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화
[속보 - 백제 호텔, 재벌 4세 사교 모임 미목회 비밀리 동영상 유출]
[백제 호텔, 보안 엄수 약속 어겨…….]
[재벌 4세의 음탕한 연회장, 동영상 파문!]
백제 호텔 고층 클럽 라운지(CL) 연회장에서 열린 사교 모임 ‘미목회’의 방탕한 연회 현장이 고스란히 언론에 퍼져 나갔다.
풍류와 식음료의 정취가 진하게 배어 있는 야외 테라스 라운지에서 뜨거운 시간을 즐긴 미목회 소속 여성들의 비밀스러운 동영상이 어떻게 유출이 되었는지, 그 사건 경위를 조사하는 경찰 측은 난감한 입장을 밝혔다.
동영상 속 그녀들은 거물급 정재계 유명 인사들의 재벌 규수들이었고, 사건 담당 관할서는 사고 수습이 더딘 점에 유감을 표했다.
경찰 측의 기자회견이 끝나고 언론은 소란스러웠다.
백제 호텔에서 벌어진 미목회의 불미스러운 동영상으로 하여 JS 그룹 문서희와 백제 호텔의 차화준 부사장의 관계가 또다시 언론에 대두된 것이다.
한때 연인이었던 두 사람의 관계에 뜨거운 관심을 가지는 누리꾼 사이에서 두 남녀의 재결합 논란이 쟁점 되자 잠자코 언론을 주시하던 차화준 부사장이 직접 나섰다.
“이번 재벌 4세 미목회의 연회와 우리 백제 호텔은 전혀 무관함을 밝히는 바이며 JS 그룹 문서희 씨와 아무런 사이가 아님을 알립니다.”
그는 백제 호텔 앞에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기자들에게 당당히 일러 주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음을 또 한 번 강조하는 바입니다.”
그의 발언은 경고였다.
* * *
“고객 만족도를 최우선으로 하는 게 당연하죠.”
계속되는 피로와 연일 쌓여 가는 업무.
책상에 쌓인 서류만 수백, 수천 장에 이른 상태가 되자 과부하에 걸린 화준은 엊저녁, 답지 않게 과음을 했다.
속은 천불이 난 듯 부글부글 끓어올랐고, 관자놀이 부근은 새벽녘에 기상한 후로 내내 그의 신경을 불편하게 했다.
명백한 그의 실수였고, 현명하지 않은 선택이었다.
“VOC 시스템을 운영해 고객 불만 사항을 빠르게 해결하는 것보다 나은 방법은 없습니다.”
백제 호텔의 중식당 ‘향도’는 오래전부터 비즈니스맨들 사이에서 손꼽히는 명품 레스토랑이었다.
차화준 부사장의 무한한 신뢰를 얻은 향도는 그뿐만 아닌, 그의 일가가 가장 사랑하는 레스토랑이기도 했다.
내로라하는 호텔 업계와의 귀빈 접대 전쟁이 한창인 지금,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소상히 의견을 전한 화준이 적당히 데워진 게살 스프를 한입 떠먹었다.
부드러운 식감이 목 언저리를 매끄럽게 지나갔다. 요란하게 진동하던 속이 조금은 잠잠해진 기분이었다.
“부정적인 입소문을 최소화하기 위해 핫라인을 운영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습니다.”
화준의 말에 고모이자 호텔의 최고 대표인 차연지 사장이 그의 의견을 수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입소문, 중요하지. 쓸데없는 말을 줄이는 것만큼 중요한 일도 없다지만 부사장도 알다시피 이번에 진행되는 식음 프로모션만으로도 동종 업계에 큰 위기감을 조성했을 거야.”
불도장을 맛보며 그녀가 말했다.
고상한 기품을 흘리며 묵묵히 식사하는 그녀는 60대에 접어든 중년으로 보기 힘들 만큼 세련미가 넘쳤다.
손짓조차 백조의 날개처럼 우아한 그녀는 재벌 3세의 표본이었다.
말이 없는 화준은 암묵적인 태도로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뭐, 그렇긴 합니다. 세계 국빈을 접대하는 코스 요리를 선보이는 호텔은 우리 백제가 유일무이하니 이번 판촉 행사만으로도 동종 업계에 강한 위협감을 주었을 겁니다.”
“그렇지, 더구나 이번 행사가 진행되는 데 부사장의 덕이 크니 모두 앞으로의 경영 행보에 두 손 두 발 다 놓았을 거야. 부사장 발뒤꿈치라도 좇아가는 게 어디 쉬운 일은 아니잖아?”
