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화
p. VVIP
숨이 가라앉았다.
이대로는 멎지 않을까 싶어질 만큼 아주 조금씩, 서서히 느려진 호흡은 깊은 수심 아래까지 내려가 맴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남자가 지금 피우고 있는 담배의 진정 작용이 아니라 나른하리만치 조용한 주변과 한가로운 일상의 결과물이었다. 어느 쪽이든 이젠 제법 익숙해졌고 지루하게 받아들이는 대신 느긋하게 즐길 수 있게 되었는데, 남자는 자신의 그런 적응력이 꽤 마음에 들었다.
문득 시선을 들자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햇빛 하나 비치지 않는 하늘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눈이 내린다고 했었나. 아침부터 잔뜩 흐리기만 하니 아무래도 오늘만큼은 일기 예보가 정확할 모양이다.
사람을 잃을 때도 만날 때도 눈이 내렸다면 눈과 인연이 꽤 깊다고 봐야겠지만 이제는, 글쎄. 다 옛날 일이 되었다. 담배 연기를 길게 내보내어 잿빛 하늘을 부옇게 덧칠한 남자는 짧아진 꽁초를 발치의 재떨이 대용인 깡통에 천천히 눌러 껐다.
한 대 더 피울까, 말까. 고민하는 남자는 인기척 하나가 점점 가까워져 오는 걸 알아차리고 있었다. 물론 그래 봐야 엄연히 영업 중인 가게 앞이니 손님이 오는 건 당연한 일이고 그저 반사적인 감지일 뿐이었다. 습관이란, 참 무서운 거다.
“실례합니다.”
뜻밖에도 손님은 가게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그 앞 벤치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중형 크기의 슈트 케이스와 나란한 부츠. 반듯한 검은 바지에 이어 따뜻해 보이면서도 멋스러운 빨간 코트를 느리게 거슬러 간 남자는 목소리만큼 젊은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서한경 씨?”
여자의 마지막 음절이 반 옥타브 올라갔지만, 확신에 찬 말투는 물음이 아니었다. “그 사람 사흘 전에 죽었는데요.”라는 무책임한 대답부터 떠올렸던 남자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의뢰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역시 한 대 더 피워야겠다.
“절판본이라도 찾고 계신가 보죠?”
태평한 물음을 던진 그는 품 안에서 담배를 꺼냈다. 그가 지포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하얀 연기를 길게 뱉어 내는 동안 그녀는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잠시 후 그가 그녀를 올려다보고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말투는 달라져 있었다. 조금 더 친근하게, 그러나 위험스럽게.
“못 본 사이 취미가 상당히 고상해진 모양이네. 윤희수 씨.”
“그 말 그대로 돌려줄게.”
오랜만에 그에게서 불린 이름.
그가 계속 모른 척하지 않은 이상 희수는 그쯤에서 시침 떼기를 그만두기로 했다. 그리고 그가 담배를 입에 물었을 때, 손을 뻗어 담배를 가로챈 그녀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깊이 빨아들였다. 그의 타액으로 살짝 젖은 필터가 꽤 달았다.
“헌책방 주인이 된 당신이라니. 상상도 못 했어.”
“실망스러워?”
“별로, 반전 있는 남자는 꽤 취향이라서.”
<잡학다방>이란 기묘한 간판을 다시금 확인한 희수는 그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거렸다. 한경이 못 말린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녀에게는 익숙한 웃음이었다.
“반갑기는 한데, 무슨 일이야? 여기까지 찾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말했잖아. 의뢰라고.”
희수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물론 마음씨 좋은 책방 주인아저씨가 아니라 서한경 팀장에게.”
경호 업무는 보안과 테러 등의 갖가지 위험 요소에 대응하여 일반 시민부터 VIP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지켜야 하는 특수직이다. 따라서 소속을 불문하고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가운데, 공공 기관과 사기업을 통틀어 경호 일을 하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 봤음 직한 이름이 바로 외국계 보안 회사 가드GUARD의 경호과 1팀 소속 서한경 팀장이었다.
“그런 사람 이제 없어.”
예상대로 한경은 웃어넘겼지만 새로운 담배를 꺼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잠깐, 그렇다면 더 이해가 안 가는데. 당신이 왜 여기까지 와서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보호 대상자가 좀 특별하거든.”
