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 쌍극의 탑
3화
풍요의 낙원과 절망의 탑 1
그저 어두운 공간이었다. 하늘도, 땅도…… 그 어느 것도 존재한다고 생각되지 않는 그저 무(無).
현성은 그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눈앞에는 열두 개의 선택지가 주어져 있었다. 관리자가 부여한 힘의 유형 열두 가지. 그가 해야 하는 첫 번째 선택이었다. 열두 개의 상징적인 아이콘이 현성의 눈을 어지럽혔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현성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 공간에 들어선 즉시, 머릿속에 알고 있을 리 없는 지식들이 주입되었다.
자신이 가게 될 세계는 게임, 정확히는 MMORPG 게임의 룰로 운영된다는 것, 그리고 관리자가 주겠다고 한 힘의 정체는 게임의 ‘직업’이라는 것도.
저 열두 개의 아이콘들은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의 종류를 보여주는 것이다. 크게 네 개 분류로 나뉘는 열두 개의 직종, 한 번 선택하면 결코 바꿀 수 없다는 사실 또한 머릿속에 이미 입력되어 있었다.
관리자의 권능에 새삼스럽게 감탄하며, 현성은 입력된 지식을 찬찬히 검토했다.
높은 공격력을 바탕으로 가까이 있는 적을 찢는 근접 공격 계열의 직업 세 가지.
쾌검의 검투사, <글래디에이터>.
최속의 창병, <스피어맨>.
강력한 한 방 파워를 가진 광전사, <버서커>.
팀을 원호하고, 멀리 떨어진 적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가하는 후위 공격 계열 직업 세 가지.
은밀한 저격수, <스나이퍼>.
강력한 마법사, <메이지>.
만능 유격대원, <레인저>.
적의 주의를 자신에게 돌리고 맨 앞에서 팀원을 보호하는 수호 계열 세 가지.
전위의 정석, <가디언>.
모두를 지키는 파티의 철벽, <팔라딘>.
맨몸 격투가, <몽크>.
그리고 마지막으로 팀원의 체력을 회복시키고 원호하는 회복 계열 직업 세 가지.
아군 원호의 정석을 보여주는 사제, <프리스트>.
전장을 유리하게 바꾸는 참나무의 현자, <드루이드>.
노래로 아군을 지원하고 적을 압박하는 음유시인, <바드>.
선택지 앞에서 현성은 생각에 잠겼다.
한 번 선택하면 뒤바꿀 수 없다. 아무리 후회한다 하더라도, 선택한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 그 압박 탓에 현성은 더 선택하기를 망설이고 있었다.
무엇이 제일 강력할까, 무엇이 제일 나와 맞을까, 무엇이 제일 탑을 올라가는 데에 유리할까.
현성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하지만 머리에 주입된 정보의 양은 선택을 하기에는 지나치게 부족했다.
문득 현성의 입가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가진 정보가 없다. 그렇다면 고민할 필요 없이 자신에게 가장 맞는 성향을 고르면 그만이다. 관리자는 나름대로 밸런스를 맞췄다고 했다. 그 말을 믿고 취향껏 고르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아이콘을 한동안 올려다보며 얼마 없는 머릿속 정보를 되새기던 현성의 입에서 결정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글래디에이터>.”
『<글래디에이터>를 선택하셨습니다. 한 번 정하신 뒤에는 변경하거나 번복할 수 없습니다. <글래디에이터>로 확정하시겠습니까?』
뇌에 직접적으로 울리는 듯한 목소리가 안내 방송처럼 들려왔다. ‘관리자’의 말소리와 비슷한 느낌이라고 생각하며 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글래디에이터>로 확정되셨습니다. 직업에 맞도록 능력치가 분배됩니다. 초기 장비가 인벤토리에 자동 부여됩니다. 필요한 기술이 주입됩니다…….』
현성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 무언가가 쏟아져 들어오는 느낌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 세계를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하면서 기초적인 지식이 머릿속으로 주입되어 갔다.
이윽고 현성의 몸은 그 허무의 공간에서 사라져 어디론가로 전송되었다.
