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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극의 탑
26화
부서지는 마음 3
차갑게 굳어가는 시체. 파티원들을 이어주던 연결 고리 중 하나가 사라져 가는 것을, 그곳에 있는 모두가 느꼈다. 파티 목록에서 그의 이름이 소멸되고, 남아 있던 그의 시체마저도 곧 황금색 빛무리가 되어 흩어져 갔다.
그곳에 있는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든든한 전위는 이 세계에서 영원히 소멸했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인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소멸한 그의 모습과 연결이 강제로 소멸해 가는 느낌은,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
유리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목까지 차올랐다. 절규하고 싶었고, 큰 소리로 그를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팀의 리더였다. 그녀에게 절망과 슬픔에 빠져 있을 틈 따위는 허락되지 않는다. 상대는 그럴 여유 따위를 주지 않는다.
유리의 마도서가 펼쳐졌다. 상대에게 가장 높은 대미지를 줄 수 있는 마법을 영창했다. 죽일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다른 팀원들을 향할 적의 주의를 자신에게로 돌릴 수는 있다.
“<라이트닝 스피어>!”
길이 3m에 달하는 거대한 번개의 창이 유리의 손을 떠나 사납게 쏘아졌다. 그것은 <환몽의 수호자>의 심장을 명중시키는 것과 동시에 눈이 부실 정도의 화려한 스파크를 튕기며 그 몸을 지져 버렸다. <환몽의 수호자>의 푸른 눈이 번뜩, 빛났다.
“그래…… 여길 봐.”
<환몽의 수호자>의 주의가 단번에 유리에게로 향하고, 그다음 순간, 육중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스피드로 돌진해 왔다. 수호자가 무정한 살의를 품고 유리에게 도달하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느새 익숙해진 체내의 마력 운용을 최대로 발휘하여 폭주시킨다. 시스템이 허용하지 않는 비정상적 마력 행사에 대한 징벌로 유리의 온몸이 욱신거렸다. 온몸의 혈관에 뜨거운 물이 질주하는 듯한 이질적인 감각. 유리는 이를 꽉 물고 그 느낌을 견뎠다.
눈앞에 죽음이 닥쳐온다. 다음 목표는 자신. 마치 기둥과도 같은 창날을 똑바로 바라보며 유리는 최대한의 민첩성을 발휘해 몸을 비켜냈다. 한계치를 넘은 그 민첩성의 대가로 그녀의 연약한 두 다리가 삐걱거렸다.
거대한 창날이 유리의 가슴을 스쳐 지나가며 옷을 베었다. 공격이 빗나간 <환몽의 수호자>의 자세가 잠시 흐트러지고, 유리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프로즌 그라운드>!”
폭주한 마력이 형태를 이루며 얼어붙어 갔다. 유리가 쿵, 하고 내디딘 발을 중심으로 거대한 냉기가 퍼지며 반경 10m의 대지를 완전히 빙결시켰다. 넓은 범위의 적에게 대미지를 입히고 발을 묶어 이동을 제한시키는 <메이지>의 마법, <프로즌 그라운드>다.
“……!!”
<환몽의 수호자>의 두 다리가 얼어붙으며 그 자리에서 멈췄다. 유리는 그 즉시 몸을 돌려 그녀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볼륨으로 소리쳤다.
“이때야! 도망쳐!”
유리의 목소리에 모두의 정신이 깨어났다. 그와 동시에 상황을 파악했다. 그녀는, 팀의 그 누구보다도 연약하고 여려 보이는 그들의 리더는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적의 발을 묶어놓았다.
눈앞에 벌어진 절망 앞에서 모두가 좌절하고 있을 때, 그들의 리더는 누구보다도 슬픈 마음을 억누르고 스스로의 목숨을 걸었다. 그것은 분명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
모두가 다리에 힘을 주었다. 슬픔을, 절망을 억누르고 모두가 땅을 박찼다.