“뭐, VVIP라도 돼? 그렇더라도…….”
“비슷해. 윤희수니까.”
그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농담이 과하시네. 윤희수 팀장님.”
그리고 그런 서한경과 함께 파트너와 라이벌을 넘나들었던 사람이 당시 2팀 소속 윤희수 팀장이다.
다만 그가 퇴직한 후 승진했기 때문에, 지금은 직함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굳이 가르쳐 주지 않은 희수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놀란 눈빛을 그대로 받아치며 미소 지었다. 그녀는 가스가 다 된 건지 탁탁 소리만 낼 뿐 불발되고 있는 그의 라이터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불, 빌려 줄까?”
“내 걸로 생색내긴.”
장난스럽게 투덜댄 그가 담배를 입에 물었고, 그녀는 몸을 굽혔다. 두 대의 담배 끝이 맞닿으면서 찰나 진의를 캐 보려는 듯 예리해진 눈빛과 여유로운 웃음을 띤 눈빛이 서로 얽혔다.
“농담 아냐.”
희수는 덧붙여 말하며 몸을 바로 했다.
“다시 말해 당분간 당신이랑 같이 있게 해 달라는 얘기인데, 어때, 이제 좀 솔깃해?”
“일단 들어 보고 싶은 만큼은.”
“그럼 잠깐 실례할게.”
희수는 가방을 한쪽으로 세워 두고 그의 옆에 앉았다. 크지 않은 벤치라 그와 몸이 맞닿을 만큼 단숨에 간격이 가까워졌다.
“들어가서 얘기하지 그래. 커피 한 잔 정도는 타 줄 수 있는데.”
“이제 막 불 붙였잖아. 당신 담배 피우는 모습, 좋아했으니까.”
“과거형이네. 너무 솔직한 거 아냐?”
“그게 내 매력 중의 하나지.”
자신만만한 대답에 한경이 픽 웃었고 희수는 본론을 꺼냈다.
“간단하고 단순한 얘기야. 열심히 일하다 보니 이래저래 원한을 사서, 협박을 좀 받았거든. 무시하고 있었는데 회사에도 민폐가 되기 시작하는 바람에 잠잠해질 때까지 휴가를 겸해서 좀 쉴까 하고.”
“그럼 왜 하필 여긴데?”
“만에 하나 일이 커질 때를 대비한 보험이랄까.”
희수는 더 가볍게 들리도록 어깨를 으쓱거렸다.
“물론 회사에도 사람은 많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적도 많아서. 실력은 둘째 치고 일단 나에 대해 뭘 알게 되건 웃어넘겨 줄 것 같은 보험이 서한경 씨 말고는 생각이 안 나더라고.”
“그동안 하나도 안 변했나 보네.”
“나야 뭐, 그대로지.”
“회사 사람들 말이야.”
웃지도 않고 대답해 희수의 말문을 막은 한경이 이쪽을 똑바로 보았다. 희수는 짧아진 담배를 땅바닥에 눌러 끄고 그의 발치에 있는 깡통 안에 던져 넣으며, 그가 자신을 계속 관찰하도록 모른 척 내버려 두었다. 그녀를 찬찬히 살피던 그가 떠보듯이 입을 열었다.
“천하의 윤희수가 몸을 사리는 것도 모자라서, 만에 하나라지만 경호를 필요로 할 정도의 일이라니. 믿기 힘든데.”
“쉽게 믿으면 자존심 상할 일이긴 하지.”
희수는 산뜻하게 인정했다.
“당신이 망설이는 것 같으니까 이제 보수 얘기를 좀 해 볼까?”
“보수?”
마치 단어의 뜻을 묻는 것처럼 되풀이하는 그에게 그녀가 친절하게 대꾸했다.
“명색이 의뢰인데 맨입으로 할 리가 있나.”
“아무리 봐도 사적인 일인데.”
“맞아. 회사랑 상관없이 내가 당신을 고용하는 셈이지. 그래서 돈으로는 준비 못 했어.”
“……그럼?”
돈을 줄 수 없다고 밝혔지만 한경의 눈빛은 한층 더 흥미진진하게 바뀌었다. 그리고 그것을 눈치챈 희수는 더 즐거워졌다. 그래야 내가 아는 서한경이지.