“과언이십니다.”
“무슨, 전부 사실인데.”
차 사장의 연이은 칭찬에 설핏 미소 지은 화준이 이번에는 자연 송이를 넣어 끓인 철갑상어 수프를 맛본다.
입안에 은은한 풍미를 남기는 수프의 맛을 혀끝으로 음미하던 그가 숟가락을 내려놓곤 부드럽게 미소 짓는다.
“말씀 편하게 하시죠, 직함을 언급할 만큼 먼 사이 아니잖습니까.”
그런 그를 보며 차 사장도 흔연하게 웃어 보였다.
작은오빠의 아들, 즉 눈앞의 조카는 언제 이렇게 컸는지, 몰라볼 정도로 성숙해졌다.
경영 승계를 위해 대학 졸업 후 곧장 유학길에 오른 그는 해외 지사에서 커리어를 쌓은 뒤 곧장 귀국해 대원 그룹 미래전략실 전략팀장으로 근무했다.
이후 대원 그룹의 백제 호텔 부사장으로 신임된 그는 승진과 동시에 승승장구하며 백제 호텔을 호텔업계 굴지의 관광호텔로 만들어 놓았다.
탁월한 경영 감각으로 조직의 안정화를 이끌고, 수익성과 재무 안정성을 향상 시킨 그는 제 조카이지만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작은오빠, 그러니까 물산의 차 사장을 쏙 빼닮은 이목구비는 시원시원했고, 강렬한 인상을 남길 만큼 도드라졌다.
깊고 퇴폐적인 눈매와 오뚝한 콧날. 남성적인 자줏빛 입술. 나이가 들면 들수록 날렵해지는 턱 선은 아직 미혼인 연지에게 결혼 욕심을 갖게 했다.
“내가 널 보면 남자가 그리워져서 큰일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한참 어린 너에게 들을 만한 소리는 아닌 것 같구나.”
그녀가 서둘러 대화를 갈무리하자 화준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여전히 결혼 생각은 없는 거야?”
차 사장이 언급한 불편한 이야기에 아주 잠시 화준이 멈칫했다.
금세 평정을 찾았으나 원하지 않은 이야기를 들은 그 순간 가뜩이나 부글거리는 속이 뒤집히는 건 사실이었다.
“달리 없는 게 사실이죠.”
“너 벌써 서른셋이야. 집안 어르신들이 모르는 척 방관하고 있다 해도 다 나와 같은 마음일 거다. 일에 열중하는 것도 좋은데 슬슬 갈 때가 된 것 같은데, 여직 마음이 없는 거니?”
“뭐, 좋은 인연이 생긴다면 자연히 따라붙는 게 희보일 테고요.”
차 사장이 안쓰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이가 차고, 적당히 들어오는 선 제안도 마다하는 그는 귀국 후 내내 일에만 매진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황야에 혼자 서 있는 그 쓸쓸한 기분이 그리도 좋은지, 다른 집 자제들과 달리 여전히 소식 없는 그가 퍽 걱정스러운 차 사장은 하루 빨리 그가 결혼하기를 바랐다.
작은오빠를 닮아 고집이 철통 무쇠 같은 그는 그녀가 은연히 흘리는 이야기를 언제나 한 귀로 흘려 넘기기 일쑤였다.
어쩌려고 저러는지. 위로 누나가 있는 화준도 그렇지만 그의 누이도 문제였다.
물론 가는 데 순서 없다지만 남매가 기계처럼 일만 하며 사니, 원.
일벌레도 이런 일벌레가 없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회사에 치중하는 그에게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퍽 미안한 차 사장이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화준은 고모의 시선을 알면서도 모른 체하며 묵묵히 식사했다.
“그나저나 M&A로 순환 출자를 해소하려는 계열사 사장들도 힘들 거야. 미목회와 관련돼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하필 우리 호텔에서 터졌으니 언론이 개떼처럼 몰려드는 것도 당연하고.”
“경찰 측에서도 사건 진상 규명에 힘쓰고 있으니 금방 밝혀질 겁니다.”
“그 말은, 우리 직원과 무관하다는 말인가?”
“그럴 겁니다. 경영의 투명화에 힘쓰는 우리 호텔 직원들이 설마 그랬겠습니까.”
“상사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만큼 직원에 대한 신뢰도가 높은 부사장이라, 마인드는 좋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어느 정도 경계하는 게 좋겠어.”
