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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링카 1권 (2화)
1. 새끼고양이를 줍다 (2)/

“왜라니? 방금 전에 네가 와서 깨웠잖아? 난 정말 일어나고 싶지 않았어. 조금 더 자고 싶었단 말이야. 잠든 지 얼마나 됐다고…”
“아니, 아니야. 내가 말하는 건 그게 아니라고.”
갑자기… 그야말로 뜬금없이, 그는 심각하게 굳은 얼굴을 해가지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상황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정리를 해보자. 우선, 얼마 전 네가 잠든 바로 그날 나도 수면에 들어갔다. 만일을 위해 네가 깨어날 준비를 마치면 자연스럽게 내가 느낄 수 있도록 마법을 걸어놓은 상태였어. 그런데 내가 잠에서 깨어나 유희를 즐기러 다닐 때까지도 넌 깨어나지 않았고 다행히 그때까지 이곳에 들어오는 자들도 없었지. 그래서 난 마음 놓고 지금의 유희를 즐기기로 했던 거야.”
“…그, 그런데?”
“근데 어젯밤에 갑자기 네가 깨어났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 아무런 준비과정도 없이, 그야말로 악몽을 꾸다 퍼뜩 정신을 차린 것처럼. 그래서 문제가 생긴 줄 알고 부랴부랴 달려왔는데 네 옆에 저 꼬맹이가 누워있었던 거야. 그리고 넌 이미 깨버린 잠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었고. 자그마치 삼백칠십 년이나 자 놓고도 말이지.”
“헉! 뭐, 뭐라고? 몇 년?”
“휴우, 믿어지지 않겠지만 넌 정확하게 삼백, 칠십, 이년 하고도 한 달반을 잤어. 흐음, 나보다도 오래 자다니 과연 내 아들이구나 하고 생각했단다. 으허허허.”
나는 입을 쩌억 벌린 상태로 서서히 굳어졌다. 삼백… 커허허헉. 생각만 해도 숨 막히는 이 말을 난 진정 믿어야 하는 것일까? 그저 잠시 잠들었다가 깨어난 것만 같은데? 계속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거짓말이지?”
“아니.”
퍼렇게 질린 얼굴로 물은 말에 킬군은 가차 없이 칼질을 했다. 아니… 아니… 으윽, 그럼 정말로…? 털썩. 나는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자 킬군이 내 앞에 마주 쪼그려 앉으며 진지한 투로 말했다.
“아무래도 저 꼬맹이가 널 깨운 게 틀림없는 것 같아. 그렇지 않고서는 설명이 안돼. 갑자기 깨어날 만큼 저 꼬맹이가 네게 무슨 자극을 준 게 틀림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나 몰래 여기까지 들어올 수는 없었을 텐데… 정말로 뭐 생각나는 거 없냐?”
“아니. 난 그냥… 꿈을 꾼 것 밖에는.”
“꿈?”
“그래. 이타라가 찾아와서… 나는, 그… 마중을 나갔었는데… 헉!”
“왜, 왜 그래?”
깨어나기 직전에 꾸었던 꿈을 생각하다가 나는 순간 헛바람을 집어 삼켰다. 무심코 바라본 내 손이 온통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있지… 저 꼬맹이, 아무래도 내가 데려왔나 봐.”
한쪽 볼을 실룩거리면서 말하자 킬군은 말없이 내 손을 내려다보다 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곤 뚜벅뚜벅 침대로 다가가 젖은 시트채로 꼬맹이를 들쳐 안는 것이었다.
“어? 어쩌려고 그래?”
“내다 버릴 거다.”
“뭐어? 왜? 아직 살아있는데…”
“그래도 상관없어. 이놈 아무래도 맘에 안 들어. 이곳까지 혼자 살아 들어왔다는 것도 그렇지만 널 깨운 것도 왠지 불길해.”
“그렇지만…”
내가 미처 붙잡기도 전에 킬군은 꼬마를 안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래서 어찌 할 바를 모른 채 부랴부랴 따라나섰는데 그가 막 대문을 나서자마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땡그랑, 땡그랑, 땡그랑…
“어라라라? 이 소리는…?”