상대는 정예급 몬스터. 유리의 마법으로 발이 묶여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그 시간 안에 모두가 이 방을 탈출해야 한다.
“아?!”
마찬가지로 뛰기 위해 발에 힘을 준 유리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극한의 순간, 스테이터스를 뛰어넘은 민첩성을 발휘한 대가였다. 다리에 있는 모든 뼈들이 삐걱거리며 유리의 명령을 거부하고 있었다.
“하…… 젠장…….”
유리는 허탈하게 웃었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기껏 적의 발을 묶어놓고는 이런 것 때문에 죽게 되다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필사적으로 다리에 힘을 주자, 고장 난 기계처럼 삐걱거리며 겨우 지면에 설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 그녀는 달릴 수가 없다. 버티고 서 있는 것조차도 고역이다.
유리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조금씩 얼음에 균열이 가며 <환몽의 수호자>가 빙결에서 벗어나려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유리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체념의 한숨을 쉬려고 했다. 그 순간…….
“앗?!”
누군가의 강한 힘에 의해 그녀의 몸이 거칠게 끌어당겨졌다. 현성이었다. 현성이 유리의 팔을 붙잡고 달리고 있었다. 그 속도와 힘을 이기지 못하고 유리의 몸이 휘청휘청 흔들렸지만, 현성은 전혀 개의치 않고 달렸다.
다리가 삐걱거렸다. 부서질 것 같은 통증이 밀려왔다. 통증이 약화된 이 세계에서는 설령 다리가 잘리더라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격통이었다. 하지만 전혀 움직이지 않던 방금 전과는 달리, 그녀의 다리가 달리고 있었다. 유리는 잡힌 팔을 통해 현성의 온기를 느꼈다. 손바닥에 땀이 차 있었다.
“나…… 데리러 온 거야?”
유리가 작게 물었다. 현성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다리만을 움직였다. 그녀의 손목을 굳게 잡은 그의 손에서 초조함이 느껴졌다.
<프로즌 그라운드>의 빙결은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길어야 30초. 거기에 상대의 속성이 ‘물’이기에 더욱 짧을 것이다. 지금 당장 풀려나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주저앉은 그녀를 구하는 것은 명백히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유리는 자신을 끌어당기며 달리는 그의 등을 보았다.
“……고마워.”
겨우 그런 말이 나왔다. ORP의 최후가 너무나 뇌리에 달라붙어 있어서, 현성의 도움에 보답할 말을 찾지 못해서 유리는 간신히 작은 감사를 입에 담았다.
현성은 말없이 달렸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빈사가 된 ORP를 적이 노리는데도, 충분히 시간이 있었는데도 현성은 그를 구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은 모를 것이다. 하지만 현성 본인은 알고 있었다. 자신은 망설였다.
그 창의 타깃이 자신이 될까 봐.
그리고 그 망설임의 대가는 가혹했다.
너무나 큰 것을 잃어버렸다. 그 책임이, 갈 곳을 잃은 감정이 너무나도 무겁다. 너무나도 무거워서 당장에라도 주저앉아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현성은 말없이 땅을 박찼다. 여기서 더 잃을 수는 없다. 적어도 남은 사람들이라도…….
“……?!”
직감이 경종을 울렸다. 위험을 느낀 직감이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그의 뒤통수를 찔렀다. 현성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뒤로 돌렸다.
결빙되어 묶인 다리, 손에 든 창, 경량화된 갑옷.
무엇 하나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하지만 있다. 무언가 달라졌다. 찾아라. 무엇이 달라졌는지.
빨리 찾아라. 무기도 아니다. 복장도 아니다. 가면도 아니다. 결빙도 아니다. 무엇이 달라졌는지 찾아라. 빨리 찾지 않으면……!
“……아!”
