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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그동안 고마웠어요.”
준희의 말에 강혁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였지만 별다른 말은 없었다. 애써 표정 관리를 하는 준희를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강혁 씨가 귀찮아하는 줄도 모르고 나 혼자 행복했어요. 그리고 이거.”
가지고 온 쇼핑 봉투를 테이블 위로 건네었다. 그저 어울릴 것 같아 샀던 건데 졸지에 이별 선물이 되어 버린 머플러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준희는 애써 가벼운 어투로 말을 건넸다.
“비싼 건 아니에요. 크리스마스 선물 미리 받는 거라고 생각해요. 난 그동안 강혁 씨한테서 많이 받았으니까.”
“…….”
“먼저 일어날게요.”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상이라도 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강혁을 내려다보며 준희는 애써 웃어 보였다.
“건강하게 잘 지내요. 안녕.”
카페를 나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참을 걸었다. 혹시 강혁이 뒤따라오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걸음이 자꾸만 느려졌다. 얼마쯤 지나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몇 번을 망설이던 끝에 휙 돌아보았다. 그곳에 기다리던 강혁은 결국 없었다.
“그렇게 귀찮았으면 웃어 주지도 말지. 그렇게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지도 말지….”
태어나길 너무 차이가 나게 태어나 평생 함께할 수 있을 거란 욕심을 가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이렇게 짧을 줄은 미처 몰랐었다. 이렇게 예쁘게 눈이 내리는 날 차이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는데 이 추운 겨울을 나는 어떻게 버텨야 할까.
바람에 손이 시려 주머니를 뒤적이던 준희는 강혁이 사 주었던 장갑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애써 참고 있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꼬박 1년을 사랑해 오던 남자와 헤어졌다는 사실에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단지 인연 하나를 정리했을 뿐인데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뜨거웠던 첫사랑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3년이 훌쩍 넘는 시간이 흘렀다.
#01. 선택적 재회
눈을 떴으나 주변은 흐릿했다. 뭔가로 가린 듯, 정확히는 한밤중에 서 있는 듯 눈앞은 어두컴컴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잠시 숨을 멈추고 있던 강혁은 천천히 손을 들어 눈앞에 가져다 대 보았다. 뭉툭한 형체만 있을 뿐 손가락의 개수조차 잘 보이지 않는다. 검은 바탕에 흰 물감을 뿌려 놓은 듯 얼룩이 떠도는 시야. 어제와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아무래도 시신경이 손상된 것 같습니다.”
옆에서 들려오는 말에 고개를 틀자 흐릿한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둘인가 셋인가. 아니, 여럿인가.
강혁은 숫자를 헤아려 보려 했지만 머리가 또다시 아파 왔다. 불가능한 노력을 접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지금이 차라리 편했다.
“수술이라도 해야 합니까?”
남의 이야기를 하듯 삭막한 어조.
“수술을 논할 케이스가 아닙니다. 지금으로서는 저절로 회복되기만을 바라는 것이 최선입니다.”
강 박사는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안과 의사였다. 그런 그가 못 고치는 경우도 있었던가. 강혁의 입술이 비뚜름해졌다.
“이러다 영영 못 보는 거 아닙니까. 저 불구가 되는 겁니까?”
“아, 아닙니다. 주 본부장님 같은 경우엔 사고가 나면서 일시적인 손상이 온 케이스라 시간이 지나면 회복될 가능성이 큽니다. 당분간 휴식을 취하시면서 눈을 쉬게 하는 방법이 가장 좋습니다.”
당황해하는 강 박사 뒤쪽 어딘가에 임 실장이 서 있었던 모양이다. 한 번도 평정심을 잃은 적이 없던 임 실장이었는데 적잖이 놀란 목소리로 불쑥 끼어들었다.
“그럼 당분간 업무에 복귀를 못 하신다는 겁니까?”
“안타깝지만 업무는 힘들 것 같습니다. 사고로 다친 곳도 아직 회복이 덜 되었고 눈도 그렇고…. 지금으로서는 요양을 권해 드립니다. 계속 눈에 신경을 쏟다 보면 두통이나 다른 증상들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워낙 예민한 부위니까요.”
“본부장님은 귀국하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습니다. 지금 손을 놓으면….”
난처한 임 실장의 음성을 들으며 강혁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로로 뛰어든 길고양이를 피하느라 낸 사고는 전적으로 제 실수였다. 누구에게 원망을 할 수도, 자신으로 인해 누군가가 피해를 보게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저 운이 안 좋았던 거다. 기껏 발버둥을 쳐 강을 건넜더니 나타난 건 끝도 없는 망망대해. 지금 딱 제 꼴이 그러했다.
