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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요란하게 울려 대는 심장 소리는 놀라서인지 안심해서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이유가 있는지 그녀는 쉽게 가늠하지 못했다. 다른 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붙들어 몸을 고정시킨 채 그녀의 완충 역할을 자처한 그가 길게 숨을 쉬었다. 희미한 숨결이 어마어마한 바람처럼 그녀를 향해 불어닥쳤다.
그는 바로 일어나거나 그녀를 흔들지 않고 신중한 태도로 팔을 풀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응…… 그럭저럭.”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엉망이 된 머리칼이 흘러내려 자신의 아래에 누운 그의 얼굴 위로 그늘을 만들었다. 그 탓인지 읽기 어려운 표정 가운데 이쪽을 올려다보는 진지한 눈빛이 형형했다. 한순간 얽힌 시선은 금세 떨어지고, 류안은 그에게서 내려와 옆으로 비켜 앉았다.
“덕분에, 고맙다. 그대는 괜찮은가?”
“네.”
즉답이었으나 그녀는 그가 일어나 앉는 동작을 유심히 본 다음 안심했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풀과 나무가 우거진 사방은 매우 조용했다.
“제법 멀리 떨어진 모양입니다.”
“그렇겠지.”
“우선 섣불리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는 게 좋겠습니다.”
류안을 돌아본 건헌이 한 손을 뻗었다. 몸에 묻은 흙을 털어 내던 그녀는 멈칫했다. 가까이 다가오던 기름한 손가락이 뺨에 닿기 직전, 그는 내밀었던 것만큼이나 갑작스럽게 손을 거두었다.
“……다치셨습니다.”
그녀는 주먹 쥔 그의 손을 보았다. 방금 전까진 아예 온몸을 붙여 놓고는 이제 손끝을 대는 것도 조심스러워하는 게 퍽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웃음은 나지 않았다. 실망인지 그보다 더 큰 무엇인지, 깊게 생각하는 대신 그녀는 직접 뺨을 더듬었다. 생채기가 났는지 쓰라리긴 해도 이만하길 다행이었다.
“뭐, 이쯤이야 핥으면 그만이지. 목뼈가 부러질 수도 있었는데 이깟 거에 신경 쓰는 건 사치다.”
류안은 등 뒤에 반쯤 썩은 나무둥치가 있는 것을 보고 몸을 기댔다. 욱신대는 몸이 여기저기서 신음을 지르는 것을 모른 척하며 물었다.
“이런 것을 예상했었나?”
“방식은 달랐습니다만.”
“어떤 수작을 부렸는지 몰라도 확실히 그대가 아니었다면 비명횡사할 뻔했다. 일부러 직전에 말을 바꾸었는데 그조차 허사였군.”
“……소인이 올린 말씀 때문이었습니까?”
“내 앞에서는 필요 이상 낮추지 말라고 했을 텐데.”
“…….”
지금 그게 중요하느냐는 항의를 하고 싶은 듯 어이없어하는 눈빛이 제법 무엄했다.
“저를 믿으신 겁니까?”
당장 바꿔 물은 말은 여전히 정중했지만, 시선 때문인지 어째 추궁받는 기분마저 들어 류안은 때아니게 즐거워졌다. 그와 이처럼 길게 말을 섞은 것도 처음이었다.
“믿었지.”
그래서 그녀는 솔직하게 답했다.
“그대가 날 해하려고 들 경우엔 정공법을 쓸 것 같았거든. 이처럼 단둘이 있을 때를 노려 시해하거나 날 구한 척 신임을 얻는 잡스러운 방식은 어울리지 않아.”
“…….”
“그대라면 시간과 공을 들여 사람들을 포섭해서 깃발을 세우고, 내 부덕을 명분으로 옥좌를 탈환하려 들겠지.”
류안은 씩 웃었다.
“뭐, 결심이 서면 한번 애써 보아라. 쉽지는 않을 것이다.”
“……폐하께서는 승부사 기질이 있으시군요.”
묵묵히 듣던 건헌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하오면 이젠 도발당한 제가 ‘두 번 실패한 적은 없습니다’라고 말씀드릴 차례일까요.”
“사실인가?”
류안이 궁금해서 묻자 그는 말문이 막힌 듯했다. 그때 머리 위쪽에서 가느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폐하! 어디 계십니까? 폐하!”
