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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레펠 공작가 사용인들의 아침은 어둑하던 하늘의 끄트머리가 붉게 일렁거릴 즈음 시작되었다.

이유는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의 주인인 공작의 기상이 그 시간이었던 것이다. 현재는 기사보다 공작으로 살고 있었으나 한번 몸에 밴 습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소피아가 끓여 준 차를 마시며 시트를 치우는 하인들을 구경하고 있던 글로리아는 입을 살짝 가렸다. 하품이 나왔다.

네 번이 넘어갈 때부터는 수를 셈하지 않은 탓에 몇 번이나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분주한 발소리가 사용인들의 기상을 알려 왔고, 그에 지나치게 놀라 버린 남자가 행위를 멈췄다. 시간상으로는 한나절 정도가 지난 셈이다.

침대 위에서 열정적으로 움직이던 남자의 얼굴이 새빨갛게 익는 장관을 떠올린 그녀는 결국 품위 없는 웃음을 남발했다. 사용인들이 들어오기 전에 바람처럼 사라졌던 그가 훈련장을 달리고 있다는 소식까지 전해 듣고 나니 참을 수가 없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독이 든 케이크가 생각보다 훨씬 맛있었거든. 맞아 소피아, 어제 일에 대한 조사는?”

한 나라의 후작이 차에 곁들이는 간식 취급 당했음을 소피아는 단번에 눈치챘다. 그러나 지적할 생각이 없었던 그녀는 이어지는 말에만 답을 더했다.

“폐하께서 나서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셔서 저택 내 사용인들에게만 괴한에 대해 아는지 물어보았습니다. 특별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여전히 철저하시군. 그건 그럼 됐어. 따로 연락을 주시겠지. 아, 하나 더 물어볼 게 있는데 테이블에 있던 술은 어디서 난 거야? 초월자가 되고 나서 처음으로 취해 본 것 같아.”

“폐하께서 하사하셨습니다. 한 모금만 먹어도 골이 쪼개질 만큼 독한 이국의 술이라고 하셨어요.”

“그랬나? 받은 기억이 없는데.”

“전하가 아니라 저에게 하사하셨으니까요. 어떻게 사용할지는 자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인이 마시기 싫어서 이국에서 선물로 들어온 술을 하사라는 이름으로 떠넘긴 황제도 문제지만, 그걸 고이 가져다가 상관에게 써먹는 부관도 정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정상이 아니었던 글로리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지난밤의 일을 떠올리며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헐렁하게 걸치고 있던 가운을 벗고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상상 이상으로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지금이라면 애인도 다 정리할 수 있었다. 괜찮은 것을 곁에 두고도 색다른 자극을 찾는다며 들쑤시는 취미는 없으니 1년 정도는 괜찮겠지.



젖은 몸을 말리고 간단히 차려입은 글로리아는 식당에서 그를 기다렸다. 기나긴 식탁의 상석에 앉아 옆자리 정리를 명령하는 순간, 마찬가지로 샤워를 마친 빈센트가 안으로 들어왔다.

식사가 시작되었지만,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가볍게 끝나야 할 아침 식사가 고기투성이인 사건에 대하여 요리사를 부를 생각조차 못 할 정도로, 빈센트는 달그락 소리 한 번 나지 않는 상석에 온 신경을 집중한 상태였다. 혼란한 본인과 달리 극상의 여유를 보여 주는 그녀가 얄미웠던 그는 잠시 손을 멈췄다.

초야를 되뇌는 머리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영리했다. 시작부터 끝까지 어떻게 접하고 반응했으며 종국에는 이성을 상실했는지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든 잊기 위해 새벽부터 훈련장을 뒤엎었으나 뇌리에 박힌 말초적 자극은 아직도 선명했다.

“……공작 전하.”

입 안에 든 것을 삼킨 글로리아가 정정했다.

“글로리아입니다, 빈센트.”

“……글로리아, 몸은 괜찮습니까?”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숨을 고른 그가 주저하며 물었다. 반짝거리는 은 식기를 그대로 놓을 뻔했던 글로리아는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몸은 괜찮지만, 같이 밤을 보냈던 남자가 바람이 되어 사라지니 마음이 쓰리더군요. 용건이 끝났다고 상대를 내버려 두는 건 예의가 아닙니다.”

마음이 쓰렸다는 소리는 거짓말이지만, 예의가 아니라는 소리는 사실이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던 빈센트는 다시 침묵했다.

식사를 끝내고 사용인과 시종을 모두 내보낸 글로리아가 웃는 얼굴로 그를 불렀다.

“빈센트.”

“…….”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대는 아니었나요?”

성적으로 충만한 밤이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전쟁터의 악귀가 저리 반응하니 놀리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글로리아가 혀를 굴리는 대로 흔들리던 빈센트는 살짝 젖어 있던 앞머리를 뒤집었다.