임 실장의 말을 중단하기 위해 힘없이 늘어뜨리고 있던 손을 들자 일순 정적이 흘렀다.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강혁의 물음에 의사가 헛기침을 하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단 며칠 만에 회복되는 사람도 있고 길면 몇 달씩 걸리는 사람도 있으니까. 아무리 의사라도 단정 지어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이러다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까?”
“최선을 다해 치료를 한다면….”
“저는 긍정적인 답변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의사의 양심을 걸고 말할 수 있는 진실을 알고 싶은 겁니다.”
“…죄송하지만 그렇습니다. 눈이 워낙 예민한 곳이어서 사고는 물론 심리적인 요인에 의해서도 시력을 잃을 수 있습니다. 최대한 노력은 해 보겠으나 장담은 어렵습니다. 주 본부장님의 의지가 최선이라는 말만 해 드릴 수밖에요.”
강 박사의 말이 끝나고 나자 병실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다들 눈치만 보느라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다.
강혁은 눈을 감고 손가락을 움직여 본다. 타박상을 입었던 어깨는 시간이 지나 거의 다 아물었고 저릿하던 손가락도 제 기능을 회복했지만 아직도 두통은 가시지 않고 있다. 교통사고가 나면서 머리를 다쳤다. 단순한 뇌진탕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시신경이 손상되었다니….
“임 실장님.”
강혁은 차분한 어조로 임 실장을 불렀다.
“네, 본부장님.”
“회사엔 잠시 미국에 간 거로 처리해 주세요.”
“하지만….”
“이 꼴을 하고 임원들 앞에 설 수는 없잖습니까. 그쪽에서 맡았던 프로젝트에 약간의 문제가 생겨서 다시 마무리하러 돌아갔다고 하세요. 임 실장님이 임기응변에 능하시리라고 믿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사람들을 병실에서 전부 내보내고 천천히 침대를 내려왔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중심 잡는 일조차 어려워 난간을 잡고 한참을 서 있었다.
방향이 어디인지 몰라 망설이다 몸을 틀어 아직은 조금 불편한 다리를 움직였다. 한 걸음 한 걸음. 앞이 보이지 않으니 아이가 첫 걸음을 떼는 것처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툭. 몸이 어딘가에 부딪히고 나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손을 내밀어 더듬어 보니 유리창이 만져졌다. 유리창을 짚은 강혁의 손가락에 힘이 실린다. 주먹으로 내리치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겨우 억누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보이지 않는 눈앞처럼 제 앞길이 캄캄했다.
고작해야 내년이나 그 후년이면 대대적인 인사이동이 있을 예정이었다. 점점 건강이 악화되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누군가가 대표로 선출이 되어야 했다. 하필이면 이런 중대한 타이밍에 불운이 닥쳤다.
전쟁터처럼 치열한 회사에서 몇 달 동안 잠적하듯 자리를 비운다는 건 지금껏 해 온 것들을 전부 잃을 수도 있다는 의미. 무작정 앞만 보고 살아왔던 제가 뭘 그렇게 큰 잘못을 했다고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황 이사가 알면 좋아하겠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창을 통해 얼굴로 쏟아지는 햇살이 보이지 않아도 느껴졌다. 여인네의 것처럼 부드럽고 따듯한 느낌.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병원은 늘 한결같았다. 넘쳐나는 환자들과 의료진이 뒤엉켜 분주하다. 로비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접수창구가 있었는데 오늘도 여전히 대기 중인 사람들로 붐볐다. 번호를 알리는 벨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교수님께 드릴 선물 꾸러미를 안은 채 들어서는 준희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몇 달 만의 방문이었다.
“어? 서 간호사님! 돌아오신 거예요?”
안내 데스크에 근무 중이던 여자가 준희를 알아보고는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죠?”
“저희야 뭐 늘 똑같죠. 언제 돌아오셨어요?”
“며칠 됐어요.”
“복직하시는 거예요?”
“그럴 생각이긴 한데 봐야죠, 뭐. 저 최 교수님이랑 약속이 있어서 올라갈게요. 나중에 봐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에서 내려 최일환 교수의 방으로 간 준희는 똑똑 노크를 했다. 문 너머에서 들어오라는 최 교수의 목소리가 들리자 문을 열고 들어가며 싱긋 웃었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준희의 말에 강혁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였지만 별다른 말은 없었다. 애써 표정 관리를 하는 준희를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강혁 씨가 귀찮아하는 줄도 모르고 나 혼자 행복했어요. 그리고 이거.”