“다행히 오래 걸리지는 않았군요.”
일어선 건헌이 목소리를 높여 위치를 알렸다. 류안은 조금 아쉬운 기분으로 낙엽을 헤치는 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듣고 있었다. 이내 무인 한 명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무사하셨군요, 폐하. 다행입니다.”
그가 가까이 다가왔고 건헌은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괜찮다고는 했지만 막상 일어나려니 다소 힘이 들어 류안은 한쪽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그녀가 몸을 바로 하기도 전에, 건헌이 난데없이 앞을 가로막듯 끼어들었다. 그리고 비틀거렸다. 반사적으로 그를 떠받친 류안은 그의 어깨에 꽂힌 검을 보고 경악했다.
무인은 혀를 차며 검을 세게 뽑았다. 붉은 피가 사정없이 흩뿌려지고 몸이 크게 꿈틀거렸지만 건헌은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팔을 벌려 더욱 꼿꼿이 막아섰다. 낮지만 강하게 질책하는 목소리 또한 그랬다.
“이 무슨 발칙한 짓인가!”
“한낱 계집 주제에 고집을 부린 대가지. 좋게 권하는 대로 물러났으면 자는 사이에 편하게 죽었을 텐데.”
“……재상이로군.”
류안이 확신을 내뱉었다. 무인이 가소롭다는 듯 웃는 가운데, 그제야 제대로 짜 맞춰진 조각들이 온전한 그림을 그려 냈다. 독립에의 일등 공신이며 온화한 충신, 연륜 있는 유능한 관리로 문무백관의 장長을 맡긴 노인을 끝까지 전적으로 믿지 못하고 경계했던 것이 옳았음이 증명된 셈이기도 했다. 그는 그저 정통성을 가진 인형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적당히 자리를 잡은 다음엔 사고를 가장해 치워 버릴 수 있는. 류안이 분노를 터뜨렸다.
“주제 파악도 못 하는 늙은이 같으니. 여태 봐준 것도 모르고 감히 발톱을 세워?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죽는 마당이니 폭언은 넘어가 주지. 염려 마라. 네가 죽어도 어르신이 알아서 나라를 잘 다스리실 거다.”
“그 전에…… 나부터 죽여야 할걸.”
건헌이 조용히 단언했다. 무인이 코웃음을 쳤다.
“재촉하지 않아도 너 또한 죽은 목숨이다. 운이 나빴던 걸 원망해라.”
“안 돼!”
류안이 당장 앞으로 나서려는데, 건헌의 벌린 두 팔이 그녀조차 막고 있었다.
“비켜라, 명령이다!”
“따를 수 없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건헌!”
그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러나 그뿐, 그는 더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부상을 입은 몸이라 뜻대로 마구 흔들거나 밀치지도 못한 류안은 애꿎은 그의 옷깃만 바짝 그러쥐었다.
“눈물 나는 광경이군. 황천에서도 사이좋게 지내어라.”
비웃은 무인이 검을 치켜들더니 돌연 움직임이 멈추었다.
“……컥.”
류안은 눈을 크게 떴다.
검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이어 무인이 털썩 쓰러졌다. 뒷덜미에는 단검 하나가 깊숙이 꽂혀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퍼뜩 고개를 든 류안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홀연히 나타난 검은 옷 일색의 사내를 발견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얼굴은 매우 낯설고, 목소리만큼이나 묵직한 눈빛은 자신을 향해 있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예감을 느낀 것과 거의 동시에, 건헌이 휘청거렸다. 류안이 급히 손을 뻗었지만 검은 사내가 더 빠르고 단호했다. 그는 류안을 무시하고 건헌을 나무에 기대앉도록 부축했다. 건헌이 미소 지었다.
“역시…… 그대였군.”
“이런 일이 벌어질까 봐 주시하고 있었습니다만 결국 막지 못하였으니 그 죄는 달게 받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고맙다, 흑염.”
“아……!”
저도 모르게 작게 외친 류안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범상치 않다 했더니 그 흑염이라니.
건헌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이쪽을 보았지만 흑염은 여전히 그녀를 무시했고 표정도 바뀌지 않았다. 아니, 그는 심각한 얼굴로 상처를 살폈다. 그리고 품 안에서 다른 단검을 꺼내더니 시체의 옷자락을 찢어 붕대 대신 건헌의 상처를 단단하게 감싸 지혈했다.