잠자리에 관한 지식은 있었다. 하나같이 쫓아 버렸지만 헐벗은 여자가 달려들었던 경험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실전은 달랐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유지되던 평정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광경은 추상적으로도 아름답다 표할 수 없다. 어항에 담긴 물고기가 같은 공간을 배회하는 것처럼 단편적인 장면이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빈센트는 그냥 보아도 흉흉한 눈에 힘을 주었다.

“저도 즐거웠습니다.”

부부의 잠자리는 비밀스러울지는 몰라도 결코 부끄럽고 천한 일이 아니었다. 여기서 글로리아의 성향을 걸고넘어져 봐야 득을 볼 일이 없음을 알기에, 그는 세 치 혀의 먹잇감이 되지 않기 위해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었다.

지난밤에 주고받았던 이야기는 따로 정리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단순하고 분명했다. 혼인 신고가 되어 있는 동안, 애인과 정부, 그 어떤 것도 들이지 않으며 잠자리는 서로하고만 가진다.

확답을 주는 것으로 상황을 정리한 글로리아가 다시 사용인을 들였다. 그들이 그릇을 내가는 것을 물끄러미 보던 그녀는 식탁이 비워질 때가 되어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선약이 없다면 의복을 맞추러 함께 가지 않겠습니까?”

황태자는 곧 돌아가겠지만, 공작비가 된 빈센트는 아발론에서 두 달 정도 기거할 예정이었다. 전쟁도 끝났고 위치상 대외 활동이 많을 수밖에 없으니 준비가 필요했다.

불편한 옷을 입고 환하게 웃으며 돌아다녀야 할 미래에 대한 한숨을 속으로만 삼키며 그가 동의했다. 그녀는 호쾌한 목소리로 준비를 명령했다.



그들이 가게 될 곳은 마담 엘레아노의 살롱이었다. 수도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탓에 예약을 넣어도 일주일은 기다려야 했지만, 제국 유일의 공작가는 이럴 때 쓸모가 있었다.

다리를 길게 감싸는 푸른 마린스커트에 허리선을 드러내는 재킷을 걸친 글로리아가 큼지막한 사파이어가 박힌 암갈색 지팡이를 손에 쥐었다. 곁에 있던 소피아는 옷과 마찬가지로 푸른 모자의 챙과 깃털을 정리하고 있었다. 준비를 먼저 끝내고 그들을 지켜보면서 빈센트는 새삼 그녀가 지향하는 차림을 깨달았다.

평화 협정 축하연에서도 그랬고, 결혼식에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지만 하나같이 몸매를 드러내는 차림이었다. 가슴은 두드러지게 하고 허리는 조이며 다리 선은 살린다. 낮이 밤이 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녀의 가운이 벗겨지던 순간을 떠올려 버린 빈센트가 기겁하며 고개를 저었다. 글로리아는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전혀 없습니다.”

아주 큰 문제가 있었지만, 솔직하게 답할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가요. 그럼 움직일까요?”

글로리아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평생 에스코트를 할지언정 당해 본 적이 없었던 빈센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녀의 손을 쥐었다.

그렇게 겉모습만큼은 완벽한 부부가 마차 앞에 섰을 때, 사용인 하나가 급히 달려왔다.

“전하, 손님이 오셨습니다.”

“오늘은 약속이 없는데…… 누가 왔다는 거지?”

빈센트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던 사용인이 답했다.

“주교님이 오셨습니다.”

모르는 빈센트에게는 그저 의아한 소리였지만, 아는 글로리아에게는 껄끄러운 소리였다. 입으로 반응하는 대신 초점을 흐린 그녀가 입을 열었다.

“빈센트, 손님이 오셨다니 출발을 조금 늦춰도 되겠습니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약속도 없이 공작가를 직접 방문할 만한 주교는 그녀가 알기로 하나뿐이었다. 혼인했다는 소식이 퍼지면 알아서 정리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알면서도 찾아온 것인가. 어느 쪽이라도 길게 끌 생각은 없다.

글로리아의 물음을 들은 빈센트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여전히 태도가 이상한 사용인을 쳐다보았다. 주교가 방문했다는 게 저한테 문제라도 된다는 건가. 그의 미묘한 반응을 이해한 글로리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비아토르교 대신전에 소속된 주교일 겁니다. 나에게 구애하던 남자이기도 하지요.”



