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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링카 1권 (12화)
3. 시바 (4)/

“끄응. 정말 이 짓을 꼭 해야겠냐?”
“물론이지. 들어주겠다고 약속 했잖아?”
“하아, 그랬지. 좋다. 그럼 간다?”
그는 내게 다시 한번 확인한 다음 마침내 결심을 굳힌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길게 늘어 서있는 눈앞의 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크게 숨을 한번 들이킨 후,
“앞에 있는 것들 다 비켜어어어…!”
시장 한복판을 달리기 시작했다. 어깨엔 나를 얹은 채로.
“꺄하하하하… 더 빨리 달려라, 빨리!”
“좋았어! 아자, 시바가 나가신다.”
아, 내가 어쩌다 이런 유치한 일에 재미가 들려서 부탁까지 했을까? 하지만 그의 탄탄한 어깨위에 주저앉아 휙휙 지나가는 풍경과 불어오는 찬바람을 맞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았던지 나는 정말 어린애처럼 신나게 웃어대고 있었다. 마주 오던 사람들이 화다닥 피하고 물건이 엎어지고 간혹 들려오는 누군가의 고함 소리 혹은 휘파람 소리도 그렇게 흥겨울 수가 없었다. 나이가 들면 도로 어린애가 된다더니 나도 그런 건가?
‘상관없어. 난 지금 살아있는 것 같은 걸. 난 살아 있어.’
벅차게 두근거리는 가슴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너는 지금 살아있다’고 외치는 것 같은 통렬한 느낌. 이런 기분을 느끼지 못했다면 시장 한복판을 내달리는 무식한 짓 따위는 시키지 않았을 것이었다. 절대로!
“후우. 어라? 저게 뭐냐?”
시장을 거의 통과해서 멈춰 섰을 때였다. 시바가 저만치 앞에서 우르르 몰려드는 기사들을 발견하고 우뚝 멈춰서더니 혹시 아느냐는 듯 나를 올려다보았다. 물론 다행히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푸른 갑옷이라면 분명 킬의 기사단일 테니까.
“푸른 갑옷에 하얀 번개… 얼라리? 저건 섬광의 기사단이잖아?”
“어? 알고 있었어?”
“그, 그럼 알다마다. 저걸 모르면 타마르인이 아니지. 그 무시무시한 오왕야의 기사단인데 모를 리가 없잖아.”
시바는 정말 두렵다는 듯 가볍게 치를 떨어보였다. 킬이 무시무시하다고? 그런 소리는 들은 적이 없었는데.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호기심. 나는 사방에 흩어져서 무언가를 열심히 뒤져대는 기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여 시바에게 물었다.
“왜 무시무시해?”
“뭐? 몰라서 묻냐?”
“응. 왜 무시무시한지 모르겠어.”
“대체 뭘 보고 산거냐? 이래서 애들은 오냐오냐 키우면 안돼는 거야.”
“사소한 건 따지지 말고 빨랑 대답이나 해.”
“흐응, 영약한 녀석. 우선, 그 사람은 강해.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강하지. 그리고 강한 만큼 잔인해. 언젠가 한번 싸우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상대를 거의 죽여 놨었어. 그것도 맨 손으로 갑옷에 투구까지 쓰고 덤비는 놈을.”
호오, 어쩌다 그런 정신 나간 짓을… 킬의 성질이 더럽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일이었지만 그가 화내는 모습은 아직 본 적이 없었던 나였다. 그래서 싸우는 모습도 도무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그 옛날 마법으로 무수한 기사들을 녹여버린 것 말고는.
“화가 났었나 보지?”
“어? 그걸 어떻게 알았어? 외국에서 온 사신이었는데 마침 몸이 불편하신 태자전하를 비꼬았거든. 그래서 연회장이라는 것도 상관없이 두들겨 패서 피떡을 만들어 놓았었는데 직후 쫓겨나가서 한 달간 근신을 해야 했어.”
“그랬구나. 어쩌다 신경을 건드려서…”
나는 킬이 누군가를 위해 화를 냈다는 사실에 조금 놀라고 있었다. 말은 안했지만 그는 혹시 병약한 태자를 아끼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기사들이 슬슬 다가오는 것을 본 시바가 말도 없이 갑자기 홱 돌아서서 지나온 길을 도로 되짚어 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뭘까, 이 수상쩍은 태도는?
“이봐, 왜 그래?”
“이상해서.”
“뭐가?”
