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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저택의 전반적인 관리를 맡은 것은 집사장이지만, 주인인 공작의 생활을 관리하는 것은 부관 겸 시종인 소피아였다. 글로리아는 바닥에 닿고도 한참이나 끌리는 긴 드레스를 살며시 그러쥐었다.

관리되는 생활에는 넓고 얕을 수밖에 없는 인간관계도 포함되어 있었고, 소피아는 집사와 마찬가지로 사용인들의 얼굴을 모조리 외우고 있었다. 그런데 이 슬픈 결혼식 날, 사용인을 가장하여 흘러들어 온 저 불순한 종자는 대체 누구인가? 우아하고 사뿐하게 달려들어 목을 꺾는 과정을 상상한다. 지그시 발에 힘을 주자 종아리 근육이 팽팽하게 섰다. 그러나 남자는 그 이상으로 민첩했다.

눈을 번뜩인 괴한이 숨겨 두었던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가 달려드는 방향에 티타니아가 놓여 있음을 확인한 글로리아는 몸에 남아 있던 여유를 가감 없이 긁어냈다.

“폐하!”

불꽃을 손발처럼 다루는 현자가 어쭙잖은 괴한한테 당할 리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나 머리가 달아올랐다. 글로리아는 사색이 된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그 애타는 목소리 덕에 상황을 파악한 티타니아는 호위를 앞세우는 대신 가볍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가 마법을 사용할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근처에 있던 빈센트가 괴한을 저지한 것이다. 달려드는 괴한의 머리를 내려쳐 바닥에 꽂아 준 빈센트는 정신을 차릴 틈도 주지 않고 곧장 발끝으로 널브러진 몸을 차올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달려온 글로리아가 급히 물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짧고 강렬한 소란 덕에 귀빈들의 시선이 아발론의 황제 쪽으로 몰려들었다.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동생을 눈빛으로 달랜 티타니아는 일부러 크게 외쳤다.

“짐은 무사하다. 나그리제 후작, 그것의 상태는 어떠한가?”

그제야 글로리아의 눈에 빈센트가 들어왔다. 그냥 두었어도 티타니아가 처리했겠지만, 그가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다. 만감이 교차했다. 글로리아는 좀처럼 트이지 않는 입을 달싹였다.

그사이, 피거품을 문 채 축 늘어진 몸을 적당히 주워 올린 빈센트가 대답했다.

“……입 안에 머금고 있던 독을 삼키고 죽은 것 같습니다.”

달리 덧붙일 말을 찾지 못한 빈센트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큰일이 생기기 전에 해결했다고는 하지만, 평화 협정을 맺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라의 사신단이 참석한 결혼식에 괴한이 나타난 것은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니었다.

소란스럽고 껄끄러운 시선이 이국의 황태자와 후작을 슬며시 훑고 지나갔다. 대놓고 쳐다보는 이들도 없지는 않았다.

불쾌한 적막을 깨고 다시 상황을 정리한 것은 티타니아였다. 목숨을 위협받았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그녀는 잔을 하나 들고 윌리엄 황태자에게 다가갔다. 티타니아의 성정을 아는 귀족들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지만, 선명한 목소리는 모두의 귀에 파고들었다.

아발론의 황제는 붉은 포도주잔을 높이 들었다.

“황태자, 건배사를 부탁합니다. 내용은 두 제국이 이룬 평화에 관한 것이 좋겠군요.”

황제의 목소리는 현 상황에 대한 침묵을 강하게 요구했다. 귀족들은 그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명목상 ‘평화의 상징’들을 위한 결혼식이었으나 실질적인 이목은 황제와 황태자에게 쏠려 있었다. 티타니아와 윌리엄이 주도하던 분위기는 그들이 돌아가자마자 썰물이 되어 빠져나갔다.

가벼운 인사를 나누었던 이들이 하나둘씩 자취를 감추고, 마지막으로 갓 부부가 된 두 사람이 홀에서 나왔다. 글로리아는 찬바람을 맞으며 미간을 주물렀다. 조금 전 티타니아와 나누었던 대화가 끊임없이 떠올랐다.



‘왜 피하지 않으셨습니까?’

‘정리가 필요했기 때문이지. 공작의 눈에는 짐이 그런 것에 몸을 사려야 할 만큼 나약한 존재로 보였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그렇다면 되었네. 이 일은 황실에서 조사할 테니 오늘의 그대는 손을 떼도록. 전부 잊고 초야를 즐기게.’

‘공작가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짐의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기도 하지.’




