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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그새 뭐가 달라졌을까.
그새 뭐가.
눈 아래 점 하나가 생긴 것도 같고.
“아뇨, 제가, 제가…… 선배한테 이런 말까지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요. 이미 이렇게 취한 거, 꿈같으니까 하는 말이에요.”
제법 흐트러진 모습으로 하소연을 늘어놓는 그녀의 모습조차 사랑스러운 걸 보면 중증인 건 확실했다.
도무지 눈을 못 떼겠다.
그가 손수 부탁해 차려진 룸서비스를 앞에 두고 냉수만 들이켜던 재은이 언젠가부터 함께 준비된 와인에 입을 대기 시작했다.
무식하게 들이마신 고량주의 여운이 그새 가시고, 재회의 감격을 달짝지근한 와인 한 잔으로 대신하려 했던 화준은 자신의 만류에도 불구 끝내 잔을 든 재은을 걱정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대학 시절부터 그녀는 술과 거리가 먼 여자였다.
특히 소주 세 잔에 녹다운되는 그녀를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으니 아까 향도에서도 그녀를 대신한 흑기사를 자처했던 것이고.
“으, 진짜 열 받아!”
그랬던 그녀가 겁도 없이 와인을 들이켰다.
전 남자 친구의 외도 현장을 두 눈으로 지켜봤다는 데서부터 밀려온 충격이 이제 와 뇌수를 강타했는지, 입을 뗄 때마다 들려오는 이야기라곤 형편없는 전 남자 친구의 이야기가 전부였다.
“선배도 들었죠? 내가 그걸 못 한대요, 그걸. 그걸! 완전 미친놈 아니에요?”
“그럼, 그만한 미친놈도 보기 드물지.”
“아니, 세상에! 지 주제는 생각 못 하고 남 탓 하는 게 정상이에요?”
“지극히 비정상적인 미친놈인 건 나도 인정.”
그녀의 말에 적극 동의하는 그의 말이 큰 힘이 되었는지, 그녀의 언성이 좀 더 높아졌다.
“흥, 어이가 없어서…… 홍콩은 무슨 홍콩!”
그간 참았던 설움이 한꺼번에 터진 듯싶었다.
해묵은 서러움을 모조리 토해 내는 재은은 잔뜩 취기가 올라 멋대로 말을 내뱉고 있었다.
이 또한 추태라는 것을 아마도, 내일 아침이면 깨우치리라.
“난 할 만큼 했어요.”
빈 잔에 다시 와인을 채우고.
“애초에 스킨십 따위에 관심 없다는 말도 일러 주었어요.”
반쯤 따른 술을 다시금 물처럼 들이켰다.
“알겠다고, 이해한다더니……. 이제 와 싫증난다며 다른 년이랑 바람난 건 그 새끼라고요.”
눈앞의 그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과거의 불편함을 잠시나마 뒤로한 재은은 그를 붙잡고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배신의 아픔을 속절없이 털어놓았다.
대체 왜 목석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박한수와 나은의 투 샷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보란 듯이 웃어 보이던 녀석의 비열한 웃음과 비수 같은 말을 툭툭 내던지던 목소리가 끊임없이 머릿속을 유영했다.
지긋지긋한 녀석과의 추억 따위 가차 없이 잘라 내고 싶은데, 굳은 심지와 달리 그녀의 의지는 너무도 나약했다.
“아무리 그래도 바람은 아니잖아요. 차라리 헤어지자고 하든가……. 이건 너무 잔인한 거잖아.”
빈 잔을 꽉 쥔 채 고개를 떨어뜨린 재은이 점점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지 못해 속수무책으로 흘렸다.
“이건…… 진짜…….”
이성이 암전되고, 오로지 감정만 앞서는 상황이었다.
지저분한 전 남자 친구에게 후회나 미련은 쌀 한 톨만큼도 남지 않았지만 오늘 일에 대한 여파가 생각보다 강력해 자꾸만 눈물이 차올랐다.
화준은 동그란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그녀를 바라보다 한숨과 함께 손수건을 꺼냈다.
이미 와인 한 병이 거덜 났다. 그녀 혼자 다 해치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단한 양이 그녀의 목울대 안으로 감쪽같이 사라졌다.
아무리 도수가 낮은 술이라지만 그녀가 감당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텐데.