차 사장은 미목회의 연회 동영상을 유출 시킨 범인이 백제 호텔 직원이라고 생각하는 듯했으나 화준의 뜻은 그와 달랐다.
두 사람의 의견이 처음으로 부딪쳤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대화에는 막힘이 없었다.
“그래서, 너는 괜찮은 거야? 이번 일, 서희에게도 꽤 타격이 클 텐데.”
차 사장이 언급한 불편한 이름을 듣는 순간 화준이 멈칫했다. 금세 평정을 찾았으나 불쾌감에 목구멍이 턱턱 막히는 건 사실이었다.
어쨌거나 한때 그녀는 그와 백년가약을 약속했던 사이였으니까.
“재벌 4세의 음탕한 연회장이라는 대목으로 기사화 나간 지 꽤 됐죠.”
“나도 알지만 이대로 두어도 괜찮겠어? 사건 진상 규명도 좋고 돈을 써서라도 기사를 묻는 것도 좋고, 뭐라도 해야지 않을까 싶은 게 내 생각인데.”
“이번 논란은 호텔에 치명적인 해악입니다. 그래서 뭐라도 할 생각입니다. 책임지고 진상 규명에 나서야죠.”
화준의 말에 차 사장도 더는 할 말이 없는지, 괜히 찻잔을 손에 잡는다.
대화가 끊겨 적막한 분위기가 두 사람이 자리한 룸 안에 밀어닥쳤다.
공격적으로 밀려온 삭막함에 헛기침을 터뜨린 차 사장이 무어라 말문을 여는 찰나 휴대폰이 울렸다.
그녀의 전화가 조용한 걸 보면 화준에게 온 업무 관련 전화인 듯하다.
“받고 와.”
성미부리는 액정을 내려 보던 그가 정중하게 묵례하며 잠시 룸 밖을 나섰다.
-제주 스테이 부지 추가 확보 제안이 반려됐습니다.
발신자는 그의 수석 비서, 조 실장이었다.
복도를 걸어 나와 홀로 나온 그가 감각적인 레스토랑의 인테리어를 눈으로 감상하며 외식가 밖으로 나왔다.
-시간 소요가 길어질 것으로 예견됩니다.
“앞으로의 일정은?”
-면세 사업 관련 입점 문제로 번거로운 회동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음.”
그의 말에 화준이 복잡한 얼굴을 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그였다.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데 시간까지 촉박하니 여간 초조하고 불안한 게 아니었다.
면세 사업과 명품 브랜드 입점 문제를 눈앞에 둔 화준은 며칠째 총력전을 벌이고 있었다.
허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 화준의 시선이 애먼 곳을 바라본다.
시선 끝에 향도를 찾은 고객들이 송두리째 걸려들었다.
월척이었다. 꼴사나운 두 남녀의 격 없는 애정 행각을 발견하게 되었으니까.
“뭐가 됐든 천천히 진행하죠.”
그때였다. 화준은 퍽 우아한 분위기를 즐기는 커플을 주시했다.
까르르 웃다가 자리를 벗어난 여자가 레스트 룸 쪽으로 걸어가고, 혼자 남은 사내는 입속말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중국 황실에서 즐겨 찾던 고량주, 시선태백을 커다란 유리잔에 콸콸 채워 넣었다.
그런 사내의 모습이 불쾌했는지 화준이 눈썹 끝을 꿈틀거렸다.
‘국빈 접대 레스토랑으로 알려진 향도가 포장마차도 아니고.’
첫맛이 진하고, 끝 맛이 부드러워 목 넘김이 수월한 시선태백을 제법 큰 물 잔에 소주처럼 때려 붓는 사내의 행동에 품격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어 헛웃음이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그가 격상 시킨 향도가 졸지에 개나 소나 찾는 술집이 된 것 같아 이곳을 무척 사랑하는 화준의 입장에서 속이 언짢은 게 당연했다.
종전까지 남아 있던 숙취가 말끔히 해소 되었다.
다만, 눈에 거슬리는 사내의 행동이 백제 호텔의 브랜드로 알려진 향도의 이미지를 격하 시키는 것 같아 숙취와는 다른 이유에서 속이 뒤틀렸다.
“급할수록 천천히 돌아가는 것도 나쁘진 않잖아.”
-불 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닌데 천천히 진행했다가는 모조리 재가 되어 버리겠습니다.
단호한 조 실장의 회답에 화준이 심드렁한 얼굴을 했다.
그때 그의 시야에 수상쩍은 여자의 모습이 포착됐다.
