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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 아닌 사이
4화
* * *
“하, 하, 하, 하.”
탁탁탁, 러닝 머신을 밟는 소리와 윤진의 거친 호흡이 규칙적으로 헬스장에 울려 퍼졌다.
얼마나 뛰었을까? 헬스장에 도착했을 때만도 까맣던 하늘이 어느새 하늘색과 붉은색으로 한껏 환해졌다.
하지만 러닝 머신 계기판만 노려보는 그녀의 눈에 창밖의 풍경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어제 일은 생각할수록 분했다. 괜히 그 일을 한다고 해서는 왜 자신이 그런 꼴을 당해야 하는지.
“하아…… 하아…….”
턱 밑까지 차오르는 숨에도 조금 더 속도를 올렸다. 휘젓는 팔의 속도도, 힘도 더욱 세차졌다.
반듯한 이마로 땀이 주르륵 흘렀다.
삐삐삐―
속이 후련해질락 말락 하던 그 순간, 러닝 머신 계기판의 빨간 글씨가 처음에 설정한 10킬로를 완주했음을 알렸다.
윤진은 러닝 머신에서 내려서며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그러곤 측면에 있는 거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조금만 먹어도 살이 금방 찌는 체질에 오리 엉덩이는 조금만 방심해도 스타일을 망치기 일쑤였다.
자나 깨나 지겹게 한 다이어트와 스쿼트 덕에 잘록한 허리와 엉덩이로 흐르는 라인은 스스로 보기에도 꽤 만족스럽다. 타고난 가슴 역시 덤벨과 웨이트로 다듬어져 옷발을 살리는 일등 공신이 되었다.
이렇게 완벽한 내가 곽남주가 뭐라고 생각할지 신경 써야겠어? 그게 더 웃기지. 흥.
윤진은 콧방귀를 뀌었다.
샤워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으려 할 때, 연주에게서 전화가 왔다.
― 어제저녁에 남주 오빠네 간다고 주소 받아 가더니, 왜 말이 없어?
“문전 박대 당했어.”
어젯밤 일이 생각나자 가슴 깊은 곳에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 문전 박대? 막 싹수없게 굴어?
“아니. 진심으로 문전 박대. 현관문 앞에서 팽 당했어.”
― 뭐?
연주도 놀랐는지 목소리가 한 톤 높다.
그래.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내 친구 연주야. 너희 오빠 좀 어떻게 해 줘.’라고 이르는 일곱 살짜리 꼬마 같은 모습에 스스로가 부끄럽긴 했지만, 어젯밤 곽남똥의 만행은 반드시 만천하에 알려야 할 필요가 있다.
― 너 딱 기다려. 내가 엄마한테 다 일러 줄 테니까.
전화가 끊겼다.
그의 만행을 연주가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말하긴 했는데, 막상 연주가 바로 어머님께 이른다는 소리를 하자, 자신이 너무 유치했나 싶다.
그 말이 연주 어머님에게도 들어가길 바란 건 아니었는데…….
아아아, 몰라 몰라. 어머님께 왕창 혼나면 더 고소한 거지 뭐.
윤진은 땀에 젖어 목덜미에 달라붙는 머리카락을 흔들어 떼어 내며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 * *
“저 왔습니다.”
고개 숙여 인사하며 현관에 들어서는 남주를 모친인 미숙이 노려보았다.
그녀의 따끔한 시선 뒤로한 채 그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빈 식탁을 확인한 후, 의아한 눈빛으로 미숙을 바라보았다.
원래 혼자 살아도 아침은 꼭 챙겨 먹는 그였다. 그런데 아침부터 잠들어 있는 저를 깨워 바로 오라고 독촉을 했으니 당연히 밥은 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네가 지금 밥 먹을 짓을 했니?”
미숙의 목소리가 평상시와는 달리 날이 서 있다.