* * *
식당의 안쪽은 왁자지껄했다. 주황빛이 돌면서 살짝 어두운 듯한 조명이 독특하고도 따뜻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사방에서 음식을 주문하는 소리와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젊은 아가씨 급사들이 눈코 뜰 새 없이 돌아다니며 부지런히 음식을 나르고 있었다.
구석 자리에 앉은 현성은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왁자지껄한 식당 내부를 주욱 둘러보았다.
아직도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죽고 나서 관리자라는 초월자와 만나 제안을 받고 이 세계로 온 것까지, 그 모든 일이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게임이라는 점 때문에 더 그렇지…….”
현성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이 세계는 게임이었다. 물론 직업을 선택할 때 지식을 부여받았으니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지식으로만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겪는 것은 확실히 달랐다. HP와 MP가 존재한다. 게임처럼 팝업 창을 시야 안에 띄울 수도 있다. 몬스터를 잡으면 경험치가 오르고, 돈과 아이템이 떨어진다.
“상처도 나았고…….”
현성은 오른팔의 소매를 걷어 팔뚝을 바라보았다.
아까 사냥을 하다가 들개에게 물어뜯긴 팔은 이미 흔적도 없이 나아 있었다. HP가 차오르자 자동적으로 상처가 사라진 것이다. 그건 재생이라기보다는 시간을 되돌리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아마 팔다리가 잘리더라도 회복될 것이다. 마치 게임 캐릭터처럼.
“그건 그렇고…….”
현성은 계산서를 내려다보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계산서에 떡하니 적혀 있는 ‘₩3,000’이라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원화라니…….”
급사에게 물어보니 당연하지 않느냐는 듯 ‘3,000원’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처음에는 우연인가 싶었다. 하지만 우연이라기에는 너무나도 똑같다. 생각해 보면 자신과 같이 이곳에 온 모두가 동양인, 정확히는 한국인이었다. 다른 인종의 사람도 있지만,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보면 전부 한국인이었다. 그저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식사 나왔습니다!”
급사의 밝은 목소리가 현성의 정신을 두들겨 깨웠다. 소박하면서도 밝은 인상의 소녀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정성스럽게 음식을 식탁에 늘어놓고 있었다.
“우와아…….”
현성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의 소리를 내뱉었다. 반찬이 끝도 없었다.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고기, 아직도 보글보글 끓고 있는 김치찌개, 그리고 익숙한 모습의 반찬들……. 전부 한식이었다.
“이게…… 은화 1개 가격이라…….”
현성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려진 진수성찬을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혼자 먹기에 지나치게 많은 양이다. 이렇게 호화로운 식사의 가격을 상기하니, 더 어이가 없었다.
오늘 한 시간 동안 사냥해서 그가 얻은 금액은 순수하게 돈만 따져서 은화 열 닢에 동화 32닢. 동화가 30원이고, 단위가 올라갈수록 100배로 커지니 액수로 치면 30,960원이다. 즉, 한 시간만 사냥해도 이와 같은 식사를 열 끼는 먹을 수 있는 것이다.
“괜히 낙원이 아닌가…….”
현성은 씁쓸하게 웃었다.
관리자가 말한 대로다. 아마 숙박 시설도 남은 금액으로 가능한 수준이겠지. 적어도 금전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부족함이 없는 낙원이었다.
원래의 세계도 이렇게 풍족했다면, 동생인 현지가 자신에 대한 미안함을 가슴속에 품고 살아올 필요도 없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던 현성은 이내 고개를 휘휘 저었다.
동생이 이곳에 오려면 그녀가 죽어야 한다. 농담으로라도 그런 상황은 입에 담고 싶지 않았다.
현성은 숟가락과 젓가락을 들었다. 식탁에 푸짐하게 차려진 음식들을 하나하나 맛볼 때마다 친숙한 맛이 입안으로 퍼져 나갔다. 다소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한국에서 늘 먹어오던 음식의 맛이었다.
“대체 이건…….”