틀린 말은 없었다. 아발론은 티타니아의 나라였고 공작가는 그 안에 속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제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현자라 불리는 그녀가 질 것이라는 상상은 감히 한 적도 없지만, 걱정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은가. 매몰차게 말하고 돌아가 버린 혈육을 향해 분통을 터뜨리던 글로리아는 반항하듯 다른 화제를 꺼내 들었다.

그래 이제 걱정은 않겠다. 하지만 머리는 굴릴 것이다.

괴한은 이 저택에 어떻게 침입했을까. 소피아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정상적인 절차를 밟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결론적으로 몰래 숨어들었다는 소리인데, 귀빈이 다수 출몰할 예정이라 경계를 강화해 둔 저택에 도대체 어떻게. 집히는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어느 것도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누군가의 시종 혹은 선물로 들어왔나? 그렇다면 누가 저런 것을 달고 왔지?

생각이 깊어질 즈음 내내 침묵을 지키던 빈센트가 입을 열었다.

“조사는 황실에서 하기로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녀도 알고 있겠지만 기를 쓰고 머리를 굴린다고 신탁처럼 답이 내려오는 것은 아니었다. 연무장에서처럼 글로리아와 단둘이 마주하게 된 빈센트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드레스차림을 처음 본 것은 아니었으나, 신부를 상징하는 새하얀 드레스는 또 감회가 새로웠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지독하게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떻게 된 것인지 뭘 입어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 없다. 전장에서 계속 보아 왔던 갑옷이나 하얀 제복도 그렇지만 지난번에 보았던 화려한 드레스도 다르지 않았다. 무엇을 어떻게 걸치든 레펠 공작의 활기는 그대로였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지금 입고 계신 드레스가 굉장히 잘 어울립니다.’ 같은 소리를 내뱉을 뻔했던 빈센트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저는 아발론이 아닌 바로디의 귀족이었다. 신원을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식장을 헤집고 다닌다면, 이국의 황제가 아닌 조국의 황태자를 보호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 순간을 다시 떠올렸다. 절박한 목소리가 천지를 흔들고…….

절박한 목소리?

빈센트는 인상을 찌푸렸다. 절박하다고 해 보았자 글로리아의 목소리였다.

“나그리제 후작.”

굳은 표정으로 생각을 이어 가던 빈센트는 눈을 깜빡였다. 그와 마주하면서 이전의 일을 좀 더 상세하게 떠올리게 된 글로리아는 머뭇거리던 입을 열었다.

“폐하를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갑작스러운 소리임은 그녀 본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진작 했어야 할 말이었다. 빈센트 테오도르 나그리제. 변명할 여지 없이 그가 티타니아를 구한 것은 사실이었다.

호박색 눈이 크게 흔들렸다. 겸연쩍은 듯 입술을 씹던 글로리아는 머리를 뒤집으며 다시 한번 고했다.

“감사합니다.”

크게 당황한 빈센트는 마르다 못해 갈라지기 시작한 입술을 달싹였다. 평소 같으면 삐딱하게 대응했겠지만,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감사 인사는 제과점에 놓인 쇳가루만큼이나 이질적이라 그도 미처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두 남녀의 머리 위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시선을 맞추는 것조차 힘들어진 글로리아와 빈센트는 딴청을 피우며 고개를 돌렸다.

“공작 전하. 후작 각하. 금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그런 둘을 구원한 것은 레펠 공작가의 집사장이었다. 새하얀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뒤로 넘긴 노신사는 정중하게 허리를 굽힌 후 고개를 들었다.

“뒷정리는 저희 사용인들의 몫이니 먼저 들어가 쉬시지요. 방은 소피아 님께서 미리 준비해 두셨습니다.”

소피아의 이름을 듣는 순간 불길함이 머리를 스쳤지만, 이 또한 거쳐야 할 일이었다. 오늘은 결혼식인 동시에 공식적인 초야였고 부부는 같은 방에서 밤을 보내야 했다.

안내를 받고 흩어졌던 글로리아와 빈센트는 준비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갔다. 눈이 마주친 순간 다시 침묵이 흐르고, 20년 넘게 쌓아 올린 화술의 덧없음을 곱씹던 부부는 우선 술병을 열었다. 인간을 초월하고부터 취기를 모르게 된 둘이었으나 마시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



혀끝이 아릴 정도로 달콤한 술은 유리잔에 부어 흔들면 파도처럼 푸르게 일렁였다. 글로리아와 빈센트는 서로의 잔을 채워 주었다. 깨끗하고 매끈한 잔에 시원한 물결이 닿을 때마다 청량한 소리가 오르내렸다.

술을 좋아하다 못해 사랑했던 글로리아는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화제는 둘에게 익숙한 것으로 골랐다.

“나는 다른 전쟁에서 패배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대 때문에 말을 돌려야 했지요.”

