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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밖으로 나왔다. 아스트라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치 새카만 야수를 연상케 하는 남자였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푸른 눈동자 속에는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한기가 서려 있었다. 그을린 피부 빛은 어두운 이곳의 그림자에 녹아도 또렷하게 보였다.
걸친 셔츠 자락 밖으로 탄탄하고 날렵한 육체의 윤곽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무척이나 야성적인 남자였다.
화려한 미목이 주는 인상이 베일 것처럼 날카로워서 아스트라는 돌처럼 굳어 버렸다.
“너는 누구지?”
“저, 저는 잠시 신세를 지고 있는, 아스트라라고 하는…….”
위압감에 짓눌려서 아스트라는 작게 이름을 뱉었다. 그녀의 이름을 듣자, 남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죄송합니다. 책을 빌리려고 왔는데, 그게…….”
“겁먹을 것 없어. 내가 레녹스 데본이다.”
그가 바로 이 성의 주인 데본 공작이었다. 아스트라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습니다, 공작 각하!”
이런 곳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다. 아스트라는 부끄러워졌다. 자는 동안 실컷 땀을 흘린 데다 씻지도 않았다. 제대로 차려입은 다음 그에게 정중하게 인사하러 가야겠다는 계획이 뒤틀려 버렸다.
“공작 각하께 인사드리는 게 늦었습니다. 마중을 나가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각하의 성에서 황송하기 그지없는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예쁜 드레스도 빌리고 맛있는 음식도 먹었어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스트라가 정신없이 속사포처럼 떠들었다. 차근차근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었는데 급한 나머지 나오는 대로 퍼붓고 있었다.
“감기는?”
“네?”
“감기에 걸렸다고 들었는데.”
맞다, 나 감기에 걸렸지.
“많이 좋아졌어요.”
아스트라의 대답을 듣고 그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질문이 예상 밖이었다. 질문한다면 다른 것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감기는?’이란 질문이 고작이었다.
나를 걱정해 준 건가?
위압감 넘치는 외모와는 다르게 속은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런 곳에 있지?”
“잠이 오지 않아서 책이라도 읽으려고요”
“아직 밤공기가 차다. 얼른 방으로 돌아가.”
레녹스는 그 말만 남기고 다시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이대로 문이 닫히면 아스트라 혼자 남겨지게 된다. 이곳으로 오기 전까지 들었던 외로운 상념이 다시금 떠오를 것 같아서 아스트라는 얼른 그의 팔을 붙잡았다.
셔츠 너머로 닿은 그의 팔뚝은 아주 단단하고, 따뜻했다. 아스트라는 아주 찰나지만 그 온기에 안정을 느꼈다. 그리고 안정을 느낀 자신을 깨닫자마자 뒤이어 찾아온 낯선 감정에 아주 조금 혼란스러웠다.
잠시 마음을 다잡고 혼란을 털어 낸 아스트라는 레녹스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공작 각하도 잠이 오지 않으세요?”
느닷없는 질문에 레녹스가 그 자리에 굳은 채로 서 있었다. 아스트라는 이 성의 주인을 상대로 대담하게 권유했다.
“저랑 조금만 이야기하지 않을래요?”
늘 굳게 닫혀 있던 그 방의 내부는 아담하고 평범했다. 벽은 도서관과 마찬가지로 벽장이 붙어서 낡은 책들이 가득했고, 큰 창문이 있는 자리에는 검은 칠이 된 책상과 의자가 있었다.
레녹스는 하나뿐인 의자를 아스트라가 있는 쪽에 가져다 놓고 자신은 책상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책상 위에는 램프가 놓여 있었는데, 불빛 곁으로 보이는 레녹스의 얼굴은 반쯤 그늘에 녹아 있었다.
의자에 앉은 아스트라는 그의 얼굴을 마주 보며 생각했다. 데본 공작이라는 사람이 저렇게 잘난 인물일 줄 미처 몰랐다. 이제껏 만나 본 남자 중에서 최고로 잘생겼다. 마티유도 잘생긴 편에 속했지만, 레녹스는 주변에 떠도는 공기부터 남달랐다.
