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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룡전 1권 (2화)
1장 혈귀곡 (2)
막 소은설이 혈귀곡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계곡으로부터 갑자기 짙은 안개가 밀려 올라왔다.
안개는 순식간에 다리 주변을 감쌌다.
“이, 이런!”
당황한 소은설이 입을 여는 순간 안개가 입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기분 나쁜 끈적함이 그녀의 입안을 채웠다.
쉬시식! 쉬이익!
키키키키키!
동시에 으스스하고 기괴한 괴성이 귀를 자극했다.
‘혀, 혈귀?’
소은설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혈귀곡에는 사람의 피를 빨아 먹는 혈귀가 살고 있다는 소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정신 차려야 해!”
소은설은 이를 악물었다.
호랑이에게 잡혀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버지의 실종에 대한 의문을 밝혀내지 못한 채 여기서 허무하게 죽을 순 없었다.
그녀는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눈을 똑바로 떴다.
스으으윽!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안개가 살아 있는 것처럼 좌우로 스윽 밀려나더니, 그곳에 사람 한 명 정도가 간신히 오고 갈 수 있는 좁은 길이 나타난 것이다.
길 좌우로는 수명을 짐작할 수 없는 오래된 노송들이 늘어서 신비로운 풍경을 만들어 내고, 바닥은 하얀 자갈이 빼곡히 깔려 어둠 속에서도 또렷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소은설은 얼떨떨한 얼굴로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길을 바라봤다.
분명 그녀가 다리를 건넜을 당시에는 없었던 길이다.
그야말로 귀신에라도 홀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소은설은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길을 따라 움직여야 하는 것인지 쉽게 판단이 서질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곳에 머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든 탈출할 방법을 찾으려면 어디로든 움직여야 했다.
“좋아, 갈 때까지 가 보자!”
잠시 고민하던 소은설이 결심이 선듯 조심스럽게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어디서 무엇이 나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녀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길을 따라 걸은 지 반 각쯤 되었을 때였다.
“으음…….”
잔뜩 긴장한 채로 걸음을 옮기던 소은설이 갑자기 신음을 토해 냈다.
어쩐지 길을 걸을수록 의식이 점점 몽롱해졌기 때문이다.
‘상처에서 흘린 피 때문인가? 아니면…… 아까 들이마신 안개?’
소은설이 눈살을 찌푸렸다.
현재 그녀의 온몸은 상처투성이였다.
하지만 비수에 스친 어깨의 상처가 조금 깊기는 했지만 의식이 흐려질 정도로 피를 많이 흘리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그녀의 상태는 안개 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안개에 의식을 잃게 하는 어떤 성분이 들어 있었던 모양이다. 만일 그것이 독이라면 큰일이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어쩐지 기분이 환각제를 먹은 것처럼 점점 묘하게 들뜨고 있었다는 것이다.
“소은설! 정신 차려!”
짝! 짝!
그녀는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때리며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독이 아니더라도 이대로 아무도 없는 산길에서 쓰러진다면 그녀는 죽은 목숨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지금 있는 곳은 그 누구도 살아나오지 못했다는 혈귀곡이다.
하지만 이미 눈꺼풀은 반쯤 감겨 있었고, 다리는 천근만근이었다.
“으응? 저, 저게 뭐지?”
그때였다.
멀어지는 의식과 사투를 벌이던 소은설이 갑자기 멍한 표정으로 앞쪽을 바라봤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놀랍게도 언제 나타났는지 아담한 모옥이 한 채 서 있었다.
하얀 길은 바로 그 모옥을 향해 이어지고 있었다.
모옥은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듯 전체가 이름 모를 잡초와 덩굴들로 뒤덮여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분명 없었는데……. 거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소은설은 두 눈을 비비며 자신이 잘못 본 것은 아닌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하지만 모옥은 여전히 눈앞에 존재하고 있었다.
방 두 칸에 부엌이 하나 딸린 그야말로 평범한 집이었다.
그런데 무언가 알 수 없는 끌림이 그녀를 모옥으로 이끌고 있었다.
나른하고 흐릿해진 의식 속에서도 왠지 반드시 모옥으로 가야만 한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것이다.