착잡한 듯 숨을 쉰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 곁으로 다가가 바들거리는 어깨를 붙잡았다.
“그래, 그래. 재은아. 그만 울자, 뚝.”
우는 그녀를 달래기 위해 부드럽게 등을 다독였다.
그럴수록 더욱 커져 가는 울음소리가 듣는 화준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기분이었다.
예쁜 얼굴 망가뜨리는 데 재주도 좋은 여자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재회의 시간을 눈물바다로 보내고 싶은 마음 따위 추호도 없는 그가 묵직한 숨을 불어 쉬며 그녀의 턱 끝을 잡았다.
천천히 그녀의 고개를 들어 올리는 그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어!”
자력으로 목을 세운 그녀가 한껏 까칠해진 눈꼬리로 눈앞의 그를 쏘아보며 외쳤다.
“그걸 얼마나 잘하는데! 알아요? 선배? 내가 그렇게 무시 받을 만큼 못하는 여자가 아니에요!”
더듬거리던 손은 그의 셔츠 깃을 세게 쥐어 잡고, 제멋대로 움직이는 입술은 매사에 여유로운 그를 잠시나마 주춤하게 했다.
화준은 중심을 잃어 비틀대는 그녀의 허리를 본능적으로 붙잡아 세웠다.
품에 꼭 안기듯 기대 오는 재은은 다시 말하지만 제정신이 아니었다.
“내가 얼마나 매력적인데요. 그건 선배도 알잖아요! 네? 나 되게 잘해요.”
“……그래, 잘하는 거 알지.”
차화준 마음 홀리는 거, 정말 잘하지.
“나 엄청 잘해. 보여 줄까요? 네? 보여 줄 수 있어요!”
“음, 보여 주다가 자칫 큰 불로 번질 수도 있을 텐데. 감당 되겠어?”
“감당 못 할 게 뭐 있어요? 그러는 선배는 감당할 수 있겠어요? 매력적인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하는 걸 지금 당장 선배한테 보여 줄 생각인데?”
화준은 당돌하게 구는 재은을 내려 보며 잠시 침묵했다.
게슴츠레하게 풀린 눈 속에 초점은 흐려 있는 상태였다.
이미 의식 소생 불가 상태에 이른 그녀는 아마 지금 제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막 떠들고 있는 듯싶었다.
더 이상은 위험했다.
말 그대로 그녀가 ‘보여 주고 싶은 그것’이 자칫 큰 불로 번질 위험이 상당했고.
그녀가 ‘보여 주고 싶은 그것’이 너무도 보고 싶은 그의 속내는 남성적 욕망으로 새빨갛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그러니까 이쯤에서 그만하는 게 좋겠는데.
“선배 혼이 슝 나가 버릴 수도 있으니까 정신 잘 차려야 돼요. 알겠죠? 안전벨트 착용은 필수!”
어쩌면.
“그러니까 내가 안전벨트인 거예요. 날 잡으면 돼. 왜? 나 그렇게 매력 없는 여자 아니거든요. 나이가 스물아홉인데, 응? 그깟 성적 매력 따위 없을 리가 없는데? 응?”
지금 순간을 기회로 순진무구한 모재은을 낚아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시에 뇌리를 스쳤다.
재은은 손톱을 세워 그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버팀목 같은 화준에게 의지해 어정쩡하게 몸을 세운 그녀가 립스틱을 덧바른 입술을 동그랗게 내민 채 그를 올려 보았다.
그녀의 레이더에 포착된 도착지는 한일자로 굳게 다물린 그의 입술이었다.
“다음에 선배 호텔에 소문 내 주세요. 스물아홉이나 먹은 모재은, 스킨십에 절대 취약한 여자가 아니라고…….”
점점 거리가 가까워지고, 작정하게 자리를 이탈한 입술이 그의 입술을 찾아 닿았다.
쪽.
예상과 달리, 그녀의 입술은 아주 잠시간 화준의 입술에 머물다 떨어졌다. 떨어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을 내쉬는 게 느껴졌다.
“하아…….”
재은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취기로 흐려진 재은의 눈과 애써 참고 있는 열망으로 흐려진 화준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화준은 겨우겨우 차오르는 열망을 참고 있었다.