“얼굴 보고 싶다고 하셔서 아침밥도 건너뛰고 달려왔더니, 무섭게 왜 이러십니까?”
말로는 무섭다고 하면서도 얼굴은 태연하기 그지없다. 그는 냉장고에서 사과 하나를 꺼내어 쓱쓱 바지에 닦았다. 아그작, 사과를 한입 크게 베어 문 다음에야 소파에 앉았다.
“그게 입으로 넘어가니?”
도대체 저놈의 성미는. 제 배 아파 낳은 아들이지만 혼낼 때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식인 둘째 아들의 모습은 영 적응이 안 된다.
큰아들처럼 자상하기를 하나, 막내아들 놈처럼 살갑기를 하나. 마이 웨이 스타일로 주변엔 신경도 안 쓰는 둘째 아들놈을 도대체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아직도 풀지 못한 숙제 같았다.
“지나가던 거지가 밥때에 들어와도 챙겨 주시던 분이 왜 먹는 것 가지고 타박을 하십니까.”
“여자를 때리다니, 넌 거지만도 못한 놈이다.”
그제야 김 여사가 왜 화가 났는지 알아챈 그의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때리긴 누가 때렸다고 그러십니까. 그냥 문 닫느라 민 건데 제풀에 쓰러진 거죠.”
“그러니까. 어쩜 그렇게 문전 박대를 할 수가 있니?”
“그러면 연락도 없이 밤에 찾아온 여자를 집에 들입니까?”
“걔가 아무나니? 윤진이야 윤진이. 네가 윤진이를 몰라, 윤진이가 너를 몰라?”
“어머니. 원래 성폭행 사고의 70프로는 친족과 지인으로부터 발생합니다. 윤진이를 진짜 딸같이 여기신다면 그런 행동에 대해 따끔히 혼내셔야죠.”
미숙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한마디 내뱉고 싶지만, 그건 아마 화제를 돌리고 싶어 하는 남주를 만족시키는 길일 것이다.
“네가 연락을 안 받아서 밤에 찾아간 거래. 오죽 답답했으면 그랬겠니. 내 부탁은 있고, 넌 연락을 안 받고. 내가 창피해서 윤진이 얼굴을 볼 수가 없다.”
미숙의 하소연에 사과를 먹던 그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어머니가 윤진이 보내신 겁니까?”
“기억 안 나니? 내가 너 스타일 바꿔 줄 전문가 보낸다고 했잖아.”
그제야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한 달 전인가, 두 달 전에 선을 봤다. 첫 만남부터 자신은 열쇠 세 개 정도는 해 갈 수 있으며, 나의 목표는 어느 자리까지냐고 묻던 여자. 더 높은 자리를 원한다면 얼마든지 지원해 줄 수 있다는 여자.
다행히 선보다가 조사 중인 대한그룹 관련 정보를 주겠다는 제보자가 나타나 급작스럽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떠났다.
그런데 그게 억울했는지 어떻게 그런 고리타분하고 촌스러운 사람을 소개해 줄 수 있느냐며 주선자를 닦달했던 모양이다.
아니, 내 옷차림이 어디가 어때서?
하여튼 결국 그 소리는 어머니의 귀에 들어갔고, 그때 옷에 대해 뭐라고 했던 것 같다. 물론, 한 귀로 흘려들었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근데 그게 그냥 엄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행동력, 추진력이 좋으신 분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며칠 동안 그를 괴롭히던 전화와 문자에 대해 처음에는 보이스 피싱이라고 생각했다.
어제 점심 인호와의 대화에서 진짜 윤진일까 잠깐 의심했지만, 그 의심은 5분을 넘지 않았다. 윤진이 그렇게 애타게 저를 찾을 리 없으니까.
그리고 오밤중에 자다 깬 상태에서 윤진을 보았을 땐 처음에는 꿈을 꾸는 줄 알았다. 그리고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땐, 혹시 대한그룹 측에서 자신의 가족과 윤진이 친한 것을 알고 윤진을 들이민 것은 아닐까 의심도 했다. 마치 부장 검사의 전화처럼.