“그는 이제껏 단 한번도 함부로 기사단을 푼 적이 없었어. 더욱이 황제가 있는 수도 안에서는 사냥도 하지 않는 사람이지. ‘그분’을 위하는 뜻에서. 근데 갑자기 기사단을 풀다니 이상하잖아? 단순한 외출로 보기엔 수도 지나치게 많고. 무슨 일이 있는 게 틀림없어.”
그는 정말 진지한 투로 그렇게 말했다. 근데 일이라는 말을 들으니까 갑자기 내가 지난밤 말도 없이 무단외박을 했다는 사실이 떠오르네 그려. 어쩌지?
“저, 저기… 이제 그만 내려줘.”
“응? 왜?”
“하아, 아무래도 집에 돌아 가봐야 할 것 같아.”
“아, 맞다. 어제 너 외박했었지? 쯧쯧, 너도 차암. 어린 녀석이 벌써부터 그러고 다니면 안 되지.”
“하! 이봐, 그게 다 누구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하는 말에 기가 막혀서 나는 그의 두 귀를 잡고 달달 흔들었다. 대체 뭘 먹으면 이렇게 뻔뻔해 질 수 있는 것일까? 매우 궁금하다는 투로 인상을 써보이자 그는 또 ‘크하하’ 웃으면서 순순히 나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마치 어린애에게 하듯 집이 어딘 줄은 알고 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대체 나를 뭘로 보고…
“그러고 보니 어느 방향인지 모르겠군.”
…뭐,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다. 더욱이 내 경우는 특이해서 충분히 있을 수도 있는 일이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별로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기사단이 나왔으니 얌전히 따라가기만 하면 될 테니까.
“즐거웠어. 나 간다.”
“이봐, 파브. 너 진짜 혼자 찾아갈 수 있겠냐? 솔직히 말해. 데려다 달라고. 그럼 금 한 냥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서비스 해주지.”
“킥, 너무 비싸서 사양하겠어. 혼자 찾아가서 달걀 먹는 걸로 만족할래. 마중도 나왔으니까 집엔 무사히 찾아갈 수 있을 거야. 그럼 다음에 또 보자, 목마야.”
나는 친절하게 손까지 흔들어 주고 돌아섰다. 그리고 산책을 나온 것처럼 유유히 걸어 기사들에게로 다가갔다. 그들은 한가하게 구경까지 하면서 걸어오는 나를 처음엔 알아보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누구 하나가 알아보고 ‘앗, 도련님!’하고 외치자 우르르 몰려들어 나를 들쳐 매더니 썰물 빠지듯 순식간에 시장에서 빠져나왔다.
“우와, 많다.”
기사들은 시장 밖에도 넘쳐났다. 죄다 끌고 나온 건지 시장을 포위하듯 늘어서서 들어가거나 나오는 사람들을 일일이 통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나를 들쳐 맨 기사가 ‘찾았습니다아…’하고 외치자 일제히 물러서서 한쪽으로 모여들었는데 바로 그곳에 나를 패배자로 만든 기사단의 수장들이 모여 있었다. 상당히 꺼칠한 얼굴들로.
“…도련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왕야께서 몹시 기다리고 계십니다.”
“흐응, 그렇겠지. 그럼 시내 구경만 하고 들어가자.”
“예에? 도, 도련님… 하지만 왕야께선 지금…”
“말을 가져와라!”
당황해서 얼굴색까지 변하는 그들을 가볍게 무시해주고 나는 그렇게 소리쳤다. 그러나 바로 그때, 근처에 서있던 조금 낯익은 마차 문이 벌컥 열리면서 누군가가 후다닥 달려 나오더니 나를 홱 붙잡고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지금 그런 말씀이 나오세요? 어제 그렇게 사라지셔서 전 거의 죽을 뻔 했어요. 게다가 도련님을 찾아올 때까지 집안의 누구도 먹거나 자지 못하게 됐고 마님께선 발작을 일으키신데다가 단장들은 목숨을 걸었고 아버지는 인질로 잡혀있다고요!”
“에?”
시커먼 얼굴로 달려나온 제제는 내 멱살을 붙잡고 숨도 안 쉬고 거의 순식간이다 싶게 말을 뱉어놓았다. 어지간히 속을 태웠던 모양이었다. 근데 앞의 말들은 다 이해가 가는데 이안이 인질로 잡혀있다는 말은 전혀 이해가 되질 않는 나였다. 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안이 왜?”
“오전 중으로 도련님을 찾아오지 않으면 아버지를 회쳐서 물고기 밥으로 던져주겠대요. 흑, 아버지이…”
“에, 제제?”
제제는 말을 하다말고 갑자기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무언가 엄청 서러운 일이라도 당한 사람 같았다. 그리하여 나는 꼼짝도 못하고 펑펑 울어대는 그에게 잡혀 곧바로 저택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질로 잡혀있는 이안을 구하기 위해서.
