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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극의 탑
7화

앨리스 1

하늘은 황혼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탑, 바벨탑의 입구로부터 현성이 비틀거리며 나왔다.
그는 살아남았다. 이 ‘죽음의 탑’에 혼자 들어가서.
탐색을 한 것이 아니다. 그저 들어가서 생존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현성의 HP와 ST(스태미나) 수치는 이미 바닥까지 떨어져 있었다.
“하…… 하하…….”
그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오늘 도대체 몇 번이나 죽음의 위기를 넘긴 것일까.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우면서 죽음의 위기를 몇 번이나 넘겼지만, 그는 결국 그들이 도달한 위치의 절반에도 닿지 못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몬스터의 출몰 빈도가 높아졌다. 초기에는 한 마리씩만 상대하면 됐지만, 점점 두 마리, 세 마리…… 나중에는 네 마리까지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
“이런 꼴로 어떻게 탑을 올라간다고…….”
고작 외곽부를 돌아다닌 것만으로도 이 정도다. 더 깊이 들어간다면 정말로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 계속해서 이렇게 싸우다 보면 죽는다. 오래갈 것도 없이 다음번에 죽는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었다.
“안 그만둬요. 돌아갈 거예요. 빨리 현지 돌봐줘야죠.”
누군가의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현성은 허공에 대고 그렇게 말했다. 누구도 그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없고, 그의 말을 듣는 사람조차 없음에도 현성은 마치 누군가의 말을 듣듯이 가만히 서 있더니, 곧 입가에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허공에 대고 대답했다.
“알았어요, 엄마.”
그렇게 대답한 현성은 자신이 묵는 숙소를 향해 걸었다. 저물어가는 해가 긴 그림자를 만들었다.

* * *

바벨탑 첫 도전 파티의 전멸로부터 일주일이 지나갔다.
현성은 여느 때처럼 식당에 혼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본래부터 혼자였기에 그는 그것이 어색하지 않았다. 그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시끄럽게 떠들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 세계에 온 지도 벌써 2주 가까이 지났다. 아무리 낯선 이세계에 떨어졌다 하더라도 아는 사람을 만들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몇몇 극히 한정적인 직업을 제외한다면, 에덴의 직업은 모두 각자의 역할에만 특화되어 있을 뿐, 혼자 움직이기에는 적합하지 않기에 지극히 당연한 흐름이었다.
“어엉? 벌써? 거짓말이지?”
“내가 거짓말을 왜 하겠냐! 그 ‘앨리스’야, 앨리스! 걔네 파티가 두 번째 관문을 돌파했다니까?”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현성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아마도 라비린토스에서의 이야기일 것이다.
5인 파티 전멸 사건 이후 발길이 뚝 끊겨 버린 바벨탑과 달리, 지하 미궁 라비린토스는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사냥터가 부족해서 사냥터 쟁탈전이 벌어진다는 이야기도 있다. 탑과는 달리 부활의 은총을 받는 지역이기에 벌어진 현상이었다.
“음…… 아담네가 첫 번째, 앨리스네가 두 번째 관문이었지. 세 번째는 누가 먹으려나?”
“글쎄, 난 앨리스 쪽에 한 표다!”
“그 비리비리한 아가씨가 뭘 한다고! 난 아담이다!”
“와, 이 새끼 봐라? 여기서는 여자든 남자든 다를 게 없다는 거 몰라?”
<관문>이라는 것은 바벨탑과 라비린토스 곳곳에 존재하는 문이자 구역을 의미한다. 이 세계에 와서 관리자로부터 주입된 지식 중 하나였다. 다음 층으로 이어지는 조건. 그것은 여섯 개의 <관문>을 전부 돌파하고 제단을 지키는 보스 몬스터를 쓰러뜨리는 것이다.
“두 번째 <관문>이라…….”