[속보 - 백제 호텔, 재벌 4세 사교 모임 미목회 비밀리 동영상 유출]
[백제 호텔, 보안 엄수 약속 어겨…….]
[재벌 4세의 음탕한 연회장, 동영상 파문!]
백제 호텔 고층 클럽 라운지(CL) 연회장에서 열린 사교 모임 ‘미목회’의 방탕한 연회 현장이 고스란히 언론에 퍼져 나갔다.
풍류와 식음료의 정취가 진하게 배어 있는 야외 테라스 라운지에서 뜨거운 시간을 즐긴 미목회 소속 여성들의 비밀스러운 동영상이 어떻게 유출이 되었는지, 그 사건 경위를 조사하는 경찰 측은 난감한 입장을 밝혔다.
동영상 속 그녀들은 거물급 정재계 유명 인사들의 재벌 규수들이었고, 사건 담당 관할서는 사고 수습이 더딘 점에 유감을 표했다.
경찰 측의 기자회견이 끝나고 언론은 소란스러웠다.
백제 호텔에서 벌어진 미목회의 불미스러운 동영상으로 하여 JS 그룹 문서희와 백제 호텔의 차화준 부사장의 관계가 또다시 언론에 대두된 것이다.
한때 연인이었던 두 사람의 관계에 뜨거운 관심을 가지는 누리꾼 사이에서 두 남녀의 재결합 논란이 쟁점 되자 잠자코 언론을 주시하던 차화준 부사장이 직접 나섰다.
“이번 재벌 4세 미목회의 연회와 우리 백제 호텔은 전혀 무관함을 밝히는 바이며 JS 그룹 문서희 씨와 아무런 사이가 아님을 알립니다.”
그는 백제 호텔 앞에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기자들에게 당당히 일러 주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음을 또 한 번 강조하는 바입니다.”
그의 발언은 경고였다.
* * *
“고객 만족도를 최우선으로 하는 게 당연하죠.”
계속되는 피로와 연일 쌓여 가는 업무.
책상에 쌓인 서류만 수백, 수천 장에 이른 상태가 되자 과부하에 걸린 화준은 엊저녁, 답지 않게 과음을 했다.
속은 천불이 난 듯 부글부글 끓어올랐고, 관자놀이 부근은 새벽녘에 기상한 후로 내내 그의 신경을 불편하게 했다.
명백한 그의 실수였고, 현명하지 않은 선택이었다.
“VOC 시스템을 운영해 고객 불만 사항을 빠르게 해결하는 것보다 나은 방법은 없습니다.”
백제 호텔의 중식당 ‘향도’는 오래전부터 비즈니스맨들 사이에서 손꼽히는 명품 레스토랑이었다.
차화준 부사장의 무한한 신뢰를 얻은 향도는 그뿐만 아닌, 그의 일가가 가장 사랑하는 레스토랑이기도 했다.
내로라하는 호텔 업계와의 귀빈 접대 전쟁이 한창인 지금,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소상히 의견을 전한 화준이 적당히 데워진 게살 스프를 한입 떠먹었다.
부드러운 식감이 목 언저리를 매끄럽게 지나갔다. 요란하게 진동하던 속이 조금은 잠잠해진 기분이었다.
“부정적인 입소문을 최소화하기 위해 핫라인을 운영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습니다.”
화준의 말에 고모이자 호텔의 최고 대표인 차연지 사장이 그의 의견을 수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입소문, 중요하지. 쓸데없는 말을 줄이는 것만큼 중요한 일도 없다지만 부사장도 알다시피 이번에 진행되는 식음 프로모션만으로도 동종 업계에 큰 위기감을 조성했을 거야.”
불도장을 맛보며 그녀가 말했다.
고상한 기품을 흘리며 묵묵히 식사하는 그녀는 60대에 접어든 중년으로 보기 힘들 만큼 세련미가 넘쳤다.
손짓조차 백조의 날개처럼 우아한 그녀는 재벌 3세의 표본이었다.
말이 없는 화준은 암묵적인 태도로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뭐, 그렇긴 합니다. 세계 국빈을 접대하는 코스 요리를 선보이는 호텔은 우리 백제가 유일무이하니 이번 판촉 행사만으로도 동종 업계에 강한 위협감을 주었을 겁니다.”
“그렇지, 더구나 이번 행사가 진행되는 데 부사장의 덕이 크니 모두 앞으로의 경영 행보에 두 손 두 발 다 놓았을 거야. 부사장 발뒤꿈치라도 좇아가는 게 어디 쉬운 일은 아니잖아?”