깨달았다. 달라진 것은 자세. 결빙된 자세 그대로 <환몽의 수호자>는 창을 역수로 잡아 머리 높이까지 들어 올린 상태였다. 전형적인 투창의 준비 자세.
오싹.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적이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내 부정했다. 그럴 리 없다고. 하지만 직감이, 눈이, 이성이, 모든 것이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네가 생각하는 것이 진실이야.’
<환몽의 수호자>의 팔이 뻗어졌다. 너무나도 모범적인 투창의 자세였다. 팔을 떠난 거창(巨槍)은 푸른 섬광이 되어 쏘아졌다.
손을 쓸 틈도 없었다. 섬광처럼 날아온 수호자의 거창은 그대로…….
푹.
절명의 빛이 되어 유리의 심장을 꿰뚫었다.
달리던 다리가 멈췄다. 수호자의 거창에 관통당한 유리는 떨어지는 꽃잎처럼 천천히 바닥으로 쓰러졌다.
실제로는 짧은 시간. 하지만 현성에게는 영원과도 같았다.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그녀가 쓰러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유리…… 누…….”
말을 잇지 못했다. 유리의 몸이 회색으로 물들어가며 차갑게 굳어졌다.
삐빅.
거슬리는 소리가 귀에 들려오며 파티가 해체되었다. 파티장이던 그녀의 소멸로 파티 자체가 소멸한 것이다.
이어져 있던 연결 고리들이 사라져 갔다. 갑작스러운 파티의 와해를 느낀 모두의 시선이 유리와 현성 쪽으로 향했다.
“언……니……?”
“누나……?”
베오와 수정의 다리가 멎었다. 풀려 버린 동공으로 그들은 이미 빛무리가 되어 흩어져 가는 유리의 모습을 보았다.
모두가 현재 처한 상황을 잊었다. 완전히 소멸해 버린 유리가 있던, 그 빈자리를 바라보며 다들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인지했다.
모두를 묶어주던 그들의 리더가, 이 세상에서 소멸했다.
“언니!!”
수정이 달려들었다. 그 목소리에 현성의 정신이 깨어났다.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현성의 시선이 곧바로 <환몽의 수호자>에게로 향했다. 물빛의 기사는 자신의 가슴팍에 오른손을 짚고 있었다.
「나의 심장은 신들의 정원을 지키기 위해서만 존재하느니…….」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기사의 가슴팍에서부터 푸른빛으로 빛나는 무언가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검의 자루였다. 가슴속에서부터 솟아오른 그 검의 손잡이를 잡고 <환몽의 수호자>는 검을 뽑아 들었다. 물빛의 아름다운 장검이 심장으로부터 뽑혀 나왔다.
「침입자들이여, 신들의 정원을 짓밟으려 한 그 죄는, 파멸로도 다 갚지 못하리라…….」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 다리를 속박하던 결빙이 깨져 나갔다. 아름다운 물빛 장검을 든 기사는 가장 먼저 유리가 소멸한 자리로 달려가고 있는 소녀에게 시선을 보냈다.
“바보야, 도망쳐!”
현성은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환몽의 수호자>가 높이 도약했다. 그 덩치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민첩한 도약으로 기사는 순식간에 수정의 앞에 착지했다.
“아…….”
자신의 눈앞으로 다가온 죽음에 수정의 다리가 멈췄다. <환몽의 수호자>가 검을 들어 올렸다. 아름다운 물빛 장검이 허공에서 햇빛을 반사하며 파르르 떨렸다.
“이수정!”
베오의 발이 땅을 박찼다. 방해되는 무거운 갑옷은 손으로 뜯어버리고, 할버드만을 든 채 베오는 관문 내부를 질주했다.
“젠……자아아아아앙─!!”
베오가 포효했다. 그래도 느리다. 손에 들고 있는 할버드조차 무겁다. 베오는 망설임 없이 할버드를 내던졌다. 땅을 박차는 다리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기사의 검이 휘둘러졌다. 허공에 아름다울 정도로 완벽한 호를 그리며, 아름다운 물빛 장검은 소녀를 양단하기 위해 떨어졌다.