게다가 얼마 전에는 사람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소주 포스터의 모델을 보고 예쁘다고 한 번 맞장구쳤더니 여자와의 만남을 주선해 주겠다는 연락도 받아 억측은 아니었다.
“그러게 왜 쓸데없는 짓을 하십니까.”
“쓸데없는 짓?”
김 여사가 한쪽 눈썹을 올린 채 그의 차림을 훑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입던 낡은 청바지에 ‘한국대학교 신입생 새터’란 글자와 함께 노란색 병아리가 그려져 있는 회색 맨투맨. 십수 년 전부터 주야장천 보아 오던 그 모습이었다. 아마 초등학생 때 입던 옷도 몸만 들어가면 주워 입을 놈이다.
그런 아들의 패션을 걱정하는 것이 쓸데없는 짓이란 말인가. 머리가 지끈했다.
어릴 때부터 걱정 한 번 안 끼치고 자란 둘째 아들이었다. 그런데 저 웃지 못할 절약 정신 때문에 속을 썩이다니. 남들한테 말하면 배부른 소리 한다고 할 일이었다.
‘에휴, 내 탓이지.’
미숙은 관자놀이를 누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릴 때 방학에는 신나게 놀아야 한다며 친정에 애들을 맡겼다. 청학동과 별반 다르지 않은 곳이라 자연과 벗 삼아 지내라며 방학 때마다 친정에 머물길 부추겼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될 줄이야!
다른 아이들이 산으로 들로 신나게 돌아다닐 때 남주는 외할아버지 옆에 딱 붙어 천자문을 시작으로 사서삼경까지 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주가 배운 것은 한학뿐만이 아니었다. 친정아버지의 엄청난 절약 정신까지 배워 버린 것이다!
다른 자식들은 안 그러는데 왜 저 자식은 제 외할아버지 판박이냔 말이지!
저런 꼴로 다니다가 결혼이나 할 수 있을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갑자기 속이 답답해졌다. 한바탕 퍼붓기 위해 흡― 하고 숨을 들이켜다 그대로 마셨다. 내가 드러누워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을 놈이었다.
제 아들놈의 아킬레스건은 딱 하나. 미숙이 이내 어깨를 한껏 늘어뜨렸다.
“내가 죽으면 네 외할머니를 무슨 면목으로 볼지 모르겠다.”
“어머니는 참, 외할머니 얘기는 왜 꺼내세요?”
심드렁하던 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외할머니가 너 장가가는 거 보고 돌아가시는 게 꿈이었는데. 나 만나면 그걸 제일 먼저 물으실 텐데. 그때 내가 너 아직도 장가를 못 갔다고 하면…….”
흑,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남주가 옆으로 와 미숙의 등을 부드럽게 다독여 주었다.
“어머니, 어머니 맨날 산으로 들로 나물 뜯으러 다니시고, 온갖 주부 운동 모임은 다 다니시는 것 압니다. 지난가을에 울트라 마라톤도 상위권으로 완주하셨잖습니까. 아마 백 살까지는 충분히 사실 겁니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저 장가갑니다. 그러니 그런 걱정은…….”
그 소리에 미숙이 얼굴 덮은 손을 내려 그대로 그의 등에 강스파이크를 날렸다.
아우 따가워라. 남주는 얼굴을 찡그린 채 등 뒤로 팔을 뻗어 맞은 자리를 긁었다.
“손힘을 보니 아직 자리보전하실 때는 아닌 것 같습니다.”
“네 외할아버지가 전화하셨다.”
미숙은 연기를 포기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그제야 이제껏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반응하던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디 편찮으시다고 합니까?”
“어디 노인네가 당신 입으로 아프다고 하니? 그냥 목소리 들으면 딱 알지. 목소리에 기운이 하나도 없어.”
