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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극의 탑
13화

적과 아군 4

“……네?”
현성은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설마 이런 요청을 받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구해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를 하려던 차에 이런 제안을 받게 될 줄은.
소녀는 현성의 표정을 살짝 살폈다. 당혹이 묻어나는 그의 표정을 보고 소녀는 입가에 매력적인 미소를 띠며 덧붙였다.
“저희 말이죠, 돌발 상황에 대처할 유격대 역할을 맡을 사람이 없거든요. 그런데 마침 그쪽은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글래디에이터>고요. 그쪽도 혼자서는 힘들걸요? 서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니까 우리 파티에 들어와 주시지 않을래요?”
현성으로서는 세 번째로 받는 파티 제안이었다. 첫 번째는 유정과의 콤비였다. 하지만 그 관계는 일방적으로 현성이 돕는 관계였고, 사흘도 채 가지 못했다.
두 번째는 앨리스와의 콤비였지만, 그녀와는 사실 파트너라기보다는 사제 관계에 가까웠고, 앨리스가 일방적으로 현성을 도와주는 관계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서로가 서로의 빈틈을 채워주는, 대등한 파트너 관계를 그녀는 제안하고 있었다.
관리자는 탑을 올라가고 싶다면 동료를 구하라고 조언했다. 앨리스 역시 같은 충고를 했다. 현성 역시 동료의 필요성은 절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나서서 동료를 구하기에는 꺼려졌다.
그는 둘 이상을 책임질 수 없다. 자신의 그릇의 크기는 현성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타인을 죽음의 문턱에 끌어들여 놓고 그들의 목숨을 책임질 자신이 없었다. 그들의 목숨의 무게를 짊어질 자신이 없어서 혼자 걷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그들이 먼저 다가왔다. 자신이 끌어들인 것이 아닌, 그들이 스스로 이 ‘죽음의 탑’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괜찮지 않을까?
현성이 잠시 고민하고 있는 동안 소녀는 그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빛내며, 현성의 팔을 조그마한 두 손으로 붙잡은 채 올려다보고 있었다. 덕분에 현성이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저런 식으로 눈을 빛내고 있으면 생각하는 데에 집중할 수가 없다. ‘이건 다른 부류의 미인계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두근거리는 느낌보다는 귀여운 아이를 보고서 그 머리를 쓰다듬고 싶다는, 그런 감정에 가까웠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파티원들 사이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첫 시작은 중갑을 입고 거대한 타워 실드를 든 덩치 큰 <버서커> 소년이었다. 소년은 옆에 서 있는 <프리스트>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음, 근데…… 유리 누나가 쓰는 미인계는 소용없지 않을까?”
“아, 혹시 모르지. 저분 취향이 언니 같은 사람 좋아하는 로리타 취향일지도?”
“에…… 별로 그런 예비 성범죄자를 파티원으로 받고 싶진 않은데.”
“베오야? 수정아? 시끄러워.”
현성과 이야기하고 있던 소녀, 유리가 웃는 얼굴로 경고했다. 소년과 소녀 모두 고등학생은 되어 보이는 외모였다. 현성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들은 분명 ‘언니’, ‘누나’라고 했다.
현성은 깜짝 놀라서 ‘유리’라고 불린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후에 다시 <버서커> 소년과 <프리스트> 소녀 쪽과 유리 쪽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유리 쪽이 연하였다. 현성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누나…… 언니……?”
“아, 쟤들은…….”
“예. 저하고 베오가 유리 언니보다 어려요! 그것도 훨씬! 언니 되게 어려 보이죠? 개 쩔죠? 초딩같이 귀엽죠?”
유리의 말을 끊고 수정이 앞으로 쏙 나서며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활발하고 명랑해 보이는 것은 좋은데 눈치는 좀 없는 것 같다. 아니, 눈치가 없지는 않은 듯하다. 다만, 그녀는 명백히 도발하고 있었다. 유리를.
“킥킥킥킥킥…… 야, 이수정! 저분이 동의하고 싶어도 눈치 보여서 곤란해하시잖아!”
“아, 맞다! 죄송해요! 유리 언니는 놀리는 게 너무 재밌어서, 처음 보는 분한테도 해버렸어요!”
여전히 웃음기를 지우지 않고 장난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뒤에서 유리가 어떤 표정으로 서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걸 보면 눈치가 느린 것 같기도 했다.
서로 킬킬대며 웃어 대는 그녀의 뒤에서는 유리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이마에 힘줄을 세우고서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정아? 베오야?”
“응? 언니, 왜에?”
“니들은 오늘 저녁밥 없어.”
“악! 언니, 미안해! 그것만은 안 돼!”
“악! 야, 이수정! 넌 또 왜 누나한테 지랄을 해서……!”