검이 소녀에게 닿기 직전, 육중한 몸이 소녀를 감싸며 대신 그 검을 받아냈다.
“안…… 늦었……다…….”
베오가 히죽, 웃었다. 갑옷과 무기마저 내던져 버린 베오의 등에 대각선 형태의 검상이 새겨졌다. HP가 한순간에 주욱 깎였다. 자신을 감싼 베오의 얼굴을 보며 수정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야…… 너, 무슨…….”
“야, 뭐 하냐? 기껏 막아줬더니…… 빨리 튀어…… 멍청아.”
장난스레 말한 베오는 감싸고 있던 두 팔을 풀고 거세게 수정을 밀어냈다.
그 순간, 수정은 보았다, 베오가 자신을 밀어낸 직후에 물빛 검이 베오의 심장을 관통하는 것을.
그리고 깨달았다, 눈앞의 소년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방패가 되었음을.
“튀어서…… 꼭 살아……!”
베오는 히죽 웃으며 마지막 당부를 남기고 회색으로 굳어갔다. 눈앞에서 또 한 명이 소멸해 간다. 그 모습을 본 소녀의 마음은 남김없이 부서졌다.
“아…… 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
수정이 괴성을 질렀다. 마음이 부서져 버린 소녀는 어떠한 할 말도 찾지 못했다. 그저 마음이 부서지는 소리를, 입으로 내고 있을 뿐.
푹.
그런 소녀의 심장에 기사의 검이 꽂혔다.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환몽의 수호자>는 마치 쓰레기를 치워 버리듯 검을 뽑아 수정을 내던졌다. 또 한 명의 팀원이 이 세상에서 소멸했다.
칠흑의 유성이 잔상을 남기며 <환몽의 수호자>에게 닥쳐들었다. 이미 두 눈의 동공이 풀려 버린 유진이 칠흑의 창을 휘둘러 기사의 몸에 4연격 찌르기 공격, <쿼드러플 피어싱>을 꽂았다.
“죽어.”
살의로 가득 찬 안광을 빛내며 유진이 창을 휘둘렀다. 그 눈에는 절망과 살의, 두 가지 감정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신속하게 칠흑의 창을 찔러오는 유진 쪽으로 시선을 돌린 <환몽의 수호자>는 무심하게 검을 휘둘렀다. 물빛의 검이 유진의 허리를 깊게 베었다.
“너 따위가…… 너 따위가……!!”
유진이 이를 까득, 갈았다. 창을 쥔 손이 덜덜 떨려왔지만, 결코 창을 놓지 않았다.
그녀는 곧바로 최강의 일격 스킬, <신터레이션>을 준비했다. 창을 쥔 손과 땅을 박찰 발에 힘을 준다.
물빛의 검이 높이 들어 올려졌다. 유진의 발이 땅을 박찼다. 본래 돌진 스킬은 먼 거리를 순식간에 좁히며 공격하는 스킬. 하지만 지금은 그 돌진에 쓸 힘을 공격에 실었다.
섬광이 된 유진의 창이 <환몽의 수호자>의 심장을 깊이 파고들었다. 동시에 물빛의 장검이 유진의 몸을 양단했다. 그녀가 목숨을 던져 가면서 가한 마지막 일격조차 수호자의 숨통을 끊을 수는 없었다. 그저 수호자의 HP를 소량 감소시켰을 뿐.
마지막 팀원마저 이 세상에서 소멸해 간다. 현성은 그저 멍하니 황금빛 가루가 꽃잎처럼 흩날리는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이 믿고 싶지 않은 광경이 꿈이기만을 바랄 뿐.
<환몽의 수호자>가 걸어온다. 오른손에는 증오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물빛 장검을 들고, 기사는 절망한 청년의 앞에 섰다.
