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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링카 1권 (4화)
1. 새끼고양이를 줍다 (4)/
나는 우선 다른 사람들을 모두 내보낸 다음 그의 앞에 의자를 놓고 마주 앉았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온, 하지만 원래는 이타라의 것이었던 노예문서를 꺼내 보여주며 물었다.
“이게 뭔지 알아?”
“그거… 그거! 내 거다! 아비 거다! 내 놔!”
문서를 보여주는 순간 그는 눈에 불을 켜더니 작은 짐승처럼 으르렁대며 나에게 덤벼들었다. 그래서 나는 먼저 그를 묶어놓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것을 곧 행동으로 옮겼던 것이다.
“끙… 끄응…”
“널 해치려는 것은 아니니까 얌전하게 굴어.”
바둥거리는 녀석을 시트로 꽁꽁 싸매 침대위에 던져놓고 나는 다시 한번 심호흡을 했다.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아 사정을 말해주기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답답한 것은 꼬맹이도 마찬가지 일 테니까 좀 더 많이 산 내가 양보해야겠지?
“내 이름은 파비안. 네가 말하는 죽음의 숲의 주인이다. 며칠 전 밤에 널 신전에서 주워 치료한 다음 이곳으로 데리고 왔지. 그때 넌… 죽어가고 있었는데 품에서 이걸 발견했기 때문에 살려준 거야.”
“죽음의 숲… 주인? 그럼… 네가 신?”
“그래. 사람들은 나를 신이라고 불렀지. 그래서 신전도 세웠고… 소원을 빌러 오기도 했어. 하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아. 어차피 나는 나일뿐이니까.”
신이라는 말에 소년은 눈을 크게 떴다.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 안 믿어도 하는 수 없는 일이다. 그건 어차피 이 일과 상관없는 얘기니까. 그런데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녀석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너, 많이 예쁘다. 너처럼 예쁜 애 본 적 없다. 정말 신일지도 모른다.”
“앙?”
“신아, 이링카를 줘라. 나 이링카 가져가야 한다.”
“이링카? 그게……. 뭐지?”
생전 처음 듣는 말에 이번에는 내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그는 얼굴이 새파래지더니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며 어떻게든 설명을 하려고 들었다.
“죽음의 숲에… 있다고 했다. 아비는 떠났는데… 이링카를 가져와야 아비 목걸이 돌려주고… 둘째 도령이 산다.”
“아앙?”
이게 대체 무슨 말인지… 필사적으로 설명을 하는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말을 한마디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단지 그가 내게 이링카라고 하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간신히 이해했을 뿐. 나는 애처롭기까지 한 그의 몸부림을 바라보다가 마른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손에 든 노예문서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이건, 원래 내가 알던 사람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네가 이걸 가지고 있는 거지?”
“헥헥… 우, 힘들다. 그거, 아비 거다. 아비가 잃어버리지 말라고 했다. 목걸이도… 그런데 그 늙은이가 가져갔다. 우, 힘없어서 뺏겼다. 다시 찾아야 해. 헥… 이제 이거 풀어줘라, 신.”
쉬지 않고 꿈틀거리던 그는 시트가 도저히 풀리지 않자 고양이처럼 울먹거리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정말 알고 싶고, 알아야 했던 것들을 단 한 가지도 알아내지 못한 나는 그만 맥이 쏙 빠져서 울고만 싶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바둥거리는 그를 내버려두고 혼자 울상이 돼서 앉아 있었는데 얘기를 모두 엿듣고 있었는지 문을 빼꼼 열고 킬군이 들어왔다.
그는 힘없이 앉아있는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곤 꿈틀거리는 꼬맹이를 풀어주면서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꼬맹아?”
“…나기.”
“성은?”
“몰라. 그치만 아비는 알아. 아, 참. 아비는 말을 안 해. 그리고 떠났어.”
꼬맹이, 나기는 또다시 뒤죽박죽 말해놓고 침울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신, 나기는 이링카가 있어야 해.”
“…”
“이봐, 꼬마야. 저 종이를 신에게 주면 네게 이링카를 찾아줄 거다. 그리고 네 목걸이도 찾게 도와줄 거야.”
“아, 정말이냐?”
근거 없는 킬군의 말에 나기는 반색을 해서 훨씬 밝은 얼굴을 해보였다. 그리고 무언가 대단한 결심을 한 듯한 얼굴로 내게 다가와 또박또박 말했다.
“그거, 신 준다. 대신 이링카를 찾아줘. 그리고 목걸이도 가져와야 해.”