가지고 온 쇼핑 봉투를 테이블 위로 건네었다. 그저 어울릴 것 같아 샀던 건데 졸지에 이별 선물이 되어 버린 머플러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준희는 애써 가벼운 어투로 말을 건넸다.
“비싼 건 아니에요. 크리스마스 선물 미리 받는 거라고 생각해요. 난 그동안 강혁 씨한테서 많이 받았으니까.”
“…….”
“먼저 일어날게요.”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상이라도 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강혁을 내려다보며 준희는 애써 웃어 보였다.
“건강하게 잘 지내요. 안녕.”
카페를 나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참을 걸었다. 혹시 강혁이 뒤따라오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걸음이 자꾸만 느려졌다. 얼마쯤 지나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몇 번을 망설이던 끝에 휙 돌아보았다. 그곳에 기다리던 강혁은 결국 없었다.
“그렇게 귀찮았으면 웃어 주지도 말지. 그렇게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지도 말지….”
태어나길 너무 차이가 나게 태어나 평생 함께할 수 있을 거란 욕심을 가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이렇게 짧을 줄은 미처 몰랐었다. 이렇게 예쁘게 눈이 내리는 날 차이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는데 이 추운 겨울을 나는 어떻게 버텨야 할까.
바람에 손이 시려 주머니를 뒤적이던 준희는 강혁이 사 주었던 장갑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애써 참고 있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꼬박 1년을 사랑해 오던 남자와 헤어졌다는 사실에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단지 인연 하나를 정리했을 뿐인데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뜨거웠던 첫사랑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3년이 훌쩍 넘는 시간이 흘렀다.
#01. 선택적 재회
눈을 떴으나 주변은 흐릿했다. 뭔가로 가린 듯, 정확히는 한밤중에 서 있는 듯 눈앞은 어두컴컴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잠시 숨을 멈추고 있던 강혁은 천천히 손을 들어 눈앞에 가져다 대 보았다. 뭉툭한 형체만 있을 뿐 손가락의 개수조차 잘 보이지 않는다. 검은 바탕에 흰 물감을 뿌려 놓은 듯 얼룩이 떠도는 시야. 어제와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아무래도 시신경이 손상된 것 같습니다.”
옆에서 들려오는 말에 고개를 틀자 흐릿한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둘인가 셋인가. 아니, 여럿인가.
강혁은 숫자를 헤아려 보려 했지만 머리가 또다시 아파 왔다. 불가능한 노력을 접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지금이 차라리 편했다.
“수술이라도 해야 합니까?”
남의 이야기를 하듯 삭막한 어조.
“수술을 논할 케이스가 아닙니다. 지금으로서는 저절로 회복되기만을 바라는 것이 최선입니다.”
강 박사는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안과 의사였다. 그런 그가 못 고치는 경우도 있었던가. 강혁의 입술이 비뚜름해졌다.
“이러다 영영 못 보는 거 아닙니까. 저 불구가 되는 겁니까?”
“아, 아닙니다. 주 본부장님 같은 경우엔 사고가 나면서 일시적인 손상이 온 케이스라 시간이 지나면 회복될 가능성이 큽니다. 당분간 휴식을 취하시면서 눈을 쉬게 하는 방법이 가장 좋습니다.”
당황해하는 강 박사 뒤쪽 어딘가에 임 실장이 서 있었던 모양이다. 한 번도 평정심을 잃은 적이 없던 임 실장이었는데 적잖이 놀란 목소리로 불쑥 끼어들었다.
“그럼 당분간 업무에 복귀를 못 하신다는 겁니까?”
“안타깝지만 업무는 힘들 것 같습니다. 사고로 다친 곳도 아직 회복이 덜 되었고 눈도 그렇고…. 지금으로서는 요양을 권해 드립니다. 계속 눈에 신경을 쏟다 보면 두통이나 다른 증상들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워낙 예민한 부위니까요.”
“본부장님은 귀국하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습니다. 지금 손을 놓으면….”
난처한 임 실장의 음성을 들으며 강혁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로로 뛰어든 길고양이를 피하느라 낸 사고는 전적으로 제 실수였다. 누구에게 원망을 할 수도, 자신으로 인해 누군가가 피해를 보게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저 운이 안 좋았던 거다. 기껏 발버둥을 쳐 강을 건넜더니 나타난 건 끝도 없는 망망대해. 지금 딱 제 꼴이 그러했다.