몸값이 하루가 다르게 치솟던 현역 때도 돈으로는 움직이지 않는 남자였으니 관심 없어 하는 일을 하게 하려면 웬만한 미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회심의 카드를 내밀었다.
“회사에 당신 파일 아직 남아 있는 거 몰랐지? 그거 없애 줄게.”
“쿨럭!”
한경이 거센 기침을 토했다. 쯧쯧. 희수는 연기가 잘못 들어갔는지 몇 번 더 콜록거리는 그의 등을 너그럽게 두드려 주었다. 하긴 희수 자신도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놀라고 웃겼으니 본인이야 오죽할까. 잠시 후 진정하고 돌아본 그의 눈가에는 눈물마저 맺혀 있었다.
“정말이야?”
“내 매력이 뭔지 다시 말해 줘?”
“와, 나, 진짜.”
씨발. 입 모양으로나마 육두문자까지 뱉은 그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당신은 어떻게, 아니, 됐고. 그럼 그걸 어떻게 없앨 건데?”
“비서실장님하고 얘기 끝냈어.”
“어떻게?”
“실장님이 나한테 살짝 빚진 게 있었거든. 그걸로 퉁친 거야.”
“하!”
그가 헛웃음을 쳤다.
“윤희수 씨 대단한 건 알았지만 하다 하다 그 사람한테까지 빚을 지울 정도일 줄은 몰랐네.”
“왜, 새삼 반했어?”
실없는 농담을 던진 희수는 그의 웃음이 짙어지는 것을 보고 내심 움찔했다. 백 마디 말보다 그린 듯 깊은 미소 하나가 훨씬 더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역시 잘못 찾아왔어, 당신.”
한경은 그 웃는 얼굴 그대로 말을 돌렸다.
“그만한 패를 써야 될 상황이라면 퇴직한 나로는 안 돼. 그동안 정말 게으르게 살았거든. 지금의 내가 얼마나 무뎌졌는지는 잘 아니까, 난 할 수 없어.”
“하지만 한 번쯤은 날 가드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잖아.”
p. VVIP
숨이 가라앉았다.
이대로는 멎지 않을까 싶어질 만큼 아주 조금씩, 서서히 느려진 호흡은 깊은 수심 아래까지 내려가 맴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남자가 지금 피우고 있는 담배의 진정 작용이 아니라 나른하리만치 조용한 주변과 한가로운 일상의 결과물이었다. 어느 쪽이든 이젠 제법 익숙해졌고 지루하게 받아들이는 대신 느긋하게 즐길 수 있게 되었는데, 남자는 자신의 그런 적응력이 꽤 마음에 들었다.
문득 시선을 들자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햇빛 하나 비치지 않는 하늘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눈이 내린다고 했었나. 아침부터 잔뜩 흐리기만 하니 아무래도 오늘만큼은 일기 예보가 정확할 모양이다.
사람을 잃을 때도 만날 때도 눈이 내렸다면 눈과 인연이 꽤 깊다고 봐야겠지만 이제는, 글쎄. 다 옛날 일이 되었다. 담배 연기를 길게 내보내어 잿빛 하늘을 부옇게 덧칠한 남자는 짧아진 꽁초를 발치의 재떨이 대용인 깡통에 천천히 눌러 껐다.
한 대 더 피울까, 말까. 고민하는 남자는 인기척 하나가 점점 가까워져 오는 걸 알아차리고 있었다. 물론 그래 봐야 엄연히 영업 중인 가게 앞이니 손님이 오는 건 당연한 일이고 그저 반사적인 감지일 뿐이었다. 습관이란, 참 무서운 거다.
“실례합니다.”
뜻밖에도 손님은 가게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그 앞 벤치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중형 크기의 슈트 케이스와 나란한 부츠. 반듯한 검은 바지에 이어 따뜻해 보이면서도 멋스러운 빨간 코트를 느리게 거슬러 간 남자는 목소리만큼 젊은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서한경 씨?”
여자의 마지막 음절이 반 옥타브 올라갔지만, 확신에 찬 말투는 물음이 아니었다. “그 사람 사흘 전에 죽었는데요.”라는 무책임한 대답부터 떠올렸던 남자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의뢰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역시 한 대 더 피워야겠다.