“…”
“파비안, 당장은 아니더라도 저 꼬맹이는 우리에게 무언가 단서를 줄 수 있을 거다. 말을 제대로 가르치면 사정 얘기도 들을 수 있을 테고 꼬마가 말하는 목걸이나 그걸 빼앗아 갔다는 자를 찾으면 틀림없이 모두스 가의 행방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 거야. 그러니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기운내자. 응?”
킬은 노예문서를 쥔 채 말없이 눈물만 뚝뚝 떨어뜨리는 나를 보듬어 안고 그렇게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이날 나는 이타라가 장난처럼 만든 노예문서를 밤새도록 읽고 또 읽다가 그대로 태워버렸다. 녀석이… 너무 보고 싶었다.
“뭐지, 이 녀석은?”
“그게… 들어와 보니 이렇게… 죄송합니다, 도련님.”
늦은 아침. 온통 금칠을 한 내방에서 눈을 떴을 때, 나는 고양이처럼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내 발치께에서 자고 있는 꼬맹이 나기를 발견하고는 기겁을 했다. 기척도 못 느꼈는데 대체 어느 틈에 기어 들어와서 누운 것이란 말인가? 게다가 다른 데 다 놔두고 왜 하필 내 발끝에서 웅크리고 잠든 것이지?
‘추웠을 텐데… 이불도 안 덮고. 정말 바보 같은 녀석이잖아?’
곤히 잠든 녀석을 어떻게든 깨워보려고 애쓰는 제제를 만류하고 나는 녀석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러나 마침 방으로 들어오다가 그 모습을 본 스칼라 덕분에 나기는 제제의 등에 업혀 가차 없이 방밖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이 도둑고양이 같은 녀석이 감히 내 아들을 넘봐? 흥, 한번만 더 그랬다간 꽁꽁 얼려서 조각상으로 쓸 줄 알아!”
“스칼라…”
아아, 화난 그녀의 얼굴은 정말로 무서웠다. 그래서 나는 말도 못하고 이불을 손에 든 채 뻣뻣하게 굳어 살기등등한 그녀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음 순간…
“잘 잤니, 내 아들?”
..라고 말하며 활짝 웃는 얼굴로 빙글 돌아서서 아침 인사를 건네는 그녀. 순식간에 변한 그 얼굴 표정에 더더욱 경악한 나는 짧은 순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서 물고기처럼 입만 벙긋 거렸다. 어쩌면 그녀가 킬군보다 더 무서운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글쎄다, 사실은 나도 들어본 적이 없어놔서…”
늦은 아침 식사를 하면서 이링카에 대해 묻자 킬군은 민망한 듯 한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그렇게 대답했다. 어젯밤에는 당장이라도 찾아다 줄 것처럼 말해서 나기를 안심시키더니 이제는 모른다고 오리발을 내미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기도 이런 사기가 없었다. 그리하여 당연히 어이가 없어진 나는 먹던 것을 도로 뱉어내고 소리쳤다.
“이제와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요? 문서도 벌써 태워버렸는데…요.”
“하지만 정말 들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 말로 끝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걸 찾아야 그들의 행방에 대한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텐데…”
화가 나고, 초조하고, 속이 타도… 나는 맘대로 소리를 칠 수 없었다. 주위에 보는 눈들이 그득했기 때문에. 어찌됐든 대외적으로(?) 나는 킬군의 아들이니까 모처럼 나타난(?) 아들이 아버지에게 소리치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지 않은가.
“아,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래두. 오늘 아침 일찍 상단에다가 말을 전해 놓았으니 조만간 소식이 오겠지. 그리고 꼬맹이가 있잖니. 좀 더 힌트를 얻으면 금방 생각이 날 수도 있겠지. 혹시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허허…”
“도련님께서 무얼 찾고 계시는 겁니까, 왕야?”
“글쎄다. 주워온 꼬마 녀석이 도움을 청해왔구나. 파비안은 워낙 마음이 착해놔서 도와줄 모양이야. 허허…”
킬은 한껏 풀어진 얼굴로 제제를 향해 히죽 웃어보였다. 저 헤픈 인간이 진정 이름 높은 기사 또는 왕자 맞아? 내가 그 사실에 대해 진지한 의심을 품을 때 제제는 놀란 표정으로 나와 킬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뭔가를 눈치 챈 것은 아니겠지? 설마 내 연기력이 모자라서…? 어쨌든 나는 좀 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아들아.”