중세 유럽처럼 보이는 세계에서, 너무나도 친숙한 한식이라니. 기묘한 조합에 현성은 잠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하던 현성은 오래 지나지 않아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받아들이든, 어떻게 느끼든, 고민을 얼마나 하든 변하는 것은 없다. 어쨌든 이세계(異世界)의 독특한 식문화에 적응할 일이 없으니 고마운 일이었다. 살면서 해외여행 한 번 다녀본 적 없는 현성은 낯선 식문화에 쉽게 적응할 자신이 없었다.
그때, 현성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곧이어 망설임이 느껴지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고개를 드니, 흰색 로브를 입은 여자가 얼굴을 붉힌 채로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주저하며 손가락만을 꼼지락거렸다.
“저기…… 그, 그러니까…….”
“……?”
현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였다. 다소 소란스러운 식당의 소음을 뚫을 정도의 볼륨으로 다소 민망한,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귀여운 소리가 들려왔다.
꼬르르르륵.
“…….”
“…….”
침묵이 둘 사이에 흘렀다. 그제야 현성은 그녀가 자신에게 다가온 이유를 이해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배가 고프지만, 가진 돈은 없는 것이다. 아무리 낙원이라도 일하는 사람에게나 낙원이라는 건가 싶었다. 어차피 혼자 먹기에는 양이 지나치게 많았기에 현성은 선뜻 손을 앞자리로 내밀며 말했다.
“앉으세요.”
“가, 감사합니다…….”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입에서 침이 흐를 것처럼 간절한 표정으로, 그러나 음식을 직접 건드리지는 못하고 뚫어져라 바라보고만 있었다. 보다 못한 현성이 한마디 덧붙였다.
“마음껏 드시고요.”
“감사합니다…….”
아까보다 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였다. 이 상황 자체가 부끄러울 법도 하지만, 아무래도 상당히 소심한 성격인 것 같았다.
그녀는 허락을 받고서도 힐끔 현성의 눈치를 보며, 음식을 조금씩 집어 먹기 시작했다.
현성도 뒤늦게 수저를 들었다. 먹으면서 힐끔 보니, 부끄러워하던 태도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배가 정말 고팠던 건지, 그야말로 ‘게걸스럽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꽤 예쁘게 생겼다. 적어도 현성의 눈에는 그랬다. 갈색으로 물들인 긴 웨이브 머리는 부드러워 보였고, 피부도 뽀얗다.
사실 못생긴 여성은 별로 본 적이 없었다. 현성은 소위 ‘눈 낮은’ 남자였다. 여동생이 ‘오빠는 눈 좀 높여!’라고 타박했을 정도다. 그걸 감안하면 그녀의 외모는 사실 평범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어느 정도 배를 채운 후에야 자신이 어떻게 식사했는지를 깨달았는지, 다시 얼굴이 새빨개졌다.
“죄송해요. 그…… 제가 <프리스트>인데, 지금은 전투력이 없어서…….”
현성은 그제야 그녀의 사정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스트>라면 근접 공격 계열 직업인 <글래디에이터>를 선택한 자신과는 달리 혼자서 사냥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프리스트>는 레벨 1때는 공격 스킬이 한 개도 없다.
“괜찮아요. 돈은 넉넉하니까요. 뭐 더 드시고 싶으신 것은 있으세요?”
“아뇨, 아뇨! 이것만으로도 감사해요! 그보다 저…… 혹시, 아주 잠깐만 같이 다니지 않으시겠어요? 그럼 그쪽은 물약 챙기실 필요 없을 거예요!”
여성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제안했다. 소심해 보이는 그녀로서는 엄청난 용기를 내 한 말일 것이다.
잠시 생각해 보던 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보다는 둘이 낫다. 어떤 돌발 상황이 벌어질지도 알 수 없고, 어차피 한 시간 사냥하는 정도만으로 숙식 문제가 해결된다면, 굳이 혼자서 사냥하며 돈을 모을 필요도 없다.
그리고 자신은 생계를 위해 사냥을 하는 것이 아니다. 최대한 빨리 레벨을 올려서 탑에 도전하는 것이 목표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뒤에 회복직이 받쳐 주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판단도 있었다.
“아, 감사해요! 저는 유정이라고 해요. 당분간 잘 부탁해요.”
“이현성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현성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자 유정은 화들짝 놀라며 그 손을 잡았다.