“엊그제 전화드릴 때는 괜찮으시던데.”
“네 할아버지 나이가 벌써 여든이야. 밤이슬에도 몸져눕고 그대로 황천길 갈 수 있는 나이셔.”
“어머니도 참.”
아닐 것이라고 고개를 저으면서도 그의 눈빛에 걱정이 서렸다.
5년 전까지만 해도 정정하시던 분이었다. 4년 전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최근 이삼 년간 볼 때마다 몸이 더 앙상하게 말라 가는 것 같아 그도 가족도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부모님께서 이제 같이 살자고 애원을 해도 한평생 살아온 동네 떠나 이 나이에 다른 곳에 새롭게 정착하는 것도 번잡스럽다며 손사래를 치던 할아버지였다.
그런 가족들에게 할아버지의 건강은 제일 신경 쓰이는 문제였다. 돌봐 드릴 사람도 옆에 없는 곳에서 몸져눕기라도 하시면.
“엊그제 전화해서 그러시더구나. 너 만나는 여자는 있냐고. 없다니까 실망하는 눈치셨어.”
“저한테는 그런 말씀 없으셨는데…….”
“너 부담스러울까 봐 직접 말씀을 못 하신 거지. 내가 전화하면 맨날 물어보셔. 할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는 짝을 만나야 하지 않겠니?”
하긴, 얼굴 보면 가끔 만나는 아가씨는 없냐고 묻기는 하셨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알아서 하긴 뭘 알아서 해. 너, 그렇게 다니면 있던 여자들도 다 도망가. 당장 결혼은 아니더라도, 결혼하려고 노력하는 시늉이라도 보여야 내가 할아버지께 드릴 말씀이 있을 것 아니야. 노인네들은 삶에 낙이 없으면 기운 금방 빠져. 네가 열심히 일하는 것도 자랑스러워하시지만, 네가 연애하고 결혼한다고 하면 할아버지가 얼마나 기운이 나시겠니?”
“알겠습니다.”
아까보다는 훨씬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다. 이럴 때 쐐기를 박아야 한다.
“몸이 안 좋으신지 동네 보건소에서 서울 큰 병원에 가서 건강 검진 받으라고 하셨대. 조만간 한번 올라오실 테니까 그 전까지 좀 달라진 모습을 보여 드려 봐.”
“네.”
싫은 것이 역력한 표정으로 그가 간신히 대답했다.
* * *
그로부터 한 시간 반 후, 동네 카페에서 우아하게 브런치를 즐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윤진은 남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 너 당장 내 집으로 와.
“내가 거길 왜 가요?”
― 그럼 어제는 왜 온 건데?
“내가 뭐,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사람인 줄 알아요?”
― 밀고를 했을 때는 원하는 바가 있으셨을 텐데?
한껏 비아냥거리는 그의 목소리에 딱히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입을 꾹 다물었다.
― 하기 싫으면 똑바로 말해. 어머니한테는 내가 다시 말씀드릴 테니까. 나도 솔직히 너 못 믿겠…….
못 믿겠다는 말에 울컥 무언가 치밀어 올랐다. 윤진은 생각하기도 전에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갈게요. 지금 갈 거예요.”
전화를 끊고 후회해 보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하여간, 이윤진 생각 없이 말할 나이 지나지 않았니?”
손으로 콩, 제 머리를 찧었다.
집에 들러 갈아입고 온 전투복을 룸미러로 살펴보았다.
징이 잔뜩 박힌 가죽 재킷에 부티 부츠, 해골이 그려진 블랙 면티에 광이 번쩍 나는 가죽 팬츠가 제 심경을 반영하는 듯해 조금은 흡족했다.
원뿔형의 뾰족한 침이 달린 크롬 반지라도 하고 올 걸 그랬나? 뽀얗고 기다란 손을 아쉽게 바라보며 전쟁터로 향했다.