“…?”
“네 가정교사를 불렀단다. 오늘부터 타마르의 역사와 왕가의 내력에 대해 가르쳐 줄게다. 열심히 배우거라. 알겠지?”
“…네.”
“그리고 며칠 뒤면 폐하의 생신 축하 파티가 열린단다. 그때를 대비해서 예절과 춤을 배우고… 아, 생신 선물을 구할 겸 상단에도 들러보자꾸나. 괜찮지?”
끄덕끄덕.
뻣뻣한 고개를 필사적으로 끄덕여주고 나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내 팔자가 어쩌다 이 모양으로 꼬였단 말인가. 공부는 둘째 치고 생전 안 배우던 춤을 배워야 하다니… 차라리 양아빠에게 말 타는 법을 한 번 더 배우는 것이 백배는 나을 것만 같았다. 진정 그럴 수만 있다면.
아침 식사가 끝난 후, 나는 곧바로 스칼라에게 불려갔다. 그녀는 파티를 대비해 옷을 맞춘다며 재단사를 불러놓고 있는 참이었다. 그래서 나는 하녀들에게 둘러싸여 치수를 재고 천자락을 둘러보고 옷을 벗었다 입었다 하는 등 갖은 시달림을 받다가 모두 여섯 벌이나 되는 옷을 골라놓고서야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하하, 마님께서 그렇게 웃으시는 건 정말 처음 보았습니다. 어찌나 행복해 보이시던지… 역시 도련님께서 돌아오신 덕분에 저택에 활기가 도는 것 같습니다.”
제제는 헝클어진 내 머리를 다시 정돈해 주며 신나게 재잘거렸다. 어제처럼 틀어 올린 머리를 두 개의 금비녀로 고정시키고 붉은색 보석을 꽂아 놓았는데 그렇게 해놓고 또 한참 감탄 성을 늘어놓았다. 자신의 손재주가 원래 뛰어난 면이 있었다나?
“나기는 어디 있어?”
“네, 왕야께서 오늘부터 말을 제대로 가르치라고 하셔서 가정교사를 불렀습니다. 지금쯤 공부를 마쳤을 겁니다. 이 반지 한번 껴보시겠어요?”
“싫어. 그보단 시내구경을 나가고 싶다.”
“그러시겠습니까? 황제폐하의 생신 파티가 얼마 남지 않아서 지금 도시는 온통 축제 분위기입니다. 아마 볼거리가 넘쳐나걸요? 근데 정말 이 반지 싫으세요? 이쁜데…”
제제는 생각보다 끈질긴 인간이었다. 내 거부의 몸짓을 깨끗이 무시하고 끝끝내 자신이 고른 반지를 내 손가락에 끼워놓았으니까. 젠장.
외출을 하겠다는 내 말에 저택은 한바탕 발칵 뒤집어졌다. 무언가 한참 떠들썩하더니 뜻하지 않게 마차가 준비되고 기사단이 출발 차비를 차렸으며 제제와 하녀 하나 그리고… 스칼라가 먼저 앞장을 섰던 것이다. 나는… 내가 원한 것은 그저 말을 타고 천천히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뿐이었는데. 정말 그것뿐이었는데… 대체 왜에…!!!
“엄마가 따라나서서 화났니, 파비안?”
“…아니요오.”
“오호호호, 그렇지? 에고, 이쁜 내 강아지.”
아침의 그 살벌한 얼굴을 본 내가 어찌 감히 ‘싫다’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으랴. 목에 가시가 걸린 기분으로 나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화려 찬란한 털옷을 입히거나 안고 부벼대거나 하다못해 강아지라고 불러도 나는 눈물을 머금고 잘 참아냈다. 내 발밑에 쪼그려 앉아 내가 입고 있는 털 코트의 끝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나기를 얼음 조각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기는 스칼라의 구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안 보이면 찾아다니고 찾으면 옷자락을 붙잡고 옆에 붙어 있다가 혼잣말처럼 ‘이링카’를 중얼거리는 것이다. 어서 빨리 찾아달라는 말이리라.
“금방 찾아낼 거다. 하지만 네가 빨리 말을 배워서 나에게 좀 더 설명을 해줘야 해. 하다못해 목걸이를 가져간 자의 이름이라도 알아야지. 그래야 빨리 돌려받을 수 있어.”
“알았다. 말, 잘 배운다.”