3화
풍요의 낙원과 절망의 탑 1
그저 어두운 공간이었다. 하늘도, 땅도…… 그 어느 것도 존재한다고 생각되지 않는 그저 무(無).
현성은 그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눈앞에는 열두 개의 선택지가 주어져 있었다. 관리자가 부여한 힘의 유형 열두 가지. 그가 해야 하는 첫 번째 선택이었다. 열두 개의 상징적인 아이콘이 현성의 눈을 어지럽혔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현성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 공간에 들어선 즉시, 머릿속에 알고 있을 리 없는 지식들이 주입되었다.
자신이 가게 될 세계는 게임, 정확히는 MMORPG 게임의 룰로 운영된다는 것, 그리고 관리자가 주겠다고 한 힘의 정체는 게임의 ‘직업’이라는 것도.
저 열두 개의 아이콘들은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의 종류를 보여주는 것이다. 크게 네 개 분류로 나뉘는 열두 개의 직종, 한 번 선택하면 결코 바꿀 수 없다는 사실 또한 머릿속에 이미 입력되어 있었다.
관리자의 권능에 새삼스럽게 감탄하며, 현성은 입력된 지식을 찬찬히 검토했다.
높은 공격력을 바탕으로 가까이 있는 적을 찢는 근접 공격 계열의 직업 세 가지.
쾌검의 검투사, <글래디에이터>.
최속의 창병, <스피어맨>.
강력한 한 방 파워를 가진 광전사, <버서커>.
팀을 원호하고, 멀리 떨어진 적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가하는 후위 공격 계열 직업 세 가지.
은밀한 저격수, <스나이퍼>.
강력한 마법사, <메이지>.
만능 유격대원, <레인저>.
적의 주의를 자신에게 돌리고 맨 앞에서 팀원을 보호하는 수호 계열 세 가지.
전위의 정석, <가디언>.
모두를 지키는 파티의 철벽, <팔라딘>.
맨몸 격투가, <몽크>.
그리고 마지막으로 팀원의 체력을 회복시키고 원호하는 회복 계열 직업 세 가지.
아군 원호의 정석을 보여주는 사제, <프리스트>.
전장을 유리하게 바꾸는 참나무의 현자, <드루이드>.
노래로 아군을 지원하고 적을 압박하는 음유시인, <바드>.
선택지 앞에서 현성은 생각에 잠겼다.
한 번 선택하면 뒤바꿀 수 없다. 아무리 후회한다 하더라도, 선택한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 그 압박 탓에 현성은 더 선택하기를 망설이고 있었다.
무엇이 제일 강력할까, 무엇이 제일 나와 맞을까, 무엇이 제일 탑을 올라가는 데에 유리할까.
현성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하지만 머리에 주입된 정보의 양은 선택을 하기에는 지나치게 부족했다.
문득 현성의 입가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가진 정보가 없다. 그렇다면 고민할 필요 없이 자신에게 가장 맞는 성향을 고르면 그만이다. 관리자는 나름대로 밸런스를 맞췄다고 했다. 그 말을 믿고 취향껏 고르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아이콘을 한동안 올려다보며 얼마 없는 머릿속 정보를 되새기던 현성의 입에서 결정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글래디에이터>.”
『<글래디에이터>를 선택하셨습니다. 한 번 정하신 뒤에는 변경하거나 번복할 수 없습니다. <글래디에이터>로 확정하시겠습니까?』
뇌에 직접적으로 울리는 듯한 목소리가 안내 방송처럼 들려왔다. ‘관리자’의 말소리와 비슷한 느낌이라고 생각하며 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글래디에이터>로 확정되셨습니다. 직업에 맞도록 능력치가 분배됩니다. 초기 장비가 인벤토리에 자동 부여됩니다. 필요한 기술이 주입됩니다…….』
현성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 무언가가 쏟아져 들어오는 느낌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 세계를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하면서 기초적인 지식이 머릿속으로 주입되어 갔다.
이윽고 현성의 몸은 그 허무의 공간에서 사라져 어디론가로 전송되었다.