“과언이십니다.”
“무슨, 전부 사실인데.”
차 사장의 연이은 칭찬에 설핏 미소 지은 화준이 이번에는 자연 송이를 넣어 끓인 철갑상어 수프를 맛본다.
입안에 은은한 풍미를 남기는 수프의 맛을 혀끝으로 음미하던 그가 숟가락을 내려놓곤 부드럽게 미소 짓는다.
“말씀 편하게 하시죠, 직함을 언급할 만큼 먼 사이 아니잖습니까.”
그런 그를 보며 차 사장도 흔연하게 웃어 보였다.
작은오빠의 아들, 즉 눈앞의 조카는 언제 이렇게 컸는지, 몰라볼 정도로 성숙해졌다.
경영 승계를 위해 대학 졸업 후 곧장 유학길에 오른 그는 해외 지사에서 커리어를 쌓은 뒤 곧장 귀국해 대원 그룹 미래전략실 전략팀장으로 근무했다.
이후 대원 그룹의 백제 호텔 부사장으로 신임된 그는 승진과 동시에 승승장구하며 백제 호텔을 호텔업계 굴지의 관광호텔로 만들어 놓았다.
탁월한 경영 감각으로 조직의 안정화를 이끌고, 수익성과 재무 안정성을 향상 시킨 그는 제 조카이지만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작은오빠, 그러니까 물산의 차 사장을 쏙 빼닮은 이목구비는 시원시원했고, 강렬한 인상을 남길 만큼 도드라졌다.
깊고 퇴폐적인 눈매와 오뚝한 콧날. 남성적인 자줏빛 입술. 나이가 들면 들수록 날렵해지는 턱 선은 아직 미혼인 연지에게 결혼 욕심을 갖게 했다.
“내가 널 보면 남자가 그리워져서 큰일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한참 어린 너에게 들을 만한 소리는 아닌 것 같구나.”
그녀가 서둘러 대화를 갈무리하자 화준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여전히 결혼 생각은 없는 거야?”
차 사장이 언급한 불편한 이야기에 아주 잠시 화준이 멈칫했다.
금세 평정을 찾았으나 원하지 않은 이야기를 들은 그 순간 가뜩이나 부글거리는 속이 뒤집히는 건 사실이었다.
“달리 없는 게 사실이죠.”
“너 벌써 서른셋이야. 집안 어르신들이 모르는 척 방관하고 있다 해도 다 나와 같은 마음일 거다. 일에 열중하는 것도 좋은데 슬슬 갈 때가 된 것 같은데, 여직 마음이 없는 거니?”
“뭐, 좋은 인연이 생긴다면 자연히 따라붙는 게 희보일 테고요.”
차 사장이 안쓰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이가 차고, 적당히 들어오는 선 제안도 마다하는 그는 귀국 후 내내 일에만 매진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황야에 혼자 서 있는 그 쓸쓸한 기분이 그리도 좋은지, 다른 집 자제들과 달리 여전히 소식 없는 그가 퍽 걱정스러운 차 사장은 하루 빨리 그가 결혼하기를 바랐다.
작은오빠를 닮아 고집이 철통 무쇠 같은 그는 그녀가 은연히 흘리는 이야기를 언제나 한 귀로 흘려 넘기기 일쑤였다.
어쩌려고 저러는지. 위로 누나가 있는 화준도 그렇지만 그의 누이도 문제였다.
물론 가는 데 순서 없다지만 남매가 기계처럼 일만 하며 사니, 원.
일벌레도 이런 일벌레가 없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회사에 치중하는 그에게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퍽 미안한 차 사장이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화준은 고모의 시선을 알면서도 모른 체하며 묵묵히 식사했다.
“그나저나 M&A로 순환 출자를 해소하려는 계열사 사장들도 힘들 거야. 미목회와 관련돼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하필 우리 호텔에서 터졌으니 언론이 개떼처럼 몰려드는 것도 당연하고.”
“경찰 측에서도 사건 진상 규명에 힘쓰고 있으니 금방 밝혀질 겁니다.”
“그 말은, 우리 직원과 무관하다는 말인가?”
“그럴 겁니다. 경영의 투명화에 힘쓰는 우리 호텔 직원들이 설마 그랬겠습니까.”
“상사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만큼 직원에 대한 신뢰도가 높은 부사장이라, 마인드는 좋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어느 정도 경계하는 게 좋겠어.”
