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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슬쩍, 슬쩍 무표정한 하얀 얼굴이 드러난다. 아주 감질나게. 어디 이상한 데는 없나 점검하는 엘레나의 작은 움직임에 머리카락이 미미하게 흔들린다. 흘러내린 머리칼 사이로 드러났다가 사라지는 엘레나의 얼굴은 검푸른 머리카락과 대비되어 유독 희었다. 드라이칸은 저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핥았다.
엘레나는 나붓하게 움직이는 손끝 하나에서도 고아함이 풍기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뼛속부터 귀족인 여자. 드라이칸 역시 남들이 보기엔 멀쩡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엘레나와 같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었다. 머리가 굵어지기도 전부터 평민들의 펍 따위를 들락날락거렸던 그에게선 묘한 천박함이 감돌았다.
엘레나 저 여자가 들었다가는 다시는 상종하지 않았을 언어를 구사했던 시절도 있었다. 완전히 내쫓겠다는 부친의 성화에 정식으로 기사가 되었으나 아무래도 사교계는 취향이 아니다. 고상하게 혀를 굴리며 눈웃음을 치는 분위기 같은 것들. 왕궁 기사로서 백색 궁에 입궁하게 되었으나 천성은 여전히 여자와 술을 탐하는 시절 그대로인 거다.
‘저 여자는 왜 나랑 자는 거지.’
그녀가 자신과 같은 부류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건 엘레나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눈에 자신은 영 글러먹을 인간일 텐데.
한때의 흥미일까.
좋은 것만 먹고 자란 귀족 여자들이라고 평민 여자들과 달리 등에 날개가 달린 것도 아니라는 것도 알지만, 어쩐지 손을 뻗으면 엘레나의 가슴을 만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현실감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다.
만난 지 벌써 4년이 넘은 지금도.
마침내 이 방에 들어오기 전과 똑같은 모습이 된 엘레나가 누워 있는 드라이칸을 응시했다. 드라이칸은 너저분한 자신의 꼴과 그녀의 완벽한 차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대로 있을 건가요?”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나의 무표정한 얼굴에 슬쩍 금이 갔다. 눈치 없는 마켈라 단장이라면 알아차리지 못할 작은 변화였으나 드라이칸은 알았다. 무언가 불만이 있는 얼굴이다. 의아하게 눈썹을 올렸다.
“왜?”
“왕궁의 재화는 루지에나를 위해 사용됩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뜻은 아닌 것 같다. 슬쩍 자세를 고쳐 앉자마자 엘레나의 분홍빛 입술 사이에서 서늘한 말이 흘러나왔다.
“훈련하지 않는 기사에게 줄 녹봉은 없지요. 왕궁의 기사들에게 주어지는 급여가 적지 않다고 알고 있는데. 드라이칸 하우어 경.”
드라이칸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 이렇게 딱딱하게 부를 때마다 긴장하게 된단 말이지.
“뻔뻔하게 그 급여를 다 받아 챙기는 건 아니겠죠?”
“…….”
“귀감이 되어야 할 기사들이 나태하면, 여왕님께도 좋은 말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
“제3기사단이 뭐라고 불리는지는 관심 없어요. 하지만 그 나태함이 여왕님께 폐가 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요. 게다가…….”
“알았어, 알았다고!”
머리를 짚은 드라이칸이 이를 갈았다.
뻔뻔하다느니, 나태하다느니. 선정하는 단어 하나하나가 가슴을 쿡쿡 쑤신다. 평소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고 할 정도로 수치심을 모르는 그였지만 무표정한 얼굴로 툭툭 던지는 것은 귓구멍을 송곳처럼 쑤셔 댔다.
한 시간 쯤 낮잠을 청할 생각이었으나 그럴 마음이 싹 사라졌다.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아무렇게나 벗어 놓은 옷을 잡아챘다. 상의에 팔을 끼워 넣는 몸짓이 신경질적이었다. 엘레나는 톡, 하면 터질 것 같은 분위기에도 아랑곳 않고 드라이칸이 옷을 다 입고 나서야 다가왔다.
“또 뭐.”
검을 허리에 차며 툴툴거리자 엘레나가 한쪽 눈썹을 끌어올렸다. 입을 다물고 가만히 그녀가 하는 양을 바라보았다. 흰 손이 불쑥 목 아래로 다가왔다. 열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아 따뜻한 손끝이 목에 닿자 몸이 굳어졌다. 구겨진 옷깃을 펴는 하얀 손에 가만히 숨을 죽였다.