제대로 먹지 못했는지 나랑 비슷한 체구밖에 되지 않는 아이. 녀석이 죽음의 숲을 찾을 만큼 고집스럽게 찾으려 하는 그것이 대체 무엇인지 나는 꼭 보고 싶었다. 그리고 녀석이 누구인지도…
<책갈피> ― <편지를 쓰긴 썼는데…>
친애하는 아버님.
아버님께서 왕야의 명을 받아 출장을 가신지 어언… 열흘. 언제나 조용하고 스산하기만 하던 저택에 일대 사건이 일어났기에 아무래도 집사이신 아버님께서도 아셔야 할 것 같아 이렇게 급히 알립니다. 충격적인 얘기니까 쓰러지시기 전에 우선 자리에 앉거나 침대에 누우셔서 이 다음 글을 읽어주세요. 누우셨나요? 그럼… 얘기합니다.
사실은, 말로만 듣고 그림으로만 봐서 요새는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도련님께서… 드디어 저택으로 돌아오셨습니다. 며칠 전 왕야께서는 궁전에서 나온 시종의 전언을 듣다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시더니 당장 마차를 타고 어딘가로 달려가셨습니다. 물론 저도 냉큼 한자리 차지하고 따라갔지요. 아버님 말씀대로 왕야를 지켜드려야 하니까요. 근데 수도에서도 멀리 떨어진 모리아시 부근에서 저를 남겨두고 어딘가로 사라지시더니 한참 뒤에 마차로 돌아오시는 것이었습니다. 엄청나게 아름다운 그분과 함께요.
눈처럼 하얀 피부와 밤하늘처럼 까만 눈동자 그리고 앵두처럼 빨간 입술과 약간 상기된 두볼이 마치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어요. 첫눈에 반했다니까요. 그리고 좋은 스승님을 모시고 공부를 하신 까닭인지 범접할 수 없는 품위가 넘쳐흘렀어요. 척 보는 순간 ‘아, 과연 우리 왕야의 아드님이시구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아무튼 그분이 돌아오시자 왕야께서는 백팔십도로 달라지셨어요. 평생 몇 번 웃을까 말까 하던 분이 요샌 날마다 웃는 얼굴로 돌아다니시고요, 얼음 같으신 마님께서는 그야말로 봄처녀처럼 변하셨죠. 어찌나 무섭던지… 안 믿어지시나요? 돌아오셔서 보시고 기절하지나 마세요.
근데 도련님께서는 참 착한 분이신 것 같아요. 오시는 길에 웬 꼬맹이를 하나 주우셨는데 이젠 가족까지 찾아주시려나 봐요. 그래서 아침 일찍 왕야께서 상단에 명을 내리셨더라구요. 아, 왕야께선 도련님을 황제폐하의 생신 파티에 데려가실 거랍니다. 그날 모든 분들께 소개를 하시려는 거지요. 모르긴 몰라도 눈독 들이는 분들이 많으실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따라가려구요. 왕야께서 이젠 도련님의 시종이 되라고 하셨거든요. 걱정 마세요, 아버님. 설마 제가 도련님을 죽게 내버려두기야 하겠어요?
자, 그럼 전 이제 도련님을 모시고 외출을 다녀오렵니다.
부디 사고치지 마시고 몸 성히 돌아오세요. 아버님의 아들내미… 제제 올림.
“…이게 뭐냐?”
“저기, 제제가 집사님께 쓴 편지 같은데요? 꽤 열심히 쓴 모양인데… 대체 언제 부치려고 한 걸까요?”
오왕야의 실질적인 오른팔이자 저택의 관리자인 집사 이안은 막 출장에서 돌아와 아들인 제제의 방에 들어섰다가 책상위에 떡하니 펼쳐져있는 종이를 보고 어리둥절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오늘 돌아온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하셨죠.”
“그럼 이 편지는 뭐지?”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잖아요? 다른 사람 다 알아도 제제는 몰랐다고 생각하세요.”
너무나 태평한 하인의 말을 당연하게 수긍해야 하는 자신의 입장이 조금 기가 막혔던 그는 한숨과 함께 편지를 주워들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복도를 거닐며 막 읽으려는데 저 앞에서 웬 사내가 히죽히죽 웃는 얼굴로 나타나더니 멍하니 서있는 그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자네 돌아왔군. 허허허…”
“뉘신지… 와, 왕야?”
…털썩. 그는 마치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사람처럼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부릅뜬 눈에 ‘기절하지나 마세요.’라고 써있는 글이 대문짝만하게 들어온 것은 그 다음의 일이었다. 전혀 제구실을 못한 편지였다.