살짝 벌어진 셔츠의 앞섶 사이로 엿보이는 쇄골이나 그 아래의 단단한 근육이 너무나 색정적이라서 눈 둘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쳐다보는 그의 노골적인 시선에 온몸에 열이 오르는 것처럼 덥게 느껴졌다.
“할 이야기는?”
“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이야기를 들어 달라는 게 아니라 대화가 하고 싶다는 소리였는데, 아무래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아스트라가 사는 지역을 포함해 왕국의 영토를 다스리는 동부의 주인이다. 무례한 언사로 기분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
횡설수설했지만 은혜를 입은 데에 대한 감사 인사는 이미 전했다. 그렇다면 궁금한 것을 조금 물어봐도 되지 않을까?
‘무슨 의도로 제 신변을 보호해 주고 계신 거죠?’
그 질문이 입 안을 맴돌았지만, 자칫하면 화를 불러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어떻게 보면 모든 의문을 포괄하고 있는 질문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스트라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질문을 던진 게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묻고 싶었던 의문점이 저절로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레녹스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실수한 게 아닐까 하고 두려워질 무렵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
“네 신변 문제를 둘러싸고 각국의 인사들이 모여서 회담을 열 예정이야. 그곳에서 네가 어디로 가게 될지 정해진다.”
“외국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너를 보호하겠다는 주장에 가장 타당한 근거를 내세우는 이가 너를 데려가겠지. 그게 외국 대신이 될지, 아니면 쉐인…… 아니, 이 나라의 국왕이 될지는 아직 아무도 몰라.”
외국으로 건너간다는 이야기는 들어 보지도 못했다.
“왜 그런 중요한 걸 미리 말씀해 주지 않으셨나요?”
“내가 도착했더니 넌 앓아누워 있었어. 그리고 우린 방금 만났다.”
그가 간결하게 대답했다.
아스트라의 얼굴이 점점 흙색으로 물들어 갔다. 고향에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 나라 영토 밖을 벗어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외국으로 가게 될지도 모른다니, 상상도 못 한 전개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저를 데려가서 뭘 하겠다는 건가요?”
“그건 그들 마음이지. 너의 힘을 활용하면 성수로 뭐든 할 수 있을 테니까.”
“아까 저를 보호하는 게 국왕 전하가 될지도 모른다고 말씀하셨죠? 그분은 저를 이용해 얻고자 하시는 게 무엇인가요?”
“나도 잘 모르겠어. 아직 구체적인 계획도 세우지 않은 것 같아. 하지만…….”
레녹스가 눈을 내리깔며 자신의 목덜미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뭔가를 생각할 때 하는 버릇 같았다.
“커다란 신전을 지어서 값비싼 보석에 파묻히게 해 주겠다고 하더군.”
“그분도 저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는 말이네요.”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 상대가 베푸는 호의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바라는 것도 확실했다. 아스트라는 가슴 안쪽이 묵직해졌다.
“상대가 누구든 바라는 것만 들어준다면 너는 호사를 누리며 살 수 있다.”
“뭘 바라는지도 모르는걸요. 꼭두각시처럼 휘둘리며 살고 싶지는 않아요.”
“겨울에는 얼어 죽고 가뭄에는 굶어 죽는 민생이 들끓는 세상이다. 네게 온 기회를 놓치지 마.”
“저도 제가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굶어 죽는다고 해도 사람으로서 도리는 지켜야 하지 않나요?”
“그렇다면 넌 굶은 적이 없다는 소리군.”
레녹스의 차가운 목소리가 진실을 꿰뚫었다. 비난하는 것도 조롱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차분하게 직시했을 뿐이다. 아스트라는 겸허하게 인정했다.
“맞아요. 없으면 적게 먹었어도 굶지는 않았죠.”
“네가 아는 사람의 도리란 생각보다 가벼운 물건이다. 빈곤과 기아가 시작되는 곳에서 부모가 제 자식을 잡아먹는 일은 흔하게 일어나.”
그는 무표정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소름 끼치는 소리를 했다.
“축복받았다면 고민하지 말고 누려.”
“그 축복의 대가를 저는 아직 몰라요.”
“내가 예측하기에 네 축복에 따른 대가는…….”
맹수를 닮은 눈빛이 아스트라를 응시했다. 사냥감을 노리는 포식자의 앞에 선 것처럼 오싹했다.