엘레나의 신장은 드라이칸의 어깨에 닿는 정도였다. 눈을 내리깔자 고운 이마와 깔끔하게 뻗은 눈썹이 보였다. 하려는 게 잘 되지 않는지 눈썹이 미미하게 꿈틀거린다. 엘레나는 감정적인 여자는 아니었다. 감정표현이 풍부하지 않은 것 또한 불만이었지만 이제는 익숙해졌는지, 사소한 몸짓, 눈짓만으로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입은 꼴이 못마땅한 거군.’
픽, 웃자 엘레나의 시선이 따라왔다. 왜 웃느냐는 얼굴이다. 어깨를 으쓱였다. 다시 구겨진 옷깃에 집중하는 엘레나를 찬찬히 훑었다. 조용히 쉬는 숨이 간질간질하게 목을 덥혔다. 그 많은 시녀들 사이에서도 대번에 눈치챘던 그 달콤한 향.
창으로 흘러들어 오는 햇볕의 따뜻함과 함께 드라이칸은 점점 나른해졌다. 그의 집요한 시선을 알지 못하는지 엘레나는 영 맘에 차지 않는 드라이칸의 옷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마침내 조금 봐 줄 만한 정도가 되어서야 손을 뗀 엘레나의 입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돌았다.
쿵쿵쿵.
쿠웅.
안정적으로 뛰던 심장이 한순간 꽈악 죄어들었다.
‘뭐지?’
당황한 드라이칸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잠깐 이상했던 가슴은 몇 번 호흡하는 동안 원래대로 돌아왔다. 가슴께를 두어 번 문지르며 눈을 끔벅였다.
‘이상하네.’
드라이칸의 행동을 알지 못한 엘레나가 두 걸음 물러섰다. 꽃향기와 비슷한 향도 멀어진다. 어쩐지 조바심이 나 손으로 두어 번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되도록 왕궁에선 깔끔하게 입어 줬으면 좋겠군요.”
차분하게 흘러나오는 말은 여느 때와 다를 것이 없었다.
“드라이칸?”
“……어, 그래. 명심하지.”
얌전한 학생처럼 웬일로 곧이곧대로 대꾸하는 드라이칸의 얼굴을 힐끗한 엘레나가 먼저 나가겠다며 방을 나섰다.
탁.
방문은 무정하게 닫혔다. 혼자 남은 드라이칸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가 바닥을 응시했다. 알 수가 없다. 거칠게 머리를 털었다. 갈기 같은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넣어 흔들고 나자 안 그래도 새집 같았던 머리가 더욱 엉망이 되었다. 보기 좋은 겉모습이야말로 신사의 덕목이라고 주장하는 사를로테가 혀를 찰 광경이었다. 금세 피곤한 낯이 되어 검집을 툭 친 드라이칸이 중얼거렸다.
“아무튼 귀염성 없는 여자 같으니.”
땀을 쫙 빼놓고 하는 말이 차림 지적이라니. 낭만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폴이 들었더라면 네가 낭만을 찾냐고 비웃을 생각을 하며 하릴없이 옷깃을 매만졌다. 그러는 사이 여운처럼 남았던 묘한 느낌도 서서히 옅어져갔다.
4년 전 백색 궁의 기사로 임명 받은 드라이칸은 회랑을 걷고 있었다. 백색 궁은 그 이름답게 깨끗한 흰색이 유독 눈에 띄는 곳이었다. 심지어 장식품마저도 흰색 종류인 것들이 많았다. 드라이칸은 마뜩찮은 얼굴로,
‘여긴 이상한 놈들만 사나.’
다른 기사들이 들었으면 무엄하다며 장갑을 던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랬다. 엘레나를 처음 만난 바로 그 날, 드라이칸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도저히 상종을 못하겠군!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떠오르자 자동적으로 얼굴이 구겨졌다.
─지금은 아버지가 계시지만, 내가 가문을 이어받으면 네놈부터 쫓아낼 거다.
하우어 백작 가의 후계자는 장남 에드먼드 하우어였다. 깔끔한 것에 집착하는 결벽증 환자, 라고 드라이칸은 평하고 있지만 귀족다운 고상한 태도로 사교계에서의 평판은 그다지 나쁘지 않다. 그런 그가 후계자의 입장에서 더 이상 드라이칸이 하우어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을 묵과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드라이칸은 미간을 긁적였다.
“예민하긴.”