“니가 먼저 빵 터졌잖아, 곰탱아!”
웃는 얼굴로 내뱉은 ‘저녁밥 강탈 선언’은 두 소년 소녀를 패닉으로 밀어 넣었다. ‘베오’라고 불린 <버서커> 소년과 ‘수정’이라고 불린 <프리스트> 소녀의 패닉은 어느새 서로를 향한 무자비한 말싸움이 되어갔다.
티격태격하는 둘을 놔두고서, 유리의 시선이 다시금 현성에게 향했다. 현성은 그 즉시 어려 보인다는 평가를 정정했다. 외모만 그럴 뿐, 전혀 어려 보이지 않는다.
“시끄러워서 죄송해요. 파티에 들어오실래요? 조금 소란스럽긴 하겠지만, 혼자 다니시는 것보다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마에 선 힘줄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채 웃는 얼굴로 그런 이야기를 하자 현성은 혹시 지금 자신이 협박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도 조금 들었다.
현성은 티격태격하고 있는 두 사람을 흘끔 보았다. 양쪽에 있던 남녀가 각각 한 사람씩 붙잡아 둘을 말리고 있었다. 현성은 자신도 모르게 풋,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서로에게 악의가 없다. 둘이 유리를 놀린 것은 그저 스스럼없는 장난. 그리고 둘이 서로에게 욕을 하며 물고 뜯는 것도 악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옹다옹하는 귀여운 앙숙이라는 느낌이었다. 이 세계에 온 뒤로 고작 2주, 그 시간 안에 이렇게까지 서로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일까?
현성은 다시 유리를 바라보았다. 유리도 어느새 티격태격하는 둘 쪽을 보고 있었다. ‘쟤들은 언제 철이 들까’ 하며 중얼거리는 모습에는 따뜻함이 느껴졌다.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주변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온기였다. 그 온기 사이로 발을 들여보고 싶었다.
“유리 씨…… 맞나요?”
유리의 시선이 다시 현성에게 향했다. 그 크고 맑은 눈을 빛내며, 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파티 초대, 부탁드려도 될까요?”
유리는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현성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최상의 미소를 보여주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유리가 그렇게 대답한 순간이었다. 신나게 말싸움을 하던 쪽에서 정말로 신이 난 듯한 두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찌나 목소리가 컸는지 탑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신입이다!”
“파티다!”
“치맥, 치맥!”
“언니! 환영 파티하자, 환영 파티!”
어쩐지 권유한 유리나 가입한 현성보다 저녁식사 금지령을 받은 두 소년 소녀가 더 좋아하며 소리쳤다. 다소 과장된다 싶을 정도로 환호를 보내는 두 소년 소녀의 반응에 현성은 다소 당황했다.
새로운 파티원이 그렇게까지 필요한 상태였던가?
그들이 환호한 이유는 곧 밝혀졌다. 탑 전체에 광고라도 할 기세로 쩌렁쩌렁하게 환호하는 둘을 보며 유리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싱긋 웃었다. 그러고는 특유의 그 고운 미성으로 친절한 듯 살벌하게 말했다.
“베오야, 수정아? 환영 파티해도 니들은 밥 없어.”
“아∼ 누나, 제발∼ 응? 내가 잘못했어∼ 쫌만 봐줘. 응?”
“그래, 언니! 한 번만 봐줘. 응? 응? 이잉∼!”
유리의 냉정한 선고에 둘은 이제 아예 대놓고 매달려 갖은 애교를 부리며 졸라대기 시작했다.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덩치 큰 소년과, 적당한 키에 충분히 여성스러운 곡선을 가진 소녀가 자신들보다 40㎝(혹은 20㎝) 이상 작은 소녀에게 매달려 애교를 부리는 모습은 다소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둘의 애교 공세에 유리도 다소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순순히 밀려날 거라면 애초에 달라붙지도 않았을 것이다.
새로 들어온 현성의 눈도 있다 보니 매몰차게 밀어내기도 난감했다. 게다가 <프리스트>인 수정이라면 모를까, 베오의 직업은 <버서커>. 모든 직업을 통틀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근력을 지닌 직업이다. 근력과는 담을 쌓은 <메이지>인 유리가 아무리 애를 쓴다 한들, 꿈쩍이라도 할 리가 없었다.
유리는 자신을 껴안으려고 하는―분명 상대 입장에서는 안기려고 했겠지만, 신장 차이가 조금 심했다―수정의 얼굴을 밀어내며 현성을 향해 어색한 웃음을 보여주었다.
“미안해요. 얘들이 먹는 것에 관해서는 워낙 독종들이라…….”
외모는 영락없이 어린 소녀의 입에서 마치 극성 자녀들을 둔 부모 같은 말이 나오자 현성은 자신도 모르게 풋, 웃었다. 어색해 보여도 어딘가 묘하게 어울리는 부분이 있었다.