잠깐의 입맞춤이 미친 듯이 아쉽다. 잠시나마 그녀를 향한 오래된 갈증을 입맞춤으로 해소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해소는커녕 갈증은 더욱 깊어졌을 뿐이다.
그런 화준의 속도 모르고 재은은 배시시 웃어 보이며 다시 그에게 다가갔다.
화준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마음으로는 그녀를 원하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찰나의 입맞춤도 이렇게 치명적인데, 다시 입술이 닿는다면…… 그땐 어떨까.
아마도 심장에 무리가 올 것이 분명했다.
“으음…….”
다시 닿은 재은의 부드러운 입술이 그의 입술을 본격적으로 탐색하기 시작했다.
꽃밭에 내려앉은 나비처럼 부드럽게 안착하더니, 이내 풀밭을 뛰어다니는 토끼처럼 입술 위를 노닐었다.
윗입술을 느릿하게 핥고 아랫입술을 쪼옥 빨아들였다.
화준의 숨소리 역시 자연스레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가 재은의 방문에 반갑게 부응하려던 순간이었다.
“아!”
화준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나비에서 토끼로, 토끼에서 강아지가 되기라도 작정했는지, 재은이 그의 아랫입술을 깨문 탓이었다.
입술 안쪽 여린 살에서 살짝 피 맛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온몸에 아찔한 전율이 일었다.
모재은한테 이런 거친 취향이 있었나.
알싸한 통증을 느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화준의 속도 모르고 입술을 뗀 재은이 헤에, 웃어 보였다.
그리고 이내…….
털썩.
남다른 도전 정신으로 잠시나마 화준을 긴장하게 한 스물아홉 모재은이 혼절했다.
“……모재은?”
스르르 눈이 감기는 게 예사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대로 잠이 들어 버릴 줄이야.
“허.”
이 허탈함은 대체 뭐란 말인가.
아니, 짐승 같은 나는 종전까지 대체 뭘 기대하고 있었단 말인가.
아닌 척했지만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심장이 오작동 반응을 일으켰다.
무서운 속도로 뜀박질을 했고, 은은하게 풍겨 오는 그녀의 체향에 눈앞은 아찔했다.
뭐든 잘하는 스물아홉 모재은의 훤히 드러난 목선에 더 미칠 것 같았다.
가느다란 목 언저리에서 솔솔 불어오는 살 내음이 코끝에 닿았을 때는 돌아 버리기 직전에 다다라 죽을 둥 살 둥 염불을 외워야 했다. 참고로 그는 무교였다. 스스로의 능력을 신앙이라 생각하는 그는 오늘따라 신이 보고 싶었다.
흔히 말하는 사슴 같은 여자의 가늘고 긴 목선이 스물의 모재은과 스물아홉의 모재은이 확연히 다른 사람임을 일러 주고 있었다.
그래서 그 짧은 시간동안 애타게 신을 찾았다.
“그래.”
어쩐지 웃음이 났다.
그녀에게 전하지 못한 손수건을 손아귀에 꽉 잡은 채로 제 품 안으로 쓰러지는 재은을 가볍게 잡아 끌어안은 화준은 허탈함에 연거푸 실소했다.
“시험지는 잘 받았다.”
그러니까 남은 문제를 잘 파악해서 답을 찾는 건 내 몫인 것 같은데.
“흐으음…….”
잠자리가 불편한지 뒤척이는 그녀가 화준의 가슴 깊이 얼굴을 묻은 채로 흥얼거린다.
자세를 바로 잡은 그가 재은의 등허리를 천천히 다독였다. 단단한 왼팔로 허리를 그러안고, 이대로 들어 안을까, 말까 고민하던 그가 작게 웃으며 속삭인다.
“그래. 미안해, 미안한데.”
잠결에 들은 화준의 목소리는 분명 봄기운처럼 싱그러웠을 테다.
그러니 스물아홉이라 스킨십에 취약하지 않은 여자가 더 이상의 뒤척임 없이 잘도 주무시는 걸 테지.
“나도 참 곤란하다.”
취기에 노곤한지 하느작거리는 그녀를 어려움 없이 안아 올린 그의 시선은 곧잘 잠든 재은을 훑었고, 실연당한 그녀의 마음을 다독이기라도 하듯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하염없이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부디 그녀가 오늘 일을 기억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새 뭐가 달라졌을까.