“전쟁이지.”
아스트라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요?”
“국왕 전하의 우려이기도 해. 그러나 나는 예측에 가깝다고 본다. 성수는 인간의 힘으로 감당하기 힘든 미지의 능력을 가지고 있어. 침략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무기는 없지.”
“마, 말 같지도 않은…….”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말라며 소리치고 싶었으나,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그의 의견이 타당하다는 것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성수를 이용해서 제일 빠르고 손쉽게 이득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침략이다.
“5년 전에 겨우 종결되었던 사국 대란을 떠올리면 더 예상하기 쉽지. 아이호른 제국의 패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삼국이 협정을 맺고 긴 시간을 걸쳐 싸웠다. 제국이 무너지고 대륙의 주도권이 흐지부지해진 실정은 언뜻 보면 평화로울지 몰라.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패권자가 등장할 아주 좋은 기회지.”
“그럴 수가…….”
“눈치를 살피며 살얼음판을 걷는 상황에 네가 나타났다. 누가 이런 기회를 놓치려고 하겠어?”
레녹스는 나직한 목소리로 현 정세를 관측했다. 그의 냉정한 추측은 아스트라를 절망으로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아연해진 그녀는 곧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처럼 보였다.
좁은 방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빈말이라도 아무 일 없을 거라고 대답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스트라가 상상했던 것보다 앞으로 일어날 훗일은 잔혹하기만 했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 질문에 해답을 준 레녹스가 비정하게 느껴졌다. 자신에게 내려진 축복에 감사하며, 편안하게 살라고 말하다니. 전쟁을 목전에 두고도 저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을 한 것이다.
“각하는 잔인한 분이시네요.”
“부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사실이 그래.”
“국왕 전하께서도 저를 이용해 전쟁을 주도할 생각이신가요?”
“그건 나도 몰라. 아직 아무 얘기도 해 주지 않았으니까.”
“차라리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어요.”
“불가능해.”
그는 딱 잘라 말했다. 어쭙잖은 배려도, 빤히 보이는 위선도 없었다.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밖으로 나왔다. 아스트라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치 새카만 야수를 연상케 하는 남자였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푸른 눈동자 속에는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한기가 서려 있었다. 그을린 피부 빛은 어두운 이곳의 그림자에 녹아도 또렷하게 보였다.
걸친 셔츠 자락 밖으로 탄탄하고 날렵한 육체의 윤곽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무척이나 야성적인 남자였다.
화려한 미목이 주는 인상이 베일 것처럼 날카로워서 아스트라는 돌처럼 굳어 버렸다.
“너는 누구지?”
“저, 저는 잠시 신세를 지고 있는, 아스트라라고 하는…….”
위압감에 짓눌려서 아스트라는 작게 이름을 뱉었다. 그녀의 이름을 듣자, 남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죄송합니다. 책을 빌리려고 왔는데, 그게…….”
“겁먹을 것 없어. 내가 레녹스 데본이다.”
그가 바로 이 성의 주인 데본 공작이었다. 아스트라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습니다, 공작 각하!”
이런 곳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다. 아스트라는 부끄러워졌다. 자는 동안 실컷 땀을 흘린 데다 씻지도 않았다. 제대로 차려입은 다음 그에게 정중하게 인사하러 가야겠다는 계획이 뒤틀려 버렸다.
“공작 각하께 인사드리는 게 늦었습니다. 마중을 나가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각하의 성에서 황송하기 그지없는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예쁜 드레스도 빌리고 맛있는 음식도 먹었어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스트라가 정신없이 속사포처럼 떠들었다. 차근차근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었는데 급한 나머지 나오는 대로 퍼붓고 있었다.
“감기는?”
“네?”
“감기에 걸렸다고 들었는데.”
맞다, 나 감기에 걸렸지.
“많이 좋아졌어요.”
아스트라의 대답을 듣고 그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질문이 예상 밖이었다. 질문한다면 다른 것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감기는?’이란 질문이 고작이었다.
나를 걱정해 준 건가?
위압감 넘치는 외모와는 다르게 속은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런 곳에 있지?”