현성은 음식을 한 조각 입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벌써 미궁 지하 1층의 1/3이 돌파된 것이다. 그런데도 자신은 바벨탑의 일부조차도 돌아다니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카인이 분노한 이유를 얼핏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럼 지가 직접 들어갈 것이지…….”
현성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런 소식을 들은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물론 자신이 더 노력한다고 해서 그 정도의 격차가 좁혀질 리 없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았다.

* * *

현성은 또다시 고전하고 있었다.
검과 검이 격돌했다. 쩌엉! 하는 거친 금속음이 울리고, 불꽃이 튀며 주변을 한순간 밝게 비췄다. 머리를 노리고 날아온 몬스터의 일격을 현성이 손에 들고 있던 검으로 튕겨낸 것이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두 방향에서 각자 다른 공격이 날아들었다. 머리를 노리는 후방의 종 베기, 심장을 노리는 좌측의 횡 베기.
현성은 왼손의 버클러를 들어 머리를 보호하며, 동시에 오른손의 검을 들어 올려 심장을 노리고 날아오는 검을 막아냈다.
“윽……!”
손에서 전해지는 저릿한 충격에 현성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시야 아래쪽에 표시된 그의 ST(스태미나) 수치 잔량은 약 30% 미만. 줄어든 체력이 전투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검을 휘두르는 손은 점점 느려지고, 적의 공격을 막는 팔의 힘은 점점 약해져 갔다. 요컨대, 쉬지 않고 이어지는 전투에 지쳐 버린 것이다.
현성은 이를 악물고 몸에 힘을 넣어 한 바퀴 회전하며, 버클러와 검으로 막고 있던 <환몽의 신도>의 소검을 밀어냈다. 하지만 이것으로 벌 수 있는 것은 아주 잠깐, 숨을 돌릴 틈 정도밖에 없었다. <환몽의 신도>가 얼굴에 쓰고 있는 웃는 가면이 그를 비웃는 것같이 보였다.
<환몽의 신도>의 하얀 장갑을 낀 손이 현성에게로 뻗어왔다. 상대의 정신을 흩트리는 정신계 환혹 속성의 공격. 이 몬스터의 가장 까다로운 점이다. 순식간에 시야가 일그러지고 두통이 밀려왔다.
“또 이거냐!”
현성은 이를 으득, 갈며 그렇게 외치고는 공격 자세를 잡았다. 이 상태로는 한 마리면 모를까, 두 마리를 상대로 막아낼 수는 없다. 그렇다면 방어가 아닌 반격을 한다.
짧은 환혹이 풀리자마자 두 신도는 현성에게로 소검을 섬광처럼 뻗어왔다. 두 자루의 검이 몸에 파고드는 것을 느끼며 현성은 그대로 준비되어 있던 공격을 뿌렸다. 푸른빛을 뿌리며 크게 검이 휘둘러진다. <반월 베기>다.
두 몬스터의 HP가 각각 40%씩 깎여 나가고, 현성의 HP도 20%가량 줄어들었다. 그 뒤로 나머지 한 마리의 공격이 현성의 등에 작렬했다. 현성은 피하려고 했지만, 스킬의 사용 후 딜레이에 묶인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금 HP가 깎여 나갔다.
“제기랄…….”
현성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사실상 그가 고전하는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다. <글래디에이터>의 스킬은 너무나도 성능이 나쁘다.
MP 소모가 적고 쿨타임이 짧은 대신 위력이 낮다. 스킬의 사용 전, 사용 후의 경직 시간이 너무나 길다. 물론 <버서커>의 스킬들이 사용 전후의 경직 시간은 더 길겠지만, 대신 <버서커>는 일격으로 적을 분쇄하는 압도적인 파괴력이 있다. 다른 전위 공격직인 <스피어맨>의 스킬들은 빠르고 날카로우며, <글래디에이터>처럼 전후 딜레이가 길지도 않다.