그새 뭐가.
눈 아래 점 하나가 생긴 것도 같고.
“아뇨, 제가, 제가…… 선배한테 이런 말까지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요. 이미 이렇게 취한 거, 꿈같으니까 하는 말이에요.”
제법 흐트러진 모습으로 하소연을 늘어놓는 그녀의 모습조차 사랑스러운 걸 보면 중증인 건 확실했다.
도무지 눈을 못 떼겠다.
그가 손수 부탁해 차려진 룸서비스를 앞에 두고 냉수만 들이켜던 재은이 언젠가부터 함께 준비된 와인에 입을 대기 시작했다.
무식하게 들이마신 고량주의 여운이 그새 가시고, 재회의 감격을 달짝지근한 와인 한 잔으로 대신하려 했던 화준은 자신의 만류에도 불구 끝내 잔을 든 재은을 걱정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대학 시절부터 그녀는 술과 거리가 먼 여자였다.
특히 소주 세 잔에 녹다운되는 그녀를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으니 아까 향도에서도 그녀를 대신한 흑기사를 자처했던 것이고.
“으, 진짜 열 받아!”
그랬던 그녀가 겁도 없이 와인을 들이켰다.
전 남자 친구의 외도 현장을 두 눈으로 지켜봤다는 데서부터 밀려온 충격이 이제 와 뇌수를 강타했는지, 입을 뗄 때마다 들려오는 이야기라곤 형편없는 전 남자 친구의 이야기가 전부였다.
“선배도 들었죠? 내가 그걸 못 한대요, 그걸. 그걸! 완전 미친놈 아니에요?”
“그럼, 그만한 미친놈도 보기 드물지.”
“아니, 세상에! 지 주제는 생각 못 하고 남 탓 하는 게 정상이에요?”
“지극히 비정상적인 미친놈인 건 나도 인정.”
그녀의 말에 적극 동의하는 그의 말이 큰 힘이 되었는지, 그녀의 언성이 좀 더 높아졌다.
“흥, 어이가 없어서…… 홍콩은 무슨 홍콩!”
그간 참았던 설움이 한꺼번에 터진 듯싶었다.
해묵은 서러움을 모조리 토해 내는 재은은 잔뜩 취기가 올라 멋대로 말을 내뱉고 있었다.
이 또한 추태라는 것을 아마도, 내일 아침이면 깨우치리라.
“난 할 만큼 했어요.”
빈 잔에 다시 와인을 채우고.
“애초에 스킨십 따위에 관심 없다는 말도 일러 주었어요.”
반쯤 따른 술을 다시금 물처럼 들이켰다.
“알겠다고, 이해한다더니……. 이제 와 싫증난다며 다른 년이랑 바람난 건 그 새끼라고요.”
눈앞의 그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과거의 불편함을 잠시나마 뒤로한 재은은 그를 붙잡고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배신의 아픔을 속절없이 털어놓았다.
대체 왜 목석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박한수와 나은의 투 샷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보란 듯이 웃어 보이던 녀석의 비열한 웃음과 비수 같은 말을 툭툭 내던지던 목소리가 끊임없이 머릿속을 유영했다.
지긋지긋한 녀석과의 추억 따위 가차 없이 잘라 내고 싶은데, 굳은 심지와 달리 그녀의 의지는 너무도 나약했다.
“아무리 그래도 바람은 아니잖아요. 차라리 헤어지자고 하든가……. 이건 너무 잔인한 거잖아.”
빈 잔을 꽉 쥔 채 고개를 떨어뜨린 재은이 점점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지 못해 속수무책으로 흘렸다.
“이건…… 진짜…….”
이성이 암전되고, 오로지 감정만 앞서는 상황이었다.
지저분한 전 남자 친구에게 후회나 미련은 쌀 한 톨만큼도 남지 않았지만 오늘 일에 대한 여파가 생각보다 강력해 자꾸만 눈물이 차올랐다.
화준은 동그란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그녀를 바라보다 한숨과 함께 손수건을 꺼냈다.
이미 와인 한 병이 거덜 났다. 그녀 혼자 다 해치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단한 양이 그녀의 목울대 안으로 감쪽같이 사라졌다.
아무리 도수가 낮은 술이라지만 그녀가 감당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텐데.
