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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
툭, 하고 펜 하나가 책상 위에서 굴러떨어졌다. 너저분하게 쌓여 있는 것들을 제 기준에 맞게 분류해 차곡차곡 짐을 챙기는 이에겐 그 소음이 차마 귓가로 닿지 않았다.
때문에 우연히 곁을 지나던 다른 이가 바닥에 외로이 자리한 그것을 들어 어깨를 툭, 치며 시야에 온전히 보이도록 내밀었다. 그제야 분주하게 움직이던 양팔이 멈추고 내리깐 시선이 펜으로 가닿았다.
“아. 고마워.”
차분하게 빚은 피부, 유난히 새까만 눈동자와 머리칼, 같은 남자임에도 조금은 고개를 들어서 올려다보아야 하는 기다란 키, 게다가 특유의 낮고 고요한 목소리는 항상 생각해 왔지만 그가 가진 성정과 퍽 잘 어울렸다.
떨어진 펜을 건네받기 위해 목소리의 주인이 별 감흥 없이 손을 뻗자 그의 손에 곧바로 건네주진 않은 채 펜을 이리저리 돌려 유심히 한번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왼쪽으로 고개를 갸우뚱 비스듬히 기울였다.
“네 거 맞아?”
“어.”
조금은 퉁명스럽게 떨어지는 그 대답에 기울어진 고개는 좀 더 각도를 낮추었다. 믿을 수 없어 반문하는 눈동자가 잠시였지만 제법 확장되어 있기도 했다.
“이게?”
목소리 또한 반문하는 눈처럼 높아졌다.
“어.”
“와, 너 이런 거 쓰는 거 나 한 번도 못 봤던 것 같은데.”
두 부리를 부산스럽게 떨어 대며 제법 귀여운 소리를 내는, 웬만한 사람은 죄다 아는 그 유명한 오리 캐릭터의 머리가 큼지막하게 달려 있는 펜을 들고 대뜸 진실 공방이 벌어졌다.
“굳이 쓸 일이 없어서.”
“응? 쓸 거 아니면 왜 샀어?”
직접 산 건가, 아니면 주문? 뭐가 됐든 저 얼굴로 이런 걸 골랐다고 하니 그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받은 거야.”
“오, 선물. 누구한테?”
까짓 캐릭터 펜 하나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궁금증을 자극할 수가 있을까. 하지만 주워 준 이의 입장에선 충분히 궁금했다. 그야 너무 어울리지 않고 또 어울리지 않으니까.
“후우, 그냥 얼른 내놔.”
펜이 인질이라도 되는 것처럼 잡고 놔주지 않기에 하는 수 없이 휙 손에서 빼앗아 들었다. 그러고는 텅 비어 있는 가죽 필통을 꺼내 달랑 그것만 집어넣고 지퍼를 닫았다.
“뭐야, 괜히 궁금하게끔.”
“신경 꺼.”
그렇게 말을 마치곤 다시금 이것저것 챙겨 넣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그에 지나던 이가 이번엔 아예 바퀴 달린 의자를 끌고 마땅한 장소를 찾아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펜에 대해 계속 설전을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다만, 이참에 궁금했던 걸 묻고자 함이었다.
혼자서 적당히 의자를 두드리며 손장난을 치다가 기회를 엿보았다. 박스 하나를 채우고 뚜껑을 닿는 그때 불쑥 목소리를 들이밀었다.
“야, 심닥.”
“왜.”
“진짜 이렇게 가는 거야, 너?”
“어.”
“마음의 결정에 조금의 변화도 없는 거고?”
“어.”
채워진 박스를 내려다 두고 새로운 박스의 뚜껑을 열었다. 책장으로 옮겨 간 그의 손이 다시 분주해졌지만 궁금증이 풀리지 않은 이는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의자를 빙그르르 돌려 그가 있는 곳으로 집요하게 시선을 던졌다.
“아니, 대체 왜? 왜 여기를 마다하고 대뜸 한국으로 들어간다는 거야?”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더니.
“어차피 프로그램 마치면 바로 가려고 했어.”
“그러니까 왜. 처우도 여기가 훨씬 좋고, 길 짱짱하게 닦이기도 여기 만한 곳이 어디 있냐고. 안 그래도 아시아계 의사 없어서 외로운데 너까지 떠나면 어떡하느냐고, 나는.”
“결국 너 외로운 게 아쉬워서 그래?”
“에이, 그냥 덧붙이자면 그렇다는 거고. 이것저것 다 따져 봤을 때 네 선택이 이해가 안 돼서 그러지.”
그는 정말이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였다. 그러고는 아직 할 말을 마치지 않아 문장을 덧붙여 왔다.
“아, 너 간다고 하는 병원 이름이 뭐였더라……. 내가 아는 곳은 아니었는데.”