딱히 무슨 짓을 한 건 아니다. 뭐, 이렇게 말하면 당장 부친에게서 이마로 던져지는 사기 재떨이를 받아야 할 테지만. 아무튼 고작 애송이 하나와 시비가 붙은 것이 다였다.
“하필이면 궁 앞에서 만나서는.”
잔머리 굴리는 것 하나는 잘하는 자식이니 그것도 고의일 거다. 남들 다 보는 백색 궁의 정문에서, 하우어 가문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자브르 자작 가의 귀염둥이 막내가 아니었다면 큰 문제는 아니었을 거라고 드라이칸은 저 좋을 대로 생각했다. 에드먼드가 화를 냈던 건 아침부터 자브르 자작의 강한 항의를 상대했기 때문이다. 조금 핼쑥한 듯했던 얼굴이 생각나자 드라이칸은 다소 머쓱해졌다.
“다음에 만나면 구해 줄 사람 하나 없을 거다.”
오일을 양 볼에 바르고 다녀 번지르르한 아일 자브르를 떠올리며 드라이칸이 살벌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 재빠른 자식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는 감히 시비를 걸지 못할 터였다. 그런 놈이니 상대하는 것도 성가시다. 드라이칸은 힘 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액땜이나 한 거면 좋겠군.”
아일을 만나기 전에도 가히 유쾌한 상태는 아니었다. 실은 백색 궁에 갈 채비를 할 때부터 하루의 만족도는 점점 하강하고 싶었다. 이유는 백색 궁으로 출근한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메어 있는 것은 싫다. 다른 가족들은 분에 넘치는 소리라며 코웃음을 치겠으나 내심은 그랬다. 그 들어가기 어렵다는 백색 궁의 기사가 됐음에도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어디에 소속된다는 건 그곳의 규칙을 따라야 함을 의미한다. 이제는 정말로 행동을 조심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마음에 안 드는 인간이 단장이어도 성질대로 날려 버릴 수 없을 것이고, 꼬박꼬박 훈련에도 참여해야 할 생각을 하니 당장이라도 걸음을 돌려 뛰쳐나가고 싶었다. 특히 소속된 기사단의 단장이 위계를 잡겠답시고 눈을 번뜩이던 것을 생각하자 반쯤 몸이 돌아갔다. 부친이 하도 성화인 탓에 왕궁 기사가 되기는 했으나 굳이 왕궁의 녹이 필요한가? 5년 전에 제국으로 떠났던 스승을 염두에 두자 굳이 루지에나에서 먹고 살려고 아등바등하면서까지 있을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때려치울까.’
남들은 들어가고 싶어 난리라는 백색 궁의 기사였으나 그는 자신이 왜 이곳에 있나 아주 근원적인 생각을 떠올리며 후회했다.
그가 회랑 한가운데 서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반대편에서 누가 걸어오고 있었다. 소리가 들리자 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호.’
드라이칸은 입술을 동그랗게 말았다.
이런 고루한 곳에 어울리면서도 어울리지 않는 여자였다.
마치 대리석으로 만든 차가운 조각상처럼 빈틈없는 아름다움이 시선을 끌었다. 검푸른 머리카락과 매끄러운 하늘빛 눈동자, 우유를 입힌 것처럼 하얀 피부. 백색 궁에 누구보다 잘 어울려서, 드라이칸은 방금까지 백색 궁의 꾸밈을 불평했던 것도 잊고 눈을 반짝였다. 똑같은 대리석 회랑을 걷고 있는데도 그녀는 마치 인적 드문 겨울 호숫가, 눈 덮인 바닥을 밟으며 오는 것 같았다.
휘익, 하던 가락대로 휘파람을 불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똑바로 쳐다보는 그 시선에 드라이칸은 그대로 굳은 채 눈을 깜박였다.
그녀가 바로 4년 전의, 지금보다 조금 앳되었던 엘레나 클로이트다. 새파란 애송이 기사였던 그보다 노련하고 능숙했던 여왕의 시녀. 그는 몰랐으나 엘레나는 그때도 이미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당시 드라이칸은 20살이었고, 각종 무도회에 초대되어 하우어 가의 삼남으로서 얼굴을 알리고 있었으나 사교계에 드물게 출입하는 엘레나에 대해선 아는 바가 많지 않았다. 때문에 드라이칸은 그녀의 눈에 띄는 외모를 순수하게 감탄했다.
물론 감탄만으로 끝났다면 그가 하우어 가의 한량이라고 불리지도 않았을 터였다.