“절판본이라도 찾고 계신가 보죠?”
태평한 물음을 던진 그는 품 안에서 담배를 꺼냈다. 그가 지포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하얀 연기를 길게 뱉어 내는 동안 그녀는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잠시 후 그가 그녀를 올려다보고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말투는 달라져 있었다. 조금 더 친근하게, 그러나 위험스럽게.
“못 본 사이 취미가 상당히 고상해진 모양이네. 윤희수 씨.”
“그 말 그대로 돌려줄게.”
오랜만에 그에게서 불린 이름.
그가 계속 모른 척하지 않은 이상 희수는 그쯤에서 시침 떼기를 그만두기로 했다. 그리고 그가 담배를 입에 물었을 때, 손을 뻗어 담배를 가로챈 그녀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깊이 빨아들였다. 그의 타액으로 살짝 젖은 필터가 꽤 달았다.
“헌책방 주인이 된 당신이라니. 상상도 못 했어.”
“실망스러워?”
“별로, 반전 있는 남자는 꽤 취향이라서.”
<잡학다방>이란 기묘한 간판을 다시금 확인한 희수는 그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거렸다. 한경이 못 말린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녀에게는 익숙한 웃음이었다.
“반갑기는 한데, 무슨 일이야? 여기까지 찾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말했잖아. 의뢰라고.”
희수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물론 마음씨 좋은 책방 주인아저씨가 아니라 서한경 팀장에게.”
경호 업무는 보안과 테러 등의 갖가지 위험 요소에 대응하여 일반 시민부터 VIP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지켜야 하는 특수직이다. 따라서 소속을 불문하고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가운데, 공공 기관과 사기업을 통틀어 경호 일을 하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 봤음 직한 이름이 바로 외국계 보안 회사 가드GUARD의 경호과 1팀 소속 서한경 팀장이었다.
“그런 사람 이제 없어.”
예상대로 한경은 웃어넘겼지만 새로운 담배를 꺼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잠깐, 그렇다면 더 이해가 안 가는데. 당신이 왜 여기까지 와서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보호 대상자가 좀 특별하거든.”
“뭐, VVIP라도 돼? 그렇더라도…….”
“비슷해. 윤희수니까.”
그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농담이 과하시네. 윤희수 팀장님.”
그리고 그런 서한경과 함께 파트너와 라이벌을 넘나들었던 사람이 당시 2팀 소속 윤희수 팀장이다.
다만 그가 퇴직한 후 승진했기 때문에, 지금은 직함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굳이 가르쳐 주지 않은 희수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놀란 눈빛을 그대로 받아치며 미소 지었다. 그녀는 가스가 다 된 건지 탁탁 소리만 낼 뿐 불발되고 있는 그의 라이터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불, 빌려 줄까?”
“내 걸로 생색내긴.”
장난스럽게 투덜댄 그가 담배를 입에 물었고, 그녀는 몸을 굽혔다. 두 대의 담배 끝이 맞닿으면서 찰나 진의를 캐 보려는 듯 예리해진 눈빛과 여유로운 웃음을 띤 눈빛이 서로 얽혔다.
“농담 아냐.”
희수는 덧붙여 말하며 몸을 바로 했다.
“다시 말해 당분간 당신이랑 같이 있게 해 달라는 얘기인데, 어때, 이제 좀 솔깃해?”
“일단 들어 보고 싶은 만큼은.”
“그럼 잠깐 실례할게.”
희수는 가방을 한쪽으로 세워 두고 그의 옆에 앉았다. 크지 않은 벤치라 그와 몸이 맞닿을 만큼 단숨에 간격이 가까워졌다.
“들어가서 얘기하지 그래. 커피 한 잔 정도는 타 줄 수 있는데.”
“이제 막 불 붙였잖아. 당신 담배 피우는 모습, 좋아했으니까.”
“과거형이네. 너무 솔직한 거 아냐?”
“그게 내 매력 중의 하나지.”
자신만만한 대답에 한경이 픽 웃었고 희수는 본론을 꺼냈다.