“도경.”
“어, 그래. 도경병원. 아니, 너 모셔 가려고 여기저기서 안달 났다고 하던데 왜 그런 곳을 가. 이왕 한국 들어가는 거 대우받을 거 다 받고 가야지.”
“은사님이 거기 원장님으로 계셔. NS 필요하다고 마침 연락도 받았고, 또.”
“또?”
짐 포장을 위해 쉼 없이 움직이던 손이 잠시 멎었다.
“……모든 이유인 사람이 거기에 있어.”
너무 늦지만 않았다면 참 좋을 것 같은데.
“모든 이유인 사람?”
“바쁘니까 도와줄 거 아니면 이만 물러나.”
더 이상의 대화가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했다. 듣던 이가 못내 아쉬운 듯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어차피 제 알 바가 아니었다.
“후우.”
조금이라도 일찍 결정을 하지 못한 게 이제야 후회스러웠다. 미련을 떠는 성격도 아니면서 그간 무엇을 이리도 망설였는지. 차곡차곡 쌓여 있는 박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로 느릿하게 절레절레 저었다.
짐 정리를 다 마친 후 조금 숨을 돌렸다. 어느새 져 버린 해 때문에 창밖은 땅거미가 내려앉은 채였다. 고단하기도 하고 배가 고프기도 하고 조금 지치기도 했다. 매 끼니를 잘 챙기는 편은 아닌지라 배가 고파도 그저 그러려니, 하면서 지나가기가 일쑤였다. 음식은 맛을 위해서보다는 그저 주린 배를 채우는 정도로만 생각했고 주린 배를 채우는 정도도 사실 때에 맞춰 잘 이뤄지진 않았다. 그럴 때면 목소리 하나가 어김없이 제 귓가를 때렸다.
‘또 밥 안 먹었지? 할 공부도 많고,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먹는 거라도 제때 잘 먹어야지. 간단하게라도, 응?’
약속을 정해 놓지 않고 불쑥 나타나는 것을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불쑥불쑥 나타나는 걸 이기지 못했다. 대놓고 달갑지 않다는 티를 내도 날아든 목소리의 주인은 생글생글 웃기만 할 뿐 덩달아 시무룩한 표정을 짓진 않았던 것 같다.
‘그냥 유부초밥이야. 한 입 거리로 간편하게 먹을 수 있게.’
내밀어졌던 도시락. 어디 가서 사 온 것도 아니고 직접 만들어 온 것이었다. 우물우물 먹으면서 맛있다, 한마디를 하지 않았어도 그녀는 그저 제가 그것을 다 비워 내는 것만으로 족하는 듯 빈 도시락이 될 때까지 옆을 지켰었다.
“…….”
딱히 그녀의 손맛이 그리운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음식에 소질이 없었단 말은 아니었고. 다만, 그러한 챙김이 곳곳에 남아 이따금씩 저를 괴롭혀 댔다. 하루 중 언제든지 배가 고프고 끼니때를 놓치면 그때마다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하아.”
의식하지 않아도 이렇게 스며들어 있다는 것. 제가 차마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 너무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저를 지배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보고 싶다.”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색이 바랜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을 들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게 대체 어떤 감정인지 정의를 내릴 수가 없었다. 누군가를 열렬히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하는 이 느낌이 왜 드는 것인지 어째서 이렇게 됐는지 저로서는 생소해 단번에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웃고 있는 모습. 이 얼굴이 여태 아른거려 딱 미칠 지경이었다.
기나긴 추위가 언제였냐는 듯 얼었던 대지에 파릇파릇 새순이 돋아났다. 날을 세워 매섭게 몰아치던 칼바람도 어느새 미온을 가진 부드러운 바람으로 바뀌고, 햇살은 나뭇가지 사이사이 파스텔 빛으로 부서졌다.
그래, 바야흐로 만물이 깨어나는 봄이 되었다.
아, 좋다.
온몸을 나른하게 감아 오는 따뜻한 온도를 기분 좋게 느끼며 분홍빛 옷을 입고 양쪽으로 줄을 지어 늘어서 있는 벚꽃나무 길을 걷는 건 이때여야 만끽할 수 있다.
살랑살랑 간지러운 기분에 심장도 울렁울렁 바운스를 시작한다.
으흠, 으흠, 으흐흐으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들을 보고 있자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는 듯하다.
아, 자전거라도 하나 타고 있었으면 이 좋은 봄날의 오후를 조금 더 드라마틱하게 누릴 수 있었을 텐데.
“탈래? 이거 2인용인데.”
어쩜. 누군가 제 마음의 소리를 읽었나 보다. 뒤에서 들려오는 웬 왕자님의 목소리에 양 볼이 붉어졌다.
이런 낭만적인 야타족 같으니라고.