4화
* * *
“하, 하, 하, 하.”
탁탁탁, 러닝 머신을 밟는 소리와 윤진의 거친 호흡이 규칙적으로 헬스장에 울려 퍼졌다.
얼마나 뛰었을까? 헬스장에 도착했을 때만도 까맣던 하늘이 어느새 하늘색과 붉은색으로 한껏 환해졌다.
하지만 러닝 머신 계기판만 노려보는 그녀의 눈에 창밖의 풍경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어제 일은 생각할수록 분했다. 괜히 그 일을 한다고 해서는 왜 자신이 그런 꼴을 당해야 하는지.
“하아…… 하아…….”
턱 밑까지 차오르는 숨에도 조금 더 속도를 올렸다. 휘젓는 팔의 속도도, 힘도 더욱 세차졌다.
반듯한 이마로 땀이 주르륵 흘렀다.
삐삐삐―
속이 후련해질락 말락 하던 그 순간, 러닝 머신 계기판의 빨간 글씨가 처음에 설정한 10킬로를 완주했음을 알렸다.
윤진은 러닝 머신에서 내려서며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그러곤 측면에 있는 거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조금만 먹어도 살이 금방 찌는 체질에 오리 엉덩이는 조금만 방심해도 스타일을 망치기 일쑤였다.
자나 깨나 지겹게 한 다이어트와 스쿼트 덕에 잘록한 허리와 엉덩이로 흐르는 라인은 스스로 보기에도 꽤 만족스럽다. 타고난 가슴 역시 덤벨과 웨이트로 다듬어져 옷발을 살리는 일등 공신이 되었다.
이렇게 완벽한 내가 곽남주가 뭐라고 생각할지 신경 써야겠어? 그게 더 웃기지. 흥.
윤진은 콧방귀를 뀌었다.
샤워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으려 할 때, 연주에게서 전화가 왔다.
― 어제저녁에 남주 오빠네 간다고 주소 받아 가더니, 왜 말이 없어?
“문전 박대 당했어.”
어젯밤 일이 생각나자 가슴 깊은 곳에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 문전 박대? 막 싹수없게 굴어?
“아니. 진심으로 문전 박대. 현관문 앞에서 팽 당했어.”
― 뭐?
연주도 놀랐는지 목소리가 한 톤 높다.
그래.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내 친구 연주야. 너희 오빠 좀 어떻게 해 줘.’라고 이르는 일곱 살짜리 꼬마 같은 모습에 스스로가 부끄럽긴 했지만, 어젯밤 곽남똥의 만행은 반드시 만천하에 알려야 할 필요가 있다.
― 너 딱 기다려. 내가 엄마한테 다 일러 줄 테니까.
전화가 끊겼다.
그의 만행을 연주가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말하긴 했는데, 막상 연주가 바로 어머님께 이른다는 소리를 하자, 자신이 너무 유치했나 싶다.
그 말이 연주 어머님에게도 들어가길 바란 건 아니었는데…….
아아아, 몰라 몰라. 어머님께 왕창 혼나면 더 고소한 거지 뭐.
윤진은 땀에 젖어 목덜미에 달라붙는 머리카락을 흔들어 떼어 내며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 * *
“저 왔습니다.”
고개 숙여 인사하며 현관에 들어서는 남주를 모친인 미숙이 노려보았다.
그녀의 따끔한 시선 뒤로한 채 그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빈 식탁을 확인한 후, 의아한 눈빛으로 미숙을 바라보았다.
원래 혼자 살아도 아침은 꼭 챙겨 먹는 그였다. 그런데 아침부터 잠들어 있는 저를 깨워 바로 오라고 독촉을 했으니 당연히 밥은 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네가 지금 밥 먹을 짓을 했니?”
미숙의 목소리가 평상시와는 달리 날이 서 있다.