“잠이 오지 않아서 책이라도 읽으려고요”
“아직 밤공기가 차다. 얼른 방으로 돌아가.”
레녹스는 그 말만 남기고 다시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이대로 문이 닫히면 아스트라 혼자 남겨지게 된다. 이곳으로 오기 전까지 들었던 외로운 상념이 다시금 떠오를 것 같아서 아스트라는 얼른 그의 팔을 붙잡았다.
셔츠 너머로 닿은 그의 팔뚝은 아주 단단하고, 따뜻했다. 아스트라는 아주 찰나지만 그 온기에 안정을 느꼈다. 그리고 안정을 느낀 자신을 깨닫자마자 뒤이어 찾아온 낯선 감정에 아주 조금 혼란스러웠다.
잠시 마음을 다잡고 혼란을 털어 낸 아스트라는 레녹스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공작 각하도 잠이 오지 않으세요?”
느닷없는 질문에 레녹스가 그 자리에 굳은 채로 서 있었다. 아스트라는 이 성의 주인을 상대로 대담하게 권유했다.
“저랑 조금만 이야기하지 않을래요?”
늘 굳게 닫혀 있던 그 방의 내부는 아담하고 평범했다. 벽은 도서관과 마찬가지로 벽장이 붙어서 낡은 책들이 가득했고, 큰 창문이 있는 자리에는 검은 칠이 된 책상과 의자가 있었다.
레녹스는 하나뿐인 의자를 아스트라가 있는 쪽에 가져다 놓고 자신은 책상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책상 위에는 램프가 놓여 있었는데, 불빛 곁으로 보이는 레녹스의 얼굴은 반쯤 그늘에 녹아 있었다.
의자에 앉은 아스트라는 그의 얼굴을 마주 보며 생각했다. 데본 공작이라는 사람이 저렇게 잘난 인물일 줄 미처 몰랐다. 이제껏 만나 본 남자 중에서 최고로 잘생겼다. 마티유도 잘생긴 편에 속했지만, 레녹스는 주변에 떠도는 공기부터 남달랐다.
살짝 벌어진 셔츠의 앞섶 사이로 엿보이는 쇄골이나 그 아래의 단단한 근육이 너무나 색정적이라서 눈 둘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쳐다보는 그의 노골적인 시선에 온몸에 열이 오르는 것처럼 덥게 느껴졌다.
“할 이야기는?”
“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이야기를 들어 달라는 게 아니라 대화가 하고 싶다는 소리였는데, 아무래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아스트라가 사는 지역을 포함해 왕국의 영토를 다스리는 동부의 주인이다. 무례한 언사로 기분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
횡설수설했지만 은혜를 입은 데에 대한 감사 인사는 이미 전했다. 그렇다면 궁금한 것을 조금 물어봐도 되지 않을까?
‘무슨 의도로 제 신변을 보호해 주고 계신 거죠?’
그 질문이 입 안을 맴돌았지만, 자칫하면 화를 불러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어떻게 보면 모든 의문을 포괄하고 있는 질문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스트라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질문을 던진 게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묻고 싶었던 의문점이 저절로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레녹스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실수한 게 아닐까 하고 두려워질 무렵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
“네 신변 문제를 둘러싸고 각국의 인사들이 모여서 회담을 열 예정이야. 그곳에서 네가 어디로 가게 될지 정해진다.”
“외국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너를 보호하겠다는 주장에 가장 타당한 근거를 내세우는 이가 너를 데려가겠지. 그게 외국 대신이 될지, 아니면 쉐인…… 아니, 이 나라의 국왕이 될지는 아직 아무도 몰라.”
외국으로 건너간다는 이야기는 들어 보지도 못했다.
“왜 그런 중요한 걸 미리 말씀해 주지 않으셨나요?”
“내가 도착했더니 넌 앓아누워 있었어. 그리고 우린 방금 만났다.”
그가 간결하게 대답했다.
아스트라의 얼굴이 점점 흙색으로 물들어 갔다. 고향에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 나라 영토 밖을 벗어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외국으로 가게 될지도 모른다니, 상상도 못 한 전개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저를 데려가서 뭘 하겠다는 건가요?”
“그건 그들 마음이지. 너의 힘을 활용하면 성수로 뭐든 할 수 있을 테니까.”