착잡한 듯 숨을 쉰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 곁으로 다가가 바들거리는 어깨를 붙잡았다.
“그래, 그래. 재은아. 그만 울자, 뚝.”
우는 그녀를 달래기 위해 부드럽게 등을 다독였다.
그럴수록 더욱 커져 가는 울음소리가 듣는 화준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기분이었다.
예쁜 얼굴 망가뜨리는 데 재주도 좋은 여자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재회의 시간을 눈물바다로 보내고 싶은 마음 따위 추호도 없는 그가 묵직한 숨을 불어 쉬며 그녀의 턱 끝을 잡았다.
천천히 그녀의 고개를 들어 올리는 그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어!”
자력으로 목을 세운 그녀가 한껏 까칠해진 눈꼬리로 눈앞의 그를 쏘아보며 외쳤다.
“그걸 얼마나 잘하는데! 알아요? 선배? 내가 그렇게 무시 받을 만큼 못하는 여자가 아니에요!”
더듬거리던 손은 그의 셔츠 깃을 세게 쥐어 잡고, 제멋대로 움직이는 입술은 매사에 여유로운 그를 잠시나마 주춤하게 했다.
화준은 중심을 잃어 비틀대는 그녀의 허리를 본능적으로 붙잡아 세웠다.
품에 꼭 안기듯 기대 오는 재은은 다시 말하지만 제정신이 아니었다.
“내가 얼마나 매력적인데요. 그건 선배도 알잖아요! 네? 나 되게 잘해요.”
“……그래, 잘하는 거 알지.”
차화준 마음 홀리는 거, 정말 잘하지.
“나 엄청 잘해. 보여 줄까요? 네? 보여 줄 수 있어요!”
“음, 보여 주다가 자칫 큰 불로 번질 수도 있을 텐데. 감당 되겠어?”
“감당 못 할 게 뭐 있어요? 그러는 선배는 감당할 수 있겠어요? 매력적인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하는 걸 지금 당장 선배한테 보여 줄 생각인데?”
화준은 당돌하게 구는 재은을 내려 보며 잠시 침묵했다.
게슴츠레하게 풀린 눈 속에 초점은 흐려 있는 상태였다.
이미 의식 소생 불가 상태에 이른 그녀는 아마 지금 제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막 떠들고 있는 듯싶었다.
더 이상은 위험했다.
말 그대로 그녀가 ‘보여 주고 싶은 그것’이 자칫 큰 불로 번질 위험이 상당했고.
그녀가 ‘보여 주고 싶은 그것’이 너무도 보고 싶은 그의 속내는 남성적 욕망으로 새빨갛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그러니까 이쯤에서 그만하는 게 좋겠는데.
“선배 혼이 슝 나가 버릴 수도 있으니까 정신 잘 차려야 돼요. 알겠죠? 안전벨트 착용은 필수!”
어쩌면.
“그러니까 내가 안전벨트인 거예요. 날 잡으면 돼. 왜? 나 그렇게 매력 없는 여자 아니거든요. 나이가 스물아홉인데, 응? 그깟 성적 매력 따위 없을 리가 없는데? 응?”
지금 순간을 기회로 순진무구한 모재은을 낚아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시에 뇌리를 스쳤다.
재은은 손톱을 세워 그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버팀목 같은 화준에게 의지해 어정쩡하게 몸을 세운 그녀가 립스틱을 덧바른 입술을 동그랗게 내민 채 그를 올려 보았다.
그녀의 레이더에 포착된 도착지는 한일자로 굳게 다물린 그의 입술이었다.
“다음에 선배 호텔에 소문 내 주세요. 스물아홉이나 먹은 모재은, 스킨십에 절대 취약한 여자가 아니라고…….”
점점 거리가 가까워지고, 작정하게 자리를 이탈한 입술이 그의 입술을 찾아 닿았다.
쪽.
예상과 달리, 그녀의 입술은 아주 잠시간 화준의 입술에 머물다 떨어졌다. 떨어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을 내쉬는 게 느껴졌다.
“하아…….”
재은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취기로 흐려진 재은의 눈과 애써 참고 있는 열망으로 흐려진 화준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화준은 겨우겨우 차오르는 열망을 참고 있었다.