이래서야 스킬의 존재 의미가 없었다. 다른 직업들과 차이가 너무 심각했다. 밸런스 붕괴다. 관리자는 분명 나름대로 밸런스를 맞췄다고 했는데, 이건 좀 아닌 것 같았다.
“아, 젠장. 후 딜레이만 없앨 수 있어도…….”
하지만 아무리 투덜거려 봤자 자신이 선택한 것이 <글래디에이터>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현성은 자세를 고쳐 잡았다.
이왕 이렇게 된 것, <글래디에이터>만의 전투법을 찾지 않으면 발전은 없다. 어쩌면 레벨을 더 올리면 이러한 단점들을 타파할 무언가가 나올지도 모른다.
현성은 다가오는 몬스터들에게 검을 겨누었다.
각기 다른 세 방향에서 날아오는 공격. 현성은 버클러로 좌측을 막으며 몸을 미끄러뜨려 두 방향에서 날아오는 소검을 흘려냈다. 그러고는 검을 크게 휘둘러 헛손질을 한 두 놈의 몸을 베었다. 몸에 주입된 능숙한 검술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아, 하아…….”
숨이 차서 슬슬 전투에도 영향이 오고 있었다. 방금 전도 숨을 참고 간신히 움직인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당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세 마리 중 하나가 다시 환혹 계열 스킬을 사용했다. 이번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시야가 흔들리며 어지럼증이 찾아왔다. 갑자기 날아든 공격에 현성은 자신도 모르게 비틀거렸다.
“……아차!”
그것은 치명적인 빈틈이 되어 패배에 일조했다.
나머지 두 마리의 <환몽의 신도>가 현성의 앞뒤로 소검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순식간에 HP가 20% 가까이 빠져나갔다. HP 잔량은 이제 10% 미만.
두 몬스터의 협공으로 현성은 바닥에 쓰러졌다. 현성에게 환혹을 썼던 녀석이 빈틈을 노리고 재빠르게 다가와 섬광과도 같은 일격을 날렸다.
“읏!”
현성은 몸을 굴려 간신히 그 일격을 피하고는 거리를 벌렸다. 남은 HP 잔량, ST 잔량, 그리고 적의 숫자. 그 무엇을 봐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미 체력이 바닥이라 도망칠 수도 없었다. 냉정하게 판단해서, 지금까지 겪어온 그 어떠한 위기보다도 위험한 상황이었다. 거칠어진 호흡과 무거워진 몸을 느끼며 현성은 위기를 절감했다.
그때였다.
“어라? 정말 사람이 있네?”
현성 이외에는 아무도 없을 터인 탑 안에서 난데없는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성은 위기조차도 잊고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위기 상황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지 태평한 얼굴로 그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오는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쌍꺼풀이 예쁘게 진 큰 눈은 맑고 또렷했다. 햇빛을 그리 많이 받지 않았다는 것이 티가 나는 하얀 피부는 나름 열심히 관리를 하고 있는지 잡티 하나 보이지 않았다. 부드러운 암갈색의 머리카락은 등을 살짝 덮을 정도의 길이에, 코는 오뚝하면서도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고, 입술은 조금 얇으면서도 윤기를 띠고 있었다. 절세미녀까지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예쁘다’ 소리는 들을 만한 소녀였다.
“하아…… 근데 거기서 뭐 해요? 걔들 세 마리 가지고.”
소녀는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마치 자신은 <환몽의 신도> 세 마리 따위는 손쉽게 상대할 수 있다는 태도였다.
“일단은 피하시고요.”
소녀가 무심히 내뱉은 말에 현성은 신도들이 있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그들은 현성 가까이까지 다가와 손에 들고 있던 소검을 휘둘렀다. 현성은 재빨리 땅을 박찼다. 허공으로 떠오른 현성은 한 바퀴 빙글 돌아 약 세 걸음 정도 떨어진 지점에 착지했다. <글래디에이터>의 긴급 회피 스킬, <공중제비>다.