1. 새끼고양이를 줍다 (4)/
나는 우선 다른 사람들을 모두 내보낸 다음 그의 앞에 의자를 놓고 마주 앉았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온, 하지만 원래는 이타라의 것이었던 노예문서를 꺼내 보여주며 물었다.
“이게 뭔지 알아?”
“그거… 그거! 내 거다! 아비 거다! 내 놔!”
문서를 보여주는 순간 그는 눈에 불을 켜더니 작은 짐승처럼 으르렁대며 나에게 덤벼들었다. 그래서 나는 먼저 그를 묶어놓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것을 곧 행동으로 옮겼던 것이다.
“끙… 끄응…”
“널 해치려는 것은 아니니까 얌전하게 굴어.”
바둥거리는 녀석을 시트로 꽁꽁 싸매 침대위에 던져놓고 나는 다시 한번 심호흡을 했다.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아 사정을 말해주기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답답한 것은 꼬맹이도 마찬가지 일 테니까 좀 더 많이 산 내가 양보해야겠지?
“내 이름은 파비안. 네가 말하는 죽음의 숲의 주인이다. 며칠 전 밤에 널 신전에서 주워 치료한 다음 이곳으로 데리고 왔지. 그때 넌… 죽어가고 있었는데 품에서 이걸 발견했기 때문에 살려준 거야.”
“죽음의 숲… 주인? 그럼… 네가 신?”
“그래. 사람들은 나를 신이라고 불렀지. 그래서 신전도 세웠고… 소원을 빌러 오기도 했어. 하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아. 어차피 나는 나일뿐이니까.”
신이라는 말에 소년은 눈을 크게 떴다.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 안 믿어도 하는 수 없는 일이다. 그건 어차피 이 일과 상관없는 얘기니까. 그런데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녀석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너, 많이 예쁘다. 너처럼 예쁜 애 본 적 없다. 정말 신일지도 모른다.”
“앙?”
“신아, 이링카를 줘라. 나 이링카 가져가야 한다.”
“이링카? 그게……. 뭐지?”
생전 처음 듣는 말에 이번에는 내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그는 얼굴이 새파래지더니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며 어떻게든 설명을 하려고 들었다.
“죽음의 숲에… 있다고 했다. 아비는 떠났는데… 이링카를 가져와야 아비 목걸이 돌려주고… 둘째 도령이 산다.”
“아앙?”
이게 대체 무슨 말인지… 필사적으로 설명을 하는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말을 한마디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단지 그가 내게 이링카라고 하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간신히 이해했을 뿐. 나는 애처롭기까지 한 그의 몸부림을 바라보다가 마른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손에 든 노예문서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이건, 원래 내가 알던 사람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네가 이걸 가지고 있는 거지?”
“헥헥… 우, 힘들다. 그거, 아비 거다. 아비가 잃어버리지 말라고 했다. 목걸이도… 그런데 그 늙은이가 가져갔다. 우, 힘없어서 뺏겼다. 다시 찾아야 해. 헥… 이제 이거 풀어줘라, 신.”
쉬지 않고 꿈틀거리던 그는 시트가 도저히 풀리지 않자 고양이처럼 울먹거리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정말 알고 싶고, 알아야 했던 것들을 단 한 가지도 알아내지 못한 나는 그만 맥이 쏙 빠져서 울고만 싶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바둥거리는 그를 내버려두고 혼자 울상이 돼서 앉아 있었는데 얘기를 모두 엿듣고 있었는지 문을 빼꼼 열고 킬군이 들어왔다.
그는 힘없이 앉아있는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곤 꿈틀거리는 꼬맹이를 풀어주면서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꼬맹아?”
“…나기.”
“성은?”
“몰라. 그치만 아비는 알아. 아, 참. 아비는 말을 안 해. 그리고 떠났어.”
꼬맹이, 나기는 또다시 뒤죽박죽 말해놓고 침울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신, 나기는 이링카가 있어야 해.”
“…”
“이봐, 꼬마야. 저 종이를 신에게 주면 네게 이링카를 찾아줄 거다. 그리고 네 목걸이도 찾게 도와줄 거야.”
“아, 정말이냐?”
근거 없는 킬군의 말에 나기는 반색을 해서 훨씬 밝은 얼굴을 해보였다. 그리고 무언가 대단한 결심을 한 듯한 얼굴로 내게 다가와 또박또박 말했다.
“그거, 신 준다. 대신 이링카를 찾아줘. 그리고 목걸이도 가져와야 해.”