순간 꿈속에서 들은 것도 같은 맑은 풍경소리가 바로 생생하게 귓전을 때리는 것이 아닌가!
“들었지? 너도 들었지? 그치?”
“듣기는 들었는데… 그 소리가 왜 이 꼬맹이한테서 나는 거라냐?”
내가 달려들면서 소리치기도 전에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 마냥 킬군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리고 꽤 곤란한 상황을 만난 것처럼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었다. 놈은 대체 뭘 알고 있는 거지이?
“키이일? 너는 이 소리를 알고 있는 거지?”
“천만에.”
그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부인을 하더니 재빨리 돌아섰다. 그래서 나는 그의 옷자락을 덥석 잡아챘고 그는 또 흠칫 놀라더니 잠시 후 고개만 삐죽 돌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붙잡지 마. 그러는 게 너를 위하고 곧 나를 위하는 길이야. 이놈은 우리에게 백해무익한 것을 가지고 온 놈이라고.”
“흐응, 그래에? 그게 뭔데?”
“으으윽… 말 못해. 안 해. 단, 내가 이러는 것은 순전히 너를 위해서라는 것만 알아둬. 즉, 지금 나를 잡으면 네 신상에 무지무지 후회할 일이 생길 거라는 말이다.”
“흥, 말도 안돼는 소리. 네가 후회를 했으면 했지, 내가 후회할 일이 어디 있다고 그래?”
“있어. 있고말고. 그러니까 조용히 그 손놓고 들어가라앙?”
그는 지나치리만큼 단호하게 외쳐놓고 도망치듯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나섰다. 마치 누군가의 목소리 같은 땡그랑거리는 풍경소리를 요란하게 흘리면서.
“잠까안! 멈춰. 안되겠어. 아무래도 그 소리가 수상해.”
결국 나는 그를 다시 붙잡고 말았다. 그냥 보냈다가는 궁금해서 홱 돌아버리거나 그도 아니면 죄책감에 못 이겨 말라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하지 말라는 짓은 더 하고 싶은 반발 심리도 쬐금 있긴 했지만. 어쨌든 후회를 하더라도 소리의 정체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나는 있는 대로 고집을 부려댔다. 그리하여 끝내는 킬군에게 항복을 받아냈는데…
“꼬맹이 놈의 품속을 뒤져봐라. 그럼 왠지 엄청 기분 나쁘게 생긴 물건이 나올 거야. 젠장. 이젠… 나도 몰라.”
“흐응, 기분 나쁘게 생긴 물건이라고?”
꼬맹이를 내려놓고 고개를 팩 돌리는 킬군을 한번 슥 올려다 봐준 후 나는 조심스럽게 녀석의 품속을 뒤졌다. 그러자 동전 몇 개가 든 낡아빠진 가죽 주머니와 약간 낯익으면서도 정말로 엄청 기분 나쁘게 생긴 누리끼리한 종이 두루마리 하나가 내 앞으로 굴러 나오는 것이었다. 붉은색 인장으로 봉인된 너덜더덜한 종이 두루마리. 꼬맹이가 이곳까지 오는 것이 가능하게 만든 바로 그 물건!
“왜, 왠지… 기분이 안 좋아.”
“그렇지? 그러게 내가 뭐랬냐? 후회할 거라고 했잖아?”
“그럼, 정말로 ‘그거’란 말이야?”
“아닐 것 같냐?”
꿀꺽. 종이 두루마리를 보자마자 난 갑자기 배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기증도 나고 입맛도 없어지고…
“끄응…”
“아앗!”
종이 두루마리를 멀거니 바라보면서 갖은 고민을 하고 있는 사이 꼬맹이가 낮은 신음 소리를 내더니 희미하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만 그것을 냉큼 품속에 집어넣고 아무 짓도 안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근데 왜 이렇게 속이 뜨끔거리는 거지?
“어, 어쩔 수 없잖아? 이걸 다른 사람이 보게 할 수는 없어.”