차 사장은 미목회의 연회 동영상을 유출 시킨 범인이 백제 호텔 직원이라고 생각하는 듯했으나 화준의 뜻은 그와 달랐다.
두 사람의 의견이 처음으로 부딪쳤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대화에는 막힘이 없었다.
“그래서, 너는 괜찮은 거야? 이번 일, 서희에게도 꽤 타격이 클 텐데.”
차 사장이 언급한 불편한 이름을 듣는 순간 화준이 멈칫했다. 금세 평정을 찾았으나 불쾌감에 목구멍이 턱턱 막히는 건 사실이었다.
어쨌거나 한때 그녀는 그와 백년가약을 약속했던 사이였으니까.
“재벌 4세의 음탕한 연회장이라는 대목으로 기사화 나간 지 꽤 됐죠.”
“나도 알지만 이대로 두어도 괜찮겠어? 사건 진상 규명도 좋고 돈을 써서라도 기사를 묻는 것도 좋고, 뭐라도 해야지 않을까 싶은 게 내 생각인데.”
“이번 논란은 호텔에 치명적인 해악입니다. 그래서 뭐라도 할 생각입니다. 책임지고 진상 규명에 나서야죠.”
화준의 말에 차 사장도 더는 할 말이 없는지, 괜히 찻잔을 손에 잡는다.
대화가 끊겨 적막한 분위기가 두 사람이 자리한 룸 안에 밀어닥쳤다.
공격적으로 밀려온 삭막함에 헛기침을 터뜨린 차 사장이 무어라 말문을 여는 찰나 휴대폰이 울렸다.
그녀의 전화가 조용한 걸 보면 화준에게 온 업무 관련 전화인 듯하다.
“받고 와.”
성미부리는 액정을 내려 보던 그가 정중하게 묵례하며 잠시 룸 밖을 나섰다.
-제주 스테이 부지 추가 확보 제안이 반려됐습니다.
발신자는 그의 수석 비서, 조 실장이었다.
복도를 걸어 나와 홀로 나온 그가 감각적인 레스토랑의 인테리어를 눈으로 감상하며 외식가 밖으로 나왔다.
-시간 소요가 길어질 것으로 예견됩니다.
“앞으로의 일정은?”
-면세 사업 관련 입점 문제로 번거로운 회동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음.”
그의 말에 화준이 복잡한 얼굴을 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그였다.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데 시간까지 촉박하니 여간 초조하고 불안한 게 아니었다.
면세 사업과 명품 브랜드 입점 문제를 눈앞에 둔 화준은 며칠째 총력전을 벌이고 있었다.
허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 화준의 시선이 애먼 곳을 바라본다.
시선 끝에 향도를 찾은 고객들이 송두리째 걸려들었다.
월척이었다. 꼴사나운 두 남녀의 격 없는 애정 행각을 발견하게 되었으니까.
“뭐가 됐든 천천히 진행하죠.”
그때였다. 화준은 퍽 우아한 분위기를 즐기는 커플을 주시했다.
까르르 웃다가 자리를 벗어난 여자가 레스트 룸 쪽으로 걸어가고, 혼자 남은 사내는 입속말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중국 황실에서 즐겨 찾던 고량주, 시선태백을 커다란 유리잔에 콸콸 채워 넣었다.
그런 사내의 모습이 불쾌했는지 화준이 눈썹 끝을 꿈틀거렸다.
‘국빈 접대 레스토랑으로 알려진 향도가 포장마차도 아니고.’
첫맛이 진하고, 끝 맛이 부드러워 목 넘김이 수월한 시선태백을 제법 큰 물 잔에 소주처럼 때려 붓는 사내의 행동에 품격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어 헛웃음이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그가 격상 시킨 향도가 졸지에 개나 소나 찾는 술집이 된 것 같아 이곳을 무척 사랑하는 화준의 입장에서 속이 언짢은 게 당연했다.
종전까지 남아 있던 숙취가 말끔히 해소 되었다.
다만, 눈에 거슬리는 사내의 행동이 백제 호텔의 브랜드로 알려진 향도의 이미지를 격하 시키는 것 같아 숙취와는 다른 이유에서 속이 뒤틀렸다.
“급할수록 천천히 돌아가는 것도 나쁘진 않잖아.”
-불 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닌데 천천히 진행했다가는 모조리 재가 되어 버리겠습니다.
단호한 조 실장의 회답에 화준이 심드렁한 얼굴을 했다.
그때 그의 시야에 수상쩍은 여자의 모습이 포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