슬쩍, 슬쩍 무표정한 하얀 얼굴이 드러난다. 아주 감질나게. 어디 이상한 데는 없나 점검하는 엘레나의 작은 움직임에 머리카락이 미미하게 흔들린다. 흘러내린 머리칼 사이로 드러났다가 사라지는 엘레나의 얼굴은 검푸른 머리카락과 대비되어 유독 희었다. 드라이칸은 저도 모르게 혀로 입술을 핥았다.
엘레나는 나붓하게 움직이는 손끝 하나에서도 고아함이 풍기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뼛속부터 귀족인 여자. 드라이칸 역시 남들이 보기엔 멀쩡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엘레나와 같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었다. 머리가 굵어지기도 전부터 평민들의 펍 따위를 들락날락거렸던 그에게선 묘한 천박함이 감돌았다.
엘레나 저 여자가 들었다가는 다시는 상종하지 않았을 언어를 구사했던 시절도 있었다. 완전히 내쫓겠다는 부친의 성화에 정식으로 기사가 되었으나 아무래도 사교계는 취향이 아니다. 고상하게 혀를 굴리며 눈웃음을 치는 분위기 같은 것들. 왕궁 기사로서 백색 궁에 입궁하게 되었으나 천성은 여전히 여자와 술을 탐하는 시절 그대로인 거다.
‘저 여자는 왜 나랑 자는 거지.’
그녀가 자신과 같은 부류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건 엘레나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눈에 자신은 영 글러먹을 인간일 텐데.
한때의 흥미일까.
좋은 것만 먹고 자란 귀족 여자들이라고 평민 여자들과 달리 등에 날개가 달린 것도 아니라는 것도 알지만, 어쩐지 손을 뻗으면 엘레나의 가슴을 만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현실감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다.
만난 지 벌써 4년이 넘은 지금도.
마침내 이 방에 들어오기 전과 똑같은 모습이 된 엘레나가 누워 있는 드라이칸을 응시했다. 드라이칸은 너저분한 자신의 꼴과 그녀의 완벽한 차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대로 있을 건가요?”
고개를 끄덕였다. 엘레나의 무표정한 얼굴에 슬쩍 금이 갔다. 눈치 없는 마켈라 단장이라면 알아차리지 못할 작은 변화였으나 드라이칸은 알았다. 무언가 불만이 있는 얼굴이다. 의아하게 눈썹을 올렸다.
“왜?”
“왕궁의 재화는 루지에나를 위해 사용됩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뜻은 아닌 것 같다. 슬쩍 자세를 고쳐 앉자마자 엘레나의 분홍빛 입술 사이에서 서늘한 말이 흘러나왔다.
“훈련하지 않는 기사에게 줄 녹봉은 없지요. 왕궁의 기사들에게 주어지는 급여가 적지 않다고 알고 있는데. 드라이칸 하우어 경.”
드라이칸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 이렇게 딱딱하게 부를 때마다 긴장하게 된단 말이지.
“뻔뻔하게 그 급여를 다 받아 챙기는 건 아니겠죠?”
“…….”
“귀감이 되어야 할 기사들이 나태하면, 여왕님께도 좋은 말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
“제3기사단이 뭐라고 불리는지는 관심 없어요. 하지만 그 나태함이 여왕님께 폐가 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요. 게다가…….”
“알았어, 알았다고!”
머리를 짚은 드라이칸이 이를 갈았다.
뻔뻔하다느니, 나태하다느니. 선정하는 단어 하나하나가 가슴을 쿡쿡 쑤신다. 평소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고 할 정도로 수치심을 모르는 그였지만 무표정한 얼굴로 툭툭 던지는 것은 귓구멍을 송곳처럼 쑤셔 댔다.
한 시간 쯤 낮잠을 청할 생각이었으나 그럴 마음이 싹 사라졌다.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아무렇게나 벗어 놓은 옷을 잡아챘다. 상의에 팔을 끼워 넣는 몸짓이 신경질적이었다. 엘레나는 톡, 하면 터질 것 같은 분위기에도 아랑곳 않고 드라이칸이 옷을 다 입고 나서야 다가왔다.
“또 뭐.”
검을 허리에 차며 툴툴거리자 엘레나가 한쪽 눈썹을 끌어올렸다. 입을 다물고 가만히 그녀가 하는 양을 바라보았다. 흰 손이 불쑥 목 아래로 다가왔다. 열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아 따뜻한 손끝이 목에 닿자 몸이 굳어졌다. 구겨진 옷깃을 펴는 하얀 손에 가만히 숨을 죽였다.