소은설은 귀신에라도 홀린 듯이 모옥을 향해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의식은 안개 때문인지 아편이라도 피운 것처럼 몽롱했고,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어느새 두려움과 경계심도 사라지고 그녀의 얼굴에는 멍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끼이익!
소은설이 방문을 열자 오래된 경첩이 비명을 토해 냈다.
“어라? 누가 있었네……. 안녕하세요? 헤헤,”
방으로 들어서던 소은설이 반쯤 풀린 눈으로 손을 흔들었다. 방 안쪽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 하나가 앉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내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잠시 눈을 비비며 사내를 바라보던 소은설이 히죽거리며 웃었다.
사내는 애초에 그녀의 인사를 받을 수 없었다.
“에이…… 조각상이네.”
자세히 보니 그녀가 사람이라 여겼던 것은 돌로 만든 조각상이었던 것이다.
기껏해야 스물이 갓 되었을 듯싶은 미청년의 조각상이었는데, 너무도 정교해서 당장이라도 일어서서 말을 걸듯 생동감이 느껴졌다.
“짜식, 잘생겼네…….”
소은설이 약에 취한 듯 입을 헤 벌리며 말했다.
조각상의 사내는 두 눈을 감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조각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각이 조각 같은 얼굴을 하고 있네……. 헤헤.”
철푸덕!
소은설은 흐리멍덩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의식은 지금 상황이 꿈인지 현실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흐릿해져 있었다.
아버지의 실종도, 초가장 무사들에게 쫓기고 있다는 사실도, 자신이 혈귀곡에 들어왔다는 것도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
“아…… 피곤하다…….”
그저 이제는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싶었다.
툭!
결국 소은설은 청년의 조각상을 두 눈에 담은 채 의식을 잃고 말았다.
순간 비수에 맞은 그녀의 어깨에서 핏물이 한 방울 흘러나와 방바닥을 적셨다.
또르륵!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핏방울이 마치 구슬처럼 땅에 한 번 튕기더니 그 모습 그대로 바닥에 내려선 것이다.
잠시 멈춰 서는 듯했던 핏방울이 가늘게 진동하더니 어느 순간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스르륵!
홍옥처럼 붉은 핏방울이 먼지 가득한 바닥 위를 미끄러져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톨의 먼지도 핏방울에 묻거나 섞이지 않았다.
핏방울이 향하는 곳은 바로 청년의 조각상이었다.
나방이 불빛에 이끌리듯 핏방울은 조각상을 향해 천천히 끌려갔다.
마침내 핏방울이 조각상과 부딪혔다.
한데 놀랍게도 핏방울이 조각상으로 흔적도 없이 빨려 들어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터엉!
바로 그 순간.
모옥 전체에 커다란 울림이 일었다.
귀를 멍하게 하는 무언가 두려우면서도 공허한 울림은 한동안 모옥을 가득 채웠다.
스으으윽!
그리고.
소은설의 상처들로부터 핏방울들이 하나둘씩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츠츠츠츠!
허공에 떠오른 핏방울들은 빠른 속도로 조각상으로 빨려 들어갔다.
쩌저적!
동시에 조각상에 미세한 균열이 일어났다.
쉬쉬쉬쉬익!
어느새 핏방울들은 가느다란 혈선이 되어 조각상으로 긴 줄을 만들고 있었다.
혈선이 짙어질수록 조각상의 균열은 점점 더 심해졌고, 어느 순간 균열의 틈새로부터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번쩍!
콰아아아앙!
조각상의 감겼던 두 눈이 열리며 강렬한 섬광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 * *
“으으음…….”
소은설은 마치 머리 한쪽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극심한 두통과 함께 깨어났다.
밤새도록 독주(毒酒)를 마신 것처럼 온몸이 욱신거리고, 무거웠다.
“아……. 어떻게 된 일이지?”
분명 모옥에 들어왔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는 거의 혼미한 상태였던지라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문을 열고 들어오긴 한 것 같은데, 그럼 여긴 모옥 안인가?’
소은설은 머리를 부여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악! 누, 누구세요?”