임 실장의 말을 중단하기 위해 힘없이 늘어뜨리고 있던 손을 들자 일순 정적이 흘렀다.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강혁의 물음에 의사가 헛기침을 하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단 며칠 만에 회복되는 사람도 있고 길면 몇 달씩 걸리는 사람도 있으니까. 아무리 의사라도 단정 지어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이러다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까?”
“최선을 다해 치료를 한다면….”
“저는 긍정적인 답변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의사의 양심을 걸고 말할 수 있는 진실을 알고 싶은 겁니다.”
“…죄송하지만 그렇습니다. 눈이 워낙 예민한 곳이어서 사고는 물론 심리적인 요인에 의해서도 시력을 잃을 수 있습니다. 최대한 노력은 해 보겠으나 장담은 어렵습니다. 주 본부장님의 의지가 최선이라는 말만 해 드릴 수밖에요.”
강 박사의 말이 끝나고 나자 병실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다들 눈치만 보느라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다.
강혁은 눈을 감고 손가락을 움직여 본다. 타박상을 입었던 어깨는 시간이 지나 거의 다 아물었고 저릿하던 손가락도 제 기능을 회복했지만 아직도 두통은 가시지 않고 있다. 교통사고가 나면서 머리를 다쳤다. 단순한 뇌진탕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시신경이 손상되었다니….
“임 실장님.”
강혁은 차분한 어조로 임 실장을 불렀다.
“네, 본부장님.”
“회사엔 잠시 미국에 간 거로 처리해 주세요.”
“하지만….”
“이 꼴을 하고 임원들 앞에 설 수는 없잖습니까. 그쪽에서 맡았던 프로젝트에 약간의 문제가 생겨서 다시 마무리하러 돌아갔다고 하세요. 임 실장님이 임기응변에 능하시리라고 믿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사람들을 병실에서 전부 내보내고 천천히 침대를 내려왔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중심 잡는 일조차 어려워 난간을 잡고 한참을 서 있었다.
방향이 어디인지 몰라 망설이다 몸을 틀어 아직은 조금 불편한 다리를 움직였다. 한 걸음 한 걸음. 앞이 보이지 않으니 아이가 첫 걸음을 떼는 것처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툭. 몸이 어딘가에 부딪히고 나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손을 내밀어 더듬어 보니 유리창이 만져졌다. 유리창을 짚은 강혁의 손가락에 힘이 실린다. 주먹으로 내리치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겨우 억누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보이지 않는 눈앞처럼 제 앞길이 캄캄했다.
고작해야 내년이나 그 후년이면 대대적인 인사이동이 있을 예정이었다. 점점 건강이 악화되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누군가가 대표로 선출이 되어야 했다. 하필이면 이런 중대한 타이밍에 불운이 닥쳤다.
전쟁터처럼 치열한 회사에서 몇 달 동안 잠적하듯 자리를 비운다는 건 지금껏 해 온 것들을 전부 잃을 수도 있다는 의미. 무작정 앞만 보고 살아왔던 제가 뭘 그렇게 큰 잘못을 했다고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황 이사가 알면 좋아하겠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창을 통해 얼굴로 쏟아지는 햇살이 보이지 않아도 느껴졌다. 여인네의 것처럼 부드럽고 따듯한 느낌.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병원은 늘 한결같았다. 넘쳐나는 환자들과 의료진이 뒤엉켜 분주하다. 로비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접수창구가 있었는데 오늘도 여전히 대기 중인 사람들로 붐볐다. 번호를 알리는 벨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교수님께 드릴 선물 꾸러미를 안은 채 들어서는 준희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몇 달 만의 방문이었다.
“어? 서 간호사님! 돌아오신 거예요?”
안내 데스크에 근무 중이던 여자가 준희를 알아보고는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죠?”
“저희야 뭐 늘 똑같죠. 언제 돌아오셨어요?”
“며칠 됐어요.”
“복직하시는 거예요?”
“그럴 생각이긴 한데 봐야죠, 뭐. 저 최 교수님이랑 약속이 있어서 올라갈게요. 나중에 봐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에서 내려 최일환 교수의 방으로 간 준희는 똑똑 노크를 했다. 문 너머에서 들어오라는 최 교수의 목소리가 들리자 문을 열고 들어가며 싱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