때마침 넘실넘실 불어오는 바람에 비단결 같은 머리칼이 수줍게 휘날린다. 그렇다면 살짝 귀 뒤로 머리칼을 넘기고 시선은 잠시 땅을 보았다가 천천히 들어 올리며 조금은 놀란 눈으로,
“어머, 저요?”
라며 이 봄날의 썸을 좀 누려 보려고 했건만.
“……?”
깜빡깜빡 두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재차 뜨고 감고를 반복했다.
“왜 대답이 없어?”
“너는 시, 심…….”
“반갑다, 정애정. 오랜만이네, 그치?”
반갑긴 개뿔.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나의 낭만적인 야타족 왕자님은 어디로 사라져 버리고!
“뭐…… 뭐지?”
분홍으로 아름답게 날리던 벚꽃길이 갑자기 모래바람이 부는 황량한 사막길로 바뀐다.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몽글몽글했던 기분은 어느새 서늘해지고 발이 푹, 푹 원하지 않게 자꾸만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는다.
왜 이래,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안 돼, 안 돼. 이게 뭐야. 어? 이게 뭐냐고. 안 돼,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안 돼에에에!”
탁. 덮고 있던 이불을 힘차게 걷어차고 튕겨 나듯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꿈속의 상황이 긴박한 일이었음을 온몸으로 느끼듯 가슴이 불안정하게 오르내렸다. 꿀꺽 침을 삼키고 탁상 위에 둔 시계로 시선을 옮겼다.
현재 시각 오전 6시 47분. 헤어진 전 남자 친구 꿈을 꾸다 깨어났다. 그것도 4년 만에 처음으로. 이게 대체 무슨 의미일까.
이름, 정애정. 나이, 서른둘. 직업, 도경병원 홍보마케팅 팀에서 대리로 근무 중. 꿈, 없음. 포부도 없음. 남자 친구? 없. 음. 하루, 하루를 그저 그런 보통날로 연명 중이지만 딱히 근심도 없고 불만도 없다.
그래, 정말 그랬었는데.
[헤어진 전 남친 꿈], [전 남친 꿈 악몽], [헤어졌던 남자가 꿈에 나왔어요.], [몇 년 만에 전 남친 꿈]
꿈보다는 해몽이라고 했던가. 애정은 드라이어로 머리칼을 말리다 말고 비슷한 맥락으로 폭풍 검색을 시작했다.
[헤어진 남자 친구가 잠깐 그리우셨던 건 아닌가요?]
“그립다고? 내가? 설마. 아니, 전혀. 이건 아냐.”
[현재 교제하고 있는 애인이 다른 이성에게 유혹당할 수도 있어요.]
“저기요, 현재 교제하고 있는 애인이 있어야 말이죠. 후우, 이것도 아냐.”
[현재 사랑받지 못하거나 애정 결핍을 느끼는 상태인가요.]
“나, 참. 그런 거 아니거든?”
[굉장히 고독하고 외로운 무의식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글쎄, 다 아니라고. 뭐야, 해몽들이 죄 엉터리잖아.”
구구절절 나열되어 있는 글들 중에 어째 마음에 차는 게 하나도 없다. 해몽도 부러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서 읽자니 더 그런가.
괜히 빈정만 상한 것 같아 애정은 이만 휴대폰을 뒤집었다. 그러고는 아직 물기가 가시지 않은 머리칼을 잡고 드라이어를 다시금 켰다. 귓가에 가까워질수록 시끄러워졌지만 어째 그게 큰 소음으로 와닿진 않았다.
그놈의 꿈이 뭐라고. 깨어난 순간부터 자꾸만 제 머릿속을 복잡하게 뛰어다니니 아주 아침부터 정신이 없다.
이만 출근 준비를 마치고 전신 거울을 보며 매무시를 정돈했다. 머리칼이 이리저리 찰랑거릴 정도로 고개를 가로로 휘젓곤 가방을 다부지게도 잡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고왔던 미간이 신경 쓰이는 일로 인해 금세 구겨졌다.
“하필 꿈을 꿔도 그 자식 꿈을 꿔 가지고.”
예상에도 없던 거대한 폭풍우를 맞이한 느낌이랄까.
‘반갑다, 정애정. 오랜만이네, 그치?’
“하나도 안 반가워, 심도훈 정말. 하나도.”
고국의 향기나 분위기라는 게 따로 있을까. 몇 년 만에 찾은 한국이지만 제일 먼저 저를 맞이한 번잡하고 사람 많은 공항은 피로만 가중시킬 뿐 멈춰서 잡다한 감상이나 늘어놓을 환경이 못 됐다.
“후우.”
때문에 컨베이어 벨트에서 짐을 찾아 카트에 하나, 둘 옮겨 담고는 어느 곳 하나 두리번거리지 않고 도훈은 공항을 벗어나기에 급급했다.