패전은 아니었지만 승리할 수도 없었다. 짧게는 하루 단위로 길게는 달 단위로 지도에 그려진 국경이 지워졌다. 맞붙어서 밀어 내거나 밀리는 일의 반복이었다. 당장에라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던 한 뼘의 땅을 두고 눈앞의 남자와 대치하던 상황을 떠올린 글로리아는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그와 눈을 맞췄다.

마찬가지로 진지해진 빈센트가 입을 열었다.

“저도 전하와 같습니다.”

글로리아가 아발론의 전쟁 영웅이듯 빈센트 또한 바로디의 영웅이었다. 평생을 통틀어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교착 상태를 선사해 준 상대를 쳐다보던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저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결착을 원했다. 가능하면 승리를 원하지만 패배를 하더라도 깔끔한 결착을 소망했다. 그러나 두 나라는 극적으로 화해했다. 빈센트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이 답답함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아발론의 공작, 글로리아 베네딕트 레펠이라 한다. 귀공의 이름은?’



그녀와 처음 만났던 순간을 떠올리던 빈센트는 갑작스레 흘러든 웃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글로리아가 입술을 씰룩였다.

“맞아요. 나도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폐하께 은혜를 입었지만, 그런 것으로는 만족이 되질 않아요. 그대와 내가 원하는 건, 좀 더…… 극악한 혈투가 아닐지?”

“……제가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어쨌든 온전한 결착을 원하는 건 같지 않습니까?”

여전히 조금 다른 것 같았지만 ‘결착’에 집중한 빈센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완벽한 긍정으로 받아들인 글로리아는 이해한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한번 풀어내고 면밀히 따지자면 살벌한 소리였다. 한동안 부부가 되어 살아야 할 남녀가 서로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은은한 빛이 감도는 방 안에는 두려움도 분란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툼은 잦았지만 이렇게까지 진중한 대화는 처음이었다. 전쟁 중에는 날붙이를 서로의 목에 들이밀기 바빴고, 근래에는 앙금 중에서도 새까맣게 타 버린 윗부분만 보고 덤벼들기 바빴다. 제법 솔직해진 그를 눈앞에 두고도 조소하지 않게 된 글로리아는 빈 잔의 끄트머리를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전부 취기 탓이겠지. 그녀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달게 들어와서 혀를 감싸고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 것들이 돌기 시작하면 둔감해진 몸은 혹한기의 칼바람조차 견뎌 낸다고 했다. 그러니 모난 구석을 매끄럽게 받아들이는 정도야 특별한 일도 아닐 것이다.

초월자가 되고 나서 제대로 취한 적이 없음을 순간적으로 잊어버린 글로리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할까요. 어차피 한 해 동안 그대와 나는 평화의 상징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 혼약을 파기하기 전에 한 번 더 겨루어 보도록 하지요. 이왕 하는 거, 이기는 쪽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으로 내기라도 할까요?”

그와 당장 싸우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맛좋은 술과 혈육을 구해 준 은혜가 혈기를 억눌렀다. 고개를 끄덕인 빈센트는 마지막 잔을 비웠다. 글로리아는 건드리던 잔을 옆으로 밀었다.

답답함은 한결 가셨지만 잠은 쏟아지지 않았다. 화제를 고민하던 어느 초월자는 무언가가 생각난 듯 부드러운 입술을 움직였다.

“그러고 보니 합의가 필요하겠군요.”

“무엇이 말입니까?”

“잠자리 문제 말입니다.”

갑작스레 튀어나온 소리에 놀란 빈센트가 크게 움찔거렸다. 글로리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그대가 정부를 몇이나 두든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서로의 명예가 있으니 저택 내로 들이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나도 그러도록 하지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저택 내로 들일 생각이었습니까?”

일정한 굵기와 높이를 유지하던 빈센트의 목소리가 대번에 달아올랐다.

“그런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정부라니……. 그런 천박한…….”

당황스러웠다. 그는 진실로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주변에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생리적인 거부감인지 도덕적인 문제인지 어쨌든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였다.

그러나 글로리아는 그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이가 좋으면 서로만 바라보고 살겠지만, 원수들끼리 하는 정략결혼인데 정부를 두지 않는 쪽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

투명하고 깊은 보라색 눈이 잔물결처럼 흔들렸다. 글로리아는 다시 입을 움직였다.

“……후작도 여자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반려 외의 여자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결혼을 했으면 반려만 보는 게 당연합니다. 몸을 섞지 않더라도 법적으로 부부가 된 이상 바깥으로 나도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대와 나도 그래야 한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답답해진 글로리아가 소리쳤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나더러 1년이나 홀로 침대를 덥히라는 건가요? 그대도 혼전에 애인을 두었을 것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