잠깐의 입맞춤이 미친 듯이 아쉽다. 잠시나마 그녀를 향한 오래된 갈증을 입맞춤으로 해소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해소는커녕 갈증은 더욱 깊어졌을 뿐이다.
그런 화준의 속도 모르고 재은은 배시시 웃어 보이며 다시 그에게 다가갔다.
화준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마음으로는 그녀를 원하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찰나의 입맞춤도 이렇게 치명적인데, 다시 입술이 닿는다면…… 그땐 어떨까.
아마도 심장에 무리가 올 것이 분명했다.
“으음…….”
다시 닿은 재은의 부드러운 입술이 그의 입술을 본격적으로 탐색하기 시작했다.
꽃밭에 내려앉은 나비처럼 부드럽게 안착하더니, 이내 풀밭을 뛰어다니는 토끼처럼 입술 위를 노닐었다.
윗입술을 느릿하게 핥고 아랫입술을 쪼옥 빨아들였다.
화준의 숨소리 역시 자연스레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가 재은의 방문에 반갑게 부응하려던 순간이었다.
“아!”
화준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나비에서 토끼로, 토끼에서 강아지가 되기라도 작정했는지, 재은이 그의 아랫입술을 깨문 탓이었다.
입술 안쪽 여린 살에서 살짝 피 맛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온몸에 아찔한 전율이 일었다.
모재은한테 이런 거친 취향이 있었나.
알싸한 통증을 느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화준의 속도 모르고 입술을 뗀 재은이 헤에, 웃어 보였다.
그리고 이내…….
털썩.
남다른 도전 정신으로 잠시나마 화준을 긴장하게 한 스물아홉 모재은이 혼절했다.
“……모재은?”
스르르 눈이 감기는 게 예사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대로 잠이 들어 버릴 줄이야.
“허.”
이 허탈함은 대체 뭐란 말인가.
아니, 짐승 같은 나는 종전까지 대체 뭘 기대하고 있었단 말인가.
아닌 척했지만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심장이 오작동 반응을 일으켰다.
무서운 속도로 뜀박질을 했고, 은은하게 풍겨 오는 그녀의 체향에 눈앞은 아찔했다.
뭐든 잘하는 스물아홉 모재은의 훤히 드러난 목선에 더 미칠 것 같았다.
가느다란 목 언저리에서 솔솔 불어오는 살 내음이 코끝에 닿았을 때는 돌아 버리기 직전에 다다라 죽을 둥 살 둥 염불을 외워야 했다. 참고로 그는 무교였다. 스스로의 능력을 신앙이라 생각하는 그는 오늘따라 신이 보고 싶었다.
흔히 말하는 사슴 같은 여자의 가늘고 긴 목선이 스물의 모재은과 스물아홉의 모재은이 확연히 다른 사람임을 일러 주고 있었다.
그래서 그 짧은 시간동안 애타게 신을 찾았다.
“그래.”
어쩐지 웃음이 났다.
그녀에게 전하지 못한 손수건을 손아귀에 꽉 잡은 채로 제 품 안으로 쓰러지는 재은을 가볍게 잡아 끌어안은 화준은 허탈함에 연거푸 실소했다.
“시험지는 잘 받았다.”
그러니까 남은 문제를 잘 파악해서 답을 찾는 건 내 몫인 것 같은데.
“흐으음…….”
잠자리가 불편한지 뒤척이는 그녀가 화준의 가슴 깊이 얼굴을 묻은 채로 흥얼거린다.
자세를 바로 잡은 그가 재은의 등허리를 천천히 다독였다. 단단한 왼팔로 허리를 그러안고, 이대로 들어 안을까, 말까 고민하던 그가 작게 웃으며 속삭인다.
“그래. 미안해, 미안한데.”
잠결에 들은 화준의 목소리는 분명 봄기운처럼 싱그러웠을 테다.
그러니 스물아홉이라 스킨십에 취약하지 않은 여자가 더 이상의 뒤척임 없이 잘도 주무시는 걸 테지.
“나도 참 곤란하다.”
취기에 노곤한지 하느작거리는 그녀를 어려움 없이 안아 올린 그의 시선은 곧잘 잠든 재은을 훑었고, 실연당한 그녀의 마음을 다독이기라도 하듯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하염없이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부디 그녀가 오늘 일을 기억했으면 하는 바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