“아, 알았어! 알았어! 숨 막히니까 그만해!”
떼어내도, 떼어내도 계속해서 매달려 오는 둘에게 유리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원하는 결과를 얻은 두 소년, 소녀는 환호성을 질렀고, 유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하던가. 순간적으로 그런 격언을 떠올린 현성은 살짝 당황했다. 하지만 외모와는 달리 묘하게 잘 어울리는 것은 사실이었다. 유리는 한층 피곤해진 미소를 지으며 현성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수선하긴 하지만…… 일단 파티부터 맺고, 자세한 이야기는 도시 가서 할까요? 환영 파티를 겸해서, 오늘은 저희가 살게요.”
“아…… 괜찮습니다. 제 식비는 제가…….”
“그럼 정이 없잖아요. 신입이니까, 처음에는 얻어먹는 거예요. 다음 회식부터는 회비 걷으니까 말이죠.”
유리는 다소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 웃는 얼굴에 담겨 있는 강제성에 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쁜 얼굴이라 그런지, 아니면 유리 본인의 기(氣)가 굉장히 센 건지 유리의 말은 거절하기 힘든 힘이 있었다.
유리는 생긋 웃으며 현성에게 파티 초대 메시지를 날렸다. 현성이 수락란을 탭하자, 파티가 이뤄지며 시야 오른쪽에 유리를 비롯한 파티원들의 직업과 HP, MP 정보가 열람되었다.

『Yuri. <메이지>. HP 892. MP 3,145.
베오. <버서커>. HP 3,921. MP 712.
Crystal. <프리스트>. HP 914. MP 2,414.
유진. <스피어맨>. HP 1,756. MP 1,024.
ORP. <가디언>. HP 4,021. MP 745.』

그와 동시에 기묘한 느낌이 몸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앨리스와 파티를 맺을 때도 경험한 느낌이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사슬로 파티를 맺은 사람들과 연결되는 듯한 기묘한 느낌.
예전에 앨리스가 그 느낌을 ‘유대감의 형상화’라고 표현했고, 현성 역시 그보다 더 적합한 표현을 찾지 못한, 그런 느낌이었다. 다만, 앨리스와 단둘이 파티를 맺었을 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느낌이 강력했다. 여섯 명이 한 몸이 된 듯 굉장한 유대감이 느껴졌다.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다.
신기해하는 현성의 얼굴을 보며 유리는 이해한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녀 역시 처음 파티를 맺고 나서 몸이 아닌 정신을 통해 전달되는 그 기묘한 느낌에 신기해했으니까.
물론, 지금도 신기했다. 항상 겪는 느낌이지만,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익숙해지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이 아끼는 파티원들과 연결된 느낌에 익숙해지면 그것을 당연하다고 여기게 될 것 같았다. 물론 불편한 느낌도, 기분이 나쁜 느낌도 아니고, 오히려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던 것도 한몫을 하고 있었다.
유리는 인벤토리에서 두루마리 한 장을 꺼냈다. 던전에서 도시로 돌아갈 때 쓰는 귀환서였다. 현재 그들이 알고 있는 도시는 틸문밖에 없으므로 그녀가 가진 귀환서는 ‘틸문 귀환서’였다.
“이쪽으로 와요. 귀환서 써서 돌아갈 거니까.”
“어…… 그거, 한 명만 이동하는 거 아니었나요? 여섯 장 쓰기엔 비쌀 텐데…….”
“파티의 특혜죠. 파티장이 귀환서를 쓰면, 가까이 붙어 있기만 해도 파티원 모두가 같은 장소로 이동하거든요.”
유리는 그렇게 말하며 현성에게 가까이 오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다른 파티원들은 익숙한지 이미 유리의 옆에 바싹 붙어서 어깨동무를 하거나 팔을 붙잡고 있었다.
현성은 조심스럽게 유리의 곁으로 다가가서 옆에 섰다. 다른 파티원들처럼 밀착할 자신은 없었다. 사실 이렇게 가까이 붙은 것만으로도 몸에서 풍기는 향기에 살짝 곤란한 상태였다. 물론 파티원 중 여성만 셋이니 그녀만의 것은 아니겠지만.
“뭐 해요? 혼자서 남겨지고 싶지 않으면 딱 붙어요, 딱!”
유리는 그렇게 말하며 잽싸게 팔을 뻗어 현성의 목을 감았다. 키 차이가 20㎝를 넘어 25㎝ 가까이 나는지라 자연스럽게 현성에게 헤드록을 거는 자세가 되었다. 파티원들―특히 베오와 수정―은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고, 그다음 순간, 유리의 손에 들린 귀환서가 타들어 가며 발동하자, 그들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