밖으로 나서 택시 승강장에서 택시를 잡아 짐을 옮겨 싣고 목적지를 말한 후에야 차창을 내려 한국의 하늘을 흘긋 올려다보았다.
차도를 씽씽 달림에도 볼에 부딪치는 바람이 살을 에일 만큼 춥지도, 그렇다고 영 따뜻하지도 않은 어느 중간 즈음, 한국의 초봄이 이제야 제법 오랜만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난 말이야, 봄이 제일 좋아. 분홍색 계절이잖아.’
피지도 않은 벚나무의 파릇파릇한 새순을 보고 있자니 문득 생각나는 목소리. 도훈은 아예 차창에 팔을 괴고 스치는 풍경들을 눈에 담기 시작했다.
‘벚꽃은 밤에 봐도 예뻐. 한 철인 게 아쉬울 정도로.’
글쎄. 둘이 함께 낮에 벚꽃을 본 적이 있었던가. 그래서 넌 항상 밤에 봐도 예쁘다고 했었나 보다. 이제 와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 한 철도 매년마다 함께이지 않았던 것 같다.
한참이나 밖을 바라보다 이만 눈을 감았다. 뭉근한 피로감이 눈꺼풀의 무게를 무겁게 만들었지만 그보다도 언저리에 자리한 목소리를 좀 더 또렷하게 상기해 내기 위함이었다.
‘소풍 가고 싶어. 김밥이랑 이런 거 싸 들고.’
‘이것 봐. 바닥에 벌써 잎들이 다 떨어졌어. 어제 비가 내려서 더 그런 것 같아. 이제 곧 지겠지?’
그래, 곧 만개할 테고 또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지겠지. 그래도 이번엔 꼭 낮에 함께 봤음 싶은데.
Rrrr. Rrrr.
울리는 휴대전화 벨 소리가 상기시키던 목소리를 한 번에 집어삼켰다. 피곤한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재킷 안 주머니에서 전화를 꺼내어 들고 발신인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혹여 목소리가 잠기기라도 했을까 봐 큼큼 짧게 목을 가다듬었다.
“네, 원장님. 안 그래도 전화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 어. 들어와도 벌써 들어왔지 않았나 싶어서 말이야. 궁금해서 먼저 걸어 봤어.
“아, 연착 때문에 도착이 좀 늦어졌습니다.”
― 그랬구먼. 그래. 먼 길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얼른 들어가 푹 쉬고. 집은 어떻게 한다고 했지, 미리 구했다고 했던가?
“네. 바로 들어갈 것 같습니다.”
― 그럼 이번 한 주는 정리하느라 정신없겠네.
“네, 정리하는 대로 시간 정해서 곧 찾아뵙겠습니다.”
혹여 그사이 심경의 변화가 있는 건 아닐까, 싶어 떠보는 전화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의중을 확고히 한 통화는 길지 않게 마무리되었고 택시는 여전히 도로 위를 달리는 중이었다.
“…….”
이제 곧 제가 다시금 한국으로 오게 된, 그것도 도경을 선택하게 된 모든 이유인 사람이 있는 그곳으로 간다.
과연 만날 수 있을까, 너를.
“이제 봄이 오려나 보네.”
창밖으로 내민 손끝에서 느껴지는 공기의 촉각과 코끝으로 느껴지는 바람의 냄새가 사뭇 포근해져 있었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아직까지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다. 조금만 피부를 노출해도 금세 시큰해질 만큼 바람이 쌀쌀했지만 유정은 개의치 않았다. 양팔을 세워 창틀에 몸을 지탱하고 그렇게 한참은 서 있었을까, 마침 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온 다른 이가 부러 과장된 목소리를 냈다.
“야, 정 대리! 추워!”
“아, 네.”
얼마 전 지독한 독감을 앓고 병가를 낸 후로 아직까지 콧물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윤 차장이었다. 유독 잔병치레가 많은 그는 감기를 앓으면서도 또다시 꽃샘추위에 올 또 다른 감기를 걱정했다.
온갖 건강 보조제가 책상에 즐비하고 뭐가 어디에 좋다더라, 또 다른 건 어디에 좋다더라, 좋은 건 그렇게 챙겨 대면서도 항상 팀 내 건강 최약체를 못 벗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하여튼 저렇게 골골대면서 남들한테 잔소리는 엄청 해요. 이건 건강에 안 좋은 습관이네, 어쩌네, 하면서.”
애정의 옆자리에 앉은 동료가 흘끗 윤 차장 쪽을 보았다가 애정을 향해 소곤소곤한 목소리를 냈다. 그에 애정도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러게. 그런 사람이 여태 제일 많이 아파.”
“참. 자기 한국대 나왔지?”
“응.”
“이번에 새로 올 NS 한국대라던데.”
