헌의 몫으로 주어졌다.

아침 식사를 끝낸 그는 익숙한 길을 걸어갔다. 식사 중에 듣는 그 어떤 얘기든 바로 흘려 버리는 습관을 익힌 지 오래건만 오늘은 그러지 못한 게 당혹스러울 정도라 걸음걸이는 다소 급했다. 말한 당자조차 금세 잊었을 말이 귓가에 달라붙어 그를 성가시게 하고 있었다.

‘뚜쟁이 노릇이나 자처하고 있다니.’

‘시침랑으로도 좋다면 말리지 않겠다.’

그는 한 손을 들어 얼굴을 문질렀다. 황제의 앞에서 의식적으로 감춘 동요가 스스로 놀랄 만큼 격했던 탓인지, 아직도 잔재가 남아 마음이 답답했다. 한숨을 삼킨 그는 별채가 보이는 곳에 이르러서야 걸음을 늦추었다.

작지만 정갈한 실내 안에 한 발을 들여놓은 순간, 건헌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던 잡념이 일시에 지워졌다.

문을 닫은 그는 계속 걸어갔다. 시야가 탁 트인 창가 옆에 앉은 다음에야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와라.”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방 한구석에 그림자가 나타났다. 건헌이 작게 미소 지었다.

“오랜만이구나.”

“소인 흑염, 건헌 님께 인사 올립니다.”

흑염黑炎은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백아국 황실에서 대대로 길러 내어 계승자에게 내려 주는 당대 최고의 무인을 가리키는 호칭이었다. 오로지 실력으로 이어지기에 더욱 경외의 대상이 된 그 존재는 황권의 상징과도 같았지만 나라가 멸함으로써 전설이란 이름 아래 사람들의 뇌리에서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었다.

그 최후의 흑염이 한쪽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대는 무사하리라 믿었지. 이리 찾아와 주어 고맙구나.”

“황송합니다. 지난 일 년간 주군을 찾아 헤매었으나 설마 이런 곳에 계시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기에 오늘에야 존안을 뵈오니 용서를 바랄 따름입니다.”

건헌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대의 주군이 아니다. 흑염. 벗으로서 온 것이라면 환영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흑염이 낮지만 강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애초, 이미 탁해질 대로 탁해진 황가를 떠나지 않은 것은 건헌 님이 계시기 때문이었으며 마음을 죽이고 황태자께 굴종했던 것 또한 소인의 언행이 자칫 건헌 님께 위해를 끼쳐 드릴까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소인, 자유가 된 몸으로 스스로에게 정직하게 참된 주군을 모시고자 합니다.”

바람결에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가 잠시 방 안을 채웠다.

이윽고 건헌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그대는 이제 어디에도 묶여 있지 않아. 어디로든 자유롭게 원하는 대로 떠나도록 해.”

“전하! 어찌 그런 말씀을……!”

“그리고 그렇게 부를 필요는 없다. 여기 있는 건 황자가 아니라 감별사니까.”

흑염의 얼굴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더욱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어찌 이 같은 치욕을 앞으로도 감수하겠다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건헌이 설핏 웃었다.

“치욕이라. 그리 생각하나?”

“어찌 달리 볼 수 있겠습니까! 물론, 살아 계신 것만으로도 기쁘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 무례를 용납할 수는 없습니다.”

“나 역시 이렇게라도 살아 다행이라는 생각은 한 적이 없다.”

“…….”

“하지만 이 경우는 치욕도, 무례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울 거야.”

건헌의 시선이 창밖으로 건너갔다.

부드러운 바람에 스친 나뭇잎이 살랑 춤을 추다 이내 잠잠해지는 광경은 그저 평화로웠다.

“자결이 실패했을 때부터 죽 생각했었다. 내가 죽더라도 홍국이 세간의 비난을 받을 이유도 없고 오히려 죽어 주어야 여러모로 편리한 입장인 것을, 분명 모두가 방심한 순간이었음에도 황제가 직접 손을 베이기까지 하며 막은 이유가 무엇인지. 그러다 감별사가 되라는 명이 떨어졌을 때 적어도 하나는 알게 되었어. 황제는 내가 살아 있기를 바란다는 것을.”

한가롭고 고요한 경치를 내다보며 그가 계속 말을 이었다.

“왜 하필 감별사였을까. 목숨을 걸고 정복자인 나를 지켜라, 언뜻 보기에는 철저한 복수지. 허나 오히려 그 때문에 반대의 목소리를 효과적으로 누를 수 있다. 폐황의 자식을 방패막이로 쓴다면 누구나 이해할 일. 몸뚱이 하나면 되니 무기 소지를 막을 수 있고 언제 죽을지 아무도 모르니 살려 두겠다는 의지의 표명도 아니니까. 머리를 잘 썼어.”