“이대로는 위험합니다. 위까지 소인이 모시겠습니다.”
“아니. 괜찮다. 그보다 어서 가 봐. 사람들이 곧 몰려올 거다.”
“하오나…….”
“염려 마라. 이깟 상처로는 죽지 않는다.”
건헌이 단호하게 말했다. 흑염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 기색이었지만 저 위쪽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결심한 듯 날카롭게 휘파람을 불었다. 웅성거림이 들리나 싶더니 이내 비탈길을 내려오는 여러 개의 발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흑염이 다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 텐데.”
묵묵하게 지켜만 보고 있던 류안이 입을 열었다. 입막음을 하거나, 적어도 건헌의 안위에 대한 다짐을 받아 내는 게 정상이지 않은가. 하지만 막 일어나 몸을 돌린 흑염은 잠깐 걸음을 멈추었을 뿐이었다. 그는 순식간에 수풀 속으로 사라졌고, 언제 있기라도 했었느냐는 듯 기척이 지워졌다. 간발의 차로 수행원들이 달려 들어왔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그들은 동료 하나가 죽어 넘어진 것을 보고 놀라 우뚝 섰다. 주변을 둘러보다 즉각 피투성이가 된 건헌에게로 의심의 시선이 꽂혔으나 멀쩡한 류안이 그를 부축하듯 곁에 있는 것을 보고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폐하,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왜 이자가…….”
“나를 구하려다 중상을 입었다. 속히 이송토록 하라.”
류안이 말을 끊고 지시했다.
“시체도 함께 가져간다. 사고사였다. 그 외는 일체 불문에 부치겠다.”
뒷목에 단검을 박고 있는 시신과 땅에 떨어져 있는 피범벅 된 검을 번갈아 본 사람들은 류안의 명에 더욱 당황하는 눈치였지만 반박하지 않고 움직였다. 고개를 돌린 류안은 건헌이 의식을 잃고 축 늘어진 모습을 보았다.
순간 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요란하게 울려 대는 심장 소리는 놀라서인지 안심해서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이유가 있는지 그녀는 쉽게 가늠하지 못했다. 다른 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붙들어 몸을 고정시킨 채 그녀의 완충 역할을 자처한 그가 길게 숨을 쉬었다. 희미한 숨결이 어마어마한 바람처럼 그녀를 향해 불어닥쳤다.
그는 바로 일어나거나 그녀를 흔들지 않고 신중한 태도로 팔을 풀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응…… 그럭저럭.”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엉망이 된 머리칼이 흘러내려 자신의 아래에 누운 그의 얼굴 위로 그늘을 만들었다. 그 탓인지 읽기 어려운 표정 가운데 이쪽을 올려다보는 진지한 눈빛이 형형했다. 한순간 얽힌 시선은 금세 떨어지고, 류안은 그에게서 내려와 옆으로 비켜 앉았다.
“덕분에, 고맙다. 그대는 괜찮은가?”
“네.”
즉답이었으나 그녀는 그가 일어나 앉는 동작을 유심히 본 다음 안심했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풀과 나무가 우거진 사방은 매우 조용했다.
“제법 멀리 떨어진 모양입니다.”
“그렇겠지.”
“우선 섣불리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는 게 좋겠습니다.”
류안을 돌아본 건헌이 한 손을 뻗었다. 몸에 묻은 흙을 털어 내던 그녀는 멈칫했다. 가까이 다가오던 기름한 손가락이 뺨에 닿기 직전, 그는 내밀었던 것만큼이나 갑작스럽게 손을 거두었다.
“……다치셨습니다.”
그녀는 주먹 쥔 그의 손을 보았다. 방금 전까진 아예 온몸을 붙여 놓고는 이제 손끝을 대는 것도 조심스러워하는 게 퍽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웃음은 나지 않았다. 실망인지 그보다 더 큰 무엇인지, 깊게 생각하는 대신 그녀는 직접 뺨을 더듬었다. 생채기가 났는지 쓰라리긴 해도 이만하길 다행이었다.
“뭐, 이쯤이야 핥으면 그만이지. 목뼈가 부러질 수도 있었는데 이깟 거에 신경 쓰는 건 사치다.”