* * *
식당의 안쪽은 왁자지껄했다. 주황빛이 돌면서 살짝 어두운 듯한 조명이 독특하고도 따뜻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사방에서 음식을 주문하는 소리와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젊은 아가씨 급사들이 눈코 뜰 새 없이 돌아다니며 부지런히 음식을 나르고 있었다.
구석 자리에 앉은 현성은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왁자지껄한 식당 내부를 주욱 둘러보았다.
아직도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죽고 나서 관리자라는 초월자와 만나 제안을 받고 이 세계로 온 것까지, 그 모든 일이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게임이라는 점 때문에 더 그렇지…….”
현성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이 세계는 게임이었다. 물론 직업을 선택할 때 지식을 부여받았으니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지식으로만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겪는 것은 확실히 달랐다. HP와 MP가 존재한다. 게임처럼 팝업 창을 시야 안에 띄울 수도 있다. 몬스터를 잡으면 경험치가 오르고, 돈과 아이템이 떨어진다.
“상처도 나았고…….”
현성은 오른팔의 소매를 걷어 팔뚝을 바라보았다.
아까 사냥을 하다가 들개에게 물어뜯긴 팔은 이미 흔적도 없이 나아 있었다. HP가 차오르자 자동적으로 상처가 사라진 것이다. 그건 재생이라기보다는 시간을 되돌리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아마 팔다리가 잘리더라도 회복될 것이다. 마치 게임 캐릭터처럼.
“그건 그렇고…….”
현성은 계산서를 내려다보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계산서에 떡하니 적혀 있는 ‘₩3,000’이라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원화라니…….”
급사에게 물어보니 당연하지 않느냐는 듯 ‘3,000원’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처음에는 우연인가 싶었다. 하지만 우연이라기에는 너무나도 똑같다. 생각해 보면 자신과 같이 이곳에 온 모두가 동양인, 정확히는 한국인이었다. 다른 인종의 사람도 있지만,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보면 전부 한국인이었다. 그저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식사 나왔습니다!”
급사의 밝은 목소리가 현성의 정신을 두들겨 깨웠다. 소박하면서도 밝은 인상의 소녀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정성스럽게 음식을 식탁에 늘어놓고 있었다.
“우와아…….”
현성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의 소리를 내뱉었다. 반찬이 끝도 없었다.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고기, 아직도 보글보글 끓고 있는 김치찌개, 그리고 익숙한 모습의 반찬들……. 전부 한식이었다.
“이게…… 은화 1개 가격이라…….”
현성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려진 진수성찬을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혼자 먹기에 지나치게 많은 양이다. 이렇게 호화로운 식사의 가격을 상기하니, 더 어이가 없었다.
오늘 한 시간 동안 사냥해서 그가 얻은 금액은 순수하게 돈만 따져서 은화 열 닢에 동화 32닢. 동화가 30원이고, 단위가 올라갈수록 100배로 커지니 액수로 치면 30,960원이다. 즉, 한 시간만 사냥해도 이와 같은 식사를 열 끼는 먹을 수 있는 것이다.
“괜히 낙원이 아닌가…….”
현성은 씁쓸하게 웃었다.
관리자가 말한 대로다. 아마 숙박 시설도 남은 금액으로 가능한 수준이겠지. 적어도 금전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부족함이 없는 낙원이었다.
원래의 세계도 이렇게 풍족했다면, 동생인 현지가 자신에 대한 미안함을 가슴속에 품고 살아올 필요도 없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던 현성은 이내 고개를 휘휘 저었다.
동생이 이곳에 오려면 그녀가 죽어야 한다. 농담으로라도 그런 상황은 입에 담고 싶지 않았다.
현성은 숟가락과 젓가락을 들었다. 식탁에 푸짐하게 차려진 음식들을 하나하나 맛볼 때마다 친숙한 맛이 입안으로 퍼져 나갔다. 다소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한국에서 늘 먹어오던 음식의 맛이었다.
“대체 이건…….”