“간단하고 단순한 얘기야. 열심히 일하다 보니 이래저래 원한을 사서, 협박을 좀 받았거든. 무시하고 있었는데 회사에도 민폐가 되기 시작하는 바람에 잠잠해질 때까지 휴가를 겸해서 좀 쉴까 하고.”
“그럼 왜 하필 여긴데?”
“만에 하나 일이 커질 때를 대비한 보험이랄까.”
희수는 더 가볍게 들리도록 어깨를 으쓱거렸다.
“물론 회사에도 사람은 많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적도 많아서. 실력은 둘째 치고 일단 나에 대해 뭘 알게 되건 웃어넘겨 줄 것 같은 보험이 서한경 씨 말고는 생각이 안 나더라고.”
“그동안 하나도 안 변했나 보네.”
“나야 뭐, 그대로지.”
“회사 사람들 말이야.”
웃지도 않고 대답해 희수의 말문을 막은 한경이 이쪽을 똑바로 보았다. 희수는 짧아진 담배를 땅바닥에 눌러 끄고 그의 발치에 있는 깡통 안에 던져 넣으며, 그가 자신을 계속 관찰하도록 모른 척 내버려 두었다. 그녀를 찬찬히 살피던 그가 떠보듯이 입을 열었다.
“천하의 윤희수가 몸을 사리는 것도 모자라서, 만에 하나라지만 경호를 필요로 할 정도의 일이라니. 믿기 힘든데.”
“쉽게 믿으면 자존심 상할 일이긴 하지.”
희수는 산뜻하게 인정했다.
“당신이 망설이는 것 같으니까 이제 보수 얘기를 좀 해 볼까?”
“보수?”
마치 단어의 뜻을 묻는 것처럼 되풀이하는 그에게 그녀가 친절하게 대꾸했다.
“명색이 의뢰인데 맨입으로 할 리가 있나.”
“아무리 봐도 사적인 일인데.”
“맞아. 회사랑 상관없이 내가 당신을 고용하는 셈이지. 그래서 돈으로는 준비 못 했어.”
“……그럼?”
돈을 줄 수 없다고 밝혔지만 한경의 눈빛은 한층 더 흥미진진하게 바뀌었다. 그리고 그것을 눈치챈 희수는 더 즐거워졌다. 그래야 내가 아는 서한경이지.
몸값이 하루가 다르게 치솟던 현역 때도 돈으로는 움직이지 않는 남자였으니 관심 없어 하는 일을 하게 하려면 웬만한 미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회심의 카드를 내밀었다.
“회사에 당신 파일 아직 남아 있는 거 몰랐지? 그거 없애 줄게.”
“쿨럭!”
한경이 거센 기침을 토했다. 쯧쯧. 희수는 연기가 잘못 들어갔는지 몇 번 더 콜록거리는 그의 등을 너그럽게 두드려 주었다. 하긴 희수 자신도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놀라고 웃겼으니 본인이야 오죽할까. 잠시 후 진정하고 돌아본 그의 눈가에는 눈물마저 맺혀 있었다.
“정말이야?”
“내 매력이 뭔지 다시 말해 줘?”
“와, 나, 진짜.”
씨발. 입 모양으로나마 육두문자까지 뱉은 그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당신은 어떻게, 아니, 됐고. 그럼 그걸 어떻게 없앨 건데?”
“비서실장님하고 얘기 끝냈어.”
“어떻게?”
“실장님이 나한테 살짝 빚진 게 있었거든. 그걸로 퉁친 거야.”
“하!”
그가 헛웃음을 쳤다.
“윤희수 씨 대단한 건 알았지만 하다 하다 그 사람한테까지 빚을 지울 정도일 줄은 몰랐네.”
“왜, 새삼 반했어?”
실없는 농담을 던진 희수는 그의 웃음이 짙어지는 것을 보고 내심 움찔했다. 백 마디 말보다 그린 듯 깊은 미소 하나가 훨씬 더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역시 잘못 찾아왔어, 당신.”
한경은 그 웃는 얼굴 그대로 말을 돌렸다.
“그만한 패를 써야 될 상황이라면 퇴직한 나로는 안 돼. 그동안 정말 게으르게 살았거든. 지금의 내가 얼마나 무뎌졌는지는 잘 아니까, 난 할 수 없어.”
“하지만 한 번쯤은 날 가드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