“돌아오셨습니다아…!”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누군가가 빽 소리쳤다. 그러자 다음 순간 눈앞이 번쩍 하더니 어느새 내 앞엔 킬군과 스칼라가 나란히 서있는 것이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팔짱을 척하니 낀 채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는 폼으로.
“할 말은?”
화가 난 듯한 얼굴로 킬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예상외의 반응이었다. 이안을 인질로 잡아놨다더니 정말 단단히 화가 난 것인가? 나는 쬐금 죄책감이 들었다. 그러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건 정말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맞아. 나도 외박 정도는 할 수 있는 나이잖아? 근데 왜 내가 죄인처럼 굴어야 하는 거지?’
그렇다. 내 나이 정도면 외박을 하다못해 모험을 갈 수도 있고 독립을 할 수도 있으며 나아가 처자식을 거느리고도 남는 나이였다. 그런데 고작 하룻밤 외박한 것 가지고 죄인 취급이라니 이 얼마나 코가 막히고 숨이 안 쉬어질 일이란 말인가? 따라서 나는 슬슬 억울해지기 시작했다.
“다녀왔습니다.”
“으음, 그것뿐이냐?”
“…네.”
나는 눈을 똑바로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본의 아니게 잠시 동안 눈싸움을 하게 되었는데 채 몇 초 지나지도 않아서 나는 항복을 선언하지 않을 수없었다. 곁에 조용히 서있던 스칼라가 손을 들어 천장 한쪽을 가리켰기 때문이었다. 그곳엔 밧줄에 돌돌 감긴 이안이 머리랑 다리만 내놓은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밑에선 제제가 고개를 바짝 젖히고 배고픈 새처럼 ‘아버지이…’하며 꺼이꺼이 울고 있었고. 에휴, 저것들이 무어라고 내가 이런 희생을 감수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드디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잘못했습니다.”
“오오, 네 죄를 네가 안단 말이지?”
“유구무언입니다.”
“핫핫핫, 그렇다면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아야 할 터!”
참으로 통쾌하기 그지없다는 투로 킬은 히죽 웃어보였다. 그리고 연속된 패배에 좌절하고 있는 내게 당당히 외치는 말.
“죄가 크니 모진 벌을 내려야 하나… ‘아빠, 미아안~’이라고 말하면서 폭 안기면 용서해주지.”
비틀. 아아, 이 무슨 유치한 함정이라냐. 속에서부터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소름에 나는 말도 못하고 한동안 몸만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러다 득의만만한 놈의 얼굴을 보자 문득 쌓인 스트레스가 둑이 터지듯 ‘툭’ 소리를 내면서 한꺼번에 터지고 말았는데…
“나, 가출할껴. 부자고 뭐고 여기서 인연 끊고 말테니까 아무도 찾지 마!”
“우에에에… 잘못했어, 잘못했다니까아!”
“아들아, 네가 그러면 엄마는 너무 섭섭해.”
무작정 뛰쳐나가려는 내 허리를 붙잡고 매달리는 킬과 스칼라. 대체 이들은 언제쯤이 돼야 철이 들까? 어쨌든 한바탕의 소동 끝에 이안은 무사히 풀려났고 나는 앙심 품은 제제에게 잡혀 박박 씻겨지고 입혀지다가 결국 문제의 목걸이에 관한 일을 들키고 말았다. 그리고 참으로 치사스럽게도 제제는 그것을 그대로 스칼라에게 일러바쳤다. 자신의 선에서 처리할 문제가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잃어버렸다고 말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놈의 시장 바닥을 전부다 뒤집어서라도 찾아내!”
처음 스칼라는 얼음가루를 풀풀 날리면서 그렇게 명령했다. 그러나 내가 달걀을 먹으면서 ‘내 실수를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다’고 말하자 그녀는 도로 명령을 거두어 들였다. 자신은 현명한 어머니가 되고 싶다나? 그러더니 또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내가 먹고 있는 달걀을 홱 빼앗으며 진지하게 물었다.
“…아무 일도 없었겠지? 널 납치해 간 그 시커먼 불한당에게 무언가 불미스러운 일을 당한 것은… 아니겠지?”
“이상한 상상하지 말아요. 나는 남자라구요.”
당당하게 소리치자 그녀는 무언가 할 말이 많다는, 그러나 차마 하고 싶지 않다는 얼굴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뜻 모를 한숨을 내쉬며 내 달걀을 가져다 버리라고 말했다. 금 한 냥이나 주고 산 그 아까운 것을…