중세 유럽처럼 보이는 세계에서, 너무나도 친숙한 한식이라니. 기묘한 조합에 현성은 잠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하던 현성은 오래 지나지 않아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받아들이든, 어떻게 느끼든, 고민을 얼마나 하든 변하는 것은 없다. 어쨌든 이세계(異世界)의 독특한 식문화에 적응할 일이 없으니 고마운 일이었다. 살면서 해외여행 한 번 다녀본 적 없는 현성은 낯선 식문화에 쉽게 적응할 자신이 없었다.
그때, 현성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곧이어 망설임이 느껴지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고개를 드니, 흰색 로브를 입은 여자가 얼굴을 붉힌 채로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주저하며 손가락만을 꼼지락거렸다.
“저기…… 그, 그러니까…….”
“……?”
현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였다. 다소 소란스러운 식당의 소음을 뚫을 정도의 볼륨으로 다소 민망한,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귀여운 소리가 들려왔다.
꼬르르르륵.
“…….”
“…….”
침묵이 둘 사이에 흘렀다. 그제야 현성은 그녀가 자신에게 다가온 이유를 이해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배가 고프지만, 가진 돈은 없는 것이다. 아무리 낙원이라도 일하는 사람에게나 낙원이라는 건가 싶었다. 어차피 혼자 먹기에는 양이 지나치게 많았기에 현성은 선뜻 손을 앞자리로 내밀며 말했다.
“앉으세요.”
“가, 감사합니다…….”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입에서 침이 흐를 것처럼 간절한 표정으로, 그러나 음식을 직접 건드리지는 못하고 뚫어져라 바라보고만 있었다. 보다 못한 현성이 한마디 덧붙였다.
“마음껏 드시고요.”
“감사합니다…….”
아까보다 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였다. 이 상황 자체가 부끄러울 법도 하지만, 아무래도 상당히 소심한 성격인 것 같았다.
그녀는 허락을 받고서도 힐끔 현성의 눈치를 보며, 음식을 조금씩 집어 먹기 시작했다.
현성도 뒤늦게 수저를 들었다. 먹으면서 힐끔 보니, 부끄러워하던 태도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배가 정말 고팠던 건지, 그야말로 ‘게걸스럽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꽤 예쁘게 생겼다. 적어도 현성의 눈에는 그랬다. 갈색으로 물들인 긴 웨이브 머리는 부드러워 보였고, 피부도 뽀얗다.
사실 못생긴 여성은 별로 본 적이 없었다. 현성은 소위 ‘눈 낮은’ 남자였다. 여동생이 ‘오빠는 눈 좀 높여!’라고 타박했을 정도다. 그걸 감안하면 그녀의 외모는 사실 평범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어느 정도 배를 채운 후에야 자신이 어떻게 식사했는지를 깨달았는지, 다시 얼굴이 새빨개졌다.
“죄송해요. 그…… 제가 <프리스트>인데, 지금은 전투력이 없어서…….”
현성은 그제야 그녀의 사정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스트>라면 근접 공격 계열 직업인 <글래디에이터>를 선택한 자신과는 달리 혼자서 사냥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프리스트>는 레벨 1때는 공격 스킬이 한 개도 없다.
“괜찮아요. 돈은 넉넉하니까요. 뭐 더 드시고 싶으신 것은 있으세요?”
“아뇨, 아뇨! 이것만으로도 감사해요! 그보다 저…… 혹시, 아주 잠깐만 같이 다니지 않으시겠어요? 그럼 그쪽은 물약 챙기실 필요 없을 거예요!”
여성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제안했다. 소심해 보이는 그녀로서는 엄청난 용기를 내 한 말일 것이다.
잠시 생각해 보던 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보다는 둘이 낫다. 어떤 돌발 상황이 벌어질지도 알 수 없고, 어차피 한 시간 사냥하는 정도만으로 숙식 문제가 해결된다면, 굳이 혼자서 사냥하며 돈을 모을 필요도 없다.
그리고 자신은 생계를 위해 사냥을 하는 것이 아니다. 최대한 빨리 레벨을 올려서 탑에 도전하는 것이 목표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뒤에 회복직이 받쳐 주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판단도 있었다.
“아, 감사해요! 저는 유정이라고 해요. 당분간 잘 부탁해요.”
“이현성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현성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자 유정은 화들짝 놀라며 그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