막 일어서려던 소은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재빠르게 물러났다.
바로 옆에서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청년 하나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 대답 없이 소은설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일 리가 없지…….”
실망한 얼굴로 혼잣말을 내뱉으며 사내가 다시 소운설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그의 눈에 왠지 모를 쓸쓸함이 잠깐 동안 스치고 지나갔다.
“어떻게 이곳까지 온 거지?”
사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소은설은 잠시 멍한 얼굴로 사내를 바라봤다.
‘혈귀곡에 사람이 살고 있다니…….’
현재 그녀가 있는 곳은 혈귀곡이 분명했다.
하면 이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혹시 혈귀곡 안에 들어왔다 빠져나오지 못한 자일까? 아, 아니면…….’
혈귀곡의 유래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난 소은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혈귀곡에 사람 피를 빨아먹는 혈귀가 산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던 것이다.
“다, 당신은 사, 사람인가요? 어, 어떻게 혈귀곡에 있는 거죠?”
소은설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사내가 좌우를 두리번거리곤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
“네…….”
사내가 못마땅한 듯 한쪽 눈을 찡그렸다.
“일단, 네 물음에 답하자면 나는 사람이 맞다. 그럼 이제 내 질문에 대답할 차례군. 다시 한 번 묻지. 어떻게 이곳까지 들어온 거지?”
사내가 빤히 쳐다보자 소은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저는 저 하얀 자갈길을 따라서 들어왔어요.”
소은설이 방 밖을 가리켰다.
“무슨 길?”
사내가 방문을 열고 밖을 살폈다.
“어, 어라?”
사내를 따라 고개를 돌린 소은설의 두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어제 자신이 걸어왔던 하얀 자갈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것이다.
“부, 분명 길이 있었는데, 소, 소나무가 서 있고!”
소은설이 손짓 발짓을 하며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사내가 유심히 쳐다봤다.
“역시 그녀처럼 똑똑하지도 않고……. 한데, 어떻게 혼원구궁마라진(混元九宮魔羅陳)을 통과할 수 있었던 거지…….”
사내가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혼원구궁마라진을 파훼할 수 있는 이는 세상에서 오로지 둘뿐이다. 자신과 또 한 사람, 바로 진을 설치한 장본인인 여령…….
한참을 횡설수설하던 소은설이 고개를 돌려 생각에 잠긴 사내를 힐끔 거렸다.
‘생긴 거나, 행동을 보면…… 혀, 혈귀는 아닌 것 같은데…….’
단정한 유삼 차림의 사내는 그야말로 옥으로 깎아 놓은 듯한 절세의 미남이었다. 게다가 차가워 보이기는 했지만, 마치 여인처럼 하얀 피부와 약간은 연약해 보이는 호리호리한 몸매는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혈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 혈귀는 아닐 거야. 만일 저자가 혈귀라면 내가 지금까지 무사할 리가 없지.’
사내가 혈귀가 아니라고 여겨지자 두려움이 어느 정도 가셨다. 최소한 목내이가 되지는 않으리라.
‘한데, 왠지 어디서 한 번 본 듯한 느낌이야.’
아까부터 어쩐지 사내의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무언가 생각이 날 듯 말 듯 하면서도 잘 연결이 되지 않았다.
“저……. 당신은 누구죠? 어떻게 혈귀곡에 있는 거죠?”
어느 정도 마음을 가라앉힌 소은설이 다시 한 번 물었다.
만일 그가 실종자들 중 하나라면 이곳에 다른 사람들도 존재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간 혈귀곡에서 사라진 사람들의 숫자가 무려 팔백 명이 넘었고, 그중 시체가 발견된 이들은 겨우 스무 명 정도였기 때문이다.
훗!
입가에 오만한 미소를 머금은 사내가 툭 내뱉듯 말했다.
“광룡.”
소은설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을 껌뻑거렸다.
‘갑자기 광룡이라니 뭔 소리야?’
소은설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사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혈마를 죽인 광룡이 바로 나다.”
마치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듯, 조금은 광오함이 담긴 목소리였다.
잠깐 동안 정적이 흘렀다.
‘보아하니 무슨 별호 같은데…….’