엘레나의 신장은 드라이칸의 어깨에 닿는 정도였다. 눈을 내리깔자 고운 이마와 깔끔하게 뻗은 눈썹이 보였다. 하려는 게 잘 되지 않는지 눈썹이 미미하게 꿈틀거린다. 엘레나는 감정적인 여자는 아니었다. 감정표현이 풍부하지 않은 것 또한 불만이었지만 이제는 익숙해졌는지, 사소한 몸짓, 눈짓만으로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입은 꼴이 못마땅한 거군.’
픽, 웃자 엘레나의 시선이 따라왔다. 왜 웃느냐는 얼굴이다. 어깨를 으쓱였다. 다시 구겨진 옷깃에 집중하는 엘레나를 찬찬히 훑었다. 조용히 쉬는 숨이 간질간질하게 목을 덥혔다. 그 많은 시녀들 사이에서도 대번에 눈치챘던 그 달콤한 향.
창으로 흘러들어 오는 햇볕의 따뜻함과 함께 드라이칸은 점점 나른해졌다. 그의 집요한 시선을 알지 못하는지 엘레나는 영 맘에 차지 않는 드라이칸의 옷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마침내 조금 봐 줄 만한 정도가 되어서야 손을 뗀 엘레나의 입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돌았다.
쿵쿵쿵.
쿠웅.
안정적으로 뛰던 심장이 한순간 꽈악 죄어들었다.
‘뭐지?’
당황한 드라이칸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잠깐 이상했던 가슴은 몇 번 호흡하는 동안 원래대로 돌아왔다. 가슴께를 두어 번 문지르며 눈을 끔벅였다.
‘이상하네.’
드라이칸의 행동을 알지 못한 엘레나가 두 걸음 물러섰다. 꽃향기와 비슷한 향도 멀어진다. 어쩐지 조바심이 나 손으로 두어 번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되도록 왕궁에선 깔끔하게 입어 줬으면 좋겠군요.”
차분하게 흘러나오는 말은 여느 때와 다를 것이 없었다.
“드라이칸?”
“……어, 그래. 명심하지.”
얌전한 학생처럼 웬일로 곧이곧대로 대꾸하는 드라이칸의 얼굴을 힐끗한 엘레나가 먼저 나가겠다며 방을 나섰다.
탁.
방문은 무정하게 닫혔다. 혼자 남은 드라이칸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가 바닥을 응시했다. 알 수가 없다. 거칠게 머리를 털었다. 갈기 같은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넣어 흔들고 나자 안 그래도 새집 같았던 머리가 더욱 엉망이 되었다. 보기 좋은 겉모습이야말로 신사의 덕목이라고 주장하는 사를로테가 혀를 찰 광경이었다. 금세 피곤한 낯이 되어 검집을 툭 친 드라이칸이 중얼거렸다.
“아무튼 귀염성 없는 여자 같으니.”
땀을 쫙 빼놓고 하는 말이 차림 지적이라니. 낭만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폴이 들었더라면 네가 낭만을 찾냐고 비웃을 생각을 하며 하릴없이 옷깃을 매만졌다. 그러는 사이 여운처럼 남았던 묘한 느낌도 서서히 옅어져갔다.
4년 전 백색 궁의 기사로 임명 받은 드라이칸은 회랑을 걷고 있었다. 백색 궁은 그 이름답게 깨끗한 흰색이 유독 눈에 띄는 곳이었다. 심지어 장식품마저도 흰색 종류인 것들이 많았다. 드라이칸은 마뜩찮은 얼굴로,
‘여긴 이상한 놈들만 사나.’
다른 기사들이 들었으면 무엄하다며 장갑을 던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랬다. 엘레나를 처음 만난 바로 그 날, 드라이칸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도저히 상종을 못하겠군!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떠오르자 자동적으로 얼굴이 구겨졌다.
─지금은 아버지가 계시지만, 내가 가문을 이어받으면 네놈부터 쫓아낼 거다.
하우어 백작 가의 후계자는 장남 에드먼드 하우어였다. 깔끔한 것에 집착하는 결벽증 환자, 라고 드라이칸은 평하고 있지만 귀족다운 고상한 태도로 사교계에서의 평판은 그다지 나쁘지 않다. 그런 그가 후계자의 입장에서 더 이상 드라이칸이 하우어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을 묵과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드라이칸은 미간을 긁적였다.
“예민하긴.”