“그래?”
1.
툭, 하고 펜 하나가 책상 위에서 굴러떨어졌다. 너저분하게 쌓여 있는 것들을 제 기준에 맞게 분류해 차곡차곡 짐을 챙기는 이에겐 그 소음이 차마 귓가로 닿지 않았다.
때문에 우연히 곁을 지나던 다른 이가 바닥에 외로이 자리한 그것을 들어 어깨를 툭, 치며 시야에 온전히 보이도록 내밀었다. 그제야 분주하게 움직이던 양팔이 멈추고 내리깐 시선이 펜으로 가닿았다.
“아. 고마워.”
차분하게 빚은 피부, 유난히 새까만 눈동자와 머리칼, 같은 남자임에도 조금은 고개를 들어서 올려다보아야 하는 기다란 키, 게다가 특유의 낮고 고요한 목소리는 항상 생각해 왔지만 그가 가진 성정과 퍽 잘 어울렸다.
떨어진 펜을 건네받기 위해 목소리의 주인이 별 감흥 없이 손을 뻗자 그의 손에 곧바로 건네주진 않은 채 펜을 이리저리 돌려 유심히 한번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왼쪽으로 고개를 갸우뚱 비스듬히 기울였다.
“네 거 맞아?”
“어.”
조금은 퉁명스럽게 떨어지는 그 대답에 기울어진 고개는 좀 더 각도를 낮추었다. 믿을 수 없어 반문하는 눈동자가 잠시였지만 제법 확장되어 있기도 했다.
“이게?”
목소리 또한 반문하는 눈처럼 높아졌다.
“어.”
“와, 너 이런 거 쓰는 거 나 한 번도 못 봤던 것 같은데.”
두 부리를 부산스럽게 떨어 대며 제법 귀여운 소리를 내는, 웬만한 사람은 죄다 아는 그 유명한 오리 캐릭터의 머리가 큼지막하게 달려 있는 펜을 들고 대뜸 진실 공방이 벌어졌다.
“굳이 쓸 일이 없어서.”
“응? 쓸 거 아니면 왜 샀어?”
직접 산 건가, 아니면 주문? 뭐가 됐든 저 얼굴로 이런 걸 골랐다고 하니 그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받은 거야.”
“오, 선물. 누구한테?”
까짓 캐릭터 펜 하나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궁금증을 자극할 수가 있을까. 하지만 주워 준 이의 입장에선 충분히 궁금했다. 그야 너무 어울리지 않고 또 어울리지 않으니까.
“후우, 그냥 얼른 내놔.”
펜이 인질이라도 되는 것처럼 잡고 놔주지 않기에 하는 수 없이 휙 손에서 빼앗아 들었다. 그러고는 텅 비어 있는 가죽 필통을 꺼내 달랑 그것만 집어넣고 지퍼를 닫았다.
“뭐야, 괜히 궁금하게끔.”
“신경 꺼.”
그렇게 말을 마치곤 다시금 이것저것 챙겨 넣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그에 지나던 이가 이번엔 아예 바퀴 달린 의자를 끌고 마땅한 장소를 찾아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펜에 대해 계속 설전을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다만, 이참에 궁금했던 걸 묻고자 함이었다.
혼자서 적당히 의자를 두드리며 손장난을 치다가 기회를 엿보았다. 박스 하나를 채우고 뚜껑을 닿는 그때 불쑥 목소리를 들이밀었다.
“야, 심닥.”
“왜.”
“진짜 이렇게 가는 거야, 너?”
“어.”
“마음의 결정에 조금의 변화도 없는 거고?”
“어.”
채워진 박스를 내려다 두고 새로운 박스의 뚜껑을 열었다. 책장으로 옮겨 간 그의 손이 다시 분주해졌지만 궁금증이 풀리지 않은 이는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의자를 빙그르르 돌려 그가 있는 곳으로 집요하게 시선을 던졌다.
“아니, 대체 왜? 왜 여기를 마다하고 대뜸 한국으로 들어간다는 거야?”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더니.
“어차피 프로그램 마치면 바로 가려고 했어.”
“그러니까 왜. 처우도 여기가 훨씬 좋고, 길 짱짱하게 닦이기도 여기 만한 곳이 어디 있냐고. 안 그래도 아시아계 의사 없어서 외로운데 너까지 떠나면 어떡하느냐고, 나는.”
“결국 너 외로운 게 아쉬워서 그래?”
“에이, 그냥 덧붙이자면 그렇다는 거고. 이것저것 다 따져 봤을 때 네 선택이 이해가 안 돼서 그러지.”
그는 정말이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였다. 그러고는 아직 할 말을 마치지 않아 문장을 덧붙여 왔다.
“아, 너 간다고 하는 병원 이름이 뭐였더라……. 내가 아는 곳은 아니었는데.”