1장 혈귀곡 (2)
막 소은설이 혈귀곡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계곡으로부터 갑자기 짙은 안개가 밀려 올라왔다.
안개는 순식간에 다리 주변을 감쌌다.
“이, 이런!”
당황한 소은설이 입을 여는 순간 안개가 입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기분 나쁜 끈적함이 그녀의 입안을 채웠다.
쉬시식! 쉬이익!
키키키키키!
동시에 으스스하고 기괴한 괴성이 귀를 자극했다.
‘혀, 혈귀?’
소은설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혈귀곡에는 사람의 피를 빨아 먹는 혈귀가 살고 있다는 소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정신 차려야 해!”
소은설은 이를 악물었다.
호랑이에게 잡혀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버지의 실종에 대한 의문을 밝혀내지 못한 채 여기서 허무하게 죽을 순 없었다.
그녀는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눈을 똑바로 떴다.
스으으윽!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안개가 살아 있는 것처럼 좌우로 스윽 밀려나더니, 그곳에 사람 한 명 정도가 간신히 오고 갈 수 있는 좁은 길이 나타난 것이다.
길 좌우로는 수명을 짐작할 수 없는 오래된 노송들이 늘어서 신비로운 풍경을 만들어 내고, 바닥은 하얀 자갈이 빼곡히 깔려 어둠 속에서도 또렷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소은설은 얼떨떨한 얼굴로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길을 바라봤다.
분명 그녀가 다리를 건넜을 당시에는 없었던 길이다.
그야말로 귀신에라도 홀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소은설은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길을 따라 움직여야 하는 것인지 쉽게 판단이 서질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곳에 머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든 탈출할 방법을 찾으려면 어디로든 움직여야 했다.
“좋아, 갈 때까지 가 보자!”
잠시 고민하던 소은설이 결심이 선듯 조심스럽게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어디서 무엇이 나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녀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길을 따라 걸은 지 반 각쯤 되었을 때였다.
“으음…….”
잔뜩 긴장한 채로 걸음을 옮기던 소은설이 갑자기 신음을 토해 냈다.
어쩐지 길을 걸을수록 의식이 점점 몽롱해졌기 때문이다.
‘상처에서 흘린 피 때문인가? 아니면…… 아까 들이마신 안개?’
소은설이 눈살을 찌푸렸다.
현재 그녀의 온몸은 상처투성이였다.
하지만 비수에 스친 어깨의 상처가 조금 깊기는 했지만 의식이 흐려질 정도로 피를 많이 흘리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그녀의 상태는 안개 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안개에 의식을 잃게 하는 어떤 성분이 들어 있었던 모양이다. 만일 그것이 독이라면 큰일이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어쩐지 기분이 환각제를 먹은 것처럼 점점 묘하게 들뜨고 있었다는 것이다.
“소은설! 정신 차려!”
짝! 짝!
그녀는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때리며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독이 아니더라도 이대로 아무도 없는 산길에서 쓰러진다면 그녀는 죽은 목숨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지금 있는 곳은 그 누구도 살아나오지 못했다는 혈귀곡이다.
하지만 이미 눈꺼풀은 반쯤 감겨 있었고, 다리는 천근만근이었다.
“으응? 저, 저게 뭐지?”
그때였다.
멀어지는 의식과 사투를 벌이던 소은설이 갑자기 멍한 표정으로 앞쪽을 바라봤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놀랍게도 언제 나타났는지 아담한 모옥이 한 채 서 있었다.
하얀 길은 바로 그 모옥을 향해 이어지고 있었다.
모옥은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듯 전체가 이름 모를 잡초와 덩굴들로 뒤덮여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분명 없었는데……. 거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소은설은 두 눈을 비비며 자신이 잘못 본 것은 아닌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하지만 모옥은 여전히 눈앞에 존재하고 있었다.
방 두 칸에 부엌이 하나 딸린 그야말로 평범한 집이었다.
그런데 무언가 알 수 없는 끌림이 그녀를 모옥으로 이끌고 있었다.
나른하고 흐릿해진 의식 속에서도 왠지 반드시 모옥으로 가야만 한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것이다.