류안은 등 뒤에 반쯤 썩은 나무둥치가 있는 것을 보고 몸을 기댔다. 욱신대는 몸이 여기저기서 신음을 지르는 것을 모른 척하며 물었다.
“이런 것을 예상했었나?”
“방식은 달랐습니다만.”
“어떤 수작을 부렸는지 몰라도 확실히 그대가 아니었다면 비명횡사할 뻔했다. 일부러 직전에 말을 바꾸었는데 그조차 허사였군.”
“……소인이 올린 말씀 때문이었습니까?”
“내 앞에서는 필요 이상 낮추지 말라고 했을 텐데.”
“…….”
지금 그게 중요하느냐는 항의를 하고 싶은 듯 어이없어하는 눈빛이 제법 무엄했다.
“저를 믿으신 겁니까?”
당장 바꿔 물은 말은 여전히 정중했지만, 시선 때문인지 어째 추궁받는 기분마저 들어 류안은 때아니게 즐거워졌다. 그와 이처럼 길게 말을 섞은 것도 처음이었다.
“믿었지.”
그래서 그녀는 솔직하게 답했다.
“그대가 날 해하려고 들 경우엔 정공법을 쓸 것 같았거든. 이처럼 단둘이 있을 때를 노려 시해하거나 날 구한 척 신임을 얻는 잡스러운 방식은 어울리지 않아.”
“…….”
“그대라면 시간과 공을 들여 사람들을 포섭해서 깃발을 세우고, 내 부덕을 명분으로 옥좌를 탈환하려 들겠지.”
류안은 씩 웃었다.
“뭐, 결심이 서면 한번 애써 보아라. 쉽지는 않을 것이다.”
“……폐하께서는 승부사 기질이 있으시군요.”
묵묵히 듣던 건헌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하오면 이젠 도발당한 제가 ‘두 번 실패한 적은 없습니다’라고 말씀드릴 차례일까요.”
“사실인가?”
류안이 궁금해서 묻자 그는 말문이 막힌 듯했다. 그때 머리 위쪽에서 가느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폐하! 어디 계십니까? 폐하!”
“다행히 오래 걸리지는 않았군요.”
일어선 건헌이 목소리를 높여 위치를 알렸다. 류안은 조금 아쉬운 기분으로 낙엽을 헤치는 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듣고 있었다. 이내 무인 한 명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무사하셨군요, 폐하. 다행입니다.”
그가 가까이 다가왔고 건헌은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괜찮다고는 했지만 막상 일어나려니 다소 힘이 들어 류안은 한쪽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그녀가 몸을 바로 하기도 전에, 건헌이 난데없이 앞을 가로막듯 끼어들었다. 그리고 비틀거렸다. 반사적으로 그를 떠받친 류안은 그의 어깨에 꽂힌 검을 보고 경악했다.
무인은 혀를 차며 검을 세게 뽑았다. 붉은 피가 사정없이 흩뿌려지고 몸이 크게 꿈틀거렸지만 건헌은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팔을 벌려 더욱 꼿꼿이 막아섰다. 낮지만 강하게 질책하는 목소리 또한 그랬다.
“이 무슨 발칙한 짓인가!”
“한낱 계집 주제에 고집을 부린 대가지. 좋게 권하는 대로 물러났으면 자는 사이에 편하게 죽었을 텐데.”
“……재상이로군.”
류안이 확신을 내뱉었다. 무인이 가소롭다는 듯 웃는 가운데, 그제야 제대로 짜 맞춰진 조각들이 온전한 그림을 그려 냈다. 독립에의 일등 공신이며 온화한 충신, 연륜 있는 유능한 관리로 문무백관의 장長을 맡긴 노인을 끝까지 전적으로 믿지 못하고 경계했던 것이 옳았음이 증명된 셈이기도 했다. 그는 그저 정통성을 가진 인형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적당히 자리를 잡은 다음엔 사고를 가장해 치워 버릴 수 있는. 류안이 분노를 터뜨렸다.
“주제 파악도 못 하는 늙은이 같으니. 여태 봐준 것도 모르고 감히 발톱을 세워?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죽는 마당이니 폭언은 넘어가 주지. 염려 마라. 네가 죽어도 어르신이 알아서 나라를 잘 다스리실 거다.”