마치 남 일처럼 덧붙이는 건헌에게 묵묵히 듣고 있던 흑염이 중얼거렸다.

“그 말씀이 옳다면, 과연 어찌하여…….”

“그래. 성난 민심을 달래려고 그 앞에 던져 줄 용도 외에는 알 수 없는 일이지. 허나 내 정체는 함구되었고 지금까지도 외유하게 한 적이 없어. 처음 감별의 일을 하라는 명을 받기로 결심한 것은 곁에 있게 되면 그 이유를 알게 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따지고 보면 독이 아니라 사람을 감별하는 셈이었지. 그러나 지금은…….”

건헌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지난 일 년의 세월은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그중 가장 큰 변화를 겪은 건 바로 황제라는 것을, 건헌은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장신구로 고정시켜야 할 만큼 길어 버린 머리칼뿐만이 아니라, 당시 젊은 장수로만 보였던 류안은 이제 두 번 다시 같은 눈으로 볼 수 없을 만큼 명실상부한 지존이며 나라의 중심이었다.

어린 시절 일족이 도륙당한 과거에 무너지지 않고 반백 년은커녕 그 절반도 미치지 않는 세월 만에 복수에 성공하기까지, 오롯이 앞을 보며 달려온 강하고 곧은 심성. 문무백관과 백만 장병이 충성을 바치는 타고난 고귀함. 거대한 나라를 유례가 없을 만큼 빠르게 안정시킨 유능함. 그 모든 것이 시간의 힘으로 점점 더 빛을 발해 눈이 부실 정도였다.

그의 자결을 막았던 당시, 황제는 그 자리에 있던 이들에게 함구령을 내리고 폐황 의천의 핏줄은 모두 죽었으며 산 자들도 그 죄에 따라 사형에 처하였다고 공포했었다. 그러나 측근들에게조차 그 비밀이 지켜질 리는 없는 법. 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감별조차 분에 넘친다며 원숭이를 식사 때 대동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반대했지만 그녀는 태연하게 일축함으로써 반대의 목소리가 잦아들게 만드는 몫을 시간의 흐름에 맡겼다.

‘감별로야 원숭이보다 사람이 쓸 만한 게 당연한 일. 눈앞에서 먹는 것을 직접 볼 수 없다면 어찌 믿겠는가?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짐은 원숭이가 싫다.’

덕분에 건헌은 매일 세 번 류안을 만났다. 아침, 점심, 그리고 저녁. 국경 시찰이나 외유로 인한 부재 등을 제외하면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어느 사이엔가 그녀를 대하는 그는 작은 꽃봉오리가 더할 나위 없이 환하게 피어나는 모습을 곁에서 가만히 지켜보는 마음이 되어 있었다. 물을 줄 자격은 되지 못하더라도, 해충을 막을 수 있는 위치는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한 건 언제부터였던가.

“……지금은,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졌어.”

그는 흑염의 시선을 마주하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녀가 어떤 나라를 만들어 갈지 직접 보고 싶어졌으니까.”

흑염의 눈이 커졌다. 건헌이 말했다.

“홍국 황제는 연치는 어릴지언정 현명한 인물이다. 지난 시간 동안 이 땅의 변화를 직접 보았을 그대라면 이해하리라 생각하는데…… 어떤가?”

흑염은 머뭇거림으로써 대답을 한 셈이었다. 하지만 완전히 납득하지는 못하겠는지 아쉬움을 흘렸다.

“하오나 건헌 님께서 다스리셨다 하여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나 역시 한때 그런 욕심을 품었었지.”

건헌이 희미하게 웃었다.

“허나 믿었던 자가 배신한 것이 하늘이 허락하지 않는 방증이라 여겨 체념하려던 차에 이번에는 홍군의 침입으로 온 황궁이 혼비백산, 어영부영 감옥에 갇혀 살아남았고. 나름의 의무를 다하고 미련 없이 자결하려 했건만 그조차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가로막힌 데다 결국엔 감별사라……. 대체 무엇이 하늘의 뜻인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내 뜻에 따라 결정하려 한다. 새삼스러운 얘기가 되었지만.”

그를 바라보던 흑염은 고개를 숙였다.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건헌 님은.”

“그런가.”

“차라리…… 변하셨다면 좋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 뵈었던 날 이후, 당신을 만인 앞에서 당당하게 섬길 수 있는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저로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