“…”
“파비안, 당장은 아니더라도 저 꼬맹이는 우리에게 무언가 단서를 줄 수 있을 거다. 말을 제대로 가르치면 사정 얘기도 들을 수 있을 테고 꼬마가 말하는 목걸이나 그걸 빼앗아 갔다는 자를 찾으면 틀림없이 모두스 가의 행방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 거야. 그러니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기운내자. 응?”
킬은 노예문서를 쥔 채 말없이 눈물만 뚝뚝 떨어뜨리는 나를 보듬어 안고 그렇게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이날 나는 이타라가 장난처럼 만든 노예문서를 밤새도록 읽고 또 읽다가 그대로 태워버렸다. 녀석이… 너무 보고 싶었다.
“뭐지, 이 녀석은?”
“그게… 들어와 보니 이렇게… 죄송합니다, 도련님.”
늦은 아침. 온통 금칠을 한 내방에서 눈을 떴을 때, 나는 고양이처럼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내 발치께에서 자고 있는 꼬맹이 나기를 발견하고는 기겁을 했다. 기척도 못 느꼈는데 대체 어느 틈에 기어 들어와서 누운 것이란 말인가? 게다가 다른 데 다 놔두고 왜 하필 내 발끝에서 웅크리고 잠든 것이지?
‘추웠을 텐데… 이불도 안 덮고. 정말 바보 같은 녀석이잖아?’
곤히 잠든 녀석을 어떻게든 깨워보려고 애쓰는 제제를 만류하고 나는 녀석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러나 마침 방으로 들어오다가 그 모습을 본 스칼라 덕분에 나기는 제제의 등에 업혀 가차 없이 방밖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이 도둑고양이 같은 녀석이 감히 내 아들을 넘봐? 흥, 한번만 더 그랬다간 꽁꽁 얼려서 조각상으로 쓸 줄 알아!”
“스칼라…”
아아, 화난 그녀의 얼굴은 정말로 무서웠다. 그래서 나는 말도 못하고 이불을 손에 든 채 뻣뻣하게 굳어 살기등등한 그녀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음 순간…
“잘 잤니, 내 아들?”
..라고 말하며 활짝 웃는 얼굴로 빙글 돌아서서 아침 인사를 건네는 그녀. 순식간에 변한 그 얼굴 표정에 더더욱 경악한 나는 짧은 순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서 물고기처럼 입만 벙긋 거렸다. 어쩌면 그녀가 킬군보다 더 무서운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글쎄다, 사실은 나도 들어본 적이 없어놔서…”
늦은 아침 식사를 하면서 이링카에 대해 묻자 킬군은 민망한 듯 한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그렇게 대답했다. 어젯밤에는 당장이라도 찾아다 줄 것처럼 말해서 나기를 안심시키더니 이제는 모른다고 오리발을 내미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기도 이런 사기가 없었다. 그리하여 당연히 어이가 없어진 나는 먹던 것을 도로 뱉어내고 소리쳤다.
“이제와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요? 문서도 벌써 태워버렸는데…요.”
“하지만 정말 들어본 적이 없어서…”
“그런 말로 끝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걸 찾아야 그들의 행방에 대한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텐데…”
화가 나고, 초조하고, 속이 타도… 나는 맘대로 소리를 칠 수 없었다. 주위에 보는 눈들이 그득했기 때문에. 어찌됐든 대외적으로(?) 나는 킬군의 아들이니까 모처럼 나타난(?) 아들이 아버지에게 소리치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지 않은가.
“아,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래두. 오늘 아침 일찍 상단에다가 말을 전해 놓았으니 조만간 소식이 오겠지. 그리고 꼬맹이가 있잖니. 좀 더 힌트를 얻으면 금방 생각이 날 수도 있겠지. 혹시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허허…”
“도련님께서 무얼 찾고 계시는 겁니까, 왕야?”
“글쎄다. 주워온 꼬마 녀석이 도움을 청해왔구나. 파비안은 워낙 마음이 착해놔서 도와줄 모양이야. 허허…”
킬은 한껏 풀어진 얼굴로 제제를 향해 히죽 웃어보였다. 저 헤픈 인간이 진정 이름 높은 기사 또는 왕자 맞아? 내가 그 사실에 대해 진지한 의심을 품을 때 제제는 놀란 표정으로 나와 킬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뭔가를 눈치 챈 것은 아니겠지? 설마 내 연기력이 모자라서…? 어쨌든 나는 좀 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아들아.”