“그 전에…… 나부터 죽여야 할걸.”
건헌이 조용히 단언했다. 무인이 코웃음을 쳤다.
“재촉하지 않아도 너 또한 죽은 목숨이다. 운이 나빴던 걸 원망해라.”
“안 돼!”
류안이 당장 앞으로 나서려는데, 건헌의 벌린 두 팔이 그녀조차 막고 있었다.
“비켜라, 명령이다!”
“따를 수 없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건헌!”
그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러나 그뿐, 그는 더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부상을 입은 몸이라 뜻대로 마구 흔들거나 밀치지도 못한 류안은 애꿎은 그의 옷깃만 바짝 그러쥐었다.
“눈물 나는 광경이군. 황천에서도 사이좋게 지내어라.”
비웃은 무인이 검을 치켜들더니 돌연 움직임이 멈추었다.
“……컥.”
류안은 눈을 크게 떴다.
검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이어 무인이 털썩 쓰러졌다. 뒷덜미에는 단검 하나가 깊숙이 꽂혀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퍼뜩 고개를 든 류안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홀연히 나타난 검은 옷 일색의 사내를 발견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얼굴은 매우 낯설고, 목소리만큼이나 묵직한 눈빛은 자신을 향해 있지 않았다.
그녀가 어떤 예감을 느낀 것과 거의 동시에, 건헌이 휘청거렸다. 류안이 급히 손을 뻗었지만 검은 사내가 더 빠르고 단호했다. 그는 류안을 무시하고 건헌을 나무에 기대앉도록 부축했다. 건헌이 미소 지었다.
“역시…… 그대였군.”
“이런 일이 벌어질까 봐 주시하고 있었습니다만 결국 막지 못하였으니 그 죄는 달게 받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고맙다, 흑염.”
“아……!”
저도 모르게 작게 외친 류안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범상치 않다 했더니 그 흑염이라니.
건헌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이쪽을 보았지만 흑염은 여전히 그녀를 무시했고 표정도 바뀌지 않았다. 아니, 그는 심각한 얼굴로 상처를 살폈다. 그리고 품 안에서 다른 단검을 꺼내더니 시체의 옷자락을 찢어 붕대 대신 건헌의 상처를 단단하게 감싸 지혈했다.
“이대로는 위험합니다. 위까지 소인이 모시겠습니다.”
“아니. 괜찮다. 그보다 어서 가 봐. 사람들이 곧 몰려올 거다.”
“하오나…….”
“염려 마라. 이깟 상처로는 죽지 않는다.”
건헌이 단호하게 말했다. 흑염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 기색이었지만 저 위쪽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결심한 듯 날카롭게 휘파람을 불었다. 웅성거림이 들리나 싶더니 이내 비탈길을 내려오는 여러 개의 발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흑염이 다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 텐데.”
묵묵하게 지켜만 보고 있던 류안이 입을 열었다. 입막음을 하거나, 적어도 건헌의 안위에 대한 다짐을 받아 내는 게 정상이지 않은가. 하지만 막 일어나 몸을 돌린 흑염은 잠깐 걸음을 멈추었을 뿐이었다. 그는 순식간에 수풀 속으로 사라졌고, 언제 있기라도 했었느냐는 듯 기척이 지워졌다. 간발의 차로 수행원들이 달려 들어왔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그들은 동료 하나가 죽어 넘어진 것을 보고 놀라 우뚝 섰다. 주변을 둘러보다 즉각 피투성이가 된 건헌에게로 의심의 시선이 꽂혔으나 멀쩡한 류안이 그를 부축하듯 곁에 있는 것을 보고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폐하,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왜 이자가…….”
“나를 구하려다 중상을 입었다. 속히 이송토록 하라.”
류안이 말을 끊고 지시했다.
“시체도 함께 가져간다. 사고사였다. 그 외는 일체 불문에 부치겠다.”
뒷목에 단검을 박고 있는 시신과 땅에 떨어져 있는 피범벅 된 검을 번갈아 본 사람들은 류안의 명에 더욱 당황하는 눈치였지만 반박하지 않고 움직였다. 고개를 돌린 류안은 건헌이 의식을 잃고 축 늘어진 모습을 보았다.
순간 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