26화
부서지는 마음 3
차갑게 굳어가는 시체. 파티원들을 이어주던 연결 고리 중 하나가 사라져 가는 것을, 그곳에 있는 모두가 느꼈다. 파티 목록에서 그의 이름이 소멸되고, 남아 있던 그의 시체마저도 곧 황금색 빛무리가 되어 흩어져 갔다.
그곳에 있는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든든한 전위는 이 세계에서 영원히 소멸했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인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소멸한 그의 모습과 연결이 강제로 소멸해 가는 느낌은,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
유리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이 목까지 차올랐다. 절규하고 싶었고, 큰 소리로 그를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팀의 리더였다. 그녀에게 절망과 슬픔에 빠져 있을 틈 따위는 허락되지 않는다. 상대는 그럴 여유 따위를 주지 않는다.
유리의 마도서가 펼쳐졌다. 상대에게 가장 높은 대미지를 줄 수 있는 마법을 영창했다. 죽일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다른 팀원들을 향할 적의 주의를 자신에게로 돌릴 수는 있다.
“<라이트닝 스피어>!”
길이 3m에 달하는 거대한 번개의 창이 유리의 손을 떠나 사납게 쏘아졌다. 그것은 <환몽의 수호자>의 심장을 명중시키는 것과 동시에 눈이 부실 정도의 화려한 스파크를 튕기며 그 몸을 지져 버렸다. <환몽의 수호자>의 푸른 눈이 번뜩, 빛났다.
“그래…… 여길 봐.”
<환몽의 수호자>의 주의가 단번에 유리에게로 향하고, 그다음 순간, 육중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스피드로 돌진해 왔다. 수호자가 무정한 살의를 품고 유리에게 도달하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느새 익숙해진 체내의 마력 운용을 최대로 발휘하여 폭주시킨다. 시스템이 허용하지 않는 비정상적 마력 행사에 대한 징벌로 유리의 온몸이 욱신거렸다. 온몸의 혈관에 뜨거운 물이 질주하는 듯한 이질적인 감각. 유리는 이를 꽉 물고 그 느낌을 견뎠다.
눈앞에 죽음이 닥쳐온다. 다음 목표는 자신. 마치 기둥과도 같은 창날을 똑바로 바라보며 유리는 최대한의 민첩성을 발휘해 몸을 비켜냈다. 한계치를 넘은 그 민첩성의 대가로 그녀의 연약한 두 다리가 삐걱거렸다.
거대한 창날이 유리의 가슴을 스쳐 지나가며 옷을 베었다. 공격이 빗나간 <환몽의 수호자>의 자세가 잠시 흐트러지고, 유리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프로즌 그라운드>!”
폭주한 마력이 형태를 이루며 얼어붙어 갔다. 유리가 쿵, 하고 내디딘 발을 중심으로 거대한 냉기가 퍼지며 반경 10m의 대지를 완전히 빙결시켰다. 넓은 범위의 적에게 대미지를 입히고 발을 묶어 이동을 제한시키는 <메이지>의 마법, <프로즌 그라운드>다.
“……!!”
<환몽의 수호자>의 두 다리가 얼어붙으며 그 자리에서 멈췄다. 유리는 그 즉시 몸을 돌려 그녀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볼륨으로 소리쳤다.
“이때야! 도망쳐!”
유리의 목소리에 모두의 정신이 깨어났다. 그와 동시에 상황을 파악했다. 그녀는, 팀의 그 누구보다도 연약하고 여려 보이는 그들의 리더는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적의 발을 묶어놓았다.
눈앞에 벌어진 절망 앞에서 모두가 좌절하고 있을 때, 그들의 리더는 누구보다도 슬픈 마음을 억누르고 스스로의 목숨을 걸었다. 그것은 분명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
모두가 다리에 힘을 주었다. 슬픔을, 절망을 억누르고 모두가 땅을 박찼다.