“…?”
“네 가정교사를 불렀단다. 오늘부터 타마르의 역사와 왕가의 내력에 대해 가르쳐 줄게다. 열심히 배우거라. 알겠지?”
“…네.”
“그리고 며칠 뒤면 폐하의 생신 축하 파티가 열린단다. 그때를 대비해서 예절과 춤을 배우고… 아, 생신 선물을 구할 겸 상단에도 들러보자꾸나. 괜찮지?”
끄덕끄덕.
뻣뻣한 고개를 필사적으로 끄덕여주고 나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내 팔자가 어쩌다 이 모양으로 꼬였단 말인가. 공부는 둘째 치고 생전 안 배우던 춤을 배워야 하다니… 차라리 양아빠에게 말 타는 법을 한 번 더 배우는 것이 백배는 나을 것만 같았다. 진정 그럴 수만 있다면.
아침 식사가 끝난 후, 나는 곧바로 스칼라에게 불려갔다. 그녀는 파티를 대비해 옷을 맞춘다며 재단사를 불러놓고 있는 참이었다. 그래서 나는 하녀들에게 둘러싸여 치수를 재고 천자락을 둘러보고 옷을 벗었다 입었다 하는 등 갖은 시달림을 받다가 모두 여섯 벌이나 되는 옷을 골라놓고서야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하하, 마님께서 그렇게 웃으시는 건 정말 처음 보았습니다. 어찌나 행복해 보이시던지… 역시 도련님께서 돌아오신 덕분에 저택에 활기가 도는 것 같습니다.”
제제는 헝클어진 내 머리를 다시 정돈해 주며 신나게 재잘거렸다. 어제처럼 틀어 올린 머리를 두 개의 금비녀로 고정시키고 붉은색 보석을 꽂아 놓았는데 그렇게 해놓고 또 한참 감탄 성을 늘어놓았다. 자신의 손재주가 원래 뛰어난 면이 있었다나?
“나기는 어디 있어?”
“네, 왕야께서 오늘부터 말을 제대로 가르치라고 하셔서 가정교사를 불렀습니다. 지금쯤 공부를 마쳤을 겁니다. 이 반지 한번 껴보시겠어요?”
“싫어. 그보단 시내구경을 나가고 싶다.”
“그러시겠습니까? 황제폐하의 생신 파티가 얼마 남지 않아서 지금 도시는 온통 축제 분위기입니다. 아마 볼거리가 넘쳐나걸요? 근데 정말 이 반지 싫으세요? 이쁜데…”
제제는 생각보다 끈질긴 인간이었다. 내 거부의 몸짓을 깨끗이 무시하고 끝끝내 자신이 고른 반지를 내 손가락에 끼워놓았으니까. 젠장.
외출을 하겠다는 내 말에 저택은 한바탕 발칵 뒤집어졌다. 무언가 한참 떠들썩하더니 뜻하지 않게 마차가 준비되고 기사단이 출발 차비를 차렸으며 제제와 하녀 하나 그리고… 스칼라가 먼저 앞장을 섰던 것이다. 나는… 내가 원한 것은 그저 말을 타고 천천히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뿐이었는데. 정말 그것뿐이었는데… 대체 왜에…!!!
“엄마가 따라나서서 화났니, 파비안?”
“…아니요오.”
“오호호호, 그렇지? 에고, 이쁜 내 강아지.”
아침의 그 살벌한 얼굴을 본 내가 어찌 감히 ‘싫다’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으랴. 목에 가시가 걸린 기분으로 나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화려 찬란한 털옷을 입히거나 안고 부벼대거나 하다못해 강아지라고 불러도 나는 눈물을 머금고 잘 참아냈다. 내 발밑에 쪼그려 앉아 내가 입고 있는 털 코트의 끝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나기를 얼음 조각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기는 스칼라의 구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안 보이면 찾아다니고 찾으면 옷자락을 붙잡고 옆에 붙어 있다가 혼잣말처럼 ‘이링카’를 중얼거리는 것이다. 어서 빨리 찾아달라는 말이리라.
“금방 찾아낼 거다. 하지만 네가 빨리 말을 배워서 나에게 좀 더 설명을 해줘야 해. 하다못해 목걸이를 가져간 자의 이름이라도 알아야지. 그래야 빨리 돌려받을 수 있어.”
“알았다. 말, 잘 배운다.”