“얼굴 보고 싶다고 하셔서 아침밥도 건너뛰고 달려왔더니, 무섭게 왜 이러십니까?”
말로는 무섭다고 하면서도 얼굴은 태연하기 그지없다. 그는 냉장고에서 사과 하나를 꺼내어 쓱쓱 바지에 닦았다. 아그작, 사과를 한입 크게 베어 문 다음에야 소파에 앉았다.
“그게 입으로 넘어가니?”
도대체 저놈의 성미는. 제 배 아파 낳은 아들이지만 혼낼 때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식인 둘째 아들의 모습은 영 적응이 안 된다.
큰아들처럼 자상하기를 하나, 막내아들 놈처럼 살갑기를 하나. 마이 웨이 스타일로 주변엔 신경도 안 쓰는 둘째 아들놈을 도대체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아직도 풀지 못한 숙제 같았다.
“지나가던 거지가 밥때에 들어와도 챙겨 주시던 분이 왜 먹는 것 가지고 타박을 하십니까.”
“여자를 때리다니, 넌 거지만도 못한 놈이다.”
그제야 김 여사가 왜 화가 났는지 알아챈 그의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때리긴 누가 때렸다고 그러십니까. 그냥 문 닫느라 민 건데 제풀에 쓰러진 거죠.”
“그러니까. 어쩜 그렇게 문전 박대를 할 수가 있니?”
“그러면 연락도 없이 밤에 찾아온 여자를 집에 들입니까?”
“걔가 아무나니? 윤진이야 윤진이. 네가 윤진이를 몰라, 윤진이가 너를 몰라?”
“어머니. 원래 성폭행 사고의 70프로는 친족과 지인으로부터 발생합니다. 윤진이를 진짜 딸같이 여기신다면 그런 행동에 대해 따끔히 혼내셔야죠.”
미숙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한마디 내뱉고 싶지만, 그건 아마 화제를 돌리고 싶어 하는 남주를 만족시키는 길일 것이다.
“네가 연락을 안 받아서 밤에 찾아간 거래. 오죽 답답했으면 그랬겠니. 내 부탁은 있고, 넌 연락을 안 받고. 내가 창피해서 윤진이 얼굴을 볼 수가 없다.”
미숙의 하소연에 사과를 먹던 그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어머니가 윤진이 보내신 겁니까?”
“기억 안 나니? 내가 너 스타일 바꿔 줄 전문가 보낸다고 했잖아.”
그제야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한 달 전인가, 두 달 전에 선을 봤다. 첫 만남부터 자신은 열쇠 세 개 정도는 해 갈 수 있으며, 나의 목표는 어느 자리까지냐고 묻던 여자. 더 높은 자리를 원한다면 얼마든지 지원해 줄 수 있다는 여자.
다행히 선보다가 조사 중인 대한그룹 관련 정보를 주겠다는 제보자가 나타나 급작스럽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떠났다.
그런데 그게 억울했는지 어떻게 그런 고리타분하고 촌스러운 사람을 소개해 줄 수 있느냐며 주선자를 닦달했던 모양이다.
아니, 내 옷차림이 어디가 어때서?
하여튼 결국 그 소리는 어머니의 귀에 들어갔고, 그때 옷에 대해 뭐라고 했던 것 같다. 물론, 한 귀로 흘려들었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근데 그게 그냥 엄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행동력, 추진력이 좋으신 분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며칠 동안 그를 괴롭히던 전화와 문자에 대해 처음에는 보이스 피싱이라고 생각했다.
어제 점심 인호와의 대화에서 진짜 윤진일까 잠깐 의심했지만, 그 의심은 5분을 넘지 않았다. 윤진이 그렇게 애타게 저를 찾을 리 없으니까.
그리고 오밤중에 자다 깬 상태에서 윤진을 보았을 땐 처음에는 꿈을 꾸는 줄 알았다. 그리고 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땐, 혹시 대한그룹 측에서 자신의 가족과 윤진이 친한 것을 알고 윤진을 들이민 것은 아닐까 의심도 했다. 마치 부장 검사의 전화처럼.