상대는 정예급 몬스터. 유리의 마법으로 발이 묶여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그 시간 안에 모두가 이 방을 탈출해야 한다.
“아?!”
마찬가지로 뛰기 위해 발에 힘을 준 유리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극한의 순간, 스테이터스를 뛰어넘은 민첩성을 발휘한 대가였다. 다리에 있는 모든 뼈들이 삐걱거리며 유리의 명령을 거부하고 있었다.
“하…… 젠장…….”
유리는 허탈하게 웃었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기껏 적의 발을 묶어놓고는 이런 것 때문에 죽게 되다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필사적으로 다리에 힘을 주자, 고장 난 기계처럼 삐걱거리며 겨우 지면에 설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 그녀는 달릴 수가 없다. 버티고 서 있는 것조차도 고역이다.
유리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조금씩 얼음에 균열이 가며 <환몽의 수호자>가 빙결에서 벗어나려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유리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체념의 한숨을 쉬려고 했다. 그 순간…….
“앗?!”
누군가의 강한 힘에 의해 그녀의 몸이 거칠게 끌어당겨졌다. 현성이었다. 현성이 유리의 팔을 붙잡고 달리고 있었다. 그 속도와 힘을 이기지 못하고 유리의 몸이 휘청휘청 흔들렸지만, 현성은 전혀 개의치 않고 달렸다.
다리가 삐걱거렸다. 부서질 것 같은 통증이 밀려왔다. 통증이 약화된 이 세계에서는 설령 다리가 잘리더라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격통이었다. 하지만 전혀 움직이지 않던 방금 전과는 달리, 그녀의 다리가 달리고 있었다. 유리는 잡힌 팔을 통해 현성의 온기를 느꼈다. 손바닥에 땀이 차 있었다.
“나…… 데리러 온 거야?”
유리가 작게 물었다. 현성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다리만을 움직였다. 그녀의 손목을 굳게 잡은 그의 손에서 초조함이 느껴졌다.
<프로즌 그라운드>의 빙결은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길어야 30초. 거기에 상대의 속성이 ‘물’이기에 더욱 짧을 것이다. 지금 당장 풀려나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주저앉은 그녀를 구하는 것은 명백히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유리는 자신을 끌어당기며 달리는 그의 등을 보았다.
“……고마워.”
겨우 그런 말이 나왔다. ORP의 최후가 너무나 뇌리에 달라붙어 있어서, 현성의 도움에 보답할 말을 찾지 못해서 유리는 간신히 작은 감사를 입에 담았다.
현성은 말없이 달렸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빈사가 된 ORP를 적이 노리는데도, 충분히 시간이 있었는데도 현성은 그를 구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은 모를 것이다. 하지만 현성 본인은 알고 있었다. 자신은 망설였다.
그 창의 타깃이 자신이 될까 봐.
그리고 그 망설임의 대가는 가혹했다.
너무나 큰 것을 잃어버렸다. 그 책임이, 갈 곳을 잃은 감정이 너무나도 무겁다. 너무나도 무거워서 당장에라도 주저앉아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현성은 말없이 땅을 박찼다. 여기서 더 잃을 수는 없다. 적어도 남은 사람들이라도…….
“……?!”
직감이 경종을 울렸다. 위험을 느낀 직감이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그의 뒤통수를 찔렀다. 현성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뒤로 돌렸다.
결빙되어 묶인 다리, 손에 든 창, 경량화된 갑옷.
무엇 하나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하지만 있다. 무언가 달라졌다. 찾아라. 무엇이 달라졌는지.
빨리 찾아라. 무기도 아니다. 복장도 아니다. 가면도 아니다. 결빙도 아니다. 무엇이 달라졌는지 찾아라. 빨리 찾지 않으면……!
“……아!”