딱히 무슨 짓을 한 건 아니다. 뭐, 이렇게 말하면 당장 부친에게서 이마로 던져지는 사기 재떨이를 받아야 할 테지만. 아무튼 고작 애송이 하나와 시비가 붙은 것이 다였다.
“하필이면 궁 앞에서 만나서는.”
잔머리 굴리는 것 하나는 잘하는 자식이니 그것도 고의일 거다. 남들 다 보는 백색 궁의 정문에서, 하우어 가문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자브르 자작 가의 귀염둥이 막내가 아니었다면 큰 문제는 아니었을 거라고 드라이칸은 저 좋을 대로 생각했다. 에드먼드가 화를 냈던 건 아침부터 자브르 자작의 강한 항의를 상대했기 때문이다. 조금 핼쑥한 듯했던 얼굴이 생각나자 드라이칸은 다소 머쓱해졌다.
“다음에 만나면 구해 줄 사람 하나 없을 거다.”
오일을 양 볼에 바르고 다녀 번지르르한 아일 자브르를 떠올리며 드라이칸이 살벌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 재빠른 자식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는 감히 시비를 걸지 못할 터였다. 그런 놈이니 상대하는 것도 성가시다. 드라이칸은 힘 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액땜이나 한 거면 좋겠군.”
아일을 만나기 전에도 가히 유쾌한 상태는 아니었다. 실은 백색 궁에 갈 채비를 할 때부터 하루의 만족도는 점점 하강하고 싶었다. 이유는 백색 궁으로 출근한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메어 있는 것은 싫다. 다른 가족들은 분에 넘치는 소리라며 코웃음을 치겠으나 내심은 그랬다. 그 들어가기 어렵다는 백색 궁의 기사가 됐음에도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어디에 소속된다는 건 그곳의 규칙을 따라야 함을 의미한다. 이제는 정말로 행동을 조심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마음에 안 드는 인간이 단장이어도 성질대로 날려 버릴 수 없을 것이고, 꼬박꼬박 훈련에도 참여해야 할 생각을 하니 당장이라도 걸음을 돌려 뛰쳐나가고 싶었다. 특히 소속된 기사단의 단장이 위계를 잡겠답시고 눈을 번뜩이던 것을 생각하자 반쯤 몸이 돌아갔다. 부친이 하도 성화인 탓에 왕궁 기사가 되기는 했으나 굳이 왕궁의 녹이 필요한가? 5년 전에 제국으로 떠났던 스승을 염두에 두자 굳이 루지에나에서 먹고 살려고 아등바등하면서까지 있을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때려치울까.’
남들은 들어가고 싶어 난리라는 백색 궁의 기사였으나 그는 자신이 왜 이곳에 있나 아주 근원적인 생각을 떠올리며 후회했다.
그가 회랑 한가운데 서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반대편에서 누가 걸어오고 있었다. 소리가 들리자 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호.’
드라이칸은 입술을 동그랗게 말았다.
이런 고루한 곳에 어울리면서도 어울리지 않는 여자였다.
마치 대리석으로 만든 차가운 조각상처럼 빈틈없는 아름다움이 시선을 끌었다. 검푸른 머리카락과 매끄러운 하늘빛 눈동자, 우유를 입힌 것처럼 하얀 피부. 백색 궁에 누구보다 잘 어울려서, 드라이칸은 방금까지 백색 궁의 꾸밈을 불평했던 것도 잊고 눈을 반짝였다. 똑같은 대리석 회랑을 걷고 있는데도 그녀는 마치 인적 드문 겨울 호숫가, 눈 덮인 바닥을 밟으며 오는 것 같았다.
휘익, 하던 가락대로 휘파람을 불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똑바로 쳐다보는 그 시선에 드라이칸은 그대로 굳은 채 눈을 깜박였다.
그녀가 바로 4년 전의, 지금보다 조금 앳되었던 엘레나 클로이트다. 새파란 애송이 기사였던 그보다 노련하고 능숙했던 여왕의 시녀. 그는 몰랐으나 엘레나는 그때도 이미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당시 드라이칸은 20살이었고, 각종 무도회에 초대되어 하우어 가의 삼남으로서 얼굴을 알리고 있었으나 사교계에 드물게 출입하는 엘레나에 대해선 아는 바가 많지 않았다. 때문에 드라이칸은 그녀의 눈에 띄는 외모를 순수하게 감탄했다.
물론 감탄만으로 끝났다면 그가 하우어 가의 한량이라고 불리지도 않았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