게다가 얼마 전에는 사람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소주 포스터의 모델을 보고 예쁘다고 한 번 맞장구쳤더니 여자와의 만남을 주선해 주겠다는 연락도 받아 억측은 아니었다.
“그러게 왜 쓸데없는 짓을 하십니까.”
“쓸데없는 짓?”
김 여사가 한쪽 눈썹을 올린 채 그의 차림을 훑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입던 낡은 청바지에 ‘한국대학교 신입생 새터’란 글자와 함께 노란색 병아리가 그려져 있는 회색 맨투맨. 십수 년 전부터 주야장천 보아 오던 그 모습이었다. 아마 초등학생 때 입던 옷도 몸만 들어가면 주워 입을 놈이다.
그런 아들의 패션을 걱정하는 것이 쓸데없는 짓이란 말인가. 머리가 지끈했다.
어릴 때부터 걱정 한 번 안 끼치고 자란 둘째 아들이었다. 그런데 저 웃지 못할 절약 정신 때문에 속을 썩이다니. 남들한테 말하면 배부른 소리 한다고 할 일이었다.
‘에휴, 내 탓이지.’
미숙은 관자놀이를 누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릴 때 방학에는 신나게 놀아야 한다며 친정에 애들을 맡겼다. 청학동과 별반 다르지 않은 곳이라 자연과 벗 삼아 지내라며 방학 때마다 친정에 머물길 부추겼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될 줄이야!
다른 아이들이 산으로 들로 신나게 돌아다닐 때 남주는 외할아버지 옆에 딱 붙어 천자문을 시작으로 사서삼경까지 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주가 배운 것은 한학뿐만이 아니었다. 친정아버지의 엄청난 절약 정신까지 배워 버린 것이다!
다른 자식들은 안 그러는데 왜 저 자식은 제 외할아버지 판박이냔 말이지!
저런 꼴로 다니다가 결혼이나 할 수 있을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갑자기 속이 답답해졌다. 한바탕 퍼붓기 위해 흡― 하고 숨을 들이켜다 그대로 마셨다. 내가 드러누워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을 놈이었다.
제 아들놈의 아킬레스건은 딱 하나. 미숙이 이내 어깨를 한껏 늘어뜨렸다.
“내가 죽으면 네 외할머니를 무슨 면목으로 볼지 모르겠다.”
“어머니는 참, 외할머니 얘기는 왜 꺼내세요?”
심드렁하던 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외할머니가 너 장가가는 거 보고 돌아가시는 게 꿈이었는데. 나 만나면 그걸 제일 먼저 물으실 텐데. 그때 내가 너 아직도 장가를 못 갔다고 하면…….”
흑,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남주가 옆으로 와 미숙의 등을 부드럽게 다독여 주었다.
“어머니, 어머니 맨날 산으로 들로 나물 뜯으러 다니시고, 온갖 주부 운동 모임은 다 다니시는 것 압니다. 지난가을에 울트라 마라톤도 상위권으로 완주하셨잖습니까. 아마 백 살까지는 충분히 사실 겁니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저 장가갑니다. 그러니 그런 걱정은…….”
그 소리에 미숙이 얼굴 덮은 손을 내려 그대로 그의 등에 강스파이크를 날렸다.
아우 따가워라. 남주는 얼굴을 찡그린 채 등 뒤로 팔을 뻗어 맞은 자리를 긁었다.
“손힘을 보니 아직 자리보전하실 때는 아닌 것 같습니다.”
“네 외할아버지가 전화하셨다.”
미숙은 연기를 포기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그제야 이제껏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반응하던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디 편찮으시다고 합니까?”
“어디 노인네가 당신 입으로 아프다고 하니? 그냥 목소리 들으면 딱 알지. 목소리에 기운이 하나도 없어.”