제대로 먹지 못했는지 나랑 비슷한 체구밖에 되지 않는 아이. 녀석이 죽음의 숲을 찾을 만큼 고집스럽게 찾으려 하는 그것이 대체 무엇인지 나는 꼭 보고 싶었다. 그리고 녀석이 누구인지도…
<책갈피> ― <편지를 쓰긴 썼는데…>
친애하는 아버님.
아버님께서 왕야의 명을 받아 출장을 가신지 어언… 열흘. 언제나 조용하고 스산하기만 하던 저택에 일대 사건이 일어났기에 아무래도 집사이신 아버님께서도 아셔야 할 것 같아 이렇게 급히 알립니다. 충격적인 얘기니까 쓰러지시기 전에 우선 자리에 앉거나 침대에 누우셔서 이 다음 글을 읽어주세요. 누우셨나요? 그럼… 얘기합니다.
사실은, 말로만 듣고 그림으로만 봐서 요새는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도련님께서… 드디어 저택으로 돌아오셨습니다. 며칠 전 왕야께서는 궁전에서 나온 시종의 전언을 듣다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시더니 당장 마차를 타고 어딘가로 달려가셨습니다. 물론 저도 냉큼 한자리 차지하고 따라갔지요. 아버님 말씀대로 왕야를 지켜드려야 하니까요. 근데 수도에서도 멀리 떨어진 모리아시 부근에서 저를 남겨두고 어딘가로 사라지시더니 한참 뒤에 마차로 돌아오시는 것이었습니다. 엄청나게 아름다운 그분과 함께요.
눈처럼 하얀 피부와 밤하늘처럼 까만 눈동자 그리고 앵두처럼 빨간 입술과 약간 상기된 두볼이 마치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어요. 첫눈에 반했다니까요. 그리고 좋은 스승님을 모시고 공부를 하신 까닭인지 범접할 수 없는 품위가 넘쳐흘렀어요. 척 보는 순간 ‘아, 과연 우리 왕야의 아드님이시구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아무튼 그분이 돌아오시자 왕야께서는 백팔십도로 달라지셨어요. 평생 몇 번 웃을까 말까 하던 분이 요샌 날마다 웃는 얼굴로 돌아다니시고요, 얼음 같으신 마님께서는 그야말로 봄처녀처럼 변하셨죠. 어찌나 무섭던지… 안 믿어지시나요? 돌아오셔서 보시고 기절하지나 마세요.
근데 도련님께서는 참 착한 분이신 것 같아요. 오시는 길에 웬 꼬맹이를 하나 주우셨는데 이젠 가족까지 찾아주시려나 봐요. 그래서 아침 일찍 왕야께서 상단에 명을 내리셨더라구요. 아, 왕야께선 도련님을 황제폐하의 생신 파티에 데려가실 거랍니다. 그날 모든 분들께 소개를 하시려는 거지요. 모르긴 몰라도 눈독 들이는 분들이 많으실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따라가려구요. 왕야께서 이젠 도련님의 시종이 되라고 하셨거든요. 걱정 마세요, 아버님. 설마 제가 도련님을 죽게 내버려두기야 하겠어요?
자, 그럼 전 이제 도련님을 모시고 외출을 다녀오렵니다.
부디 사고치지 마시고 몸 성히 돌아오세요. 아버님의 아들내미… 제제 올림.
“…이게 뭐냐?”
“저기, 제제가 집사님께 쓴 편지 같은데요? 꽤 열심히 쓴 모양인데… 대체 언제 부치려고 한 걸까요?”
오왕야의 실질적인 오른팔이자 저택의 관리자인 집사 이안은 막 출장에서 돌아와 아들인 제제의 방에 들어섰다가 책상위에 떡하니 펼쳐져있는 종이를 보고 어리둥절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오늘 돌아온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하셨죠.”
“그럼 이 편지는 뭐지?”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잖아요? 다른 사람 다 알아도 제제는 몰랐다고 생각하세요.”
너무나 태평한 하인의 말을 당연하게 수긍해야 하는 자신의 입장이 조금 기가 막혔던 그는 한숨과 함께 편지를 주워들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복도를 거닐며 막 읽으려는데 저 앞에서 웬 사내가 히죽히죽 웃는 얼굴로 나타나더니 멍하니 서있는 그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자네 돌아왔군. 허허허…”
“뉘신지… 와, 왕야?”
…털썩. 그는 마치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사람처럼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부릅뜬 눈에 ‘기절하지나 마세요.’라고 써있는 글이 대문짝만하게 들어온 것은 그 다음의 일이었다. 전혀 제구실을 못한 편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