“누가 뭐랬냐? 잘 했다. 암, 잘했고말고. 그럼 이제 이 꼬마만 버리고 오면 되겠군.”
점점 파랗게 변해가는 꼬마를 내려다보면서 그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미 그가 가져온 것을 받은(?) 이상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됐느냐 하면… 퍽!
“이 나쁜 놈아아…!”
다시 꼬마를 안아드는 킬군을 발로 차버리고 꼬마를 빼앗아 안은 다음 후다닥 집안으로 들어와 문을 걸어 잠가버렸다. 그래봤자 놈은 워프해서 들어와 벌써 나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살려내서 뭘 어쩌려고 그래? 그걸 가져온 이상 귀찮은 일이 생길게 뻔한데.”
“시끄러. 아무리 그래도 그냥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 살려내서 소원 하나만 들어주면 그만이잖아. 그리고… 이 꼬맹이 아버지를 찾고 있단 말야.”
“……”
내 말에 킬군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내가 본격적인 치유 마법을 걸어 꼬맹이를 치료하는 동안 계속 말이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다고 해서 약해질 내가 아니었다.
“그렇게 일렁거리는 눈으로 바라보지 마! 기분 나빠.”
“쳇, 매정한 녀석 같으니라고. …저리 비켜봐.”
눈에 보이는 상처를 모두 치료하자 그는 나를 옆으로 옮겨 놓고 꼬맹이를 공중에 둥둥 띄워 올렸다. 그런 다음, 지하에 있는 따뜻한 온천물에 던져 넣고는 운디네를 불러 깨끗하게 씻기라고 말했다. 그래, 거기 까지는 좋았다. 근데 바로 직후에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하는 말이…
“너는 이 아빠가 직접 씻겨주마.”
…였다.
“이 변태 도마뱀, 죽어 버려!”
“아얏, 예전의 그 인간놈 하고는 같이 목욕도 했으면서 뭘 그래?”
“아버지니까 그랬지.”
“나도 아빠잖아?”
“누구 맘대로! 그러고 보니 대체 언제부터 네가 내 아빠가 된 거야? 악, 기분 나빠. 이제부터는 말끝마다 아들이라고 부르지 마!”
이 날은, 내가 오랜 잠에서 깨어난 날이었고 동시에 새끼고양이를 닮은 정체불명의 꼬맹이 하나가 ‘노예문서’를 들고 찾아온 날이기도 했다.

“으음, 정말 이상하단 말이야.”
말끔해진 꼬맹이를 침대위에 눕혀놓고 바라보면서 멍하니 중얼거리자 실프를 불러 내 머리카락을 말리고 있던 킬군이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놈은 길게 자란 머리칼을 내가 목욕 하면서 싹둑 잘라버린 일로 잔뜩 심술이 나있는 상태였다.
“뭐가 그리 이상하길래 아까부터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거냐?”
“음… 그게 말야, 이 꼬맹이 이상하게 낯이 익어. 분명 내가 아는 누군가를 닮은 것 같은데… 그게 누구인지 도무지 모르겠단 말야. 상자 속에 들어있던 문서를 가지고 있는 것도 이상하고. 그 녀석이 상자를 버릴 리는 없는데… 아무튼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무슨 사연이 있겠지. 지나간 시간이 있는데 그깟 사연 한두 가지쯤 없으려고? 자아, 다 됐다. 이제 옷을 갈아입어야지.”
커다란 모포를 뒤집어 쓴 채 어깨까지 짧아진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는 나를 불끈 안아 일으킨 킬군은 아무래도 직접 준비해 온 것이 분명한 옷가지를 꿰어 입히며 자신의 사정에 대해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지금 하고 있다는 그 유희에 대해서 말이다.
“타마르라고 하는 나라의 왕족행세를 하고 있어. 지금 대륙에서 가장 강한 제국이지. 그곳의 황제에겐 일곱 명의 왕자가 있는데 나는 그중의 다섯 번째야. 진짜는 다섯 살 때 죽었어. 누군가가 사주한 자객한테 쫓기다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는데 마침 그 자리를 지나가고 있던 내가 죽은 놈 대신 그 역할을 하게 된 거지. 그게 벌써 삼십 년 전이야.”