“도경.”
“어, 그래. 도경병원. 아니, 너 모셔 가려고 여기저기서 안달 났다고 하던데 왜 그런 곳을 가. 이왕 한국 들어가는 거 대우받을 거 다 받고 가야지.”
“은사님이 거기 원장님으로 계셔. NS 필요하다고 마침 연락도 받았고, 또.”
“또?”
짐 포장을 위해 쉼 없이 움직이던 손이 잠시 멎었다.
“……모든 이유인 사람이 거기에 있어.”
너무 늦지만 않았다면 참 좋을 것 같은데.
“모든 이유인 사람?”
“바쁘니까 도와줄 거 아니면 이만 물러나.”
더 이상의 대화가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했다. 듣던 이가 못내 아쉬운 듯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어차피 제 알 바가 아니었다.
“후우.”
조금이라도 일찍 결정을 하지 못한 게 이제야 후회스러웠다. 미련을 떠는 성격도 아니면서 그간 무엇을 이리도 망설였는지. 차곡차곡 쌓여 있는 박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로 느릿하게 절레절레 저었다.
짐 정리를 다 마친 후 조금 숨을 돌렸다. 어느새 져 버린 해 때문에 창밖은 땅거미가 내려앉은 채였다. 고단하기도 하고 배가 고프기도 하고 조금 지치기도 했다. 매 끼니를 잘 챙기는 편은 아닌지라 배가 고파도 그저 그러려니, 하면서 지나가기가 일쑤였다. 음식은 맛을 위해서보다는 그저 주린 배를 채우는 정도로만 생각했고 주린 배를 채우는 정도도 사실 때에 맞춰 잘 이뤄지진 않았다. 그럴 때면 목소리 하나가 어김없이 제 귓가를 때렸다.
‘또 밥 안 먹었지? 할 공부도 많고,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먹는 거라도 제때 잘 먹어야지. 간단하게라도, 응?’
약속을 정해 놓지 않고 불쑥 나타나는 것을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불쑥불쑥 나타나는 걸 이기지 못했다. 대놓고 달갑지 않다는 티를 내도 날아든 목소리의 주인은 생글생글 웃기만 할 뿐 덩달아 시무룩한 표정을 짓진 않았던 것 같다.
‘그냥 유부초밥이야. 한 입 거리로 간편하게 먹을 수 있게.’
내밀어졌던 도시락. 어디 가서 사 온 것도 아니고 직접 만들어 온 것이었다. 우물우물 먹으면서 맛있다, 한마디를 하지 않았어도 그녀는 그저 제가 그것을 다 비워 내는 것만으로 족하는 듯 빈 도시락이 될 때까지 옆을 지켰었다.
“…….”
딱히 그녀의 손맛이 그리운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음식에 소질이 없었단 말은 아니었고. 다만, 그러한 챙김이 곳곳에 남아 이따금씩 저를 괴롭혀 댔다. 하루 중 언제든지 배가 고프고 끼니때를 놓치면 그때마다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하아.”
의식하지 않아도 이렇게 스며들어 있다는 것. 제가 차마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 너무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저를 지배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보고 싶다.”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색이 바랜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을 들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게 대체 어떤 감정인지 정의를 내릴 수가 없었다. 누군가를 열렬히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하는 이 느낌이 왜 드는 것인지 어째서 이렇게 됐는지 저로서는 생소해 단번에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웃고 있는 모습. 이 얼굴이 여태 아른거려 딱 미칠 지경이었다.
기나긴 추위가 언제였냐는 듯 얼었던 대지에 파릇파릇 새순이 돋아났다. 날을 세워 매섭게 몰아치던 칼바람도 어느새 미온을 가진 부드러운 바람으로 바뀌고, 햇살은 나뭇가지 사이사이 파스텔 빛으로 부서졌다.
그래, 바야흐로 만물이 깨어나는 봄이 되었다.
아, 좋다.
온몸을 나른하게 감아 오는 따뜻한 온도를 기분 좋게 느끼며 분홍빛 옷을 입고 양쪽으로 줄을 지어 늘어서 있는 벚꽃나무 길을 걷는 건 이때여야 만끽할 수 있다.
살랑살랑 간지러운 기분에 심장도 울렁울렁 바운스를 시작한다.
으흠, 으흠, 으흐흐으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들을 보고 있자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는 듯하다.
아, 자전거라도 하나 타고 있었으면 이 좋은 봄날의 오후를 조금 더 드라마틱하게 누릴 수 있었을 텐데.
“탈래? 이거 2인용인데.”
어쩜. 누군가 제 마음의 소리를 읽었나 보다. 뒤에서 들려오는 웬 왕자님의 목소리에 양 볼이 붉어졌다.
이런 낭만적인 야타족 같으니라고.