니르케의 은총이라 불리는 금빛을 눈과 머리에 새긴 남자는 얼굴의 생김새마저 황홀했다. 다듬어진 상아처럼 매끄러운 피부에 조화롭게 얹힌 것들이 극단의 주인공으로 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미려했던 것이다. 그런 이가 우수에 젖어 고개를 떨구고 앉아 있는 모습은 만인의 관심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글로리아가 그렇다 선언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눈치가 있는 이들은 그가 공작가의 주인에게 애틋한 마음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글로리아는 어제부로 결혼을 한 상태였다. 주인의 평소 품행을 생각하면 정부 하나쯤은 우습지만, 상대는 신을 섬기는 주교다. 그러니 이 치정극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입과 귀가 근질거렸던 하인들이 응접실로 가져가야 할 차를 두고 경쟁할 무렵, 보란 듯이 나타난 소피아가 차가 들린 쟁반을 빼앗았다.

“일하세요.”

저녁 하늘 같은 주황색 눈동자에 생기가 없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지만, 근래 들어 더욱 낮아진 목소리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소란스럽게 움직이던 이들이 곧장 가벼운 입을 꾹 눌러 닫았다. 상황을 정리하자마자 소피아는 그대로 응접실로 올라가 셋에게 차를 전해 주었다.

소피아가 정중하게 인사하고 나간 뒤, 방 안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닫힌 문을 가만히 보고 있던 글로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헤레스 주교. 무슨 일입니까?”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그가 빈센트를 보며 말했다.

“혼인을 하셨다고…….”

“그렇습니다. 이쪽은 바로디의 빈센트 테오도르 나그리제 후작입니다. 어제부로 제 비…… 아니, 반려입니다.”

글로리아는 전날 썼던 단어를 정정했다. 평화의 상징을 벗어나서 당분간 빈센트와 글로리아는 부부였다. 상호 간의 존중을 위해 표현을 고르는 게 당연했다.

잔을 집으려다 그만둔 헤레스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이렇게 급히 혼인을 하신 것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겠지요. 제게도 아직 기회가 있을 터. 그렇겠지요?”

헤레스는 대답을 요구하듯 애타는 얼굴로 글로리아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헤레스가 표현하는 기회란 대체 무엇인가.

금색 시선을 얕게 흔들고 있는 남자는 첫 만남에서부터 무릎을 꿇었다. 온 세상이 아름답다 칭송하는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가장 아래에서부터 구애했다. 그 주변을 우연히 지나가던 귀족 도련님에 의해 성스럽기 그지없는 장면이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으나 당사자였던 글로리아는 깔끔하게 질색할 뿐이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당황스럽다고 해야 하나?

헤레스의 외모가 출중한 것은 인정하지만, 저의 취향은 아니었다. 그는 인식하지 못한 모양이었으나 글로리아에게 이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니 처음 본 남자가 아름다움을 무기로 내세워 애정을 요해 봤자 줄 수 있을 리 없었다.

“주교, 나는 언제나 거절 의사를 표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미 결혼까지 했지요. 그대의 기회가 구혼이라면 이미 자리가 없습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제가 바라는 건 혼인처럼 형식적인 절차가 아닙니다. 그저 마음만 내어주시면, 저는 그것으로 족합니다.”

정색하는 여자와 홀로 달아오른 남자의 대화를 듣고 모든 정황을 파악한 빈센트는 인상을 찌푸렸다. 헤레스의 목소리는 외모만큼이나 매끄러웠지만 담겨 있는 내용은 껄끄러움을 넘어 추잡했다. 신의 종이라는 자가 반려가 있다고 말하는 여자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바로 그 반려인 저도 있는 자리였다.

자유를 교리를 내세우는 종교라지만, 세상에는 정도라는 것이 있었다. 기가 막혔던 빈센트가 결국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가 나올 일은 없었다.

“무례하군요.”

“……예?”

“나의 반려 앞에서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혼자서 찻잔을 들었던 글로리아는, 입에 담았던 것과 달리 한 점의 온기도 없는 목소리로 헤레스를 꾸짖었다. 두 제국이 같이 믿고 있는 비아토르교는 대륙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종교였다. 눈앞의 미남자가 그곳의 주교였기 때문에 존중의 의미로 예고도 없는 방문을 허가한 것이지만, 오늘은 도를 넘었다.

빈센트와 합의를 본 대로 감정적인 교류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저택에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애당초 몸 한번 섞어 본 적 없는 사이였다.

글로리아는 살벌하게 단언했다.

“나는 그대에게 그 어떤 기회도 줄 생각이 없습니다.”

“전하! 잠깐만……!”

“선약이 있어 움직이겠습니다. 돌아가는 길은 시종장이 안내할 겁니다.”

할 말을 마친 그녀는 다 마시지도 않은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란 모자에 달려 있던 하얀 깃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헤레스보다 글로리아한테 놀란 빈센트가 그녀와 함께 문을 나설 즈음 애타는 외침이 한 번 더 들려왔으나, 제국의 공작은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