“흐응, 재미있어?”
“그럭저럭. 네가 깨어날 걸 대비해서 미리 아들내미가 있다고 말해 놓은 참이야. 좋은 스승에게 보내 공부를 시키고 있다고 그랬지. 어젠 황제의 생일 파티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다가 달려온 거야. 잘 됐지 뭐. 널 소개시키기엔 딱 좋은 기회라고.”
그는 신이 나서 정신없이 떠들어댔다. 하지만 그 사이 우연으로라도 크샤인 제국이나 화이트 문 혹은 모두스 가에 대한 이야기는 절대 꺼내지 않았다. 내가 무엇보다 궁금해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
“아, 깜빡할 뻔 했다. 가기 전에 폴리모프를 해야 돼. 그곳의 왕족은 모두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하고 있거든. 넌 색깔만 바꾸면 될 거야.”
발등까지 내려오는 새하얀 털 코트와 여우 털로 만든 빨간색 목도리를 둘러주며 그가 말했다. 그래서 나는 간단하게 머리칼과 눈동자 색깔을 바꿨는데 그러고 나니까 마치 오래전 염색을 하면서 살았을 때의 내 모습과 비슷하게 보였다. 하지만 그전에 앞머리를 제외한 머리칼을 모두 들어올려 정수리 부근에서 화려한 보석이 박힌 두 개의 금비녀로 고정시키는 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짧게 자르는 건데…
“그 나라 사람들은 치장하는 걸 좋아하지. 덕분에 보석 세공이나 금을 다루는 능력이 아주 뛰어나. 물론 훌륭한 세공품들도 많고. 자, 이것도 손가락에 껴보자.”
“싫어. 무겁고 귀찮아.”
“이봐 이봐, 넌 왕족이라고. 나 오딜란 세이 타마르의 아들이란 말야.”
킬은 자신이 마치 엄청 대단한 존재라도 되는 것 마냥 가슴을 탁탁 두드리며 마구 잘난 척을 해댔다. 하지만 정작 그런 자신은 온통 검은색 한가지로만 된 옷을 입고 별다른 장식품도 달지 않은 단출한 모습이었다. 물론 나는 여러 개의 목걸이와 반지에 팔찌까지 두른 엄청나게 화려한 차림이었고. 이에 의문을 느낀 나는 이마를 찡그리며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막심한 빈부의 격차는 무엇이냐고. 그랬더니 그는 ‘허허’ 웃는 얼굴로 짧게 대답했다. 가보면 안다고. 뭔가 심히 불길한 느낌을 주는 웃음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순식간에 치장을 마친 나는 타마르 제국의 다섯 번째 왕자 오딜란 세이 타마르의 아들인 파비안 카이 타마르가 되어 집을 나서게 되었다. 자그마치 삼백 칠십하고도 이년 한달반 만에. 그러나 이때까지도 나는 정말 그토록 긴 시간이 나를 비껴 지나갔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 달라진 것들에 대한 것도.
다가닥… 다가닥…
세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는 거대한 저택들이 늘어서 있는 넓고 긴 대로를 지나 어딘가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었다. 마차는 겉은 물론이고 안까지도 웬만한 집안의 거실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넓고 화려했는데 바닥에 깔린 양탄자부터 시작해서 천장에 박힌 화려한 금장식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귀해 보이지 않는 것이 없었다. 한마디로 엄청나게 금칠을 한 마차였다. 누가 집어가기에 딱 좋은.
나는 몸이 푹 파묻힐 정도로 푹신한 의자에 기대앉아 커튼을 걷고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가는 마차 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내 앞엔 킬군이 조용히 무게를 잡고 앉아 있었고 문 바로 옆엔 갈색 머리를 한 웬 청년이 혼자 다소곳이 앉아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가 바로 킬군을 따라 다니는 시종인 모양이었다.
‘흐음, 아그리파하고는 많이 다르네. 건물도 더 크고 화려하고 사람도 많고… 이런 곳이 있다는 얘기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