때마침 넘실넘실 불어오는 바람에 비단결 같은 머리칼이 수줍게 휘날린다. 그렇다면 살짝 귀 뒤로 머리칼을 넘기고 시선은 잠시 땅을 보았다가 천천히 들어 올리며 조금은 놀란 눈으로,
“어머, 저요?”
라며 이 봄날의 썸을 좀 누려 보려고 했건만.
“……?”
깜빡깜빡 두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재차 뜨고 감고를 반복했다.
“왜 대답이 없어?”
“너는 시, 심…….”
“반갑다, 정애정. 오랜만이네, 그치?”
반갑긴 개뿔.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나의 낭만적인 야타족 왕자님은 어디로 사라져 버리고!
“뭐…… 뭐지?”
분홍으로 아름답게 날리던 벚꽃길이 갑자기 모래바람이 부는 황량한 사막길로 바뀐다.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몽글몽글했던 기분은 어느새 서늘해지고 발이 푹, 푹 원하지 않게 자꾸만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는다.
왜 이래,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안 돼, 안 돼. 이게 뭐야. 어? 이게 뭐냐고. 안 돼,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안 돼에에에!”
탁. 덮고 있던 이불을 힘차게 걷어차고 튕겨 나듯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꿈속의 상황이 긴박한 일이었음을 온몸으로 느끼듯 가슴이 불안정하게 오르내렸다. 꿀꺽 침을 삼키고 탁상 위에 둔 시계로 시선을 옮겼다.
현재 시각 오전 6시 47분. 헤어진 전 남자 친구 꿈을 꾸다 깨어났다. 그것도 4년 만에 처음으로. 이게 대체 무슨 의미일까.
이름, 정애정. 나이, 서른둘. 직업, 도경병원 홍보마케팅 팀에서 대리로 근무 중. 꿈, 없음. 포부도 없음. 남자 친구? 없. 음. 하루, 하루를 그저 그런 보통날로 연명 중이지만 딱히 근심도 없고 불만도 없다.
그래, 정말 그랬었는데.
[헤어진 전 남친 꿈], [전 남친 꿈 악몽], [헤어졌던 남자가 꿈에 나왔어요.], [몇 년 만에 전 남친 꿈]
꿈보다는 해몽이라고 했던가. 애정은 드라이어로 머리칼을 말리다 말고 비슷한 맥락으로 폭풍 검색을 시작했다.
[헤어진 남자 친구가 잠깐 그리우셨던 건 아닌가요?]
“그립다고? 내가? 설마. 아니, 전혀. 이건 아냐.”
[현재 교제하고 있는 애인이 다른 이성에게 유혹당할 수도 있어요.]
“저기요, 현재 교제하고 있는 애인이 있어야 말이죠. 후우, 이것도 아냐.”
[현재 사랑받지 못하거나 애정 결핍을 느끼는 상태인가요.]
“나, 참. 그런 거 아니거든?”
[굉장히 고독하고 외로운 무의식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글쎄, 다 아니라고. 뭐야, 해몽들이 죄 엉터리잖아.”
구구절절 나열되어 있는 글들 중에 어째 마음에 차는 게 하나도 없다. 해몽도 부러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서 읽자니 더 그런가.
괜히 빈정만 상한 것 같아 애정은 이만 휴대폰을 뒤집었다. 그러고는 아직 물기가 가시지 않은 머리칼을 잡고 드라이어를 다시금 켰다. 귓가에 가까워질수록 시끄러워졌지만 어째 그게 큰 소음으로 와닿진 않았다.
그놈의 꿈이 뭐라고. 깨어난 순간부터 자꾸만 제 머릿속을 복잡하게 뛰어다니니 아주 아침부터 정신이 없다.
이만 출근 준비를 마치고 전신 거울을 보며 매무시를 정돈했다. 머리칼이 이리저리 찰랑거릴 정도로 고개를 가로로 휘젓곤 가방을 다부지게도 잡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고왔던 미간이 신경 쓰이는 일로 인해 금세 구겨졌다.
“하필 꿈을 꿔도 그 자식 꿈을 꿔 가지고.”
예상에도 없던 거대한 폭풍우를 맞이한 느낌이랄까.
‘반갑다, 정애정. 오랜만이네, 그치?’
“하나도 안 반가워, 심도훈 정말. 하나도.”
고국의 향기나 분위기라는 게 따로 있을까. 몇 년 만에 찾은 한국이지만 제일 먼저 저를 맞이한 번잡하고 사람 많은 공항은 피로만 가중시킬 뿐 멈춰서 잡다한 감상이나 늘어놓을 환경이 못 됐다.
“후우.”
때문에 컨베이어 벨트에서 짐을 찾아 카트에 하나, 둘 옮겨 담고는 어느 곳 하나 두리번거리지 않고 도훈은 공항을 벗어나기에 급급했다.