하지만 그걸로 위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다시금 자신에게로 달려오는 몬스터들을 피해 현성은 다시 한 번 더 <공중제비>로 그들을 뛰어넘은 뒤, 재빨리 대시하여 거리를 벌렸다. 그 모습을 본 소녀가 너무나도 태연하게 말했다.
“와…… 개판이다!”
“그렇게 말할 거면 상대해 보지그래요?”
“그럴까요? 도와주기도 할 겸.”
홧김에 한 말에 소녀는 너무나도 시원한 태도로 중얼거리고는 등 뒤로 손을 빼 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그제야 현성의 눈에 그녀의 복장이 들어왔다. 가벼운 가죽 갑옷, 그리고 등 뒤에 매달려 있는 거대한 대검. 자신과 같은 <글래디에이터>였다.
스르릉, 검이 뽑혔다. 길이만 무려 150㎝, 폭은 한 뼘은 족히 될 법한 거대한 대검이었다. 현실이었다면 절대로 들고 휘두르지 못할 그 무기를, 소녀는 한 손으로 가볍게 뽑아 들었다.
<환몽의 신도> 세 마리가 거리를 벌린 현성에게로 돌진했다. 현성은 재빨리 방어 자세를 취해 몬스터의 공격에 대비했다. 섬광이 되어 쏘아진 몬스터의 공격이 어느 정도의 시간차를 두고 현성에게 쏘아졌다. 그 일격이 현성에게 닿기 직전,
바람이 불었다. 질풍과도 같은 속도로 몬스터와의 거리를 좁힌 소녀의 대검이 햇빛을 반사하며 번득였다. 돌진의 속도까지 실어 내려친 일격은 <환몽의 신도>의 왼쪽 어깻죽지부터 오른쪽 옆구리까지를 비스듬하게 갈랐다. <돌진 베기>다.
본래라면 거기서 동작이 멈췄어야 했다. 적어도 현성이 아는 <글래디에이터>는 그랬다. 하지만 그 직후 그녀는 아래로 내려 벤 자세 그대로 검을 빙글 뒤집더니, 곧바로 좌에서 우로 올려 베며 그 방향 그대로 몸을 빙글 돌리고, 이번에는 좌측 위에서 우측 아래로 내려 베었다. <회전 베기>다.
고작 수초간의 공방, 3격을 얻어맞은 <환몽의 신도> 한 마리가 빛무리가 되어 흩어졌다.
“허…….”
현성의 입에서 어이가 없다는 탄성이 터졌다. 공격의 위력도 위력이지만, 방금 그 빠르기는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글래디에이터>의 스킬들이 저렇게나 빨랐나?
한순간에 소녀의 DPS(초당 대미지)가 현성보다 압도적으로 높아졌다. 남은 두 마리의 <환몽의 신도>는 그 순간, 이 자리에서 가장 위협이 되는 적이 현성이 아닌 소녀라고 판단하고 시선을 그녀에게 돌렸다. 방향을 바꿔서 자신에게 달려오는 몬스터들을 보고 소녀는 씨익 웃었다.
“각각 40%, 60%.”
작게 중얼거린 소녀는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자신들에게 육박해 오는 소녀를 본 <환몽의 신도>들이 급히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닿지 않았다. 달려오던 속도까지 이용하여 소녀는 <공중제비>를 시전, 공중으로 도약하여 그들의 뒤로 착지하고는 푸른 달빛을 뿌리며 원형으로 검을 크게 휘둘렀다. 현성도 사용한 적이 있는 스킬, <만월 베기>였다.
저게 저렇게까지 빠르게 발동되는 스킬이었나?
현성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것만으로도 <환몽의 신도> 한 마리는 모든 HP를 잃어버리고 빛무리가 되어 사라졌다. 남은 한 마리조차도 HP가 3% 미만, 완전히 빈사 상태였다. 그런 몬스터의 머리 위로 떨어진 소녀의 <일섬>은 마지막 <환몽의 신도>를 완전히 양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