소은설은 귀신에라도 홀린 듯이 모옥을 향해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의식은 안개 때문인지 아편이라도 피운 것처럼 몽롱했고,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어느새 두려움과 경계심도 사라지고 그녀의 얼굴에는 멍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끼이익!
소은설이 방문을 열자 오래된 경첩이 비명을 토해 냈다.
“어라? 누가 있었네……. 안녕하세요? 헤헤,”
방으로 들어서던 소은설이 반쯤 풀린 눈으로 손을 흔들었다. 방 안쪽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 하나가 앉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내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잠시 눈을 비비며 사내를 바라보던 소은설이 히죽거리며 웃었다.
사내는 애초에 그녀의 인사를 받을 수 없었다.
“에이…… 조각상이네.”
자세히 보니 그녀가 사람이라 여겼던 것은 돌로 만든 조각상이었던 것이다.
기껏해야 스물이 갓 되었을 듯싶은 미청년의 조각상이었는데, 너무도 정교해서 당장이라도 일어서서 말을 걸듯 생동감이 느껴졌다.
“짜식, 잘생겼네…….”
소은설이 약에 취한 듯 입을 헤 벌리며 말했다.
조각상의 사내는 두 눈을 감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조각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각이 조각 같은 얼굴을 하고 있네……. 헤헤.”
철푸덕!
소은설은 흐리멍덩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의식은 지금 상황이 꿈인지 현실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흐릿해져 있었다.
아버지의 실종도, 초가장 무사들에게 쫓기고 있다는 사실도, 자신이 혈귀곡에 들어왔다는 것도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
“아…… 피곤하다…….”
그저 이제는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싶었다.
툭!
결국 소은설은 청년의 조각상을 두 눈에 담은 채 의식을 잃고 말았다.
순간 비수에 맞은 그녀의 어깨에서 핏물이 한 방울 흘러나와 방바닥을 적셨다.
또르륵!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핏방울이 마치 구슬처럼 땅에 한 번 튕기더니 그 모습 그대로 바닥에 내려선 것이다.
잠시 멈춰 서는 듯했던 핏방울이 가늘게 진동하더니 어느 순간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스르륵!
홍옥처럼 붉은 핏방울이 먼지 가득한 바닥 위를 미끄러져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톨의 먼지도 핏방울에 묻거나 섞이지 않았다.
핏방울이 향하는 곳은 바로 청년의 조각상이었다.
나방이 불빛에 이끌리듯 핏방울은 조각상을 향해 천천히 끌려갔다.
마침내 핏방울이 조각상과 부딪혔다.
한데 놀랍게도 핏방울이 조각상으로 흔적도 없이 빨려 들어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터엉!
바로 그 순간.
모옥 전체에 커다란 울림이 일었다.
귀를 멍하게 하는 무언가 두려우면서도 공허한 울림은 한동안 모옥을 가득 채웠다.
스으으윽!
그리고.
소은설의 상처들로부터 핏방울들이 하나둘씩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츠츠츠츠!
허공에 떠오른 핏방울들은 빠른 속도로 조각상으로 빨려 들어갔다.
쩌저적!
동시에 조각상에 미세한 균열이 일어났다.
쉬쉬쉬쉬익!
어느새 핏방울들은 가느다란 혈선이 되어 조각상으로 긴 줄을 만들고 있었다.
혈선이 짙어질수록 조각상의 균열은 점점 더 심해졌고, 어느 순간 균열의 틈새로부터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윽고.
번쩍!
콰아아아앙!
조각상의 감겼던 두 눈이 열리며 강렬한 섬광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 * *
“으으음…….”
소은설은 마치 머리 한쪽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극심한 두통과 함께 깨어났다.
밤새도록 독주(毒酒)를 마신 것처럼 온몸이 욱신거리고, 무거웠다.
“아……. 어떻게 된 일이지?”
분명 모옥에 들어왔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는 거의 혼미한 상태였던지라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문을 열고 들어오긴 한 것 같은데, 그럼 여긴 모옥 안인가?’
소은설은 머리를 부여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악! 누, 누구세요?”