밖으로 나서 택시 승강장에서 택시를 잡아 짐을 옮겨 싣고 목적지를 말한 후에야 차창을 내려 한국의 하늘을 흘긋 올려다보았다.
차도를 씽씽 달림에도 볼에 부딪치는 바람이 살을 에일 만큼 춥지도, 그렇다고 영 따뜻하지도 않은 어느 중간 즈음, 한국의 초봄이 이제야 제법 오랜만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난 말이야, 봄이 제일 좋아. 분홍색 계절이잖아.’
피지도 않은 벚나무의 파릇파릇한 새순을 보고 있자니 문득 생각나는 목소리. 도훈은 아예 차창에 팔을 괴고 스치는 풍경들을 눈에 담기 시작했다.
‘벚꽃은 밤에 봐도 예뻐. 한 철인 게 아쉬울 정도로.’
글쎄. 둘이 함께 낮에 벚꽃을 본 적이 있었던가. 그래서 넌 항상 밤에 봐도 예쁘다고 했었나 보다. 이제 와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 한 철도 매년마다 함께이지 않았던 것 같다.
한참이나 밖을 바라보다 이만 눈을 감았다. 뭉근한 피로감이 눈꺼풀의 무게를 무겁게 만들었지만 그보다도 언저리에 자리한 목소리를 좀 더 또렷하게 상기해 내기 위함이었다.
‘소풍 가고 싶어. 김밥이랑 이런 거 싸 들고.’
‘이것 봐. 바닥에 벌써 잎들이 다 떨어졌어. 어제 비가 내려서 더 그런 것 같아. 이제 곧 지겠지?’
그래, 곧 만개할 테고 또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지겠지. 그래도 이번엔 꼭 낮에 함께 봤음 싶은데.
Rrrr. Rrrr.
울리는 휴대전화 벨 소리가 상기시키던 목소리를 한 번에 집어삼켰다. 피곤한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재킷 안 주머니에서 전화를 꺼내어 들고 발신인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혹여 목소리가 잠기기라도 했을까 봐 큼큼 짧게 목을 가다듬었다.
“네, 원장님. 안 그래도 전화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 어. 들어와도 벌써 들어왔지 않았나 싶어서 말이야. 궁금해서 먼저 걸어 봤어.
“아, 연착 때문에 도착이 좀 늦어졌습니다.”
― 그랬구먼. 그래. 먼 길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얼른 들어가 푹 쉬고. 집은 어떻게 한다고 했지, 미리 구했다고 했던가?
“네. 바로 들어갈 것 같습니다.”
― 그럼 이번 한 주는 정리하느라 정신없겠네.
“네, 정리하는 대로 시간 정해서 곧 찾아뵙겠습니다.”
혹여 그사이 심경의 변화가 있는 건 아닐까, 싶어 떠보는 전화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의중을 확고히 한 통화는 길지 않게 마무리되었고 택시는 여전히 도로 위를 달리는 중이었다.
“…….”
이제 곧 제가 다시금 한국으로 오게 된, 그것도 도경을 선택하게 된 모든 이유인 사람이 있는 그곳으로 간다.
과연 만날 수 있을까, 너를.
“이제 봄이 오려나 보네.”
창밖으로 내민 손끝에서 느껴지는 공기의 촉각과 코끝으로 느껴지는 바람의 냄새가 사뭇 포근해져 있었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아직까지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다. 조금만 피부를 노출해도 금세 시큰해질 만큼 바람이 쌀쌀했지만 유정은 개의치 않았다. 양팔을 세워 창틀에 몸을 지탱하고 그렇게 한참은 서 있었을까, 마침 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온 다른 이가 부러 과장된 목소리를 냈다.
“야, 정 대리! 추워!”
“아, 네.”
얼마 전 지독한 독감을 앓고 병가를 낸 후로 아직까지 콧물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윤 차장이었다. 유독 잔병치레가 많은 그는 감기를 앓으면서도 또다시 꽃샘추위에 올 또 다른 감기를 걱정했다.
온갖 건강 보조제가 책상에 즐비하고 뭐가 어디에 좋다더라, 또 다른 건 어디에 좋다더라, 좋은 건 그렇게 챙겨 대면서도 항상 팀 내 건강 최약체를 못 벗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하여튼 저렇게 골골대면서 남들한테 잔소리는 엄청 해요. 이건 건강에 안 좋은 습관이네, 어쩌네, 하면서.”
애정의 옆자리에 앉은 동료가 흘끗 윤 차장 쪽을 보았다가 애정을 향해 소곤소곤한 목소리를 냈다. 그에 애정도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러게. 그런 사람이 여태 제일 많이 아파.”
“참. 자기 한국대 나왔지?”
“응.”
“이번에 새로 올 NS 한국대라던데.”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