깨달았다. 달라진 것은 자세. 결빙된 자세 그대로 <환몽의 수호자>는 창을 역수로 잡아 머리 높이까지 들어 올린 상태였다. 전형적인 투창의 준비 자세.
오싹.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적이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내 부정했다. 그럴 리 없다고. 하지만 직감이, 눈이, 이성이, 모든 것이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네가 생각하는 것이 진실이야.’
<환몽의 수호자>의 팔이 뻗어졌다. 너무나도 모범적인 투창의 자세였다. 팔을 떠난 거창(巨槍)은 푸른 섬광이 되어 쏘아졌다.
손을 쓸 틈도 없었다. 섬광처럼 날아온 수호자의 거창은 그대로…….
푹.
절명의 빛이 되어 유리의 심장을 꿰뚫었다.
달리던 다리가 멈췄다. 수호자의 거창에 관통당한 유리는 떨어지는 꽃잎처럼 천천히 바닥으로 쓰러졌다.
실제로는 짧은 시간. 하지만 현성에게는 영원과도 같았다.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그녀가 쓰러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유리…… 누…….”
말을 잇지 못했다. 유리의 몸이 회색으로 물들어가며 차갑게 굳어졌다.
삐빅.
거슬리는 소리가 귀에 들려오며 파티가 해체되었다. 파티장이던 그녀의 소멸로 파티 자체가 소멸한 것이다.
이어져 있던 연결 고리들이 사라져 갔다. 갑작스러운 파티의 와해를 느낀 모두의 시선이 유리와 현성 쪽으로 향했다.
“언……니……?”
“누나……?”
베오와 수정의 다리가 멎었다. 풀려 버린 동공으로 그들은 이미 빛무리가 되어 흩어져 가는 유리의 모습을 보았다.
모두가 현재 처한 상황을 잊었다. 완전히 소멸해 버린 유리가 있던, 그 빈자리를 바라보며 다들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인지했다.
모두를 묶어주던 그들의 리더가, 이 세상에서 소멸했다.
“언니!!”
수정이 달려들었다. 그 목소리에 현성의 정신이 깨어났다.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현성의 시선이 곧바로 <환몽의 수호자>에게로 향했다. 물빛의 기사는 자신의 가슴팍에 오른손을 짚고 있었다.
「나의 심장은 신들의 정원을 지키기 위해서만 존재하느니…….」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기사의 가슴팍에서부터 푸른빛으로 빛나는 무언가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검의 자루였다. 가슴속에서부터 솟아오른 그 검의 손잡이를 잡고 <환몽의 수호자>는 검을 뽑아 들었다. 물빛의 아름다운 장검이 심장으로부터 뽑혀 나왔다.
「침입자들이여, 신들의 정원을 짓밟으려 한 그 죄는, 파멸로도 다 갚지 못하리라…….」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 다리를 속박하던 결빙이 깨져 나갔다. 아름다운 물빛 장검을 든 기사는 가장 먼저 유리가 소멸한 자리로 달려가고 있는 소녀에게 시선을 보냈다.
“바보야, 도망쳐!”
현성은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환몽의 수호자>가 높이 도약했다. 그 덩치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민첩한 도약으로 기사는 순식간에 수정의 앞에 착지했다.
“아…….”
자신의 눈앞으로 다가온 죽음에 수정의 다리가 멈췄다. <환몽의 수호자>가 검을 들어 올렸다. 아름다운 물빛 장검이 허공에서 햇빛을 반사하며 파르르 떨렸다.
“이수정!”
베오의 발이 땅을 박찼다. 방해되는 무거운 갑옷은 손으로 뜯어버리고, 할버드만을 든 채 베오는 관문 내부를 질주했다.
“젠……자아아아아앙─!!”
베오가 포효했다. 그래도 느리다. 손에 들고 있는 할버드조차 무겁다. 베오는 망설임 없이 할버드를 내던졌다. 땅을 박차는 다리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기사의 검이 휘둘러졌다. 허공에 아름다울 정도로 완벽한 호를 그리며, 아름다운 물빛 장검은 소녀를 양단하기 위해 떨어졌다.