막 일어서려던 소은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재빠르게 물러났다.
바로 옆에서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청년 하나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 대답 없이 소은설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일 리가 없지…….”
실망한 얼굴로 혼잣말을 내뱉으며 사내가 다시 소운설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그의 눈에 왠지 모를 쓸쓸함이 잠깐 동안 스치고 지나갔다.
“어떻게 이곳까지 온 거지?”
사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소은설은 잠시 멍한 얼굴로 사내를 바라봤다.
‘혈귀곡에 사람이 살고 있다니…….’
현재 그녀가 있는 곳은 혈귀곡이 분명했다.
하면 이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혹시 혈귀곡 안에 들어왔다 빠져나오지 못한 자일까? 아, 아니면…….’
혈귀곡의 유래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난 소은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혈귀곡에 사람 피를 빨아먹는 혈귀가 산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던 것이다.
“다, 당신은 사, 사람인가요? 어, 어떻게 혈귀곡에 있는 거죠?”
소은설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사내가 좌우를 두리번거리곤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
“네…….”
사내가 못마땅한 듯 한쪽 눈을 찡그렸다.
“일단, 네 물음에 답하자면 나는 사람이 맞다. 그럼 이제 내 질문에 대답할 차례군. 다시 한 번 묻지. 어떻게 이곳까지 들어온 거지?”
사내가 빤히 쳐다보자 소은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저는 저 하얀 자갈길을 따라서 들어왔어요.”
소은설이 방 밖을 가리켰다.
“무슨 길?”
사내가 방문을 열고 밖을 살폈다.
“어, 어라?”
사내를 따라 고개를 돌린 소은설의 두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어제 자신이 걸어왔던 하얀 자갈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것이다.
“부, 분명 길이 있었는데, 소, 소나무가 서 있고!”
소은설이 손짓 발짓을 하며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사내가 유심히 쳐다봤다.
“역시 그녀처럼 똑똑하지도 않고……. 한데, 어떻게 혼원구궁마라진(混元九宮魔羅陳)을 통과할 수 있었던 거지…….”
사내가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혼원구궁마라진을 파훼할 수 있는 이는 세상에서 오로지 둘뿐이다. 자신과 또 한 사람, 바로 진을 설치한 장본인인 여령…….
한참을 횡설수설하던 소은설이 고개를 돌려 생각에 잠긴 사내를 힐끔 거렸다.
‘생긴 거나, 행동을 보면…… 혀, 혈귀는 아닌 것 같은데…….’
단정한 유삼 차림의 사내는 그야말로 옥으로 깎아 놓은 듯한 절세의 미남이었다. 게다가 차가워 보이기는 했지만, 마치 여인처럼 하얀 피부와 약간은 연약해 보이는 호리호리한 몸매는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혈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 혈귀는 아닐 거야. 만일 저자가 혈귀라면 내가 지금까지 무사할 리가 없지.’
사내가 혈귀가 아니라고 여겨지자 두려움이 어느 정도 가셨다. 최소한 목내이가 되지는 않으리라.
‘한데, 왠지 어디서 한 번 본 듯한 느낌이야.’
아까부터 어쩐지 사내의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무언가 생각이 날 듯 말 듯 하면서도 잘 연결이 되지 않았다.
“저……. 당신은 누구죠? 어떻게 혈귀곡에 있는 거죠?”
어느 정도 마음을 가라앉힌 소은설이 다시 한 번 물었다.
만일 그가 실종자들 중 하나라면 이곳에 다른 사람들도 존재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간 혈귀곡에서 사라진 사람들의 숫자가 무려 팔백 명이 넘었고, 그중 시체가 발견된 이들은 겨우 스무 명 정도였기 때문이다.
훗!
입가에 오만한 미소를 머금은 사내가 툭 내뱉듯 말했다.
“광룡.”
소은설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을 껌뻑거렸다.
‘갑자기 광룡이라니 뭔 소리야?’
소은설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사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혈마를 죽인 광룡이 바로 나다.”
마치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듯, 조금은 광오함이 담긴 목소리였다.
잠깐 동안 정적이 흘렀다.
‘보아하니 무슨 별호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