“아까 저를 보호하는 게 국왕 전하가 될지도 모른다고 말씀하셨죠? 그분은 저를 이용해 얻고자 하시는 게 무엇인가요?”
“나도 잘 모르겠어. 아직 구체적인 계획도 세우지 않은 것 같아. 하지만…….”
레녹스가 눈을 내리깔며 자신의 목덜미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뭔가를 생각할 때 하는 버릇 같았다.
“커다란 신전을 지어서 값비싼 보석에 파묻히게 해 주겠다고 하더군.”
“그분도 저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는 말이네요.”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 상대가 베푸는 호의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바라는 것도 확실했다. 아스트라는 가슴 안쪽이 묵직해졌다.
“상대가 누구든 바라는 것만 들어준다면 너는 호사를 누리며 살 수 있다.”
“뭘 바라는지도 모르는걸요. 꼭두각시처럼 휘둘리며 살고 싶지는 않아요.”
“겨울에는 얼어 죽고 가뭄에는 굶어 죽는 민생이 들끓는 세상이다. 네게 온 기회를 놓치지 마.”
“저도 제가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굶어 죽는다고 해도 사람으로서 도리는 지켜야 하지 않나요?”
“그렇다면 넌 굶은 적이 없다는 소리군.”
레녹스의 차가운 목소리가 진실을 꿰뚫었다. 비난하는 것도 조롱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차분하게 직시했을 뿐이다. 아스트라는 겸허하게 인정했다.
“맞아요. 없으면 적게 먹었어도 굶지는 않았죠.”
“네가 아는 사람의 도리란 생각보다 가벼운 물건이다. 빈곤과 기아가 시작되는 곳에서 부모가 제 자식을 잡아먹는 일은 흔하게 일어나.”
그는 무표정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소름 끼치는 소리를 했다.
“축복받았다면 고민하지 말고 누려.”
“그 축복의 대가를 저는 아직 몰라요.”
“내가 예측하기에 네 축복에 따른 대가는…….”
맹수를 닮은 눈빛이 아스트라를 응시했다. 사냥감을 노리는 포식자의 앞에 선 것처럼 오싹했다.
“전쟁이지.”
아스트라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요?”
“국왕 전하의 우려이기도 해. 그러나 나는 예측에 가깝다고 본다. 성수는 인간의 힘으로 감당하기 힘든 미지의 능력을 가지고 있어. 침략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무기는 없지.”
“마, 말 같지도 않은…….”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말라며 소리치고 싶었으나,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그의 의견이 타당하다는 것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성수를 이용해서 제일 빠르고 손쉽게 이득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침략이다.
“5년 전에 겨우 종결되었던 사국 대란을 떠올리면 더 예상하기 쉽지. 아이호른 제국의 패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삼국이 협정을 맺고 긴 시간을 걸쳐 싸웠다. 제국이 무너지고 대륙의 주도권이 흐지부지해진 실정은 언뜻 보면 평화로울지 몰라.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패권자가 등장할 아주 좋은 기회지.”
“그럴 수가…….”
“눈치를 살피며 살얼음판을 걷는 상황에 네가 나타났다. 누가 이런 기회를 놓치려고 하겠어?”
레녹스는 나직한 목소리로 현 정세를 관측했다. 그의 냉정한 추측은 아스트라를 절망으로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아연해진 그녀는 곧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처럼 보였다.
좁은 방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빈말이라도 아무 일 없을 거라고 대답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스트라가 상상했던 것보다 앞으로 일어날 훗일은 잔혹하기만 했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 질문에 해답을 준 레녹스가 비정하게 느껴졌다. 자신에게 내려진 축복에 감사하며, 편안하게 살라고 말하다니. 전쟁을 목전에 두고도 저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을 한 것이다.
“각하는 잔인한 분이시네요.”
“부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사실이 그래.”
“국왕 전하께서도 저를 이용해 전쟁을 주도할 생각이신가요?”
“그건 나도 몰라. 아직 아무 얘기도 해 주지 않았으니까.”
“차라리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어요.”
“불가능해.”
그는 딱 잘라 말했다. 어쭙잖은 배려도, 빤히 보이는 위선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