검이 소녀에게 닿기 직전, 육중한 몸이 소녀를 감싸며 대신 그 검을 받아냈다.
“안…… 늦었……다…….”
베오가 히죽, 웃었다. 갑옷과 무기마저 내던져 버린 베오의 등에 대각선 형태의 검상이 새겨졌다. HP가 한순간에 주욱 깎였다. 자신을 감싼 베오의 얼굴을 보며 수정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야…… 너, 무슨…….”
“야, 뭐 하냐? 기껏 막아줬더니…… 빨리 튀어…… 멍청아.”
장난스레 말한 베오는 감싸고 있던 두 팔을 풀고 거세게 수정을 밀어냈다.
그 순간, 수정은 보았다, 베오가 자신을 밀어낸 직후에 물빛 검이 베오의 심장을 관통하는 것을.
그리고 깨달았다, 눈앞의 소년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방패가 되었음을.
“튀어서…… 꼭 살아……!”
베오는 히죽 웃으며 마지막 당부를 남기고 회색으로 굳어갔다. 눈앞에서 또 한 명이 소멸해 간다. 그 모습을 본 소녀의 마음은 남김없이 부서졌다.
“아…… 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
수정이 괴성을 질렀다. 마음이 부서져 버린 소녀는 어떠한 할 말도 찾지 못했다. 그저 마음이 부서지는 소리를, 입으로 내고 있을 뿐.
푹.
그런 소녀의 심장에 기사의 검이 꽂혔다.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환몽의 수호자>는 마치 쓰레기를 치워 버리듯 검을 뽑아 수정을 내던졌다. 또 한 명의 팀원이 이 세상에서 소멸했다.
칠흑의 유성이 잔상을 남기며 <환몽의 수호자>에게 닥쳐들었다. 이미 두 눈의 동공이 풀려 버린 유진이 칠흑의 창을 휘둘러 기사의 몸에 4연격 찌르기 공격, <쿼드러플 피어싱>을 꽂았다.
“죽어.”
살의로 가득 찬 안광을 빛내며 유진이 창을 휘둘렀다. 그 눈에는 절망과 살의, 두 가지 감정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신속하게 칠흑의 창을 찔러오는 유진 쪽으로 시선을 돌린 <환몽의 수호자>는 무심하게 검을 휘둘렀다. 물빛의 검이 유진의 허리를 깊게 베었다.
“너 따위가…… 너 따위가……!!”
유진이 이를 까득, 갈았다. 창을 쥔 손이 덜덜 떨려왔지만, 결코 창을 놓지 않았다.
그녀는 곧바로 최강의 일격 스킬, <신터레이션>을 준비했다. 창을 쥔 손과 땅을 박찰 발에 힘을 준다.
물빛의 검이 높이 들어 올려졌다. 유진의 발이 땅을 박찼다. 본래 돌진 스킬은 먼 거리를 순식간에 좁히며 공격하는 스킬. 하지만 지금은 그 돌진에 쓸 힘을 공격에 실었다.
섬광이 된 유진의 창이 <환몽의 수호자>의 심장을 깊이 파고들었다. 동시에 물빛의 장검이 유진의 몸을 양단했다. 그녀가 목숨을 던져 가면서 가한 마지막 일격조차 수호자의 숨통을 끊을 수는 없었다. 그저 수호자의 HP를 소량 감소시켰을 뿐.
마지막 팀원마저 이 세상에서 소멸해 간다. 현성은 그저 멍하니 황금빛 가루가 꽃잎처럼 흩날리는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이 믿고 싶지 않은 광경이 꿈이기만을 바랄 뿐.
<환몽의 수호자>가 걸어온다. 오른손에는 증오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물빛 장검을 들고, 기사는 절망한 청년의 앞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