“엊그제 전화드릴 때는 괜찮으시던데.”
“네 할아버지 나이가 벌써 여든이야. 밤이슬에도 몸져눕고 그대로 황천길 갈 수 있는 나이셔.”
“어머니도 참.”
아닐 것이라고 고개를 저으면서도 그의 눈빛에 걱정이 서렸다.
5년 전까지만 해도 정정하시던 분이었다. 4년 전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최근 이삼 년간 볼 때마다 몸이 더 앙상하게 말라 가는 것 같아 그도 가족도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부모님께서 이제 같이 살자고 애원을 해도 한평생 살아온 동네 떠나 이 나이에 다른 곳에 새롭게 정착하는 것도 번잡스럽다며 손사래를 치던 할아버지였다.
그런 가족들에게 할아버지의 건강은 제일 신경 쓰이는 문제였다. 돌봐 드릴 사람도 옆에 없는 곳에서 몸져눕기라도 하시면.
“엊그제 전화해서 그러시더구나. 너 만나는 여자는 있냐고. 없다니까 실망하는 눈치셨어.”
“저한테는 그런 말씀 없으셨는데…….”
“너 부담스러울까 봐 직접 말씀을 못 하신 거지. 내가 전화하면 맨날 물어보셔. 할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는 짝을 만나야 하지 않겠니?”
하긴, 얼굴 보면 가끔 만나는 아가씨는 없냐고 묻기는 하셨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알아서 하긴 뭘 알아서 해. 너, 그렇게 다니면 있던 여자들도 다 도망가. 당장 결혼은 아니더라도, 결혼하려고 노력하는 시늉이라도 보여야 내가 할아버지께 드릴 말씀이 있을 것 아니야. 노인네들은 삶에 낙이 없으면 기운 금방 빠져. 네가 열심히 일하는 것도 자랑스러워하시지만, 네가 연애하고 결혼한다고 하면 할아버지가 얼마나 기운이 나시겠니?”
“알겠습니다.”
아까보다는 훨씬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다. 이럴 때 쐐기를 박아야 한다.
“몸이 안 좋으신지 동네 보건소에서 서울 큰 병원에 가서 건강 검진 받으라고 하셨대. 조만간 한번 올라오실 테니까 그 전까지 좀 달라진 모습을 보여 드려 봐.”
“네.”
싫은 것이 역력한 표정으로 그가 간신히 대답했다.
* * *
그로부터 한 시간 반 후, 동네 카페에서 우아하게 브런치를 즐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윤진은 남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 너 당장 내 집으로 와.
“내가 거길 왜 가요?”
― 그럼 어제는 왜 온 건데?
“내가 뭐,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사람인 줄 알아요?”
― 밀고를 했을 때는 원하는 바가 있으셨을 텐데?
한껏 비아냥거리는 그의 목소리에 딱히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입을 꾹 다물었다.
― 하기 싫으면 똑바로 말해. 어머니한테는 내가 다시 말씀드릴 테니까. 나도 솔직히 너 못 믿겠…….
못 믿겠다는 말에 울컥 무언가 치밀어 올랐다. 윤진은 생각하기도 전에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갈게요. 지금 갈 거예요.”
전화를 끊고 후회해 보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하여간, 이윤진 생각 없이 말할 나이 지나지 않았니?”
손으로 콩, 제 머리를 찧었다.
집에 들러 갈아입고 온 전투복을 룸미러로 살펴보았다.
징이 잔뜩 박힌 가죽 재킷에 부티 부츠, 해골이 그려진 블랙 면티에 광이 번쩍 나는 가죽 팬츠가 제 심경을 반영하는 듯해 조금은 흡족했다.
원뿔형의 뾰족한 침이 달린 크롬 반지라도 하고 올 걸 그랬나? 뽀얗고 기다란 손을 아쉽게 바라보며 전쟁터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